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에는 마귀가 산다.
"그 이야기 들어봤어? 의약당에……."
※ 손풀기 단문. 퇴고 X
늦은 밤, 친목을 도모하겠다며 명자배의 대사형 방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이 혹시라도 사숙들이나 사숙조들이 제 이야기를 들을까 봐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용히 속닥였다.
화산의 의약당 복도 끝 가장 구석진 방.
그 방에 마귀가 잠들어 있다.
그 말에 한 명이 뚱한 표정으로 툴툴댔다.
"여기는 화산이고, 화산은 도문인데 어떻게 마귀 같은 게 있을 수 있겠어?"
"아냐, 위치는 잘 모르겠지만 마귀에 대한 건 나도 들어봤어. 전에 넘어졌을 때 손바닥이 까져서 의약당에 갔었는데, 치료를 받은 다음 나왔더니 사숙들께서 복도를 지나가시면서……."
- 놈이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오는 날이면 태상 장문인부터 의약당으로 날아오실 텐데.
- 그 마귀 녀석이 얌전히 있는 건 또 낯선 일이긴 하지. 이쯤이면 한 번은 날뛰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럼 윤종 사형이 쓰린 속을 부여잡고, 백천 사숙과 조걸 사형이 놈을 붙들어서…….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사숙들이 멀어지면서 거의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이야기만으로도 어둑한 의약당 복도 끝을 멍하니 바라보던 어린 아이의 안색을 창백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대체 얼마나 흉포한 마귀면 그 대단하다던 화산오검 중 세 사람이나 그 마귀를 붙들어야 한다는 걸까? 얼마나 위험하기에 태상 장문인부터 모든 화산의 제자가 달려올 것이란 걸까? 아까와 달라진 건 복도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 외에는 없었지만 복도 끝이 아까와는 다르게 음침하고 위험하게 보였다. 결국 도망치듯 서둘러 의약당을 빠져나왔다.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야."
싸아아. 다른 누구도 아닌 제 사숙들이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니 방 안이 급격히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도 더 가까이에 무시무시한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났다.
"역시 마귀라면…, 마교와 싸웠을 때 붙잡아온 걸까?"
"왜 붙잡아왔을까? 인질로 쓰려고?"
"그러면 전쟁이 끝났는데도 왜 붙잡아두고 있는 건데?"
머리를 맞대고 한참 속닥이던 시간은 벌컥 문이 열리고 "이 녀석들! 아직 안 자고 뭐 하냐!"하고 호통치는 사숙조의 목소리에 끝이 났다. 각자의 방에 돌아가고 나서도 명자배의 머릿속에는 계속해서 의문과 두려움이 남았다.
"오늘 아침에 사숙께 들었다. 어제 학이 방에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눴다며?"
"……예."
윤종의 말에 명자배 아이들의 작은 고개가 저도 모르게 수그러들고 눈을 꼭 감았다. 화산에 입문하기 전, 부모와 주위 어른들로부터 원래 도문에서는 지엄한 법도를 지켜야 한다고 들었던 이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이었다. 화산이 부흥하기 전이었다면 그 말을 믿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지금의 화산은 그 이름의 무게가 다르다. 그래서 분명히 혼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 모습을 윤종의 뒤에서 바라보던 조걸이 낄낄대며 장난스레 말했다.
"사형, 왜 애들을 겁주고 그럽니까?"
"조용히 해라, 걸아."
"넵."
조금 가벼워진 듯한 분위기에 명자배 아이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었다. 조금 겁먹은 눈들이 눈앞의 제 사숙들을 바라보았다. 겁을 주지 않겠다는 듯 윤종이 눈을 조금 크게 뜬 채로 명자배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추어 앉아 바로 앞의 녀석들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혼내려고 말한 것이 아니다. 화산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엄한 곳이 아니며, 설령 엄하다고 하더라도 서로 친해지기 위해 이야기 나누는 정도는 괜찮아. 우리가 너희를 이리로 부른 건, 이제 명자배를 더 받지 않을 것 같으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화산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함이란다."
윤종이 말을 마치고 살짝 눈짓을 주자 청자배들이 최대한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법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이라도 다쳤을 시 의약당에 가야 하며, 그러지 않고 참을 경우 네 사고가 발견 즉시 대침을 들 것이라던가, 밤늦게까지 수련한다면 유이설 사숙조가 등 뒤에서 나타날 테니 너무 놀라지 말라던가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서로를 향한 긴장을 풀고서 무르익어가는 분위기에 조걸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괴담까지 슬그머니 입 밖으로 꺼내려 하자 윤종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고서 그만두었다. 그래도 사질들 앞에서는 체면을 챙겨주면 안되냐며 입을 삐죽인 조걸이 화산에서의 생활 규칙을 마저 알려주고 나서 자리를 파하려던 찰나에, 명자배 한 명이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사숙…….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뭔데?"
