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백천청명] 착각 1

청명의 착각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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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은 백천이 자신을 연모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백천의 대가리를 깬 그날부터 청명에게 온갖 욕설과 험난한 수련을 종용 받으면서도 불만없이(?) 제 대가리를 깨달라고 달려드는 모양새나 어떤 지옥길에서도 청명을 놓칠 새라 절박하게 따라 붙는 모습이 청명이 보아도 제정신인 인간의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심지어 이제는 자타공인 화산 최고의 멧돼지가 되어 청명이 나서는 길의 선두를 도맡는다.

100년 전 화산에서 생의 거의 모든 세월을 보낸 청명은 자신보다 나이 많고 항렬 높은 사숙이 본래라면 제자나 다름없을 청명을 이렇게 믿고 따른다는 게 평범한 일이 아님을 알았다. 

아무리 청명이 백천을 동룡이라 놀리며 제자 취급을 하고 있을지언정 백천이 청명을 스승이나 그 비슷한 무언가라고 여기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백천에게 청명은 어떤 존재일까.

청명은 오늘도 남들의 3배는 굴림 당하면서 얼굴만은 헌앙한 백천을 바라보면 문득 생각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개인수련을 마무리한 청명은 수련의 마무리 즈음 일어난 사형,사숙을 연무장으로 내던지듯 모아놓고 오늘도 훌륭한 멧돼지 육성수련을 강행했다.

집채 만한 바위를 짊어진 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절벽을 오르는 백천을 내려다보던 청명은 고개를 처든 채 청명을 바라보고 있던 백천과 눈이 마주쳤다.

그 속에는 이글거리는 정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 사숙이 날 연모하는구나'

청명은 생각했다.

실제로 백천의 눈동자 속의 이글거림은 정염이 아닌 차오르는 분노였고, 청명의 대가리를 한대 치고야 말겠다는 염원이었지만.

이도 염은 염이라.

문득 고개를 든 의문과, 밤낮 없는 수련으로 판단력을 잃은 정신, 그리고 청명 자신조차 몰랐던 아주 약간의 기대가 만나 청명은 백천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청명은 백천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좋은 것 같기도' 

고운 얼굴선이나 헌앙한 미소 같은 백천의 외향은 물론이오, 청명이 아무리 강해도 위험한 곳에는 언제나 자신을 데려가라던가, 죽어도 자기 먼저 죽어야 한다던가, 그런 과격하고 적극적인 애정의 표현은 이전의 화산에서는 경험해본 적 없는 것이였다.

지금까지 청명을 향한 걱정이란 건 대게 제발 사고치지 말라거나, 치더라도 수습 가능할 정도로만 하라거나, 수습이 안될것 같으면 증거를 남기지 말라는(?) 걱정이 전부였기에, 청명을 향한 백천의 행동과 표현은 청명에게 있어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의 행위와 다르지 않은 것이였다.

물론 동성이라는점 말고도 나이차이라던가 사패새끼들의 발악이라던가, 마교의 발호 등등 문제는 산적해있지만 청명은 기본적으로 돌진하는 대장 멧돼지였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보다 더 큰 문제로 덮어 해결해 왔었고, 일단 백천의 갸륵한 마음을 받아주고 기정사실부터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백천은 저를 연모하고 있고 훌륭한 대장 멧돼지와 제가 키운 최고의 멧돼지의 만남을 그 누가 막을수 있으랴.

그렇게 믿으며 청명은 홀로 히죽 웃었다.

"미안하다. 널 그런 대상으로 생각해본적은 없다"

그러니까 백천의 이런 대답은 예상치 못하다 못해, 청명이 숨쉬는 법도 잊게 할만큼 당황스럽게 했다.

'어째서?'

숨이 막혀 질문은 소리가 되지 못했다.

그저 의문과 혼란을 담은 눈으로 백천을 쳐다봤을 뿐이다.

이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슨 말을 이어할지 고민하는 백천을 보고 청명도 눈을 흘기며 씹어삼키듯 말했다.

