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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청명] 착각 3_完

그 모든 게 착각이 아니었음을 안 백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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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포함 약 10,000자

백천은 마지막까지 청명의 뒤를 쫓아 화음현에 갈 생각이 없었다. 

그 여인과의 약속이 오늘이란건 알고 있었다.

청명이 따로 말해주진 않았어도 그의 방을 찾아갔을때 청명이 그를 내쫒으며 분명 ‘효과가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효과란 분명 소문을 말하는 거겠지.

왜 그 여인과의 관계를 저잣거리에 소문내려는지 백천으로서는 알수 없지만 청명은 그 기회를 장이 들어서는 오늘로 봤으리라.

백천의 예상대로 청명은 오늘 수련시간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백천은 제 할일에 집중하자며 최선을 다해 청명에 대해 신경쓰지 않으려했다.

그가 언제나처럼 절벽을 오르려 돌 틈새 사이로 손을 올리려는 순간, 백천의 다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뒤돌아 화산의 산문을 향해 뛰쳐나가고 있었다.

뒤에서 사형제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백천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사실 청명이 여인과 만나겠다고 선언한 그날부터 백천은 하루 두시진도 못자는 날이 계속되었다.

머리는 시시때때로 지끈거렸고 몸은 솜에 물을 먹인 듯 무거웠다. 단정했던 얼굴에 먹구름이 씌인듯 칙칙해졌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청명의 상태는 좋아보였다. 여전히 아침저녁으로 강도높은 수련을 했고, 식욕도 왕성했으며,서신이 올때면 히죽히죽 웃으면서 제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청명은 이제 정말 백천따위는 안중에도 없는것 같았다.

제게서 억지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고, 어쩌다 백천과 단둘이 있어도 이전과 다름없이 행동했다.

마치 그날의 일이 없었던 일인것처럼.

그게 몹시도 불쾌했다. 그래 불쾌했다.

청명을 향해 뭐라도 한마디 쏘아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하다못해 청명을 빠져들게한 그 여인의 얼굴이라도 봐야했다.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린 백천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수 없었다.

‘어디에 있지?’

달음박질하여 화음까지 내려온 백천이 청명의 기척을 찾았다.

기감을 펼쳐도 이 많은이들 사이에서 청명을 찾는일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그 화산검협이 여인이랑?”

“그렇다니까! 아직 어린 여인이지만 더 크면 미인이 될걸세, 화산검협도 미청년이니 잘어울리는 한쌍이야.”

“어허, 화산파에서 혼인소식을 못들은지 오래인데 간만에 들은게 화산검협의 혼인소식이라니! ”

“아직 확실한건 아니지. 그저 아는 세가의 아가씨일수도.”

“에헤이!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니까!”

객잔앞에서 술을 마시던 이들의 대화를 들은 백천은 청명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걸 확신했다.

그리고 그 여인과 함께있다는 것 또한.

'일단 청명이를 찾자.'

무작정 걸어가는 백천의 머릿속엔 청명을 찾겠다는 생각뿐이였다.

그의 얼굴을 보고 확인하고 싶었고 따지고 싶었다.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걷던중 문득 ‘확인? 무슨 확인? 청명이를 찾아서 무엇을 확인 하려고?’

순간 제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려했는지 깨달은 백천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정인끼리 만나는 자리에 처들어가서 도대체 무슨 얼굴로 두사람을 볼 것이란 말인가. 또 청명에게는 무엇을 이유로 화를 낼것인가.’

자꾸 떠올라서 제 잠자리를 방해한 죄를 물을 것인가?

아니면 왜 화음현에 저와 같이 오지 않았냐면서 떼를 쓸것인가?

‘그 무엇이 되었던 청명이에게 해서는 안되는 말이고, 나는 이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백천의 발은 멈추지 않았고 백천의 눈은 청명을 찾았다.

백천은 제 자신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다 포기해 놓고서는 무슨 염치로 그를 찾는단 말인가.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왜 청명을 쫓는걸 그만둘수 없느냔 말인가.

방금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청명을 만나고 싶었는데 제정신이 조금 돌아오니 또 이대로 못찾았으면 싶기도 했다.

그가 제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제 사질은 언제나 소란의 중심에 있었고, 백천은 보통의 무인보다도 뛰어난 청각을 갖고있었다.

