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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송연] Blossom

첫 업로드: 2022.08.17. 포스타입


"……."

동그랗고 빨간 불빛 아래 멈춰 서있는 차 안.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정리된 검은 시트 위에는 민트색 종이봉투와 빨간 장미 한 송이가 어색하게 놓여있었다.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그것을 쳐다보기를 한 번. 두 번. 셋넷다섯여섯…….

손바닥만 한 봉투 안에 폭탄이라도 든 것처럼 몇 초에 한 번씩 옆자리를 힐끔거리던 조인은 뒤늦게 바뀐 신호를 알아채고 액셀을 밟았다. 급하게 뒤로 쏠리는 작은 꾸러미에 구김이라도 질까 싶어 금세 속도를 줄이긴 했지만.


지난 주말이었던가? 아주 오랜만에 새 넥타이가 필요하겠다 싶어 쇼핑몰에 들른 차였다. 마지막 방문이 몇 년 전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바뀌어버린 매장 구조가 헷갈리는 것도 당연한 일. 주차장으로 가는 입구를 찾아 답지 않게 헤매다 보니 어느새 눈앞에는 대부분 여성용임이 분명해 보이는 주얼리 매장이 즐비했다.

그리고 희미한 옛 기억에 의하면, 이런 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꼭 매장마다 직원이 눈에 불을 켜고 그다지 반갑지 않은 마중을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다음엔 낯간지러운 — 주로 외모에 관한 — 칭찬들로 운을 떼면서, 존재한 적보다 그렇지 않았던 적이 많은 남의 애인(조인은 언제나 이 부분을 가장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뭘 보고 연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의 취향을 신경 써주겠지.

적의도 악의도 아닌 열의를 띠고서 친절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민간인들이란 조인에게 너무도 어려운 존재들이었다. 혹자는 애인이 없다고 솔직히 고하고 돌아서라 제안했으나……. 그런 사실을 굳이 제삼자에게 털어놓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말한다고 해봐야 그들은 "어머 이렇게 잘생기셨는데, 왜요?!"라며 더욱 호들갑을 떨 것이 확실했다.

사실 연인이 없다는 이야기까지 꺼내지 않더라도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고 간단히 거절하며 돌아서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소소하고 일상적인 담화,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이니 감동이니 하는 간지러운 소재들이 왜 이리도 멀고 어렵게 느껴지는지는 당사자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차라리 말 한마디 붙일 수 없도록 허리춤에 칼이라도 차고 나왔다면 상황이 이보다 나았을까. 전장에 끝없이 펼쳐진 적진을 돌파하는 것도 이보다는 쉬웠는데. 가벼운 한숨 끝에 아무튼 무사통과를 다짐한 그는, 전방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비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아니나 다를까. 저마다의 일을 보면서도 한산한 가게 앞을 연신 힐끔거리던 직원들이 조인의 등장에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래, 저 매와 같은 눈!

저 사람들은 은근한 호객 행위를 쉽사리 거절하지 못할 인간을 한눈에 골라내는 이능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다 시선이 얽히는 순간 최소 한 시간가량 '여자친구를 위한 선물 리스트'를 주제로 하는 다자 토론에 강제로 참여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제 얼굴에 와닿는 야망(?) 어린 시선들에 등골이 서늘해진 조인은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그 덕분에 형형색색의 액세서리들과 직원들의 은근한 눈길은 시야의 가장자리를 스치고 빠르게 사라져갈 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오로지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발길 닿는 대로 걷던 그는 원래의 목적지를 상기하고 현재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안내판을 찾아 헤매던 시선이 바로 앞 매장 쇼윈도 안의 '그것'에 닿은 것이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꽃 모양으로 섬세하게 세공된 은빛 테두리. 그 가운데 별처럼 반짝이는 연하늘색 큐빅. 평범하게 자연물을 본뜬 주얼리 브랜드의 봄맞이 신상품이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꼭… 무언가가… 아니 누군가가 생각날 듯한…….

"아."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어느새 선명해진 얼굴이 방실방실 웃음 지었다. 유리 진열장 너머의 귀걸이와 그 위로 덧그려진 상상 속 송연의 모습은 제법 잘 어울리는 듯했지만 조인은 생각을 끝맺을 수 없었다. 매장 안의 직원이 흥미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으니. 꼭 장난을 꾸미다 들통난 아이처럼 화끈거리는 얼굴을 홱 돌리고서 그는 또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정말 단순한 은색 꽃 모양 귀걸이일 뿐인데 어찌 그것을 마주한 순간 자연스레 송연이 떠올랐단 말인가.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조인은 스스로를 심문하듯 그 해답을 찾아 고뇌했다.

그래, 가운데 박혀있던 큐빅의 투명한 하늘빛에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떠오른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은색이 회색과 비슷하니 그의 머리칼이 연상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변에 귀걸이를 끼는 사람이 송연 말고는 몇 없다 보니(아마도?) 자연스레 '귀걸이'와 그를 연관 지었을 지도. (늘 긴 머리를 내리고 다니는데 귀걸이를 착용한다는 것은 어찌 알고 있느냐고 머릿속 또다른 목소리가 물었지만 조인은 애써 무시했다.)

…혹은 봄꽃처럼 서글서글한 미소가 그 모양과 비슷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유독 작은 크기가 그의 아담한 체구와 비슷하게 느껴졌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면…….

…….

….

며칠 동안 쥐어짜 낸, 꽤나 그럴듯한 사유들로 스스로를 속이며 사건을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마음은 뜻대로 접히지 않았다.

