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오천 원에 싸게 팝니다.
가비지타임 전영중 드림
그 애는 알기 쉬운 녀석이지만 취향 면에선 은근히 깐깐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골목을 지나다 악기 상점에서 '야, 저거 네가 좋아하는 거다.' 하고 가리키면 금방 눈을 빛내면서 어디? 하며 두리번거리다가도, '내가 좋아하는 건 기타가 아니라 베이스라고!' 하면서 엄청 성을 내지 않나.(지금은 좀 차이점을 알겠지만.)
분명 전에 잃어버렸다는 거랑 똑같이 생긴 걸 샀는데 '아, 이거 메타몽 변신인형 아니잖아!' 하고 서럽게 울지를 않나.(그렇다고 받아가 놓고 돌려주진 않았다.)
바로 며칠 전에는 날개 달린 거, 매번 쓰는 걸로 사오라고 시켜서 갔더니만, 날개 달린 건 너무 많고 걔가 매번 쓰는 게 뭔지는 내가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그래서 일단은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서 판매량이 제일 많은 브랜드로 사 갔더니 또 장난하냐고 화를 내는 게 아닌가. 편의점 직원의 신기하다는 눈초리를 내가 어떻게 필사적으로 회피해왔는지 알면서!
그리고 이것이 어이없게도, 전영중이 모처럼의 휴일을 하루 종일 매대 앞에 서 있는 걸로 낭비하는 이유였다.
낭만, 오천 원에 싸게 팝니다.
ⓒ산하엽, 2023
"아, 하여튼 전영중 이거 섬세하지 못한 새끼."
그렇게 약 40분 정도 지났을까. 괜히 상품을 들었다 놨다, 똑같은 곳을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는 꼴을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옆의 누군가가 괜히 성질을 부렸다. 이 녀석 성질에 이 정도 참았으면 많이 참은 거라곤 생각하지만... 도저히 가만 넘길 수 없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뭐, 섬세하지 못한 새끼? 전영중은 실제로 섬세하지 못한 편일지 몰라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녀석에게 듣는 것만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만지작거리던 인형을 내려놓고 후 하고 숨을 골랐다.
"준수야, 너한테 듣고 싶진 않다."
"아니, 굳이 여기 와 놓고 갖고 싶다는 것도 모르는데 뭘 사줄 거냐고 진짜."
"그럼 넌 걔 선물로 뭐 사줄 건데?"
"그냥 카카오톡 위시리스트에 있는 거 살 건데."
"너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그렇게 말했지만 준수는 현명한 편이었다. 그 애는 갖고 싶은 게 생기면 바로 위시리스트에 추가하니까. 아마 지금 확인하면 한 오백 개 정도 나올 것이었다.
"애초에 그런 걸 왜 신경 쓰냐? 시간 아깝게. 그냥 갖고 싶다는 거 사 줘야지. 원하는 게 딱 있다는데 뭐하러 우리가 고민을 하냐고."
"준수야… 낭만 없다는 말 많이 듣지?"
"아니 X바, 우리 사이에 낭만이 있어서 어쩔 건데."
성준수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음, 실로 맞는 말이었다. 너랑 걔가 낭만이 있을 사이는 아니지, 나도 그렇고. 전영중은 반박도 못 하고 다시 한참이고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치, 낭만이 있을 관계는 아니지 우리가. 근데 왜 여기서 내가 고민하고 있어야 하냐고. 그러게 이 길목을 지날 때마다, '아. 저거 진짜 귀엽다. 진짜 귀여운데... 내 방 침대에 놓으면 딱일 것 같은데...' 하며 다 들릴 정도로 중얼거리는 녀석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런 고생을 할 일은 없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자 괜시리 또 중얼거리는 그 애 얼굴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져서 전영중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또, 또 저 청승맞은 새끼 지X은 있는 대로 다 떨어 지X은."
이미 자기 몫을 결제한 성준수는 정 없이 간다, 한 마디만 뱉고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사람 무안 주기 전국 대회가 있다면 아마 준수는 전국 결승까지 갈 정도겠지… 매정한 녀석.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결국 그 녀석이 갖고 싶다던 게 뭔지는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했으며 점장인지 알바생인지 모르겠는 사람의 시선은 따가워져만 갔다. 다음에 와서 마저 생각해야겠다. 전영중은 제일 값싸 보이는 열쇠고리 하나를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오천 원이요."
뭐라고. 전영중은 지갑을 꺼내려던 손을 잠깐 멈칫했다. 뭔 바보같이 생긴 너구리 열쇠고리도 오천 원이나 하는 시대라니. 세상은 그에게 너무 불합리했다. 이것도 낭만의 값인 걸까? 우리 사이엔 낭만 같은 거 없는데. 전영중은 괜히 바가지를 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괜히 투덜거리기엔 직원한테 예의가 아닌 듯하여 도망치듯 오천 원 짜리를 던져두고 나왔다. 딸랑, 또 오세요. 하고 공허하게 뒤통수에 대고 인사하는 직원에게 네, 안 그래도 또 올 겁니다. 하고 괜히 성질을 부리고만 싶었다.
