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귀환] 악몽 꾸는 청명이

. by 마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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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컾으로 쓰긴 했는데 청명른 같은 썰

 

1.

“작작 좀 마셔라, 이놈아!”

“아! 장문인! 뺏어가는 게 어딨어요!”

현종은 청명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을 빼앗았어. 술을 물처럼 퍼먹었는지 잠깐 눈을 뗀 사이에 꽤 많은 양이 줄어있었지. 현종은 못마땅하게 청명을 바라봤어. 주교를 상대하며 얻은 상처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도 독주를 마시고 있으니 현종의 속이 타들어 갈 것만 같았지. 소소가 아무리 대침을 들고 위협해봐도 일시적이었어. 보다 못한 백천이 결국 현종에게 일러바쳤지. 그들이 한마디 하는 것보다 장문인의 명령 한 번이 더 효과적이니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청명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백천을 노려봤어.

“진동룡! 이 치사한 놈! 장문인을 모셔와?!”

현종은 백천을 향한 매서운 눈초리를 가로막으며 청명을 꾸짖었어. 씩씩거리던 청명은 장문인의 진심 어린 잔소리에 결국 숨기고 있던 술까지 전부 빼앗겼지. 현종은 청명이 얌전히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지켜본 후에야 자리를 떴어. 그렇게 소동은 마무리가 됐어.

쫓기듯이 방에 들어온 청명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쩝쩝 다셨어. 조금만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만 장문인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술을 마실 수는 없으니 아쉬워하기만 했지. 청명은 침의로 갈아입기 전 부상을 살폈어. 온몸이 붕대에 감겨 있었어. 붕대가 감기지 않은 곳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지. 마화에 짓뭉개진 다리는 아예 감각이 없었고, 뼈가 드러난 손가락에선 피와 진물이 흘러나왔지. 더러워진 붕대를 풀고 깨끗한 붕대를 감은 청명은 침상에 누웠어. 눈을 감자 술을 마시는 동안 잊고 있던 통증이 찾아왔어.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았는데 몸이 아프니 정신이 뚜렷해졌지. 심지어 열까지 올라서 청명은 쉽게 잠들지 못했어. 이리저리 몸을 뒤집으며 한참 끙끙거리던 청명은 밤이 깊어져서야 잠들었지.

이상한 소리를 들은 조걸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어. 혼곤한 탓에 소리의 방향을 찾지 못한 조걸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어. 그러다 옆방에서 소리가 새어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지. 벌떡 몸을 일으킨 조걸은 벽에 몸을 바짝 붙이고 귀를 기울였어. 끙끙대며 앓는 소리가 점점 흐느낌으로 변해갔지. 옆 방이 누구더라? 청명이? 조걸은 빠르게 뛰쳐나와 바로 옆방으로 향했지. 문이 열리자 울음소리는 더 커졌어. 청명은 침상이 아니라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었어. 작은 몸을 더 작게 말고서는 흐느꼈지.

“청명아! 어디 아프냐?”

조걸은 다급하게 이마를 짚었어. 열이 높았지. 자는 사이 식은땀을 흘렸는지 몸이 축축했어. 평소라면 문을 열자마자 잠에서 깼을 텐데 청명은 깨어나지 못했지. 대신 우는 소리만 냈어. 몸에 칼이 박혀도 아프다는 소리 한번 안 냈던 애가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으니 조걸은 다급해지겠지. 조걸은 청명을 끌어안은 채 크게 고함을 질렀어.

“소소야, 소소야아! 큰일 났다! 청명이가 아프다!”

조걸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난 형제들이 하나둘 곁으로 모여들었지. 그리고 멀리서 후다닥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렸어. ‘아, 좀 비켜봐요!’ 사형제들을 밀치고 들어온 소소가 청명의 상태를 살폈어. 체온을 재고, 다친 상처를 확인했지. 자는 동안 얼마나 몸을 비틀었는지 다물려 있던 상처가 터져 있었어. 청명은 앓다가 반쯤 혼절한 상태였지. 청명의 몸을 안아 올린 조걸은 서둘러 의약당으로 향했어. 혈을 짚어 약을 삼키게 하고 터진 상처를 바느질했지. 해가 떠오를 즈음에 청명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왔어. 열도 많이 내렸지. 새벽녘이었지만 소란스러움에 눈을 떴는지 의약당 근처에 사람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어. 소소는 짜증을 내며 팔을 휘저었지.

