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점은 춤추지 않는다, 막간의 이야기
올 캐릭터 드림
* 이벤트 ‘글로리어스 마스카레이드’ 엔딩까지의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07.
무도회가 끝난 후. 곧바로 숙소로 돌아와서 잠든 아이렌은 꿈도 꾸지 않고 죽은 듯 잠을 자다가 평소보다 조금 늦게 눈을 떴다.
“벌써 돌아가는 날이 되다니. 아쉽네.”
집합 시간에 늦지 않게 분주히 준비하던 아이렌은 따스한 햇볕이 들어오는 창가로 눈을 돌렸다. 평온한 오전의 풍경을 구경하는 제비꽃색 눈동자는 피로가 가시지 않은 탓에 평소보다는 생기가 없어 보였다.
“으으, 얼른 돌아가서 쉬고 싶다고.”
상대보다 일찍 일어났음에도 돌아갈 준비는 이제 막 끝낸 그림은 정돈을 마친 침대 위에 도로 드러누우며 한탄했다.
그 요란한 동작에 시선을 빼앗긴 아이렌은 소리죽여 웃었다.
“하긴. 어제 그림은 완전히 끝도 모르고 날뛰었으니까. 피곤이 덜 풀려도 이상하지 않지.”
“흥. 너는 결국 한 곡도 안 추고 도망다녔잖냐!”
그림의 말을 들은 아이렌이 잠깐 말을 멈추었다.
제가 종일 도망 다닌 게 부끄러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대강당 밖 복도에서 실버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마른침을 삼킨 그는 파트너의 발언을 정정해주지 않고 능청스레 답했다.
“뭘 기대한 거니, 그림? 내가 춤을 추리라 생각했어?”
“기대까지는 아니지만, 혼자만 우두커니 있는 건 이상하니 그렇지!”
“그 생각이 더 이상한 거 같은데.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지.”
짐짓 어른스레 충고한 아이렌은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후 가방을 챙겨 들었다.
“원한다면 칼춤 정도는 춰줄 수 있지만. 그걸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그건 또 뭐야…….”
“그런 게 있어. 슬슬 가자.”
농담이란 원래 알아들어야 재미있는 거라지만, 이 농담만큼은 모르는 쪽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아이렌이었다.
늦지 않게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반기는 건, 숙소의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듀스와 에펠이었다.
“아이렌, 잘 쉬었어?”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다소 따분해 보이던 듀스는 아이렌을 보자 반갑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나야 편히 쉬었지. 너희도 잘 쉬었어?”
“물론이야. 좀 피곤했던 것도, 자고 나니 멀쩡해졌어.”
“나도 마찬가지야. 어제는 정말 즐거웠지. 헤헤.”
듀스와 에펠은 밝은 얼굴로 조잘조잘 대답했다. 두 소년의 표정은 정말로 즐거워 보여,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말았다. 아무리 낮 동안 푹 쉰 후 무도회에 참가한 것이라지만, 힘든 일을 겪은 후 무도회에 참가해서 몸에 무리가 오진 않았을지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피로가 풀리지 않아 뻐근한 어깨를 가볍게 주무른 그는 에펠에게 물었다.
“선배들은?”
“리들 씨와 루크 씨는 선생님이랑 같이 계셔. 다른 선배들도 아마 약속장소에 모여있지 않을까?”
“그럼 너희는 왜 여기…….”
“그거야 당연히 아이렌 군을 데리러 온 거지. 많이 피곤해 보였으니까, 혹 늦잠을 자진 않을까 해서 말이야.”
정확한 판단이다. 어제 자신은 여러 이유로 상당히 피곤했었고, 실제로 오늘 아침엔 늦잠까지 자고 말았으니까. 데리러 오기 전 나오긴 했지만, 만약 제가 조금만 꾸물거렸어도 두 사람은 더 기다리지 않고 현관문을 노크해왔을 것이다.
아이렌이 에펠의 판단력에 순수하게 감탄하는 도중, 그림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아, 꼬붕은 내가 깨우기 전까진 꿈나라에서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고!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라니까!”
