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肖像초상, 一
※ 화산귀환 약 1400화까지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 화산귀환 1231화가 최신화일 당시 구상 및 작업 시작한 글로 최신 연재분과 어긋나는 부분이 다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 24년 7월 디페스타에서 판매되었습니다.
“참, 청명 도장. 혹시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건네받은 거래 목록을 빠르게 훑으며 탁자에 놓인 당과를 입으로 가져가던 청명이 고개를 들었다. 현영과 운방, 백상 등 재경각에 소속된 이들의 안목은 충분히 믿는 청명이지만, 습관처럼 청명은 은하상단 상단주인 황종의와 둘이서 대화를 나누며 한 번 그의 눈을 거쳐 보내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그러다 보면 지금처럼 그로부터 밖의 소식을 전해 듣기도 하니, 그 시간이 꽤 나쁘지 않았다. 옛날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검이나 휘두르고 술이나 마시며 살았는데, 이제는 무언갈 하지 않으면 몸에 좀이 쑤시는 기분이다.
“무슨 소식이요?”
전쟁 이후 안휘로 돌아간 남궁이나 전쟁이 끝난 뒤 소림으로 돌아간 혜연과 하다못해 정사대전 이후에 흩어진, 이름 좀 날린다는 사파 놈들 소식까지. 그의 귀에 들어올 만한 소식은 이미 죄다 늦지 않게 들어오고 있다. 화산의 곁에는 개방도 있고, 녹림도 있으니까.
타 문파나 사파의 움직임은 한 상단의 상단주가 쉬이 파악할 수 없거니와 굳이 파악할 만한 일이 아니다. 보통 그런 움직임을 눈치채는 이들은 개방이니까. 물론 알고 있으면 더 좋겠지만, 굳이 알 필요가 없으니 그들은 그저 돈의 흐름을 살피고 좇을 뿐이다. 그러니 거래 물품에 문제가 생겼다면 거래 물품 목록을 건네주면서 먼저 말을 해주었을 것이다. 청명은 그가 굳이 입에 담으면서까지 청명에게 전하려고 한 소식이 무엇인가에 호기심을 가졌다.
은하상단의 황종의 상단주가 차를 홀짝였다. 찻잔을 소리 나지 않게 조심스레 내려놓은 황종의가 주위를 살짝 살피나 싶더니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화산의 제자가 그려진 초상화 하나가 비싼 값에 거래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화산의 제자가 그려진 초상화. 비싼 값.
그 두 단어의 조합에 느리게 끔뻑이던 청명의 두 눈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초상화가 있다는 것은 의뢰한 녀석이 있다는 것이다. 혹은 멋대로 그려서 비싼 값에 팔고 있다던가, 아예 인간을 창작해서 옷만 그럴싸하게 입혀놓았을 수도 있다.
“아니!!”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주위를 살펴 조심스레 소식을 전한 황종의의 배려에도 청명의 목청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 말은 누가 우리 애들을 멋대로 그려서 비싼 돈 받고 팔았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아니면 어떤 미친놈이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의뢰를 맡겼단 거예요? 초상화 주인은 어떻게 생겼어요? 잘생기고 이름 있는 놈을 그려야 수요가 있을 테니까 역시 백천 사숙인가?”
빠르게 제 할 말을 쏟아낸 청명이 벌떡 일어나더니 연무장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당장이라도 연무장에 뛰쳐나가 “어떤 미친 새끼가 시간이 넘쳐나서 초상화 의뢰를 맡겼냐!”하고 외치거나, 냅다 화산을 뛰쳐 내려가 온갖 인력을 동원해 화공을 찾아내기라도 할 듯한 기세에 황종의가 다급히 그의 옷자락을 붙잡아 다시 앉히고 진정시켰다.
새삼스레 이 양반은 전쟁을 겪기 전이나 겪은 후나 달라진 게 없다 싶어, 이를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아니면 눈을 질끈 감은 채 다른 도인들처럼 무량수불을 외우기라도 해야 할지 저도 모르게 망설이고 말았다. 얌전히 앉은 채로 씩씩거리던 청명의 옷자락을 붙든 손을 놓지 않은 채 황종의가 빠르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뜸을 들여 말하면 이 손조차 놓고 냅다 뛰쳐나갈 것 같았다.