주말 이후 처음으로 복도에서 마주친 날 어쩐지 송연의 귓가가 신경 쓰이는 것은 기본. 무심코 "귀를 언제 뚫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귀걸이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자그마한 새 귀걸이를 사볼까 고민 중이라는 송연의 말은 메아리처럼 남아 곁을 맴도는 듯 쉽사리 잊히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머릿속은 한층 더 심각했다. 어느 날은 잠에 들고자 눈을 감은 찰나 머릿속에 평소보다도 작은 송연 한 명이 톡, 허공에 피어나는 것이 아닌가.

있는 힘껏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잠들어 보려 했건만 또다시 꽃망울처럼 터지는 송연이 나타나 두 명. 꽃 같은 귀걸이를 한 꽃 같은 송연이 세 명. 꽃 같은 귀걸이를 하고서 꽃처럼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꽃 같은 송연이 네 명. 꽃 같은 미소로 품에 안겨 오는 꽃 같은 송연이 다섯 명. 꽃 같은… 송연…… 꽃…… 송연…….

상상인지 꿈인지 모를 송연들을 떨쳐낸 조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어내었다. 그러고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잠에 들어보려 했으나 웬 걸.

한술 더 뜬 다음 꿈에서는 청명한 하늘 위에 별빛 꽃잎들이 춤을 추듯 흩날리고, 모든 것을 닮은 송연이 나긋나긋 웃으며 다정히 이름을 불러주기까지 했으니. 어지간한 악몽에도 꿈쩍 않던 조인이 한밤중에 땀에 젖은 채 깨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누군가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깨어난 것을 내심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고 했겠지만. 범인도 목격자도 없는 사건에 대한 심경을 당사자가 입 밖에 낼 리 없으니 그것 역시 꿈속의 송연처럼 조인 혼자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하고 잠드는 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은 지 어언 일주일째, 어제. 주차장의 빈 자리에 익숙하게 차를 세우는 조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방실방실 웃는 송연이 구름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정신이 나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장 난 비디오처럼 줄곧 송연이 재생될 리가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기어코 그때 그 매장으로 돌아와 그때 그 귀걸이를, 정성스레 선물 포장까지 해가며 받아다 조수석에 모셔둘 리 없었다.

심지어 며칠 후면 로즈데이라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며, 직원은 투명한 비닐로 간결하게 포장된 빨간빛 장미 한 송이를 선물 봉투와 함께 쥐여주고 "꼭 성공하세요!"(대체 뭘!)라는 응원 멘트와 함께 저를 열렬히 배웅하더랬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다 괜찮다고 치자. 늘 혼자서 직장으로 향하던 차 안에 생각지도 못한 물체가 함께하고 있지만. 그것이 제 목숨을 위협하는 것도 아니니 별일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럼 전달은?

대체 송연에게 무어라 말하며 이 두 물체를 건넨단 말인가? 세간에는 "오다 주웠다"는 무심한 듯 세심한 멘트가 유행이라지만 도저히 그런 간지러운 말을 입에 올릴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아니면 "일주일 내내 귀걸이와 당신이 번갈아 떠올라 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 왔으니, 이걸 받고 그만 머릿속에서 나가주십시오." ? 둔감해 빠진 제가 보아도 최악의 멘트다.

이런 저런 상황들을 고려했을 때 옆자리의 그것들을 내미는 그 순간이 그에게 연애를 제안해야 하는 타이밍인 듯했지만. 상상만 해도 글자 하나하나가 목에 걸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송연과 내가 무슨 사이라고. 몇 번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통화를 가끔 하긴 했으나 같은 직장 다른 부서의 먼 동료 관계일 뿐인 자신이 대체 뭐라고.

커다란 손으로 연신 마른세수를 하듯 얼굴을 쓸어내린 조인은 핸들에 이마를 갖다 댄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동그랗고 부드러운 볼을 쿡 찌르면 바람이 빠져나간 풍선처럼 한없이 작아져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그럼 내 몸과 마음도 한결 편안해지겠지. 별 말도 안 되는 공상에 사로잡히는 일 없이 전처럼 잠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송연이 없는 세상이란 영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간단하다. 그냥 건네주면 될 일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털어놓아야지. 당신이 평소에 이런 것을 착용하고 있어서, 당신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기에, 이것이 당신과 닮아서 지나칠 수 없었다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로지 송연의 몫. 이제 자신이 할 일은 패배한 장수처럼 송연에게 칼자루를 쥐여주고 이 모든 일에 대하여 그가 내릴 처분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결연하게 마음을 다잡은 조인은 익숙한 숫자들을 나열해 그의 번호를 완성했다. 통화버튼을 누르면 익숙해진 노래가 흘러나오기를 몇 소절. 일전에는 몰랐던 노랫말이 어쩐지 제 처지와 비슷하다 생각할 때쯤 장난기 어린 낭랑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1. 조인은 이미 송연의 개인 연락처를 외웠다. 사무실 직통번호도 알고 있음.

2. 송연의 통화연결음은 10cm의 그라데이션.

밤은 다시 길고 깊어졌네 나는 점점 너로 잠 못들게 돼

글로 적어내긴 어려운 이 기분을 너도 느꼈으면 좋겠는데

너는 아무 생각 없이 몇 번 나를 지나가며 웃은 거라지만

나의 하얀 옷에 너의 잉크가 묻어 닦아낼 수 없을 만큼 번졌네

3. 이 날부터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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