“네게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뭐냐, 그 말투는!”
훅 치고 들어오는 아이렌의 대꾸에 그림이 버럭 화를 내자, 세 사람은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평화로운 웃음소리는 듣고만 있어도 절로 기분이 들뜰 만큼 밝았지만, 그 따뜻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렌 군.”
유령처럼 조용히 다가온 인영의 목소리가 익숙하다. 그리 큰 목소리로 부르지 않았음에도 목소리는 제대로 닿은 걸까. 그 자리에 있는 세 사람과 한 마리는 놀란 얼굴로 입을 닫은 채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롤로 프람!”
가장 먼저 반응한 건 듀스였고, 질색하며 상대를 호명한 건 에펠이었다. 참고로 그림은 너무 놀라 온몸의 털을 쭈뼛 세울 뿐, ‘후냣!’하는 감탄사 하나 내뱉지 못했다.
정작 호명 당한 당사자는 평온한데, 주변 사람들만 놀라고 있는 꼴이라니.
롤로는 자신을 경계하는 이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아이렌과 눈을 맞추었다.
“당신들에게 볼일은 없습니다. 저는 아이렌 군과 대화 하러 온 겁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차가운 얼굴과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누가 봐도 호의적인 느낌은 아닌 모습. 적대적인 감정을 품은 이라면 반발심이 들 수밖에 없는 언행에, 아이렌을 제외한 셋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웃기지 마, 당신이 아이렌이랑 할 이야기가 뭐가 있어?”
“선배들을 불러오기 전에 물러나는 게 좋을걸!”
“네 녀석, 내 꼬붕에게 무슨 허튼짓을 하려는 거냣!”
마법도 쓸 수 없고, 신체적으로 약자인 친구를 보호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이렌은 그걸 알기에 친구들의 격렬한 반응을 유난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보고 있을 생각도 없었다.
“얘들아, 나는 괜찮아.”
“뭐?”
“아, 아이렌 군?”
한마디 말과 손짓으로 소란을 피우는 셋을 진정시킨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롤로 앞에 섰다.
전혀 두려워하지도 긴장하지도 않는 아이렌은 곧바로 수락하지 않고 질문부터 건넸다.
“혹시 이야기가 길어질까요?”
“아닙니다. 돌아갈 시간을 넘기는 일은 없도록 할 터니, 그 점은 우려치 않아도 좋습니다.”
‘그렇구나.’ 혼잣말로 답한 아이렌은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 돌린 그는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잠깐 다녀올게. 셋이서 먼저 가.”
“뭐? 아이렌, 대체 무슨 생각이야!”
“글쎄, 하지만 잡아먹히기라도 하겠어?”
듀스의 농담을 우스갯소리로 받아친 아이렌은 마치 눈치라도 보듯 롤로의 안색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그도 유머를 즐기지 않는 것과 별개로 우스갯소리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지, 특별히 기분 나빠 보이는 기색은 없었다.
롤로는 먼저 몸을 돌리고 뒤따라오라는 듯 고갯짓했다.
“조금 걷도록 하지요.”
“좋아요.”
걱정되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자신만 바라보는 친구들에게 손 인사한 아이렌은 롤로의 뒤를 따라갔다. 나란히 섰다고 하기엔 거리가 있고, 그렇다고 뒤쫓아 간다고 하기엔 바짝 붙은 묘한 거리감을 유지한 채 걷고 있는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앞서나가는 이였다.
“무도회 때 거의 모습이 보이지 않던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걱정되어 묻는 건 아닐 테다. 아마 순수하게 궁금증이 들어 묻는 것이겠지. 질문의 의미를 그리 해석한 아이렌은 거짓 없이 솔직히 답했다.
“별일 없었어요. 그냥 춤추는 걸 좋아하지 않다 보니 그림자 속에 숨어다닌 거죠.”
“그렇다면 아예 불참하는 선택도 있었을 텐데.”
“선배가 혼자 고생하며 청소한 대강당에서 개최한 무도회인데, 어떻게 빠지겠어요.”
