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청명] 바보와 바보
청명이 감정을 자각하지 못한 백천을 관찰(?)합니다.
※ 큰 스포일러는 없습니다만 백천의 직책(~1210)과 관련하여 가벼운 언급은 있습니다.
※ 그냥 문득 생각이 나서…… 손풀 겸해서 가볍게 썼습니다. / 퇴고 X
그는 여든이 넘는 인생 전체를 연애와 담쌓고 살았다. 이립을 바라보던 시절에는 길을 가다 평소에 보기 드문 미녀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눈길이 가긴 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사랑놀음을 하기엔 그가 참 도인이었기 때문…….
- 양심.
……그래, 그건 아니고. 그냥 그 시간에 술이나 마시고 맛있는 걸 찾으러 다니는 것이 더 재밌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간에! 그런 쪽에 영 아는 게 없는 청명조차도 자연스레 제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아득바득 제 곁을 지키려는 백천의 눈빛이며 낯을 보다 보면 신호가 오는 것이다.
‘저놈 저거……, 설마 나 좋아하나?’
아니, 저렇게 티를 내도 돼? 싶은 마음에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녀석의 행동을 너무나도 당연시하는 분위기에 청명은 제가 이제는 하다못해 도끼병에라도 걸렸나 싶더랬다. 물론 처음에 청명 또한 그의 행동이 한 문파의 대제자이자 장문대리로서 사질이자 문도를 지키고 보호하려는 움직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다른 놈한테는 안 그러잖아! 나한테만 그러잖아!
‘내가 너무 팼나?’
나를 이 정도로 만신창이로 만든 놈은 네가 처음이야, 같은 그런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에게 얻어맞고 저만치까지 날아간 횟수가 얼만데! 사춘기 올 나이도 지났으면서 저보다 훨씬 어린,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사질 놈에게 연심을 가지는 게 말이나 되나? 청명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처음에는 감정을 숨기는 줄로만 알았다. 하기야, 같은 남성을 좋아하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같은 문파의 저보다 열은 어린 사질 녀석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른 놈들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 끝이 어떻든 두고두고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 그 안에 든 상대가 여든 넘게 먹은 노인네인 줄도 모르고. 그런데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청명을 챙기려는 행위 자체에 익숙해져서 제 감정조차도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 제 딴에는 눈치가 빠른 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새인데, 제 감정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는 정도라니.
‘바보 아냐?’
백천을 바라보던 청명의 눈이 못마땅하다는 듯 한껏 가늘어졌다. 그 눈빛이 조금도 풀어질 기세가 보이지 않자 꾸역꾸역 수저를 움직이던 백천이 눈을 질끈 감고서 말했다.
“……청명아.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제발 말로 해라, 제발…….”
“사숙.”
“…응.”
“그거 다 먹고 검 들고나와.”
청명의 한 마디에 주위가 왁자지껄하던 주위가 조용해졌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왔다.
저녁의 찬 공기를 맞으니 잠깐 가출했던 이성이 점차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백천이 마음을 자각하지 않는다면, 혹은 고백하지 않는다면 둘 모두에게 좋은 일 아니던가. 고백받을 일이 없다면 청명 또한 그를 거절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청명은 언젠가 연모하던 이에게 차이고서 다른 사매들에게 위로받던 막내 사매를 떠올렸다. 녀석은 막내 사매라는 입장이었고 상대가 같은 문파 사람이 아니었기에 사매들에게 둘러싸여 그리 위로라도 받을 수 있었으나 백천은 다르다. 어디 가서 제 연심을 거절당했다는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들 놈도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를 거절했을 청명 또한 하필 같은 문파의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감히 제 입 밖으로 낼 생각조차 못 할 것이다. 어디 오갈 수 없는 진심은 어쩌면 그의 속을 곪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마음을 자각하지 않으면 청명 또한 거절할 일도 없고, 그러면 두 사람 모두 그런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저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남들보다는 좀 더 자주, 더 오래 붙어 지내며 항상 투닥거리는 사숙과 사질로 지내면 될 테다.
뒷짐을 지고 뚱한 표정을 지은 채 발에 걸리는 돌멩이나 툭툭 걷어차며 한참 걸어가던 청명이 저 밑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나무 밑에 대강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사숙더러 어디로 나오라고 말을 안 했는데, 이렇게 멋대로 이리로 와버렸네.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청명은 문득 한 가지 생각에 도달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제 마음 하나 자각하지 못하는 사숙을 보면 심기가 거슬리지?’
영 복잡한 마음에 쿵, 쿵, 나무에 머리를 두어번 박다가 순간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힘껏 머리를 나무에 부딪히려던 찰나였다.
“다 먹고 검 들고나오라더니, 이제는 하다못해 나무에 머리를 박고 앉아있네, 이 미친놈이…!”
관자놀이 부근에 느껴지는 거친 손바닥의 느낌이 제법 익숙하다. 제가 생각에 잠긴 틈에 다가와 머리를 보호한 것이었다. 그 순간의 다급함이 온몸으로 느껴지자 청명은 무어라 입을 열지 않고 그저 두 눈을 끔뻑이며 눈 앞에 다가온 사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디로 나오라고도 말하지 않고서 나와버린 그를 따라 나와서는, 청명이 이런 나무에 머리를 박으면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고 가만히 있던 나무만 부러질 거라는 것도 빤히 알면서도 굳이 그 틈새에 제 손을 끼워 넣어 제 머리를 받쳐주는 이런 행동을 보여주면서.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다정한 모습 그 이상을 자신에게만 보이면서 어째서 제 마음 하나 자각하지도 못하고서 계속 사람의 마음을 두들겨대는…….
‘응?’
생각의 끝에 다다른 청명이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고서 눈앞의 백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거……, 얘만 바보인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삐걱대고 바보같은 두 사람이 왜이렇게 끌릴까요…. 바보 사숙과 바보 사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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