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일점은 춤추지 않는다 下
올 캐릭터 드림
* 이벤트 ‘글로리어스 마스카레이드’ 엔딩까지의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 말레우스 이벤트 SSR 카드 스토리 네타 아주 약간 들어있습니다.
05.
“꼬붕, 슬슬 무도회 갈 준비를 해야 할 텐데?”
늦은 점심 식사 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포만감에 졸고 있던 아이렌은 그림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어지간히도 무도회가 기대되는 걸까. 아까까진 자신과 함께 졸고 있었던 그림은 언제 옷을 갈아입은 건지 무도회 복장으로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잔뜩 들뜬 발걸음을 눈동자로 쫓던 아이렌은 시계를 확인해 보고 탄식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여유가 있는데. 벌써 준비한 거야?”
“그럼! 이 몸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데!”
저렇게나 신이 나 있다니. 무도회가 취소되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기대감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림에 비하면 침착하기 그지없는 아이렌은 어두워지는 창밖을 힐끔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서, 옷은 갔다 와서 갈아입을게.”
“다녀올 곳? 흐음, 어딜 가길래? 설마 도망가는 건 아니지?”
“무슨 엉뚱한 소리야, 내가 도망갈 곳이 어디 있다고.”
애초에 제가 왜 도망쳐야 한단 말인가. 아무리 춤추기 싫고 사람 많은 곳은 기가 빨려 꺼려진다지만,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조용히 참여해서 벽의 꽃이 되어주면 그만인데. 제가 불참했다간 잡으러 올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님을 아는 아이렌은 괜히 힘 빼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잘 차려입은 그림의 모자를 똑바로 씌워준 그는 곧바로 밖으로 나와, 이 교류회의 인솔 교사를 찾아갔다. 어젯밤 그림과 함께 가장 고생한 트레인의 상태가 걱정되기도 했고, 혹 무도회에 관련해 무어라 지시가 있는 건 아닌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노크 후 방으로 들어간 아이렌을 반기는 건 침대에 앉아 아픈 허리를 달래고 있는 트레인이었다. 조심스럽게 곁으로 다가와 우두커니 서 있는 제자에게 편히 앉으라는 듯 손짓한 그는 상대가 의자에 앉고 나서야 용건을 물었다.
“아이렌 군. 무슨 일인가?”
“선생님이 걱정되어서 들렀어요. 어제 무리하셨잖아요.”
“아하.”
이해했다는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 트레인의 시선이 제자의 두 손으로 향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겹쳐 둔 새하얀 손은 날카로운 시선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아이렌은 어른의 대답을 기다리는 착한 아이의 모습으로, 별다른 움직임 없이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입은 닫고 귀는 열어 둔 제자에게 답했다.
“푹 쉬면 나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것보다 아이렌 군은…….”
“저는 괜찮아요. 상처에 약도 발라뒀고요.”
“……그렇군.”
그 대답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반사작용 같았다.
트레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자신의 몸 상태를 무덤덤하게 설명한 아이렌을 가늘게 뜬 눈으로 살폈다. 오늘 새벽까지 함께 고생했기에 저 ‘괜찮다’라는 말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그는 지나치게 의젓한 이 어린 숙녀가 신경 쓰여서 질문을 멈출 수 없었다.
“아이렌 군.”
“예, 선생님.”
“다른 학생들 방에도 이렇게 들러서 안부를 확인했나?”
“전부는 아니고, 대부분은요. 이데아 선배나 아줄 선배는 좀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지금쯤이면 털고 일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아이렌은 최대한 성심성의껏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을 설명했다. 직접 모두의 상태를 둘러보기 힘든 트레인이니, 제가 이렇게라도 학생들의 안녕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트레인은 꼭 업무 보고 같은 설명을 듣더니,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네가 하고 있구나.”
“예? 아니, 그냥 일어난 김에 한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셔도…….”
“아니다. 나도 사감들만 불러 상황을 전해 들었을 뿐 전부를 챙기지는 못했는데, 오히려 자네가 일일이 돌아보고 왔지 않나.”
아이렌의 행동에는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제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꼭 책임자라도 된 듯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하려 한 이 학생에게 갖는 감정은 미안함과 걱정스러움이 더 컸다.
이제 겨우 16살 소녀면서, 대체 왜 이렇게 책임감이 강한 걸까.
트레인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자네는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힘든 밤을 보낸 후이니 잔소리는 최대한 하고 싶지 않지만, 이건 꼭 말해야겠다. 그는 선생이자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눈앞의 소녀에게 한탄했다.