듣기 좋은 대답에 일정한 보폭으로 걷던 발이 멈칫한다. 단 한 걸음 덜 내디뎠을 뿐인데 어느새 제 바로 옆자리를 내어주게 된 롤로는 왼쪽에서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아이렌과 눈을 맞췄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인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인다. 그 은은한 표정을 보아하니 제가 내뱉은 말의 무게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는 듯 보였다.
롤로는 그 태연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꾹꾹 삼키며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렸다.
“감언(甘言)은 되었습니다, 저는 진실이 궁금한 것이니.”
“정말인걸요?”
“…….”
꿋꿋한 태도에 손에 쥔 손수건이 가볍게 구겨진다. 평온함이 사라진 롤로의 모습을 애써 외면하듯 시선을 돌린 아이렌을 괜히 주변 풍경을 구경하며 덧붙였다.
“물론 모두가 참석하는 자리에 저만 빠지는 건 도리가 아니라 생각한 점도 크긴 해요. 하지만, 선배 얼굴 보러 간 것도 맞아요.”
이렇게까지 주장하면 진실인지 거짓인지 헷갈리게 된다. 롤로는 마치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듯한 상대의 태도가 낯간지러워, 손수건을 치우는 순간까지도 애꿎은 입술만 깨물어댔다.
“당신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요.”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호의적으로 굴며 제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는가 싶다가도, 중요한 순간에는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은 여자. 필사적으로 제 계획을 막으려는 이들을 도와주었으면서, 정작 제 태도를 비난하거나 질책하지 않고 이해한다는 듯 구는 이방인. 롤로 프람에게 있어 아이렌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지만, 당사자는 그 거리감을 이해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 말, 정말 많이 들어요.”
“……그렇습니까.”
“예. 저는 제가 단순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 눈엔 아닌가 봐요.”
그럴 수도 있지. 원래 미궁은 거기 사는 사람에겐 조금 복잡한 길 정도일 뿐이지만 침입자에게는 무덤이 되곤 하니까.
그리 생각한 롤로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가, 제가 찾아온 이유를 입에 담았다.
“당신이 이렇게 말했지요, ‘속죄란 타인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기쁨을 주는 일’이라고.”
어제 낮, 대강당에서 나누었던 대화 끝. 혼잣말이나 다름없던 아이렌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던 그는 마주 잡은 자신의 손을 고쳐 잡았다.
“그렇다면 당신은 타인에게 죄를 사면받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롤로의 질문에 아이렌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자신은 그냥 별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었는데, 상대는 그 답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이리 답을 찾으러 온 것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혹시 어제 무도회에서도 자신을 찾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왕이면 당일에 해답을 얻고 싶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아, 결국 아침부터 찾아오게 된 건 아닐까.’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들어차는 와중에도 이미 대답은 준비해 둔 아이렌은, 금방 표정을 정돈하고 모범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그건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따라 다르겠죠? 누군가는 사과 한마디에 모든 걸 용서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상대의 목숨을 거둔다 해도 계속 앙심을 품기도 하니까요.”
“……으음.”
“게다가 씁쓸한 일이지만……, 인간은 감정적이라서 ‘죗값을 치르게 만든다’라는 핑계로 온갖 짓을 하곤 하잖아요.”
제가 언급한 말이지만 참으로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렌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롤로는 그 고갯짓과 표정, 말투에서 확실한 혐오감을 느끼고 숨을 삼켰다.
제가 홍련의 꽃을 처음 대강당에서 피워냈을 때, 자신의 실제 계획을 밝혔을 때도 이런 격렬한 거부감은 보이지 않았는데. 인간의 본성이라는 게, 그렇게나 불쾌하단 말인가.
여전히 표정이 어두운 아이렌은 서늘한 가을바람에 식어가는 자신의 팔을 매만졌다.
“그런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니 재판과 형량이 필요한 거겠죠. 피해자도 가해자도 받아들일 수 있는 속죄를 위해, 법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당연하지만 그조차도 인간들의 규칙 안에서 행해지는 일이라, 오류투성이 되지만.”