"아니~뭐~내가 연애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 좋아하냐고 물은건데 무슨!

동룡이 주제에 착각도 유분수지! 미안할거 없고 아님 됐어 나 간다!"

창피했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착각을 한것도 창피했고, 변명하며 자리를 피한것도 창피했고, 무엇보다 이제와 연모를 자각한게 창피했다.

동룡이 따위가 건방지게 군다며, 소심한 백천대신 제가 먼저 다가가 주자며 너그러운 척 행동했던 모든 순간들을 되돌리고 싶었다.

생각해보면 백천이 저를 연모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는데 자신안의 연모의 싹이 저 좋을대로 착각해서 백천과 정인이 되고자 했다.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오며 그길로 청명은 장문인에게 달려가 폐관수련을 하겠다 말했다.

청명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현종은 '우리 새끼가 뭔가 일을 쳤구나' 싶어 저놈이 더 큰 일을 치기 전에 일단 가둬두자고 생각해 허락했다.

그렇게 청명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건 십오주야 뒤의 일이었다.

백천은 최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다.

저놈의 망둥이가 안밖으로 사고를 치다 못해 제 마음도 혼비백산 난장판을 만들고 자기는 폐관수련한다며 튀어버린것이다.

청명이 폐관을 들어가기 전날 저녁.

언제나처럼 대련을 빙자한 폭력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던 중 대가리를 얻어맞고 엎어져있던 백천에게 청명이 갑자기 사숙! 하며 저를 부르더니 따라오라며 손짓한뒤 먼저 뛰어가는게 아닌가.

깨진 대가리가 울렸지만 늦장을 부렸다간 저 망둥이가 또 무슨 지랄을 할까 싶어 서둘러 쫒아간 백천이 도착한곳은 처음 청명에게 대가리가 깨졌던 절벽 밑이었다.

내가 최근 뭔가 잘못한일이 있나 아니면 갑자기 과거의 백천의 만행을 떠올린 청명이 제 대가리를 진짜로 이승과 결별시키려고 그러나 생각하며 속으로 떨고있던 백천은 고개숙인 청명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백천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생각과 행동과 말이 일치하는 청명아닌가. 이렇게 뜸을 들이는걸 보면 분명 그럴만한 사정이 있을터.

'설마 어딘가 아픈걸까? 아님 말못할 고민이 있나. 지난번 사파놈한테 당한곳이 잘못되었나 이럴게 아니라 소소에게..' 생각이 빠르게 회전하며 백천이 청명에게 손을 뻗으려던 찰나,

청명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청명의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홀로 붉은 매화처럼 빛나고 있었다. 

순간 그 속에 빨려들어갈것 같은 기분이 들던 백천을 정신 차리게 한것은 청명의 한마디였다.

"사숙 나 좋아하지."

"뭐?"

"나 좋아하냐구."

반사적으로 되물은 백천이 순간 멍해졌다.

'어디서 부터 놓친거지?'

예상도 못했던 청명의 질문에 백천은 저와 청명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슨일이 있었나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다. 지극히 보통의 사숙질관계 아니었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봐도 특별한 감정이 오갈만한 사건이나 행위는 없었던 백천은 재차 정신을 붙잡으며 청명을 바라봤다.

매일같이 청명의 표정이나 기분을 살피던 백천은 한눈에 알아봤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멀쩡하던 청명의 귓볼이 그의 눈만큼이나 붉게 변했다는 것을.

"미안하다. 널 그런 대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백천은 순간 쏟아내듯 그렇게 말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백천은 일단 청명에게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유는 뭔지, 혹시나 착각할만한 무언가가 있었는지 청명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의 사질은 자신이 이해할수 없는 말을 하다가도 결국 그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청명의 붉은 귓볼을 보자 어떠한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영원과도 같은 침묵이 이어지고 청명은 씹어 삼키듯 변명을 말하며 자리를 피했다.

청명이 떠난후에도 백천은 한동안 그자리에 서있다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시고는 청명과는 반대방향으로 그곳을 벗어났다.

