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청명(암검)+당청 2세] 통합본.
* 날조, 망상 함유량 594033929220100% / 개연성 000000% / 2차 연성을 넘어 4830220394차 연성.
* 진짜 아놔 맛있는데 저만 먹는 소재...
* 당청은 맞는데, 그리 뚜렷하게 드러나는 커플링 요소는 아니고, 청명이랑 ????의 중심 이야기인 편...
* ????가 누구냐구요? …… 보시면 압니다…….
* 1차 정마대전이 끝나고, 전력 중 살아남은 건 당보와 청명이 뿐이였다는 if. (당보와 청명이 빼고 죽은 사람은 전부 죽었다! 입니다…….)
[당보청명(암검) + 당청 2세] 성장물 (1). (지금이라도늦지않았으니취향이아니시라면뒤로가기)
평화가 찾아왔다.
아주, 아주 많은 희생이 있었으나 중원은 간신히 평화를 되찾았다. 화산파의 매화검존 청명이 고금제일마 천마의 목을 치고 찾아온 평화였다. 그리고 그 평화에 차츰 익숙해져갈 즈음, 기쁜 소식이 알음알음 퍼져가고 있었다.
친우에서 전우로, 전우에서 정인으로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어쨌든 두 사람은 평화를 맞이한 세상에서 혼례를 올렸다. 제 사랑하는 이들의 축복을 받지는 못 하는 것이 내심 아쉬운 청명이였으나, 그래도, 그래, 그마저 잃지 않은 것이 어딘가. 그래서 청명은 더이상 제 마음을 숨기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대뜸 혼례를 올리자는 제 말에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뻑이다가,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모습 역시도 봐줄만 했으니 더더욱 만족스러웠다.
두 사람의 혼례 소식이 알음알음 퍼져나감에 따라, 그에 따라 오가는 이익에 대해 주판을 튕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두 사람의 앞길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소소하게만 치루려던 혼례가 화려해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작게 치루자는 말에 길길이 날뛰다가 제 으름장에 두손 두발 들고 말았던 녀석은 아주 입가가 귀에 걸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 뒤. 또 다른 기적적인 소식이 세상에 퍼졌다.
작디 작은 아이를 안아든 당보의 입가엔 연신 웃음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동글동글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음에도,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침상에 누워있던 청명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 좋냐."
"좋고 말고요! 이게 어디 흔한 일입니까? 게다가 보십쇼. 형님이랑 절 꼭 닮아서 동글동글 예쁜 것이,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는 따 놓은 당상입니다!"
얼씨구. 저 놈이 애 아빠가 되더니 아주 주책바가지가 된 것 같았다. 가끔 저만큼이나 과격했던 녀석이기에 내심 걱정은 했다만……. 자신이 홀몸이 아닌 것을 듣자마자 당장 침상에만 누워있어야 한다며 저를 안아들려 난리치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킨 적도 있었다 (물론 머리를 좀, 내려쳐주긴 했지.). 그 뒤로는 제 앞에서만큼은 어찌나 행동거지며 말투며 조심스러워졌는지, 본래 저놈 성격을 잘 아는 이들 마저도 사람이 바뀌었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렇게나 고대하던 날이 왔는데, 좋아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긴 하겠다만…….
"형님?"
청명의 표정이 썩 밝지 못함을 느낀 당보가 그를 조심스레 불렀다. 대답 대신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은 청명이 당보에게 등을 보이며 몸을 돌려누웠다. 하지만 당보가 어디 그 정도로 물러날 인물이던가. 아이를 작은 침상에 조심스레 눕혀둔 당보가 청명의 침상으로 다가가 툭 걸터 앉았다. 청명의 한쪽만 남은 팔을 가만히 쓸어주던 당보가 입을 연다.
"우리 형님, 경사스러운 날에 어찌 이리 기분이 나쁘실까?"
"……."
청명이 침묵했으나, 당보는 그 침묵을 참고 기다릴 줄 알았다. 그 고요함 속 망설임과 짙은 근심을 읽어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참 후, 청명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나는, 솔직히 걱정된다. 저 아이가……."
말꼬리를 흐린 청명이 아이에게 들리기라도 할까봐, 힐끔 아이 쪽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다시 달싹인 청명이 몸을 돌려 당보를 바라보았다. 매회빛 눈동자가 모종의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흔들렸다.
"…… 저 아이가, 우리를 닮을까봐."
당보 역시 그 말에 조금, 표정을 굳혔다. 전부 뱉어지진 않았지만, 담겨있는 것들은 명확하게 들려왔다.
저 아이가 우릴 닮아, 그 등에 막대한 무게를 짊어지게 될까봐.