차가운 말투로 내뱉은 아이렌은 가볍게 눈을 감더니, 느리게 호흡하고 눈꺼풀을 열었다.
마치 가면을 바꿔 쓰듯 어느새 평소의 다정다감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롤로와 시선을 맞추었다. 경멸과 지긋지긋함으로 일그러져있던 자안은, 그새 뚜렷하고 선명하게 밝아져 있었다.
“어제 선배의 행동은 제가 보기엔 적절한 속죄였다고 생각했어요, 과시적이지도 않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으며 몸도 힘든 노동이라니.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습니까.”
“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 그렇게 생각해요. 게다가 나중에 무도회에서 저희를 치켜세워주셨으니, 하실 만큼은 하신 게 아닐까요.”
이젠 이게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인지, 진심인지도 모르겠다. 시시각각으로 표정과 분위기가 바뀌는 이방인 소녀를 신기하다는 보던 롤로는, 다음 말을 듣고는 정말로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선배가 제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신경 쓰이게 했다면 죄송해요.”
“……내게 사과하는 겁니까?”
“그거야, 괜히 애매한 소릴 해서 선배를 신경 쓰이게 한 거잖아요. 고뇌를 불러일으킨 것에 대한 사과라고 할까요. 때로는 몸이 아픈 것보다 머리가 아픈 게 더 괴롭잖아요.”
애써 놀라움을 감춘 롤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상대의 양손으로 향했다. 약을 잘 발라두었기 때문일까. 손에 가득한 상처들은 어제보다 색이 옅어져 있었다.
설마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으로부터 사과의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아무리 이 여자는 마법을 쓸 줄 모르는 일반인이라 해도, 제가 저지른 일을 알고 그걸 수습하기 위해 뛰어다니기까지 했으니 미안하다는 마음 따위는 품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저렇게 손이 갈기갈기 찢겨나갈 정도로 홍련의 꽃을 뜯어내 놓고, 자신에게 사과를 요구한 적도 없으면서, 겨우 마음을 어지럽힌 일을 사과하다니. 정말, 어쩜 이리도 모순적인 여자가 있을까.
“롤로 선배.”
호기심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그 안에 가득 차올라 요동치는 순간. 갑자기 두어 걸음 앞서나가 제 앞에 멈춰 선 아이렌이, 대뜸 양손을 내밀었다.
‘뭐지.’ 가지런히 모아 제 앞에 내민 손과 아이렌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롤로는 곧 상대의 뜻을 파악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여자는 제 손을 원하고 있다. 그것도 두 손을. 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분위기로 알 수 있다.
롤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지만, 아이렌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하아.”
어색한 대치 상황.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는 순간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결국 롤로는 맞잡고 있던 제 두 손을 상처투성이 손에 얹었다.
부드럽게 상대의 손을 감싸 쥔 아이렌은 한숨 쉬는 상대에게 멋쩍게 웃어 보인 후,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 굉장히 건방지고 주제 넘는다 생각하지만. 선배를 힘들게 하는 번뇌가 어떤 방식으로라도 해결되길 기도할게요.”
마치 기도문을 읽는 것 같은 목소리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축언(祝言)이었다.
롤로는 얼른 손을 빼고 싶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가볍게 떨었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예.”
“내 계획을 망치는 데 일조한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다니,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거라면, 단언컨대 그럴 필요는 없다. 롤로는 그리 생각했기에 상대의 호의를 딱잘라 거절하려 했지만 아이렌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다음엔 내게 들키지 않게 불을 지르는 건 어떨까요?”
“허?”
“안 보는 곳에서 저지른 범죄는 속죄를 요구받지 않는 법이니까요.”
장난스럽게 킥킥 웃은 아이렌이 먼저 손을 놓아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편법을 말한 그는, 황당해하는 롤로에게 제 생각을 장황하게 서술해냈다.