“어떨 때는 다 큰 어른처럼 굴다가도, 어떨 때는 그 나이대 아이처럼 굴고. 일과 중에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수업에 임하는 것 같은데, 방과 후에는 어김없이 소란에 휘말려 오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어.”
“하하……, 제가 사고를 좀 많이 치기는 했죠?”
“흠.”
묘한 대답을 한 트레인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교내에 일어나는 사고 대부분은 다른 남학생들이 치는 거고, 아이렌은 거기 휩쓸리는 게 대부분이니 이 아이가 사고를 친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고의 원인이 되거나, 기폭제가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니 마냥 부정할 수는 없겠지.
부정도 긍정도 아닌 말로 이 대화를 얼버무린 그는,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아이렌 군. 너무 모든 걸 책임지려고 할 필요는 없네.”
이 아이는 너무 많은 걸 제 손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동안 쭉 지켜본 결과 트레인이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단순히 책임감이 강한 게 아니라, 자신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까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본인은 그런 점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지, 아이렌은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딱히 책임감 때문에 한 일은 아녜요, 저는 그냥…….”
“아니. 이번 일만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야. 예전부터 쭉 하고 싶었던 말이네.”
조금 잔소리가 길어지겠지만, 모처럼 단둘이 있게 되었으니 개인 상담을 해준다고 생각하고 말해도 되겠지.
트레인은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늘 상대에게 품고 있던 걱정을 털어놓았다.
“자네는 늘 혼자서 뭐든 해내려고 하지. 무언가 곤란한 일이 생겨도 상담하거나 묻기보다는 혼자 해결해 보려고 하고, 자신을 챙기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챙기려고 들지 않나. 동급생뿐만이 아니라, 3학년 선배까지 도우려 드는 1학년이 어디 있는지, 원.”
이건 꽤 자세히 관찰해야 말할 수 있는 평가다. 아이렌은 상대가 제 담임 선생님도 아닌데도 이런저런 예시를 쉽게 드는 걸 보곤 멋쩍게 웃었다. 충고를 들어 기분이 나쁜 건 아니다. 다만, 제가 또 누군가를 걱정시켰다는 것 자체가 아이렌을 불편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나이랑 상관없이, 도울 수 있는 건 도우면 좋다고 생각해요.”
“남을 돕는 건 자신을 돌본 후에 해도 되는 일이네, 아이렌 군.”
“저는 아무 문제도 없는걸요.”
상당히 오만한 발언이다. 아마 말을 내뱉은 당사자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멋쩍게 웃고 있는 거겠지. 이 세상엔 완전하고 완벽한 사람도 없고, 누구나 크고 작은 문제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나는 문제 없다’니, 차라리 헛소리 말라며 대드는 쪽이 더 그 나이대 아이다웠으리라 생각하는 트레인이었다.
이제는 제가 학생을 지도하는 건지, 교사랑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완고한 제자를 보며 뜨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정말이지. 남자애들보다 여자애들이 먼저 철이 든다지만, 자네는 어른스러운 게 아니라 애늙은이 같아.”
“칭찬으로 생각해도 되는 거죠?”
“후우, 이렇게 능청 떠는 법은 또 어디서 배운 건지.”
자신도 딸을 둘이나 키워봤다지만, 아이렌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적당히 하려 해도 말 안 듣는 막내딸을 훈육하듯 계속 딱딱한 말이 나오는 트레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상대를 위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을 전해주었다.
“너무 혼자서 많은 걸 짊어지려 하다 보면 반드시 탈이 나네. 기대야 할 때는 믿을만한 이에게 기대고, 한창 놀고 싶을 나이니 틈틈이 노는 것도 잊지 말게. 모든 걸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직 제 탓인 일도 없어. 세상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많은 관계가 복잡한 얽혀 잘 풀리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는 거야.”
“네, 선생님.”
“대답만 하지 말고.”
“……저, 그렇게 말로만 알겠다고 하는 애로 보이나요?”
“흠.”
딱히 유일한 여학생이자 감독생인 그를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영혼 없는 대답을 하는 데다가 워낙 황소고집인 걸 아니 절로 저런 소리가 나오는 거지. 심지어 아이렌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건 다른 학생들도 똑같이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말 믿음직하면서도 걱정되는 홍일점이다. 아이렌은 그렇게나, 모순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학생이었다.
“나도 자식이 있는 누군가의 아버지로서 자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네. 안 그래도 매일 사고뭉치인 사내 녀석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니, 분명 홍일점으로 고충이 있을 터.”
“전혀요. 오히려 다들 사고뭉치인 점이 귀엽다고 생각해요.”
“…….”
