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백천청명] 착각 2

청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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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과 초흔이 서신을 주고받은지도 석달이 지났다.

그사이 서신의 존재를 알게된 사형들이 청명의 대가리를 깨버리겠다는둥 불쌍한 여인을 구제해줘야한다는둥 지껄이며 달려들길래 골고루 대가리를 깨주었던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대체로 큰일 없이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사형들 대가리를 깨는 와중에 그 광경을 다 지켜본 백천이 적당히 깨라며 눈을 흘기고 가는걸 보고 역시 자신이 착각했음을 다시금 확인한 듯 하여 심장이 아릿하긴 했지만.

백, 청자배는 오늘도 청명의 멧돼지 육성수련을 견디며 신음하고 있었다.

운검의 심부름을 다녀온 곽회가 서신한장을 펄럭이며 뛰어 왔다.

"청명아! 초흔소저한테 서신왔다!"

"아니 이름은 또 언제 훔쳐본거야!!!"

사형제란 놈들이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좋아진 시력으로 남의 서신이나 훔쳐보는데 쓰고 말이야.

청명은 곽회한테서 서신을 빼앗아 곧바로 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수련하고 있어! 적당히 하면 죽을줄 알어."

"저 망둥이가 푹 빠졌나봐…"

수련도 안지켜보고 말이야.

웅성되는 사형제들 사이에서 백천은 제 방으로 향하는 청명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청명은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서신은 전과 비교할수 없을만큼 장난스러운 인삿말로 시작했다.

장난기 넘치는 초흔의 서신을 웃으면서 읽던 청명은 이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정인의 증표라…"

청명과 초흔이 예상했던대로 빈번히 주고받은 서신의 대한 소문이 그녀의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상대가 '그' 화산검협이라는 사실은 안 부모는 대경실색했다.

명문정파의 제일기재란 분명 탐나는 사윗감이지만 자식이 그저 안온하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소꿉친구와 약혼까지 시키려했던 부모입장에서는 강호의 은원이 가득한 무인과의 인연은 피할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것이였다.

하지만 딸이 먼저 구혼서를 넣은 이상 제쪽에서 먼저 청명을 거절 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의 화산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초흔의 노림수이다.

이렇게 순조롭게 약혼 문제가 해결되나 싶었던 찰나, 이번에는 초흔의 약혼자 후보였던 상인 아들이 나섰다.

화산같은 대문파에서 혼인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그 흔한 패물하나 전하지 않는다는게 무슨의미겠나며 제대로된 정인이라면의 그에 맞는 증표라도 보내왔을것이라고 주장한것이다.

초흔의 서신에는 자신이 청명인척 뭐라도 준비해보겠다고 했지만 청명이 생각하기에 들킬경우 앞선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수 있어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답했다. 

돈은 넘치도록 있었고 청명은 초흔이 좋았다. 

정인이 될수는 없지만 그녀와 서신을 주고받는 것은 즐거웠고 그 순간만은 시도때도 없이 떠오르는 백천을 잊을수 있었다.

"근데 정인한테는 뭘 줘야 하는거지…?"

청명은 정말 몰랐다.

도사로서 자신이 연애를 해봤을리 없었고 당연지사 남의 연애사도 관심이 없었기에 정인끼리 뭘주고받아야 의미가 있는지 몰랐다.

"내일 사형들한테 물어봐야하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청명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눈을 뒤집어 까며 달려드는데 정인의 증표 어쩌구 하며 물어보면 정말로 눈에서 피눈물을 쏟으며 달려들것 같았다.

그냥 화음현에 내려가 적당한 상인한테 물어봐야지 싶었던 찰나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잘 알고있지만 근래 방문이 뜸하던 자의 것이었다.

"사숙?"

"청명아 잠시 들어가도 되겠느냐."

백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가듯 뛰어가 문을 연 청명은 자신의 행동에 놀라 당황하며 동그란 눈으로 백천을 올려다 봤다.

"무..슨 일이야 동룡아. 내가 하라던건 다한거야? 안끝난거면 곱게 못죽을줄 알아."

