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리디케는 손을 뻗었고

데못죽 신재현 드림 | 403회차 이후의 이야기

ONE AND ONLY by 유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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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내가 지옥에서 돌아와서 문을 두드리고 너를 향해 손을 뻗어 간청한다고 해도 열어주지 않을 사람이란걸 알아. 그러니까, 내가 만약 지옥에서 돌아온다면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마. 나도 열어주지 않을 거야. 너는 단지 내가 그 자리에서 미련 없이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면 돼⋯⋯.

라고, 어느 날의 유시하가 말했다. 지나치게 단조롭고 지나가는 안부나 오늘 자 레티의 직원 식당 메뉴를 묻는 것 같은 말투로, 유시하가 말했다. 신재현은 그날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건 청려답지도, 신재현 답지도 않았으나 머리의 한 부분이 지우개질 된 것처럼 알 수가 없었다. 유시하가 한 이 말도, 아주 오래, 오래,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기억해낸 일부였다.

그리고 그 일부에 따르면 언젠가 가장 찬란했던 유시하는 시체가 되어 신재현 곁에 남았다. 신재현은 한참을 그 찬란 속에서 홀로 멈춘 채로 살다가, 정적 끝에 리라를 잡았고 오르페우스가 되었다.

에우리디케는 손을 뻗었고

오르페우스는 그 손을 맞잡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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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아.”

물기라고는 보이지도 않는 건조한 목소리로 건너편에 있던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걸었다. 신재현은 고개를 돌려 그 여성을 바라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들어가는 게 좋지 않겠어? 너도 스케줄 있을 텐데.”

문장 사이사이 어조마다 넘실넘실 어려있는 걱정이 감사하다가도 거절하고 싶었다. 분명한 축객령 같은데 무른 면이 있어서 가능성이 보였다. 파고들어서 그냥 이 자리에 있는게 나을지, 아니면 그 축객령에 따를지 고민하던 신재현은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음, 아니에요. 활동 공백기라 조금만 더 있다가 갈 예정이라서요. ⋯⋯그리고 빈소 지키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고마워.”

유시하의 어머니이자 신재현이 십 년은 훌쩍 넘게 보았던 그 얼굴이 수척해진 얼굴로 고개를 까딱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휴게실로 들어갔다. 이들이 아무리 가족 외의 외부인을 반기지는 않다고 해도 신재현이 외부인이라고 분류되기에는 20년 이상 이 가족과 가까이 지내지 않았던가. 구태여 딸과 가장 오랫동안 지낸 친구에 대해 강압적으로 나가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신재현이 묘사하기를 그녀의 어머니를 수척하다고 했지만, 사고 소식을 접하고 충격에 의해 실신한 이후로 타인이 그녀의 얼굴만 본다면 지나칠 정도로 평온한 낯이었다. 어느정도냐면, 음. 한순간에 친딸과 진배없는 양딸을 보낸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하면 납득이 갈까. 유시하를 그토록 아꼈던 면모와는 상반되는 지금, 아까 전 쏟아낸 눈물은 거짓말인 것처럼 아무리 보아도 그냥 무표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표정을 깜빡 상기하며 신재현은 낯에 가볍게 걸쳤던 미소를 안면에서 지워내고는 제 옷차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색 상복.

신재현은 유시하의 장례를 분명히 수도 없이 치렀을 것이다. 그러나 ‘신재현’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유시하가 먼저 죽었을 때, 신재현의 기억은 사라진다. 유시하는 한 회차 앞으로 나아가지만 신재현은 유시하의 이전 회차에서 가지고 있던 그대로의 회차 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신재현은 이전 회차의 자신이 어떠한 방식으로 유시하의 장례를 치렀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모든 신재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죽는 방법은 매번 달랐겠지만 장례는 아마 비슷한 형태로 진행했을 것이다. 그 비슷한 403번의 장례에서, 403명의 자신은 이랬을 것 같았다. 답지 않게, 그가 꿈꿔온 ‘완벽한’ 아이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다 못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차의 자신이.

유명한 연예인이다 보니 지인이나 관계자가 아니면 빈소 자체에 출입을 막았던 터라 빈소는 꽤나 한가하다 못해 텅텅 비어있었다. 저 멀리서는 잠을 심각하게 설친 듯 보이는 유시하의 아버지가 벽에 기대어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고, 저 안쪽의 휴게실에서는 유시하의 어머니가 재차 눈물을 쏟아내다가 기절하듯 잠에 들었을 것이다.

