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의 추억, 8월 편
에펠 펠미에 드림
아이렌은 제가 자연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도시에서 태어나 그 안에서만 자랐긴 하였어도, 그의 고향은 빌딩 숲만 가득했던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철새가 찾아오는 큰 강, 높고 낮은 산들, 거기에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바다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이 모든 걸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에서 자란 그에게 자연이란 여행을 떠나야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통학하던 학교도 산을 끼고 있어서 등교 때마다 오르막길을 오르고 점심시간엔 뒷산을 어슬렁거리던 자신이지 않던가.
그런 의미에서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낯선 곳임에도, 아이렌에겐 꽤 익숙한 감상을 주는 장소라 할 수 있었다.
학교 밖으로 나가 조금만 걸으면 쉽게 바다를 볼 수 있고, 드넓은 학교 안에는 울창한 숲도 있다. 비록 그 형태는 조금 다를지라도 자연이 주는 본질적인 감상이란 비슷하기 때문일까. 아이렌은 낯선 세계에서 만난 자연에 언제나 익숙함을 느꼈다.
하지만 결국 자연이라는 것도 여러 면모가 있는 법. 아이렌은 지금. 제 눈 앞에 펼쳐진 자연에서 익숙함이 아닌 낯선 경외감을 느꼈다.
“와, 진짜 그림 같다.”
드넓은 침엽수 숲. 나무와 땅을 덮은 새하얀 눈. 겨울의 냄새가 짙은 공기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소리까지. 원래 세계서 살면서 볼 일이 없었던 냉대기후의 특징이 선명한 숲을 보고 있자니, 절로 새하얀 입김과 함께 감탄이 나온다.
추워서 덜덜 떨면서도 두 눈을 빛내는 아이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에펠은 제비꽃색 눈동자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그렇지? 어제까진 눈이 왔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난 눈 오는 것도 좋아. 숲에 산책을 올 수는 없었겠지만, 에펠이랑 같이 실내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애플파이를 먹는 건 즐거울 거 같거든.”
“정말?”
“응. ……에취!”
아무리 옷을 두껍게 입었어도 역시 추위를 타는 이에게 이런 날씨는 가혹한 건지, 코끝이 빨개진 채 말을 이어가던 아이렌이 재채기하고 만다. ‘아차.’ 상대의 반응에 제가 실수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마음이 쓰이게 된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자, 아이렌 군. 이거 써.”
“괜찮아. 나도 손수건 있…….”
“그러지 말고. 이미 꺼냈으니까, 그냥 써 줘.”
“어? 으음. 응.”
어차피 손수건은 누구 걸 쓰든 상관없긴 하지만, 저렇게 권한다면 괜히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아이렌은 에펠이 내민 손수건으로 코를 풀려다가, 부드러운 천에 수놓아진 사과 자수를 보고 멈칫했다.
“이 손수건 예쁘다.”
“그렇지? 우리 할머니께서 수놓아 주신 거야.”
“전에 인형 만들 때도 느낀 거지만, 역시 손재주가 좋으시구나.”
이런 예쁜 손수건에 코를 풀어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잠깐 스친 아이렌이지만, 손수건의 본래 용도를 떠올려보면 너무 고민할 일은 아닌 거 같다. 세탁이야 제가 하면 되는 거니,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지.
흐르는 콧물을 급히 훔친 아이렌은 개운해진 코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에 천천히 한숨을 내뱉었다.
“고마워, 에펠. 이 손수건은 내가 세탁해서 돌려줄게.”
“그 손수건, 마음에 들어?”
“응? 어어, 뭐……. 그렇지? 이게 기성품이라면 예뻐서 하나 사고 싶은 정도랄까.”
“그럼 가질래? 할머니께서 수 놓은 손수건은 많이 있거든.”
“그래도 돼?”
물론이다. 사실, 그러라고 일부러 가져와서 내민 거니까.