청명이 애써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 끝냈다 망둥이 놈아."

"할만 했나보네 숨하나 안꺼떡이고 내가 동룡이를 너무 얕봤어."

내일부터는 바위하나 추가라며 낄낄대는 청명을 지긋이 바라보던 백천이 말했다.

"그…요즘 별다른 일은 없느냐?"

"갑자기 무슨?"

"아니 요근래 네가 너무 조용해서 혹시 무슨걱정거리라도 있나하고."

"와. 사숙 지금 나한테 사고 안치고 다니고 뭐하냐고 한거야?"

"그 말이 아니잖아! 하여간 요 망둥이놈 걱정을 해줘도."

"걱정같은거 안해줘도 딱히 별일은…아! 사숙 빨랑 들어와봐!"

"뭔데 이놈아!"

청명은 백천의 팔을 끌어당겨 방안에 끌고 들어왔다.

백천이 청명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하는 사이 청명은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신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정인 사이에는 보통 뭘 줘야해?"

백천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지만 청명이 서신을 치우고 뒤도는 사이 원래표정으로 돌아갔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 받을 이에게 물으면 되는것을. 그러고 보니 정인생겼다면서. 어울리지 않게 혼자 고민하지말고 직접 물어보던가. 설마 네 정인인데 뭘 받고 싶은지 묻지도 못하느냐"

백천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지만 목소리는 어딘가 서늘했다.

"그냥 보통은 어떤가해서. 부탁받은 입장에서 묻기도 좀 그렇고 사숙이 그래도 진가 사람이라 이런건 잘알지 않을까해서. 난... 보통을 모르잖아."

씁쓸하게 웃는 청명을 보고 백천은 순간 아차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청명을 탓하는 어투로 말을 한것이다.

백천을 청명은 이해했어야 했다. 청명은 실패하고 싶지 않았던것이다.

자신의 착각으로 백천에게 섣부른 연정을 내비쳤던 것처럼 이번에도 제 착각과 고집으로 상대방을 당황시키고 싶지 않았던거겠지. 

그리고 그 실패를 경험하게 한 백천에게 조언을 얻고자 할 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려는 것이었다.

백천은 입술을 깨물었다.

청명을 연모하지 않으면서 지독한 소유욕을 겉으로 드러내서는 안됐다.

그가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데 방해해서는 안된다.

청명을 위해서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자 결심한 백천은 입을열었다가 이내 다시 닫았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실은 나도 잘은 모른다…보통은 비녀나, 장신구 같은거겠지만 잘 모르겠으면 화음현에 내려가 같이 고르는것은 어떠냐. 원한다면 내가 같이…"

"바로 그거야 사숙!"

백천의 '내가 같이…'란 말은 벌떡일어난 청명의 발구름소리와 소리치듯 외치는 청명의 말에 막혀 들리지 않았다.

"고마워 사숙! 역시 같이 다니는게 효과가 빠르겠어. 동룡이가 도움 될때가 다 있네!"

당장 서신을 보내야겠다며 백천을 쫓아내듯 내보낸 청명이 방문을 닫자 백천은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청명은 백천을 방에서 쫓아내고서 닫힌 문에 기대어 주저 앉았다.

백천의 걱정어린 표정은 진심이었다. 

아마 은연중 저를 피하는 것을 느꼈으리라. 

그래도 자신을 향한 청명의 마음을 받아줄수는 없어서 지금껏 다가오지 못하다가 청명에게 정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자 안심했을것이다.

사고치지 않아 걱정이 된다는 말도안되는 핑계를 대고 찾아와 청명의 얼굴모르는 정인을 위해 조언까지 해주는 백천이다.

그 상냥함이 이렇게 밉게 느껴질수 있을줄이야.

제가 물어봐놓고선 백천에 대한 서운함이 삐죽 튀어나와 심장을 찔러댔다.

백천의 방문에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물어본 것인데 백천은 최선을 다해 고민해주었다.

고민끝에 백천이 정인과 같이 화음현에 가라는 말을 하자 참을 수 없는 서러움이 몰려들어와 괜찮은 생각이라며 서신을 보낸다고 호들갑을 떨어 서둘러 백천을 내보냈다.

