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초상肖像, 二
※ 화산귀환 약 1400화까지의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 화산귀환 1231화가 최신화일 당시 구상 및 작업 시작한 글로 최신 연재분과 어긋나는 부분이 다소 존재할 수 있습니다.
※ 초상 1편: https://glph.to/u14imi
“초상화라…….”
태상 장문인 현종과 장문인 운암, 그리고 오검을 한데 모은 청명이 황종의로부터 들은 내용을 정리해서 설명했다. 청명의 정체가 어땠거나 문파의 제자가 산문 밖으로 나가려면 장문인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청명을 절대 홀로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니 오검은 언제가 되었든 이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될 것이었고, 어차피 그들이 듣게 될 일이라면 문파의 어른들께 이야기하는 김에 함께 듣도록 청명이 오검을 부른 것이다. 그게 더 빠르니까.
“정말 화산의 선조를 그린 초상화가 발견됐단 말이냐?”
청명의 말에 깊게 생각에 잠긴 현종과 운암 대신 확인차 되물어본 백천이 묻자 청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듣기로는 그렇대. 추정일 뿐이지만.”
“그런데 초상화의 주인이 선조인 것은 어떻게 확신해?”
“화공이 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라는데, 당연히 그 시절 화산 사람이겠지. 사숙은 백 년 전으로 갈 수 있어?”
죽고 나서 냅다 백 년 후로 오는 경우는 봤어도 백 년 전으로 간 경우는 못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백 년 후에 눈을 뜬 것이고, 본 게 아니라 직접 겪은 것이지만. 여하튼 사례가 없다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청명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해보던 백천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음,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지.”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술법이니 사술이니 하는 것들이 유행(?)하긴 하지만, 그것도 기껏해야 적을 잠깐 휘말리게 하거나 아군을 보호하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지 않나.
“이미 그림은 그 사람 손으로 넘어갔으니, 우리가 할 일은 그 기록이라는 걸 찾아서 그분과 협상을 시도하거나….”
“그림을 사는 수밖에 없겠네요.”
살 돈이 없는 것은 아니니 두 선택지 모두 존재한다. 예전이었다면 꿈도 못 꾸고 쓰린 속을 달래기 바빴을 테지만, 이제 화산에는 돈도 명성도 모두 있다. 그 초상화가 진정 화산의 선조를 그린 것이 맞다고 하면 재경각에서도 망설이지 않고 많은 돈을 내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대가 얼마나 많은 돈을 부를지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래가 아니더라도 기록을 찾는 것도 중요하긴 하겠죠. 그 기록이라는 게 있어야 어떤 분을 그렸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기록을 못 찾더라도 알아볼 방법이 없진 않을 수도 있지.”
“응?”
모두의 시선에 청명이 더 입을 열지 않고 슬그머니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당시 청자배 놈들은 나름대로 평생 봐온 얼굴들인데, 지금이야 기억이 안 나지만 그림이라도 보면 알아볼 수 있겠지. 물론 그조차 그럴 수 있으리라고 확답을 내어놓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뭐, 그래도 조금 고생하겠지만 그쪽이 돈이 덜 나가는 건 맞을 테니까 기록을 찾는 게 좋긴 하지. 더 확실하고.”
청명이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태연히 말했다.
“그 초상화가 발견된 곳은 어디래?”
조걸의 물음에 황종의의 말을 떠올린 청명이 책상 위에 펼쳐진 지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 가리켰다.
“여기. 귀주 쪽. 듣기로는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혼자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더라. 아마 그 주변 산에서 머물지 않았을까 싶은데.”
모두의 시선이 청명의 손끝으로 향했다. 아, 그리고 수집가는 여기서 지낸다더라. 청명이 덧붙여 말하며 그 인근의 다른 곳도 짚었다.
“그러니까, 그 화공의 작업실로 추정되는 곳도, 이미 초상화를 손에 넣은 수집가의 거처도 모두 강남에 있다는 것이로구나…….”
장문인전 내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그들 중 과연 강남에 좋은 기억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과거 정마대전을 겪고 십만대산에서 한 번 죽었던 청명은 물론이고, 해남에서 돌아오면서 몇 번이나 삶과 죽음을 오갔으며 또 그런 이들을 살리기 위해 아득바득 제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던 화산에게 다시 밟게 될 강남이 영 껄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가야지, 어쩌겠어.”
땅은 그저 땅일 뿐이다.
더 이상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없다. 적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아군을 구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결사대를 이끌고 목숨을 걸고서 적의 머리를 치러 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화산에 있어야 할 것을 다시 화산에 가져오려는 것뿐이다.
“그 넓은 곳을 우리가 하나하나 헤집고 다니다가는 몇 년이 지나도 못 찾겠지. 이러는 동안에도 누가 찾았을 수도 있고.”
청명이 툭 던지듯 말하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지.”
