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청명] 별 떨어진다
별똥별에 소원 비는 백천청명.
※ 화산귀환 1175화의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 24년 7월 디페스타에서 극소량 무료배포되었던 버전으로 수정해 업로드합니다.
술에 취해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섞여 나왔다. 술잔은 마를 틈도 없이 새로운 술이 따라지고 비워졌고, 어디에서는 흥얼대는 노랫소리도 들렸다. 허허, 개판일세. 청명은 혹여 저 술에 만취한 말코 놈들에게 제 귀한 술을 빼앗길까, 한 손으로는 술병 주둥이를 입으로 가져가면서 남은 손으로 빠르게 새 술병을 집으려 했다.
“청명아.”
이 요란한 술자리 속에서 창밖을 한번 힐끗 쳐다본 백천이 몸을 일으켜 청명에게로 다가왔다. 그 부름에 청명은 저도 모르게 손을 허공에서 멈추었다. 제 옆에 우뚝 멈춰 선 문짝만 한 사내의 몸을 따라 시선이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멈춘 시선 끝에는 술에 취한 것인지, 아니면 민망해하는 것인지 모르게 조금 붉어진 낯의 백천이 청명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잠깐 나가지 않겠느냐?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어? 어, 음……. 그러지, 뭐.”
제 손에 들린 술병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던 청명이 아쉽다는 듯 입을 쩝 다시고는 몸을 일으켜 백천의 뒤를 따랐다. 워낙에 바쁜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술자리에서 자리를 비운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므로 청명이 앉아있던 식탁의 제자들 몇몇만 두 사람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말고는, 언제 멈췄냐는 듯 다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탁.
문을 닫고 전각 밖으로 나온 청명이 문이 닫혀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식당을 힐끔 쳐다보았다. 식탁 위에 두고 나온 술병이 눈에 아른거렸다. 나중에 돌아갔을 때 내 술 건드린 놈은 괘씸죄로 무게 추가시켜야지. 백천더러 자신이 그 좋아하는 술까지도 내려두고 왔음을 들으라는 듯 짧게 투덜거리다 팔꿈치로 백천의 팔을 툭툭 건드렸다.
“사숙, 툭하면 나 이렇게 부르는 거 이제 그만할 때 안 됐어? 그러다가 비밀 연애고 나발이고 다 들킨다?”
“그래도 안 들켰으면 됐지.”
아무리 저들이 돌산 도사 놈들이라고 해도 거의 매일같이 이리도 불러내는데 과연 눈치채지 못했을까? 청명이 뚱한 표정으로 백천을 힐끔 쳐다보았다. 청명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분 좋다는 듯 잘난 얼굴로 저리 싱글벙글 웃고 있는 걸 보면 ‘그래, 저 얼굴로 나 좋다는데 거기다 대고 뭔 말을 하나.’ 싶어 그 또한 따라 헛웃음을 흘리고 만다. 백천이 이끄는 대로 가벼이 경공을 펼쳐오니 보이는 것은 넓진 않아도 탁 트인 풀밭이라, 또 무슨 소릴 하고 싶어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데려온 건지 슬슬 이야기를 들어 봐야만 했다.
“그런데? 진짜 뭔 일이 있어서 부른 건 아닐 거 아냐.”
“오늘 밤 별이 잔뜩 떨어진다는 소식을 들어서.”
“……별?”
“응.”
백천의 말에 청명이 황당하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시간이 늦었고 일부러 기감을 날카롭게 벼려두지 않으면 어느 정도 무던한 편이라고는 해도, 중원의 어떤 누구를 데려와 물으면 오늘 하늘은 구름이 잔뜩 껴 별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것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우중충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이 예쁘다느니 하지 않았나? 그쪽 하늘이 취향인가? 도명은 백천白天이면서, 하나도 안 어울리게.
“매일같이 별 보며 나와서는 별 보고 들어가는데, 이렇게 따로 불러가면서까지 봐야 해?”