백천이 청명의 폐관수련을 안건 다음날이 되서였다.

청명이 다시 모두와 함께 수련을 시작한건 그로보터 십오주야가 지난 뒤였다.

그동안 백천은 때때로 청명의 붉은 눈동자와 붉은 귓볼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제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문제가 아주 많은 관계이지만 백천은 청명이 진심으로 원한다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청명이 원하는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 생각해본적이 없을 뿐 청명의 고백아닌 고백을 듣고나서 떠올려보니 정인이 된 청명과 함께있는 제 모습이 생각보다 거부감이 없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청명이 그로 인해 화산에 더 오래 붙어있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백천이 아는 청명은 타인의 감정에 매우 기민했고, 욕심이 많은 척하는 주제에 백천과 자신의 감정이 다른것을 알고도 저를 붙잡아둘만큼 이기적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백천은 청명의 감정이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있으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외로워하던 청명이 아니던가.

누구보다 어른같아 보여도 아직 어린부분이 있었고 잔정도 많은 아이이니 10살이나 많은 사숙이 가재도 까주고, 당과도 사주며 챙겨주니 순간 마음이 동한것이다.

순간의 착각으로 함께하기에는 서로 짊어진게 너무나도 많지 않은가.

백천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했다.

폐관수련에서 돌아온 청명도 이전과 다를바가 없었다.

청명도 폐관수련 중 자신의 감정이 착각임을 깨닫고 수련장에 제 대가리를 몇번 깨가며 정신을 차린게 분명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다시 누군가의 방이 있는 지붕위에서 청명과 둘이 지난 이야기를 술안주삼아 코가 삐뚤어지게 마실 수 있을것이다.

'어떻게 동룡이 놈한테 동할수 있었냐고' 웃으면서.

하지만 백천의 기대와는 다르게 반년넘게 둘이서 달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없었다.

 

"청명아. 서신이 왔으니 장문인께 들러 받아가거라"

화음현 주변 상권 점검을 다녀온 청명이 방문을 나서기전 현영이 말했다.

"또요?"

"이놈아, 또요는 무슨! 화산에서 구혼서가 오는건 너나 천이 녀석정도지 다른 이가 들었다면 속에서 천불이 났을거다."

"네네~ 받아갈게요."

손을 불량스럽게 까닥거리면서도 곧바로 장문인 방으로 향한 청명은 기척을 내고 문을 두드렸다.

"장문인, 제자 청명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들어오거라."

청명으로서는 나름 예의 있게 고하고 들어가자 곧바로 화려한 청색 비단에 싸인 구혼서가 보였다.

"그건 천이에게 온것이란다. 명이 너는 여기있다."

"사숙은 여전히 사숙만큼 화려한 구혼서만 오네요."

낄낄대며 청명이 말하자 현종은 눈을 흘기며 너한테도 멀쩡한 구혼서가 들어오는데 천이라면 당연하지 하며 차를 홀짝였다.

"저 정도면 일등 신랑감이죠."

"예끼. 장가들 맘도 없는것이. 그래도 답신은 꼬박꼬박하는게 신기하긴 하다만."

"뭐, 예의니까요."

슬쩍 웃으며 청명이 구혼서를 들고 방문을 열자, 눈앞에 백천이 서있었다.

"청명아."

"아 사숙도 구혼서?"

백천의 기척을 느끼고 있던 청명은 태연스레 백천에게 물었다.

"아니 나는 다른일로 불려왔다."

"그래? 그럼 난 먼저 간다."

별로 흥미없다는 듯 청명이 방을 나서자 백천이 뒤돌아 떠나는 청명을 바라보다 다시 현종에게 몸을 돌렸다.

"청명이가 구혼서를 신경쓰기도 하는군요"

백천이 묻자 현종이 웃으며

"청명이가 어린시절 사람이 마음을 전하는 것은 아주 용기있는 일이니 사소한 일이라 치부하지말고 진심을 다해 응해줘야한다고 누군가한테 배웠다는구나. 저 망둥이 놈이 아직까지 기억하고 행하는 것을 보니 아주 훌륭한 어른이 곁에 있었것 같구나."

