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존 드림] 매화연(梅花燕)
유료

[화산귀환/검존드림] 매화연(梅花燕)

04. 시선

*암향화연 3화 이후의 시기입니다.

*적폐/날조 캐해석 주의.

*약간의 당보 드림 언급 있습니다. 삼각관계 주의.

*청명과의 데이트를 추가로 볼 수 있습니다. (유료입장)

햇살이 따사롭게 내려 낮잠이 솔솔 오는 봄바람이 살랑인다. 뭉게구름이 천천히 태양을 가리다 비추는 평화로운 하늘 아래, 피풍의를 뒤집어쓴 연홍 련의 표정은 평소보다 굳어있다. 항상 미소 지어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여인이 웃음기를 거두니 얌전한 얼굴에 서린 옅은 피로감이 엿보인다. 그녀는 며칠 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당보도 없는데, 곤란하네.’

며칠 전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처음엔 당보와 도둑을 잡고 나서 보복이 온 건가 싶어 경계했지만, 살의를 담은 시선은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하기엔 목에 걸리는 가시처럼 신경 쓰이고. 마치 자신이 누구인지 감시하는 거 같은, 관찰되는 시선이 여간 불편했다. 시선이 있는 방향으로 찾아보려 하면 사라졌고, 기감을 세워 경계하기를 며칠 째 긴장된 몸 탓에 숙면을 하기가 쉽지 않다.

연홍에서 보낸 자객일 리는 없다. 단장님을 통해 본가에서 연통을 받으니까. 하나 해결하니 하나가 붙는 게 무슨 업보인가. 이쪽이 찾으려 하면 사라지니 어쩌겠는가. 수를 알 수 없는 자를 상대하려면 제 판에 끌어와야 했다.

‘단순히 내가 예민한 걸로 끝나는 문제였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연홍 련은 화음의 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다. 딱히 목적지가 있진 않았다. 자신을 지켜보는 목적은 몰라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휴가를 보내면 되고, 자객이 제 앞에 나타나 준다면 이유라도 알 수 있겠지. 이것도 안 되면 당보에게 서신을 보내던가 해야지. 당가에 일이 생겼는지 옷을 맞춘 이후로 그의 방문도 뜸해졌다. 제 한 몸 지키기 위해 받은 비도로 어찌하기 어려워진다면 단도라도 써야지 별 수 있나. 싫긴 해도 검무에 쓰는 검 다음으로 익숙한 무기니까.

‘우선은 휴가니 언니들 몫의 선물들이랑.....’

연홍 련은 걸어가던 중 상인들이 파는 매대에 문득 멈춘다. 종류별로 포장되어 있는 담뱃재들이었다. 상인의 뒤로 연초를 피우며 음료를 기울이고 있는 손님들이 엿보인다. 공기 중에 익숙한 냄새가 난다했더니 연초 냄새였구나.

‘그러고보니, 당보가 연초를 즐기던데. 선물로 하나 사줄까.’

휴일이 겹칠 때면 당보와 함께 종종 거리에서 장신구를 봐줄 때가 있었다. 그가 선물해 줄 때도 있지만 공연에 쓸 소품을 같이 봐줘서 사갖고 가면 언니들이 마음에 들어하곤 했었지. 일전에 도움 받은 것도 있으니 하나쯤 선물을 사줘도 좋을거 같았다.

“어서 옵쇼, 선물용 찾으시나? 원하면 시향도 가능하니 천천히 구경해보소.”

연홍 련은 상인의 말에 손을 모아 눈을 반짝인다. 연초를 피워보지 않아 뭘로 줘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시향할 수 있다면 오히려 좋았다. 당보가 피우는 연초향과 비슷한 걸로 골라줘야하나 싶었는데, 제 취향인 향이 있다면 그것도 같이 줘도 괜찮지 않을까. 권세가 도련님 입엔 성에 안 찰지도 모르겠지만 선물은 성의가 중요한 거라 하니까. 연홍 련은 소담히 웃으며 상인에게 부탁한다.