두 사람 모두 존(尊)이라는 별호를 달기에 충분한 이들이였다. 매화검존(梅花劍尊) 청명은 검을 잡았을 때부터 매화를 피워낸 천재였고, 모두를 공포로 밀어넣었던 마교의 교주, 천마의 목을 베어버린 장본인이였다. 당보 역시도 당가 역사상 가장 완벽한 비도술을 구사하여 암존(暗尊)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이였다. 한 사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인 전력이였고, 두 사람의 합은 말힐 것도 없었다. 과연 그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아이가 평범한 아이일까? 청명의 걱정은 분명 그런 것일 터였다. 당보도 그 마음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였다. 청명의 검술과 제 암기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라면, 세상이 저 아이를 가만히 내버려둘까. 강한 힘을 가지면, 그에 따른 적 역시도 많아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당보마저도 그 불안을 입 밖으로 꺼내기엔 청명이 많이 위태로워 보였다.
"…… 아직 그런 것을 걱정하기엔 시기상조요."
"그래, 그렇지……."
납득한 듯 말하면서도 청명의 표정은 펴지질 못했다. 몸을 숙여 청명의 이마에 입술을 부빈 당보가 조곤히 속삭였다. 조금 주무시오. 청명은 묵묵히 눈을 감았다.
힐끔힐끔, 청명의 눈치를 보듯 굴러가는 눈동자가 청명과 눈이 마주치자 또 냉큼 내려갔다. 공손히 손을 모으고 고갤 숙인 모습은 분명 반성을 하는 모습이였으나, 아이의 눈동자엔 '난 잘못 없음!' 하고 쓰여있는 것이 뻔히 보였다. 허, 누가 내 새끼 아니랄까봐, 뭐 이런 것까지 닮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린 청명이 한 손으로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을 쓱쓱 쓸었다.
"당희(當喜)야, 많이 다쳤냐."
노기가 실리지 않는 목소리에 고개를 반짝 든 아이가 히히, 웃었다. 녹빛과 매화빛을 각각의 눈동자에 담은 눈매가 곱게 휘어 웃었다. 아이답게 활짝 웃는 밝은 미소가 아주 깜찍했다.
"괜찮아요! 제가 더 많이 줘팼거든요!"
물론, 이어진 말은 그렇지 못했다만은……. 그럼에도 청명은 드물게 은은한 표정이였다. 아이고, 장문 사형. 제가 사고칠 때 사형이 딱 이런 심정이였겠구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 청명이 다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했다. 맞느니 패줘야지."
물론 청명은 청문이 아니였기에 뱉는 말은 달랐다. 희미하게 애를 다 망친다며 뒷목을 잡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청명은 깔끔하게 그것을 무시했다. 아이는 얼굴에 상처를 달고도 연신 싱글벙글했다. 아이의 머리에서 청명이 손을 뗀 찰나, 방문이 퍽 거칠게 열렸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머리에 틀어올린 머리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어찌나 열 받아 보이던지, 씩씩대던 당보가 조막만한 아이의 양 볼을 답싹 감싸고는 이리저리 살폈다.
"아야야, 아버지, 아파요……."
"어떤 놈들이냐."
서슬퍼런 당보의 기세에도 아이는 주눅든 기색이 없었다. 되레 제 양 허리에 손을 척 얹더니 아까의 청명에게처럼 자랑하듯 엣헴, 하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제가 더 많이 쥐어 박아줬어요! 아버지도 칭찬해주셨다구요!"
녹색 눈동자가 순식간에 청명을 쏘아보았다. 아, 뒷말은 안 해도 됐을텐데. 매화빛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청명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뜨던 당보가 다시 아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대체 애한테 뭔 소릴 한거요. 잘 듣거라, 다음부터 시비를 거는 놈들이 있으면, 이거, 이 대침을 여기에……."
"너야말로 애한테 뭔 소리 하냐."
아이에게 대침을 건네며 목 언저리의 혈을 짚어주는 당보를 보며 기겁한 청명이 당보의 뒷통수를 퍽 후려쳤다. 악! 소리와 함께 고개가 앞으로 훅 꺾인 당보가 뒷통수를 문지르며 울상을 지었다.
"거긴 잘못 짚으면 바로 뒈지는 곳이잖아. 미쳤어?"
"아, 형님! 그치만 애 얼굴 좀 보시라구요! 우리 하나뿐인 딸내미 얼굴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놨는데 당연히! ……. 읍읍."
당보의 입을 틀어막은 청명이 당보에게 눈을 부라렸다. 금세 잠잠해지긴 했다만, 녹색 눈동자엔 불만이 가득해보였다. 진짜 애 앞에서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리는 건 이놈도 마찬가지인 듯 싶다. 이만 가서 쉬라는 청명의 말에 당희는 고개를 폭 숙였다가 후다닥 방을 나섰다. 그제야 당보를 놓아준 청명이 침상에 풀썩 앉았다. 두어번 헛기침 하던 당보도 슬금, 그의 옆에 앉는다. 잠깐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 어때?"
앞뒤 없이 대뜸 뱉어진 물음에도 당보는 그에게 굳이 뭔갈 되묻지 않았다. 저 질문의 의도를 너무 잘 알았으니까. 당보가 묵묵히 제 앞머리를 슬, 쓸어올렸다.
"…… 비도술도, 독공도, 의술도, 재능은 나쁘지 않은 것 같소."