“그때도 말했지만, 저는 선배가 대단히 사악하고 개인적인 이유로 이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다만 작은 재판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 양측이 수긍할 형량이 나오지 않는데, 이 넓은 세상을 상대로는 그런 급진적이고 살벌한 방법은 받아들여지기 힘들 뿐이죠. 애초에 옳고 그름이라는 건 허상이에요. 시대와 상황과 사람에 따라 바뀌니까요.”
참으로 훌륭한 궤변이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모든 것을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부도덕한 궤변이다. 이 여자의 논리대로라면 법이란 것도 다 농간일 뿐이리라.
하지만 우습게도, 자신은 저 말에 위로를 받고 있었다. 제가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이해받은 것 같아서, 제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그저 방법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
“아이렌 군, 당신은 대체 누구 편입니까?”
상대의 체온이 남은 손을 언제나처럼 마주 잡아 배 위에 얹은 롤로는, 결국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묻고 만다.
다소 노골적인 질문임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아이렌은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굳이 따지자면 제 사람들 편일걸요.”
이런 대답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롤로는 그리 생각했고, 얄궂게도 그건 말을 꺼낸 당사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제 대꾸가 상대의 혼란을 가중할 뿐이라는 걸 아는 아이렌은 이번엔 좀 더 명확한 언어로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동급생이나 선배들만큼 롤로 선배도 중요하다는 거겠네요.”
그러니까, 자신도 ‘제 사람’이란 말인가.
아군을 정의하는 말을 들은 롤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지었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잖아요. 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가 한 말을 종일 생각하다가 이렇게 물으러 오셨죠.”
“그건…….”
반사적으로 반발하긴 했지만, 롤로는 명확한 반박의 말을 준비해 두진 않았었다.
새하얗게 바란 머리로 저 말을 어찌 논파해야 하나 고민하는 그가 입을 다문 사이.
미궁에 사는 괴물은 길을 헤매는 외부인을 낚아채, 제 입에 넣었다.
“그리고 선배가 누구든지 상관없어요. 저는 그냥 선배가 행복해졌으면 하는 거죠. 아름다운 것이 행복하길 바라는 게 그렇게 이해를 요구하는 일이었나요?”
괴물의 혀는 따뜻했다.
온몸을 감싸는 온기는 어째서인지 따끔거리는 걸 넘어 고통스러울 정도라, 롤로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를 뻔했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밀어(蜜語)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롤로가 무엇에 집착하는지, 어째서 이른 시간에 제게 그 말에 대한 답을 들으러 온 건지 예상해낸 아이렌은 거침없이 제 예측을 토해냈다.
“이 모든 소동이 선배가 무언가에게 속죄하려는 행동의 일환이었다면, 역시 전 선배를 미워할 수 없는걸요. 세상의 불합리함을 지우려는 행동은 원래 다 옳을 수 없죠.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눈앞의 것만 볼 뿐, 본질을 보는 힘이 없거든요.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이라면 애초에 세상이 불합리한 꼴로 이뤄지지 않았을 테고.”
아, 그래서 인간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하는 것인가. 자신은 어떤 의미로든 동떨어진 존재이니, 그렇게 자신과는 관계없다는 듯 지껄이는 것인가.
조금은 눈앞에 있는 존재의 본질을 알 것 같기도 해진 롤로는, 어느새 고통이 사라진 몸을 잘게 떨었다.
자신을 어여삐 여기는 미궁 속 괴물은, 꼭 제 나이대 소녀들처럼 수줍어하며 코 밑을 훔쳤다.
“말이 길어졌네요. 대화를 하자고 불러내신 건 선배였는데, 제가 더 떠들다니.”
“……아닙니다.”
어차피 듣고 싶은 대답은 들었고, 이렇게 건설적인 대화라면 조금 길어진다고 해도 나쁠 게 없다.
롤로는 손수건을 꺼내 제 입을 가리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느끼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기분 탓일까. 슬쩍 스친 제 뺨이, 화상을 입은 듯 뜨거웠다.