백천은 청명을 연모하지 않는다.

어쩔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청명의 서신은 그로부터 한시진뒤 화산을 떠났다.

백천은 황망한 표정으로 서신이 산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저 서신이 청명의 정인에게 도착하면 얼마안가 둘은 함께 화음현을 찾을것이다.

청명은 서툴지만 나름 심미안이 있기에 그의 정인에게 어울리는 비녀나 장신구를 금방 찾아 정인의 의사를 묻겠지.

비녀라면 청명이 직접 정인의 머리에 꽂아줄수도 있겠다.

제 머리는 대충 올려묶지만 재주좋은 놈이니까 여인의 머리도 금방 틀어올릴지도 모르지.

방금전 보통의 정인이 뭘주고받냐는 청명의 질문에 가장 잘어울리는 대답은 가락지일 것이다.

차마 가락지라 대답하지 못한것이 다행일까.

백천의 말을 듣고 청명이 가락지를 골라 정인에게 주고 혹여나 그 가락지가 둘의 혼인에 쓰인다면 백천은 견딜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저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지만 모든게 늦어버린 이상 백천은 서신을 찢지도 제 마음을 인정하지도 못한채 우두커니 서있기만 했다.

초흔이 화음현을 찾아온 날.

청명은 장문인께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녀를 만나러갔다.

"도장은 소문으로 듣던것 보다는 덜 험악해 보이시네요."

"너도 아해같은 문체에 비해서는 여인태가 나네."

"어머, 도장이랑 크게 차이나는 나이도 아닌걸요. 서신에서도 느꼈지만 도장은 절 참 아이처럼 여기시는것 같아요."

초흔이 입을가리며 기분이 상한척 고개를 돌리자 청명이 피식 웃었다.

청명과 초흔이 실제로 만나는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둘은 서신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서신이 두번 왕복한 사이에 청명은 어투는 평소와 같아졌고 초흔도 청명을 진짜 친우처럼 대하며 서신에 집안이나 혼인에 관한 여러가지 투정을 잔뜩 쏟아내곤 했다.

방금같은 농은 서신에서도 자주 주고 받던 농으로 초흔이 서안에 떠도는 화산검협에 대한 다양한 소문을 청명에게 전하며 진위여부를 확인하면 다소 과장되긴 했어도 대부분이 다르지 않아 청명은 긍정했다.

그럴때마다 초흔은 청명이 분명 산적과 같은 사내일것이라며 즐겁게 놀려댔다.

초흔의 장난에 청명은 서신으로 산적같은 사내에게 시집올뻔 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답하자, 초흔은 혼인날 저녁이 되기도 전에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질거라며 당차게 이야기하곤 했다.

서신으로 이어진 인연이지만 지난 석달간 서로가 서로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있는 두사람은 얼굴을 마주해도 분위기가 어색해지지도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도 않았다.

되려 청명은 사형제와는 다른 신뢰가 두사람 사이에 있다고 느꼈다.

청명에게 있어 이는 매우 낮선 느낌이었지만 싫은 기분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백천에게서 눈을 돌리고 싶어서 그녀를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지만 지금의 청명은 자신의 작은 서신 친우가 진심으로 자유롭고 행복했으면 했다.

자신이 도와 그녀가 스스로의 사랑을 찾아 결실을 이룬다면 백천에게 평생 제 마음을 전하지 못하더라도 청명은 끝까지 그의 곁에 있을수 있을것같았다.

'이런걸 대리만족이라 해야하나.'

"그래서 저를 부른이유가 이거군요?"

초흔이 화려하게 장식된 화음현 상가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오늘은 달에 한번 가장 큰 장이 서는 날이니까. 오가는 상인은 물론 외부인도 최고로 많은 날이지."

"상 오라버니가 제 말을 못믿으니 소문을 내어 다른 사람들 입으로 듣게하자는 거죠?"

상 오라버니는 그녀의 세살많은 소꿉친구이자 그녀의 오라버니 역할은 자처하는 약혼자 후보이다.