한참을 머뭇거리던 아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에 당시 의약당에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던 청자배의 두 녀석이 움찔했으나, 다행히 다른 이들이 어떻게 말해줘야 할 지 눈치를 살피느라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 거기에 마귀 녀석이 있기야 하지. 조걸이 작게 중얼거렸다가 생각에 잠긴 듯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던 윤종이 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아직은 너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없구나. 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의약당의 끝 방에는 가지 말거라. 알았지?"
그 말을 하는 윤종의 낯에 드리운 것은 두려움이나 공포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안타까움과 간절함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보기에는 명자배의 아이들은 너무나도 어렸다.
본디 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명자배 중에서도 행동파인 녀석들 서너명이 뭉쳐 조심스레 의약당에 들어갔다. 그곳에 들어가자 약재들을 관리하는 이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문 너머로 새어 나왔고, 치료 중 엄살 부리다 찰싹! 등짝을 얻어맞는 소리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하지만 그들의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었다.
괴담의 핵심지, 의약당 복도의 끝!
다른 곳에 비해 살짝 어두운 방이었다. 불도 이쪽에는 일부러 켜두지 않은 듯했고, 의도적으로 조금이라도 어둡게 만들어둔 듯했다. 복도에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것을 확인한 아이들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드르륵. 고요함 속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방은 빛을 차단해두어 어두웠고, 그간 자주 침향을 펴두었는지 옅게 배인 냄새가 났다. 문이 열려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소문의 근원지에 들어간다는 생각에 긴장된 이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뎌 침상에 누워있는 마귀에게로 다가갔다.
"……응?"
그런데 어둑한 방 안의 침상에 누워있는 건 마귀 따위가 아니었다. 꽤 잘생긴 성인 남성이었다. 긴 머리는 누군가 관리를 해온 듯 엉키거나 엉겨 붙지도 않았고, 길이가 일정하게 짧은 손톱도 깨끗했다. 덩치에 비해 큰 손에는 조금 옅어지긴 했으나 굳은 살이 잔뜩 박혀있었으며, 흉터가 가득했다. 개어진 무복에 새겨진 매화며 그 위에 가지런히 놓아둔 검을 본 아이들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조금이라도 평소처럼 말하게 되면 다른 방에 있는 사람들이 올 것 같았고, 그 전에 근처에 다가가도 깨지 않던 이 사람이 깨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화산 사람인 것 같죠?"
"응. 그런데 왜 사숙들은 마귀라고 하셨을까?"
한참을 머리를 맞대며 눈 앞의 남성의 정체를 추측해보던 아이들은 보지 못했다.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남성의 굳어있던 손이 침상의 이불을 움켜쥔 것을.
그리고.
"……어린 애?"
곁에서 속닥이며 나누는 대화 소리에 느리게 눈을 뜬 남성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잠에서 막 깨어났음에도 흐린 시야로 어떻게든 상대를 파악하려는 듯한 냉철한 눈빛에 덜컥 겁을 먹은 아이들이 파득 튀어 올랐다. 그러고는 누가 신호를 주지 않았는데도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우리가 소문의 마귀를 깨운 거야! 어떡해?!"
"이, 일단 의약당에 계신 사숙들께라도 말씀드리러 가요!"
"내가 오지 말자고 했잖아!"
"사저가 언제요! 제일 먼저 말 꺼낸 건 사저잖아요!"
허. 아이들이 뛰쳐나가고 난 뒤, 오랜 시간 누워있으면서 굳어버린 몸을 일으켜 침상 위에 멍하니 앉은 채 복도에 울리는 대화에 화산의 마귀, 청명이 저도 모르게 반가운 웃음을 터트렸다.
화산의 마귀가 긴 잠에서 깨어났다!
사실 좀 더 구구절절 배경을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건드려보겠답시고 방치하다가 못 올리게 된 글들이 한둘이 아니므로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올려봅니다. 전쟁 직후 긴 잠을 자게 된 청명이가 눈 뜨자마자 제 정체를 가늠해보던 명자배들을 보게 되는 그런 걸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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