사실 그토록 찾아 헤메던 이의 이름이라 들렸다는 것을 백천이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 뿐인지도 모른다.

지나다니는 양민들 사이에서 청명의 이름이 들린다. 

화산검협...청명...화산신룡...화산제일기재...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이름 모두가 백천의 귀에 선명히 닿았다.

백천은 이끌리듯 청명의 이름이 점점 더 많이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언제나 청명이 이름이 들리는 곳에는 백천이 그와 함께 있었다. 오늘까지는.

백천이 향한 길의 끝에는 청명이 있었다.

여인과 함께 있었다.

청명은 신중하게 장신구를 고르고 있었다.

여인에게 줄 장신구였다.

청명을 발견한 순간부터 백천의 머리속에는 주변 모든 소리가 사라진 채 자신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하지만 이내 백천의 시선이 청명의 얼굴을 향하고, 그의 눈에 담긴 진중함을 보았을 때 백천의 귀에는 그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저 오감이라고는 시각만이 존재하는 듯 백천은 청명만을 보았다.

청명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고 그의 정인 되는 여인이 한마디 하자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인에게 전낭을 건냈다.

온갖 귀한 것이 오가는 화산에서도 본적 없는 귀한 홍옥이 달린 장신구였다.

단순히 값이 나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값이야 지금의 화산이라면 수십개를 사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백천이 화산에서 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이유는... 누가봐도 정인끼리 주고받을 법한 물건이였기 때문이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건만 어찌 알고 그런걸 고르냔 말이다.’

백천의 시선이 청명의 손을 쫓았다. 그의 손이 여인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여인에게 고운 함에 담긴 홍옥 장식구를 전하는 청명의 손을 당장이라도 낚아채서 자신을 보도록 하고 싶었다.

이게 무슨짓이냐며 날뛰는 청명을 끌어안고 놀라는 청명의 정인을 노려보며 그의 입술에 제 입을 맞추고 싶었다.

선남선녀라며 호들갑을 떨어대는 양민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경악에 물들게 하고 싶었다.

청명의 저 눈이, 저 손이 전부 자신에게만 향하게 하고 싶었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면 하다못해 저 홍옥 장신구를 둘이 보는 앞에서 깨트려버리던가 아니면 차라리 누구의 손에도 닿지 못하게 제 목구멍으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미친거지...내가 미친거야.”

청명과 여인사이를 당장이라고 떼어놓고 있는 그의 상상 속과는 달리 현실의 백천은 그저 우두커니 선체 멍하니 중얼거릴 뿐이었다.

결국 백천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함에 담긴 홍옥 장신구는 청명의 손에서 여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함을 받은 여인이 청명을 향해 수줍게 웃었다.

멈췄던 백천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여인의 저 표정은 백천이 그날의 청명에게 전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날, 그 절벽 밑에서 청명의 연심에 백천이 응했다면, 저 여인처럼 청명을 마주보고 수줍게 웃어주었다면, 청명의 정인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홍옥장신구를 주고받는 사람 역시 백천이었을 것이다. 

때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든다.

발목을 스치던 파도는 어느새 너울이 되어 백천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연심을 착각한 이는 청명이 아니었다.

“동룡이가 상관할 일이 아닌데.”

백천의 분노에 청명은 차갑게 일축했다.

“저 여인이 소중하지 않았느냐?”

“소중하지.”

물론 친우로서다. 소중하지 않았다면 이런 촌극에 어울려줄리 없었다.

“지금이라도 쫓아가거라. 더 늦기전에 얼른!”

“아니 안 쫓아갈거야.”

“네가 가지 않겠다면 나라도 가겠다.”

백천을 청명을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사숙, 정말로 내가 초흔을 쫓아갔으면 해?”

청명의 말에 걸음을 멈춘 백천은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동룡아, 나는 정말 괜찮아.”

“도대체 뭐가 괜찮은데!!”

숲이 떠나가라 소리친 백천이 청명을 향해 돌아봤다.

큰 보폭으로 청명에게 다가오더니 청명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차마 닿지는 못한 채 주먹을 움켜졌다.

“너는 행복해져야 한다. 청명이 네가 저 여인과 함께 해야지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여인을 데려올 것이다.”

“와 방금전에 초흔한테 들은 말이랑 똑같네. 쟤도 그러더라고 나한테. 행복해지라고.”