‘그럴 리가.’ 굳이 제 뺨을 다시 한번 만져보기보다는 제 감각이 착각한 거라고 믿기로 한 그는 말을 돌리기 위해,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단어를 화두에 올렸다.
“아이렌 군은 원래 그렇게 아무에게나 아름답다고 말합니까?”
“아뇨, 저는 취향이 까다롭거든요.”
“……허.”
다소 오만한 말이지만, 저리 말하는 것도 이해한다. 겨우 3일 본 걸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아이렌은 축제에서도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에는 심드렁해하며 자신만의 멋을 찾고 있었으니까.
롤로는 신기한 마법 도구나 요란한 축제 현장은 관심도 두지 않고, 아이 같은 얼굴로 새끼염소의 귀여움에 대해 떠들던 아이렌을 떠올리고 한쪽 입꼬리만 비쭉 올렸다.
“아. 그리고 말이죠.”
그러나 그 비뚜름한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롤로는 상대는 보이지 않게 감정을 흘려내 보내다가, 갑자기 확 다가온 흰 얼굴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코가 마주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아이렌은, 속삭이듯 작게,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이리 말했다.
“보편적인 기준은 관심도 없다지만, 선배는 여러모로 제 취향이거든요. 얼굴도 성격도.”
아. 손끝이 뜨거워진다.
롤로는 외면하고 있던 열기가 제 얼굴을 덮치는 것을, 이번에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아이렌! 괜찮아? 언제까지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
그때, 저 멀리서 듀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친구의 부름에 자세를 바로 한 아이렌은 부끄러움에 손수건으로 하관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고 있는 롤로에게 물었다.
“혹시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있어도 하고 싶지 않다. 진심으로, 자신은 지금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다.
뇌까지 뜨거워진 롤로는 모든 정신력을 동원해 제 솔직한 마음을 점잖은 형태로 표현해냈다.
“없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갈게요. 아쉽네요, 선배랑 이별하는 것도. 이곳을 떠나는 것도.”
공손하게 고개 숙여 인사한 아이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덕분에 롤로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지 못한 그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기다리는 두 명과 한 마리의 곁으로 돌아갔다.
“아이렌 군,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에펠은 겉보기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친구의 모습을 열심히 훑어보며 물었다. 초조해하는 사랑스러운 얼굴에 어쩐지 죄책감이 든 아이렌은 씩씩한 태도로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응. 너희도 참, 걱정이 많다니까.”
“걱정 안 하게 생겼냐고. 저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데!”
“나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마 세 사람은 그런 것만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건 아닐 테지만, 아이렌은 정말 어떠한 위기감도 느끼지 않았기에 저것 외엔 해줄 말이 없었다.
그는 어느새 걱정은 접어둔 채, 황당하다는 듯 자신을 보는 친구들에게 고갯짓했다.
“자, 가자. 선배들이랑 선생님이 기다리겠어.”
08.
현자의 섬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강당에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지도교사인 트레인이었다.
“다들 돌아갈 준비는 끝냈나? 두고 가는 건 없는지 확인하도록.”
정말로 힘겨운 교류회였지만, 이제는 모든 게 끝이다.
큰 사건을 해결하고 무도회까지 참여한 학생들은 모두 여독이 쌓인 건지 이틀 전에 비하면 기운이 많이 없어 보였지만, 여전히 총명한 눈빛을 잃지 않은 이도 있었다.
“예. 모두 모였고, 준비도 마쳤습니다.”
“아아, 돌아가면 바로 핼러윈 데이 준비를 해야 하다니. 여전히 쉴 틈도 없이 바쁘겠네요.”
“음. 두 사람은 사감이니 일이 많지. 수고가 많겠군.”
공손히 대답한 리들과 한탄하는 아줄을 본 트레인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반 학생들도 핼러윈 위크 때는 이런저런 걸 준비하느라 바빠지긴 해도, 역시 사감이 가장 일이 많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학년의 두 사감이 선생님과 핼러윈 위크 준비에 대해 떠드는 사이.