알지 못하는 청명의 과거가 외롭지만은 않았을것이라며 안심하는 장문인 옆에서 백천은 자신에게 온 구혼서를 바라봤다.

"물론 직접 답신하지 않더라도 천이 너처럼 문파의 장문인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것도 예의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헌데, 이번에도 거절하는 것이냐?"

현종은 백천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예. 부탁드립니다. 저는 차기 장문인으로서 문파를 위해서 살아가고자 하니, 누군가의 곁을 지키지 못함을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다. 이해하고 말고, 화산의 장문인이 모두 혼인을 하지 않은것은 아니나 천이 너에게는 더 많은 짐이 지워질테지...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제자가 그릇이 작을 뿐입니다."

백천은 현종의 눈을 바라보며 미안해 할 필요 없음을 전하고 본래 나누고자 했던 이야기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온 청명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지 않았겠지?'

백천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해서 지난 반년 얼마나 노력했던가.

창피함과 수치스러움은 십오주야간 있던 폐관수련장에 다 쏟아버리고 왔다.

그 모든 감정들을 걷어버리고 남은것은 순수한 연심뿐이었다.

청명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은 다 망하는 거라던데 바보같긴"

자조하며 구혼서를 탁상위에 올려 놓았다.

청명이 폐관을 하며 가장 많이 생각한것은 백천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그럼에도 백천의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내것은 내것 남의 것도 내것이라며 행패를 부려대던 청명을 아는 자들이 보면 '저 놈이 폐관수련중에 주화입마에 들었구나' 할만한 사건이지만 정작 당사자는 모든 수치와 분노를 내려놓고 빠르게 상황을 납득했다.

빠른판단이야말로 청명의 장점이 아닌가.

'어쩌다가 동룡이 놈한테 마음이 동해서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의 청명은 고개를 양옆으로 빠르게 도리질했다.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청명은 이미 결심했다.

뒤늦게 깨달은 이 연심을 숨기기로.

백천이 청명의 그 고백아닌 고백을 착각이었다고 생각할만큼, 스스로마저 백천을 연모하지 않는다고 느낄만큼

그래서 언젠가 백천이 연모하는이 라며 수줍은 표정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데려오면 웃으며 놀려먹을수 있을만큼

숨기고 숨겨서 그의 곁에 있으리라.

구혼서에 답신을 쓰기 위해 먹을 갈며 청명은 생각했다.

'이 혼서를 쓴 이는 어떤 마음으로 서신을 전했을까.'

문득 구혼서의 내용에 눈길이 갔다.

여인들은 어떠한 말로 연심을 전하는지 저와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졌다.

검존시절에는 나름대로 도사답게 여인들의 구혼에 답신했던 청명이었지만 (그 모든건 적어도 여인을 울리는 파렴치한이라는 별명만은 없어야 한다는 청문의 철저한 교육 덕분이었다.)그 내용에 관심을 가진 적은 없었다.

청명을 향한 그들의 마음을 알고자 하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었다.

제가 짝사랑하는 처지가 되어서야 들여다보다니 염치없음을 느끼면서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구혼서의 문체는 정갈했지만 여인의 것치고는 힘과 박력이 느껴졌다.

보통의 구혼서와는 달리 가문을 나타내는 인장도 없고 여인의 부모나 보호자가 쓴 서명도 없었다.

적어도 집안에서 공식적인 절차를 받고 전달된 구혼서는 아니리라.

대략적인 서신의 내용은 청명의 대한 영웅담을 듣고 동경하게 되었다. 자신도 자유로운 도사님처럼 되고 싶다. 직접 만나보고 싶다. 안된다면 서신이라고 주고받고 싶다. 등으로 잘 모르는 청명이 봐도 구혼서와는 거리가 먼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어딘지 모르게 절박함이 느껴졌다. 

