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도사 귀농일지

매화도사 귀농일지 02.

화산귀환 ncp 회지 샘플

비날공방 by 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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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은 심란한 마음을 도무지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망할 원시천존 같으니. 두 번의 생을 산 것만으로도 이미 차고 넘치게 살 만큼 살았는데 왜 또 살아나게 하냔 말이다! 분통이 터진 청명이 짧아진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좀 전부터 숟가락을 들고 이유식을 먹이려 허둥거리던 여자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청명아. 엄마가 요리를 못해서 맛이 없지…?”

다시 만들어줄 테니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손도 안 댄 그릇과 접시를 가져가 정리하는 뒷모습에 청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발달이 미숙해 귀 근처를 만지작거린 것에 그쳤지만 하여튼 진정은 했다.

미안할 게 뭐 있나. 오히려 평범하지 않은 애를 키우게 된 젊은이들에게 이쪽이 미안하면 미안했지. 반성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가져온 이유식을 얌전히 받아먹자, 시무룩해져 있던 여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 청명이는 채소보단 소고기가 입에 맞나 보네.”

채소보다 고기를 더 좋아하긴 했지만 맹세코 일부러 편식한 건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주는 대로 먹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이유식 한 그릇을 싹 비우고 나자, 여자는 청명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이며 거실을 천천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먹고 자고 싸고, 그러다 다시 먹고 자고. 아기의 삶이란 상당히 단조로웠으나,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 내던져진 청명에게는 주변의 정보를 흡수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다.

청명은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며 몇 가지 사실을 배웠다.

우선 이 세계에는 무인이 없었다. 살아가는 생활 양식이나 변화한 풍경을 보면 청명이 아는 중원도 아니었고, 개인의 무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대신 공권력과 이성적인 대화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는 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소리가 나는 네모난 상자를 들고 말을 걸거나 그림을 남겼다. 거리에는 강철로 된 탈 것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쉴 새 없이 달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한 도시에 모여 살고 있었다.

그러나 초삼으로 깨어났을 때처럼,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세 번의 삶을 통틀어 처음으로 생긴 부모님의 존재는 이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을 살면서도 가져본 적 없던 여유와 안도감을 청명에게 주었다. 언제나 나를 사랑하고 내 편을 들어줄 사람들. 다치면 누구보다 걱정하고 기쁜 일은 함께 축하하며 슬프거나 괴롭고 힘든 일은 기꺼이 함께 짊어지고 갈 이들.

청문 역시 믿음직한 보호자였으나 언제나 청명 한 사람만을 아껴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던 만큼, 오롯이 저에게만 쏟아지는 조건 없는 사랑은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끈을 느슨히 풀어주었다.

“아바.”

“청명아, 방금 아빠라고 한 거야?”

“음마!”

“오빠, 우리 청명이는 천재가 아닐까?”

우리 아들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고 귀엽고 똑똑한지~ 그래, 아빠랑 엄마 여기 있네! 그렇게 말하며 품에 꼭 끌어안고 쓰다듬는 손길이 기분 좋아 저도 모르게 웃어버리자, 카메라의 연사 소리가 거실에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다.

 

* * *

 

그래, 인정한다. 청명은 이 삶이 썩 나쁘지 않았다.

너무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탓에 사람들 사이에 쉽게 섞이지 못하고 겉돌던 과거와 달리, 청명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어린아이로 자랐다. 백 년이란 틈이 있어도 중원이란 시대에 속해있던 두 번의 생에 비하면 이 세계는 어딜 가도 청명이 모르는 것들로 흘러넘쳤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나니, 백 년 하고도 오십 년쯤 살아본 경험이 있던 청명은 슬슬 모든 것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공부야 원리와 기초를 이해하고 조금만 응용하면 금방 풀어낼 수 있었고, 게임 역시 그래픽 쪼가리가 대신 강해져봤자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 싶어 금세 흥미를 잃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만큼은 좋아해 간식 내기 축구 시합이 열리면 빠지지 않고 참여했으나 그마저도 즐겁다고 느끼는 순간은 지극히 짧았다. 부모님은 그런 청명을 걱정해 다양한 것들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나 어느 것 하나 청명의 흥미를 자극하진 못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아침 6시에 설정해 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일어난 청명은 조용히 집을 나와 가볍게 몸을 풀었다. 매일 아침 달리는 공원의 달리기 코스에는 그날따라 사람이 적었다. 오늘은 조금 편하게 달릴 수 있겠네. 신발 끈을 꽉 조여 맨 청명이 걸음을 옮겼다.

