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청명소병] 그렇게 생각했다네요

반년동안 혼자 연애해서 고슴도치된 임소병

2호땅굴 by 바삭바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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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공개

*임소병은 한이 맺혀있고 청명이가 연애를 좀 못합니다

*BGM 반복재생으로 틀면 감사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으러 가는거라고 허탈하게 말하는 이가 있다. 반면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보며 그 과정 속에 겹겹이 의미를 쌓는거라 말하는 이 또한 있다.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는 그가 겪어온 길과 인생을 대하는 태도 등이 담겨있다. 당연한 말이겠지.

 

자신의 삶을 긍정하던 부정하던 그저 받아들이던. 살아있는 이라면 한번쯤은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럼 이런 경우는 어떻겠는가.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아가지만 이미 죽음을 맞이해 있는 자. 

 


 

 

임소병은 좋게 말하면 통찰력 있고 섬세한 성격. 나쁘게 말하면 세상 모든일을 제 두뇌 위에 올려두고 나름대로 의미를 정리하기 전까진 찝찝해 미쳐버리는 인간이다. 그 집요한 성질은 그를 남들보다 조금 더 이해하고 예측하도록 이끌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범주. 늘 모든걸 정리하고 예측할 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타고나길 풀 뜯는 동물로 태어난 주제에 살점을 뜯어먹는 척 산에 군림하다보니 간혹 진짜 짐승들에게 물릴 일이 종종 있었지

근처를 어슬렁대며 위협하는 만인방의 맹수 장일소가 그러했고, 어느날 쳐들어온 화산파의 미친개. 청명 또한 그러했다.

 

다만 임소병은 쥐새끼이기에 간혹 들어온 맹수를 피해 달아날 수도 있고 쥐고있던 견과류 따위를 내밀곤 다가가 머리를 비빌수도 있었지만 그 둘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고기 뜯는 짐승들은 자기 구역을 침범한 위협적인 포식자와 죽어도 공존할 수 없었다. 왜냐? 본인 또한 상대에겐 고깃덩이에 불과하단 걸 본능적으로 알아채기에. 그래서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세력을 뻗어나간다. 그건 그들이 타고난 성질이고 임소병은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장일소의 이해할 수 없는 영역 확장의 탐욕은 어느정도 납득할 수준까지 맞춰진다. 이런 경우 쥐새끼의 대응은 간단해진다. 더 표독스러운 짐승을 데려와 앞장세워 뒤를 따르는 것.

 

 

이제 정말 이해할 수 없는건 청명이었다. 

 

 

청명은 미친 듯이 세력을 확장해 나가지만 고기를 뜯는것도 아니고 우두머리가 되길 원하지도 않는다. 남들은 알 수 없는 숭고한 정신적인 충족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임소병이 보기에 청명은 애초에 정해진 길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은 채, 정확하게 노려보며 뼈가 부서져라 달리기만 하는 미친 동물이었다. 곁에서 아무리 집요하게 살펴보고 생각해도 그 뜀박질 속에 자신의 삶이나 영광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그 미친 짐승의 길 위에 갑자기 얹혀진 임소병은 어떤 의미인가. 삶의 첫걸음인가? 실수로 들여와 곧 정리해야 할 불순물인가.

 

 


 

 

생각에 잠긴채 부채를 팔랑이던 임소병을 청명이 쿡 찌른다. 

 

 

“ 멍이나 때릴거면 혼자 오지 왜. ”

“ 헤헤, 미안합니다 도장. 이렇게 놀러나온건 오랜만이라 잡생각이 뜨지 뭡니까. ”

“ 거 귀한 수련시간 빼서 나온건데 잡생각은 산에서도 할 수 있는거 집중 좀?”

“ 우와! 저기 신기한 물건이 있는데! 좀 보러가야 될 것 같습니다! ”

 

 

흥. 특유의 영감님 같은 투덜거림을 후딱 끊어내는 기술. 이게 연륜이라는 것이다 청명아. 재수없게 웃은 임소병은 잔소리가 다시 이어지기 전에 반짝이는 장신구 등이 놓여있는 곳을 가리키곤 청명이 심드렁하니 늘어놓은 팔에 스을쩍 팔짱을 껴 끌고간다. 

 

 

“ … ”

 

 

늘 그렇듯 팔을 마주 엮어오지도 풀어내지도 않은채 터벅터벅 따라오는 청명이녀석. 