여인이란 본래 이런것인지. 소소와는 다른 저돌적인 면이 있는 여인같았다.

무엇보다 청명은 이 구혼서에서 연심을 느끼지 못했다.

혼서를 보낸 여인은 자신과 혼인을 하고 싶기보다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이 되려 청명의 마음을 가볍게 한것인지, 거절의 서신을 보내려던 청명의 마음이 바뀌었다.

청명은 혼인도 만남도 어렵지만, 서신만이라면 주고받을수 있다는 내용을 담아 답신을 썼다.

만약 청명에게 마음이 있는 여인이라면 이는 매우 무례한 행동이겠지만 청명은 아닐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여인이 자신에게 가짜 구혼서를 쓰게된 사정이 궁금했다.

청명이 답신을 보낸지 이레.

여인에게서 서신이 왔다. 이번에는 구혼서가 아닌 평범한 서신이었다.

첫문장은 떨리는듯 살짝 흔들렸지만 글자는 점점 차분해졌다.

여인은 초흔이라는 자로 그녀는 청명에게 답신이 오리라 예상하지 못한듯했다.

혼인을 거절했음에도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은지 청명의 답신을 기꺼워하며 서신 친구가 된것에 감사를 표했다.

청명은 지난번의 결의의 찬 문체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즐거움이 느껴지는 글을 읽어내려갔다.

서신에는 그녀가 서안에 있는 거상의 차녀라는 점

근래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는 화산파의 특히나 청명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은건 진심이라는 점.

최근 결혼 압박을 받고있는 점.

그 상대가 어릴적 부터 같이 자라다시피한 세살 연상의 상인집안 자재라는 점.

자신은 정략혼이 아닌 자유로운 연애를 하고 싶다는 점.

등이 두서없이 나열되어있었다.

예상대로 초흔의 집안에서는 그녀가 청명에게 구혼서를 넣은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아직 18세인 그녀는 청명에게 있어 손녀뻘보다도 어리기에 도저히 여인으로 생각할수는 없었지만 특유의 발랄함에 두서없는 어리숙한 글조차 재롱처럼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는 솔직하게 청명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청명의 예상대로 그녀는 청명을 연모하지는 않지만 너그러운 도사님께 청하건데 정략혼을 피할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다.

'너그러운 도사님이라...화산놈들이 보면 귀를 파내며 통곡하겠구만 낄낄'

청명은 서신 친구로서 기꺼이 도와주겠노라며 답신을 보냈다.

"근래 청명이한테 서신이 자주오는것 같지 않나요 사형?"

합격진 훈련중 조걸이 윤종을 보며 말했다.

"집중이나 하걸아."

"아니 진짜로요! 아버지 서신 받으러 가면 꼭 저놈한테도 서신이 와 있다니까요?"

"그게 뭐 어때서 그러냐 원래도 서신이 많이 오는 편이지 않느냐."

화산에서 제일 많이 일을 벌리고 또 그 일을 제일 많이 해결하는 망둥이 놈한테는 당연히 서신도 빗발친다.

윤종은 별일 아니라는듯 합격진 훈련에 몰두하려 했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다면.

"분명 여인의 서신이었습니다. 제눈으로 확실히 봤습니다. 그것도 세번연달아!"

원체 목소리가 큰 조걸이었다. 거기다 청명에게 죽을만큼 단련당한 이들이니 연무장에 거의 모든 화산사람들 귀에 조걸의 말이 들리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연무장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소란을 인식한 백천이 다가왔다.

"거기! 오늘내로 합격진을 완벽하게 익히지 않으면 청명이 놈이 대가리를 깰게 분명한데 무슨 소란이냐!"

실수한 당사자뿐만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대가리가 깨지기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백천이 소란을 진압하려 서둘러 달려왔다.

하지만 이내 백천은 뒤돌아본 사질들의 분노에 찬 표정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사숙!!!"

"청명이놈이!!!!"

"그 마구니가!!!"

"그 악귀같은놈이!!"