하지만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생각은 없는 에펠은 그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으음.’ 고민하느라 앓는 소리를 낸 아이렌은 에펠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 너무 에펠 군에게 받기만 하는 거 같은데.”
“음?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거야, 이렇게 고향 가는 길에 동행도 시켜주고 집에 초대도 해주고 손수건까지 주었잖아. 나 너무 염치없이 받기만 하는 거 아냐?”
“그런 생각 하지 마, 아이렌. 전에 켈카로트 때도 말했지만, 나는 또래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누군가가 이렇게 놀러 와서 함께 지내는 게 정말 기쁜걸? 그리고 풍작촌을 좋아해 주는 것도 고맙고 말이야.”
제 입으로 말하기 좀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풍작촌은 바깥사람들이 매력적으로 느낄 장점이 많은 만큼 단점도 많은 곳이었다. 품질 좋은 사과가 열리는 사과나무밭과 웅장한 모룬산의 자태는 아름답기 그지없으며 특산품인 사과도 매우 훌륭하지만, 오락거리는 거의 없고 편의 시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으니까. 흔히 청년층이라 할 나이대의 사람은 별로 없는, 적은 수의 가구가 모여 사는 다소 폐쇄적인 마을. 관광지도 아니며 쇼핑이나 문화생활을 하기 적절한 곳도 아닌 이런 곳에 선뜻 ‘또 가고 싶다’라고 해주다니. 고향을 사랑하는 그에겐, 아이렌의 호의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에펠의 감사 인사를 들은 아이렌은 멋쩍게 웃으며, 옷에 묻은 눈을 털어냈다.
“나는 말이야, 눈이 거의 내리지 않는 곳에서 자라서 그런지 겨울의 풍작촌 풍경이 정말 좋더라고. 이런 침엽수림을 볼 일도 없어서, 꼭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랄까. 사람은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고 하고, 나도 분명 그렇지만……. 역시 접해 볼 기회가 없었던 걸 마주할 때의 두근거림은 남다른 거 같아.”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니, 아이렌 군의 고향도 기회가 된다면 가보고 싶은걸.”
“하하. 불가능하긴 하지만, 정말로 기회가 된다면 꼭 데려가서 안내해 줄게. 다른 볼거리도 많지만, 에펠 군이랑 함께 해변 산책도 해 보고 싶으니 말이야.”
아이렌이 말하는 그 해변은 제가 봐온 현자의 섬의 해변과는 다르겠지. 마법이 없는 세계의, 눈이 잘 오지 않는, 제 옆의 이 소녀가 태어나 자란 곳의 바다는 과연 어떤 색으로 물결치고 있을까.
같은 듯 다른 풍경을 쉽게 상상해 낼 수 없는 에펠은 아이렌과 두루뭉술한 환상 속을 걷는 걸 그만두고, 현실의 눈밭에 발을 디뎠다.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작은 호수가 있거든. 거기 가볼래?”
“호수? 좋아. 이 계절이면 얼어있을까?”
“그럴 거야. 한겨울이면 꽁꽁 언 호수 표면이 꼭 커다란 거울을 엎어놓은 것 같아서 예쁜데……. 아이렌 군이 좋아해 주면 좋겠네.”
“와아, 기대된다. 가자.”
장갑을 낀 두 손이 서로를 단단히 마주 잡는다. 마치 어린 동물들이 서로를 의지해 길을 개척해 나가듯, 나란히 숲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경쾌하다.
에펠은 차가운 공기를 허파 깊숙이 들이마시며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뽀득뽀득 눈이 밟혀 압축되는 소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바스락거리는 산짐승들의 기척도, 초목의 냄새도. 모든 것이 고향 숲에서 느꼈던 익숙한 것들인데, 오늘따라 어떻게 이렇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걸까.
‘아이렌 군도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이대로 둘이서 숲에 영원히 갇혀버려도 재미있을 텐데.
눈 감고도 집에 찾아갈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장소에서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 에펠의 입술이 희미하게 호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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