“그럼, 추천을 받고싶은데 시향도 할 수 있을까요?”

“아무렴! 제일 잘 나가는 건 이쪽이지만 안쪽에 가면 종류가 더 많으니 손님 취향껏 골라보소. 시향할 거면 이쪽으로 오시오.”

연홍 련은 상인을 따라 가게에 들어선다. 여러가지를 시향한 끝에 몇가지를 골라내 비단에 포장된 함을 받은 그녀는 소매에 넣고 가게를 나온다. 마음에 들어하면 좋겠는데. 만족스레 구매한 연홍 련의 발이 다시 정처 없이 이동한다.

**

타박. 타박.

연홍 련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 이제까지는 몇 번 찾으러 갔던 일 때문인지 잠잠하나 싶더니. 제 발자국과 겹치게 걸어오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면 시선이 사라졌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실력 있는 자객이 붙은 건 확실하다. 이동하면 환청이라도 듣는 것처럼 발소리가 들리니 점차 등에 식은땀이 날 거 같았다. 이렇게 따라가고 있다는 티를 낼까? 아니면 제게 용건이 있나? 고민하던 연홍 련은 조금 빠르게 발걸음을 돌려 샛길로 향한다. 사람이 없는 쪽으로 가보자. 거기서라도 따라온다면.. 연홍 련이 발걸음을 재촉하려 하니 그녀의 어깨에 손이 얹어지자 절로 몸을 움츠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연홍 련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자신만큼 놀란 눈으로 내려보는 청명이 서 있었다. 어라.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잘못 느낀 건가? 예상치 않게 나타난 청명을 바라보던 연홍 련은 금방 예의 미소 짓는다.

“아…청명 도사님이셨군요.”

아는 얼굴이라 안도되는 것과 동시에 머리는 복잡했다. 잘못 느꼈을 리가 없는데. 뒤돌았을 때 시선이 사라진 걸 확인했으니까. 단순히 방향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건가? 설마 도망갔나? 연홍 련의 눈이 주변을 빠르게 살핀다. 청명은 연홍 련을 내려보다 입을 연다.

“..내가 무섭게 했나?”

청명의 물음에 연홍 련의 시선이 다시 청명에게 향한다. 평소에 보던 매화 문양의 도복이 아닌 그는 외출이라도 나온 건지 경장에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답지않게 주저하며 제 눈치를 살펴 묻는 청명의 반응에 연홍 련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도사님을 뵐 줄은 몰라 놀랐지만... 어쩐 일이신가요?”

연홍 련의 물음에 청명은 표정을 구기며 그녀를 내려본다. 본래 청명은 청문 몰래 술이라도 기울이려 화음에 내려왔다. 마음 같아선 청문의 시야에 들키지 않을 서안에서 술을 까는 게 가장 편하게 놀기 좋지만... 이 여자가 서안에서의 일을 얘기한 탓에 당장은 가기 불편해 가까운 화음에서 해결하려 했다. 익숙한 기감을 따라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 여인이 있었다. 청명은 콧방귀를 끼며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퉁명스레 대꾸한다.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확인해봐야지. 당연한 거 아닌가?”

연홍 련의 얼굴이 굳는다. 지금 이 주변엔 자신과 청명만 서 있었다. 청명이 나타난 방향이라면 자신의 뒤를 알아차릴 수 있는 위치였을 텐데 그는 자신을 붙잡았다. 그럼 샛길에 들어오기 전까지 쫓아온 누군가가 청명을 발견하고 도망갔다는 거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자신은 자객을 끌어들여 단도를 꺼내 보이려 했다.

'도망갔으니 이젠 그것도 물거품이군.'

