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청명(암검)] 헛소문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침묵을 무겁다 느낀 적이 적이 없음에도, 당보는 지금 한 사람의 침묵에 철저히 짓눌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억울한 기분이긴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묵묵히 당보를 바라보고 있는 청명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억울하다는 말이 목구멍으로 도로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체감상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았을 즈음, 굳게 닫혀있던 입이 드디어 열렸다.
"소문이 참 재미있던데."
청명의 싸늘한 한마디에 당보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그 놈의 말도 안 되는 소문. 그 하나 때문에 자신이 고초를 겪는 중이었다. 뭐, 거기에 자신의 잘못이 정말 단 하나도 없냐 묻는다면, …… 그건 아니였지만…….
"설명해봐."
"…… 말하면, 들어줄거요?"
청명이 한 쪽 눈살을 슬 찌푸렸다. 더 끌면 정말로 사단이 나겠다 싶어 당보가 급히 입을 떼었다.
***
아마도, 몇 주 전부터였을까, 당보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곧 혼례를 올릴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하지만 당연하게도 당보는 모르는 일이었다. 제 하나뿐인 정인은 여인이 아니였고, 혼례는, …… 너무 이른 얘기가 아니던가.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고, 이제야 겨우 손 하나 잡은 단계로 넘어온 둘에게 혼례라는 단어를 올리기엔 이른 감이 있었다. 아무튼, 당보는 그 소문에 딱히 대응하지 않았다. 그런 근거없는 소문이야 금방 가라앉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그런 사라져가는 소문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을 게 뻔했다.
적어도, 당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맞아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당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사람들은 명성이 드높은 이들의 소문에는 금세 기름을 부어대며 부풀리기 마련이라는 것이였다. 그게 훗날 꺼질 불이라고 해도 말이다.
당보는 답지않게 멍한 얼굴로 제 처소에 쌓인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함께 동봉된 서찰엔 혼례를 축하한다는 둥의 이야기들이 한껏 쓰여있었다. 미치겠네. 손을 들어 조금 수척해진 얼굴을 꾹꾹 쓸어내리던 당보가 선물을 정리하던 이를 손짓으로 휘휘 물렸다. 이번엔 정말 실수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성질 같아선 이것들을 냅다 다 태워버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여기저기서 이런 고급진 선물을 보내오는 곳들이 보통 집안이겠는가!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힌 입장에선 또 그렇게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노릇이었다. 의자에 몸을 깊게 묻던 당보가 가볍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선을 그리로 돌렸다. 아까 물렸던 이가 조금 창백한 얼굴을 문 사이로 내밀었다.
"무슨 일이냐."
"저어, 어르신……. 연통이 도착했습니다만, 그게……."
"그냥 아무대나 두고 가거라."
"그, 검, 검존께서 보내신……."
검존이라는 두 글자를 듣자마자 의자에 기대어있던 당보가 격하게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격했는지, 의자가 뒤로 쿠다탕, 소릴 내며 넘어갔다. 당보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 정인에게 온 연통이 무엇일지, 당보는 솔직하게 알고 싶지 않았다. 당보가 묵묵히 손을 내밀자 아이가 급히 서신을 두 손으로 내밀어 건네고는 눈치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
"……."
제게 연통을 보내올 때면 늘 매화 꽃을 따다 정성스레 말려 만든 압화를 함께 엮어 보내주곤 했는데, 지금 제 손에 들린 것은 정말 달랑 흰 종이 하나 뿐이었다. 서신을 펼치는 당보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나 좀 보자.]
고작 한 줄 뿐인데, 당보는 마치 처형 선고라도 받은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
"그러니까……."
"예……."
"그냥 그 모든 것이 오해다?"
당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청명의 표정은 좀체 풀어질 줄 몰랐다. 아직도 미심쩍은 것이 남아있다는 듯이. 당보는 막힘없이 대답하기 위해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왜 단 한 번도 그 소문이 헛소문이라 대응하지 않았는데?"
"말했잖소. 금방 사그라들 줄 알았다고……."
청명이 간신히 펴졌던 얼굴을 꾹, 구겼다. 당보는 속으로 작게 탄식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게 있는 걸까. 아니, 정확히는 자신에게 진짜로 묻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인데……. 팔짱을 낀 청명의 손이 검은 도복자락을 움켜쥐듯 구겼다. 곧 청명의 입이 작게 달싹였다.
"……는."
"예?"
개미 목소리만한 목소리를 제대로 못 들은 건지 당보가 되물었다. 아랫 입술을 몇번 깨물며 자근 씹어대던 청명이 시선을 떨어트리며 다시 입을 떼었다.
"나한테는, 왜 연락 한 통 없었는데?"
"아."
당보가 탄식과 비슷한 짧은 소리를 흘렸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이 헛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그제야 자신이 간과한 무언가를 눈치챈 당보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금세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청명의 손을 꾹, 움켜쥔 당보가 답지 않게 정리되지 않은 말을 마구 흘려댔다.
"그게, 저도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이 상황이 진정되면 바로 연통을 넣으려 했소."
하지만 청명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제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이와 혼례를 치룬다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데, 상대는 자신에게 연락 한 통도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 소문이 거짓이라며 오해를 풀기 위해 나서지도 않았다.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겠는가. 입장을 바꿔 만약 자신이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상대를 죽여버리기 위해 길길이 날뛰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보는 사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형님, 제가 잘못했소."
"……."
당보에게 잡힌 손을 묵묵히 빼낸 청명이 몸을 일으켰다. 혀, 형님? 당혹감 서린 목소리에 청명이 가늘게 치켜뜬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닷새 준다."
"예?"
