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백천청명] 看雲步月, 三

현화산 백천 X IF 화산이 망해 낭인으로 살아가는 청명.

※ 화산귀환 1536화까지의 스포일러 요소를 직·간접적으로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 추후 내용 일부가 수정될 수 있습니다. 

“일단 네게는 내가 초면일 테니, 먼저 내 소개부터 해야겠구나. 나는 대화산파의 이십이대 제자인 백천이다.”

온갖 경우의 수를 떠올려보던 청명이 자신이 뭘 들은 것이냐는 듯 표정을 찌푸린 채 다시금 손가락으로 제 검파劍把를 툭툭 건드렸다. 허튼 소리하면 다시 검을 뽑겠다는 의미였다.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곧이어 백천이 자신이 종남에서 나오게 된 계기에서 시작해 그가 몸담고 있던 화산의 이야기를 차분히 이어나갔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긴 이야기에는 청명이 잘 아는 내용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정마대전의 공로를 화산을 퇴출한 구파일방이 나누어 가졌다는 것, 화산의 이름이 지워지고 서서히 무너졌다는 것.

하지만 청명의 세상과는 또 달랐다.

많은 이들이 하산하고 도망치기도 했으나 끝까지 화산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부족한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정도正道를 지키며 험하고도 긴 겨울을 버텨낸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그곳에서 화산의 이름이 다시금 천하에 퍼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화산에 다시 그 봄을 가져다주었던 이가…….

“‘청명’이었다, 고…….”

“그래. 녀석과 너는 차림새만 조금 다를 뿐이지, 똑같이 생긴 데다가 성질머리도 똑같이 더럽고, 나이도 얼추 맞는 것 같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 이름을 불러보니 잠결이었지만 반응을 보이더구나.”

중간에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 섞여 있었으나 청명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망해가던 화산의 재정과 무학을 되살리고 천하에 이름을 알리고 있다는, 그의 사질이라는 ‘청명’이라는 존재.

아마 백천이 만나고 함께 했다던 그 ‘청명’ 또한 자신일 것이다. 다만 화산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곳의 자신일 뿐. 남이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을 테지만, 청명에게도 나름대로 확신하게 된 근거가 있었다.

‘일단 나는 검법 도해본을 써본 적이 없어.’

물론 저쪽의 청명과 자신이 검존 시절부터 달랐다면 한 권쯤이야 미쳐서 썼을 수도 있겠으나, 모든 검법의 비급을 쓸 일이 어디 있겠는가? 검법을 보완하고 변형하는 것은 무각원에서 할 일이고, 무각주인 청진이 할 일인데. 굳이 청명이 그 성질머리로 자리에 앉아 후대를 위한 검법을 남길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자신도 마교와의 전쟁 끝에 죽어 다시 이리 어린 몸으로 살아났으니, 저쪽 또한 비슷한 처지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곳에서의 ‘청명’이 자신처럼 엇나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아마, 화산이 이곳에서처럼 완전히 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이곳에도 화산이 남아있었다면…….’

혼자가, 아닐 수 있었을까?

무어라 대답을 내놓을 줄 알았던 청명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떨구자, 방안에는 그저 침묵만이 맴돌았다. 제 이야기에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졌을 청명을 이해한다는 듯 백천이 말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 술 말고는 마실만 한 것이 마땅히 없어,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점소이를 불렀다. 다행히도 점소이는 엉망인 내부는 보지 못한 채, 많은 돈을 지불했던 손님과 그 손님을 찾아온 이에게 객잔에 있는 차 중 가장 고급진 차와 잔을 가져왔다. 차와 잔을 올려둔 과반을 들고 자리로 복귀할 때까지도 청명은 달리 입을 열지 않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백천은 데운 물로 차를 우려내어 잔에 따라 청명에게 건네고 제 잔에도 따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여튼 나도 처음엔 많이 놀랐다. 잠깐 어지럼증이 닥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홀로 화음 길바닥에 있질 않나. 거의 도시처럼 변하기 시작했던 화음이 황폐해졌길래, 화산에 급히 올라가 보니 전각도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백천이 처음 제 화산에 올랐을 때만 해도 워낙 낡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해 보였으나, 그래도 건물이 남아있긴 했다. 아직도 사문의 어른들이 어린 그를 맞이해주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눈을 뜬 이후 화음과 화산, 그 어디에도 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상황 파악이 우선이라 판단한 백천은 휑한 화음을 벗어나, 경공을 펼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지역 중심가의 큰 객잔에 들어갔다. 객잔에서 강호 이야기를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호사가들에게 슬그머니 다가가서는 비상금으로 들고 다니던 돈으로 비싼 술을 주문해주며 들어본 바로는 화산은 망한 지 오래됐다고 했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대산혈사가 있었던 이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그러니 아마 백천이 알고 있던 모든 인물이 이곳에서는 화산과 조금도 연관이 없으리라. 그 막막함 속에서 백천은 객잔을 빠져나와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화산에 돌아가 봐야 다 낡고 무너져 지낼 만한 곳이 없었고, 화산이 없으니 천우맹 또한 없어 천우맹에 속해있던 문파들을 찾아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내가 알던 화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며 길을 걸어가던 차에, 우연히 네 별호를 들었다. 너라고 지칭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별호를 들으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지.”