청명이 무언가 말을 얹는 대신 당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필사적으로 피하던 당보가 결국,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처럼 뱉었다.
"사실,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오. …… 대단할 정도야.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나오."
청명의 표정이 어두웠다. 한 분야도 아니고,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니였다. 부모된 자로서 아이의 성장에 함께 기뻐해야함이 마땅하겠으나, 그 무게감을 지독하도록 잘 아는 청명으로서는 그리 좋은 이야기일 수가 없었다. 아이가 날 때부터 배움에 욕심이 많아, 원래대로라면 당가의 여자아이에겐 전해질 수 없는 독공도 전해진 참이였다. 굳이 아이의 배움길을 막고 싶지 않아했던 두 사람이, 당가를 얼마나 들들 볶아댔던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이런 결과를 보고 있자니……. 그것이 정말 옳은 일이였나 싶은 것이다. 청명이 한 손으로 얼굴을 꾹, 감쌌다.
"나도 참 못난 놈이로구나. 자식의 성장을 마냥 기뻐해줄 수가 없다니……."
당보가 묵묵히 청명의 등을 토닥이듯 쓸었다. 불안함이 일렁이는 밤이 간신히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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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보청명(암검) + 당청 2세(당희)] 성장물 (2).
그로부터 봄이 딱 세 번 지났다. 아이는 해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 열 셋 즈음이 되었던가.
두꺼운 겨울 옷에서 조금 얇아지는 봄 옷으로 갈아입을 즈음, 세 사람은 당가에서 화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세 사람은 네 계절 중 절반은 화산에서, 절반은 당가에서 보내곤 했는데, 서로의 집안인 당가도 화산도 포기할 수 없었던 청명과 당보가 내었던 묘책이였다. 두 아버지가 맞댄 머리로, 당희는 풍경이 아름다울 봄과 여름의 화산에서 피어나는 생명들을 보며 자라났고, 날이 추워져 생명이 잠에 들 시기에는 당가에서 지내곤 했다.
그리고 이제 막 생명이 꿈틀대는 화산의 봄을, 세 사람은 다시금 맞이하고 있었다.
당희가 청명의 텅 빈 옷 소매를 꾹꾹 당기며 그를 수련장으로 이끌었다. 청명의 표정은 영 못마땅했으나, 아이의 힘에 순순히 딸려가고 있었다. 벌써 밤낮 가리지 않고 청명에게 검을 쥐게 해달라며 들들 볶아대는 것도 열흘즈음 되었다. 아이도 아이다만, 기어코 열흘 내내 버티는 청명도 청명이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던가. 영 내키지 않아하면서도 청명은 끝내 걸음을 옮겼다. 어젯밤 당보와 나누던 얘기 때문이기도 했다.
목검을 꾹 쥔 당희가 잔뜩 기대에 부풀어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체 청명을 바라보았다. 에휴, 과장되게 한숨을 내쉰 청명이 당희의 뒤에서 아이의 자세부터 단단히 잡아주었다. 하체에 힘을 싣는 법부터 기본적인 내려치기까지. 아이의 배움은 역시나 빨랐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명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당희야, 넌 이미 다른 것들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검술까지 그리 익히고 싶더냐."
아이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들이 하는 건 전부 다 배우고 싶어요!"
그래서 언젠가 두 사람을 뛰어넘는 천하제일이 되고 싶다며 당돌하게 선언하는 아이의 모습에 청명이 쓰게 웃었다. 아직 그 이름이 가진 무게감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일테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는…… 아이가 그것을 몰랐으면 싶었다. 그런 생각을 흘려내는 사이, 당희가 검을 쥐고 몇 번 몸을 꿈지럭 댔다. 무언가 기억을 더듬는 것 같기도 했다. 꾸물대는 움직임을 얼핏 알아챈 청명이 작게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수련하던 것을 몇 번 지켜보고 있었던가. 자신이 피워내는 매화를 보며 예쁘다며 꺄르륵 웃어대던 웃음소리가 어찌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다. 아마 그 때문에 제게 검을 가르쳐달라 졸라댄 것이겠지. 하지만 매화라는 것이 그리 쉽사리 피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화산의 제자들이라 해도, 끝내 매화 한송이 피우지 못하는 제자들 역시 있을 정도였으니까. 청명이 고개를 살살 내저으며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를 내었다.
"아서라, 넌 아직……."
청명의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 일순 당희의 검 끝이 완벽한 호선을 그려냈다.
사락.
동시에 눈이 시리도록 피어나는 매화빛 향연에 청명의 입이 천천히 다물렸다. 당희가 피워낸 매화가 화려하게 만개할수록 청명이 표정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형님,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닙니까.
매화빛의 검기가 환상보다 지독하고, 선명하게, 청명의 시야를 채워나갔다.
당희가 검술의 재능까지 물려받았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매화였다.
그러니 괜찮을 겁니다.