신재현은 이 빈소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행적을 천천히 생각하다가 마지막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까지 생각했다. 자신은 유시하의 영정사진을 바로 보고 있는 곳의 벽에 기대앉아 있노라니 절로 비릿한 미소가 그려져서 나왔다. 가치 있는 것은 드물고, 쓸모없는 것은 널린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비효율적인 일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그냥 가볍게 조문을 하고, 일반적으로 친한 사이에서 전하는 정도의 위로를 담아 상주에게 전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유시하가 먼저 죽은 뒤의 모든 회차에서의 신재현은 이렇게 조문객 없는 빈소를 지켰을 것이다. 어느 회차에는 스케줄이 없으며, 어느 회차에서는 유시하의 죽음으로 비상이 걸린 레티로 인해 브이틱 자체의 컴백이 미뤄졌다는 온갖 핑계를 수고스럽게도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대면서, 그렇게 3일 내내 이 외로움만 남아있는 빈소를 지켰을 것이다.

일상으로 복귀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테였다. 스스로를 추측해 보건대 며칠간은 평소처럼 일을 하겠거니 싶었다. 정해진 시간마다 운동을 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식사를 하고, 정해진 시간마다 연습을 하고⋯⋯. 어느 화창하고, 날씨가 좋은 다른 날들과 여등 똑같이 지내다가 문득 유시하의 공백을 깨닫고 구태여 몰려들어오는 파도를 피해 둑을 쌓을 이유를 속으로만 간직한 채로, 그는 저항 한번 하지 않고 익사해 죽었을 것이다.

신재현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유시하의 죽음이 동봉하는 것은 단지 친구를 잃은 슬픔이 아닌 신재현은 물론이요 청려에게까지도 미치는 번아웃이었다. 유시하는 목이 졸리고 폐부에 공기 대신 물이 들어차고 목이 꺾이는 감각과 심장을 찌르는 역린에 지나치게 익숙해질 정도로 많이 죽었고, 자신은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죽지 않았나. 그 사실을 아무리 상기해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니까 눈앞에서 죽는 건 그렇게 쉬웠는데, 먼저 보내는건 쉽지가 않았다.

신재현은 자신의 행동을 참회했다.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고, 유시하의 404회차에 존재하는 신재현이 이 생각을 할 확률은 유시하가 죽은 이후라면 모르겠지만 그 전제가 없다면 만무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나치게 늦은 후회이자 참회였다.

잔인하게 끊어야 미련을 없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잔인했나 봐요, 누나에겐. 그럴 줄 알았으면 0회차에 눈앞에서 죽지는 말 걸 그랬나⋯⋯.

유시하와 신재현이 유일하게 자의가 아닌 상태에서 공유한 회차를 잠시 생각하던 그는 며칠 전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겨울의 절정이라 지나치게 차가운 공기와는 대조될 정도로 따뜻한 분위기, 심장 한구석을 간지럽히던 정체 모를 열기와 익숙하지 않은 질투, 내지는 부러움⋯⋯ 아니, 동경이었나. 이번 생이 비로소 403회차를 지나고 나서야 성공하게 된 생이라고, 모든 삶과 회차 속에서 이보다 더 최선일 회차는 없을 거라고 그토록 맑게 웃던 유시하를 질투한건지, 동경한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신재현은 유시하의 영정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언제 찍은 건지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에는 분명하게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며칠 전에 보았던 것보다는 약간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지만 무대로 나가기 전 잘 다녀오겠노라며 흐릿하게 웃음 짓던 그 얼굴과 유사하면서도 달랐다. 분명 그때가 더 행복했을 텐데도, 그때보다는 저 사진 속에서 박제된 유시하가 더 행복해 보였다. 언제 저런 웃음을 마지막으로 보았던가. 가만히 그 입꼬리가 그리는 곡선을 눈으로 훑던 신재현이 불현듯 유시하를 향해 물었다.

그렇게 환하게 웃는 건 오랜만에 보는데, 행복해요?

응. 많이.

왜?

너랑 있잖아.

말만이라도 고맙네요. 예전에도 이랬나?

언제나.

낭만적인 말을 하네요. 누가 보면 죽도록 사랑하는 연인인 줄 알겠어요.

가끔은 이래도 괜찮잖아.

그런가요? 그래도 뭔가 이상해서.

전제에서 이상함을 느낀거 아닐까⋯⋯. 너나 나나 옛날 일 기억하지 못 하는건 피차일반이잖아.

하긴 그렇네요. 그래도 오래간만에 대화하니까 좋지 않아요?

그러게. 오래도록 너랑 대화했으면 좋겠어⋯⋯.

이젠 다시 대화 못 할텐데. 돌아오는게 낫지 않겠어요?

