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스토리 드림

왕자의 책사는 얼굴이 없다, 1장(一章)

레오나 킹스카라, 빌 셴하이트 드림

* ‘타마슈나 무이나’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 쟈밀 드림도 살짝 들어가있습니다. 쟈밀은 안 나오는데…… .


01.

사건은 효광에 도시에 도착하고 몇 분 되지도 않아서 일어났다.

 

“잭!?”

 

도시 주변을 둘러보며 캐치 더 테일이나 노을의 초원에 관해 설명하는 레오나의 말에 귀 기울이던 중. 돌연 잭이 쓰러져 버렸다. 그것도 단순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거나, 비틀거리다 넘어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드러누워 미동도 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깜짝 놀란 빌은 재빨리 쓰러진 후배를 깨워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도는 통하지 않았다.

 

“가, 갑자기 쓰러졌어……. 불러도 반응이 없는걸.”

“곤란하군……, 아마도 열사병이다.”

“의식이 없어, 이건 심각한 상황이지 않나.”

 

레오나와 릴리아는 진중한 얼굴로 잭의 상태에 대해 한 마디씩 내뱉었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쓰러진 잭 밑에는, 동행 중 가장 작은 이가 깔려있다는 사실이었다.

 

“후냣! 이 몸, 쓰러진 잭 밑에 깔려 버렸다고!”

“자, 잠깐 기다려 그림. 내가 빼 줄 테니까, 버둥거리지 마!”

 

이러니저러니 해도 믿을 건 파트너밖에 없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 걸까. 다행스럽게도 아이렌은 그림의 구조요청을 듣자마자 거구에 깔린 상대를 꺼내 주었다.

그림의 상태를 살피느라 다급한 아이렌과 온몸이 아프다며 법석을 떠는 그림, 깨어나지 않는 후배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빌과 릴리아. 그리고 이런 소란 속에서도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잭까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 상황을 정리하고 나선 건 레오나였다.

 

“너희들, 침착해! 우선 안정을 취할 잘 곳과 몸을 식힐걸…….”

 

그러나 그 말이 마저 끝나기도 전.

조용히 다가온 그림자 하나가 점잖은 목소리로 혼란 속에 끼어들었다.

 

“곤란해 보이시는군요, 레오나 님.”

 

그리 큰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각자의 이유로 소란스럽던 모두의 시선은 낯선 이에게로 쏠렸다.

특히 레오나는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의아함과 놀람이 섞인 눈으로 입을 열었지.

 

“네 녀석은…….”

 

보아하니 레오나는 상대와 이미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눈치가 빠른 아이렌은 그답지 않게 당황하는 레오나를 보고 그리 추측했지만, 아무래도 그림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구야, 이 녀석?”

“그림. 초면의 어르신에게 이 녀석이라고 하지 마.”

“흥. 네가 내 엄마인 줄 아냐, 꼬붕!”

 

정말 내가 네 엄마였다면 이렇게 가만히 안 두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꾹 삼킨 아이렌은 레오나와 이런저런 말을 나누는 낯선 이를 찬찬히 살폈다.

 

‘레오나 님이라고 부르는 걸 봐선, 왕실 사람이려나? 아니, 물론 왕실 사람이 아니더라도 보통은 선배에겐 예를 갖추겠지만.’

 

하지만 아이렌이 굳이 왕실 사람이라고 생각한 건, 다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꽤 연륜이 있어 보이는 낯선 이는 몸가짐이 바르며 예를 갖춘 정중한 말투를 쓰고 있었고, 레오나 또한 상대를 대하는 데 꽤 허물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아무래도 궁 밖의 사람이라곤 생각하기 힘들지 않겠나.

 

“……과연, 어떻게 된 건지 알겠습니다. 상태를 진찰하도록 하지요.”

 

레오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동글동글한 안경을 고쳐 쓰며 잭에게 다가갔다.

 

“으으…….”

“흠…… 레오나 님의 예상대로, 열사병이군요. 시원한 그늘로 옮겨드려야겠군요. 응급처치도 하겠습니다.”

