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귀환] 은恩을 갚겠소.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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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귀환 1001화 직후의 무언가를 가볍게 끄적여봤습니다.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퇴고X

※ 태극검제의 최후와 그 외 모든 것(성격 등…)에 대한 날조가 있습니다.

화산의 매화검존과 사천당가의 암존이 힘을 합쳐 주교인 광혼과 집법사자들을 물리치고 본단에 복귀했다. 마교의 큰 전력 중 한 축이었던 광혼과 그의 곁에 있던 집법사자들의 죽음으로 인해 제아무리 광신교도들이라 할 지라도 아주 잠깐은 그들의 기세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복귀 후 크고 작은 상처들을 치료받은 청명이 보급으로 들어온 술병 하나를 들고서 나무 그늘을 찾아 대충 털썩 주저앉아 주둥이에 술병을 꽂았다. 출전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술이나 마시며 숨을 돌릴 생각이었다.

눈 앞에 시커먼 옷에 허연 수염을 단, 아는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진 말이다.

"매화검존."

"……태극검제."

쓸데없이 분위기 잡는 취미는 없으나 상대가 먼저 그리 나왔으니 청명 또한 차분한 목소리로 상대를 대우했다. 물론 그렇다고 앉아있는 몸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지만.

전쟁 전에는 무한에 쳐들어온 그를 슬그머니 피하려다 붙들려 술과 안줏거리를 강제로 대접하곤 했던 태극검제였으나 이번만큼은 그를 먼저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태극검제는 전쟁 전처럼 마냥 깔끔하고 체면을 차리는 모습은 아니긴 해도 대충 나무 그늘 하나를 찾아 흙바닥에 털썩 앉아있던 청명과는 달리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단정한 차림새를 유지하는 듯했다. 복귀하기 전 광혼과의 전투 직전에 본 무당의 모습에 기분이 나빠질 대로 나빠졌던 청명의 표정이 태극검제를 보자마자 대번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앞에 선 태극검제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포권하고서 말했다.

"……무당의 제자들을 구해주었다 전해 들었소이다. 감사하오."

"허, 별 말씀을."

체면 차리는 건 영 낯간지러우니 한 번으로 충분하다. 눈빛으로 대충 할 말 끝났으면 가라고 말한 청명이 다시 심드렁해진 표정으로 턱을 괴고서 술병을 흔들었다. 그런데 감사 인사만 가볍게 하고 떠날 줄 알았던 검제가 발을 떼지 않는 것이 아닌가. 더 할 말이 있느냐는 듯 청명이 눈알을 굴려 위를 바라보자 어두운 낯의 태극검제가 숨을 들이마시고는 말했다.

"사문이 매화검존께 은혜를 입은 바가 있으니, 부족한 몸이지만 언젠가 내 화산에 은恩을 갚겠소."

"……뭐? 은? 야, 내가 뭐 무당 놈들이 예뻐서 구해준 것 같냐?"

체면이고 나발이고, 어이가 없어서 청명이 눈을 크게 뜨고서 물었다. 만약 이번 광혼과의 전투 때처럼 청문의 명이 있었고, 마교 놈들의 손에 종남의 어린 제자들이 죽어가는 꼴을 봤더라도 청명은 무당 녀석들을 구해냈던 것과 같이 움직였을 것이다. 악감정이 있건 없건 정파의 죽음은 결국 이쪽 손해니까. 이 전쟁을 조금이라도 더 빨리 끝내려면 이쪽 전력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있어야 하니까. 이 생각은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그러니 만일 검제 녀석이 화산의 지원 요청을 받고 나가서 화산의 제자들을 살려 보낸다고 해도 청명은 녀석에게 은을 갚겠다느니 하는 헛바람 든 소리는 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전쟁이 장난도 아니고, 은이고 원이고 아무튼 갚고 보겠답시고 설치다가 죽는 녀석을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니었다.

청명의 뾰족한 대꾸가 익숙하다는 듯 태극검제가 꿋꿋이 말했다.

"무당의 제자는 한 입으로 두말을 하지 않소이다. 나는 분명 말했소. 은을 갚겠노라고."

"얼씨구? 누가 보면 뭐, 화산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줄 알겠다?"

"……형님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닌 듯한데…."

그 말에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검제가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화산도 주둥이는 하나라 한 입으로 두말은 안 하지만 난 원래 화산에서도 별종이라 한 입으로 세 마디도 하거든? 쓸데없는 데에 힘들이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라."

은은 개뿔, 하여간 무당 놈들 주둥이 터는 건 알아줘야 한다며 청명이 신경질적으로 술병을 입에 꽂았다. 더는 이야기하기 싫다는 뜻이다. 여기서 더 건드리면 폭발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검제 또한 더 제 말을 전하지 않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제 문파사람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이윽고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와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멈추었다. 주위에는 마교도들과 몇몇 아군들의 시신이 그득이 쌓여있었다. 숨 돌릴 틈이 나자 어디 숨어있었는지 전서구가 당보의 어깨 위로 슬그머니 착지했다. 발목에 묶인 서신을 펼쳐본 당보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은 청명이 물었다.