왜 답이 없지⋯⋯.

***

유시하는 끝까지 잠들어있는 모습으로 화장터에 들어갔다. 육중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화장터 안에서 시체가 불타는 소리, 비록 시신이 이리저리 뭉개진 탓에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얼굴만큼은 지나치게 평온해서 유독 곤히 자고있는 사람이 불꽃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장이 끝나고 난 뒤, 유시하의 부모는 유시하의 유골을 보석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재현에게 말했다. 혹시, 가지고 싶으면 말해줄래? 언제 써놨는지는 몰라도, 유언장에 적혀있더라고⋯⋯. 만약 그렇게 만들 거라면 너한테도 달라고. 아마 평생동안 친구는 너밖에 없어서 그랬을 거야. 불편하면 거절해도 돼, 재현아.

신재현은 유시하의 아버지가 횡설수설 이유를 늘어놓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받겠다는 말과 인사를 동봉한 언어를 전하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집으로 향하는 차에 올라탔다. 매니저가 괜찮냐는 말을 했지만 신재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창가로 가로등이 지나가고,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신재현은 멍하니 유언장에 대한 이야기를 되뇌었다. 유언장, 유언장. 도대체 언제⋯⋯. 그러다가 어느 날 나눴던 대화를 문득 떠올렸다.

- 유언장을 써요?

- 난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넌 안 썼어?

- 난 내가 죽으면 세계도 끝난다고 생각했거든요. 남아있지 않을 지도 모르는 거라 굳이 싶어서.

- 글쎄⋯⋯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니까 쓰는 거지.

이건 단지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해야하나⋯⋯. 유시하는 그렇게 말을 마쳤던 것 같았고 신재현은 그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그 기억의 전부였다.

***

유시하 사망 1달차, 새벽 3시 30분.

신재현은 유시하가 좋아하던 동백차를 우렸다. 달고 익숙한 내음이 코를 스쳐지나갔다. 유시하의 체향과 유사한 향이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크고 넓은 무채색의 집에 혼자 있었다. 이제는 종종 오갈 사람도 줄었고 이 집에서 나가서 다른 곳에서 생활할 일은 더 잦아지겠지⋯⋯. 신재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마셨다. 그래도 잘 하면 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가정은 잘 하지 않지만 만에 하나 우연의 일치로 유시하를 잊을 수만 있다면⋯⋯.

이 슬픔인지 유감인지 모를 감정도 함께 씻겨나갈 수 있을텐데.

유시하 사망 2달차, 오전 11시 43분.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났다. 아니, 좀이라고 칭할 수준은 아니었다. 청려로도 신재현으로도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늦은 시간에 기상했고, 아주 오래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침운동은 설렁설렁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고, 꾸준하게 먹던 샐러드의 양도 어쩐지 오늘만큼은 많게 느껴졌다. 이 모든 현상들을 명확하게 하자면 그는 신재현답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신재현이었고 청려였다.

청려는 신재현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았으나 신재현은 청려가 아는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신재현은 아주 오래도록 청려라는 존재로 살았기 때문에.

유시하 사망 3달차.

유시하가 국가대표 시절 자주 연습하던 빙상장을 통째로 빌린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관계자들 내지는 관리자들 탓에 살짝 고전했다. 한참을 관객석에 앉아있는데 문득 스케이트를 타 보고 싶어져서, 충동적으로 스케이트를 빌려서는 그대로 신었다. 유시하가 신던 방식 그대로, 매듭묶던 방식 그대로. 그는 새카만 피겨 연습복을 입었고 새카만 스케이트를 신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빙상장을 홀로 가로질렀다. 제빙기를 관리하는 사람이 신재현을 향해 이제 한 번 제빙기를 돌려야 한다고 말하기 전 까지, 그는 한참을 아이스링크를 누볐다. 발밑은 반짝거리고 지나간 곳에는 흔적이 남는다, 날카로운 날은 얼음을 가르고 날 앞에 달린 작은 톱은 얼음을 박찬다. 그게 기분 좋았다. 유시하가 왜 스케이트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신재현은 아주 오래 전, 유시하에게 배웠던 점프를 뛰었다. 유시하는 기억 속에서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고⋯⋯.

신재현은 여전히 그 기억에 수몰되어 있는가?

유시하 사망 4달차, 새벽 1시 21분.

고요한 정적이 좋았다, 그걸 침범해오는 유시하도 좋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싫어했겠지만 유시하라면 상관 없었다. 그게 이른 아침이라도, 늦은 밤이라도, 잠들어있던 새벽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무렵에, 이상한게 들리기 시작했다.