 

따로 의료기술을 배운 것인지, 정체 모를 이의 응급처치는 상당히 능숙하고 재빨랐다.

그의 치료를 보던 빌은 슬며시 레오나에게 다가가 누구도 먼저 묻지 못하던 걸 솔선하여 물었다.

 

“……레오나, 이분은 누구니? 아는 얼굴 같은데.”

“하아…….”

 

레오나는 조각 같은 얼굴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하는 건지 곤란해하는 건지 모를 시선으로 제 옆으로 돌아오는 남자를 힐끔 쳐다본 그는, 마지못해 동행들에게 상대를 소개해주었다.

 

“이 녀석은 이 나라의 왕족을 섬기는 시종장이야.”

“키파지라고 합니다. 레오나 님의 학우 여러분들, 부디 기억해 주시기를.”

 

온화한 미소를 지은 키파지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우아한 몸짓을 본 아이렌은 제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았다는 걸 기뻐하면서도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순한 하인도 아니고 시종장이라면,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닐 터.

 

‘그러니까, 말하자면 최측근이라는 거 아닌가?’

 

아까 그림이 건방지게 말했는데, 괜찮은 걸까. 파트너의 무례가 걱정되는 아이렌은 조용히 분위기를 살폈다.

입을 꾹 다물고 눈치만 보는 아이렌과 달리, 빌은 적극적으로 상대와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빌 셴하이트라고 합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고명하신 모델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전히 어딘가 불만스러운 듯한 레오나와 달리 서로 예를 갖춘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 덕에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지자, 릴리아와 그림도 적극적으로 상대와 통성명을 해왔다.

 

“나는 릴리아라고 하네. 가시의 골짜기에서 왔지. 신세 좀 지겠네.”

“이 몸은 그림이다!”

“릴리아 님, 그림 님. 먼 길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모두 인사하는데 자신만 가만히 있으면 그건 또 이상하겠지. 한결같이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받아주는 키파지를 보고 조금이나마 긴장이 풀린 아이렌은, 깊게 심호흡하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렌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아이렌의 이름을 들은 키파지의 잔잔한 수면같이 평온한 얼굴에, 미세한 동요가 일렁였다.

두 눈을 크게 뜬 그는 갑자기 레오나 쪽을 힐끔 보더니,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당신이 바로 그…….”

“예?”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존함만 몇 번 들었던 분을 직접 뵙게 되어 기쁩니다. 효광의 도시에 어서 오세요.”

 

노련한 시종장인 만큼 표정을 감추는 것도 능숙한 걸까. 키파지는 곧바로 평정심을 되찾고 아까와 같이 형식을 갖춘 인사말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의 당황을 똑똑히 보았던 아이렌은,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존함만 몇 번 들었던’이라니. 이건 명백하게 제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빌 같은 유명인도 아니고, 애초에 이 세계 출신이 아닌 제 이름을 알 방법이 무엇이 있겠나. 아이렌은 그 답을 레오나에게서 찾으려 했다.

키파지가 다시 잭을 살피는 동안, 아이렌은 재빨리 레오나에게 가 소리죽여 물었다.

 

“레오나 선배, 혹시 제 이야기하고 다녔나요?”

“아니.”

“정말이죠? 그럼 방금 키파지씨의 반응은 뭐죠? 왜 왕실 관계자가 저를 아는 거냐고요.”

“내가 어떻게 알아? 애초에 내가 본가에 이것저것 보고 할 사람으로 보인 거냐?”

 

‘그건 당연히 아니지.’ 레오나가 얼마나 본가와 거리를 두는지 아는 아이렌은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하지만 레오나가 말하지 않았다면, 대체 어떻게 키파지가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경우의 수가 떠오르지 않아 끙끙거리는 아이렌과 달리, 레오나는 금방 진짜 범인을 찾아냈다.

 

“아. 그건가.”

“뭔가 짚이는 게 있으신가요?”