 

큰 상가라는걸 증명이라도 하듯 거리에 치렁하게 늘어진 천과 등 사이를 지나 도착한 작은 노점상 앞에서 임소병은 팔짱을 풀어냈다. 마치 이 싸구려 금속 잡동사니들에 관심이라도 있는 척 과정스레 고개를 기웃거리니 흘끗 따라보는 시선. 임소병은 매대에 올려진 물건 중 가장 그와 어울리지 않을것처럼 생긴 예쁜 비녀를 덥썩 들곤 고개를 들어올린다. 눈치를 챈것인지 슬금슬금 물러나는 청명.

 

 

“ 도장. ”

“ 어. 안써 ”

“ 거 참 단호하시네! 에이… 그러지 말고 ”

“ 안쓴다니까? ”

 

 

웃음을 띄운 채 두발자국 접근하면 세발자국 물러나며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다. ‘내가 이 나이에 그런거나 쓰고 재롱 떨어야겠냐?!’ 말하는듯한 모양새. 강력한 반발에 임소병은 전략을 바꿔 입을 툭 닫곤 우울하게 중얼거려본다.

 

 

“ 아니 뭐 저라고 다 큰 사내놈이 치렁하니 치장한걸 보고 싶겠습니까? 추억 쌓자는건데 협조 한번만 합시다… ”

“ 협조는 뭔 얼어죽을 협조. 사람 놀리려고 온거면 나 간다? ”

“ 참… ”

 

 

결국 바람도 햇볕도 저 고약하기 짝이 없는 나그네의 옷을 벗길 순 없었다. 뭐, 저 성정에 정인이 되었다고 바로 헬렐레 풀어져서 해달란건 넙죽넙죽 들어주진 않을거라 예상했지만 말이다. 만일 청명이 그리 닭살돋게 나왔다면 임소병이 더 소름끼쳐했을 것이다.

 

 

“ … ”

“ 뭐? 그렇게 봐도 안해. ”

 

 

근데 계절이 두 번 지날동안 먼저 손 한번 잡지않고. 내뱉는 말들은 차갑기 짝이 없고. 간만에 놀러나와 이런 별 시덥잖은 부탁 하나 들어주지 않는건 좀 서운하지 않겠냐. 어? 진짜 안해?

 

 

 

 

잠시간 청명과 임소병, 그리고 이놈들이 도둑놈인지 뭔지 의심중인 주인장까지. 셋 사이 미묘한 신경전이 흘렀다.

 

임소병은 그를 가만 노려보다가 급 기력을 잃은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비녀를 꽉 쥔채 소매 주머니에서 동전을 한웅큼 꺼내 주인장에게 내밀었다. 

 

흥정 한번 없이 내민 금액이 싸구려 비녀의 원가를 웃도는 양이라는걸 깨달은 주인은 그제서야 긴장을 풀고는 공손히 인사한다. 

 

 

“ 감사합니다 나으리. 좋은 시간 보내십쇼! ”

 

 

꾸벅. 마주 인사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먼저 앞으로 걸어나가는 임소병의 뒤를 청명이 따라간다. 

 

 

“ 그걸 왜 사? …설마 직접 쓰려고? ”

“ 알 거 없수다. 장단 맞춰줄 생각 없으면 관심 꺼요 ”

 

 

걸쭉한 말투 끝에 슬쩍 서운함이 새어나온다. 욕심이 그렇게 많아 추억 하나 함께 나누기도 싫은 듯 하니 혼자라도 가져가야죠. 목구멍까지 꿈틀대는 뒷말을 참아내고 임소병은 비녀를 소매에 넣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분위기가 이상해질 쯤 허튼소리를 꺼내며 너스레를 떠는게 제 몫이었으나 왠지 오늘만은 너무 지친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조용히 걷기만 했다. 

 

 

 


 

 

 

“ … … ”

“ … ”

 

 

분위기 푸는 사람이 없으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공기. 그저 기척으로 따라오고는 있구나~ 생각하며 걷던게 한 식경이었다. 그나마 흐리게라도 떠있던 해가 점점 져가며 거리의 홍등이 하나 둘 불을 켜간다. 낮과는 조금 결이 다른 활기가 도는 거리. 무기력을 넘어 조금 우울하게도 보이던 임소병이 잠깐 멈춰서곤 뒤를 돌아본다.