무인에게 꽃은 잘 어울리지 않기에 보통 별호에 화花가 붙는 일은 거의 없었고, 붙더라도 대부분 검으로 매화를 피워내는 화산 사람들에게 많이 붙는 편이었다. 당장 그가 있던 곳에서만 해도 유이설에게 빙검매화氷劍梅花라는 별호가 있지 않던가? 백천의 추측일 뿐이었지만, 어쩌면……. 이곳에서도 매화를 피워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화산이건, 화산과 연관된 사람이건 간에.

아무리 그가 있던 화산에 사람이 없었다고는 해도 모든 배분의 사람을 다 합하면 백여 명은 훌쩍 넘겼다. 백천은 가만히 제 사제와 사매들, 그리고 사질들까지 모두 떠올리며 그런 별호를 받을 만한 이를 추려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있던 화산에도 사람이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니라, 그런 별호를 받을 만한 사람을 추려내는 건 생각보다도 더 쉬웠다.

유이설과 청명.

화산이 망했더라도 기어이 화산의 귀신으로 살아갈 이들이자, 검에 조금도 온정을 두지 않는 이들.

하지만 이곳의 화산은 먼 옛날 망해버렸기에 그가 알던 현자배조차 화산 근처에 발도 들인 적이 없다. 만일 유이설이 이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아버지가 도중에 화산에서 도망쳐 나올 일도, 반쯤 불타버린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붙든 채 망가질 일도 없었을 테니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이와 같은 상태일지도, 무엇보다 그전에 그녀가 화산에 대해 알고는 있을지조차도 백천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남은 후보는 한 명뿐이다. 이미 먼 옛날에 망하고 없다던 화산의 검법을 어떻게 그가 알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단 한 사람, 청명밖에 없다고, 백천은 그리 생각했다.

모두가 입에 올리는 혈화마검은 딱 그 별호와 꽃을 피워내는 검, 정파를 향한 증오만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강호가 지긋지긋해진 은둔한 노인이라거나, 명문 가문에서 쫓겨난 망나니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으나 워낙 소문이 제각각이어서 사람들이 좋을 대로 지어내고 떠드는 것에 가까웠다. 명성에 관심이 없는 도사일 거라는 말도 있었고, 문파와 가문의 입적을 거부하고 그들을 때려눕혀 재물만을 갈취해갔으니 단순히 사파일 거라는 말도 있었다. 하여튼 명확히 밝혀진 이름도, 용모파기 하나 없는 그를 이 넓은 중원의 어디서 찾아낸단 말인가. 돌아가면 상이 녀석에게 죽겠구나, 한탄하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가며 여기저기서 정보를 얻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그렇게 그의 행적을 계속 살펴봤으나 그와 맞닥뜨린 이들의 위치가 워낙 곳곳에 퍼져있어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기야, 그를 알아내는 것이 쉽다면 저보다 훨씬 오래 강호 생활을 해온 이들이 어떻게 혈화마검을 붙들지 못했겠는가.

하지만 백천은 알고, 그들은 모르는 것이 있다.