"그래 상놈의 자식이 자꾸 끼어들어 일을 망치려드니 빠르게 처리하고 그 자유연애인지 뭔지 하자고."

"상놈이라고 좀 하지 마세요! 사람이름 갖고 그러는거 아녜요!"

상의 이름을 알고나서 청명이 서신으로 간간히 놀리듯 부를때마다 초흔은 크게 화를내곤 했다.

초흔은 상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녀 나름대로 그에게 정도 들었으리라.

다만 혼인과 정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한거겠지.

초흔은 낄낄대는 청명을 째려보다가 그의 손목을 낚아채다시피 잡아 장이 들어선 곳을 향했다.

"얼른가요. 최대한 많이 돌아다녀야 소문도 날거 아녜요. 근데 여기까지 와서 든 생각인데 이렇게 한번 같이 돌아다닌다고 소문이 날까요?"

"나지. 생각보다 엄청 날걸? 이래뵈도 화음주변에서는 날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대충 여기저기 구경다니다가 그...증표?로 장신구같은거 하나 딱 사주면 끝이야. 사흘도 안가서 서안 구석구석까지 소문날거다."

"으...그렇게 생각하니 무섭기도하네요."

"뭐가 무서워? 소문 한번에 만사형통인데."

"소문이 너무 잘나서 연애할 사내들이 다 도망갈까봐요."

실제로 화음현과 그 주변에서 청명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화산의 무복을 입은 채 도관도 안하고 홀로 산문밖을 돌아다니는 삼대제자는 청명밖에 없으니까.

이미 청명이 화음에 발을 딛은 순간부터 개방이나 주변상인들을 통해 청명의 방문이 알려졌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사파는 당연하고 불량배나 다소 행실이 거친 정파문파인들까지 몸을 사린다.

힘있는 무인이 양민들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환영받을 일은 아니지만 화산검협의 이름은 다양한 사건사고의 억제제가 된다.

존재만으로 그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청명이니 초흔과의 만남이 소문나지 않을리 없었다.

'주목받고 있어...'

대놓고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무를 익히지 않은 초흔도 알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시선이 느껴진다.

'사흘은 무슨 이정도면 서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온 중원에 소문이 다 나겠어'

힐끗 청명을 바라보니 무인이니만큼 시선에 더 예민할법도 하건만 겉으로보기에 청명은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듯 했다.

달에 한번있는 큰 장이라더니 사람도 많고 정말 없는게 없었다.

최대한 많이 돌아다니는게 목적인 청명과 초흔은 이곳저곳 둘러보며 구경을 다녔다.

구경을 다니며 초흔이 신기하거나 흥미를 끄는 물건을 보고 있으면 청명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전낭을 꺼내드려고 해서 말리느라 초흔은 애를 먹었다.

자신은 뭐가 정인의 증표인지 모르겠으니 초흔이 좋다고 생각하는걸 전부 사주면 되지 않냐면서 말이다.

'정인의 증표는 작고 귀하고 적을수록 의미가 있다' 고 하자 그제서야 청명이 납득했다.

"일단 신중하게 고르는 척을 좀 해요."

자고로 여인은 사내에게 많은것을 받는 것보다 하나를 받더라도 신중하게 고른 선물을 받는것이 훨씬 기쁜 법이다.

청명에게 그러한 깨달음을 주며 초흔은 다시 앞서 걸어갔다.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선물을 고르는 건 초흔이겠지만 일단 고민하는 척을 하기로 했다.

청명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점을 지나가면서 장신구를 하나하나 보기 시작했다.

집중하면 일리 밖에 있는 개미다리 갯수까지 셀수 있는 청명이기에 수많은 장신구들을 세심하게 볼수 있었다.

누가봐도 신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주변사람들은 화산검협과 함께 있는 여인이 보통관계가 아님을 알았다.

눈칫껏 상등품을 권하는 상인들 사이에서 청명은 더욱 신중하게 물건을 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장신구 사이에서 붉은 옥이 달린 술장식에 눈길이 멈췄다.

'이거 사숙 허리장식에 쓰면 잘 어울릴것 같은데.'