“너, 그 녀석에게 네 이름 가르쳐 줬을 거 아냐. 그럼 그 녀석이 말한 거겠지.”

“그 녀석?”

 

저런 식으로 말하면 누굴 말하는 건지 어떻게 아나. 불친절한 레오나의 화법에 드물게도 아이렌의 미간이 구겨지려는 순간, 머릿속에 사랑스러운 미소가 두둥실 떠올랐다.

레오나와 같은 왕실 사람이자, 자신과 접점이 있는 인물. 거기에 제 이름까지 알 사람이라면…….

뒤늦게 상대가 말한 이가 누군지 눈치챈 아이렌은 소리죽여 말하던 것도 잊고 언성을 높였다.

 

“설마 지금 천사 같은 조카를 그 녀석이라고 부른 건가요?”

“천사는 무슨. 어쨌든, 범인은 아무리 봐도 내가 아니라 그 녀석 같으니 따질 거라면 그 녀석에게 따지는 게 어때? 키파지라면 체카와도 가깝게 지내니, 네 그림도 봤을지도 모르지.”

“으, 으아아.”

 

진실을 알게 된 아이렌은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고 신음했다.

레오나의 조카이자 이 나라의 유력한 왕위계승권자 중 하나인 체카는 이제 겨우 5살 된 소년으로, 매지컬 시프트 대회 때 아이렌과 잠깐 만난 적이 있었다. 레오나를 만나러 보건실까지 왔다가 우연히 안면을 트게 된 두 사람은 왕실 근위병들이 체카를 찾으러 오기 전까지 짧은 교류를 했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가끔 연락을 주고받곤 했으니까.

 

‘나 뭔가 왕족을 상대로 실례되는 행동 한 적 없었나?’

 

아이렌은 차분하게 자신이 체카와 한 교류를 살펴보며 마른세수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보건실에서는 레오나가 상대하기 귀찮아하기에 잠깐 놀아주긴 했지만, 워낙 그 시간 자체가 짧고 별다른 걸 하지도 않아서 문제 될 행동은 없었을 것 같다. 레오나의 방을 드나들며 우연히 체카가 보낸 편지를 보고, ‘글자를 막 배운 조카 애가 편지까지 보냈는데 왜 답장은 안 해주는 거냐’라고 다그치듯 물었다가 어쩌다 보니 제가 대신 답장을 보낸 적도 여러 번 있긴 하지만, 그 답장 내용도 그림일기 수준의 귀엽고 단순한 그림들과 짧은 안부 편지였으니 별문제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나는 그냥 아기 천사가 답장도 못 받고 실망할까 봐 그런 거였는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설마 왕실 시종장이 자신을 기억하게 될 줄이야. 대체 자신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어째 두려워지는 아이렌이었다. 혹 왕실과 친분을 쌓으려고 괜한 짓을 하는 불청객이라 생각하면 어쩌나. 하지만 아까 키파지의 태도에 적의는 없어 보였으니, 안심해도 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가득 차오르는 머리를 당장에라도 쥐어뜯을 것 같던 아이렌은, 문득 신경쓰이는 점을 하나 더 떠올리고 멈칫했다.

 

‘아니, 그런데 뭔가 눈빛이 묘하지 않았나?’

 

아이렌은 자신을 놀란 눈으로 보던 키파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정적인 느낌은 없지만, 마냥 반가워한다기엔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신기함과 의아함이 섞인 그 눈빛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게다가, 레오나는 왜 쳐다본 거고?

개운치 못한 해답을 곱씹으며 레오나에게 돌아선 아이렌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거는 빌을 피할 수 없었다.

 

“아이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온 거니?”

“아무것도 아녜요, 선배.”

“그래?”

 

아이렌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때, 8할 정도는 무슨 일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며 다진 깊은 개인적 친분으로 그걸 잘 알고 있는 빌은 수상하다는 듯 미덥지 못한 홍일점을 훑어보다가,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왜 키파지 씨가 널 안다는 듯 반응한 거지?”

 

이런,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은 주제다.