청명은, 더 이상 그 광경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늦은 밤. 몇 번 뒤척이던 당희가 잠들지 못하고 몸을 슬쩍 일으켰다. 색이 다른 눈동자가 묘하게 침울해보였다. 검을 잡은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매화를 피워냈다. 자신은 그게 뛸 듯이 기뻤다. 제 검 끝에서 개화하는 매화는, 아버지에 비해 서툴렀으나 그럼에도 그 역시 매화라는 듯이 퍽 아름다웠다. 그 환상이 간신히 사그라들었을 즈음, 당연하게도 건네질 칭찬을 바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지만……. 당희는 그대로 움찔, 굳어버렸다. 청명의 매회빛 눈동자가 퍽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마치, 봐선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청명의 표정을 다시금 떠올리자 손 끝이 파르르 떨려와 당희는 제 양 팔을 감쌌다. 아버지들이 너무 보고 싶었지다. 하지만, 나이를 열 셋이나 먹고 아버지들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철 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자게 된 것도 기어코 저를 옆에 두고 자겠다며 반대하던 아버지들을 간신히 떨구고 얻어낸 제 방이 아닌가. 그래서 그 대신 무릎을 세우고 그곳에 얼굴을 푹 묻었다. 어두운 방안에 우울함만이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
시무룩하게 묻혀있던 고개가 갑자기 퍼뜩 들렸다. 바깥에서 아주 미미한 기척을 느낀 순간 당희의 눈매가 뾰족하게 날이 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침울해 보이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서늘한 살기까지 흘리고 있었다. 매화검존과 암존이 있는 이 화산에 감히 침입할 이가 누가 있겠느냐만은, 부러 기척까지 죽이며 이곳으로 접근해온 기척이 달갑게 느껴질리 없었다. 베개 밑에서 긴 침을 꺼낸 당희가 그것을 꾹 쥐었다. 곧 방문이 스르르 열리자, 당희는 지체할 것 없이 그것을 내던졌다. 날카롭게 날아간 침이 누군가의 손에 확 잡혔다.
"아이고, 자는 줄 알았더니……."
익숙한 목소리에 당희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죄송해요, 아버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아……!"
당희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급히 일어나려다 이불에 다리가 꼬여들어 침상 아래로 몸이 고꾸라졌다. 아이가 바닥에 부딪히기도 전, 날쎈 손 하나가 작은 몸을 가볍게 받아냈다. 둔탁한 통증 대신, 익숙한 체향과 체온이 한가득 감싸오는 느낌에 당희가 간신히 시선을 올렸다. 제 한쪽 눈색과 똑같은 녹빛 눈동자가 서글서글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조심해야지. 그래, 잠이 안 온다면, 아버지랑 같이 잘까?"
어둑한 방 안. 옆으로 누운 당보의 품에 당희가 안겨 연신 꼼지락 댔다. 늘 당찼던 아이의 표정에 근심이 많아보여 당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검을 잡자마자 매화, 를 피워냈다던가…….
당연한 결과였다느니, 부럽다느니, 화산의 제자들이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대서 안 들을래야 안 들을수가 없었다. 제 하나뿐인 정인께서 기분이 안 좋으신 것도 필히 그것과 관련이 있을터였다. 청명의 침묵 뿐인 걱정에, 그를 간신히 재우고 나니 당희가 걱정이 되었다. 잘 자고 있을까. 그것만 잠시 확인하려 했었다만은, 누가 그와 제 핏줄 아니랄까봐……. 하나뿐인 딸로부터 대침으로 새벽 인사를 받게 될 줄 누가 알았는가. 당보는 당희를 품에 안은 체 가만가만 그 작은 등을 토닥이듯 쓸었다. 한동안 아이의 등을 토닥이기만 하는 소리가 울렸다.
"저, 아버지……."
작게 부르는 목소리에 당보의 손길이 멈칫했다. 아이의 목소리엔 잠기운이라곤 없었다. 재우긴 글렀구나. 당보의 시선이 살짝 내려가 당희를 마주 보았다. 작은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 제가, 제가 매화를 피워낸 게, 잘못인걸까요?"
당보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다시금 아이를 꼭 안아주며 고개를 저었다. 어느 새 아이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고스란히 느끼던 당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럴리가."
"그럼, 왜……."
아버지는 기뻐보이지 않았던 걸까요. 아이는 말꼬리를 흐리며 뒷말을 삼켰다. 하지만 당보는 이미 그 말의 뜻을 알아챈 것 같았다.
"형님은, 네 아버지는……. 널 걱정하는 것 뿐이다."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걱정할 게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아버지들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자신은 누구보다 강해질 수 있을테다. 그럼 세상엔 무엇 하나 무서울 것이 없을 텐데도, 저를 걱정해야할 이유가 대체 뭐가 있는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묵묵히 입을 닫아버린 당희를 보며 당보는 쓰게 웃었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였다. 힘을 가진 자가 지는 무게감을,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입고 쓰러져가는데도, 내가 상처입고 고통에 울부짖어도, 그럼에도, 그래도,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 그 무게감을. 당보는 아이을 품에 숨기듯 감싸며 눈을 꾹 감았다. 이왕이면, 당보 역시도 아이가 그 모든 것을 짊어지지 않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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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보청명(암검) + 당청 2세(당희)] 성장물 (3).
