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검존드림] 매화연(梅花燕)
05. 초련(初戀)
*암향화연 4화 이후의 시기입니다.
*적폐/ 날조 / 캐해석의 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매화연 유료 분 일부 + 청명 시점과 함께 둘의 꽁냥이 이어집니다. (유료입장)
*평균 유료 분보다 양이 많아 이번 편은 가격이 다릅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생각보다 짐은 적지만... 아니, 오히려 늘어났나.’
당보와 연말을 같이 보낸 이후,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갔다. 수상한 시체가 나타난 원인이 마교라는 게 밝혀지면서 소식들이 퍼지니 그 영향은 악단에도 미치게 되었다. 모두와의 회의 끝에 지금 상황에선 악단을 이어가는 건 어렵다고 판단해 춘절까지만 이어가고 각자 해산하기로 결정되었다. 연홍 련은 제 몸처럼 입고다니는 피풍의와 삿갓을 쓰고 봇짐을 지고 걸어가고 있었다. 몇 년을 악단에서 지내다 휴일이 아닌 홀로 움직이게 되니 기분이 이상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
‘지금 속도로면 아마... 십주 야 조금 넘게 걸리려나.’
살랑.
발걸음을 재촉하던 연홍 련의 잔머리가 살랑이며 문득 매화향이 맡아졌다. 연홍 련은 꽃향기에 따라 고개를 든다. 머리 위로 매화나무가 만개하여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매화가 드리워진 나무들 위로 높은 연화봉이 보였다. 저 길로 따라나서면 화산이 나올 터. 화산이라. 마교에 다들 골머리를 앓던 중 가장 눈에 띄는 소식은 단연 청명이었다.
‘아니, 이젠 매화검존... 이시지.’
신도들의 잔혹하기가 저승사자와 다름없는 이들의 등장에 어린 아이들이나 힘없는 여인, 어르신들은 거리에서 보기가 힘들어졌다. 남쪽에서부터 조금씩 활동하던 그들이 이제는 지역에 상관없이 나타나기까지 하니 봄이 찾아온 게 무색하게도 거리의 풍경은 다소 쓸쓸한 광경이다. 당가가 있는 사천에도 마교가 습격해 암존인 당보도 고생이겠지. 그런 이들을 거침없이 몰아내고 있는 것이 화산의 검이자 주교를 잡아낸 영웅, 그게 지금의 매화검존 청명이다.
‘돌아가면, 이제 얼굴 보기 힘들 텐데.’
안 그래도 자주 보기 힘든 사람인데. 이대로 자신이 연홍으로 돌아간다면 한동안 적응하느라 화산에 오기는 더 어려워질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얼굴이라도 보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연홍 련은 멀찍이 연화봉과 매화나무를 바라보다 마음을 잡았는지 발걸음을 옮긴다. 그녀의 발이 화산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
“하아... 하…무거워 죽겠다.”
화산에 오는 건 이로써 두 번째지만 다시 올라도 정말 험한 산이다. 그때는 공연에 필요한 것만 가볍게 챙기고 올랐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짐도 늘었으니 연홍 련이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쓰고있던 삿갓을 벗으니 하나로 땋아낸 머리가 드러난다. 연홍 련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 붙어있는 머리카락을 떼어낸다. 계단에 앉아 쉬는 연홍 련이 조금 멀리 보이는 화산의 전각을 바라본다. 숨을 고르던 연홍 련은 멍하게 화산의 정문을 보고 있으니 문득 고민되었다.
‘생각해보니, 마교때문에 바쁜 사람일 텐데 이렇게 왔다가 없으면 어떡하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 같아 무작정 오르긴 했지만 다 오르나서야 뒤늦게 생각나지는 건 뭐란 말인가. 아니 중간에 고비 때마다 돌아갈까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까운 마음에 아득바득 올라왔지. 연홍 련은 부끄러움이 몰려와 얼굴에 열이 오르니 상대적으로 서늘한 손등으로 뺨을 문지른다.
‘아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안그래도 마교때문에 흉흉한 세상이다. 본가에 돌아가는 동안 같이 가줄 호위가 필요하기도 했으니까. 마교에 있어서 가장 든든하다 할 수 있는 문파라면 당연 화산이다. 매화검존과 갈 수 있으면 가장 좋지만 없으면 다른 도사님에게라도 부탁드려야지. 청명의 이름값이 너무 높아져서 그렇지 지금의 장문인이신 대현검 청문만 봐도 다른 문파의 배분들보다 강해서 사파의 씨를 말려버린 게 그들이지 않은가. 마음을 다잡던 연홍 련이 일어나자 뒤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이야?”