아니 시선이 사라졌으니 안도해야 하나. 연홍 련은 손목을 쥐며 오한이 드는 몸을 진정시켰다. 그가 옆에 있는다면 자객이 나타나지 않아 편하겠지만, 그러면 찾기 쉽지 않으니까. 휴가를 편히 보내긴 물 건너갔다. 청명과 헤어지면 다시 찾아봐야지.

“…그랬군요. 귀한 시간을 뺏어버렸네요. 신경 쓰지 마시고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연홍 련이 고개를 숙여 청명에게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린다. 연홍 련의 뒷모습을 보던 청명은 작게 혀를 차다 성큼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톡 두드린다.

“데려다줄게.”

안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희게 질려있다. 표정도 굳어 늘 웃던 그녀 답지 않게 겁을 먹어 보였다. 그녀가 신경 쓰이는 것도 있지만 이건 도사로서 할 일이다. 이 여인은 화음이 익숙하지 않을 테니 길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정도는 술 먹기 전에 가볍게 하는 산책이니까. 청명의 제안에 연홍 련의 눈이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다 곧 소담한 미소를 보인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청명 도사님.”

연홍 련은 옆에 서 있는 청명의 손을 잡자 청명은 재빠르게 손을 빼낸다. 연홍 련은 그의 반응에 놀라다 조금 민망한 듯이 손을 모은다. 당보랑 걸을 때나 언니들이랑 같이 이동할 때 손을 잡는 게 익숙해 습관처럼 잡았는데 잊고 있었다. 이 사내는 자신이 잡으려 하면 놀라는데. 이쯤 되면 싫어하는 건가란 생각도 든다.

“아... 놀라게 해서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청명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낸다. 그것도 잠시 그의 손이 느릿하게 연홍 련의 손목을 감싸 잡는다.

“....아니, 됐다. 떨어지지 말고 붙어있어.”

얼굴을 쓸어낸 청명이 인상을 쓴 채 앞장서서 걷는다. 연홍 련은 청명의 발걸음을 따라가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귀가 옅게 빨개진 채 자신의 손목을 잡는 손은 세게 잡기는 커녕 이러다 빠지는 거 아닌가 싶게 약하게 잡는 손길이었다. 세게 잡으면 아플까 봐 조심하는 건가? 연홍 련은 새삼스러운 배려에 옅게 웃음이 났다.

‘도사는 도사시라니까.’

연홍 련을 빠르게 종종걸음으로 청명의 옆에 다가와 그의 소매를 잡는다.

“천천히 걸어주시면 안되나요? 제가 어디 갈 건지 알고 가시는 거예요?”

연홍 련의 말에 청명은 멈춰서 고개를 돌린다. 청명이 멈추자 연홍 련은 소매를 잡은 손을 놓는다. 소매 잡는 것도 싫어하려나. 연홍 련이 청명의 눈치를 살피고 있으니 그가 더욱 표정을 구깃인다.

“…어디로 갈 건데.”

연홍 련은 잠시 고민한다. 청명이 데려다준다는 말에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그랑 헤어지고 나면 자객을 다시 찾아보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청명이 자신과 있는걸 보고 도망쳤다면 따로 떨어진다 해서 자객이 다시 나타날까? 이제껏 봐 온 자객이라면 보다 확실히 혼자가 될 때를 노릴 거다. 예를 들면 숙소에 돌아가고 나서 같은. 그럼 숙소에 가기보다 차라리 청명과 시간 보낼 수 있으면 좋은데. 고민하는 연홍 련이 청명에게 묻는다.

“이참에 도사님께 추천받고 싶은데 여기 화음에서 먹을만한 식당이 있나요?”

“..몰라. 아무 데나 가도 먹을만하겠지.”