저 멀리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어 오도카니 떨어져 있던 이데아가 아이렌에게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아이렌 씨, 결국 어제 춤은 한 번도 안 추고 도망 다닌 게 사실?”
그 말을 들은 아이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실버 쪽으로 향했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시선이 향하자마자 실버 또한 아이렌을 힐끔 보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제 유일한 댄스 파트너가 과묵하고 상냥한 사람이라는 것에 감사한 아이렌은 한결 편한 마음으로 능청을 떨었다.
“이데아 선배도 춤은 거의 안 추시지 않으셨나요.”
“하지만 다른 의미로 주목받아서 피곤했습니다만. 아아, 눈에 띄고 싶지 않아…….”
“잘난 남자의 숙명이란 그런 거죠.”
“우왓, 역시 아이렌 씨. 입 안의 혀 그 자체.”
두 사람의 대화는 그리 다정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았다. 그러나 귀가 좋은 이에겐 충분히 거슬린 걸까. 제 종자들과 함께 돌아갈 준비를 하던 말레우스는 불쑥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쉬운 일이군. 너와 춤을 추고 싶었는데.”
말레우스가 누구에게 말하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이데아는 목표물이 된 아이렌을 두고 냅다 아줄의 곁으로 도망가 버렸고, 지은 죄가 있는 아이렌은 구차한 변명은 관두고 솔직하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선배.”
“사과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부디 핼러윈 위크 때는 함께 춤을 춰주면 좋겠군.”
아아, 그때는 또 무슨 변명을 하고 도망을 가나.
저도 모르게 실버 쪽으로 향하는 눈길을 억지로 발끝으로 잡아둔 아이렌은 물 밖으로 건져 올려진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네 녀석. 감히 도련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불손함도 정도가 있지!”
그 침묵이 건방져 보였던 걸까. 말레우스가 가만히 대꾸를 기다리는 와중, 갑자기 대화를 지켜보던 세벡이 버럭 소리쳤다.
고막이 저릿해질 정도로 시끄러운 외침에 아이렌은 번뜩 고개를 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변명은 놀란 것 치고는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었다.
“잠깐, 세벡.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잘 생각해 봐. 감히 내가 말레우스 선배와 춤을 추는 게 옳을까? 선배의 위신을 위해서라도 춤도 못 추고 연고도 능력도 없는 내가 파트너가 되는 게 옳을까?”
“……윽!”
이런 점을 지적할 줄은 몰랐던 건지, 기세 좋게 호통친 세벡이 이를 꽉 물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실버나 릴리아였다면 ‘신분은 중요하지 않다’ 같은 말을 했을지 몰라도, 말레우스의 광신도나 다름없는 세벡은 아이렌의 주제 파악을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세벡을 대신해 입을 연 것은, 이 대화의 주제가 되던 남자였다.
“내 파트너는 내가 정한다.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둬 줬으면 좋겠군, 아이렌.”
“……으음, 네.”
설마하니 당사자가 제 의견을 반박할 줄이야. 이럴 줄은 정말 몰랐던 아이렌은 제법 엄격한 얼굴로 제 말을 다그치는 말레우스 때문에 얼른 사과하고 말았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여러분!”
어쩐지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되려는 그때. 발맞춰 걷는 세 명 몫의 발소리가 다가온다.
트레인은 친절한 미소로 자신들을 부른 노블 벨 칼리지 학생회 부회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돌아가신다니, 정말 아쉽습니다.”
“음. 마중을 나와주다니, 고맙군.”
“당치도 않습니다! 주최 측으로서, 도움을 받은 처지에서, 이 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진실을 모르는 보좌와 부회장은 호들갑에 가까울 정도로 작별 인사를 해왔지만, 롤로 프람은 조각상처럼 굳은 표정으로 형식적인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조심히 돌아가시기를.”
“……그래, 그러도록 하지.”
트레인 또한 괜히 더 할 말은 없는지, 이런저런 말은 접어두고 무난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위선과 가식이 가득한 작별의 현장. 나이튼 레이븐 칼리지의 모두가 매서운 눈으로 롤로를 노려보는 와중. 말레우스만큼은 여유로운 태도로 친근히 인사했다.