 

 

“ 도장, 그래도 이왕 내려온거 식사나 하고 가시렵니까? ”

“ … … …어? ”

 

 

…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 임소병 만큼이나 복잡한 표정으로 멍하니 길바닥을 보며 걷던 청명이 고개를 들며 얼빵한 소리를 낸다.

 

 

“ 밥이나 먹고 빨리 돌아가자고요. 수련할 시간 아까워 죽겠을텐데 ”

“ …뭐… 그렇지는 않은데. 그래. ” 

 

 

뭔가 하고싶은 말을 삼킨듯한 청명은 걸음을 빨리해 임소병의 옆으로 붙었다. 보나마나 반주를 걸칠 생각에 마음이 급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지. 

뚱한 표정으로 또다시 터벅이며 걷다보니 그와 자꾸만 어깨가 툭툭 부딪힌다.

 

...

익숙한 상황.

 

도장이 처음 붙어왔을땐 이 넓은 길에서 좀 떨어져 걷지 뭔 시비냐고 생각했었지. 

두 계절동안의 헌신과 노력의 결실이라고나 할까, 이제 임소병은 이 신호를 안다. 손을 잡고 걷고싶은데 자기 체면에 먼저 다가오긴 좀 그러니 뭐 한번 해보라는 지극히 수동적인 신호. 아주 재수없기 짝이 없지만 우습게도 소병은 이 행동에 종종 설레였었다. 이 관계가 일방적으로만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걸 말해주는 몇 안되는 증거였기에. 

 

 

“ 비가 오려나… ” 

 

 

팔이 닿고있단걸 인식하지 못하는 마냥 명백히 딴청을 피우는 목소리. 근데 오늘은 그 같잖은 시도 받아주기 싫었다. 댁이 수줍기 짝이 없는 새색시도 아니고, 밤에는 어디든 덥썩덥썩 잡아재끼면서 낮엔 손 하나도 먼저 잡아줘야되나? 소병은 괜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에게서 조금 떨어져 걸었다. 

 

 

“ 오면 뭐 어떻습니까. 비 조금 맞는다고 뒤지는것도 아니고 ”

“ 이것 봐라? ”

 

 

뚱하기 짝이 없는 무표정으로 말하니 청명이 툭 나온 주둥이를 집게로 쭈욱 꼬집곤 임소병이 신경질을 부리기 전에 놓는다. 에잇 거 참! 그 행동에 인상을 잔뜩 구기면서 이제 가까이 오지도 말라는 듯 팔을 퍼덕이는 임소병. 난리치는 통에 팔을 몇 대 얻어맞은 청명이 얼굴을 저 멀리 빼곤 진정하라는 듯 녹림왕의 마른 팔뚝을 잡아 내린다. 

주우욱. 아주 손쉽게 내려가는 팔뚝.

 

 

“ 매번 힘으로 진짜… … ”

" 억울하면 수련하던가 "

 

 

인간이 수련해서 멧돼지를 어떻게 당한댑니까. 까칠하게 반론하려던 임소병이 곧 입을 다문다. 왜? 팔뚝을 잡아내린 큼직한 손이 곧장 풀리지 않고 팔목을 타고 내려오더니 뭐 소중한것이라도 대하듯 부드러이 손을 잡았기 때문에.

 

 

“ … … … ”

 

 

늘 차갑던 손에 온기가 옮겨온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힐끗 마주보곤 다시 시선을 앞으로 고정하는 청명.

 

 

어우, 진작에 할거 다하고 몸뚱아리도 공유한 사이에 이게 뭐라고 이렇게 떨린다. 안하던 짓을 선보인 청명은 손을 한번 고쳐잡더니 엄지로 임소병의 손등을 다독이듯 살살 쓸어준다. 

이 동냥하듯 떨어지는 애정에 하루종일 죽도록 서운했던게 거짓말처럼 녹는걸 보니 나도 참 속없는 사람이다 싶던 소병. 헛기침을 두어번 하더니 뜨뜻한 손을 마주잡곤 옆으로 좀 더 붙는다. 

 

 

“ 어허, 남들 다 지나다니는 밖에서 이래도 됩니까? ”

 

 

언젠가 들었던 말을 이제야 되돌려주는구나. 안그래도 옆으로 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소병에게 청명은 뻔뻔스런 얼굴로 대꾸했다.