“힉?!”
놀란 연홍 련은 입을 막은 채 고개를 돌린다. 방금까지 훈련하고 있었는지 정문에서 나온 청명은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연홍 련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나타난 청명에 놀란 것도 있지만 정확히는 그의 차림새에 더 놀랐다. 도복에 가려져 있던 거대하고 탄탄한 가슴과 뭘 어떻게 훈련하면 저렇게 근육이 갈라질 수 있는지 싶은 복근이 드러나져 있다. 연홍 련은 자신이 청명의 몸을 조금 길게 보고 있었단 생각에 빠르게 고개를 돌린다.
“그...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지나가다가 들려본 거인데…”
어떻게 말해도 이상했다. 화산을 지나가다 들른다는 변명은 대체 뭐란 말인가. 당황한 나머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저 인간은 어떻게 만날 때마다 늘 갑작스럽단 말인가. 처음 화산에 올 때도 도사들이 훈련하는 건 보긴 했었지만 누구도 저렇게 상의를 헐벗고 훈련하는 이는 없었는데. 아니 지금은 자신이 갑자기 찾아온 것도 있으니 결국 내 탓인가. 연홍 련은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올라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청명은 연홍 련의 뒤로 다가와 머리에 턱을 괴며 내려본다.
“나 보려고 왔어?”
민망함에 도망이라도 가고 싶은 연홍 련은 얼굴에 열이 남아있었지만 다시 돌아가긴 글렀다. 어차피 화산에 온 이유가 청명을 볼 생각이었지 않은가.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 화산에 온 용건은 시작이라도 할 수 있는 셈이었다. 연홍 련은 옅게 붉어진 얼굴로 청명을 흘겨본다.
“..그러면 안 되나요?”
청명은 그대로 굳은 채 연홍 련을 한참 내려본다. 훈련을 하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 나왔더니 이 여인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임에도 여전히 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지만 전보다 앳된 느낌은 벗어나져 있다. 제 몸보다 그득한 봇짐을 가지고 끙끙이고 있어 부르자 얼굴을 가리니 가까이서 확인 하고싶다. 제게 꽂혀서 바라보는 눈동자가 일렁이니 순간 자신도 울렁였다. 그녀가 자신을 보러왔다하니 기분이 간질거렸다.
“청명아-”
청명의 입이 달싹이려다 그를 부르는 청문의 목소리에 흠칫한 청명은 빛살처럼 빠르게 뒤돌아본다. 그와 마찬가지로 훈련을 해서 땀을 흘린 청문이 수건을 목에 걸고 청명을 보고 있다.
“아- 장문 사형.”
청명은 어색하게 청문에게 반응하여 그에게 한 두걸음 앞으로 발걸음 옮긴다. 연홍 련 역시 청문의 목소리에 긴장하여 허리를 피고 삿갓으로 머리를 가렸지만 청명의 거대한 몸통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고 가녀린 그녀의 체구까지 가려지게 된 건 청명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저 청문의 의심을 덜기 위해 제 뒤에 있는 연홍 련 쪽으로 붙을 순 없으니 그에게 가까이 갔을 뿐이다. 청문은 의심스레 눈이 가늘어진다.
“씻으러 가지 않고 뭣 하느냐. 옷 여미고 얼른 씻어라.”
“아-아 그럼요, 그럼요. 씻으러 가야겠네. 이 사제 바빠서 먼저 가보겠습니다요.”
청명은 머리를 긁으며 그대로 뒤로 한발짝 물러나니 청문이 한숨을 쉬며 내뱉는 말에 경직된다.
“씻고 나면 뒤에 계신 낭자도 데려다주고 오거라. 화산의 밤길은 금방 어두워진다.”
청명과 같이 경직된 연홍 련은 이 상황에 대한 수치스러움에 삿갓 아래에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지금, 격렬히, 제발 삿갓 속으로 제 몸을 숨길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숨고 싶다. 연홍 련은 자신의 손안에서 내적 비명을 지르다 천천히 심호흡한다. 표정을 가다듬은 그녀는 청명의 뒤에서 벗어나 삿갓을 벗어 청문에게 정중히 인사한다.
