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 드림] The Weavers (1)

커미션 작업물

아하스는 무성하게 자라난 고무나무 잎과, 생장의 제한을 잊은 양 뻗어나가는 두꺼운 넝쿨을 응시했다. 흠 없이 단단한 녹색은 살랑거리는 바람에 따라 가볍게 움직였고, 그 아래로 작은 덩치의 창조생물 군체 하나가 줄을 서 움직였다. 번개의 에테르와 얼음의 에테르, 물의 에테르가 극단적으로 부족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식물을 포함한 생명들은 부족한 에테르를 효율적으로 저장하기 위한 내부 기관을 형성하곤, 특정 에테르를 통해 다른 에테르를 변환하는 활동을 호흡처럼 수행했다. 이 이데아 환경 조성은 성공적이었다. 정글을 이룬 생태 군락은 이보다 열악한 환경에 놓여져도 살 수 있을 터였다. 엘피스의 연구원들이 보면 칭찬하다 못해 환호를 보낼 터였다.

그러나 아하스는 묵묵히 손을 휘저어 거대 열대 우림을 모두 지워냈다. 그가 직접 발안하고 누구도 생각치 못했을 부분까지 세세하게 조정되었던 정글의 이데아는 그렇게 한 줌 먼지가 되었다.

이데아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이 이데아는 그가 바라는 걸 이뤄줄 수 없었다. 세 가지 에테르, 아니, 네 가지 에테르가 모자라더라도 어떻게든 에테르 생태 균형을 회복하는 환경을 구현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실현했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모든 에테르가 남김없이 고갈되는, 이른바 ‘종말’이라 불리는 상황에서는 이 이데아가 구현되더라도 지금처럼 먼지가 되어 흩어지겠지.

 

정글이 있던 허공을 바라보던 아하스는 고개를 내리깔고 천천히 눈을 떴다. 스승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종말에 관한 글자가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의 머릿속에 있었다. 글자들은 정보가 되어 때로는 에테르 구성식으로, 때로는 입체 모형으로, 때로는 상상 속 광경으로 너울거렸다. 그는 그것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살펴보고, 분석하고, 지금처럼 이데아를 이용해 시뮬레이션을 돌려보기도 했지만 종말을 예방하거나 해결할 방법은 어떻게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스승의 묘사와 같은 일이 이 별에 펼쳐진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도 절멸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또 다른 자신이 종말을 피할 수 없었다 말했단 사실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그 말을 의심하지도 않았다. 자신이라면 예고를 듣지 못했대도 그러한 미래가 발생하는 일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단지, 사실을 알게 된 상황에서는 그 상황 나름대로 관점을 달리해 시도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그러니 정글의 이데아가 목적에 불충분하다 해서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시도할 만한 가짓수는 아직도 무한에 가깝게 남아 있었다. 인류가 1 이전에 0이 존재한단 사실을 밝혀냈듯이, 숫자로는 담을 수 없는 양이 존재한단 사실을 인정하고 무한이라 이름지어냈듯이, 아직 도달하지 못했을 뿐 가능성은 반드시 존재했다. 뭐, 애초에 아하스는 무언가에 대해 좌절해 본 적도 없었지만.

 

좀 더 극단적인 생태 환경을 만들어볼까, 고민하던 아하스는 이번에는 땅의 에테르 한 줌 뿐인 이데아를 창조하기 시작했다. 대지엔 온통 모래 뿐이었으며, 얼음 에테르가 자리할 수 없어 바위나 자갈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창조생물들의 이데아 원리들이 그의 백색 눈동자 앞에서 펼쳐진 책처럼 떠다녔다. 그는 그중 몇 가지를 조합하기 시작했고, 한참의 시간동안 모래밭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오히려 그나마의 모래조차 점차 사라지더니,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가 되기 직전 한 줄기 가느다란 바람이 불어오는 걸 시작으로 점차 활기를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환경이 번창하는 듯 싶어지는 찰나, 아하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 모든 것을 정글에 그랬던 것처럼 모조리 없애 버렸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하나의 에테르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터무니없이 불안정해서, 그대로 놔두면 그나마 존재하던 그 하나의 에테르마저 점점 고갈되어 버렸다. 극소량의 에테르만으로도 충분한 생태가 갖춰질 수 있는 방법을 찾기만 한다면, 역으로 그 생태가 모조리 파괴되었을 때 무엇부터 건드려야 생태가 회복될 수 있는지를 추적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까지 밝혀진 세계의 원리로는 종말의 예방도, 종말에서의 회복도 꾀하기 어려웠다. 정녕 이치 밖의 힘을 이용하는 방법 뿐인 걸까. 잠시간 생각에 잠기던 아하스는 곧 절레절레 고개를 젓곤 기지개를 쭉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게 좋을 성 싶었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충분한 휴식에서 나오는 법.