청명은 시치미를 뗀다. 화음이야 화산 사람들이라면 자주 다니는 만큼 식당이야 많이 알고 있었다. 그만큼 화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기도 하다. 아는 곳에 갔다가 이 여인과 있는 걸 사형제들이 보면 분명 놀려먹을 거 같은데. 그런 놈들은 대가리를 깨주면 되지만 청문이 봤다면 또 의미모를 소리나 할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척 하는 게 최선이다. 귀한 집 소공녀가 만족할만한 식당이 화음에 있을지 자신도 모르는 건 맞으니 꼭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청명의 대답에 연홍 련은 어딘가 납득한 건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도사님만 괜찮으시다면 시간 내 줄 수 있나요? 시장하시다면 같이 먹는 건 어때요?”

연홍 련의 제안에 청명은 난감해졌다. 자신은 분명히 이 여인을 데려다주고 제 갈 길 가려고 했다. 근데 같이 먹자니. 이러면 사형제나 청문한테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일텐데. 거절해야 했다. 아니 어차피 자신도 술을 먹으려 나온 건데 상관없지 않나. 갈등하던 청명은 잡고 있는 연홍 련의 손목을 보다 꾹 잡았다.

“……오래는 못 있어.”

“화음에만 파는 특산품도 있다면 같이 살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러면 여기 맛있는 술 파는 곳은 아시나요, 도사님?”

“그거라면 내가 전문가지.”

청명의 표정이 밝아진다. 이 주제라면 자신이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다. 술 사는 정도라면 오래 걸리지도 않고 들킬 부담도 적으니까. 연홍 련의 제안을 덥석 잡은 청명은 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서니 연홍 련은 청명을 보다 작게 웃는다.

**

호록.

연홍 련은 청명과 함께 시장에 나와 있다. 그녀는 상인이 내미는 술을 시음해본다. 혀에 감기는 과일 향과 부드럽게 넘어가 술을 마시기보다 향 좋은 차를 마시는 가벼움에 연홍 련은 입가를 가리며 감탄한다.

“정말 부드럽고 순하네요. 이거라면 숙취도 적겠어요.”

“명주인데 당연하지. 무려 서봉주(西凤酒) 20년산인데.”

청명은 으쓱이면서 옆에서 술을 기울이는 연홍 련을 흘겨본다.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안색이 훨씬 나아 보였다. 비싼 술을 알아보는 건지 상인이 눈치 빠르게 시음을 권해 마셔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마시는 걸 보고 있자니 자신도 한번 맛보고 싶어졌다. 나도 이건 비싸서 맛보지 못했는데. 청명의 시선이 연홍 련이 마시는 술잔을 내려보고 있으니 시선을 느낀 연홍 련이 청명을 올려본다.

“도사님도 맛보실래요? 향이 좋아요.”

연홍 련이 청명에게 술잔을 내민다. 청명은 멈칫인채 옅게 맡아진 과일 향에 침을 삼키지만 곧 목을 빼낸다. 맛은 보고 싶다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먹던 걸 마실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잔을 하나 더 받는게... 아니다, 잔은 감질나니 얼른 사고 술이나 먹고 취했으면 좋겠다.

“…주인장, 이거 하나 주게.”

“예이, 한 병이면 되겠수?”

“아... 네. 다른 술도 추천해 줄 수 있나요?”

얼떨결에 승낙한 연홍 련은 청명에게 내밀던 술잔을 가져와 한 잔 비운 채 상인에게 다시 돌려주며 웃는다. 청명 덕분에 좋은 술을 고르게 됐으니 사고 나면 그에게도 하나 사주면 되겠다. 그 뒤로 연홍 련이 시음하고 좋아할 때마다 청명이 대신 달라고 하는 바람에 연홍 련은 결국, 시장을 벗어나 그를 데리고 식당에 가기로 한다.

**

청명과 헤어진 연홍 련은 숙소에 돌아와 길게 내려온 감색 머리카락을 젖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다. 침의로 갈아입은 그녀는 장포를 걸친 채 협탁에 올려둔 비단함을 본다. 청명과 만나기 전에 구매했던 담뱃재는 당보가 찾아오면 전해주면 되겠지. 언니들은 청명과 같이 고른 술이 마음에 드는지 신나서 안주를 사러 갔으니 술시(*오후 7시~오후 9시) 안에는 올 것이다. 그 전에..