"그 안에 전부 해결해. 넘기면 평생 내 얼굴 볼 생각도 말아라."
"혀, 형님, 도사 형님!"
당보의 애타는 부름에도 청명은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체 떠나버린 이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던 당보의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망했다. 바보라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만약 지금 청명이 준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그걸로 끝이다. 소리없는 비명을 내지른 당보가 급히 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당가를 나선 청명이 그제야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심했나, 싶었지만…… 자신의 분노는 정당했다. 오해? 알아서 사그라들 줄 알았다? 당보의 대답을 곱씹던 청명이 다시 들끓는 화에 거친 숨을 토해냈다. 처음 그 소문이 돌기 시작했을 때, 자신과 당보가 어떤 사이인지 아는 이들은 슬며시 저에게 걱정을 표했다. 하지만 그 때의 청명은 신경쓰지 않았다. 분명 그놈이 알아서 소문을 가라앉히고 헛소문 따위 신경 쓰지 말라며 연락을 넣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런 청명의 생각을 비웃듯이, 소문이 이만큼 퍼져나가는데도 당보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며, 청명에게 연락 한 번 주지 않았다. 그게 청명에게 어떤 식으로 와닿았을지는 뻔할 뻔자가 아니던가. 시간이 갈수록 청명의 분위기는 낮게 가라앉았으며, 주변인들은 더이상 그 일을 감히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복잡하게 엉켜가는 청명의 머릿속에선 알아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당가 놈들이 그놈에게 강제 혼인을 시킬 작정이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그 성질머리에 그 말을 고분고분 들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내가 아닌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청명이 늘 당보에게 연통을 보낼 때나 쓰던 질 좋은 종이를 낚아채듯 꺼내 펴들었다. 나 좀 보자. 그렇게 쓰던 붓끝이 살짝 떨렸다.
그렇게까지 마음 고생을 했더니, 전부 오해라는 둥, 정리가 되면 연락을 넣으려 했다는 둥, 얼마나 열 뻗치는 소리로 들렸겠는가. 솔직히, 닷새 안에 그걸 전부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전전긍긍해 한 만큼 저놈도 어디 당해봐야하지 않겠냐, 는 유치한 마음도 없잖아 있었으므로. 한참을 당가 앞에 서있던 청명이 곧 걸음을 돌리고,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 당가에선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
"허……."
청명이 조금 질린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나흘, 당보가 혼인을 한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당가에 보내졌던 선물이고 연통이고 전부 다시 돌려보내졌으며, 그 혼인이 그저 소문에 불과했다는 말이 더 압도적인 수로 저잣거리를 메웠다. 정말로 그 짧은 시간만에 그 소문을 전부 해결했다고? 못해도 몇 주야는 걸릴 줄로만 알았는데……. 자신이 놓은 으름장이 생각보다 효과가 굉장했던 모양이라, 이렇게 빠르게 해결되니 또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청명의 손에는 당보가 오늘 아침에 막 보내왔다던 서신이 들려있었다. 늘 단정하던 글씨가 어찌나 날려 적혀있던지, 그의 다급함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일이 전부 해결되었으니 오늘 만나러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
역시, 심했나? 쩝, 소리를 내며 도로 서신을 조심조심 접어두던 청명이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장로님, 암존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래."
청명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도 전, 청명의 처소에 당보가 먼저 걸음을 불쑥 들였다. 화산의 제자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으나, 청명은 나가보라는 손짓을 하며 당보에게 시선을 두었다. 문이 탁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당보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왔, 아니, 너 몰골이 왜 그 모양이야!"
경악한 청명의 목소리에도 당보는 묵묵히 청명에게 손을 뻗었다. 망설임없이 그 손을 덥석 잡으니 그의 큰 몸뚱이가 청명에게 기대오며 한껏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제가 잘못했소……."
"……."
힘없고 먹먹한 목소리가 당보에게서 흘러나왔다. 미묘한 죄책감이 청명의 가슴을 두드려댔다. 골탕 좀 먹이고 싶었던 것은 맞지만, 이렇게까지 그가 초췌한 꼬라지가 되길 바란 것은 아니였다. 답지않게 당황한 청명이 손을 들어 그의 쑥 들어간 뺨을 더듬다 감싸잡고는 자신을 마주하게끔 했다.
"…… 너, 잠은 잤냐?"
당보가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한숨도?"
"예……."
"미치겠네, 진짜."
"그치만, 그럴 틈이 도저히 안 나서……."
웅얼웅얼 뱉어진 말에 청명은 말문이 막힌 듯 한동안 조용했다. 그래, 누굴 탓하랴. 다시금 한숨을 푹, 내쉰 청명이 당보의 손을 잡아 끌어 침상으로 이끌었다. 평소대로라면 대낮부터 너무 파렴치하지 않냐며 호들갑을 떨 녀석이 잠잠했다. 당보를 침상으로 밀어 눕히자, 청명의 향이 가득 묻어난 침구 위로 당보가 느리게 고개를 부볐다.
"좀 자고 일어나서 얘기해."
"그치만……."
"그 전엔 아무것도 안 들어."
"……."
청명의 단호한 말에 당보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바로 단잠에 빠져든 건지, 규칙적인 숨소리가 새근새근 들려온다. 뒷통수를 박박 긁던 청명이 조용히 침상에 걸터앉았다.
"미련하긴……."
이 정도까지 절박한 그의 마음을 끝까지 믿지 못한 제 잘못도 있었기에, 청명은 더이상 혼잣말도 내뱉지 않았다. 거뭇한 그의 눈가를 살살 쓸어내던 청명이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일어나면 뭐라도 먹을 수 있도록 부탁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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