"그새끼가 여인이랑!!!!"

"오 원시천존이여..."

"연애를!!!!"

"아악!!나는 왜 그놈보다 약해서!!!"

다양하게 울부짖는 사형제들 비명 사이에서 백천은 청각은 정확하게 '청명이가 여인과 연애를 한다'는 말이 꽂혔다.

백천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지 않았음을 사질들을 표정을 보고 확신했다.

"진정해라! 내가 가서 확인할터이니 너희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재차 훈련에 매진하거라."

그리 말하며 백천은 장문인전으로 달려나갔다.

본디 삼대제자의 사생활을 문파의 대사형이나 되어서 일일이 신경쓸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청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는 명실상부 화산제일검이자 타문파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있는 자.

만약 일신상의 변화가 있다면 재빨리 확인해야만 한다.

'만약 혼인이라도 한다면...'

혼인? 백천은 자리에 없는 청명을 대신하여 장문인께 확인하고자 달려가던 두 다리를 멈춰세웠다.

'청명이가 혼인을 한다고?'

백천은 순간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자신이 왜 혼란스러워 하는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다. 

'일단 확인이 먼저다.'

재차 다리를 움직이며 백천은 장문인께 향했다.

"사실이다."

"청명이가 여인과 서신을 나누고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구혼서를 보낸 여인과."

"그래, 어찌된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 여인과 마음이 잘맞는지 빈번히 주고받더구나."

백천이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청명이는...그 여인과 혼인을 생각하고 있는겁니까"

"아직은 거기까지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본인이 원한다면 막을 도리가 있겠느냐?

혹시 모르지 그놈이 혼인이라도 하면 지금처럼 언제든 하늘로 날아갈듯 뛰어다니지 않고 땅에 발붙이며 살지..."

백천도 현종도 청명이 화산에서 마음놓고 지내질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화산에 많은 것을 가져다준 청명이지만 정작 청명은 화산의 한구석에서라도 쉴수 없었다.

그의 짐이 되지 않고자 화산의 모두가 노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위기때마다 청명을 찾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위기일수록 청명은 더욱 단단해졌고 화산은 그런 청명의 등을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종은 기꺼웠다. 청명이 마음둘곳이 하나라도 늘어나는 것이.

백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곁에 청명을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그를 붙잡아둘것이 필요했다.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원하던 대로 된것이다.

청명이 백천을 연모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와 혼인하게 되면 청명이 수련시간 이외에 둘이 만나는 일을 은연중 피할 일도 없어질거고, 백천도 청명이 혹시 오해를 할까 다른 사형제들처럼 대하려 선을 그을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자신이 청명을 사랑하는 척 해야하나 고민할 필요도 없고 이전과 다름없이 사숙 사질 관계로 그와 함께 할수 있다.

가장 위험한 순간에 청명 곁에 있을 수 있고, 청명보다 먼저 죽을수 있다.

백천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장문인 말이 옳습니다. 제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백천을 장문인전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제 방에 도착할때까지 제발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기를.

굳이 면경을 보지 않아도 알것 같았다. 자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제것을 빼앗긴 아이의 표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종남을 나온 그순간부터 단 한번도 어쩌면 태어나서 단 한번도 지어본적 없는 끔찍한 표정일 것이다. 

백천은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는 자신을 느꼈다.

청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백천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청명이 누구의 것도 되지 않는다는것을.

그렇다고 자신이 청명의 것이 될수도 없었다. 

반년도전에 청명을 거절하며 스스로 그 권리를 내치지 않았던가.

백천은 생각을 그만두고 싶었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이 제 것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붉은 매화꽃잎과 같은것이다.

그래.

마치 그날의 청명의 눈동자와 귓볼에 내려앉은 것과 같은 붉음.

그래야만 한다.

청명이 제게 향했던 그것은 그 붉음 만큼이나 향기로운 것이였다.

이토록 탁하고 어두운 감정이 그것과 같을리가 없다.

이 감정이 연모일리 없다.

2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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