제자들이 돌아가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현영이 다가왔어.

“이제 괜찮은 거냐?”

“네. 아직 안심하긴 이르지만, 사형은 워낙 괴물 같은 회복력을 지녔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소소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어.

“이래서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했던 건데. 그 잠깐 사이를 못 참고….”

그 말을 귀담아들은 현영은 청명이 다 나을 동안은 술을 마시지 못하게 막겠지. 좋아하는 걸 마음껏 먹지 못하는 게 막는 건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청명은 갑작스럽게 내려진 금주령을 듣고 정신이 혼미해졌어. 자기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이제 괜찮다고 큰소리 뻥뻥 치다가, 결국 소소에게 대침으로 입을 뚫리고 나서야 조용해졌지. 술을 마시지 못하니 청명은 죽을 맛이었어. 하도 얼굴을 찌푸리고 다니니까 보다 못한 현자 배가 술 대신 당과를 쥐여주며 어르고 달랠 거야. 장문인과 장로님들의 부탁이니 감히 어길 수는 없었는지 청명은 꽤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어.

술을 마시지 않으니 빠르게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데, 청명의 안색은 나날이 안 좋아졌어.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오고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 사형제들을 수련시키며 버럭버럭 소리 지르다가도 돌아서면 지친 얼굴을 쓸어내렸지. 아무리 피곤해도 지친 모습을 보여주지 않던 청명이야. 그런 청명이가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고 한숨까지 내뱉고 있으니 화산은 비상이 걸렸어. 애가 큰 병이라도 걸렸나 싶어 의약당으로 데려가겠지. 가는 도중 엄청난 저항이 있었지만, 사형제들이 팔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니 천하의 청명도 질질 끌려갔지.

진단을 마친 소소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어.

“수면 부족이에요. 수면약이라도 처방해 드릴까요?”

“수면 부족이라니 전쟁터에 던져 놔도 코 골고 잘 것 같은 놈이….”

조걸의 중얼거림을 들은 윤종은 잽싸게 주먹을 휘둘렀어.

“됐어. 뭔 약까지.”

청명은 손을 휙휙 저었어. ‘말했잖아. 별거 아니라고. 이제 됐지? 얼른 돌아가서 훈련해!’ 청명이 버럭 소리 지르자 사형제들은 얼른 흩어졌어. 팔다리를 휘적대며 걸어가는 청명을 오검은 오랫동안 지켜봤지.

“정말 수면 부족이더냐?”

“네. 혹시 몰라서 확인해 봤는데 상처도 곪은 데 없이 멀쩡해요.”

“음, 그래….”

단순히 수면 부족이라기에는 청명의 상태가 이상했어. 항주에 다녀온 뒤로 청명은 무척이나 예민해졌어. 원래도 속에 화가 많은 아이였지만, 화산의 제자에게까지 가시를 세워대는 놈은 아니었지. 그런 녀석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고 있어.

훈련 도중 실수를 한 청자 배에게 청명은 진득한 살기를 내뿜었어. 청명의 살기를 받아본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는 그 종류가 달랐지. 날카롭다 못해 자신조차 베어낼 것만 같은 살기였어. 청명은 바닥에 검을 박아 넣고 이를 드러냈어. 겨우 이 정도 실력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청자 배를 다그쳤지. 언제나 심드렁하게 혹은 깐족대면서 뱉어내던 말에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우울이 묻어났어. 마교를 눈으로 확인한 후에 다급해진 청명이 사형제들을 몰아붙이는 거였다면 사정이 나았지. 이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청명은 청자 배에게 그런 말을 하고 난 뒤에는 자신을 책망했어. 겁먹은 표정을 숨기려고 했지. 오검은 청명의 굳은 얼굴에서 지독한 피로함을 읽었어.