“그……인사가 늦었습니다 장문인. 실례가 안된다면 객으로 하루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장문인께 상담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뭐?”
청명은 연홍 련의 말이 황당한지 고개를 돌려 연홍 련을 본다. 청문 역시 놀랐는지 연홍 련을 보다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정문을 열어준다.
“실례라니요, 공기가 차니 우선 안에 드시지요.”
연홍 련은 청문의 허락이 떨어지자 바닥에 내려둔 짐을 챙겨 쪼르르 청문에게 간다. 청명은 얼빠진 얼굴로 제게 멀어지는 연홍 련의 뒷모습을 본다.
‘아니, 나 보러 왔다며. 장문 사형 말에 왜 바로 따라가는 건데??? 객을 받는 날도 아닌데 어디 신성한 도관에 함부로 머물려고??’
청명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어이가 없는지 연홍 련을 따라나선다. 아무리 장문인이 허락했다지만 이건 아니지!
“아니 사형! 장문 사형!”
청명이 정문을 들어서려 하자 청문은 문을 잡아 소매로 제 옆에 연홍 련의 시야를 가려낸다. 청문의 표정에서 못마땅함이 서린 표정으로 청명을 바라본다.
“너는 도사란 놈이 항상 옷을 정갈히 해야 한다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얼른 씻고 와라.”
청명은 답답하단 듯이 청문을 보지만 그는 단호했다. 시선에 못이긴 청명은 결국 마지못해 계곡으로 뒤돌아 떠나니 청문은 연홍 련에게 시선을 주어 부드러이 웃는다.
“저번에도 오셔서 아시겠지만 화산은 도문이라 객이 지켜야 할 도리가 있으니 옥천원으로 먼저 가보면 되겠소. 청진아, 부탁하마.”
“아... 네, 감사합니다. 장문인.”
청문이 웃으며 그도 씻으러 계곡으로 떠나니 연홍 련은 한숨을 돌렸다. 청명의 등장에 놀란 것도 있지만 자신도 화산을 올라 땀을 흘린지라 옷도 정비하고 씻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짐도 내려두고 싶고. 그렇게 연홍 련은 다가온 청진을 따라가면서 세 사람은 각자 발걸음을 돌린다.
**
“연홍에 돌아간다는 것이오?”
의복을 정비하고 돌아온 청문의 질문에 연홍 련은 조금 민망한 듯이 웃는다. 장문인의 처소에 자리잡은 둘은 다탁 위에 매화차가 놓여있다. 연홍 련이 먼저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악단에 있을 땐 가능한 신분을 숨기고 있었던 지라 소개가 늦어 송구합니다, 장문인.”
“아, 아니 제게 사과할 건 아니지요! 이해하오.”
상담하고 싶다 하여 차를 우리고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녀의 관해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연홍세가가 권세가라는 걸 알아도 세가의 소공녀를 직접 마주하게 될 거라는 건 청문에겐 생경한 일이었다. 어쩐지 행동거지나 말씨에 품위가 있더라니. 청문은 고개를 끄덕이다 의문이 드는지 입을 열었다.
“헌데... 상담하고 싶다는 게 그럼 연홍에 관련된 것이오?”
연홍 련은 허리를 펴고 본론을 얘기하기 위해 잠시 숨을 돌린다. 그녀 역시 이 얘기를 청문에게 하는 게 좋을지 고민이었지만 자신이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이상적인 도인이라면 청문이었다. 청문에게도 알려야 되는 사항이라면 들린 김에 얘기하는 게 낫겠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연홍 련은 품에 가진 서신을 청문 앞에 내민다. 칼날 위로 피어난 산사나무 문양이 붉은 밀랍으로 찍혀 있었다. 연홍의 인장이 담긴 서신이었다.
“제가 설명하기보단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청문은 의문스레 연홍 련을 보다 그녀가 내민 서신을 받아 훑어본다. 그는 서신을 풀어 읽어보다 놀란듯이 연홍 련에게 묻는다.
“마교에 대해 알아낸 게 있다니 이게 무슨...소공녀께선 짐작되는 부분이 있소?”