한바탕 움직이고 나니 상쾌하기 그지없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청명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오늘은 또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학교는 방학이라 가지 않아도 되고, 청명은 따로 다니는 학원도 없었다. 도서관에 또 가자니 그나마 흥미 있던 책들은 모조리 읽어버린 후였고. 진짜로 뭘 한다. 청명이 소리 없는 한숨을 삼키고 있던 때였다.

공원 직원들이 벤치 옆에 자리한 지역 사업 안내 현수막에 뭔가를 걸기 시작했다. 무슨 내용인가 싶어 자리에서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난 청명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린 현수막의 내용을 읽었다.

 

[청년 귀농 교육과정생 모집 중! 청년이여, 시골로 가자!]

 

“귀농이라…”

그 단어에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어릴 적 부모님과 함께 주말농장을 다니던 때였다. 갓 딴 깻잎과 상추를 차가운 물에 씻어, 소금을 뿌리고 두툼하게 구워낸 삼겹살을 편 마늘과 쌈장을 넣고 밥 한 숟갈 넣어 싸 먹는 맛이란. 생각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일 만큼 맛있었고, 무척이나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청명은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씻고 아침을 먹은 뒤 도서관으로 향했다. 언제나 향하던 문학 서가 대신 농사에 대한 자료가 적힌 책을 찾아 종일 읽고 또 읽었다. 계절에 맞게 작물을 심는 방법, 기온에 따라 해줘야 하는 관리, 파종과 수확의 시기 등등, 농사와 귀농에 관련된 책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자기 전에는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틀어 농사 영상을 찾아보았다. 흙을 갈고 이랑을 만든 뒤 잡초가 자라지 못하고 수분이 날아가지 않도록 검은 비닐을 멀칭한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서 자라난 새싹은 순식간에 무럭무럭 자라 튼실한 열매를 맺었다. 열아홉이 될 때까지 무엇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았던 청명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별다른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건 농사와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청명은 남은 방학 동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개학 날, 학생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던 담임 선생님 앞에서 폭탄 발언을 터트린 것이다.

“선생님, 저 대학 안 가려고요.”

처음엔 그 말이 농담인 줄 알았던 담임은 진학 포기 선언이 청명으로선 상당히 진지하게 꺼낸 말이란 걸 알고 상담실로 청명을 불렀다. 사교육의 힘 없이 학교 공부와 예습, 복습만으로 모의고사 올 1등급을 받는 학력에 자기 관리도 뛰어난 청명이라면 수험생들이 간절히 바라는 최정상급 대학을 원하는 곳으로 골라 가는 것도 꿈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부를 그만둔다니? 학교의 평판 이전에 담임으로서 학생의 미래를 위해 그것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말려야 했다.

담임은 청명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19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과 그것이 농사였고, 당연히 계획도 없이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는 게 아니라는 것까지도. 이야기가 끝났을 땐 창밖엔 어느덧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담임이 말했다.

“네가 대책 없이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란 건 알겠구나.”

“그럼 저…”

“하지만 청명아, 대학 진학은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농업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과도 있으니 그쪽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선생님.”

“요즘 농업은 단순히 1차 산업이 아냐. 농업 기술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고 수십 년간 농사를 지어온 농부들이나 청년 농부들 또한 발전하는 기술을 배우고 최신 농업을 익히고 있단다. 너 역시 그런 길을 가게 될 테고.”

네 꿈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란다. 다만 다른 길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내 역할이라서 그래. 담임은 웃으며 말했다.

“부모님께선 뭐라고 하셨니?”

“원하는 걸 하라고 응원해주셨어요.”

그렇지만 표정으로 어림짐작하자면 아마 선생님과 비슷한 말을 하고 싶으셨던 거겠죠. 청명은 한숨을 삼키며 식은 유자차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이렇게 들뜬 기분은 하도 오랜만이라 주변을 둘러볼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슬슬 돌아갈까, 부모님도 걱정하시겠다. 담임의 말에 청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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