“다음에 또 보지, 롤로 프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형식적인 배웅도 했으니 이제 볼일은 끝이다.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모두가 그리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아이렌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선배, 혹시 괜찮으면 편지를 보내도 될까요?”
불쑥 롤로에게 다가가 묻는 아이렌 때문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보좌와 부회장은 얌전해 보이던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홍일점이 적극적인 관심을 표해서 놀란 것이었고, 나머지는…… 굳이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었지.
모두가 자신만 바라보는 걸 알면서도 나름대로 의연함을 유지하는 롤로는, 혹시나 하여 되물어 보았다.
“저에게?”
“예.”
‘그런 건 아까 단둘일 때 물었으면 좋았을 것을.’ 목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롤로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잠깐 고민한 그는 작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답장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낸다면 꼭 읽겠습니다.”
“네, 그럼 보낼게요.”
두 사람의 대화는 평화로웠지만,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비난의 말들이 오갔다. ‘저 뻔뻔한 자식이.’ ‘진심이야?’ ‘아이렌 씨, 대체 무슨 소리를…….’ 걱정과 경악이 섞인 속닥거림을 애써 모른 척한 롤로는, 마치 보라는 듯 아이렌과 눈높이가 맞게 고개를 숙였다.
“부디.”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하도록,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연 롤로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곳에서는 부디 무모하거나 위험한 일은 마시고, 섭생(攝生)하시기를.”
그건 이 남자가 들려줄 수 있는 가장 절제된 호감 표현이었다.
상처로 얼룩진 손을 바라보는 짙은 녹색 눈동자의 그늘 속, 희미한 온기를 포착한 아이렌은 들뜬 목소리로 똑같이 소리죽여 답했다.
“저는 겁이 많아서 위험한 일은 못 해요.”
“……죄송합니다만, 누가 겁이 많다는 겁니까?”
“저요.”
그 말에 동의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적어도, 이 대강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럴 것이다.
롤로는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손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반박했다.
“엉망이 된 손으로 그리 말하는 건, 설득력이 부족할 뿐입니다.”
“보기에 흉해서 그렇지, 그렇게 아프지 않아요.”
“…….”
엄살을 부려주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괜찮다는 말만 하니 기분이 묘하다.
롤로는 마법도 쓰지 못하면서 오지랖이란 오지랖은 다 부리고 다니는 상대가 어이가 없어, 지극히 건전한 충고를 하고 말았다.
“그렇게 무리하다가는 큰 탈이 날 겁니다. 사람의 목숨은 생각보다 훨씬 덧없습니다.”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상식선의 조언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여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규격 외 존재라는 건 확실하다. 그렇기에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조언이 먹혀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롤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덧없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진심이 담긴 조언은 무게부터 다른 탓일까. 아이렌은 롤로의 충고에 잠깐 말이 없더니, 얼마 남지 않은 얼굴 사이의 간격을 더 좁히며 답했다.
“괜찮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튼튼하기도 하고…….”
느릿느릿 움직이던 입술은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다가온 몸이 뒤로 물러선 후에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어 걸음 물러선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대답하는 아이렌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였다.
“저는 죽는 걸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닌데다가, 이 부조리한 세상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바람 소리에도 묻힐 것 같은 작은 목소리로 한 말이지만, 롤로의 귀는 아이렌의 음성을 놓치지 않았다.
‘아.’ 하고 얼빠진 소릴 내버린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대강당의 창문에서 쏟아지는 햇볕이 새까만 머리카락과 제비꽃색 눈동자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난다. 마치 유리 파편이 튀듯, 잘게 반짝거리는 얼굴.
롤로는 서늘한 대답과 어울리지 않는 상대의 표정을 응시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안녕히 계세요, 롤로 선배. 편지할게요.”
정겨운 작별 인사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마치 춤을 추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우들에게 돌아가는 아이렌의 뒷모습은, 침묵하는 롤로의 눈동자에 깊게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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