아이렌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감각에, 제가 가장 싫어하는 ‘얼버무리며 거짓말하기’ 기술을 사용해 버렸다.

 

“레, 레오나 선배가 말했나 보죠. 뭐.”

“흐음.”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정확히 모르겠으니까, 그렇게 노려보셔도 소용없어요!”

“저기, 누가 노려봤다는 거니? 어이가 없어서.”

 

당사자는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분명 노려보았다. 그것도 당장이라도 진실을 털어놓지 않으면 주술이라도 걸 것 같은 눈으로 말이다.

‘뭐가 원인인지 확신은 가지만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니, 제가 한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자신을 합리화한 아이렌은 정신을 차린 잭을 향해 주의를 돌렸다.

 

“아, 저기 잭이 일어났어요!”

“……흠.”

 

명백하게 말을 돌리기 위한 행동임에도, 빌은 더는 따지지 않고 정신을 차린 잭에게 가버렸다.

상대가 일부러 모른 척해준 걸 모르지 않는 아이렌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별일 아니겠지? 그냥 출신도 모를 평민 여자애가 왕세손이랑 친한 게 이상해서 기억하는 거겠지.’

 

언제나 사서 걱정을 하는 아이렌은 이번에도 제가 기우에 빠진 것이길 바라며 키파지를 힐끔 바라보았다. 수심으로 가득 찬 제비꽃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키파지는, 인자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02.

 

“꼬붕! 이 몸의 복장, 어떠냣?”

 

그림은 화려한 전통 무늬가 수놓아진 리본의 매무새를 정돈하며, 거울 앞에서 으스대었다.

키파지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쓸 호텔까지 온 후, 자신들을 위해 준비해 준 노을의 초원의 전통 의상으로 갈아입던 중인 아이렌은 자신보다 빨리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그림의 모습을 보곤 쿡쿡 웃었다.

 

“잘 어울리네. 귀여워.”

“귀엽다니! 이 몸은 멋진 거라고!”

“네, 네. 자칭 미래의 대마법사 그림 님. 멋있어서 정신이 어지럽사와요.”

 

장난스럽게 대꾸한 아이렌은 걸쳐두기만 한 꼴이나 다름없는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거울서 멀찍이 떨어져 제 모습을 살폈다.

 

‘예쁜 옷이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런 디자인이려나.’

 

형형색색의 무늬가 아름다운 옷과 망토는 움직이기 편하고 시원했다. 게다가 머리를 묶은 스카프에는 그림의 리본에 그려진 것과 비슷한 무늬가 있어 누가 보아도 두 사람을 한 세트처럼 보이게 했다.

미와 실용성, 그리고 소속감까지 느끼게 하는 세심한 의상을 이리저리 살피던 아이렌은 스카프를 사용하기 위해서 하이 포니테일로 다시 묶은 머리를 정리했다.

 

‘뭐, 완전히 같은 옷은 아니겠지. 내 건 리본도 달려있고. 누가 봐도 젊은 아가씨가 입을 법한 옷이니까.’

 

일단 제 눈엔 이상해 보이진 않지만, 객관적으로 괜찮은지는 모르겠다.

외모에 그리 자신이 있는 편은 아닌 아이렌은 거울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한참을 서성이다가, 자신이 너무 시간을 지체하는 건 아닐까 하여 이만 모두가 모인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

진작 준비가 끝난 그림은, 닫힌 방문 앞에 서서 아이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 우리도 가자고! 이 몸이 가장 멋있을 건 안 봐도 뻔하지만!”

“현직 모델과 그 현직 모델도 인정하는 미모의 왕자, 거기에 초절정 미소년과 태양의 의인화 같은 선배도 있는데 그런 말을 하다니. 네 자신감 하나는 세계 제일이야, 그림.”

“흥! 너보다 내가 더 멋있다고 심술부리지 말라고, 꼬붕!”

 

평소처럼 가볍게 아웅다웅하며 자신들의 방을 나온 한 사람과 한 마리는, 그렇게 왁자지껄한 집합 장소로 돌아왔다.