“……이만 나왔으면 하는데. 내게 용건을 물으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일 텐데?”

연홍 련의 말에 잠시 후, 창문을 통해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까지 꼼꼼히 야행복을 입은 흑의인이 등장하자 연홍 련은 가늘게 흑의인을 본다.

“…눈치가 빠르군.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나?”

“피곤하니까 용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흑의인은 흠칫했다. 흑의인은 이 여인을 며칠간 계속 지켜봤다. 월하가인 서월. 당가의 소공자가 자주 만나는 여인. 연홍세가의 소공녀. 화산의 화산제일기재와 인연이 있는 여인. 이 여인의 성정은 파악했다 생각했는데 지금의 여인은 성가시다는 듯이 차가운 눈으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의 정체를 묻지도 않는 거봐 선 자신이 그동안 보고 있었던 자객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는 건가.

“…화산제일기재와 무슨 사이지?”

“그게 며칠간 날 감시하는 이유라는 건 아니겠지? 난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취미는 없는데.”

흑의인은 주먹을 꾹 쥔다. 소공자가 신경 쓰는 여인이 아니었으면 건방진 계집이라고 살수로 위협했겠지만, 이 여인은 보기보다 날렵하다는 걸 도둑을 잡을 때 보지 않았던가. 함부로 위협해서 소공자의 원한을 받는 건 흑의인은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흑의인은 자존심을 누른 채 목을 가다듬어 말한다.

“…실례, 그대가 당가의 비도를 사용하는 걸 목격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뵈었소.”

연홍 련은 깜박이며 흑의인을 본다. 당보와 도둑을 잡았을 때 보았다는 것 이전에 당가의 비도를 알아보았다는 것이 의외였다. 자신이 비도를 쓴 것은 딱 두 번이었지만 산채에서 자신을 본 목격자는 죽었거나 관에 넘겨졌다. 그럼 이 자는 당가에서 온 자객이라는 건가. 연홍 련은 팔짱을 낀 손으로 옷자락을 조금 더 꾹 잡는다.

“…당가의 자객이 왜 나를 찾으시는지, 여기엔 당신네 소공자는 없다만?”

“그대에게 비도를 준 게 소공자인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건 안 좋아해. 소공자가 시킨 게 아니라면 더더욱.”

흑의인은 점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리 소공녀라도 오대세가도 아닌 계집이 이리 오만한 태도라니. 소공자에 대한 예의도 없고. 대체 소공자는 이 계집의 어디가 마음에 드는 건지. 단순히 겉모습인가. 흑의인은 얼굴에 핏줄을 세우며 입을 열었다.

“…본래 당가의 비도는 외부인이 소지해선 안되오. 비도술을 익히는 건 더더욱 금기하지.”

심드렁한 연홍 련의 눈이 순간 굳는다. 비도술을 익히게 된 건 사소했다. 수련하다 지친 당보가 시험 삼아 보여줬다가 따라 하는 걸 보고 본인이 신나서 제게 권하게 된 거니까. 근데 이 미친놈이 당가의 규율까지 어기면서 자신한테 알려줬다는 건가? 가르쳐줬다 해도 기껏해야 비도 손질하는 방법과 어떻게 던져야 하는지 정도만 알려줬지 그 이상의 비도술을 알려준 적은 없었다. 연홍 련은 길게 한숨 쉬며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올린다.

“..그래서, 어찌할 생각인지? 살인멸구라도 하실 건가?”

“설마. 그 정도로 경우 없진 않소. 다만 그대가 가진 비도는 회수했으면 하는데.”

연홍 련은 표정 없는 얼굴로 흑의인을 보다 발걸음을 돌려 금침 아래 넣어둔 비도를 가져와 꺼내 보인다.

“찾는 게 이건가?”

“맞소, 순순히 돌려준다면 물러나도록 하지.”