“그건 그냥 수련하러 오가는 길에 별을 보는 거고, 내가 말한 건 별이 떨어지는 걸 같이 보고 싶었단 소리다.”
“그게 뭐 어디 다른가.”
청명이 작게 투덜댔다. 얌전히 앉아서 무언가를 보고만 있는 건 영 성미에 안 맞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술병이라도 챙겨 나올 것을 그랬다.
“이렇게 하늘이 흐린데 별 같은 게 어디 보이겠어?”
“저 밑에서 양민들도 다 한다고 들었는데, 이리 탁 트인 곳에 왔는데 네가 못 할 리가 없지.”
제 능력을 믿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 이게 지금 날 시험해보는 거냐고 바락바락 성질을 부려야 할지. 청명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백천은 그가 봐두었던 자리에 청명을 데리고 가더니 털썩 앉았다.
“사숙, 그렇게 앉으면 그 허연 옷에 풀물 든다?”
“어쩐 일이냐, 네가 내 옷 걱정도 다 해주고.”
아무리 청명이 투덜대도 능청스레 대꾸해오자 입을 삐죽 내민 채 청명 또한 그의 오른쪽에 털썩 퍼질러 앉았다. 이제 어떻게 하냐는 듯 백천을 쳐다보았으나 백천은 정말 말 그대로 하늘을 보려는 듯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볼 때마다 잘났다, 잘났다 해줬더니 무슨 고개를 치켜든 옆태도 잘났네. 저 얼굴은 어두침침한 곳에서 봐도 어째 뒤에 등불이라도 켜둔 것마냥 훤하게 잘 보인다. 빤히 쳐다보거나 말거나 가만히 앉아있던 백천이 청명의 왼손을 잡고서 다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방금 여기서 저기로 별이 하나 떨어졌다. 거봐라, 내가 다 보일 거라고 했지?”
“뭐? 어디?”
백천의 말에 청명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시선을 돌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동룡이도 본 별을 자신이 못 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백천이 말하려 입을 연 순간 별은 이미 떨어지고 없었다. 거짓말로 나 속이는 거 아냐? 그리 말하는 듯한 눈길을 보내며 청명이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백천이 말했다.
“금방 또 떨어질 거다. 내 듣자 하니 오늘은 별이 꽤 많이 떨어질 예정이라더라.”
백천의 말이 맞긴 했다. 구름에 가려지긴 해도, 짧은 시간에 꽤 많은 별이 떨어졌다. 다만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무인의 눈에 별이 담겼어도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눈 한 번 깜빡이면 소원은커녕, 입도 뻥긋 못했다.
“양민들이 이걸 어떻게 해? 우리야 무인이니까 그나마 잘 보이는 거지, 이렇게 흐린 날에는 소원 하나 빌지도 못하겠다. 빠르기는 또 얼마나 빠른데.”
“뭐……. 그만큼 간절했으니까 빌 수 있었던 거 아닐까?”
백천의 말에 청명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쭈? 그러니까 내 소원은 그리 간절하지 않다?”
“그 말이 아니잖아, 이 새끼야!”
청명의 눈에서 흥미가 뚝 떨어지는 것을 눈치챈 백천이 손으로 청명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금세 흥미를 잃고 심드렁해진 청명의 낯을 보고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청명이 네가 별 떨어지는 순간에 비는 소원은 내가 다 이루어주마.”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사숙 오늘 있는 거 없는 거 다 털릴 준비나 해!”
