[백천청명] 별 떨어진다

별똥별에 소원 비는 백천청명.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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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스포일러는 아니고… 화산귀환 1175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있습니다. 

※ 손풀기용 단문. 퇴고X

술에 취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섞여 나왔다. 술잔은 마를 틈도 없이 새로운 술이 따라지고 비워졌고, 어디에서는 흥얼대는 노랫소리도 들렸다. 허허, 개판일세. 청명이 술병을 비우고서 새 술을 꺼내려들 때였다. 밖을 한번 힐끗 쳐다본 백천이 몸을 일으켜 청명에게로 다가왔다.

"청명아. 나와보겠느냐?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어? 엉. 갈게."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운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므로 청명이 앉아있던 식탁의 제자들 몇몇만 힐끔 시선을 주었을 뿐, 다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탁.

문을 닫고 전각 밖으로 나온 청명이 뒤를 힐끔 쳐다보더니 팔꿈치로 백천을 툭툭 건드렸다.

“사숙, 툭하면 나 부르는 거 이제 그만할 때 안 됐어? 그러다가 비밀 연애고 나발이고 다 들킨다?”

“그래도 안 들켰으면 됐지.”

아무리 돌산 도사 놈들이라고 해도 거의 매일같이 백천이 청명을 이리도 불러내는데 과연 눈치채지 못했을까? 청명이 뚱한 표정으로 백천을 힐끔 쳐다보았다. 청명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 좋다는 듯 잘난 얼굴로 저리 싱글벙글 웃고 있는 걸 보면 ‘그래, 나 좋다는데 거기다 대고 뭔 말을 하나.’ 싶어 그 또한 헛웃음을 흘리고 만다. 백천이 이끄는 대로 경공을 펼쳐오니 보이는 것은 넓진 않아도 탁 트인 풀밭이라,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또 무슨 소릴 하고 싶어서 불렀나 싶은 마음에 백천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진짜 뭔 일이 있어서 부른 건 아닐 거 아냐.”

“오늘 밤 별이 잔뜩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어서.”

“……별?”

“응.”

청명이 황당하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시간이 늦었고 일부러 기감을 날카롭게 벼려두지 않으면 어느 정도 무던한 편이라고는 해도, 중원의 어떤 누구를 데려와 물으면 오늘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 별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것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이 예쁘다느니 하지 않았나? 그쪽 하늘이 취향인가? 도호는 백천白天이면서.

“매일같이 별 보며 나와서는 별 보고 들어가는데, 이렇게 따로 불러가면서까지 봐야 해?”

“그건 그냥 별을 보는 거고, 내가 말한 건 별이 떨어지는 걸 같이 보고 싶었단 소리다.”

“그게 뭐 어디가 다른가.”

청명이 작게 투덜댔다. 얌전히 앉아서 무언가를 보고만 있는 건 영 적성에 안 맞는데.

“이렇게 하늘이 흐린데 별 같은 게 어디 보이겠어?”

“눈도 좋은 녀석이 그렇게 말하면 되나. 저 밑에서 양민들도 다 별 떨어지는 걸 보면서 소원을 빈다고 들었는데, 이리 탁 트인 곳에 왔는데 네가 못 할 리가 없지.”

제 능력을 믿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이게 지금 날 시험해보는 거냐고 바락바락 성질을 부려야 할지. 청명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백천은 그가 봐두었던 자리에 청명을 데리고서 앉았다.

“사숙, 그렇게 앉으면 옷에 풀물 든다?”

“어쩐 일이냐, 네가 내 옷 걱정도 다 해주고.”

아무리 청명이 투덜대도 능청스레 대꾸해오자 입을 삐죽 내민 채 백천의 오른쪽에 털썩 퍼질러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하냐는 듯 백천을 쳐다보았으나 백천은 정말 말 그대로 하늘을 보려는 듯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잘났다, 잘났다 해줬더니 무슨 고개를 치켜든 옆태도 잘났네. 저 얼굴은 어두침침한 곳에서 봐도 어째 뒤에 등불이라도 켜둔 것마냥 훤하게 잘 보인다. 청명이 백천을 빤히 쳐다보거나 말거나 가만히 앉아있던 백천이 청명의 왼손을 잡고서 하늘을 가리켰다.

“방금 여기서 저기로 별이 하나 떨어졌다. 봐라, 내가 다 보일 거라고 했지?”

“뭐? 어디?”