또 몇 번의 계절이 지났다.
당희는 이젠 아이라는 호칭이 무색해질 정도로 쑥쑥 커갔고, 많은 것에서 선명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가의 암기와 독공과 의술, 화산의 매화검법. 그 재능을 피워내면 피워낼수록, 사람들은 이제 암존과 매화검존 보다 아이의 이름을 입에 더 많이 담았다.
그리고……. 청명과 당희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않은지도 몇 해가 지났다.
어찌보면 당연할 일이었다. 청명은 아이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지 않아했고, 그에 반항하듯 당희는 아득바득 많은 것을 배워나갔다. 고요하게 부딪히는 두 사람이 서로의 진심에 대해 귀를 막고, 자신의 진심에 대해 입을 다물기까지 그리 오래걸리진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당보는 착잡한 기분이었다. 다만, 청명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그저 잠자코 있을 뿐이지. 많은 이들이 이제야 약관이 넘은 아이의 이름을 드높히며 떠들어댔다. 당보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안 드는 정도가 아니다. 끔찍하게 싫었다. 이제야 간신히 아이 티를 벗은 아이에게 쏟아지는 이야기들에 얼마나 진절머리가 나던가. 청명도 아마 제 마음과 비슷할 것이었다. 아무런 짐을 짊어지게 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여느 아이처럼 제 곁에만 두고, 감싸안고만 싶은 심정을 정말로 모르겠는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린 당보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몇 달 전부터 기이한 소문이 세상에 알음알음 퍼져가고 있음을 알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마교 잔당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 했던가…….
당보의 녹빛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약 스무 해 전, 청명이 '그' 천마의 목을 베며 훗날 정마대전이라 불리는 끔찍한 전쟁의 막을 내렸다.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다. 수 천, 수 만, 아니, 아니지. 숫자를 차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특히 피해가 큰 건 화산이었다. 청명은 자신이 아끼던 이들과 아버지처럼 따르던 청문까지 잃었고, 또, 한 쪽 팔마저도 잃었다. 당보는 청명의 텅 빈 소매가 맥없이 팔랑이는 것을 볼 때마다 제 속에 쥐어 뜯기는 기분이였다. 그런데, 우두머리를 잃은 그 작자들이 다시금 스물스물 기어오르려 하는 모양이었다. 간신히 평화를 되찾은 이 땅에 다시금, 그 때의 그 악몽을 되새기려는 듯이. 당보가 입술을 짓이겨 씹었다. 만약, 만약에, 정말로……. 다시금 그 미친 놈들이 이 땅 위로 기어올라 발을 딛게 된다면, 가진 힘의 무게에 떠밀리는 것이 과연 누가 될까. 청명과 자신? 아니면,
그 아이?
다시 그 지옥에 뛰어드는 건 두렵지 않다. 몇 년이 넘게 질리도록 봐온 광경을 다시 본다고 한들, 벌벌 떨어대는 머저리 같은 짓을 하겠는가. 다만, 그래, 지금은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죽는 건 무섭지 않다. 하지만, 제 사랑하는 이들이 죽는 건 무섭다. 청명도, 당희도……. 당보는 무엇 하나 잃고 싶지 않았다. 그건, 분명 청명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는, 청명은, 다시금 무언가를 잃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가라앉은 얼굴로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당보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곧 작게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리더니 천천히 입을 떼었다.
"봄이라 한들 밤날씨는 아직 춥지 않소?"
곧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청명이 느리게 들어서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이 가볍게 부딪히며 짤그락댔다.
"간만에 한 잔 할까?"
"좋지."
촛불 하나만 일렁이는 방 안에서는 빈 잔에 술을 쪼로록 따라내는 소리만 들려왔다. 좋아하는 술자리임에도 청명의 얼굴은 아까의 당보처럼 어둡게 침잠해 있었다. 그 표정을 힐끔, 올려다 보던 당보가 채워진 잔을 살짝 들었다. 청명 역시 잔을 들자, 잔이 가볍게 쨍,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온다. 두 사람이 잔을 말끔히 비워낸 후에야 당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새 밤 외엔 얼굴 보기가 힘든 건 알고 계시오?"
"…… 그냥, 검 좀 휘두르고 싶어서."
"흐음……."
"중심 잡기가 어려워서 익숙해지느라……."
변명을 주절주절 늘어두는 청명을 보며 당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청명이 한 쪽 팔을 잃은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그 긴 시간동안 청명이 단 한 번도 수련을 빼먹지 않은 건 당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감을 잡지 못했다? 아니, 그럴리가 없었다. 청명이 더욱 수련에 매진하기 시작한 건 몇 달 전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즈음부터라는 말이였다.
"형님……."