“찾아갈 거면 직접 가져가. 돌려줬다가 칼 맞는 건 사양이니까.”

흑의인은 연홍 련을 가늘게 본다. 무기라곤 손에 들고 있는 비도만 가지고 있었다. 여리해보이는 얼굴과 달리 신중한 것이 순진하지는 않은 계집이다. 흑의인은 조용히 연홍 련에게 다가가 비도를 가져가려 한다. 그 순간, 연홍 련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흑의인의 팔을 잡아 침상에 엎드려 제압한다. 비도가 바닥에 떨어진 흑의인은 갑작스러운 제압에 당황한다.

“큭...! 이게 무슨 짓이오!”

“이제까지 계속 감시해놓고 저항이 없을 거라 생각하다니. 당가 사람이 보기보다 순진하군.”

연홍 련은 조소를 짓는다. 그녀는 팔을 비틀어 잡을 뿐만 아니라 무릎을 세워 흑의인을 압박해 누르다 보니 흑의인은 쉽게 저항하기 어려웠다. 연홍 련은 바닥에 떨어진 비도를 가늘게 흘겨본다.

“이 상태로 물어서 가져가. 비도가 당신 입에 떨어지면 그땐 소공자에게 갈 것도 없이 내 손에 죽는 거야.”

“하... 무인도 아닌 계집이 당가를 협박해서 살아남을 거 같으냐?”

“당가의 자부심, 좋지. 근데 지금은 우선순위가 잘못됐어. 당신이 지금 내게 취해야 될 건 한가지야.”

연홍 련은 흑의인의 머리채를 잡아들어 친절히 알려주듯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알려준다.

“‘그동안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꼬리 잡힌 쥐새끼처럼 물고 도망가는 거란다.”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연홍 련은 흑의인을 내려본다. 흑의인은 등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얼굴과 지금 자신이 압도되고 있는 기세가 너무도 기분 나쁜 부조화인데, 이 여인의 입에서 나오니 시선이 뺏길 정도로 잘 어울렸다. 분명 연홍은 무공이 강한 집안이 아닐 텐데. 곱게 휘어진 자색 눈동자가 귀신같았다. 흑의인은 덜덜 떠는 몸으로 입을 뗀다.

“그…그동안..”

연홍 련은 여전히 미소 지으며 흑의인을 바라본다. 머리채를 잡는 손에 조금 더 힘이 가해지자 흑의인은 빠르게 대답한다.

“그... 그동안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시오!”  

연홍 련의 미소가 진해진다. 그녀는 머리채와 팔을 제압한 채로 흑의인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머리를 잡은 손은 놓아 어깨로 옮긴 그녀는 여전히 비틀어 잡고 있었다.

“착하기도 해라. 이제 물고 나가기만 하면 되겠구나. 소공자를 만나거든 안부 전해주렴.”

굴욕적이었지만 흑의인은 제압된 채로 엉거주춤 비도를 물었다. 자신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이 여인에게 함부로 반항하면 정말 죽을 거라고. 강호에선 사람은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의 감각을 믿어야 될 때가 있다. 무엇보다 이 여인이 잡고 있는 손이, 목소리가 족쇄처럼 자신을 죄어가는 기분에 흑의인은 당장 이 귀신같은 여인에게 벗어나고 싶었다. 비도를 무는 걸 확인한 연홍 련은 마침내 흑의인을 놓자마자 그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춘다. 바깥을 확인한 연홍 련은 창가에 다가가 창문을 닫고 걸쇠까지 채워 꼼꼼히 닫아두고서야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정말 피곤하다."

자신이 아는 가장 무서운 이를 따라 했더니 몸이 두 배는 피로해졌다. 그래도 이제는 맘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지. 긴장이 풀려지니 그간 쌓여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듯 졸음이 쏟아졌다. 연홍 련은 그대로 엎드려 잠의 파도에 휩쓸려 깊은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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