혈화마검의 정체가 화산의 제자라는 전제. 그중에서도 청명일지도 모른다는 추측. 그것이 백천을 이리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화산의 어딘가에서 지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이라면 어떤 곳에 있더라도, 어떤 일을 겪더라도 결국 화산으로 돌아올 것 같았으니까. 화산이 망하고, 화음에 살던 이들이 떠나가 화음 또한 황폐해져 사람들의 관심이 완전히 끊긴 데다가 애당초 화산 자체가 오악 중 한 곳에 속해있을 정도로 험해 모습을 감추기에는 이만한 곳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백천이 며칠간 화산과 그 주변을 아무리 뒤져도 인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고, 결국 화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렇게 내려오던 길에 문득 화산에서 내려와 타지로 이동할 때 청명이 자신이 아는 맛집이 있다며 저를 포함한 일행들을 데리고 갔던 객잔들을 떠올렸다. 그런 곳들은 대부분 연약한(?) 그의 사형들과 사숙, 사고를 두들겨 놓으려 데려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외진 곳에 있었는데…. 그 기억을 더듬어가며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긴 곳에서 이렇게 우연히 ‘청명’과 재회 아닌 재회를 하게 된 것이다. 객잔을 어르신께서 빌렸다는 점소이의 말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되레 뻔뻔하게 청명의 생김새를 대강 읊으며 친분이 있는 척 굴었더니 일행이라 생각했는지 다행히 속아 넘어가 준 덕이었다.

“내 말을 믿고 말고는 분명 네가 판단 내릴 일이지만,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려면 적어도 화산을 알고 있을 너와 지내야 할 것 같았다.”

백천이 제 앞에 놓아준 뜨거운 차를 단숨에 비워낸 청명이 한숨을 뱉고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저리 설명하는 것을 들으니 저쪽의 청명 또한 자신이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과거 청명이 여기저기 도망치다가 우연히 발견한 작은 객잔이었으니까.

“……일단, 네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네 입에서 나온 이름들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 많고.”

사파 연합은 또 뭐고, 천우맹은 또 뭐란 말인가. 애당초 그의 정체 탓에 정보를 전해 들을 경로가 마땅치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오는 놈 안 막고 패거나 죽여온 청명이라 강호 소문에는 다소 어두운 면이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백천이 말하는 규모의 인물이나 연합이라면 아무리 청명이라고 해도 모를 리가 없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거나, 혹은 이곳에서는 영영 일어나지 않을 일이거나. 물론 어느 쪽이어도 청명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화산을 알고, 그 검을 휘두르며, 이쪽을 잘 모르는 이를 무작정 내치기에는 여러모로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딱 하나는 알아둬야 할 거야. 무림 공적과 지내는 삶이 그리 순탄하진 않을 거라는 것.”

타인에게 이리 말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한참을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청명이 서늘한 낯으로 백천을 노려보았다. 청명은 정과 사를 가리지 않고 적을 만들어왔다. 지금까지야 이런저런 꼼수로 얼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지만, 앞일은 모르는 것 아니던가. 청명이 그러건 말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백천이 찻잔을 기울였다. 찻물 위로 백천의 하얀 낯이 어렴풋이 일렁였다.

“걱정하지 마라. 낯선 곳에서 눈을 뜬 지금도 그렇고, 내 인생에 어느 한순간도 순탄하기만 했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다행이지. 같이 지내다 보면 내가 돌아갈 방법도 알게 될 수도 있을 테고.”

“뭐야? 너한테만 다행인 거 아냐?”

백천의 대꾸에 청명이 괜한 짓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며 투덜대고는 속이 탄다는 듯 연신 잔에 차를 채우고 비워댔다. 그래도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에 청명을 가만 바라보던 백천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와 내가 동행하기로 한 이상, 이제 네가 날 사숙이라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

“뭐?”

투덜대며 잠깐 느슨해지나 싶었던 청명이 황당하다는 듯 백천을 노려보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청명의 속이야 어떻든 지금 모습은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몸이 아닌가. 얼굴은 물론이고 자세 등에서부터 정파 티가 나는 백천의 곁에서 함께 제 신분을 감추려면 그 역시도 정파인 것처럼 하고 다니는 게 좋긴 했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말이다…….

“하, 그래도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한테 사숙 소리하기는 싫은데.”

“어리긴 네가 더 어려, 이 새끼야. 사숙이라 안 부르면, 뭐라 부르려고 그러냐?”

“……흠.”

곧 죽어도 사숙 소리는 하기 싫었는지, 얼굴을 감싼 채 제 볼을 꾹꾹 누르며 생각해보던 청명이 얼굴에서 손을 뗐다.

“도명이…, 백천이라 했던가?”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심드렁한 낯으로 드러눕듯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아명으로 부를까, 싶다가도 아명을 들을 나이는 진즉 지난 듯하거니와 새파랗게 어린 몸으로 부르기엔 이질감이 드니 마땅히 부를 만한 호칭이 없었다. 그렇다고 낯간지럽게 별호를 부르기도 그렇고.

