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청명]따스한 겨울 끝자락

화산의 제자라면 전부 하나, 하나 기억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옹기종기 모인 기억 덩어리 속에서도 유난히 몸을 부풀리고 제 색을 드러내는 녀석이 있곤 하였다. 무위가 눈에 찰 정도로 강하여 기억에 남았다면 좋았겠지만. 대다수 제게 거지같이 굴거나, 건방지게 대했거나, 아주 착실하게 자근자근 밟아놔도 벌떡벌떡 일어나 찾아오거나……. 아니면 특이한 특징이 있는 녀석이었다.

언제 갈아두었는지 보송보송 마른 이불이 부드럽게 온몸을 감쌌다. 내내 죽은 듯 자던 이가 일어난 기척을 느꼈음에도 돌아보지 않은 이유는 지금 행하는 움직임이 상당히 중하단 뜻이었기에 서운함을 붙이는 대신 덮어둔 다정을 그러모아 가슴 밑에 욱여넣고서 턱을 괴었다.

제 눈에는 온통 말라비틀어진 풀때기밖에 되지 않는데 그것을 고르는 닮은 색의 눈이 제법 진지하다. 흉 많은 손이 길게 나열된 풀때기 위를 유영하며 집어 들어 냄새를 맡거나 끝을 살짝 짓이겨보는 등 커다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온 세상의 예민함을 득득 긁어모은 집안을 제 발로 뛰쳐나와 강호를 떠돈 녀석이니 그리 자라도록 배워온 세월이 닳은 지 오래일 텐데도, 사실 예민함을 달리 쓰면 나오는 섬세함이 내내 묻어나옴을 지난 밤의 제가 제일 잘 알았다.

행상인이 당장 들고 나가 장사해도 될 만큼 약재를 가져와 놓고 막상 손에 쥔 양은 제 손에 겨우 들어찰 만한 한 움큼밖에 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저 녀석이 입은 녹색 장포는 가지런히 놓인 풀들이 제법 높은 가격을 보증한다는 사실만은 알았다. 하여튼 아닌 척하면서 까다로운 녀석. 습관처럼 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도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을 온몸으로 막는 고목은 돌아보지 않았다.

손안에 쥔 약재가 작은 도마 위에 놓인다. 썰기 좋기 한데 모인 약재가 일정한 간격으로 썰리는 소리가 울린다. 지겹도록 들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베는 것이 다른 탓인지, 베는 사람이 다른 탓인지. 귓가에 듣기 좋게 감겨들게 만드는 일도 재주다 싶었다.

일정한 크기로 잘린 약재를 촘촘한 망에 넣고 빠져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조금씩 데워지는 봄바람이 약재 냄새를 짊어지고 코 위에 잠시 머문다. 순간 코가 시려 작게 코를 훔치니 한 번 돌아보지 않던 녀석이 춥소? 창문 닫을까? 물어온다. 됐다, 녀석아. 하던 일이나 마저 해라.

오랜 세월 그저 묵묵히 존재하는 고목은 사실 많은 변화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누가 알까? 미미하게 쏠린 신경을 모른 척 만끽하며 눈을 깜빡였다. 미리 가져다 둔 화로에 불붙이고 두꺼운 자기로 만든 주전자에 한 번 끓여 식힌 물과 망을 넣고 불 위에 올린다. 하얀 손이 마치 장포에 새겨진 나비가 튀어나와 현현한 것같다. 나풀나풀 바지런한 날갯짓 위로 불쑥 솟아있던 꽃망울이 툭 개화한다.

비녀를 깎는 모습, 도자기를 빚는 손길, 자수를 놓는 움직임, 화음은 물론 강호행을 나가도 꼭 머무는 곳의 장인을 찾아가 일하는 모습을 보던 녀석이 있었다. 오랜 시간이 손에 고스란히 녹아 투박하게 거친 손이 움직이는 모습이 마음에 찬다하였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피워내는 매화가 더 아름답지 않느냐, 하도 요사스럽다고 평을 받기야 하지만. 물은 말에도 웃으며 피워낸 매화보다 피워내기 위해 노력하는 몸짓이 좋다고 하였던 녀석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이상한 녀석이라고 이름 붙여 한 곳에 처박아두었건만, 기어이 튀어나와 제게 속살이고서 붙잡을 새도 없이 흐리게 흩어진다.

너무 뜨겁지 않되 식혀서는 안 되니 한 시진을 내내 불 앞에 있어야 했다. 이제는 안락함에 묻혀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닌 주어진 애정을 품에 안고서 다가가는 방법을 안다. 자박자박 다가가 등을 툭 기대자 대충 감은 이불에 맨발이 드러난다. 그리 춥지도 않건만 기어이 그 꼴은 보지 못 하겠는지 결국 낙화한 매화 위로 하얀 나비가 날아든다. 그래봐야 당보인 주제에 급하게 날아드는 날갯짓이 참으로 우스우면서도, 그래.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 아름다워서 눈을 떼지 못 했구나. 닿지 않은 말은 흘려봤자 길을 잃을 테니 꾹 삼켰다. 언젠가 하늘에 오른다면 전해줄 말이 소복소복 쌓인다. 대신 내내 묶어둔 주머니를 풀어 하나, 둘 꺼내어 내놓는다.

“당보야.”

“예, 형님.”

“당보.”

“예. 왜 자꾸 불러 말코야.”

“이게 하늘같은 형님한테.”

언젠가처럼 웃었던 웃음소리가 오랜만에 바싹 마른 방안을 채운다. 밖은 봄이건만 여전히 한겨울을 노니는 겨울이 몹시도 삭막하다. 처음 눈을 뜬 순간 입김이 나올 정도로 시린 겨울이 평생 가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질긴 것들은 도무지, 도무지 저를 그리 놔두지를 않아서.

그래서 겨울을 품고 봄의 품으로 파고든다. 이제는 갓 틔우는 싹을, 막 터뜨리는 꽃망울이 얼어붙을까 두렵지 않다. 겨울과 봄이 만나 결국 여름이 되는 법임을, 이제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암전에 듦이 두렵지 않다. 초목의 싱그러운 향은 제게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요, 날아드는 하얀 나비는 언제고 찾아와 봄을 알릴 테니. 참으로 따스한 겨울 끝자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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