그를 기다리던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드디어 돌아갈 생각이 들었나?”

 

아하스와 상당히 떨어진 거리의 포플러나무 아래서 팔짱을 낀 채 몸을 기대고 있던 하데스가 그에게 다가갔고, 발랄하기 그지없는 낯으로 눈을 감은 아히르는 짜잔, 하고 몸을 돌렸다.

 

“응, 오늘은 할 만큼 한 것 같아. 내가 하디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나? 하긴, 어엄청 숨어있었는데 술래가 찾으러 안 오면 섭섭하지?”

 

자세를 푼 하데스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그 짜증 어린 표정을 보며 아하스가 소리내 웃은 건 당연했다.

 

“누가 섭섭해한단 거냐. 언제부터 알고 있었고?”

“처음부터? 내가 정글을 지우기 30분 전에 도착했지? 그렇게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게다가 내 제일 소중한 친구의 뜨거운 시선인데!”

“하아……. 사람이 찾으러 온 것도 모자라 기다려주기까지 했는데, 그걸 알면서도 네 일이나 보고 있었다 이거지?”

“하지만, 이만큼 기다려 줬다는 건 그만큼 여유 있는 날이기 때문이잖아? 그렇다면 사양 않고 내 일 봐도 되지.”

“한 마디도 안 지는 점 하고는…….”

“이런 내가 너무너무 좋지, 하디? 북반구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보러 올 정도로?”

“그렇게 말한 적 없다. 혼자 멋대로 나가지 마.”

 

하데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그의 팔 안에 자기 팔을 쏙 넣으려던 아하스는 자신의 이마를 꾹 누르는 검지에 의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밀려났다. 그러나 아하스가 장난 섞인 애교를 부리며 다시 달라붙자, 하데스도 그걸 두 번씩 막지는 않았기에 결국 그의 팔 하나는 아하스의 차지가 되었다.

짜증 어린 한숨을 내쉰 하데스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고심해서 공간 단위로 이데아를 창조하는 건 드문 일인데. 두 번이나 가차없이 지우는 걸 보니, 뜻대로 안 풀렸나?”

“응—. 어엄청 노력했는데, 이거다! 싶은 정도는 아니었어.”

“…보나마나 그 종말에 관한 거겠지.”

“어라? 신경쓰고 있는 건 맞지만, 꼭 그럴 리도 없는데? 나 알잖아?”

“…….”

 

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아하스의 방글방글 웃는 실눈의 눈꼬리를 비스듬히 바라본 하데스는, 곧 그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내가 아는 너는 이 세계가 끝을 맞이할 거란 얘기를 들은 이후, 매일의 모든 시간을 그걸 막아내는 데에 쏟을 놈이니까.”

 

성큼 발을 내딛어 자신보다 20cm는 더 큰 사람을 끌어당긴 아하스는 즉석에서 생각난 곡조를 흥얼거리며 호수 지역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왜 여기서 이데아를 조물조물하는지 궁금하지 않아?”

 

네녀석이 끌고 가 봤자지, 라는 듯 아하스가 걸음을 옮기자 마자 제 보폭을 터벅터벅 옮기던 하데스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아니.”라고 답했다. 그가 궁금해해서 뭘 한단 말인가? 자신의 대답이 어찌됐던 이 녀석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할 텐데.

그의 짐작대로였다. 아하스는 하데스가 “어.”라고 대답한 것인 양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종말 대비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한 장소로 이곳을 고른 건, 재앙이 찾아왔을 때 온 세상이 불에 휩싸일 거라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하스는 몇 번이나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아모로트의 모든 웅장한 건물들이 모래성처럼 흩어지고, 땅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며, 하늘 자체가 불타버린 재가 되어 퍼석거리는 파편을 떨구는 모습을.

그가 아무리 상상하더라도 결코 실제의 종말에 비견할 순 없을 터였다. 수만 번 상상하고 수억 번 대비한다 한들 그는 분명 그 광경 앞에서 침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사람들의 비명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재앙의 광경을 상상하려고 애쓴다거나, 재앙에 대비하겠다는 마음으로 유황 지대에서 이데아를 생성하는 건 그다지 의미 없을 듯했다.

 

“그렇다면 정반대의 풍경을 눈앞에 두는 건 어떨까. 새파란 호수, 모든 생물이 물 속에서 편안하게 호흡하고 지느러미를 파닥이는 모습을 계속해서 아로새기면서, 제아무리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더라도 이 세상은 본래 이런 모습이 아니라고, 훨씬 더 활기로 가득찬 곳이라고 굳게 생각해낼 수 있게.”

 

긴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아하스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하데스는 내내 침묵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