 

 

“ 다 보라고 해. 내가 잡고싶다는데 뭐 어쩔거야 ”

“ 지가 신경쓸땐 언제고… ”

“ 뭐라했냐? ”

“ 비가… 올 것 같아서 신경쓰인다구요. ”

 

 

매번 쫄면서도 시원스레 투덜거리고, 말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임소병을 보곤 청명이 피식 웃었다. 음기가 많이 빠져나가고도 선천적으로 몸이 찬건 마찬가지인지 마르고 차가웠던 손이 거의 청명과 비슷하게 따뜻해졌을 즈음. 도란도란 잡담하며 걷던 두 사람이 종종 가던 주점으로 들어간다. 

 

 


 

 

여느곳과 비슷하게 붉게 잘 꾸며진 넓은 주점. 차이점이라고 하면 바로 옆에 강이 흐르고있어 2층 창가에 자리잡으면 제법 눈이 즐거웠다. 늘 탁 트인곳에 머물던 임소병과 사람 한가운데에 있을때면 종종 사고를 치던 청명이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장소라고나 할까. 둘은 익숙하게 마주앉아 쫄랑쫄랑 걸어온 점소이가 추천한 요리를 대충 주문했다. 음식보다 조금 먼저 나온 향이 좋은 술 두어병과 제법 값이 나가는 차 한잔. 이렇게 두고 보니 새삼 취향차이가 느껴진다며 임소병이 실없는 잡담을 하곤 웃었다.

 

잔이 비워지기 전에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임소병은 늘 그렇듯 무인답게 먹성이 좋은 청명이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한 젓가락 문 다음 창밖을 보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타고나길 입이 짧은 그가 정인마저 멸어(蔑魚)를 데려왔다면 둘이서 멀뚱멀뚱 얼마나 뻘줌했을까. 생각하며 졸졸 흐르는 강을 지켜보는데… 보는데… 이 어두운 와중에 물가에서 놀고있는 아이들이 눈에 띄인다. 그닥 깊은 강은 아니지만 왠지 신경이 쓰인 임소병은 턱을 괴곤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소병이 손하나 까딱하지 않은 동파육과 가지요리를 거의 다 비워가던 청명이 입에 있는걸 우적우적 씹으며 말을 꺼냈다. 

 

 

“ 저기선 백 번 넘어져도 안죽는다. ”

“ 보고 계셨습니까? ”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젓가락으로 강을 가리킨다. 

 

 

“ 강이 얕아. 물살도 약해서 거의 고인거나 마찬가지고. 너도 알잖아? ”

“ 그렇다 해도 물가에서 애가 놀고있으면 눈이 갑니다. ”

 

 

보면 볼수록 사파에는 어울리지 않는 고운 천성을 가진 녀석인데 잔인하게 굴어야 할때엔 또 바로바로 바뀌는게 가능하니, 특이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그새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약간 울적해보이는 녀석을 못본 척. 다시 고개를 접시에 처박고 식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임소병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 어렸을적에 계곡에서 놀다 발을 헛디뎌 쓸려갈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

“ 그랬냐 ”

“ 그땐 무공도 뭣도 없을적이라 정말 이러다 죽는구나 생각했었죠. ”

 

 

계속 말하라는 듯 잔잔한 눈을 마주본 청명이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으며 입가를 슥 닦아낸다. 

 

 

“ 그 급박한 와중에도 생각했습니다. 녹림왕의 아들내미니 뭐니 어화둥둥 태어나 좋은거 입고 먹고 자랐는데도 뭐가 안되고 죽을수도 있는거구나. ”

“ 음. ”

“ 삶이란건 생각해보면 그닥 의미 없는건데 너무 과대평가된게 아닌가 싶은 생각 말입니다. ”

 

 

문득 녹림왕은 칼에 찔리면 안죽냐고 바락바락 대들던 어느날의 임소병이 스쳐지나간다. 그는 다 식어가는 차를 홀짝이곤 말을 이었다.

 

 

“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삶은 아무리 아등바등 애써도 언제든 허무하게 끝날 수 있죠.  ” 

짧은 정적. 다소 무거워진 주제에 청명의 눈썹이 씰룩인다. 