물론, 믿기 어렵겠지만 그에게도 그 정도 자제력은 존재했다.
딸랑거리는 문이 닫히자, 전영중은 물건을 가방 안에 대충 집어던졌다. 배고프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동안 아까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낭만, 낭만이라…….
'우리 사이에 낭만이 있어서 어쩔 건데?'
그 단어가 오늘따라 더 간지럽게 느껴졌다. 봄에는 꽃가루 알레르기가 기승을 부리듯 낭만 알레르기도 기승인 모양이었다.
*
"또 오세요."
이 시점에 전영중의 가방 안에는 오천 원짜리 열쇠고리만 일곱 개쯤 들어가 있었다. 사천 원 짜리도 있고 칠천 원 짜리도 있던 것 같다. 종류도 실로 다양했다. 너구리, 토끼, 개구리, 뭔지 모르겠는 물떡 같은 거, 고양이, 아 이건 진짜 뭔지 모르겠는 거, 펭귄…
그러니까 그로부터 장장 6일이나 지난 것이다. 그리고 그 애 생일은 오늘이었고.
어쩐지 '그래서 결국 일주일 동안 고민만 하다가 하나도 못 샀다고? 진짜 미련한 새X.' 하는 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이것 때문에 오늘 하루 종일 바쁜 척 카카오톡 확인도 안 했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전영중은 그제야 휴대폰을 들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 74건. 이 중 50개 정도는 단톡에서 쓸데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일 테고, 10개 정도는 광고일 것이고… 그럼 남은 10개 정도는 이 녀석한테서 온 거겠지. 그는 친구 탭 메인에 뜨는 문구를 하염없이 보다가 별안간 한숨을 쉬었다.
[오늘 생일인 친구]
젠장, 역시 양심에 찔린다. 전영중은 한참이나 채팅방 입력창에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액정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 아니면 '생일 선물 준비했어'? 이런 말은 직접 대면하고 말로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낯간지럽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이것밖에 없겠다. 전영중은 간단하게 키패드를 딱 두 번 두드렸다. 더도 덜도 말고 깔끔하게.
19:54 [야]
[ㅇ?] 19:54
19:55 [나와.]
*
"야, 줄 거 있어."
"뭐야? 뭐야, 뭐야?"
평소라면 '꼴에?' 하고 빈정대거나 기대도 안 한다며 들어갈 녀석이 기대를 하는 걸 보니 생일은 생일인 모양이었다. 전영중은 머쓱한 듯 목 뒤를 한참이나 긁적이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행히도 그의 손은 또래 중에서도 제법 큰 편이었고, 그 안에 야무지게도 들어가는 그것은 받기 직전까지 무엇일지 모를 터였다. 기대한 듯 입꼬리를 씰룩거리는 그 녀석이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두 손을 내밀었다.
"어…"
툭. 손을 놓자 어딘가 맥아리없는 소리가 그 애의 입에서 나왔다. 딱히 변명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런 반응이라니. 그리고 전영중의 입은 그의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습관이 있었다.
"이거 너 닮았더라."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았을 텐데. 입에서 나오는 변명은 제법 구차했다.
"장난해? 이거 턱시도샘이잖아. 완전 귀여워."
"솔직히 싫어할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오천 원 짜리니까…"
전영중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어쩐지 기분이 쑥쓰러워서? 이렇게 간단하게 좋아할 줄 알았다면 일주일 동안 괜히 고민했다는 생각에? 전영중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 애는 받은 키링을 이리저리 보다가 스트랩을 가방끈에 달았다. 퍽이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뭐라고…. 이런 생각을
"네가 내 생각 해서 사온 거잖아."
아니야? 하고 묻는 그 애 눈은 분명 빛나고 있었다. 일주일 동안 고민한 게 허사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고 해야 할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자 그는 괜히 심술궂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 널 닮아서 좀 멍청하게 생기고 쪼끄만한 게. 네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더라."
"야!"
운동도 안 하는 애가 조막만한 손으로 때려 봐야 아프지도 않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맞아주고 있다 보니 제 풀에 지쳐서 씩씩거리며 돌아가는 게 아닌가. 단순한 녀석……. 아니, 오히려 단순해서 다행이었다. 단순하니까… 그러니까 이런 어지간한 헛짓거리는 눈감아줄 거라고.
역시 이 애는 알기 쉬운 녀석이지만 취향 면에선 은근히 깐깐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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