사형제들은 언제나 청명이 지닌 짐을 이고 갈 준비가 되어있었어. 지쳤다, 단 한 마디면 됐어. 그 한 마디가 어려워서 속내를 꾹꾹 눌러 담는 어린 사제가 안쓰러웠지. 억지로 캐물으면 청명은 힘든 내색조차 하지 않을 테니, 그들은 청명이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어. 지켜보자꾸나. 백천의 조용한 다짐에 오검은 고개를 끄덕였어.

어느 날 밤 조걸은 울음소리를 듣고 눈을 떴어. 온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소리는 작았어. 그 소리를 한참 듣던 조걸은 얼굴을 찌푸렸어.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조걸은 몸을 일으켜 청명의 방으로 향했어. 문을 열자 방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누운 청명이 보였어. 이불을 뒤집어써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있었지. 그리고 그 옆에 윤종이 있었어. 윤종은 입가에 손가락을 세우며 조용히 들어오라고 말했지.

“청명아.”

윤종은 이불을 쓴 아이를 토닥거리며 잔잔히 이름을 불렀어. 울음소리가 줄어들 즈음엔 이불을 벗겨내고 땀과 눈물에 젖은 뺨을 쓸었지. 무서운 꿈을 꾸었는지 청명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어. 아이의 몸을 끌어안은 윤종은 괜찮다, 괜찮을 거다, 라고 속삭였지. 손을 잡아주고 뺨을 문질러주니 청명은 울음을 그쳤어. 이내 눈꼬리에 눈물을 달고 색색거리며 잠들었지. 윤종은 청명을 안아 올려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어. 옆에 앉아서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지.

“무슨 꿈을 꾸는 걸까요.”

조걸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청명을 바라봤어.

“글쎄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워 꿈속에서도 울고 있는 것인지….”

윤종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조걸은 입술을 짓씹었어.

청명이 열을 냈던 밤. 그날도 청명은 울고 있었어. 그땐 정신이 없어서 청명이 아파서 우는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었겠지.

“만약 쭉 악몽을 꿔 왔다면….”

“그래. 신경이 곤두서 있던 것도 잠을 설친 탓이겠지.”

윤종이 담담하게 말했어.

원래도 극단적으로 잠이 짧은 청명이었어. 화산의 제자들을 수련시키고, 사업을 관리하고,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수련을 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 잠을 잤지. 겨우 확보한 짧은 수면시간마저 악몽 따위에 방해받으니 피로가 쌓이기만 하겠지. 그런 날이 반복되니까 청명은 위태로워졌어. 제 감정을 채 갈무리하지 못해 속으로만 곱씹던 불안이 겉으로 드러났지. 조걸은 쭈그려 앉아 머리를 벅벅 긁었어.

“…악몽 때문에 힘들다면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아마 자신도 모를 거다.”

“예?”

“악몽 꾼 걸 기억 못 하는 것 같더구나. 원인을 모르니 이 녀석도 속이 답답하겠지.”

윤종이 악몽을 꾸는 청명을 발견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어. 청명의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자, 윤종은 청명을 주시했지. 그리고 밤중에 악몽을 꾸는 청명을 보았어. 깜짝 놀란 윤종이 청명을 달래보아도, 청명은 잠에서 깨어나면 자신이 악몽을 꾸었다는 사실조차 잊었어. 자신이 우는 것조차 모르는 아이에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겠어. 윤종은 그저 청명을 위해 밤을 지새웠어. 청명이 잠들 때가 되면 방에 몰래 찾아가 끙끙거리며 몸을 비트는 아이의 손을 잡아주었지. 서럽게 울던 아이가 그 온기에 매달려 울음을 그치던 모습을 윤종은 매일 밤 지켜봤어.

윤종의 이야기를 들으니 조걸의 속은 더 어지러웠어.

“술. 악몽 때문이겠죠?”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지만 조걸은 확신했지. 지독한 악몽을 꾸는 청명과 매일 밤 술을 퍼붓는 청명. 부상 때문에 술을 끊고 나서 악몽을 꾸기 시작했으니, 그 내막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

“우리는 이 녀석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네요. 이번 일이 없었다면 이 정도로….”