“ …너 요즘 우울하냐? ”

“ 뭐 그런건 아니고. 다만, 끝을 예상하고 지나치게 겁을 먹을 필요도 없다는 말을 하고싶었습니다. ”

 

 

본론을 말하기 분위기를 잡는 버릇. 임소병은 늘 입가에 띄우던 미소를 지우곤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삶을 지속하는게 우리의 영역이 아닌것이면 인간은 그저 주어진 삶을 꾸리며 충실히 살아가면 되는 일이죠. 자연스러운 일들은 자연스럽다 받아들이면 됩니다. 청명 도장. 당신은… ”

 

 

‘ 당신은 왜 삶을 꾸리길 버거워하십니까. 왜 절 손에 쥐는것을 지금껏 망설입니까? ‘

 

 

생략된 말. 아마도 다름아닌 청명이니까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팔짱을 끼고선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있다. 그저 음식점에서 말하기엔 다소 무거운 주제였다는걸 인지했는지 임소병은 부채를 촥 펼치곤 다시 웃음을 띄워보였다.

 

 

“ 그런 의미에서 궁금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

“ …뭔데? ”

“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헤헤 ”

 

 

또 뭔 대단한 질문을 하려고 운을 띄우는 임소병의 모습에 내심 긴장감이 도는지 침을 삼키는 청명. 정인과 함께한다는건 원래 이렇게 매 시간이 전시상황인것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얇은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말을 이어간다. 

 

 

“ 도장은... "

" ... ...응. "

" 만약 전쟁중에 백천 도장이랑 당신이 너무 사랑해 마지않는 정인이랑 같이 물에 빠져있으면 누굴 먼저 구할겁니까? ”

“ 다 먹었다. 일어나자 ”

 

 

들을 필요도 없었다는 듯 미련없이 일어나는 청명을 당황한 임소병이 꽉 붙잡는다.

 

 

“ 에이, 그러지말고! 만약에 말입니다 만약에! ”

“ 아니 그런 상상을 왜하는데?! 알아서 헤엄쳐 나와!! ”

“ 저 진지합니다. 진짜 진지해요! 한번만 대답을… ”

 

 

일어나려는 청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니 주변에서 식사를 하던 이들이 요상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청명은 끄응 앓는소리를 내곤 결국 자리에 앉았다.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

 

 

“ 평소에 그런거 자주 상상해? 아니 동룡이도 헤엄 잘치고 너도 빠져죽진 않을텐데 내가 왜 구해 ”

“ 둘 다 얻어맞아서 팔다리가 죄다 부러져있는 상황으로 갑시다 ”

“ 그럼 둘 다 구하면 되지 ”

“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한쪽은 무조건 죽어요. 게다가 주변에는 따로 도움을 줄 사람도 도구도 없고 무조건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가정! ”

 

 

얘는 이런 시덥잖은거에 뭐 이리 열정적일까.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왠지 절박하게도 보인다. 여기서 원하는 대답을 그저 내줄수도 있겠지만 임소병은 그런 입발린 말을 원치 않는 사람인걸 알고있기에 괜히 마음이 답답해진다. 

 

 

다시 팔짱을 끼곤 눈까지 감은채로 한참을 생각하는 청명과 긴장되어 목이 타는 듯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소병. 그렇게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윽고 영 자신없는 표정으로 입을 여는 청명. 다가올 폭풍이 예상되는지 어둡고 흐린 창 밖을 보며 말했다. 

 

 

“ 글쎄다. 애초에 전시에... 위기상황에 그런 불안요소가 있는 것 부터가 이미 글른 것 같은데.  ” 

" 아... ... ... "

...

자신없는 대답과 제법 긴 정적...을 못이기고 청명이 소리를 지른다.

" ... ... ...아, 왜?! "

" 뭐... 그렇네요. 불안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불안요소... "

 

 

아 젠장. 조졌다. 이 녀석 방금 그 실없는 질문에 함축된 의미를 무지막지하게 담아뒀던게 틀림없다. 그럼 각오하게 신호라도 좀 주던가...

게다가 임소병이 원했던 대답이 뭔진 몰라도 결코 이것만은 아니었던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가뜩이나 창백한 낯빛이 차갑고 어둡게 가라앉았다. 실망감에 힘이 풀린건지 과하게 들어간건지, 소병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 정말… 그게 대답입니까? ”

“ … … … ”

 

 

그 어떤 권력자를 마주할때에도 나오지 않던 식은땀이 다 난다. 

 

 

“ 하… ”

 

 

아까랑은 차원이 다르게 크게 상처받은듯한 임소병. 아니 이게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었다고?

 

내심 매번 그래왔듯 따박따박 쏴붙이곤 말거라 생각했던 청명은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그 다사다난했던 오랜 인생을 통틀어도 완전히 삐쳐버린 정인을 달래본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이미 꺼낸 말을 무르기도, 책임질 수 없는 대답을 할 수도 없었기에 청명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걸까. 임소병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채를 펼치곤 제 입가를 가렸다. 