“작업실이 산에 있을 수 있으니, 일단 녹림왕에게도 한 번 연락을 넣어보는 게 좋겠구나.”
“그럼 개방에도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개방보다는 상단 쪽에. 이건 무림의 일이 아니니까.”
“저희 상단에도 도움을 요청해두겠습니다. 아무래도 교류를 주고받은 곳이 많을 테니까요.”
다른 이들이 서로 생각을 이어가며 묻고 대답한다.
그간 쌓았던 모든 경험이 그들의 단단한 바탕이 되어 이제는 청명이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익숙하게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의 낯에 흡족한 미소가 옅게 피어올랐다.
‘진짜 다 컸네, 다 컸어.’
청명이 당과를 입에 가져가며 슬그머니 입을 가렸다.
워낙 잘 키워놨으니 이쪽은 큰 문제 없을 듯하고, 남은 건……. 황종의가 추가로 건넨 정보들을 머리로 정리해보던 청명이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인 건, 이유는 몰라도 수집가 양반이 화산에 호의적인 편이라고 하니 적당히 타협 가능할 것 같다는 것이긴 한데…….”
사실 양민 중에서는 화산에 적대적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화산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수많은 피난민을 받아들여 그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기도 했으며, 실제로 치열했던 마교와의 전쟁 또한 승리로 이끌었던 문파니까. 황종의로부터 전해 들은 추가 정보들을 떠올리며 청명이 곰곰이 생각하던 중 울컥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호의적이면 뭐해! 자기가 손에 넣은 게 화산 사람 초상화라는 걸 알았으면 일단 화산에 가져와야 할 거 아냐! 이 새끼가 어딜 슬그머니 입 닦고 있다가!”
청명이 불을 내뿜는 순간 벼락같이 그의 주변에서 달려들어 청명의 양 팔을 잡아 눌러 앉히고, 빠르게 그의 입에 당과를 집어넣었다. 이제까지 그가 갑자기 발작하고 날뛰는 꼴을 수백 번 하고도 더 봐왔기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전쟁이 끝난 뒤로 좀 잠잠해졌나 싶더니, 여전히 청명은 청명이었다.
“어어, 그래, 청명아. 진정하고. 당과 여깄다.”
“어휴, 요즘 좀 잠잠하다 했더니!”
“당과 먹어. 빨리.”
익숙한 단맛이 입에 맴도니 분을 삭이지 못해 연신 씩씩대던 청명 또한 호흡이 점차 차분해졌다. 그가 진정했음을 확인한 이들이 언제든 다시 달려들 수 있게끔 천천히 떨어지자, 청명이 심통 난 얼굴로 입에 든 당과를 우물거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분노 섞인 긴 한숨을 뱉었다.
일상이나 다름없던 짧은 소란이 사그라들고, 운암이 강남으로 떠날 이를 추려내 확정 지었다. 사실 따로 추려낼 것도 없었던 것이, 청명과 오검이 이리 한데 모여있는데 여기서 어느 누굴 더하고 빼겠는가. 소식을 제일 먼저 접했던 청명을 중심으로 언제든 그의 목줄을 잡을 대사형 둘, 상재를 가진 조걸과 핵심을 찔러 도움을 주는 유이설, 그리고 만에 하나 나간 이들 중 부상자가 생길 경우를 대비하여 뛰어난 의원으로서 당소소까지. 이제까지 많은 합을 맞춰왔기에 그들을 떼어놓고 보내기도 어색했다. 초상화 소식을 전해 들은 현영과 운방으로부터 그 초상화가 화산의 선조를 그린 것이 맞다면, 화산을 내다 팔아야 할 정도가 아닌 선에서 상대가 원하는 금액을 지불해도 된다는 허가를 받고서야 여섯 명을 강남으로 보낼 짐을 꾸렸다.
“다른 운자배 중 한 명에게 인솔하라고 함께 보내고 싶었다마는…….”
전쟁이 끝나고 안정되었다고는 하나, 화산은 원래도 장로직에 빈자리가 많았다. 현자배는 셋이었고 운자배는 열 남짓이라, 천우맹 안건까지 더하면 일손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소수로 다니는 게 다닐 때 훨씬 편하다는 말에 결국 청명과 오검만을 보내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이리 다시 강남에 보내자니 영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괜찮습니다, 장문인. 별다른 일이야 있겠습니까?”
“저거 플래그 아닙니까?”
곁에서 속닥거리는 것이 들려왔으나 깔끔히 무시한 채 백천이 말을 이었다.
“선조의 초상화를 확인하고 전달받아서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태상 장문인께서도 늘 이야기하셨지만……, 너희에게 반드시 완수해야 할 임무는 없다. 선조의 초상화를 되찾는 건 분명 우리에게 큰 의미를 부여할 테지만, 그보다 더 중한 것은 너희 모두의 안위다. 천이 네가 장문 대리의 위치에 있으니 그것만은 끝까지 기억해야 한다.”