유시하 사망 5달차,

곧 컴백 시기였다. 그러나 저번과는 달리 이상하게 주변이 고요했고 가끔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재현은 점점 어그러지고 있었고 어쩌면 청려도 함께 어그러지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신재현은 수틀리면 저도 따라서 자살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곳에 남은 자신은 유시하가 떠난 이상 필요없는 데이터로만 남을 뿐이었으니까. 어차피 이제는 404회차로 나아간 유시하에게는 신재현이 닿지 않을 테니까. 그의 주파수는 유시하의 403회차에 맞춰져 있었다. 바꿀 스위치 따위의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시하 사망 6달차

무언가가 자꾸 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들여보내달라고 한다. 그게 아니라면 길을 가다가도, 집 안을 걷다가도 등 뒤를 누군가가 찌르는 느낌이 날 때가 있었다. 신재현은 그의 원인을 알 수가 없었으나 그런 느낌이나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어림짐작 가는게 있었다. 그게 문득 유시하의 손길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유시하 사망 7달차.

브이틱이 정규집으로 컴백했다.

신재현은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유시하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 한 달은 오히려 더 편안했던 것 같다. 차라리 유시하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그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했다.

유시하 사망 8달차.

똑똑.

단조로운 두 번의 노크로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올 무렵이면 신재현은 언제나 잠에서 깨어났다. 인터폰으로 확인해봐도 아무런 사람이 없는 문 앞에서 누군가가 자꾸만 노크한다는 것은 그닥 달가운 일이 아니었던 데다가, 그게 유시하가 노크하던 방식이랑 똑같아서 저절로 몸이 먼저 반응하는 듯싶었다. 그는 항상 문을 열어주기 위해 자리나 침대에서 일어났다가 유시하가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유시하가 정말로 살아돌아온 걸까. 이미 회귀한다는 시점에서 살아 돌아올 수도 있고 귀신이 되어 나타날 수도 있고 그런 거 아닐까. 그러다가 문득 그러면 안된다라는 강박에 시달리며 참아왔다.

가장 고비인 것은 누군가가 자꾸 자신의 등 뒤에 접촉하는 느낌이라는 것. 어깨든, 등이든, 손을 올리거나 찌르는 듯한 느낌이 올 때가 있는데 맨 처음에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레티 내부에 있는 연십실이었던 터라, 누가 왔나 싶어서 살짝 옆으로 돌아 거울을 보았는데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뒤에서는 자꾸만 찌르는 느낌이 났다. 제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리듯, 아직 이 자리에 온전하게 있다는 걸 토로하듯, 유시하의 몸짓이나 유시하의 방식으로⋯⋯. 신재현은 이 기괴한 상황에 제대로 적응은 커녕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아니면 그냥 내버려둬도 상관 없다는 느낌이었다.

유시하 사망 9달차.

어느날부터는 목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아무도 없는데 집을 제외한 혼자 있는 순간이라면 언제나 '유시하'가 찾아와 신재현을 향해 말했다. 재현아, 뒤 돌아볼래. 하고. 자신을 향해 손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뻗으며 항상 그렇게 말했다. 집에서는 현관문에서 노크를 하며 문 밖에 서 있는다. 하릴없이 서 있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돌아가거나, 신재현이 가달라고 하면 돌아갔다. 신재현은 이제 이 상황에 슬슬 질려가고 있었고 어떨 때는 정말로 유시하일지도 모른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해낸 것이다. 유시하가 자신이 지옥에서 돌아와 문을 열어달라고 한들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제가 편히 죽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지만 지옥에서 돌아온 유시하도 유시하라는 말 아닌가.

신재현은 유시하의 존재가 제 인생에서 추가된 이상, 유시하가 없으면 온전할 자신이 없었다. 주변인이 죽는다는 것은 청려에게도 신재현에게도 상당한 타격을 입혔기 때문에 더했다. 신재현은 그 무렵에서, 문 밖에 있는 '유시하'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유시하 사망 10달차, 오후 11시 36분.

"들려요?"

"응, 들려."

"왜 들리지⋯⋯."

"그야 네가 말하고 있잖아⋯⋯."

"진짜 누나 목소리네요. 그래도 들을 이유는 없죠."

"언제나 나지⋯⋯. 네 목소리라면 듣고 싶었으니까."

"차라리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포기할 가능성이 더 높아졌을 텐데⋯⋯."

왜 나를 포기해?

침묵 속에서 유시하는 그렇게 묻는 듯 했다. 신재현은 하하!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누나는 죽었으니까요. 유시하는 아하하, 하고 웃으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돌아왔잖아. 네 앞으로.