조걸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눈을 꾹 내리감았지.

“…힘들어하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니 노력해야지. 이 미련한 놈이 속내를 토할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단단해지면 될 일이야.”

조걸은 고개를 끄덕였어. 청명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던 조걸은 찌푸려진 미간을 꾹 눌렀어.

‘남의 속도 모르고.’

두 사람은 말없이 밤을 지새웠어.

“뭐야?”

침의로 갈아입고 막 침상에 누웠을 때 문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어. 에잉, 귀찮게. 청명은 궁시렁거리며 문을 열었지.

“사형?”

윤종이 문 앞에 서 있었어. 청명은 오밤중에 이 사형이 왜 날 찾아왔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 윤종이 손에 든 술병을 내밀었어.

‘술?’

“이걸 왜 나한테 줘? 나 아직 술 못 마시는 거 몰라?”

“필요하잖아.”

윤종은 부드럽게 웃었어.

“이제 부상도 거의 다 나았으니 마셔도 될 거다. 그렇지만 과하게 마시지는 말아라. 다들 걱정할 테니.”

혼자 긴 말을 쏟아낸 윤종은 청명에게 잔까지 건네주었어. 청명은 떨떠름한 얼굴로 방안에 들어왔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청명은 뚜껑을 열어 향을 맡았어. 독주는 아니었으나 향이 좋고 맛이 달아 속을 달래기에는 좋았지. 술병을 기울이던 청명은 피식 웃었어. 저 눈치 빠른 사형이 청명이 악몽 때문에 술을 마신다는 걸 알아챘나 봐.

“하여튼 착해빠졌다니까. 남 걱정할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르지.”

청명은 제 앞에 잔을 두고 술을 따랐어.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술잔을 기울였지. 처음에는 장문 사형을 부르다, 저보다 나이가 많던 사제와 유일했던 친우의 이름도 꺼냈지. 어리광을 부리듯 상대에게 투덜거리던 청명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있었어. 악몽에 시달리느라 잠을 설쳤던 탓에 청명의 몸은 진득한 피로에 짓눌려있었어. 그런 몸에 술이 들어가니 청명은 빠르게 취했지. 청명은 침상에 머리를 기댄 채 중얼거렸어.

“어린놈들한테까지 걱정 끼치다니 나도 영 맛이 갔네.”

그렇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청명은 홀로 낄낄거리며 웃었어.

과거에도 청명은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술을 달고 살진 않았어. 술독에 빠진 것처럼 매일 취해있지는 않았단 말이지. 순전히 불쾌한 꿈 때문이었어. 초삼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나서 청명은 꿈을 꾸기 시작했어. 어떤 꿈이었는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불쾌하다는 감각만이 남아있었지. 꿈을 꾸다 밤중에 눈을 뜨면 온종일 가슴이 소란스러웠어. 집중을 못 하고 숨이 턱턱 막혀왔지. 가슴 속에 징그러운 무언가가 자라나는 느낌이 들었어. 그럴 때면 청명은 자신이 벌을 받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는 꿈에 자신이 잡아먹힐까 봐 겁이 났지. 청명은 어느 순간부터 술에 매달렸어.

피식거리며 웃던 청명은 잔을 늘어뜨린 채 투정 부렸어.

“…너무들 하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코빼기도 안 비치고.”

꿈에서조차 웃는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는 사형제들의 매정함이 서러웠지. 무릎을 끌어안은 청명은 느리게 고개를 까닥거렸어. 긴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지. 이내 청명의 고개가 덜컥 꺾이며 긴 숨소리가 들렸어.

 

꿈에 그리운 사람들이 찾아왔어. 언제나 악몽의 형태로만 얼굴을 비추던 이들이 난생처음으로 즐겁게 웃었지. 그 얼굴들이 어찌나 반가운지 청명은 울다 웃었어. 안온한 시간이었지. 십만대산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청명이 처음으로 느껴보는 평온이었어. 어찌나 다정한 꿈이었는지 잠에서 깨어난 청명은 아득한 그리움을 느꼈지.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 남은 온기를 곱씹던 청명은 빙그레 웃었어.

