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청명/암존검존] 불안






   * TW : 부상 묘사, 유혈

   *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검존과 그 옆을 홀로 지키는 암존.















   그 날은, 그러니까, 아마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마교 새끼들과 부딪히며 전쟁을 이어 나간지가 얼마인지, 세는 것조차 이젠 의미가 없다.

   얼굴에 튀어 굳어가기 시작한 피를 소매로 벅벅 문지르던 당보가 쯧, 혀를 찼다. 하여간, 그 미친 놈들, 곱게 가주는 법이 없다. 잔뜩 불쾌해진 기분에 당보는 제 하나뿐인 형님이 보고 싶어졌다. 형님이랑 술이라도 한잔 걸칠까. 며칠 전에 형님을 드리겠다며 꿍쳐둔 분주 몇 병이 생각났다. 금세 빙글, 웃음기를 띄운 당보가 후다닥 제 천막으로 향했다.

   당보의 허리 춤엔 세네병의 분주가 걸린 체 달랑대고 있었다. 걸음조차 사뿐하고 가벼워 병끼리 붙어있는데도 쨍쨍거리는 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청명이 기거하는 곳으로 향하던 당보의 걸음이 느려졌다. 막 돌아온 모양인지, 다른 몇 명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청명이 보였다. 청명의 꼴도 당보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그 뒤를 따르는 놈들은……. 당보가 소매로 입가를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불순한 눈빛을 알아챈 청명이 당보를 흘기자 당보가 냉큼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두 사람의 기에 잔뜩 눌려 주춤대던 이들은 청명의 손짓에 인사만 남기고 후다닥 흩어졌다.

   "이번엔 몇 가서 몇 살려온 거요?"

   "나 포함 열 다섯 가서, 열 셋."

   청명이 조금 표정을 굳혔다. 당보가 미약하게 한숨을 뱉는다. 전쟁에서야 몇이 죽어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도, 그는 간간히 그런 표정을 짓곤 했다. 뭐, 이럴 때 그의 기분을 풀어주는 건 제 주특기가 아닌가. 청명에게 다가서며 술을 꺼내기 위해 제 장포 자락을 걷어내던 당보의 손길이 멈칫했다. 뭔가, 청명에게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뭘까. 당보가 청명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그런 그의 눈길을 눈치챈 청명이 얼굴을 구겼다.

   "사람을 뭐 그리 훑어봐. 눈 안 깔아?"

   "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도사 형님이구려."

   욕이냐? 하고 낮게 되묻는 청명의 말에도 당보는 금세 빙긋 웃으며 청명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하하! 제가 며칠 전에 꿍쳐둔 분주 몇 병을 가져왔습니다만? 하자 청명의 미간에 잡혀있던 주름이 슬슬 펴졌다. 휴, 살았다. 먼저 거처로 들어서는 청명을 따라 당보 역시도 느긋한 걸음을 옮겼다.

   벌어진 천막 입구를 잘 갈무리한 당보가 술 한 병을 들며 뒤를 돌았다. 청명이 그에게 등을 보인 체 우뚝 서있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이 그의 뇌리에 꽂혀들었다. 그것의 원인을 알 길이 없어서, 그는 병을 든 체 잠시 멍하게 섰다.

   "… 형님?"

   당보의 작은 부름에 청명의 고개가 이쪽으로 조금 돌려졌다. 머리카락에 가려진 청명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살짝 달싹인다.

   "당보야, 아, 무 한테, 도……. 알리지, 마, 라……."

   말꼬리가 흐려지며 서있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당보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쨍그랑! 들고 있던 술병이 바닥에 떨어져 깨졌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고 청명의 몸을 감싸 받아냈다. 곧 당보가 그와 함께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형, 형님! 도사 형님!"

   당혹감 어린 표정의 당보가 급히 청명을 살폈다. 그의 검은 장포를 벗겨내던 당보의 손길이 굳듯이 멈췄다. 옆구리에 크게 난 상처. 그곳에서 아직도 피가 울컥울컥 새어나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당보는 지체없이 옆구리에 찬 술병을 하나 꺼내들어 술병의 마개를 이로 뜯어내고는 그의 상처 위로 그것을 들이부었다. 한 병을 더 꺼내서는 제 손 위로 들이붓던 당보가 곧 청명의 상처를 꾹 눌러 지혈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고통스러운 듯 청명이 얼굴을 구기며 힘겹게 허덕였다. 덜덜 손이 떨리는데도, 당보의 손길은 본능처럼 움직였다.

   "형님, 정신 차리시오……. 정신 차리셔야 하오……."