청명을 절망으로 밀어 넣은 여인이 뻔뻔하게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가 감히.

백천은 이를 으득하고 씹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뻔뻔한 여인이라 할지라도 청명의 곁에 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를 하는 건 자신만으로 충분했다.

이미 한번 청명을 제 손으로 절벽에서 밀어버린만큼 자격이 없을지라도 백천은 청명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설령 때늦은 제 마음을 잘게 으깨어 보이지 않는 구석에 치워버릴 지라도.

백천이 화음현 한가운데 서서 제정신을 차리건 여인을 안아들고 사라진 청명의 뒤를 쫒는 사내를 발견하고 나서였다.

누군가 청명을 쫒는다는 것을 알게된 백천은 방금까지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 무엇보다 청명의 안전이 우선인 백천은 사내의 뒤에 붙었다.

아무래도 사내는 무공을 깊이 익힌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부로 어설픈 척 방심을 유도하는 자들도 있으니 백천은 청명보다도 한참은 뒤쳐진 사내를 계속해서 쫒았다.

느린 경공을 펼치던 백천은 이 사내와 함께 도착한 곳이 자신에게 지옥과도 같을 것이란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달려갔다. 

한 발작 또 한 발작 내딛으며 백천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백천이 알고있던 연정이란 정인을 위해 고운 꽃신을 사들고 그의 발에 손수 신겨주며 혹여 새신에 먼지라도 묻을까, 그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제 등에 업어주는 것이였다.

다죽어가는 사질 놈이 제발 버텨주기를 기도하며 들쳐업고 가슴이 터지도록 달리는게 아니라.

하지만 그럼에도 그놈 입에 들어가는 가재 하나가 기꺼워서 손수 까먹이는것도, 팍팍한 용돈이지만 매번 그놈 먹을 당과를 사가는것도, 아무렇지 않게 방으로 들어간 놈의 상처를 눈치채고 잠든척하는 녀석의 등에 약을 발라주는것도 동시에 연정이였다.

우습게도 백천은 청명을 향한 제 모든 행동에 그에 대한 연정이 담겨있었음을 이제와 깨달았다.

청명이 오해했을 모든 행동은 결코 오해가 아니였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청명에게 그가 줄 수 있는 모든 연정을 주리라.

‘하지만 이제 모든것이 늦어버렸구나.’

사내가 달려가는 방향 끝에 청명과 여인이 있음이 느껴졌다.

사내와 거리를 유지하던 백천은 다시 한번 사내의 기도를 살폈다.

역시나 위협적인 기세가 없어 백천은 이정도라면 청명에겐 문제가 없다 판단했다.

사내와의 거리를 줄이지 않은채, 그럼에도 위험하면 언제든 뛰쳐나갈수 있도록 나무 위에 몸을 숨겼다.

백천은 사내보다도 먼저 청명의 손이 여인의 손을 맞잡으려 하는 모습을 보았다.

백천은 이제는 닿고 싶어도 닿을수 없는 청명의 흉터투성이의 손을 당연하듯이 잡을 수 있는 여인에게 격렬한 질투를 느꼈다.

‘어쩌면 앞으로 수없이 봐야하는 모습일지도 모르지.’

뛰쳐나간 사내가 청명의 손을 쳐내지 않았다면 제가 나섰을지도 모른다.

사내의 정체는 청명의 정인을 연모하는 자인듯 했다.

여인을 숨긴채 나름 사내답게 청명에게 맞서는 듯 했으나 청명을 상대로는 부질없는 짓이다.

양민일테니 대가리는 아니더라도 곧 정강이나 볼기를 걷어차인 뒤 쫒겨날것이다.

본래라면 백천이 청명의 과도한 폭력을 막기위해 나서야할 때지만 오늘은 나서고 싶지않았다.

‘실컷 얻어맞으라지.’

백천은 청명의 정인을 향해서 이루말할 수 없는 질투심을 느꼈지만, 그보다도 청명의 행복을 막으려드는 저 사내가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백천의 기대와는 다르게 청명은 사내를 때리지도 사내 뒤에 숨은 여인을 되찾아 오지도 않았다.

‘왜…?’

‘도대체 왜 도와주는 거지…?’

누구보다 청명을 잘 아는 백천이기에 사내를 위협하는 청명을 태도를 보고 단박에 눈치챘다.