단 한 마디로 청명의 사기를 올린 백천이 더없이 열정적인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는 그를 바라보며 못 말린다는 듯 미소 지었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빌어서 또 괴롭혀대려고. 독기 오른 청명이 비는 소원이 백천을 곤란케 하리라는 것도, 그리고 심보를 모르는 것도 아닐진대, 백천이 소원을 들어주겠노라는 한 마디에 저러고 있는 모습을 보면 어쩐지 딱 그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별이 많이 떨어진다는 백천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짧은 시간 동안 연달아 떨어지기도 하고, 더 안 떨어지나 싶을 때 사람 놀리듯 빠르게 떨어지기도 했다. 별이 그렇게 많이 떨어지는데도 매 순간 어, 하는 순간에 별들을 보냈다. 사실 청명의 소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화산과 천우맹이 잘 됐으면 좋겠고, 그 외의 놈들은 좀 혼쭐나서 망했으면 좋겠고. 애지중지(?) 키워온 우리 애들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 그래도 술을 아주 쌓아놓고 마셔보고는 싶네. 그걸 빌어서 사숙 주머니를 아주…….’
그 순간 청명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청명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다.
“……사숙.”
“응?”
태연한 백천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듯 청명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떨떠름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별 보자며. 그래서 술 마시려던 나 데리고 나왔잖아.”
“그랬지?”
“그런데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덤덤한 백천의 대답에 청명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려 제 손을 붙들고서 그 큰 손으로 제 손에 무언가를 꾸물거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청명의 손은 덩치에 비하면 큰 편인데도 문짝 같은 덩치인 백천의 양손에 완전히 덮여 가려졌다.
“알고 있었느냐?”
허. 백천의 뻔뻔한 물음에 되레 청명이 기가 막힌다는 듯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처럼 투덜대기 시작했다.
“남의 손 붙들고 그러고 있는데, 그럼 눈치 안 채겠어? 내가 바보야? 사숙 지금 내 소원 들어주기 싫어서 방해하는 거지?”
“눈치채지 말라고 한 거 아니니까 상관없지 않으냐.”
“말이라도 못 하면 밉지나 않지!”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움직이지 좀 말거라. 거의 다 됐으니까.”
그러고는 청명의 손을 조금 더 붙들고 있던 백천이 손을 놓아주고서야 청명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반지?”
시중에서 파는 건 아니었다. 흉터와 굳은살로 그리 부드럽지도, 곱지도 않은 제 손을 쫙 펴고는 어째 이질적인 풀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뭉툭하게 생긴 꽃을 줄기 채로 꺾은 다음,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새 그 큰 손으로 꼬물거려 반지로 만든 모양이다. 생전 해본 적 없는 낯간지러운 행동에 입꼬리가 영 가만히 있지 못하고서 연신 움찔댔다. 이거, 되게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행동 같네. 물론 둘은 연인 사이가 맞긴 하지만 말이다.
‘아, 너무 좋아했나?’
혹여 제 손길에 꽃이 상할까, 청명은 제 손가락을 두른 줄기만 만지작거렸다. 간질거리는 마음에 투덜댈 생각도 들지 않아 반응이 조금 늦기야 했지만,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툭툭 뱉었다.
“……수작질 부릴 거면 진짜 반지를 가져오지.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긴 한데…….”
“한데?”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일이잖느냐.”
괜히 민망해 쉴 새 없이 투덜대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풀 반지가 끼워진 손을 만지작거리던 청명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순식간에 현실로 내던져져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 누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반지를 사는 건 사치라서?”
백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백천은 빨리 대답하라는 듯한 청명의 재촉에도 대답하지 않고 먼저 손을 뻗어 말아쥔 청명의 주먹을 살살 펴주었다. 그제야 청명은 제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기 직전이었음을 알았다. 여전히 제 손을 잡고 있던 백천의 손을 대충 떼어내며 짧게 숨을 뱉은 청명이 그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제 표정을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말해봐.”
백천은 몸을 기울여 청명의 낯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정말 괜찮은 것인지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반지 하나에 값이 꽤 나가는 건 알지?”
“그거야……, 그랬지.”