   미친 사람처럼 똑같은 말을 중얼중얼 대면서도 당보의 손길에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상처를 꿰매고, 약을 뿌리고, 붕대를 꽉 감았다. 치료를 마치고 그를 조심히 안아올려 침상에 눕힌 뒤, 이불까지 꼭꼭 덮어준 후에야……. 당보는 그제서야,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침상에 털썩, 걸터 앉았다. 한바탕 폭풍이 저를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이 진이 쭉 빠졌다. 청명의 숨소리는 아까보단 나았으나, 당보의 귀에는 여전히 위태롭게만 들렸다. 떨리는 손을 꽉 맞잡으며 고개를 묻은 당보가 눈을 감았다. 고비를 넘기고 나니 의문이 들었다. 형님은 절대 맥없이 당해줄 위인이 아니였다. 그렇다면……. 아까 청명과 함께 돌아오던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천천히 눈을 뜨며 드러난 녹빛 눈동자가 살기로 번들거렸다.



   천막의 천을 거칠게 걷어낸 당보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스스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무작정 걸음을 옮겨갔다. 그 기세에 주변에 있던 이들조차 주춤주춤 물러난다. 그리고 대단한 우연이게도, 청명과 함께 돌아왔던 이들 중 하나의 얼굴이 눈에 띄였다. 당보가 걸음을 늦추며 주먹을 움켜쥐려던 순간이었다.

   "저……."

   머뭇이며 들려온 음성에 당보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느 새 거칠어진 숨을 색색 내뱉으며, 조금 멍한 얼굴로 앞의 상대를 바라본다. 조금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리고 죄책감이 서린 얼굴로 더듬더듬 입을 여는 그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검존께선, 괜찮으신가요? 아까, 저를 도우시다가 다치신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가라앉는 분노에 현기증이 치밀었다. 그것을 추스르느라 당보는 잠시 말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그래……. 괜찮으시다."

   나즈막하게 뱉어진 당보의 말에 금세 그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걱정되었다는 둥, 그래도 다행이라는 둥, 말을 늘어놓던 그가 조심스레 병 하나를 내밀었다. 청명이 좋아하는 술이였다.

   "괜찮으시다면……."

   뒷말은 이어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해달라는 뜻이겠지. 느리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자, 그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하곤 후다닥 멀어졌다. 병 목을 꾹 움켜쥐던 당보가, 맥없이 손을 떨궜다.

   무엇을, 나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형님을 저리 만든 저 자의 목이라도 비틀어버릴 셈이였나?

   헛웃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치민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머저리처럼 군 것이 우스웠다. 형님이 알면 죽도록 얻어맞고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빈 손에 얼굴을 묻고 한참 숨죽이며 끅끅 웃어대던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

   분노가 사라지니, 그 안에 감춰둔 감정이 발끝을 스물스물 기어올랐다. 처음으로, 누군가 크게 다치는 것이 무서웠다. 불안했다. 간간히 자잘한 부상을 입고, 피를 흘리던 모습을 봤음에도, 당보는 저리 쓰러진 제 형님을 시야 안에 담고 나서야, 그 역시도 피를 흘리고, 다치고, 또, 죽을 수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당보는 그것이 덜컥 두려웠다. 걸음을 돌려 급히 내달렸다. 똑같은 길을 되짚으며 달리는데도, 그 뒤로 따라붙는 감정이 달랐다.



   천막 앞에서 숨을 고르던 당보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형님…….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도 답은 없었다. 이리 부르면 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색색이는 청명의 숨소리는 아까보다 더욱 안정적이였다. 그런데도 당보의 표정은 불안해보였다. 의자를 조용히 끌어와 침상 옆에 자릴 잡은 당보가 청명의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쿵쿵,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손 안으로 타고 전해졌다. 당보가 조용히 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젠 어디도 안 갈테니, 얼른 일어나셔야 하오."

   방금 멋대로 나가버렸던 것을 사죄하듯, 조곤조곤 말을 뱉던 당보가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으로 청명의 손을 꾹, 쥐었다.



   깜빡. 당보가 침상에 엎드린 체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다 벌떡, 상체를 일으킨다. 언제, 언제 잠들었지? 당보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뜬 눈으로 지새어도 모자랄 판에, 잠에 들다니. 당보가 잔뜩 겁 먹은 얼굴로 침상을 살폈다. 침상이 비어있었다. 짧게 숨을 들이킨 그가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그의 등 뒤에서 손 하나가 불쑥 뻗어져 당보의 양눈을 가리며 제게 툭 기대도록 당겼다.

   "당보야, 난 괜찮으니 더 자라."

   "…… 형님."

   "그래, 나 여깄다."

   "도사 형님……."

   "그래."

   불안으로 점철된 목소리에 일일히 답해오는 목소리가 안정적이여서, 온 몸의 긴장이 후두둑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자신의 눈을 가린 손을 꾹 움켜쥐던 당보가, 결국 짧게 웃었다.

   "그럼, 조금만, 조금만……. 더 자다가 일어나겠습니다. 옆에 계셔야 합니다……."

   "오냐."

   불안을 간신히 달래던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