출신은 종남이지만 제가 애지중지 키운 사숙이니만큼 붉은색도 썩 잘어울렸다. 무엇보다

'이정도로 붉은 옥은 귀하지.'

정인에게는 하나를 주더라도 작고 귀한것일수록 의미가 있다고 방금 초흔에게 배우지 않았던가.

"예쁜 홍옥이네요. 홍옥은 예로부터 삿된것을 쫓아내는 효과가 있어서 길한 일이 있을때 부적대신 선물하기도 했죠."

청명의 시선이 홍옥 술장식에 향한것을 알고 초흔이 말했다.

"그럼요. 이렇게 좋은 홍옥은 혼인때나 쓰일만큼 귀한것이죠."

상인이 그녀의 말을 받아채듯 덧붙이자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이건 어때?"

"어머, 정말로 골라줄지는 몰랐는데...이렇게 좋은걸 받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긍정적인 초흔의 대답에 청명은 상인에게 값을 치루고 장신구를 받았다.

고운 함에 홍옥이 장식된 술이 담겨져 청명에게 전해졌다.

잠시 함을 바라보던 청명은 이윽고 초흔에게 함을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어딘가 시원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밥이나 먹으러 갈까?"

"배는 고픈데...솔직히 시선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밥이 안넘어 갈것 같아요."

초흔은 청명에게 홍옥 장식구를 받고나서 더욱 뜨거워진 주변시선에 체할것만 같았다.

"그럼 근처에서 사가지고 좀 떨어진곳에서 먹자."

"사람이 없는곳으로 가려면 한참은 걸어가야할텐데요?"

"괜찮아 괜찮아 일단 먹고싶은거 사와."

영문을 모르겠지만 초흔은 청명이 시키는대로 들고가기 편하게 볶음요리중심으로 사서 돌아왔다.

"이거면 될까요? 무인이라 얼마나 드실지 몰라서 넉넉히 사왔는데"

"잘했어, 그럼 가보자 일단 음식은 나 주고."

흔들리지 않게 음식을 허리춤에 매단 청명이 이어 초흔의 등과 무릎뒤에 손을 넣어 안아올렸다.

초흔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청명이 나무보다도 높이 뛰어올랐다.

초흔은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을 지른채 마음속으로 차라리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청명의 입장에서는 초삼의 몸으로 회귀한 뒤 처음으로 펼친 경공만큼이나 느린속도였지만 뜀박질조차 안한지 오래인 초흔에게는 돌아가신 조부님을 뵙고 올만큼 빠른 속도였다.

"조부님이...말씀하셨어요...저 말코같은 도사놈한테 시집가는 순간 니 인생은 쫑날거라고!!!'

이로서 더 확실해졌다며 죽었다 깨어나도 청명한테 시집가는 일이 없을거라고 길길이 날뛰는 초흔을 등지고 청명은 떨어진 통나무를 손으로 깔끔하게 쪼갠뒤 그위에 요리를 올려놓았다. 

"사숙이었으면 그냥 땅바닥에서 먹게 하는건데 여인이라 이정도 해주는줄 알아."

바위 위에 제 장포를 올려놓은 청명이 초흔을 그위에 앉게하며 말했다.

"고맙네요 아주 그냥 황송해 죽겠어. 제가 그 백천사숙? 이라는 분이 아니여서 천만다행이네요."

석달간 주고받은 서신속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때문에 초흔은 알수 있었다.

청명의 서신에는 아직 한참 모자라더라던가 병아리새끼만도 못하다던다 사형제들의 향한 온갖 욕이 담겨있었지만 실은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것을.

그리고 혼인을 하지 않는 이유가 그가 도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입을 크게 벌리고 쩝쩝거리며 식사를 하는 청명을 초흔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뭐 할말있어?"

"정말 괜찮은가 해서요."

"뭐가."

"소문이요."

"이미 각오한거 아니였어?"

"저말고요. 도장말이예요."

"안 괜찮을게 뭐 있어. 어차피 혼인도 안하는 도산데."

"연모하시는 분이 있잖아요."