“최근에 그려진 것이 아니랍디다. 그 그림을 그린 이는 백여 년도 전에 세상을 떴거든요.”
백여 년도 전.
그 말에 씩씩대며 미간을 좁히고 있던 청명의 움직임과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장필단張筆端이라 하는데, 당시에도 나름 이목을 끌었던 화공이었죠. 그의 유작遺作 중 하나,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린 그 초상화가 얼마 전 상행 중이던 작은 상단의 상인에게 우연히 발견된 겁니다.”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청명은 원래 마실 술과 먹을 음식, 그리고 휘두를 검만 있으면 충분히 만족하는 도사 나부랭이일 뿐이었기에 그런 쪽으로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청명이 저도 모르게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제 생각에는 과거 화산이 구파일방에 있었던 시절의 화산파 제자를 그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초상화에 그려진 인물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으나, 가슴에 새겨진 매화를 보고서 사람들이 화산의 제자를 그린 것이리라고 추측했더랍니다. 전쟁 이후로 화산의 명성이 자자하니, 그 초상화의 값어치를 대번 알아본 상인이 그 화공의 그림을 수집하던 어떤 부유한 수집가에게 비싼 값을 받고서 조용히 넘겼고요.”
알 만하다. 아마 눈에 불을 켜고 장필단의 작품을 모으는 수집가 측에서 누가 어떤 금액을 부르던 그보다 더 얹어주겠노라 했을 테고, 상인 입장으로선 달리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뭐,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일 그 초상화를 화산에 넘겼더라면 당장은 그가 건넸을 돈처럼 눈에 보이는 큰 이득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화산은 그 상단에 마음의 빚을 지게 됐을 것이다. 애당초 옛날 무너지기 직전의 화산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의 화산은 돈을 지불할 능력이 차고 넘치니 그 수집가가 제안했을 금액만큼은 아니더라도 값도 충분히 치렀을 테지. 거기다가 태상 장문인인 현종이나 장문인인 운암의 성정을 생각해보면, 그 이후에도 그 상단과 화산의 관계가 충분히 우호적으로 유지될 것이 분명했다. 과연 그것보다 더 큰 이득이 있을까?
전쟁이 끝났다.
과거 장강참변을 시점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사패련邪覇聯과의 전쟁에 이어 천우맹天友盟은 마교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많은 이의 피를 불러온 전쟁이니만큼 천우맹에서도 부상자나 사망자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전쟁에 나섰던 이들 중 생존자가 가장 많았다. 그들은 서로 다른 문파임에도 전쟁터에서 즉각적으로 역할을 나누는 데에 조금의 거리낌조차 없었고, 서로의 강점을 최대한으로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며 전쟁터를 누볐다. 특히 천우맹에 속한 문파 중에서도 천마의 목을 또다시 베어낸 화산에 사람들의 관심이 특히나 더 쏠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화산에 열광했다. 중원의 누구도 화산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청명이 막 돌아왔을 때만 해도 빚더미에 짓눌리고 무공을 잃어 망해가던 섬서의 한 문파에 불과했던 화산이, 과거의 영광 그 이상을 누리게 된 것이다.
섬서의 패자이자 천우맹의 중심. 화산.
‘가슴팍에 매화가 새겨진 옷을 입은 이가 화산의 제자일 거라는 그 추측에 초상화 하나가 비싼 값으로 팔릴 걸 짐작했던 것도 그래서겠지. 아마 그 화공의 그림을 수집한다던 부유한 수집가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비싼 값에 넘어갔을 거고.’
값어치가 비싸거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것을 소장해 재력을 뽐내려는 인간은 널리고 널렸다. 어딜 가나 어떻게든 제 부를, 수집 의욕을, 그리고 무언가를 향한 애정을 자랑하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인간은 있는 법이다. 실제로 청명은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과거 유령문과도 사업을 추진하지 않았던가. 물론 전쟁 중에는 주로 물자를 나르는 데에 유용하게 써먹었지만. 청명이 차분히 생각을 이어가고 있을 때 황종의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듣자 하니, 그가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더랍니다.”