신재현의 목에서 유시하의 유골로 만든 작은 목걸이가 빛났다. 신재현은 그 목걸이를 만지며 답했다.

"그렇네요⋯⋯."

내가 사랑했지만 이제는 죽은 사람이 왜 살아돌아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는 그 말을 혀에서 녹이고는 그대로 삼켰다. 활자는 위 속으로 추락해서 위산에 갉아먹힌다.

유시하 사망 11달차, 26일.

신재현은 오늘 현관문을 열기로 결심했다. 더이상 이 상황에 대한 감정도, 제대로 유지할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결과 도출은 번번히 실패하고 언제나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는게 도대체 어떻게 감정이라고 명명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곧바로 열지는 않을 심산이었다. 신재현은 오늘도 동백차를 손에 든 채로 무채색의 집안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유시하가 찾아올 것이다. 그 말마따나, 오늘도 어김없이 유시하가 찾아와서는 두 번 문을 두드리고 말했다. 재현아, 문 좀 열어줄래? 아니면 우리 대화할까⋯⋯. 신재현은 실소를 머금은 채로 동백차를 작은 간이 탁자에 두고는 곧바로 문을 여는 것 대신 먼저 대화하는 것을 택했다.

"우리 대화할까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오늘은 뭐 했어요?"

"빙상장에 갔어. 선수 시절에 자주 가서 타던 곳."

"즐거웠어요?"

"응."

"어떤 게?"

"전부 다⋯⋯."

그 모든 순간이 좋았노라고, 유시하가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언어가 거짓에서 피어나 창조되는 것인지 머리를 거치고 입을 거쳐 허라는 매개를 통해 나오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너랑 같이 스케이트 탔던 게 기억이 났어."

"왜요?"

네가 어제 거기를 다시 갔다고 했잖아. 오늘 이른 시간에 그 곳에 갔는데, 네가 탄 곳의 궤적이 남아있는 것 같은거야⋯⋯. 그래서 오래간만에 옛날 생각도 나고, 그랬어. 왜?

유시하는 다시 되물었고 신재현은 이제 더이상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말을 나누면 나눌 수록 점점 더 유시하 같아져서, 아니면 유시하였으면 좋겠어서⋯⋯⋯⋯. 신재현은 문득 이 인생이 끝나도 상관이 없으니 같은 주파수의 세계에서 사는 유시하가 보고 싶어졌고,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문 열어줄까요?

응.

그 말에 신재현은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문 손잡이를 잡고 그대로 현관문을 열었다.

문 앞에서 유시하는?것은 곳에서 일그러지게 웃고 있었다⋯⋯. 여전히 온전하고 완벽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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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그러지게 웃고 있던 유시하가 손을 뻗었다.

신재현은 그 손을 맞잡았던가⋯⋯

***

"안녕하세요 티카! 오늘은 재현이 형 집에 와 있어요."

"그 카메라는 뭐야?"

"이거 회사에서 브이로그 올릴 거라고 찍으래요! 형은 공지 못 받으셨어요?"

"아, 그거구나. 나는 다음 순서라."

"아하⋯⋯. 와, 형! 그나저나 이런 무채색 톤 집에서 살면 안 힘들어요? 전 밝은 게 힘도 나고 좋던데! 이런 분위기면 더 외롭잖아요. 아, 역시 사장님한테 숙소 합쳐달라고 해야했나?"

진채율이 생기 가득한 목소리로 청려의 집에 발을 들이며 종알종알 떠들었다. 신재현은 진채율이 바리바리 싸들고 온 선물들을 한 쪽에 가지런하게 정리하며 대답했다.

"그닥 외롭지도 않아. 혼자라는 느낌도 안 들고. 채율, 그건 저쪽에다 놔."

"어떻게 혼자라는 느낌이 안 들지? 전 우리 숙소 생활이 그리운데! 우단이랑 윤신이랑 형이랑 같이 있을 때가 더 즐거웠던 것 같아요."

"글쎄⋯⋯."

신재현은 벽에 기댄 채로 웃으며 눈을 감았다. 티카가 늘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진채율이 그 말에 꺄르르 웃었다. 형의 팬 사랑은 따라올 사람이 없네요! 신재현은 가만히 웃으면서 대답을 대신했다.

웃는 신재현 뒤로 유시하가 그의 목에 팔을 두르며 안았다. 신재현은 여전히, 계속 미소짓고 있었다.

에우리디케의 인두겁은 과도하게 차가웠으나 오르페우스는 상관하지 않았다.

에우리디케는 손을 뻗었고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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