 

 

“ 그렇네요 도장. 차마 결과를 볼 자신이 없다면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 과연 심계가 뛰어나십니다. ” 

 

 

빈정거리는 말투와 차가운 시선. 그와 상반되는 떨리는 손끝이 시선을 가져간다. 좀처럼 보기 힘들게 당황한 청명이 눈을 꿈뻑이며 그를 쳐다본다. 

 

 

“ 근데 그러려면 불안요소를 조금 더 빨리 놓았어야죠. 애초에 거절하시던가… …괜히 기대하게 뭡니까 이게? ”

 

 

바로 이어 말하려다 목이 조금 메였는지 고개를 돌려 작게 기침한 임소병은 부채로 입을 가리곤 작은 소리로. 그러나 청명의 귀엔 똑똑히 들릴정도로 말하곤 잡을새도 없이 주점을 나갔다. 

 

 

‘ 이도저도 안될거 끝냅시다 그냥. 먼저 갑니다.  ’

 

 

불안요소 퇴장!

누가봐도 잔뜩 화가 나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야말로 날벼락이라도 얻어맞은 듯 손에 얼굴을 파묻곤 한숨을 푹 내쉬는 청명. 이윽고 우중충하던 하늘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옛날 이야기를 해볼까.

청명은 예나 지금이나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성에게 그다지 인기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화산은 결혼을 금하지 않는 문파였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똑부러진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험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담력을 가진 사람은 온 세상을 뒤져보아도 몇 없었고 청명 또한 누군가를 과부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의도적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도사로서의 자아도 한 몫 했었고.

 

그는 그렇게 인생을 한 번 마무리했었다. 

 

이후 원인을 모르게 주어진 두 번째 인생. 그는 비참하게 망해가던 화산을 다시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몸이 죄다 부서지고 피를 토하고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차마 내 등만을 믿고 눈을 빛내는 병아리들에게 말할 순 없었지만 첫 번째 생보다도 훨씬 어둡고 고독한 길이었다.

 

꾸역꾸역 업고가던 병아리들이 제법 자라나 믿을 수 있는 지원군이 되었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지옥 같은 수련을 마치고도 잠이 오지 않았던 어느 날. 청명은 종종 그랬듯 지붕 위에서 혼자 병나발을 불며 밤이 깊다는 생각을 했고, 제 안에도 삶을 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의지하며 걷고 막연한 내일을 약속하고. 그런 것 말이다. 

 

내 팔자에 그게 말이나 되는 욕심이냐. 잡념은 발만 묶어둘 뿐이다. 텅 비어버린 술병을 들고 슬슬 백매관으로 돌아가려 바닥을 내려보니 여태 애써 무시하던 지붕 밑 인기척과 눈이 마주쳤었다. 

 

 

‘ … ’

‘ … … … ’

 

 

우두커니 서서 뭘 많이도 고민했는지 별로 춥지도 않은 바람에 식어있는 창백한 피부와 찬 손에 들려있는 새 술병.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올려보다 어색하게 웃어보이는 표정까지. 

 

감성, 순정… 이런것과는 제법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온 청명의 눈에도 그건 대단히 소중한 것으로 보였다. 

 

왜 여기서 이러고있냐는 물음에 그냥 보고싶었다며 자긴 즐기지도 않는 술병을 흔드는 임소병을 보며 청명은 조금 마음이 설레였던 것도 같다. 

 

 


 

 

…근데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지. 

 

청명은 금방 버거워졌다. 내가 대체 뭔 줄알고 무방비하게 몸을 내맡기고 잠드는 모습이나 나조차도 포착하지 못했던 자잘한 습관을 관찰해서 챙겨오는 모습. 마른 무릎을 베개삼아 눈을 감고 있으면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길. 괜히 차오르는 심술에 괴롭히고 아프게 다뤄도 먼저 잡아주는 손 한번에 행복해하는 옆얼굴이. 

 

마치 시한폭탄 같은 그의 삶에 넣기엔 너무 소중한 것들이었다. 청명은 뒷 일 생각않고 사랑하기엔 너무 멀리 보는 사람이었고, 이번 생에도 흘려보내기엔 후회가 뼈저릴 것 같았다. 어쩌겠냐. 나도 사람인데 상처를 주더라도 보류하고 싶은 일은 있는 법이다. 