청명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반지에 관심을 가져본 적은 없었지만, 문득 정인에게 혼인하자고 하고 싶다며 알뜰살뜰 돈을 모으던 사제 놈이 떠올랐다. 어차피 혼인해도 화산에서 살 텐데 무엇 하러 돈을 그리도 모아대냐 놀렸더니 혼인하자고 청혼할 때 건네줄 반지를 사야 한다고 했었던가. 도사 놈이 물욕도 많다며 낄낄대며 비웃었는데. 그래도 결국 그놈은 정인과 혼인하는 데에 성공했다. 화산에 거하는 제자들이 많은 만큼, 용돈 액수 자체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기에 반지를 사기까지 시간이 꽤나 걸려 혼인 또한 늦어졌지만 말이다. 문득 떠오른 과거를 빠르게 떨쳐낸 청명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백천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사숙이랑 나랑 붙어먹은지 얼마 안 되어서 돈을 못 모았어?”
“부, 붙어먹다니, 넌 무슨 말을 또……. 워낙 바빠 돈 쓸 틈도 없었다 보니, 모아둔 돈으로도 충분히 적당한 반지 정도는 살 수 있다. 나라고 네 손에 반지 그거 하나 사다 끼워주기 싫겠냐.”
“그런데?”
“…전쟁 중에 장신구를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 없으니까.”
아차, 하는 순간 목이 달아나는 전쟁에서, 반지처럼 작은 장신구를 신경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차피 반지는 왼손에 낄 테니까 상관없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사람 일이 마음대로 풀리던가? 오른손으로 검을 휘두르더라도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때는 잘 쓰지 않던 왼손으로라도 검을 휘둘러야 한다. 하다못해 입으로 칼을 물고서라도 대응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러지 못하면 죽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과연 반지를 온전히 챙길 수 있을까? 검을 들 때의 청명이 그 누구보다도 과격히 움직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고작 반지 하나 때문에 그 긴박한 상황에 머뭇거릴 녀석이 아니라는 것또한 잘 알지만, 만에 하나 제가 끼워준 반지 때문에 청명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게 된다면 죽어서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낱 반지가 아닌가. 두 사람은 이미 많은 시련을 함께 이겨왔고, 고비를 넘어왔다. 그 시간과 깊어진 마음이 중한 것이지, 애초에 두 사람은 도사인데다가 무인이기에 잘 하지도 않을 장신구에 크게 목을 맬 필요가 없었다. 애당초 여태껏 반지 없이도 연애를 잘(?) 이어 오지 않았나. 하지만 가끔 남몰래 청명의 손을 잡을 때면 언젠가 흉과 굳은살 많은 이 손에 반지를 끼워주는 제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백천이 청명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서툴게 엮어 묶은 꽃반지가 여전히 청명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꽃반지였어. 언제 어디서든 네 손에 다시 끼워줄 수 있을 테고, 그 순간만큼은……, 네가 온전히 내 사람이 될 것 같아서.”
설령 그것이 끝내 두 사람의 족쇄가 된다고 해도 말이다. 가만히 백천의 이야기를 듣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아니, 뭐 다 좋은데 내가 왜 사숙 사람이 되는 거야? 사숙이 내 사람이 되는 거지.”
“뭐?”
“뭐.”
둘이 같은 것이 아니냐 대꾸하려던 백천은 그가 왜 이리 구는지 알게 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말을 오해해 분위기를 심각하게 만들었던 것이 이야기를 듣고 난 지금에서야 조금은 머쓱해졌던 모양이다. 이럴 때는 이 말 저 말 꺼내어가며 우겨보지 말고 얌전히 수긍하면 되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네 사람이 되는 거지.”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단 말인가.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람인 것을.
“…하여튼, 그래서 진짜 반지는 전쟁이 끝나면 주고 싶었다.”
청명이 백천의 사람이고 백천이 청명의 사람임을 말없이 증명하는 수단으로. 또 언제든 자신이 그의 곁에 있으리라고 말해줄 매개체로서.
“그런데 말이야.”
“……응?”
“전쟁 끝나고 나서 내가 저기, 어디냐……. 아, 그래. 북해 같은 곳에 갔다가 반지 잃어버리고 돌아오면 어떡하려고?”