조금 처참해진 기분으로, 당보가 청명을 불렀다. 청명이 스스로의 몸에 다시 일깨우려는 것은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감각이 아니다. 그 지옥같은 전장에서 펼쳐야했던, 그 검이다. 오로지 상대의 목숨을 끊기 위해 휘둘러야 했던 그 처절한 검이였다. 청명은 대답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대비하는 거야."
"…… 우린 이미 너무 많은 걸 잃었소."
"그리고 아직 잃지 않아야 하는 것도 남아있지."
청명의 말에 당보의 입이 다물렸다. 청명 역시 더이상 말을 얹지 않고 잔을 채웠다. 다시금 침묵이 돌았다. 청명이 당보의 잔까지 채우자 당보는 별 말 없이 그것을 들이켰다. 조용히 잔을 내려둔 당보의 표정엔 망설임이 엿보였다.
"당희는……."
아이의 이름에 잔을 기울이는 청명의 손이 멈췄다. 뒷말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청명은 그 뒷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로, 만에 하나, 그 마교가 돌아온다면, 당희는? 술로 바짝 타들어가는 입술을 축인 청명이 고개를 저었다. 청명의 반응에 당보가 빈 술잔을 만지작 거렸다.
"……그 아인 납득하지 못할거요."
"납득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야."
단호한 음성에 당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청명은 그런 당보를 쳐다보지도 않은 체 잔을 입에 댄 체 날이 선 목소리를 흘렸다.
"아니면, 너도 그 아이가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냐?"
"형님,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소."
당보가 얼굴을 구기며 청명을 바라보았다. 하여간 이 작자는 예나 지금이나……. 청명 역시도 알터였다. 당보가 그런 의미로 꺼낸 말이 아님을. 제대로 된 말이 오가지도 않고 당희의 의견을 묵살한 체 청명이 제멋대로 구는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딸아이와 청명의 사이가 더 멀어질 것을 걱정한 것이겠지. 청명도 알고 있었으나 당희에게 설명한다 한들 그 아이가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니, 설명하지 않는다. 참 주변인 속 터지게 만드는 사고방식이였다. 둘 사이엔 더이상 이렇다 할 대화는 더 오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감처럼, 물 밑에서부터 서서히 기어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
청명은 익숙한 전장의 한 가운데에 서있었다. 널려있는 시체들, 토악질이 날 것 같은 선명한 피비릿내. 청명의 시선이 널린 시체들을 천천히 훑어나갔다. 그곳에는 장문 사형도 있었고, 제 사제들과 사질들도 있었다. 그리고,
당보와 당희도 있었다.
청명이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춥지도 않은 날씨에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렸다. 잠시 나갔다 들어온 당보가 놀라 청명의 어깨를 덥석 잡을 때까지, 청명은 아무것도 못한 체 그저 떨고만 있었다.
날카로운 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검이 휘둘러지면, 목덜미를 반쯤 덮는 검은 머리카락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가쁜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후에야 검을 바닥에 내팽게친 당희가 흙바닥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착잡함에 무작정 검을 휘둘렀는데도 속에 응어리진 무언가는 도저히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응어리지기 시작한 그것은, 지금에 와서도 커졌으면 커졌지 도저히 줄어들지 않았다. 당희는 그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아버지, 그러니까 청명과 제대로 마주보고 웃어본 게 언제인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눈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예전엔 분명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속에서 무언가 울렁거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신은 두 아버지가 모두 좋았다, 진심으로. 그리고 자랑스러웠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제 어깨가 절로 올라가고 씰룩씰룩 웃음이 났다. 하지만 두 아버지는 아닌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제 이름을 불리울 때마다 묘하게 가라앉던 청명의 표정이 생각나자 당희는 눈을 질끈 감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청명은, 자신이 못마땅한 걸까? 자신이 매화를 피워내기 시작할 즈음부터 시작된 갈등이였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이전부터 그런 기색이 있었다. 검을 더 가르쳐달라며 졸졸 따라다니던 짓도 이젠 그만 두었다. 아버지는 진심으로 자신을 가르치지 않을테다. 의문을 가져도 답이 나올 구석은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당희가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 납검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였다. 급하게 뛰어가는 누군가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간발의 차로 부딪히는 것은 면했으나, 당희를 알아본 이가 그녀에게 다급하게 사과를 건넸다. 자세히 보니 당가의 식솔 중 하나였다. 당가의 식솔이 화산엔 어쩐일이지? 그것도 꽤 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그런데, 어쩐 일로……."
"그게, 아! 장, 장로님!"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는 청명과 당보를 바라보며 그 자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두 사람에게까지 뛰어갈 생각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마, 마교, 마교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곧 이어진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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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보청명(암검) + 당청 2세(당희)] 성장물 (4).
쾅, 하는 거친 소음과 함께 방문이 열리고 청명이 성큼성큼 걸음을 들이밀었다. 그 뒤로 당보와 당희가 따라붙었다.
"아버지!"
씹어뱉듯 뱉는 호칭에도 청명은 당희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모습에 당희는 화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저 시선 끝에 자신이 머무르는 법이 없었다. 대체 왜! 침상에 걸터앉은 청명의 앞에 선 당희가 청명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주고 받던 적 없는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갔다.