그걸 사고뭉치라는 말로 갈무리해도 좋은 걸까. 게다가 귀엽다니. 배짱이 좋은 건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건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트레인은 잠깐 말문을 잃었지만, 아이렌은 오히려 입이 풀린 듯 구구절절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
“그리고 선생님이 하시는 말도, 다 절 생각해서 말씀해 주시는 거라는 걸 알아요. 절대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무리하지 않을게요.”
공손히 인사하는 웃는 얼굴은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모범생의 모습이었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선 드문 그 공경에 결국 두 손을 든 트레인이 사적인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내가 자네 아버지였다면 매일 한숨을 쉬었을 거야.”
“하하……. 한숨으로 그쳐서 다행이네요.”
“당연히 정말 그랬다면 한숨에서 안 끝나지. 무슨 소릴 하는가.”
트레인은 제가 내뱉은 가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만약에’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아이렌이라면 성적 걱정은 그다지 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다소 과격하게 접근하는 제자들이 신경 쓰여 수업이나 제대로 하겠느냔 말이다.
늘 아이렌의 곁을 맴도는 몇몇 학생들과 그들의 접촉 농도를 떠올린 트레인은 어깨를 떨었다. 아무래도 정말 딸을 가진 아버지인 만큼, 이 가정은 상당히 오싹하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질색하는 선생님의 모습에 소리죽여 웃은 제자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마저 쉬세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
“그래. 아이렌 군도 푹 쉬도록. 그림 군도 잘 챙겨주게.”
“예.”
허리 숙여 인사한 아이렌은 방을 나오며 지금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조금 있으면, 모두와 모여 대강당으로 갈 시간이었다.
‘무도회에는 안 오시겠지?’
꽤 허리가 아파 보이셨으니 그대로 쉬시겠지.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조금 부럽기도 하다.
아이렌은 예상보다 멀쩡한 제 몸에 실망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06.
가면무도회가 시작되고, 말레우스가 아줄과 이데아와 함께 미리 준비한 선물을 발표한 후.
아이렌은 한층 뜨거워진 대강당 안의 분위기를 보며 난감하게 웃었다.
‘세상에.’
이런 걸 준비 했을 줄은 몰랐다. 좋은 구경을 하긴 했지만, 이 상황이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다. 안 그래도 롤로가 어제 사건을 해결한 공로를 모두 앞에서 말하는 바람에 주목받아 골치가 아파져 있는 중이었는데, 이걸로 더 이목을 끌게 되지 않았나.
하지만 아이렌이 그저 속으로 한탄하는 것에 그칠 수 있었던 것은, 그 이목은 같은 학교 학생들 모두가 아닌 주로 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말레우스 선배에게 몰려갔네. 뭐어, 다행인가.’
그 말레우스 드라코니아가 자신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줬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아이렌은 옹기종기 모여 말레우스에게 한 마디씩 던지고 가는 다른 학교 학생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자리엔 다른 학교 학생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이런 이벤트가 있을 줄 몰랐던 다른 사람들, 예를 들어 리들과 듀스도 말레우스에게 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으니 말이다.
‘모두 즐거워 보이니, 그걸로 된 거지.’
이런저런 장식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홀과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학생들은 명화에서 나올 듯 아름답고, 무도를 위해 준비된 음악은 고막이 녹아내릴 듯 호화롭고도 감미롭다. 우여곡절 끝 열린 무도회는 웃음소리와 기쁨이 넘쳐흘렀지만,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홍일점이 하는 일이라고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앉아 이 모든 걸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정신 사나워…….’
이곳이 싫은 건 아니다. 단지, 자신은 사람이 너무 많은 걸 견디지 못할 뿐이다. 아이렌은 길게 숨을 내뱉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사람들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신경 쓰여서 가만히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찌나 기가 빨리는지. 본능적으로 타인을 간파하는 이 여자에게 이토록 많은 인파는 생각의 과부하를 일으키게 하기 마련이었고, 그랬기에 웬만하면 이런 모임은 오고 싶지 않았지만, 문제는 아이렌의 책임감이 그리 얄팍하지 않다는 것에 있었다.
주최 측에서 기껏 의상까지 맞춰주었고 모두가 참여하는 행사인데 자신만 빠진다?
그런 불손한 짓을 저지르느니, 그냥 통제할 수 없는 제 통찰력이 고통받는 쪽을 고르는 게 낫다. 무엇보다 제가 빠지면 억지로라도 끌고올 사람들이 있으니, 괜한 저항은 시간 낭비일 뿐이지. 아이렌은 그리 판단했기에 지금까지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벽의 꽃이 되는 걸 선택했다.