"본단으로부터 온 거냐?"

"예."

"왜, 뭐래?"

"……검제가 전사했답디다."

당보가 메마른 목소리로 말하자 청명이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 전 그를 찾아온 낯이 흐릿하게 떠오른 탓이다.

"검제? 무당의?"

"예."

"……그리고?"

"그리고라니? 그게 전부요."

당보가 서신을 반으로 접으며 시치미를 뗐으나 청명이 헛소리 하지 말고 더 읊어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렇게 두어번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결국 당보가 한숨을 내쉬며 어찌 알았느냐 물었다.

"네 녀석이 검제 놈 죽었다는 소식 하나에 보일만한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하여튼 나도 댁을 잘 알고, 형님도 날 잘 알아서 문제요."

"그래서. 또 뭐가 쓰여있었는데?"

"화산에서……."

화산이라는 말에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청명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한참의 지독한 침묵 속에서 청명이 마저 말해보라는 듯 말 없이 턱짓으로 재촉했다. 저래 보여도 제 사문을 어지간히도 아끼고 생각하는 양반이다. 빨리 이어 말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화산파 사람을 찾아, 보이는 마교놈들은 죄다 죽여가며 이 산을 샅샅이 뒤질 태세라, 당보가 한숨을 내쉬며 서신을 작게 접어 소매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화산에서 지원 요청이 와서 마침 본단에 복귀한 검제 녀석이 갔답니다."

"…그리고 전사했다는 거군. 그래서, 검제 외의 사상자는?"

"검제가 도착하기 전 타문의 네다섯 정도. 화산은 사상자는 없고 부상만 있다고 하오. 검제의 도착 이후 무사히 본단에 복귀했다고 하니…, 형님께서 굳이 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제야 왜 당보가 그의 죽음에 대해 전하려 하지 않았는지를 눈치챘다. 얼마 전 청명이 술을 마시며 그놈이 그런 말을 했더라며 주절주절 털어놨으니까. 이 난세에 은을 갚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일이 어딨느냐는 것이다. 당장 자다가도 명이 떨어지면 검을 들어야 하는 이 판국에 말이다. 그런데 태극검제는 기어이 제 입으로 뱉은 말을 지킨 것이다.

"……은을 갚겠다더니."

청명이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떤 미친 놈이 제 목숨으로 은을 갚는단 말인가. 말 없이 제가 만들어낸 피바다를 걸어가던 청명이 문득 뒤를 돌아보며 멈추어 섰다.

"왜 자꾸 멈추시오? 갈 길이 먼데."

"당보야. 술 좀 줘봐라."

"아니, 이 양반아! 이거 다 치료용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내가 마시려는 거 아니니까 한 병 내놔."

"……."

당보가 못 믿겠다는 듯 흘겨보았으나 청명의 손은 거둬질 줄 몰랐다. 고집 하나는 센 양반이니 어쩔 수 없겠거니 싶어 미간을 잔뜩 좁힌 당보가 신경질적으로 술병 하나를 꺼내서 넘겼다. 술병을 받아든 청명이 망설임 없이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청명이 몸을 돌려 두리번거리자 그 의도를 알았다는 듯 당보의 날카로운 눈빛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검제 놈이 어디쯤에서 죽었다고?"

"여기에서라면… 아마 북서쪽일 겁니다."

북서쪽으로 몇 걸음 성큼성큼 나아간 청명이 술병을 기울였다. 소리 없이 흐르는 술이 이미 피로 축축이 젖은 땅을 깊이 적셔 들어갔다. 무심히 술을 반 이상 쏟아부어 낸 청명이 다시 뚜껑을 닫았다.

"…여기에 검제가 묻힌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알아서 선계에서 마시라지."

"마시라고 줄 거면 맛이라도 있는 걸로 줄 것이지 아깝게 치료용을."

"야, 죽고 없는 놈이 맛있는 술을 어떻게 마시냐? 그게 더 아깝다. 그건 내가 마셔야지."

"그런데 왜 절반만 줍니까?"

"……."

"……야, 이 말코……."

아웅대며 걸어가다 이내 말이 없어진 청명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 친하진 않았어도 알고 있던 이의 부고를 들으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것이다. 청명도 여든이 넘는 생을 살아왔으니 부고를 들은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전쟁에 떠밀려 타인을 구하다가 죽진 않았다. 그리고 어울리지 않게 아득바득 은을 갚겠노라고 말하고서 화산을 구하다 죽었다고 하니…. 마치 자신이 녀석을 죽음으로 떠민 것 같다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잡생각을.'

그러게 내가 은을 갚겠노라고 했잖소. 처음 만났을 때 오만하던 그 태극검제의 목소리가 어째 근처에서 들리는 것 같아 청명이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더 있어봤자 포위 당하는 꼴만 볼 테니 얼른 복귀하지. 청명의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빠른 속도로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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