그는 사내를 아니, 여인을 도와주고 있었다.

사내를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에서 청명을 향하던 수줍음과는 다른 감정을 보았다.

그 안에 담긴 것은 여인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저 사내와 그리고 청명을 향한 백천의 감정과 닮아 있었다.

결국 청명은 떠나가는 두사람을 붙잡지 않았다.

청명에게 연모하는 이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와는 비교도 안되는 절망이 백천을 뒤덮었다.

청명은 절대로 이런 취급을 받으면 안된다.

그 누구보다 행복해져야만 했다.

백천이 준 상처따위는 기억저편으로 날려버릴만큼 행복해져서 그에게 일말의 기회조차 주면 안됐다.

청명은 평생토록 후회하는 백천을 비웃어야만 했다.

방금전까지 사내도 여인도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백천이지만, 홀로 남은 청명을 바라보자니 제 스스로도 무엇을 원하는지 도통 알수가 없었다.

단지 청명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명이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청명이 저처럼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숙 다시 한번 물을게. 내가 초흔을 되찾아 왔으면 좋겠어?”

웃음기를 뺀 청명이 백천을 마주봤다.

“...”

“사숙이 원하는 대로 할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백천은 때때로 청명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바로지금처럼.

그렇지만 청명이 자신의 무언가를 시험하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수 있었다.

백천을 향한 청명의 시선이 마치 이전과 같은 열기를 품은 것만 같아서, 그날의 붉음이 꺼지지 않은것은 아닐까 착각하게 된다.

자꾸만 희망적인 방향으로 가려는 생각을 두들겨 패면서도 혹시나…정말로 만의 하나…자신에게 기회를 준거라면.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백천이 다음으로 하는 말에 의해 두사람의 관계가 변한다는 것을.

백천은 청명의 무엇이 되고 싶은가.

그의 행복만을 바라며 살아간다고 결심했었는데. 더이상 청명에게 제 이기심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만약 자신이 아직 그의 행복이 될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청명이와…’

“...가지…말거라”

“왜?”

“네가 아깝다.”

“지금까지 하던 말이랑 정반대네. 누굴데려오든 상대가 아까울 거라더니.”

“누굴 데려와도 네가 아까울 거다.”

청명이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지금 나 차였다고 위로해주는거지.”

“그런게 아니다. 진심으로 청명이 네가 아깝다.”

“말이라도 고맙네. 근데 생각보다 괜찮아. …두번째이기도 하고…”

그 말에 청명을 바라보던 백천의 눈이 흔들렸다.

“딱히 사숙을 탓하는건 아니야. 그냥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그래.”

“왜 네가 미안해하느냐. 사과해야하는건 나다.”

마치 울것같은 표정의 백천을 보며 청명이 말했다.

“내가 착각했으니까.”

그 한마디에 백천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착각…? 착각이라고..? 그때 그 고백이, 연심이 착각였다고, 한순간도 날 연모한적 없다고 다 잊어달라고 할셈이냐! ”

설령 그게 진실일지언정 백천은 전력으로 부인하고 싶었다.

제가 먼저 청명의 연심이 착각이라고 치부해 놓고 이제와서 그날의 일이 청명의 진심이기를 바랬다.

언젠가는 누군가와 함께 할 청명을 바라볼 수 밖에 없기에 청명의 마음이 한때나마 자신을 향했었다고 믿고 싶었다.

그날의 연심을 청명의 입을 통해 부정당하고 싶지 않았다.

청명은 격한 반응을 하는 백천의 손을 붙잡아 그의 손을 자신의 가슴께에 올려놓았다.

“맞아. 그때 그 고백도 연심도 착각이었어.”

청명에게 손을 붙잡힌 채로 듣기 싫다는듯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백천의 눈가를 청명이 남은 한손으로 닦아주며 계속 말했다.

“이게 연심이야.”

청명의 가슴에 얹어진 백천의 손을 통해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입을 벌린채 할말을 잃은 백천은 청명의 심장소리가 전해지는 제 손을 바라보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듯 청명이 이끄는대로 움직였다.

청명은 가슴께에 있던 백천의 손을 내려 그대로 제 손과 깍지를 꼈다.

“그리고 이게 고백이야. 사숙, 내가 사숙을 연모해.”