 

“기다렸느냐! 이 몸도 갈아입고 왔다고!”

 

문을 연 것은 아이렌이었지만, 재빨리 안으로 들어온 건 그림이었다.

당당히 제 자태를 뽐내는 그림의 의기양양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아이렌은, 제게 쏠리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뒤늦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어떠냐, 멋있지? 아이렌과 이 몸의 의상이라고!”

“뭐, 한 세트 같은 느낌이긴 하지.”

 

어차피 자랑은 그림이 다 할 테니, 자신은 그냥 조용히 있어야겠다.

그리 생각한 아이렌이지만……. 안타깝게도 동행들의 관심은 그림보다는 그에게 쏠리고 말았다.

 

“오오, 두 사람은 우리랑 달리 리본이 달려있구먼.”

“흠. 나쁘지 않아. 색이 잘 어울리는걸. 아이렌 너는 키가 커서 큼지막한 무늬도 잘 소화해 내구나.”

“와! 정말 예뻐, 아이렌! 쟈밀이 보면 정말 좋아할 텐데! 그림도 멋지네!”

 

이럴 수가. 릴리아와 카림은 그림도 함께 언급하긴 했지만, 빌은 아예 자신에게만 말하고 있지 않나.

아이렌은 어색하게 웃으며 조용히 있는 레오나 쪽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제가 아는 레오나 킹스카라라면 복장에 관한 칭찬이나 코멘트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 저도 모르게 안전하다 느끼는 쪽으로 발이 움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레오나는 가까이 다가온 아이렌의 옷을 지그시 보다가 엄지와 검지로 옷감을 만지며 말을 걸어왔다.

 

“흐음. 꽤 신경 써서 준비했군. 어쩌면 선수 옷보다 더 정성을 들인 거 같은데.”

 

그나마 다행인 건 그의 말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평가가 아닌, 나름대로 흥미가 가는 이야기였다는 점일까.

아이렌은 뜻밖의 정보에 다시 한번 제 옷을 훑어보았다.

 

“그 정도로 좋은 옷인가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건 꽤 비싼 옷감이거든. 캐치 더 테일같은 거친 스포츠용 옷에는 절대 쓸 수 없는 고급 모직물이지.”

“정말이에요?”

 

어쩐지 굉장히 편한데도 예쁜 옷이다 싶었는데, 비싼 옷이었던 건가.

살면서 옷에 비싼 돈을 쓴 적이 없던 아이렌은 갑자기 확 부담스러워져,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 이런 걸 입어도 되는 거예요?”

“입으라고 준비한 거니 입으면 되는 거지. 뭘 심각하게 받아들여? 이게 고급 옷감이긴 해도 이 정도도 베풀어 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왕가는 아니거든.”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요…….”

“알아.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니니 그냥 입으면 된다는 소리지.”

 

어라. 지금 이 사람, 뭐라고 한 거지.

아이렌은 레오나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을 듣곤, 장난스럽게 물었다.

 

“저, 잘 어울려요?”

 

안 어울린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는 말은 같다고 할 수 없지만, 이런 코멘트는 평생 안 할 거 같은 남자가 저런 소릴 한 건 흥미롭지 않은가.

옷 가격을 생각하며 쭈뼛거릴 때는 언제고, 갑자기 히죽 웃으며 묻는 건방진 후배를 보던 레오나는 혼자서 묶느라 조금은 모양새가 엉성해진 스카프 리본에 손을 뻗었다.

 

“리본이나 똑바로 묶고 물어라.”

“대답 피하지 마시고요.”

“내 의견이 중요한가? 안 어울린다고 하면 벗게?”

“선배 나라의 의상이니까, 아무래도 선배의 의견이 궁금하지 않겠어요?”

“시시한 이유군.”

 

묶은 머리가 풀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리본의 모양을 고쳐 준 그는 느긋하게 천천히 상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어느 음습한 인어가 선물해 준 귀걸이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귀걸이만 바꾸면 괜찮겠네.”