초흔의 말에 청명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그런거 없는데?"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낯으로 청명이 말했다.

"저말이죠. 여차하면 도장을 꼬셔서 도망이라도 갈까 했었어요. 근데 도장 맘에 이미 든 사람이 있더라구요. 여인들은 이런건 기가 막히게 눈치가 빨라요. 그이 맘속에 자기자리가 없단걸 알면 아 이사람은 텃구나!하고 빨리 정리하죠."

"지금보니 눈치 없는거 같은데. 여튼 나한테 연모하는 이는 없고 있더라고 상관없어."

"도장, 저는 도장이 좋아요. 어느순간부터 막 좋아졌어요. 연모는 아니지만요."

초흔의 입고리가 내려가고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도장이 그냥 날 도와줬으면 싶었어요. 날 도와준다면 누구든지 상관없었죠. 근데 지금은 만약 도장덕분에 제가 행복해진다고 하면, 그 옆에서 도장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도장, 저는 행복해질거고, 도장도 행복해져야만해요."

청명은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초흔의 솔직함은 청명이 이길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청명은 똑바로 바라보는 올바름 앞에서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는 청명이 초흔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자, 초흔을 만나길 피해왔던 이유이기도 했다.

"...소문이 나도 상관없는건 사실이야. 그 인간은 눈하나 깜박하지 않을걸. 진즉 너와 서신을 주고받는 다는걸 알면서도 조언까지 해주던 사람이니까."

씁쓸한 기분으로 인정한 청명이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성이 없었던 것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무로 만드는 것은 다르죠"

"다르지 않아. 변하는건 없으니까. 설령 무언가 변하더라도 너한테 필요한 일이야"

"도장이 마음을 접는데 필요한게 아니고요?"

흡하고 숨을 들이킨 청명이 순간 주먹에 힘을 주다가 다시 풀었다.

"둘다한테 필요한걸로 하자. 반대로 묻겠는데 너는 정말 괜찮아? 상인가 뭔가하는 놈 좋아하잖아?"

"놈은 좀 빼라고요! ...역시 알고 있었군요."

"그냥 그대로 혼인하는게 나은거 아닌가."

"아니요. 상 오라버니는 저를 여인으로 보지 않아요. 가족이나 여동생으로 보지."

"그게 연모의 감정보다 못하진 않을텐데."

"못하진 않죠. 하지만 달라요. 제가 원하는건 그런 감정이 아니예요. 청명도장도 그렇지 않았나요?"

초흔이 청명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도장이 연모하는 이도 도장을 사형제로만 여겼기 때문에 괴로웠던건 아니었나요. 제가 문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사형제는 죽음까지도 함께하는 사이라고 들었어요. 죽음까지 함께할수 있는 마음이라면 그게 결코 연모보다 못한감정은 아닐거에요."

청명은 되돌려줄 말이 없었다. 초흔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명도 백천에게 사형제와는 다른 무언가를 바랬었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비참했다.

백천이라면 정인이 되었건 사숙이 되었건 청명과 함께 할 것이다. 

청명과 함께 죽어줄수 있는 자였다.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본인도 죽음을 경험한 청명은 죽음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인지 알았다.

그럼에도 청명은 백천에게 다른 무언가를 원했고 저도 백천에게 다른것을 주고 싶었다.

"도장 포기하지 말아요. 도장이 연모하는 이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평생 연모하는 마음을 감추고 살아가려고 생각하고 있다면 차라리 떠나버리세요."

"너처럼?"

"저처럼요."

초흔이 말갛게 웃었다.

"난...화산을 떠나지 못해"

"진짜로 떠나란게 아니에요. 그 마음을 굳이 그 사람 곁에 머물도록 둘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곁에 있고 싶어도, 바라보고 싶어도 꾹 참고 다른 이에게 주려고 노력해보는거죠. 그때는 이사람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제짝이 다른데 있거나 하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다른사람은...아마 생각하기 힘들거야."