백천의 세상이 멈췄다. 

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도 풀벌레가 우는 소리도 모두 멈춘채 청명의 체온만이 손을 타고 느껴졌다.

마치 그날처럼 영원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이 이어지자 백천과 깍지를 낀 청명의 표정에 체념이 떠오르며 맞잡은 두 손이 풀리려했다.

백천이 서둘러 풀리려는 청명의 손을 붙잡았다.

이내 제 쪽으로 청명을 당겨 꽉 껴안았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빈틈없이.

“청명아…청명아아…나도 너를 연모한다. 내가 너를 연모해…바보같이 너무 늦게 깨달아버렸어…내가 먼저였다.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너무 돌아왔어…”

백천에게 다시한번 기적같은 기회가 왔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청명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하지 못했다.

백천은 제가 얼마나 미안한지, 얼마나 바보같았고, 얼마나 청명을 생각했으며, 얼마나 그의 행복을 바라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저 흐느끼며 청명에게 끊임없이 연모하고있노라 고백했다.

조금 전 그자리에서 오열하던 상 보다도 오래도록 청명에게 제 연심을 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를 졸졸 쫒아다니면서도 그들이 널 상처입히는걸 막지도 그렇다고 네 앞에 나서지도 못했다며 우울한 낯으로 백천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상처투성이인 청명의 손을 제 것인냥 놓지 않았다.

‘웃지마라. 웃으면 쫑난다.’

토끼같은 사숙이 자신의 죄를 고하면서도 제 손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에 청명은 제멋대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으며 생각했다.

“너는 내가 밉지도 않으냐.”

조심스레 묻는 백천에 청명은 그러거나 말거나 요놈의 동룡이를 어떻게 요리해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짐짓 진지해서 백천은 또 하나의 오해를 했다.

“역시 쉽게 용서하긴 힘들겠지. 청명아 나는 이미 내 실수로 인해 너와 함께할 수 있었던 시간을 적잔히 낭비했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아. 네가 하고싶은 말이나 하고싶은 것이 있다면 가감없이 말해다오. 무엇이든 받아들이마.”

백천의 대담함에 청명의 사고가 일순 정지했다.

청명은 백천이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미안해하는지 도무지 알수 없었다.

답지않게 소심하게 군 걸 초흔에게 지적받아 본래 제 성격대로 백천에게 들이받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청명이 굴러들어온 호박을 발로 차버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럼 사숙….”

“그래 청명아.”

백천이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청명을 바라보았다.

그를 보는 청명의 눈이 초승달처럼 얇게 휘었다.

“그럼… 우리 일단…”

찐하게 접문부터 하자.

백천과 청명이 정인이 된지 보름.

초흔에게서 서신이 왔다.

두 사람은 서안으로 돌아간후 부모에게 둘이 혼인하고 싶다 뜻을 전했다.

다만 혼인을 좀 미뤄 초흔이 방년(20살)을 맞을때까지 정인으로 있게 해달라고 했다.

부모는 상대가 화산검협이 아니란 사실만으로도 크게 기뻐하며 허락했다.

이로서 초흔의 자유연애계획은 성공했다.

처음부터 상대가 정해져있긴 했지만.

백천은 아직도 초흔과의 관계가 진짜라 생각하고 있었다.

청명의 마음의 상처를 의식해서인지 백천도 사형제도 그 일을 화두로 꺼내는 일이 없었다.

‘슬슬 말해줘야겠지?’

청명은 품에서 홍옥이 장식된 술을 꺼내며 생각했다.

‘조금만 더 즐기지 뭐.’

화를 내지 않아도 사형제들이 제 말에 눈치껏 수련하는것도 편했고, 무엇보다 저를 보석다루듯이 애지중지하는 백천의 모습을 더 보고싶었다.

언젠가 말해야 하겠지만 당분간은 현재를 즐기기로 하자.

그리고 그날이 오면

‘이것도 진짜 주인을 만나는거지.’

 

얼마안가 진실을 알게된 백천이 분기탱천하며 날뛰다 청명이 건넨 홍옥 장식을 받고는 온 중원을 돌아 최고급 홍옥 가락지를 찾아왔다.

양손을 덜덜 떨며 청명의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워주는 백천의 모습은 화산에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아래는 후기 겸 소장용 결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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