“잘 어울린다는 뜻으로 알고 있을게요.”

“하.”

 

조금은 뻔뻔한 대답에 레오나가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자, 저 멀리서 이 모든 걸 지켜보던 키파지의 동공이 빠르게 떨렸다.

‘흠흠.’ 헛기침하며 나란히 붙어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온 그는 아이렌과 눈을 맞추고 입을 열었다.

 

“시합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도, 레오나 님의 정……. 아니, 학우 되시는 분이니. 실례되는 일이 없도록 준비해 보았습니다.”

 

‘방금, 뭔가 말하려다가 급히 말을 바꾸지 않았나.’

아이렌은 무언가 이상한 걸 감지하긴 했지만, 확신할 수 없는 건 파고 들어봐야 좋을 게 없음을 알기에 금방 생각을 멈추었다. 그 대신, 그는 자신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옷의 가격을 머릿속으로 어림짐작해보곤, 어쩐지 흐뭇해 보이는 키파지에게 옷값에 맞는 정중함을 보여주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수도 아닌 저랑 그림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기뻐해 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이렇게 정중히 감사해 주시니 도리어 부끄럽군요.”

 

두 사람이 예의 가득한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그림의 차림새를 마저 구경하던 카림은 일행을 쭉 둘러보고 순수하게 웃었다.

 

“아, 이왕이면 아이렌 뿐만이 아니라 모두의 모습을 쟈밀에게 보여주고 싶은걸!”

 

글쎄다. 과연 쟈밀이 기뻐할까. 아니, 아이렌의 모습은 보고 좋아할 것 같지만, 카림이 캐치 더 테일 의상을 입은 걸 보면 기겁할 텐데.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지만, 레오나는 음흉하게 웃으면서 능청을 떨 뿐이었다.

 

“대회가 끝난 후, 느긋하게 구경시켜 주자고. 원한다면 그 옷,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 가져가도 좋아. 쟈밀이 아주 기뻐하겠지.”

“그것도 좋네, 그렇게 할게! 고마워!”

 

아아, 저 악의라곤 없는 활기찬 대답을 보라.

빌과 릴리아는 태양처럼 밝게 웃는 카림을 보며 한탄했다.

 

“최악의 사후통보네.”

“기뻐하며 자랑하는 카림의 모습을 볼 쟈밀이 불쌍하구먼.”

 

안타까움에 탄식하는 건 그 둘만이 아니었다. 아이렌은 그 누구보다도 심각한 얼굴로 손톱까지 깨물며 이 자리에 없는 이를 걱정해 주었다.

 

“쟈밀 선배의 위장 건강이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제가 다 죄책감이 드는데요.”

 

‘죄책감’ 그 단어를 들은 빌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따지고 보면 그건 레오나가 느껴야 하는 감정이지, 아이렌 몫의 감정은 아니지 않나.

이 후배는 냉정할 때는 지독하게도 냉정하지만 제 사람 앞에선 누구보다도 물러지는 걸 아는 빌은, 쓸데없는 소릴 하는 상대를 지적했다.

 

“어라. 네가 굳이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는 없지 않니?”

“다 알면서도 말리지도 알리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좀……. 방관자를 넘어서 레오나 선배의 원대한 계획의 공범자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맘이 영 안 좋네요. 나중에 쟈밀 선배가 원망해도 할 말 없을지도.”

 

쟈밀이라면 만약 원망한다고 해도 아이렌이 아니라 레오나를 원망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 사태를 모르고 넘어간 자기 자신을 탓하겠지.

하지만 빌은 제 생각을 말하기보단, 깊은 한숨으로 이 상황을 넘겼다.

 

‘정말이지, 그 녀석이랑 친하긴 친하구나?’

 

쟈밀은 알까. 아이렌이 이렇게까지 늘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아니. 아마 알겠지.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할 거지만, 분명 알고 있을 거다. 틈만 나면 붙어있는 후배들을 떠올린 빌이 누구도 보지 못하게 비뚜름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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