 

 

쏴아아-

 

 

주점에서 머리를 쥐어뜯다 그를 찾아나가니 빗줄기가 좀 더 거세져있었다. 주변의 노점상들은 발빠르게 철수했는지 빈 수레만 남아있었고 강가에서 놀던 아이들조차 돌아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거리. 청명은 빗속을 뚫고 왔던 길을 쭉 되돌아갔다. 임소병이 산으로 갔을지 화산으로 갔을지 근처에서 방을 잡았을지.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일단 걷고 또 걸었다. 한참동안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만약 그를 마주했을때에 과연 날 반겨줄지. 어떤 말을 해야하며 난 어쩌고 싶은건지. 

 

 

철벅, 철퍽

 

 

물웅덩이들을 무심히 짓밞으며 나아가는 발걸음. 

 

솔직히 매번 사파새끼라 욕하고 쥐어박아도 임소병은 태생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도 관심없을 머리통에 비녀 하나 꽂아주는것도 겁내는 무지렁이보단 더 좋은 사람을 만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지붕까지 기어올라와 언 손으로 술잔을 채워주던 얼굴을 떠올린다. 떠올리며 등불이 다 꺼지고 거리가 활기를 잃어 어둠이 드리울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거리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이곳마저 넘어가면 남은 건 산에... 

 

 

툭.

 

 

발치에 뭔가 가벼운 것이 부딪혀 튕겨나갔다. 

 

 

“ … ”

 

 

눈에 익숙한 작은 비녀. 그 앞에 쭈그려앉아 손에 쥐어보니 방금 굴러가며 엉겨붙은 흙탕물을 제외하면 척 보아도 떨군지 얼마 되지 않아보인다. 꼭 누군가 방금 일부러 던진 것 처럼.

이상하게도 그걸 보는 청명은 실실 웃음이 났다. 피로가 싹 달아나곤 머리가 점차 명료해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산길로 들어서는 초입에서 뭔 생각을 그리도 했는지 세찬 빗물에도 지워지지 않은 자잘한 발자국이 한가득이다. 

 

 

“ 한참 어린놈이 하는짓은 촌스럽기 짝이 없어서… ”

 

 

히죽이며 발자국이 이어진 그 끝을 바라보니 낡아빠져 빗줄기조차 온전히 막아주지 못하는 처마 밑에 누군가 쪼그려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 잘 정리하고 다니던 머리는 흐트러진채 젖어있고 겹겹이 입은 옷은 한껏 구겨져 말마따나 젖은 쥐새끼같다. 

 

조용히 걸어가 그 옆자리에 털푸덕 앉으니 움찔하는 작은 등짝. 

 

 

“ 야. ”

“ … …뭡니까? ” 

 

 

처녀귀신마냥 늘어뜨린 머리를 들어올리니 꼴이 말이 아니다. 침침한 그림자 속에서도 명백히 보이는 벌개진 눈가와 잔뜩 지친표정. 뺨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어있어 좀 떼주려 손을 뻗으니 내력을 담은 손날이 예민하게 쳐낸다. 

 

 

“ 그냥 가던 길 가시죠… 안그래도 짜증나 뒤지겠으니까 ”

“ 이거 초대장 아니었어? ”

 

 

흙이 엉겨붙은 비녀를 들어보이니 가만 보던 임소병이 손을 뻗어 채가려한다. 암만 방심하고 있어도 제 손에 쥔걸 뺏길 리가 없는 청명. 딱 약오를정도로 팔을 높이 올려 잡아채지 못하도록 물린다. 그런 패턴이 두어번 반복되자 약이 바짝 오른 임소병의 몸이 점점 청명에게 쏠리고 균형이 흐트러져, 마치 덫 위에 올라온 쥐같은 모양새가 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잠시 균형이 무너진 어깨를 휙 감싸안아 손쉽게 품 안으로 가둔 청명. 

악! 치미는 짜증에 소리를 지른 임소병이 몇 번이나 일어나 멀어지려했지만 옆구리 틈으로 들어온 단단한 팔뚝이 띠를 두르듯 안아버리니 내력을 써도 도저히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부채로 때려도 보고 팔꿈치로 찍어도 보고 물기까지 했지만 꿈쩍도 않는 팔뚝에 결국 의지가 꺾인 듯 스르륵 무너져 가슴팍에 기대는 모습.