"이번엔 저도 가게 해주세요."
"안 된다고 얘기했을텐데."
"대체 왜요!"
청명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슬슬 언성을 높히자 당보 역시도 곤란한 기색을 내비추고 있었다. 벌써 마교의 잔당들과 전투를 이어나간지도 몇 주가 흘렀다. 당연하지만 당보도 청명도, 당희를 그 전장으로 데려가는 법이 없었다. 그때마다 당희는 화를 냈지만, 결국 한 걸음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당희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당보의 시선이 청명의 옷 아래 허옇게 감긴 붕대로 향했다. 아이도 본거다, 당보와 청명의 몸에 늘어가는 상처들을. 더 이상은 그저 두고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일터였다. 우두머리를 잃은 마교놈들은 더 처절하게 몸부림쳤다. 분명 그놈들에 대해서는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그들의 몸부림에는 당보 역시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더 견딜 수 없는 건……. 옛날과는 달리 자주 다쳐오기 시작하는 두 사람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자꾸만 당희에게 닿으려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요? 왜 저는 안 되는데요? 저도 강해요! 싸울 수 있다고요!"
"이게 약하고 강하고의 문제더냐."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도 당희는 물러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얘기를 제대로 들어야 겠다는 듯이. 하지만 몇 년간 깊어진 골이 그리 순식간에 메워질 깊이던가. 청명은 대답 대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당희가 짧게 물기 어린 숨을 뱉었다. 주먹이 꾹 말려들고, 이가 바드득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청명은 더이상 당희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냥……."
"……."
"그냥 제가 못 미덥다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아버지는 옛날부터 그랬잖아요."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내뱉은 당희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아이의 예의없는 행동에도 두 사람은 당희를 잡지 못했다. 정적만이 감돌기 시작하는 공간을 보며 당보가 작게 한숨 지었다.
"형님."
"아무 말도, 하지마. 들어줄 기분 아니니까."
"형님도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형님도 결국 그 아이가 걱정되는 거잖소."
청명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체 뱉어진 말에 청명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당연한 말이다. 청명은, 누구보다 그 아이를 걱정하고 있다. 모든 것을 잃고 당보와 단 둘만 남은 세상에 찾아온 제 하나뿐인 기적이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제 경고를 무시한 당보에게 화를 내는 대신, 손에 얼굴을 묻은 체 한숨처럼 내뱉었다.
"…… 당희한테 가봐. 난 괜찮다."
"…… 푹 쉬십쇼. 당희는 제가 잘 달래볼테니."
당보 역시도 무어라 더 말을 얹지 않았다. 그 대신 청명을 한 번 꼭 안아주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청명은 그제서야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그 아이를 납득시키고, 제 울타리 안에서 지킬 수 있는 걸까.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아 그저 입을 다물어 버리고 있지만, 청명 역시도 그것이 최선이 아님을 알고 있다.
"…… 장문 사형, 너무 어렵습니다."
제가, 잘못된 겁니까? 단지 그 아이가 걱정되어 지키고 싶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질끈 감은 시선 안으로, 제 사형이 설핏 웃는 모습이 비쳤다. 그저 안타깝다는 듯, 그럼에도 저를 믿는다는 듯이.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허나, 제대로 된 말로 전하지 하지 않으면 전해질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청명아.
얼핏 그의 인자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청명은 다시금 느리게 눈을 떴다. 아른거리던 모습이 흐드러지듯 사라진다. 제대로 된 말, 이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청명에겐 너무나 어려운 것이였다. 하지만, 당희가 지었던 표정이, 속삭이듯 뱉던 힘없는 목소리가, 말이, 전부 청명의 속을 아프게 파고 들었다. 청명은 아이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지, 상처주고 싶었던 게 아니였다. 옷을 추스린 청명이 천천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한 번,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청명이 그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사색이 된 당보가 뛰어들어왔다.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청명의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형님! 당희가 안 보입니다!"
청명이 숨을 삼켰다. 당보의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당희의 검이랑 암기도, 보이지 않소……."
***
청명과 당보는 온 화산을 헤집으며 뛰어다녔다. 상처가 욱씬거렸으나 청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가는데도, 청명은 걸음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형님……! 형님!"
화산을 다 헤집다 못해 산 밑으로 향하려는 청명의 몸을 당보가 꽉 붙들었다. 힘 빠진 손이 그를 밀어내려 애썼으나 당보는 되레 청명을 더 단단히 끌어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청명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이거 놔, 이 새끼야!"
어느 새 청명의 옆구리가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상처가 터진 것 같았다. 핏방울이 옷을 물들이다 못해 바닥으로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당보가 이를 바득 갈았다.
"지금 형님 상태나 보고 말하시오. 그 몸으로 누굴 찾으러 간다는 거요."
"애부터 찾아야 할 거 아냐!"
청명의 고함에도 당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곧 청명의 몸부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의 가쁜 숨소리만 색색 들려왔다. 그 숨소리에 차츰 물기가 어리는 것을 들으며 당보가 눈을 꾹, 감았다.