당장에 자신들도 마교가 잔혹한 이들이라는 것만 알지 그들에 대한 정보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연홍에서 마교에 대해 알아낸 게 있다니. 대처법을 강구했다는 것인가. 청문은 경악스러움도 잠시 침착하게 되물으니 연홍 련은 고개를 저으며 서신을 다시 제 품에 가져와 정리한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연홍에 가야지요. 회의를 위한 소환장이라는 건 쓰여 있지만 자세하게 쓰여있지 않아 저도 난감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게 다 추측이었다. 시기도 자신이 딱 도착했을 때쯤 회의을 하려는 것도 그렇고 알 수 없는 거 투성이지만 인장은 가주인 아버지의 것이 확실하다. 당사자인 자신도 생각이 많았는데 청문은 저보다 혼란스러울 것이다. 연홍 련은 청문에게 제안한다.
“그래서 장문인, 청문 진인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부탁이오?”
“괜찮다면 연홍까지 저와 동행해 줄 사람이 필요할 듯한데, 장문인이 추천해줄 수 있으실지요. 시기가 불안정하다보니 혼자서는 조금 고민되서요.”
연홍 련의 말에 진중하던 청문이 멈칫이다 곧 부드러이 웃는다. 인자한 눈에 서린 눈빛이 어딘가 장난기가 깃든 그는 순순히 대답한다.
“이거 제가 실례했소이다. 그럼 청명이랑 가보는 건 어떻습니까, 소공녀. 그를 보러 온 거 아니오?”
청문의 말에 연홍 련은 생각지 않았는지 당황스러움에 옅게 빨개진다. 진중하실 거란 모습과 달리 짓궂은 질문을 하실 줄은 몰랐지만 부정하기엔 이미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으니 할 말이 없었다. 연홍 련은 민망함에 애꿎은 잔머리를 귀로 넘긴다.
“그... 부끄럽지만 속된 마음으로 도관에 찾아뵙게 되어 면목이 없습니다.”
좀 전까진 예의 바르고 의젓한 여인이 지금은 수줍은 소녀 같은 반응에 청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제 아들처럼 키우던 청명이가 마음에 둔 여인이 그와 마찬가지로 같은 연심을 가진 걸 보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리. 이보다 재밌는 구경도 없고 말이다. 청문은 다정히 웃으며 연홍 련에게 말한다.
“그럼 연홍세가로 완전히 돌아가시는 것이오?”
“연홍에 가야 보다 확실하겠지만, 저 역시 가주님의 뜻에 따라야 하는 몸이니까요.”
연홍 련은 쓰게 웃으며 청문에게 대답한다. 청문은 납득하고는 재밌는 듯이 미소가 진해진다.
“괜찮다면 청명의 어디가 좋은지 물어도 되겠소?”
연홍 련은 청문의 질문에 작게 입을 꾸물인다. 보기보다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 두 번은 당황하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마음을 들키고 한 것에 민망함은 남아있어 옅게 빨개진 뺨을 손으로 쓸어낸다.
“정말... 장문인, 짓궂으십니다. 검존이 동행한다면 저야 좋지만…그 분 의사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무려 매화검존이다. 마교에게 있어 사신과도 같은 그라면 자신의 호위가 아니더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도 많을 텐데 굳이 자신과 동행할까. 이건 자신의 희망과는 별개이다 보니 억지로 데려가고 싶진 않았다. 같이 가면 적어도 며칠은 붙어있을 텐데 이동하면서 불편한 건 자신도 사양이었다. 연홍 련의 우려에 청문은 인자하게 웃는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오.”
연홍 련은 청문의 말에 고개를 갸웃댔지만 그는 자신이 우려낸 매화차를 마시며 예상되는 청명의 반응을 곱씹는다. 그 아이라면 분명 거절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이 하는 말엔 그래도 잘 듣는 이가 청명이지 않은가. 이번엔 단순히 제 말 때문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
‘생각보다 날 좋게 봐주셔서 다행이지. 갑작스레 찾아온 건데 순순히 머물게 될 줄이야.’
처음 화산에 머물렀을 땐 언니들과 다 같이 쓰느라 다소 정신 사나웠는데 이번엔 객잔을 혼자 독점해서 쓰니 유독 넓게 느껴진다. 그 덕에 내부에 있는 욕실도 편히 써서 여유롭게 쉴 시간이 생겼다. 하나로 땋던 머리가 풀어낸 연홍 련은 부스스해진 감색 머리카락을 빗어내기 시작한다. 숱이 많아 빗질을 해두지 않으면 곧잘 머리카락이 엉키는 그녀는 능숙하게 빗질을 하고 펼쳐둔 금침에 풀썩 눕는다. 오랜만에 바닥에서 잠들어서 그런가. 아님 혼자 쓰기엔 휑하게 넓은 객잔이라 그런가. 눈이 감기기는 커녕 말똥거리니 천장을 보던 연홍 련은 결국 다시 일어나 침의 위로 장포를 걸치고 방을 나선다.