백천의 말에 청명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돌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룡이도 본 별을 자신이 못 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백천이 말하려 입을 연 순간 별은 이미 떨어지고 없었다. 거짓말로 나 속이는 거 아냐? 그리 말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청명이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백천이 말했다.

“금방 또 떨어질 거다. 듣자 하니 오늘은 별이 꽤 많이 떨어질 예정이라더구나.”

백천의 말이 맞긴 했다. 구름에 가려지긴 해도, 짧은 시간에 꽤 많은 별이 떨어졌다. 다만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무인의 눈에 별이 담겼으나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소원 하나조차 빌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해? 우리가 무인이라 그나마 별 떨어지는 게 잘 보이는 거지, 이렇게 흐린 날에는 소원 빌지도 못하겠다. 빠르기는 또 얼마나 빠른데.”

“뭐……. 그만큼 간절했으니까 때맞춰 빌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어쭈? 내 소원은 그리 간절하지 않다?”

“그 말이 아니잖아, 이 새끼야!”

청명의 눈에서 흥미가 떨어지는 것을 눈치챈 백천이 청명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심드렁해진 청명의 낯을 본 백천이 푸스스 웃었다.

“청명이 네가 별 떨어지는 순간에 비는 소원은 내가 이루어주마.”

“허?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사숙 오늘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릴 준비나 해.”

단 한 마디로 청명의 사기를 올린 백천이 더없이 열정적인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는 그를 바라보며 못 말린다는 듯 미소 지었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빌어서 또 괴롭혀대려고.

별이 그렇게 많이 떨어지는데도 매 순간 어, 하는 순간에 별들을 보냈다. 사실 청명의 소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화산과 천우맹이 잘 됐으면 좋겠고, 그 외의 놈들은 좀 망했으면 좋겠고. 우리 애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 그래도 술을 아주 쌓아놓고 마셔보고는 싶네. 그걸 빌어서 사숙 주머니를 아주…….’

그 순간 청명이 생각에서 깨어났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청명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다.

“……사숙.”

“응?”

“……별 보자며. 그래서 술 마시려던 나 데리고 나왔잖아.”

“그랬지.”

“그런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덤덤한 백천의 대답에 청명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 제 손을 붙들고서 그 큰 손으로 제 손에 무언가를 꾸물거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청명의 손은 덩치에 비하면 큰 편인데도 문짝 같은 덩치인 백천의 양손에 완전히 덮여 가려졌다.

“알아챘느냐?”

허. 백천의 뻔뻔한 물음에 되레 청명이 기가 막힌다는 듯 연신 투덜댔다.

“남의 손 붙들고 그러고 있는데, 그럼 눈치 안 채겠어? 내가 바보야? 지금 내 소원 들어주기 싫어서 방해하는 거지?”

“눈치채지 말라고 한 거 아니니까 상관없지 않으냐.”

“말이라도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 그래. 움직이지 좀 말거라. 거의 다 됐다.”

그러고는 청명의 손을 조금 더 붙들고 있던 백천이 손을 놓아주고서야 청명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반지?”

시중에서 파는 건 아니었다. 흉터와 굳은살로 그리 부드럽지도, 곱지도 않은 제 손을 쫙 펴고는 어째 이질적인 풀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뭉퉁하게 생긴 꽃을 꺾어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반지로 만든 모양이다. 생전 해본 적 없는 낯간지러운 행동에 입꼬리가 영 가만히 있지 못하고서 연신 움찔댔다. 이거, 되게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행동 같다. 물론 맞긴 하지만.

‘아, 너무 좋아했나?’

간질거리는 마음에 투덜댈 생각도 들지 않아 반응이 조금 늦었다.

“…그, 기왕 수작질 부릴 거면 진짜 반지를 가져오지.”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긴 한데…….”

“한데?”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잖느냐.”

괜히 민망해 투덜대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풀 반지가 끼워진 손을 만지작거리던 청명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언제 누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반지를 사는 건 사치라서?”

백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백천은 빨리 대답하라는 듯한 청명의 재촉에도 대답하지 않고 먼저 손을 뻗어 말아쥔 청명의 주먹을 펴주었다. 제 손바닥에 옅은 손톱자국이 새겨진 것을 보고서야 청명은 그새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음을 자각했다. 여전히 제 손을 붙들고 있는 백천의 손을 떼어내고서 짧게 숨을 뱉은 청명이 말했다.

“……이제 말해봐.”

