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도사 귀농일지 01.
화산귀환 ncp 회지 샘플
“오늘은 날씨가 좋네. 연화봉이 선명하게 보여.”
윤종은 화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흐드러지게 꽃을 피운 커다란 매화나무 아래의 전각에서 당과를 우물거리던 청명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요 며칠 동안 옅은 안개가 끼어 흐리기만 하던 하늘이 오늘따라 유난히 맑았다.
무릎 위에 흩어진 새하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겨주며 윤종이 그렇구나, 하고 대답하자 청명은 제 취급이 어린 삼대 제자를 대하는 것 같다며 입을 쭉 내밀었다. 하여튼 대사형이란 이들은 다 똑같다니까. 오지랖이 넓고 틈만 나면 참견을 해오는 데다 한결같이 상냥하고 다정했다. 손에 남은 당과를 한입에 집어넣은 청명은 윤종을 올려다보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작별 인사를 하기엔 좋은 날이네, 안 그래?”
청명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들은 윤종은 말없이 청명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윤종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청명아.”
윤종이 불렀고
“윤종 사형.”
청명이 대답했다.
멈칫 떨리던 손이 이제는 완전히 멈춰버리자 청명은 윤종의 손을 붙잡아 제 뺨으로 가져다 댔다. 오랫동안 검을 잡아 와 거칠어진 손이지만 피부에 닿는 온기는 따뜻하기 그지없다. 단전이 망가진 이후 툭하면 추위를 타는 사제를 위해 계속해서 내력을 돌리며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윤종은 무어라 말하려 몇 번이고 입을 뗐으나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십수 년 전의 정마대전은 청명이 제 모든 것을 희생해 천마의 목을 베며 막을 내렸다. 중원을 구한 대가로 좌수와 단전을 잃은 영웅은 많은 것을 잃었다. 고강한 내력, 누구와도 견줄 수 없던 외공, 청명이 극한의 노력을 통해 이뤘던 모든 것은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손가락을 빠져나간 지 오래였다.
살이 쭉 내려버린 뺨,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 끝없이 밀려오는 통증과 후유증에 툭하면 앓아눕는 날이 이어졌다. 화산 밖은 고사하고 의약당 밖을 벗어나는 것조차 드물었다. 좋아하는 술이나 고기는 입에도 못 대고 맛없는 환자식만 먹는다고 투덜대던 기억이 여태 선명했다.
그러나 화산이 구하고자 했던 중원을 구했고, 중원을 구하고자 했던 화산을 구했다. 살아서 화산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되려 후련할 정도로 웃던 사제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무슨 어리광을 부리나 했더니.”
“그래서 불만 있어?”
“있어도 네 고집을 그 누가 꺾겠느냐.”
“잘 알고 있잖아.”
청명이 작게 키득거리자, 윤종은 멈췄던 손을 움직여 다시금 청명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자꾸나.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들려온 윤종의 말에 청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청명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온통 후회와 절망으로 점철되었던 첫 번째 죽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죽음이었다.
대화산파 이십삼 대 제자.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매화검존(梅花劍尊) 청명(靑明).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천마(天魔)의 목을 치고 화산에서 영면.
그것이 청명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글귀였다.
청명은 꿈을 꾸었다. 이것이 꿈인지 기억인지, 아니면 그저 찰나의 주마등에 불과한지는 알 수 없지만, 저번과는 다르게 죽어 가는 중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모든 것을 잃고 비쩍 마른 거지의 몸에서 깨어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육신의 굴레를 벗어난 청명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 감각을 만끽하며 편히 눈을 감았다. 깊고 깊은 물 속에 잠긴 것처럼 거대하고 먹먹한 흐름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괜스레 먼저 떠난 이들의 얼굴이 눈꺼풀 아래 일렁인다.
장문 사형. 내가 얼마나 사형을 보고 싶어 했는지, 사형은 아마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모를 겁니다. 평생을 함께했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십니까. 내 그 고통을 어린 사손들에게 남기기 싫어 버틸 만큼 버티고 왔으니 이번에는 꼭 칭찬 좀 해주시오.
청진아, 너도 거기 있겠지. 춥고 어두운 여우굴이 아니라 제대로 밝고 따스한 곳에서 모두와 다 함께. 너무 늦게 찾으러 가서 미안했다. 그래도 네가 남긴 건 제대로 화산에 이어줬으니 너무 뭐라 하진 말아라. 사형은 나름 노력했어.
당보 너는 특히나 내 고생을 알아야 해. 내가 네 유언 하나 이뤄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긴 아느냐. 벌로 누구 하나 쓰러질 때까지 대작도 하고, 선계 유람도 하면서 질릴 때까지 네놈 후손들 이야기를 들어줘야겠다.
휘청거리던 화산은 이젠 그 누구도 함부로 자리를 엿볼 수 없을 만큼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병아리는 믿음직한 장닭이 되어 품에서 떠나간 지 오래고, 무학도, 재물도, 인재도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후회하느냐?
청명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호하나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였다. 아뇨,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했고, 만족스러운 삶이었습니다.
청명의 대답에 의문의 목소리는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이야. 질문을 바꾸마.
―네게 남은 미련은 없느냐?
나의, 미련?
‘청명 사형!’
‘청명…!’
‘청명아!’
‘끼이…!’
나의 화산.
나의 사형제들.
청명은 제가 죽는다 해도 화산은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작별을 고할 때 보았던 슬퍼하는 얼굴들이 자꾸만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채워지지 않는 부재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 청명이었으니까.
그것이 못내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나도, 너희와 좀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렇구나. 그게 네게 남은 미련이구나.
한없이 따뜻하고, 한없이 자애로운 커다란 손이 끝없이 가라앉던 몸을 부드러이 안아주는 감각에 청명은 눈을 감았다. 온갖 시름과 고민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노곤한 감각이 의식을 좀먹는 기분이었다.
―아이야. 이것이 마지막이란다.
그러니 부디… 뭐야, 뭐가 마지막이라는 건데? 끝엔 뭐라고 말한 거야? 청명은 까무룩 잠들 뻔한 의식을 억지로 깨우고는 사라진 목소리를 향해 소리쳤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다시 한번 말해줘! 이봐! 어디로 간 거냐고!
젠장, 이놈의 몸은 또 왜 이렇게 무거워서…!
…잠깐, 몸?
그 순간 어두웠던 사방이 한순간 밝아지더니, 이윽고 눈 부신 빛이 청명의 시야를 덮쳤다. 부상으로 앓던 몸에서 벗어나 간신히 되찾았던 자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온몸은 한철 사슬에 묶인 것처럼 답답해졌다. 따스하고 안락했던 그 감각들은 전부 어디로 갔는가. 음공이라도 쓰는 것처럼 우렁차게 울어 재끼는 목소리가 제가 내고 있음을 깨닫는 덴, 아무리 청명이라도 납득하고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10월 10일, 16시 37분이고 신장은 50cm, 2.8kg이에요.”
청명이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 눈을 떴을 때는 두 명의 사람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것 봐, 코는 자기를 꼭 닮은 것 같아. 눈은 오빠를 더 닮았네. 그런 일련의 대화가 흐르고, 또다시 나타난 누군가가 저를 조용하고 작은 공간에 눕혀놓고 나서야, 청명은 이 어이없는 상황에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비명만을 질렀더랬다.
10월 10일. 16시 37분.
청명하도록 맑은 가을의 어느 날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청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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