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관] 세상을 담을 그릇 一

화산귀환 구화산 드림

아해야, 아주 재미 있는 이야기 하나 들어 보련?

옛날, 옛날. 지금으로 부터 백년 하고도 팔십 여년 전에, 몽골 초원에 어느 여인이 살았어요. 바람결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말을 타고 달리는 걸 가장 좋아하던 소탈한 모습과는 달리, 그는 초원을 호령하는 황금씨족, 알탄우룩 보르지긴 씨 였답니다. 대원 태조의 직계 후손 이었던 그녀는... 잠깐, 태조가 누구냐고? 요즘은 서당에서 옛날 이야기 안 해주니? 패아지근 철목진孛兒只斤 鐵木眞 말이야, 칭기즈칸.

큼, 다시... 말을 타는 것도 아주 좋아했지만, 여느 몽골족들 처럼 신실한 라마교 신자 였던 여인은, 어느날, 대활불을 만나기 위해 서장밀교의 총 본산, 포달랍궁으로 향했습니다. 아무리 중원에서는 밀려났다고 하나, 여전히 초원의 패자로 군림하는 드높은 신분 덕에, 그는 쉽게 달뢰라마와 판첸라마를 독대하고 포달랍궁의 백궁에 한달 정도를 머물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여인은 그만 젊은 날의 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달뢰라마를 모시던 어느 승려와 정을 통하게 됩니다. 딱 하룻밤의 일탈이었기에, 그와 승려는 그 일에 대해 함구 하기로 약조하고 헤어집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아해한테 해도 되냐고? 지학을 넘겨도 한참 전에 넘긴 놈이, 말이 많다.

아마 그렇게 끝났더라면 두 청춘남녀의 비밀스러운 일탈 정도로 남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보르지긴 씨의 배 속에는 작은 생명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의 부모는 크게 노했으나, 자초지종을 듣고 승려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아이를 없애지는 않았어요. 아이가 태어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달뢰라마를 모시던 젊은 승려는 몽골에서부터 달려온 전령을 마주하게 됩니다.

몇천리나 되는 거리였지만, 보르지긴 씨가 내준 준마는 그정도 거리야 보름 만에 주파 할 수 있었어요. 소식을 듣고 사색이 된 승려는, 달뢰라마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청했습니다. 매서운 질책과 호된 처벌, 파계까지도 각오한 것과 달리, 달뢰라마는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어요.

어쩐지, 어제 아주 신묘한 광경을 꿈에서 보았다고요. 그는 간밤에 수많은 보살과 부처와 신장들이 그를 둘러싸고 커다란 그릇을 전해주는 꿈을 꾸었다 말했습니다.

- 갑시다, 초원으로. 하늘의 뜻을, 세상을 구할 이를 담을 그릇을 찾으러.

한달 여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달뢰라마는 초원에서 보르지긴 씨와, 그의 품에 안긴 작은 여아를 만났습니다. 마음 고생이 심했는지, 심하게 마른 보르지긴 씨와 그의 부모는, 의아해 하면서도 달뢰라마와 라마승 일행을 환대하였습니다.

얼굴에 미소를 띈 채로, 달뢰라마는 요람에 눕혀 있는 아이를 안아 들며, 이 아이를 찾으러 왔다 말하였습니다. 혹여 계율을 어긴 이의 핏줄 마저 단죄하려 온 것인가, 두려워진 보르지긴 여인은 눈을 꾹 감아 버렸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달뢰라마의 너그러운 웃음 소리가 그를 감쌌습니다.

- 참으로 큰 일을 하셨습니다. 세상을 담을 그릇에, 태를 제공하셨으니. 

그의 부모는 의아해 하며, 혹여, 이 여아가 환생자인지 물었으나, 달뢰라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습니다. 

- 허나, 장차의 환생자를 담을 그릇이지요.

천막 안의 대부분의 이들이 그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 듯 했으나, 라마는 그대로 말을 이었습니다.  

- 이 아이는, 기器 입니다. 일평생,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워 두 세계를 그 몸에, 그 정신에, 그리고 그 명운에 담게 될 이 입니다.

뜻 모를 말을 내뱉은 달뢰라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여인에게 합장했습니다. 

- 세상을 담을 아해 입니다. 부디, 올바른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내어주시지요.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추상적인 언어 속에 담긴 언어 그 이상의 의미를 느낀 여인과 그 부모는 아이를 순순히 떠나 보내었습니다. 

한없이 원망스럽고, 또 이유없이 눈이 가던 아이. 연이 아니어서 일까, 아직도 제대로 정조차 들지 않은 아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연약한 맥을 가졌음에도, 의레 아이들이 그러는 것 처럼, 제대로 칭얼거리지도, 울지도 않던 기묘한 아이. 

여인의 부모는 아이의 작은 손에 보르지긴 부족을 뜻하는 표식이 화려하게 새겨진 옥패를 쥐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라마를 따라 보내나, 후일 이 너른 초원이 그리워 진다면 다시 찾아 오라는 의미에서. 드넓은 초원은 세상 만물을 품으나니, 이 아이가 돌아온다면, 그 역시 말없이 품어주겠지요.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소매에서 붉은 반장문 장식을 떼어내고는, 아이의 목에 걸어주었 습니다. 

아이야, 아직 이름 조차 짓지 못한 아이야. 시작과 끝 없이 영원히 이어지는 이 매듭처럼, 끝없는 복을 누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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