 

 

“ …아휴… 내가 이럴거면 차라리 멧돼지를 만났지. 아주 미쳤지 내가… ” 

“ 소병아. ”

 

 

나름 큰 각오 끝에 진지한 음성으로 부른 이름. 내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말인데도 낯간지러워 미쳐버리겠다. 그건 임소병도 마찬가지였는지 바짝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같던 몸이 움찔한다.

 

 

“ 분위기 잡고 개수작부리지 마쇼. 안넘어갑니다. ”

“ …그동안 내가 서운하게 굴었던거 다 안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 

 

 

미안함이란걸 아는 사람이 사람을 반년간 희망고문하냐고 쫑알거리는 임소병. 평소같았으면 이쯤에서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았을 청명은 담담한 투로 말을 잇는다. 

 

 

“ 아까 물었지.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거냐고 ”

“ 애초에 이도저도 하기 싫다고 대답 했잖습니까? ”

“ 난 동룡이를 구한다. ” 

 

 

매정하리만치 단호한 어투로 나온 말. 그 말에 내내 트집을 잡던 품안의 고슴도치가 얌전해진다. 

 

 

“ 그 애. 사숙은 지금 화산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야.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지만. 난 화산이 일순위고 그보다 더 중요한건 없어. 너... 심지어 나조차도 포함해서 말이야 ”

“ ...그렇군요. ”

 

 

잔인하게도 들릴 수 있는 말을 담담히 받아들인 태도. 나직히 나온 대답에서는 실망도 서운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 청명 도장, 바쁜 사람들끼리 결론만 말합시다. 무슨 말이 하고싶습니까. 헤어졌다고 화산에 화풀이하지 말라고? ”

 

 

오히려 기대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청명은 임소병을 안고있던 팔에 힘을 꽉 주곤 잠시 고민한 다음. 작은 소리로 말했다.

 

 

“ 그래도 네가 괜찮으면 그 외적으로는 너랑 살아보고 싶다고. … …이번엔 진짜로. ”

두 번의 인생을 통틀어 이리도 입밖에 내기 어려운 말이 있었을까. 천리 길을 한걸음에 뛰어가도 멀쩡한 심장이 난동을 부린다. 청명에겐 정말 큰 각오였다. 살아본다는 그 막연한 말을 확실히 이해할 녀석에게 꺼낸건.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순 없지만 한 번 소중한걸 죄다 잃었었다. 

 

얻는다는건 잃는다는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졌고 이루려는 목표 외에는 무엇도 성취하고 싶지 않았다. 도란도란 시간 보내며 정들면 뭐하나? 미친놈 하나가 싹 쓸어버리면 고통만 가증될 뿐인데. 

 

처절하리만치 눈에 담았던 결과는 삶이란걸 다시 꿈꾸기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청명은 목표를 달성한 후 안전한 세상이 오면 누구에게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채 당연스레 져버리고 싶었고. 그럼에도 제 빈자리가 영원한 상처로 남을 수 있다는게 무엇보다 큰 두려움이었다. 

 

 

“ 도장… ”

 

 

근데 요 쥐새끼가 자꾸 꿈꾸게 만들었다. 당장 해가 지날때 목숨이 붙어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이 아슬아슬한 판도를 알면서도 옆에서 자꾸 부추겼다. 쥐뿔 모르면서 그게 삶이라고 자신있게 외치더니 결국엔 다시 잡고야 말게 만든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후회하게 될지 아닐지. 그냥 셈에 능한 녀석이니 믿어보기로 했다.


 

 

그 뒤로 어떻게 됐냐. 

청명은 안고있던 팔을 천천히 풀어내 차가워진 손을 붙잡곤 귓가에 생전 해본 적 없는 사랑고백을 속삭였다. 그게 서로에게 얼마나 충격적인 말이었나. 

청명이놈이 관짝에 들어갈때까지도 들어볼 일 없을거라고 상상하던 바로 그 말. 늘 창백하던 고슴도치의 얼굴이 터질것처럼 벌개지곤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며 돌아본다. 침착한 척은 하지만 만만찮게 시뻘개진 청명. 민망하니 괜히 언성을 높이며 얼굴을 가리다가 임소병이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꾸 고개숙여 기웃거리자 냅다 밀어눕혀 입을 맞춰버렸다.

.

 

흙탕물에 쫄딱 젖은 거지꼴이 된 두 사람은 그런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몸장난을 이어가다 누군가의 재채기소리를 신호로 손을 꼭 잡곤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여느 연인들처럼.

 

 

비는 계속 내리지만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했다.


*아래는 후기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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