“그럼 화산에 입문하기 전에 쓰던 이름도 있을 거 아냐. 본명으로 부르지 뭐. 본명이 뭔데?”

“……뭐?”

본명 대라는 게 저렇게까지 동요할 일인가? 청명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친절히 다시 말해주었다.

“본명.”

“……본명도, 백천이다.”

제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 진초백이 들으면 펄쩍 뛸 소리다. 백천이 잠시 멈추었다가 대답한 찰나를 놓치지 않은 청명이 아까부터 저보다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구는 어린 녀석을 골려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순 두 눈을 반짝였다.

“알고 있는진 모르겠는데, 내가 남에게 거짓말하는 건 괜찮지만 남이 나한테 거짓말하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좋은 말 할 때 똑바로 불어야 할 게다.”

무량수불, 분명 다른 세계의 청명일진대 어쩜 이리도 자신이 아는 청명과 똑같을 수 있는지. 마치 냉수라도 되는 것처럼 백천이 제 앞에 놓인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곳에서 마주하고 처음으로 보는 호기심 가득한 청명의 눈을 보니 속이 쓰려오기 시작했다. 차마 입이 안 떨어진다는 듯 괴로워하는 백천의 모습을 보고 되레 기분이 한결 좋아진 청명이 "아, 얼른!"하고 재촉했다. 눈을 꾹 감은 백천이 이내 입을 열었다.

“……진동룡.”

침묵이 흘렀다.

멍한 눈으로 백천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이 입술을 콱 깨물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이내 소리 없이 어깨를 들썩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이름을 듣고 웃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저 얼굴에 이름이 진동룡이지? 끅끅거리면서도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던 청명이 결국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처럼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하! 도, 동룡이……. 동, 동룡아, 너는 진짜, 지인짜로 화산에 입문하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평생 동룡이라 불렸을 텐데! 안 그러냐, 동룡아?”

“그래, 마음껏 웃어라, 마음껏 웃어. 이 새끼야…….”

자포자기했다는 듯 백천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뒤로도 끅끅거리며 웃어대던 청명이 눈가를 훔쳤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른 이의 앞에서 이리도 웃었던 것이 대체 언젠지. 마주친 이후로 내내 어른 행세를 하던 어린 녀석이 이제야 끙, 앓는 소릴 내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그 또한 꽤나 웃긴 모양새라, 청명의 웃음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겨우 사그라들었다.

“그, 크흡, 그래도 내 기분이 좋아졌으니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대화해야 할 때는 친히 네게 사숙이라 불러주마. 어때, 감사하지?”

“……오냐, 참으로 감사하다, 이 새끼야.”

백천이 이를 빠드득 갈아가며 억지로 감사를 건네는 백천의 낯을 낄낄 웃으며 찬찬히 뜯어보던 청명이 두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에효, 그럼 당분간 나도 얌전히 살아야겠네.”

“네가?”

“왜? 일단 동룡이 널 원래 있던 곳으로 보내야 할 거 아냐. 그 이후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지.”

언제까지고 곁에 사람을 둘 생각은 없다. 가능한 한 빨리 저 백천이라는 자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다시 제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저 녀석이 제 복수를 도와줄 것 같지도 않고. 애당초 제 복수를 도우라고 하기에는 얼핏 살핀 그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던 데다가, 이제껏 정도만을 걸어왔을 ‘화산’의 제자에게 다른 세상의 청명을 위해 정도에서 벗어나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입 밖으로 낼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당장 청명으로부터 내쳐질 일은 없으리라는 걸 알았는지, 백천이 조금은 안도하는 눈빛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괜히 거슬린 청명은 쯧, 짧게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방해되면 화산이고 나발이고, 확 버리고 갈 거다.”

청명의 낯에서 점차 이렇다 할 표정이 사라지고, 목소리에서 감정과 높낮이가 사라진다.

“내 삶의 목적이자 목표는 단 하나뿐이다. 화산을 잊은 놈들에게 그 이름을 다시 그 머리와 눈에 새겨주는 것.”

이는 백천에게 알리기 위해 말한 것이 아니었다. 제 사문의 죽음을 방치한 역겨운 이 세상에서, 이제까지 이를 갈아가며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쓰린 속을 붙든 채 생을 이어온 청명, 스스로에게 다시금 제 생生의 목적을 상기시키려는 것에 불과했다. 그의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인간은 단순히 화산을 알고 그 검을 휘두르는 유일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복수를 위해 억지로 숨을 이어가는 망령에 불과하노라고.

청명의 말에 백천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거렸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