‘화산의 밤은 조용하구나.’
그때 왔을 땐 화산의 초식을 견문하고 언니들이랑 같이 합을 맞추고 하느라 조용한 줄 몰랐는데. 이렇게 느긋히 밤에 화산을 둘러보는 건 처음이었다. 청강석으로 다듬어진 연무장을 가로질러 담벼락 위로 보이는 매화가 달빛을 받아 소담히 피어진 분홍 꽃이 유독 운치가 있다. 아직 봉우리가 완전히 만개하지 않았지만 절정에 다다르면 지금 느껴지는 매화향이 더 진해지겠지. 천천히 주변을 걷던 연홍 련은 담벼락 구석에 정돈되어 있는 목검을 본다.
‘그러고 보니, 이젠 연습할 일이 없구나.’
공연할 때나 연습할 때 항상 갖고다니는 거였는데. 이제는 더 연습을 안 해도 되니 어쩐지 허전해졌다. 몸을 안 움직여서 잠이 오지 않았던 건가. 연홍 련은 세워져 있는 목검을 하나 들었다. 객이 마음대로 써도 될 까 싶지만 자정이 넘어가고 한 시간이라 주변에 다니는 사람이 없다. 검무만 가볍게 추고 다시 돌려놓자.
목검을 잡은 연홍 련은 자세를 가다듬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달빛 아래에 연홍 련의 그림자가 춤을 추듯 움직인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팔이 때로는 바람을 갈라내어 소리가 날카롭다. 팔을 멈출 때면 박력까지 느껴질 정도로 검무에 집중하던 연홍 련은 옅게 땀을 흘렸다. 가볍게 추려던 의도와 다르게 작게 숨을 고르는 그녀는 목검을 내려본다. 이게 진검이었으면 제 얼굴이 날에 보였을 텐데. 가만히 검을 바라보던 연홍 련이 나직이 입을 연다.
“…왜 보고만 계십니까, 검존?”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또렷하게 부른 연홍 련의 뒤로 느릿한 발걸음이 다가온다.
“언제부터 알았어?”
자신이 있다는 걸 알고 부른 것이 신기한 청명이 묻자 연홍 련의 대답은 다소 뜬금없었다.
“매화 향이 짙게 날 때부터요.”
정확하게는 그에게 나는 기감을 느낀 거지만. 처음부터 보고 있었으면서 몰랐을 거라고 생각한 그가 조금은 순진해 보였다. 시선을 읽는건 자신에겐 무인이 검을 드는 것 만큼이나 익숙한 것을. 향에 민감한 것도 없지 않아 영향이 있지만 연홍 련은 굳이 설명하지 않고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긴다.
“검존께 보이기엔 광대놀음이었을 텐데 어떤가요?”
연홍 련의 질문에 청명은 목덜미를 긁적인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줘야 될지 모르겠다. 청명은 어색하게 제가 할 수 있는 표현을 드러낸다.
“…나는 춤에 관해선 모르지만…..월하가인이 있다면 그대 같겠지.”
연홍 련은 멈칫했다. 그녀는 무희로 지낸 만큼 칭찬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검무에 대한 칭찬이라면 타인에게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지만 이제 그녀는 무희도 아니고, 더 이상 월하가인 서월도 아니었다. 거기다 지금은 무대에서처럼 화장한 것도 아니고 그저 연습하던 모습일 텐데. 한 번도 자신이 춤추는 걸 본 적 없는 그의 입에서 제 별명이 불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기대하지 않던 칭찬에 연홍 련은 제 뺨을 감싸보았다.
‘지금, 얼굴이 빨갛던가. 뜨겁진 않은데.’
청명은 연홍 련의 대답이 없으니 슬슬 불안해졌다. 자기가 이상한 말했나. 표정을 굳혀 그녀를 보고 있으니 뺨을 잡아 가늘게 내려보던 눈동자가 제게 닿아졌다.
“그게... 생각지도 않은 말이라 놀라긴 했지만, 기쁘네요.”
검무를 추느라 투명하던 피부에 옅게 붉어진 얼굴 위로 제비꽃 눈이 반달처럼 예쁘게 웃으니 청명은 그대로 굳은 듯이 그녀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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