청명의 터무니없는 가정에 백천이 황당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백천을 놀리려는 의도로 물어보는 것이었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물어보는 듯했다. 끙, 앓는 소리를 낸 백천이 대꾸했다.
“네가 북해에 갈 일이 있으면 또 얼마나 있다고. 거긴 껴입고 있느라 빠질 일도 없을 텐데.”
“아, 아무튼! 그 망할 놈의 전쟁이 끝나고 나서 내가 어디 멀리서 반지를 잃어버리고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냐니까?”
“너라면 어떻게 할 건데?”
마땅히 떠오르는 생각은 없는데, 계속해서 들려오는 재촉에 백천은 번뜩 떠오른 역질문 수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음? 음…. 백상 사숙한테 말해서 돈을 꿔본다?”
청명의 대답을 들은 백천이 얼마 전 재경각에 찾아가 용돈을 조금만 올려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백상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저 아수라였다.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지 안 그래도 백천의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백천이 말했다.
“……돈을 아주 바닥에 버리라며 날 천장에 거꾸로 꽂아버릴걸?”
“아, 그건 그렇겠네.”
청명은 힐끔 시선을 돌렸다가 백천의 하얗게 질려버린 낯을 보고서 괜히 낄낄거렸다. 아까와 다르게 청명의 표정이 많이 풀린 것을 확인한 백천이 떨리는 손을 뻗어 청명의 왼손을 잡았다. 자신이 반지를 끼워준 그 손을.
“전쟁이 끝난 뒤에 네가 돌아다녀 봐야 또 얼마나 돌아다니겠냐. 잃어버려도 내가 금방 찾아줄 수도 있을지 모를 일이고. 평화가 찾아오면…, 그래, 그때가 오면 네가 검을 들 일도 지금보다는 적을 테니까.”
전쟁이 끝나면.
청명은 그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연모하고 있던 이에게 거절당할지언정 고백이라도 한번 해보고 싶다던 어린 사손 녀석도, 영 전쟁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유람이라도 가보겠느냐고 물어봤던 친우 놈도, 천마 놈의 목을 베고 나면 실종된 사제 녀석을 찾아 화산에 데려오고 과거와는 조금이라도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도 모두 죽었으니까. 그렇게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하여 청명에게 전쟁이 끝난 뒤에 무언가를 하자는 말은 살아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란 저주와도 같았다.
하지만 어째선지, 별이 떨어지는 저 하늘 아래서 언젠가의 미래를 입에 담고 있으면 꼭 그 이야기들이 모두 이루어질 것만 같아서……. 저 별에 비는 제 소원은 자기가 다 이루어주겠다는 터무니없는 그의 약속을 그저 믿고만 싶어지는 것이다.
“……사숙.”
“응?”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내뱉는 대답에 목이 메었다. 말을 채 꺼내지 못하던 청명이 백천의 너른 어깨에 힘없이 머리를 툭 기대었다. 그의 어깨에 닿은 얼굴에 느껴지는 온기에 청명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 화산에서 혼인해버리자.”
“…어?”
잠깐 청명의 말을 곱씹어보던 백천이 한 박자 늦게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제 어깨에 기대어있는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청명이 제 손을 덮은 백천의 손을 꽉 붙잡았다. 잡은 이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나 누군가에게 이런 말 해보는 거 처음이거든? 그러니까.”
기어이 내뱉어버린 낯간지러운 말에 귀 끝부터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에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절대 죽지 마.”
그 순간, 하늘에서 유성우流星雨가 떨어졌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다가 번뜩 떠올라 작업했던 글입니다. 단편 하나를 개인 소장으로 뽑고 싶다고 생각하고 바로 실천으로 옮긴 건 이 글이 유일하네요. 여러 핑계를 대고 미룬 적이 많았거든요.
유성우 아래 빈 소원만큼, 두 사람이 아프지 말고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제발요.)
항상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24. 07. 27.
화련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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