청명과 눈을 마주하며 정말 괜찮은 것인지 확인한 백천이 여전히 청명의 손에 감겨있는 풀 반지를 바라보았다.

“반지 하나에 값이 꽤 나가는 건 알지?”

“그거야……, 그렇지.”

청명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반지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문득 정인에게 혼인하자고 하고 싶다며 알뜰살뜰 돈을 모으던 사제 놈이 떠올랐다. 어차피 혼인해도 화산에서 살 텐데 무엇 하러 돈을 그리도 모아대냐 놀렸더니 혼인하자고 청혼할 때 건네줄 반지를 사야 한다고 했던가. 도사 놈이 물욕도 많다며 비웃었는데. 결국 그놈은 정인과 혼인하는 데에 성공했다. 화산에 거하는 제자들이 많은 만큼, 용돈 액수 자체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기에 반지를 사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렸지만 말이다. 문득 떠오른 과거를 떨쳐낸 청명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백천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건 왜? 사숙이랑 나랑 붙어먹은지 얼마 안 되어서 돈을 못 모았어?”

“부, 붙어먹다니, 넌 무슨 말을 또……. 화산이 어려울 때는 따로 용돈이 없었고, 원래 돈을 그리 많이 쓰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진짜 조금만 더 모으면 반지 정도는 살 수 있다.”

“그런데?”

“전쟁 중에 장신구를 신경 쓸 여력이 있을 수가 없지 않으냐.”

아차, 하는 순간 목이 달아나는 전쟁에서, 반지처럼 작은 장신구를 신경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차피 반지는 왼손에 낄 테니까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사람 일이 마음대로 풀리던가?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더라도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때는 잘 쓰지 않던 왼손으로라도 검을 휘둘러야 한다. 하다못해 입으로 칼을 물고서라도 대응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러지 못하면 죽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반지를 챙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반지야 다시 사면 되겠지.”

한낱 반지가 아닌가. 두 사람은 이미 많은 시련을 이겨왔고, 고비를 넘어왔다. 그 시간과 깊어진 마음이 중한 것이지, 애초에 두 사람은 도사인데다가 무인이기에 잘 하지도 않을 장신구에는 크게 목을 맬 필요가 없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걸 잃어버려 다시 사야 할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겠느냐?”

“정답. 백상 사숙한테 말해서 돈을 꿔본다?”

청명의 대답을 들은 백천이 용돈을 조금만 올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아수라였다. 상상만 해도 무서운지 안 그래도 백천의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돈을 아주 바닥에 버리라며 천장에 거꾸로 꽂아버릴걸?”

“아, 그건 그렇겠네.”

청명은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백천의 하얗게 질려버린 낯을 보고서 낄낄댔다. 청명의 표정이 많이 풀린 것을 확인한 백천이 손을 뻗어 청명의 왼손을 잡았다. 자신이 반지를 끼워준 그 손을.

"…하여튼, 그래서 진짜 반지는 전쟁이 끝나면 주고 싶었다. 다시 맞춰야 한다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겠느냐. 전쟁이 끝나면 적어도 저 멀리서 잃어버릴 일은 없겠지. 평화가 찾아오면…, 그래, 그때가 오면 네가 검을 들 일도 많지 않을 테고."

전쟁이 끝나면.

청명은 그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연모하고 있던 이에게 거절당할지언정 고백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던 어린 사손 녀석도, 영 전쟁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유람이라도 가보겠느냐고 물어봤던 친우 놈도, 천마 놈의 목을 베고 나면 실종된 사제 녀석을 찾아 화산에 데려오고 과거와는 조금이라도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도 모두 죽었으니까. 그렇게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하여 청명에게 그 말은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란 저주와도 같았다.

“……사숙.”

“응?”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내뱉는 대답에 목이 멘다. 말을 채 꺼내지 못하던 청명이 백천의 너른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툭 기대었다. 그의 어깨에 닿은 얼굴에 느껴지는 온기에 청명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 화산에서 혼인해버리자.”

“…어?”

잠깐 청명의 말을 곱씹던 백천이 한 박자 늦게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제 어깨에 기대어있는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청명이 제 손을 덮은 백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나 누군가에게 이런 말 해보는 거 처음이거든? 그러니까.”

내뱉어버린 낯간지러운 말에 귀 끝부터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 들어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절대 죽지 마.”

그 순간,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둘 다 죽지 않기를 바라며… 도경수의 별 떨어진다 듣다가 생각나서 가볍게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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