그 말에 청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록이요?”
“예. 여태 발견됐던 장필단의 작품은 모두 작업 기록이 따로 있었습니다. 누구의 의뢰로, 무엇 혹은 누군가를 그렸는지, 그것을 어떤 생각과 의도로 작업한 것인지……. 주로 그런 기록들을 전부 남겨왔다고 하더군요. 보통은 작품과 함께 거래되곤 했답니다. 그런데….”
“그런데.”
대충 이해했다는 듯 청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이었다.
“그 초상화만 작품 기록을 찾지 못했다? 작품과 기록은 뗄 레야 뗄 수 없는데? 그의 작품을 수집해온 사람은 지금 그 기록을 찾기 위해 눈이 돌아갔겠네요?”
“예. 전해 듣기로는 그 화공의 작품을 제일 많이 소장한 이가 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아마 그 초상화에 대한 기록을 어떻게든 손에 넣으려고 할 겁니다. 별개로 이건 그들의 추측입니다만…….”
살짝 뜸을 들이던 황종의가 주위를 살피고서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로는 그 초상화의 주인이 당시 화산제일검이자 천하삼대검수 중 한 명이었던 매화검존梅花劍尊이 아닐까 한다더군요.”
가만히 앉아 그의 말을 듣던 청명이 소리죽여 실소했다.
‘그럴 리가.’
물론 당시 화산을 대표할 만한 검수라고 하면 매화검존이 독보적이긴 했다. 천하삼대검수라고는 하나, 실질적으론 천하제일 검수에 가까웠으니까. 실제로 청문을 통해 제 초상화를 그리고자 한다고 연락을 취해온 이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었고.
‘당연히 다 거절했지만.’
다른 거창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가만히 앉아서 타인이 제 모습을 다 그리길 기다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 시간에 술이나 한 병 더 마시고, 고기나 하나 더 뜯을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그런 수고까지 해가며 제 초상화를 남긴단 말인가. 그림이 뭐라고.
당시의 청명은 얼굴도 모를 후인들을 위해 무언가 남기는 것에 의미를 알지 못했고, 그마저도 청진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몰래 술을 마시고 복귀한 사실을 숨겨줄 테니 자신이 보완한 검법대로 한 번 휘둘러달라고 부탁했을 때나 혹은 청문이 폐기할 검법을 이야기했을 때처럼 검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결국 몇 번 더 권유해보던 청문은 장문의 자리에 앉은 자신과 장로인 다른 사제들의 초상화를 남기면서도 화산에서 가장 유명했던 매화검존 청명의 초상화는 포기해야 했다.
‘그러니 일단 내 초상화는 아닐 테고…….’
전해 들은 그 화공의 활동 시기를 생각해보면 당시 태상 장문인이나 태상 장로였던 백자배의 초상화는 아니다. 그분들이 거의 등선하셨을 즈음이니까.
대현검 청문과 매화검존 청명의 이름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둘 외에도 당대의 청자배 중 이름있는 녀석들이 꽤 많았다. 그럴싸한 별호를 가진 놈도 꽤 있었고. 지금이야 빠져나간 사람들이 많아 장로 자리에 앉은 이도 몇 없지만, 그때는 장로며 호법이며 청자배에만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들 모두의 초상화를 그려내진 못했겠지만, 그래도 그 수가 꽤 됐을 것이다. 청문의 초상화는 장문인의 초상화이니만큼 화산에 있었으니 아마 마교의 잔당들이 화산에 쳐들어왔을 때 전각들과 불탔을 가능성이 크고.
‘그럼 역시 사제나 사매 중에…….’
“……도장? 청명 도장?”
아무래도 생각에 너무 깊게 빠져있었나 보다. 청명이 역시 생각할 것이 많다는 듯 끄응, 앓는 소리를 한 번 내고는 뒷목을 긁적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말씀해주신 것도 알아보긴 해야겠네요.”
“도장. 영 마음에 걸리시면 은하상단이 대신…….”
“괜찮아요. 화산의 선조를 그린 초상화라면 화산의 제자들이 직접 알아보고 되찾아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언제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냐는 듯 청명이 입꼬리를 가볍게 말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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