“이렇게 찾아올 줄 알았다면 진작 투덜거릴걸.”

청명은 술이 반쯤 남은 술잔을 들어 올렸어. 처음 같은 향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희미한 단맛이 느껴졌지.

“괜찮아요.”

청명은 술을 머금고 오래도록 눈을 감았어.

“다들 이렇게나 날 걱정해주는데, 나도 이제 괜찮아져야죠.”

 

2.

 

악몽을 꾸고 나면 검존의 기억과 검협의 기억이 엉망으로 뒤섞여 혼란스러운 청명이 보고 싶다. 분명 이곳은 자신의 화산인데 사형제들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거야.

화산의 제자들은 백매관에서 다 함께 생활하니 종종 청명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어.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듯 밤중에 사람이 자는 방에 들어오는데 모를 수가 없었지. 청명은 아무말없이 사형제들의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돌아나갔어. 어떨 때는 사형제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해 못 할 말들을 중얼거렸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꾹 감고 있던 청자 배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어.

무얼 그리 애타게 찾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어. 처절한 얼굴로 누군가를 찾는 청명을 보면 속이 타들어갔지. 사형제들은 그런 청명을 발견할 때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이의 손을 잡아 방으로 데려다주었어. 그리고 청명이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 줬지. 그렇게 잠들고 나면 청명은 그날 있었던 일을 잊었어.

한밤중 돌아다니다가 눈을 뜨면 청명은 눈에 띄게 피로해하겠지. 사형제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도 나무에 등을 기대고 늘어질거야. 청명이가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불같이 화를 내던 사형제들도 그런 날은 모르는 척 넘어가겠지. 오늘따라 저 병아리들이 자신의 눈치를 살핀다는 걸 알고 있지만, 청명은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

악몽을 꾸고 혼미한 정신으로 돌아다니다가 윤종에 방에서 눈 뜬 적도 있겠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윤종의 손에 이마를 묻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어. 윤종은 제 사제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봤어. 잠깐 주위를 훑던 청명은 이곳이 제 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 윤종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손을 끌어 잡는 걸 보니,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지. 청명은 가슴에서 솟구치는 기분 나쁜 감정들을 꾹 눌러담은 채 태연하게 말했어.

어? 사형이 왜 여깄어?

천둥이 무서워 함께 자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느냐

사형은 그 나이 먹고 혼자 못 자?

윤종은 작게 웃으며 농담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지. 그러나 이 상황이 너무 불편한 청명은 빨리 달아나고 싶었어. 달아나려는 아이를 붙잡으려 윤종은 다정하게 말했어. 이불을 들추고 침상을 툭툭 두드렸어.

청명아 춥다 어서 들어와라

윤종과 청명 두 사람을 들이기에 침상은 충분히 넓었어. 단정히 웃고 있는 윤종을 보며 청명은 어릴적 기억을 떠올릴 거야. 천둥이 치던 밤 홀로 잠들기가 무서워 청문을 찾았던 적이 있어. 청문은 오밤중에 훌쩍거리며 찾아온 아이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제 침상에 들였지. 그리고 손을 잡아 주었어.

이제 무섭지 않지?

청명의 손을 잡아준 윤종은 마치 그날의 청문처럼 청명에게 묻겠지. 청명은 아무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윤종은 아이의 얼굴에서 지독한 그리움 읽겠지.

오늘 밤은 괜찮을 거다

내가 옆에 있어줄 테니 악몽을 꾸지 않을 거다, 라고 윤종은 말했지. 가슴을 토닥거리는 손길은 따뜻했어.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이던 청명은 아득함 그리움에 잠기겠지. 그 감정이 낯설어 윤종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는데, 그것이 어리광인 줄 알았던 윤종은 청명의 손을 더 꽉 붙잡았어.

걱정 말아라 네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마

누군가의 옆에서 자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청명은 쉽게 잠에 들지 못했어. 몸을 한껏 웅크려 윤종의 고요한 얼굴을 힐끔거렸지.

어서 자라

청명은 느리게 눈을 내리감았어. 윤종의 평온한 목소리를 들으니 오늘 밤은 악몽을 꾸지 않을 것만 같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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