“예, 장문인.”
대답은 잘하지. 하지만 자신이 저 대답에 말을 더 얹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운암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들을 배웅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여 서로 놓고 가는 것은 없는지 확인하기 시작하는 녀석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기분이 꽤 새로웠다. 화산의 이름이 드높아지면서 아이들의 강호행을 배웅했을 현종 또한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어 고개를 돌렸다.
"……태상 장문인?"
어딜 보시는 거지? 운암은 현종의 불안한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곳에는 짐을 확인하던 이들 사이에 끼어든 청명이 지난 해남행에서와 마찬가지로 직선으로 가로질러 내려가야 빠르다며 제 연약한(?) 사형제들을 구박하고 있었다. 현종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대번 눈치챈 운암이 입을 열었다.
"태상 장문인께서도 아이들에게 당부하시지요."
"응? 내가?"
"화산의 제자들이 먼 길을 떠나지 않습니까. 태상 장문인 눈에 걱정이 가득하십니다."
연신 소란스레 사형제들을 들볶던 청명도, 그를 말려보던 이들도 사문의 두 어른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리자마자 언제 흐트러졌냐는 듯 빠르게 다시 도열했다. 늘어선 이들의 낯을 하나하나 살피던 현종의 시선이 청명에게서 멈추었다. 이들 모두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으니 어련히 잘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현종은 눈앞의 어린 제자에게 이 말만큼은 꼭 전해야만 했다.
“……청명아.”
“네? 네, 태상 장문인.”
이대로 가기만 하면 될 텐데, 다른 이들은 말없이 보고 넘겼던 현종으로부터 이름이 불리자 청명이 어리둥절한 낯으로 현종을 응시했다. 그 눈빛을 한참 가만히 바라보던 현종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일, 그분이 그림을 내어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무력으로 뺏어오면 안 된다.”
“……네?”
뜬금없는 이야기에 청명이 크게 뜬 두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종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주먹을 써도 안 되고, 검은 더더욱 안 되고, 협박해서도…….”
“…아니! 대체 절 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멍하니 현종의 당부를 듣던 청명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무뢰배.”
“강도.”
“미친놈.”
“마지막은 어떤 놈이야?”
청명이 고개를 돌려 째려보자 입을 열었던 녀석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휘파람을 불며 그 날카로운 시선을 외면했다.
“……내 걱정이 되어 그런다.”
청명이 처음 화산에 올라 옥천원에서 쓰러지기 전 이걸 팔아먹었느냐고 했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던 탓이다. 그러나 언제 그리 말했냐는 듯, 청명이 화산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화산이 먼 옛날부터 계속 팔아넘겼던 물건들에는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 이후로 현종이 과거에 팔았던 유물들을 다시 매입할 틈조차 없이 많은 일이 휘몰아쳤고, 이제야 옛 선조들과 관련된 유물의 소식을 접한 것이다.
화산을 향한 청명의 애정이 더없이 크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예전에 선조의 유해를 수습해왔을 때, 한동안 청명의 상태가 이전과 어딘가 미세하게 달라졌던 것을 현종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아직 한참 어린 이 제자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그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이번 또한 선조와 연관된 일이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종이 끙, 앓는 소릴 내며 눈을 질끈 감자 청명의 옆에 서 있던 백천이 나섰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태상 장문인. 그래도 여태 같이 다닌 경험이 있으니 저희가 녀석이 터지지 않게 최대한 잘 막아보겠습니다.”
나름대로 청명 담당 경력직(?)들이 아닌가. 게다가 오검은 청명이 꽤 편안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러니 녀석들이라면 괜찮겠거니 한 현종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청명이 삐딱한 목소리로 투덜댔다.
“내가 무슨 벽력탄이야? 터지게?”
“…차라리 벽력탄이었으면 말을 안 하지.”
“어쭈? 한 번 터져줘? 터트려 줘?”
아웅다웅하기 시작하는 사이 좋은(?) 문도들을 가만히 바라보던 현종은 이내 흐뭇하게 웃고 말았다.
“너넬 보는 내 속이 먼저 터지겠으니, 빨리 가거라.”
“아, 태상 장문인!”
“다녀오겠습니다.”
화산의 선조와 그 후예들은 항상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나, 결과적으로는 화산만 빼고 지킨 꼴이 된 선조였고, 막막한 현실을 버티면서 머나먼 타지에서 대의를 위해 명을 다해야 했던 선조들을 조금도 수습해오지 못한 후예들이었다. 때로는 원망했고, 때로는 안타까움에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잃었던 재물과 명성, 자리까지 되찾았으나 여전히 화산에 돌아오지 못한 화산의 것을, 이제는 되찾아 올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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