100여년 넘는 세월을 거쳐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이다. 다음까지 또다시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럼 다 태워버리세요. 도장 그분께 제대로 마음은 전했나요? 그 때 전했던 마음이 지금만큼 컸나요? 처음 연모를 자각했을 때와 지금은 뭐가 다른가요? 도장 마음속에서 무언가 변했다면 그걸 솔직히 전해요."

백천에게 거절의 말을 들었을때 청명은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했었다.

어중간하게 속을 떠보려다가 제 밑천만 드러낸 셈이다.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한 감정의 편린이 백천에게 닿을리가 없지.

청명도 그 날의 일이 실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수를 바로잡지 않으면 백천과는 어색한 관계가 지속될 뿐이다.

실수를 바로잡는 방법으로 청명은 자신을 속이는 쪽을 택했고, 초흔은 그가 은연중 외면해왔던 쪽을 권했다.

청명이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쥐고 있자 초흔이 손을 뻗어 그손을 덮었다.

저보다 반절은 작은 손에 위로받은 청명은 그위에 다시 제손을 얹으려고 했다.

그의 손이 닿기 전에 풀숲에서 한사람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상..오라버니..?"

숨을 헉헉 들이내쉬는 사내를 보며 초흔이 놀란듯 눈을 크게 떴다.

"어쩐지 화음현에서부터 졸졸 따라오더니."

청명이 피식하며 웃었다.

간신히 숨을 고른 사내가 청명과 초흔의 맞잡은 손을 보고는 소리쳤다.

"그녀를 놔주시오!"

상은 상인의 맏아들로 무당파의 속가제자로서 무공을 익히긴했지만 속가제자는 속가제자일뿐 청명의 경공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다만 초흔에 대한 걱정으로 젖먹던 힘까지 끌어와 어찌저찌 쫓아온 것이다.

"오라버니...어째서...?"

있을리 없는 자가 나타나니 초흔은 놀랄수 밖에 없었다.

"희야...나와 혼인하기 싫다면 내가 물러가마. 내 너를 아껴주는 이라면 그 누구인들 기꺼워하지 않을수 있겠느냐 하지만 저 화산의 제자는 안된다. 희야...네가 위험해질수 있어."

초흔의 아명을 부르며 다가온 상은 초흔과 청명의 손을 떼어냈다.

청명에게는 영 타격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기분나쁜 티를 냈다.

이 사내에게는 확인해야 할것이 있었기에.

“위험할일이 뭐있어 내가 제일 센데.”

청명이 이를 드러내며 위협적으로 웃었다.

상은 초흔을 제 뒤로 숨기고 청명을 마주봤다.

꽉쥔 주먹이 조금 떨리고 있있지만 결코 눈을 피하진 않았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화산검협. 희는 내 동생같은 아이로 집안에서도 애지중지 커 생각이 많이 어리오. 집안에서 결정하지도 않은 혼인을 하려할정도이니. 화산검협이라면 희말고도 훌륭한 혼처는 많을터. 이번 혼서로 손해본일이 있다면 우리 집안에서 배상할터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물러가주시오”

나이보다도 성숙한 상의 태도에 청명은 비웃음을 띈채 말했다.

“니가 초흔의 오라버니라고 아닌것같은데?”

비웃음을 띈채 제 말을 부정하는 청명의 모습에 상이 울컥하며 말했다.

“내 비록 희와 혈연으로 이어져있지는 않아도 평생을 함께 자란 내 동생이오.”

“진짜 동생이라면 떠나보낼 각오를 했었어야지.”

청명의 말이 상의 폐부를 찔렀다. 청명이 상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너는 초흔의 오라버니가 아니다. 그럼 이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지. 초흔의 결정을 뒤집을수 있는건 네놈이 아니야.”

“누가 뭐래도 난 이 아이의 오라버니요.”

코앞까지 온 청명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상이 말했다.

“나만 아니면 된다고 했지? 그럼 누굴 데려와야 넌 만족할거냐.”

“물론 희를 행복하게 할수 있는 사내라면…”

“날 보지말고 쟬보고 말해!!”

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명이 화를 내며 소리치자 순간적으로 상의 고개가 초흔을 향해 돌아갔다.

초흔은 아무말 없이 상의 눈을 마주보았다.