"…… 당보야, 그 아이마저 잘못되면 안 돼, 그건, 그건 안 돼……."
흐느끼듯 뱉는 목소리에 당보가 청명을 놓아주었다. 단단한 손이 청명의 양 어깨를 꾹 붙들었다. 당보의 표정엔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당보 역시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것 같았다.
"형님 몸부터 돌보시오. 당희는 내가 꼭 찾아 무사히 데려오겠다 약조할테니."
곧 당보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당희 뿐만이 아니오, 형님."
당보의 말에 청명은, 더이상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눈을 질끈 감은 청명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안도한 당보가 청명의 몸을 훌쩍 안아들어 급하게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 아버지?"
익숙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빠르게 돌아간 시선에 눈을 동그랗게 뜬 체 두 사람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당희가 들어왔다. 조금 흙투성이가 됐으나 다친 곳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허둥대며 당보의 품에서 벗어난 청명이 당희의 어깨를 붙들었다.
"형, 형님!"
놀란 당보가 청명을 불렀으나, 청명은 당희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피냄새도 나지 않았고, 그녀의 안색에도 문제가 없었다. 안도감이 물 밀듯 밀려오자 되레 울컥 치미는 화에 청명이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어딜 다녀온 거야! 내가 얼마나……!"
청명이 문득 입을 다물었다. 당희는, 아까 저에게 화를 낸 것도 잊었다는 듯이, 그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살피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설마 그 새 마교놈들이……!"
"당희야……."
청명의 부름에 당희가 말을 멈췄다. 청명이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다. 당보의 말과 청문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나는, 이 아이를 잃을까봐 무서웠다. 나는, 이 아이를 지키고 싶다. 한쪽만 남은 팔이 당희을 와락 끌어안았다.
"네가, 못 미더운 게 아니다."
"……."
"내게 남은 건, 이제 당보와 너 뿐이라서 무서웠다. 네가 강하다는 이유로, 원치도 않은 지옥에 떠밀릴까봐. 그걸, 내가 막아줄 수 없을까봐. 그래서! 그래서……. 네 앞길이 피로 물들까봐, 가시밭길 뿐일까봐……. 그러다 결국, 너마저……. 너마저 잃을까봐 무서웠다……."
서투르게 와르르 쏟아지는 말에, 당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팔로, 목소리로, 저를 한껏 감싸안은 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가는 청명의 모습에, 당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네게 상처를 준 것도, 미안하다……."
작게 내뱉어진 사과에, 청명의 양 어깨를 살살 쥔 당희가 그를 조심스레 떼어놓으며 청명을 마주 보았다. 당희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해보였다. 청명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저 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영영 그리 남을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 새 제 아이가 훌쩍 커버린 것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절 걱정하시는 걸 알면서도, 그런 말 해서 죄송해요……."
청명이 입을 달싹였으나, 당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버지, 제가 상처 입을까 두려워 소중한 사람들 뒤에 숨어 살라고 하진 마세요.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걸 두고 볼 수 없는 건, 아버지 뿐만이 아닙니다. 제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입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데! 제게 그것을 지켜보며 그저 손 놓고 보호만 받으라고 말하지 마세요. 정말로 저를 믿으신다면, 아버지들이 저를 이끌어 주세요."
이내 당희가 씩, 웃음 지었다. 청명이 간간히 짖궂게 웃던 그 표정과 똑 닮아있었다.
"제가 누구 딸인지 잊지 않으셨잖아요."
청명은 짧게 숨을 뱉었다. 그래, 그랬지. 당희는 저와 당보의 하나뿐인 아이였다. 부모가 믿어줘야 하는, 믿어줄 수 있어야 하는. 그저 제 욕심으로, 자신이 두렵다는 이유로 감추려고 하기만 하는 것은, 결국 이 아이를 못 믿는다는 말 밖에 더 되겠는가. 청명이 살짝 시선을 떨궜다. 그 몇 년간, 너무 움츠러 있었다. 자신답지 않게 말이다. 정말로 지키고자 한다면 숨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데도. 청명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퍽 개운하기까지한 표정으로 웃었다. 몇 년 만에 마주 본 체로 터트린 웃음이었다.
"각오는 되어있지? 난, 내 딸이라고 봐주는 법 없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으니, 전력으로 이끌어 주세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당보가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에게 다가선 당보의 손이 청명의 어깨를 꾹 붙들었다.
"형님, 다 좋습니다만, 상처 치료가 먼저입니다."
청명이 무어라 입을 열려했으나, 당보와 당희의 매서운 눈빛에 슬 입을 다물었다. 아니, 치료 받겠다고 말하려 한건데. 억울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희가 청명의 손을 꼭 쥐었다.
"가요, 아버지."
청명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세 사람이 참으로 오랜만에 서로의 곁을 내준 체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훗날, 또 다른 지존의 별호를 부여받게 될 아이의 첫 걸음이 간신히 뻗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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