청명의 위협에도 떨리지 않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곧 눈동자 뿐아니라 상의 전신이 떨리기 시작했다.

“희야…난…네가 행복해질수만…그럴수만 있다면..”

“오라버니 그 이상 말하면 저는 더이상 오라버니와 함께할 수 없어요.”

이제껏 본적없는 초흔의 단호한 눈빛에 상은 충격에 휩싸였다. 

모르는 이가 봤다면 그 속에 담긴게 공포라고 느낄만큼.

본적이 없다고?

상은 희의 이런 눈빛을 알고있었다.

이제 막 여인태가 날 즈음 제게 연심을 고백하는 희에게서 본것이었다.

그 당시 상은 희의 수줍은 고백에 어차피 너와 나는 가족이나 다름없으니 혼인하여도 변함없이 쭉 함께있겠다며 기뻐했었다.

그날부터 상은 희가 자신과 혼인할 것이라 믿었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는 날이 적어지고 항상 가던 축제에 몸이 불편하다며 함께가지 않더니 화산검협에게 혼서를 넣었다는 소식을 듣기전까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등뒤에 있는 무시무시한 사내를 깎아내리면서까지 이 혼인을 막아왔다.

그녀를 행복하게 할수 없다면서. 제가 희를 행복하게 해줄 사내를 찾아오겠다면서.

“희야…오라버니가…내가 잘못했다. 내 곁은 떠나지 말아다오.”

“저는 오라버니와 함께 할수 없어요.”

상이 눈가가 붉어진채 말했지만 초흔은 여전히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젠 내가 네 오라버니인것도 싫으냐. 그럼 네 오라버니도 안하겠다. 그저 나를 밀어내지 말아라.”

“오라버니가 약혼자도 오라버니도 아니게 된다면 제가 무슨 이유로 오라버니와 함께할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족이 아니게 되면 서로에게 무엇이 되는건가요?”

희가 가족도 동생도 아니게 된다면 희는 그에게 무엇일까.

그토록 내려놓고 싶지 않았던 것을 희 앞에서 전부 내려놓은 그는 깨달았다. 무너져 내린 그의 무릎이 땅에 닿았다.

“너는…내 여인이다. 내 사랑이고. 내가 평생을 지켜야하는 이다.”

아집을 걷어내고 남은 것은 연심이라.

상은 자신이 그저 희 곁에서 함께 행복하고 싶었음을 알게됐다.

주저앉으며 흐느끼는 상의 등을 초흔이 천천히 토닥였다.

‘만족해?’

전음으로 청명이 물어보자 초흔의 눈이 커졌다 이내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는 웃으며 입모양으로 말했다.

‘생각만큼 속 시원하지는 않네요.’

상이 어느정도 진정되자 초흔이 이번 혼담은 없었던 일로 해달라며 청명에게 고개숙였다.

상도 바닥에 엎드려 초흔을 붙잡은건 저이니 원망하려면 자신에서 하라며 호소했다.

청명은 손을 휘휘 저으며 얼른 가라고 두사람을 쫒아냈다.

둘이서 해결해야 할 일이 아직 많이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청명 나름의 배려이다.

떠나는 길에 초흔은 홍옥 술이 담긴 함을 돌려주었다.

“진짜 주인에게 전해주세요.”

그 말을 남기고 둘은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제 나와도 돼 사숙.”

청명이 저멀리 걸어가는 초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그랬느냐.”

“뭐가.”

“왜 놓아줬냐고 하는거다 망둥아! 네녀석 성격이면 저따위 놈 두들겨패서 쫒아냈어야지!!”

“얼씨구 제~발 양민만은 패지말아달라고 빌던 동룡이가 건방지게.”

“청명아!!”

척 보기에도 분노에 찬 백천의 모습에도 청명은 능글맞게 대답했다.

백천은 이해할수가 없었다. 제 사질이 뭐가 모자라서 저따위 놈한테 연모하는 이를 빼앗기나.

자신이 어떤마음으로 여기에 왔는데.

3으로 이어집니다. 생각보다 길어지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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