‘일단 자리를 옮길까.’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있다 보면, 또 누군가 다가와서 말을 걸게 뻔하다. 무도회장에 온 후 ‘네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감독생이구나!’라는 말로 시작하는 춤 권유만 스무 번 넘게 들었던 아이렌은 만약을 위해 무작정 다리를 움직였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걸까. 가까이에서 차분하고도 익숙한 미성이 들려왔다.
“아이렌.”
도망치듯 후다닥 움직이던 아이렌은 제게 다가오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 급히 멈춰 섰다.
리들과 듀스와 함께 나타난 말레우스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아이렌의 눈에는 그의 즐거워하는 표정이 훤히 보였다.
“말레우스 선배.”
“혼자인가?”
“예, 그림은 어딜 갔는지 보이질 않아서…….”
어차피 여기저기서 먹고 마시며 놀고 있겠지. 미아가 되진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굳이 당장 찾을 필요는 없을 거다.
파트너가 사라졌음에도 초조함 없이 느긋해 보이는 아이렌을 본 듀스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이 틈에 휴식해야 하는 거 아냐? 아, 생각해 보니 아이렌은 춤춘 적이 없으니 계속 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려나.”
“하하…….”
‘이 녀석. 지금 자기랑 춤 안 춰준다고 심술부리는 건가.’ 평소보다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이렌은 머릿속으로 그리 모난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곤란한 말에 시선을 피하며 억지로 웃는 아이렌이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리들은 아이렌을 위해 기꺼이 화제를 전환해 주었다.
“우리는 방금 말레우스 선배와 ‘소원이여 울려라’ 노래에 대해 말하고 있었어.”
“그러고 보니, 아이렌의 감상도 듣고 싶은걸? 넌 방금 드라코니아 선배의 발표를 어떻게 들었어?”
아, 갑자기 감상을 묻는 듀스 때문에, 안 그래도 무거워진 머리가 가볍게 지끈거린다.
두뇌 회전이 느려진 아이렌은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않고 말레우스를 힐끔 보더니, 정제된 말을 좋아하는 그답지 않게 당장 느낀 바를 토해냈다.
“굉장히 즐겁게 부르시는 것 같아 보기 좋더라고요.”
“즐겁게? 내가?”
생각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솔직한 대답에 말레우스는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은은하게 웃어 보였다.
“……늘 생각하지만, 너는 날 제대로 보고 있군. 확실히 마음을 담아 노래하는 건 즐거웠어.”
보아하니 과부하 상태라 해도, 아이렌의 통찰력은 제대로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한 당사자는 말레우스가 기뻐하는 걸 신경 쓸 틈도 없이, 제가 말실수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홍련의 꽃이 나타났을 때는 이 모든 게 중지되는 것까지 각오했지만……. 전원 무사하고, 무도회도 참가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죠. 무엇보다 무사한 게 제일이니까요.”
틀에박힌 대답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렌은 정말 그걸로 족했다.
다들 무사하게 즐길 수 있다면 그걸로 됐지. 그 이상을 생각할 건 없다. 그 외에 대체 무엇이 중요한가. 그러니 아무 문제도 불만도 없는 그였지만…….
“아이렌이여, 지금부터 나와 함께 춤추지 않겠나?”
상냥하고도 정중하게 내민 커다란 손에, 안일한 소릴 하던 정신이 번뜩 깨어나고 말았다.
말레우스의 제안에 헛숨까지 삼킨 아이렌은 반사적으로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죄송해요. 저, 그림을 찾으러 가봐야 할 거 같아서.”
“갑자기?”
“갑자기가 아녜요. 방금까지도 그림을 찾아 돌아다니던 중이었고…….”
일부만 감추고 모든 걸 털어놓지 않거나 빙빙 돌려 말하는 재주는 있을지언정, 남을 속이는 건 싫어하는 아이렌이 이런 속 보이는 거짓말까지 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춤추는 것도 주목받는 것도 싫은 그는 이 제안을 도무지 승낙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딱 잘라 거절하면 될 걸 어째서 거짓말까지 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가시의 골짜기의 차기 당주가 쥐뿔도 없는 여자애한테 춤 신청을 거절당하면, 그건 엄청난 추문이 되지 않겠나. 제가 오물을 뒤집어쓰는 건 몰라도, 지인의 명예를 더럽힐 순 없는 아이렌에겐 결국 거짓말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그, 그러니까. 저어, 그림을 찾고 나서 나중에 춰요! 그럼, 이만!”
“아.”
그리도 지쳐있었으면서 대체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건지, 아이렌은 평소라면 절대 나오지 않을 속력으로 달려서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사람들 틈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며, 최대한 멀리 도망친 그가 도착한 곳은 대강당 밖 복도였다.
시끌벅적한 내부와 달리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쓸쓸한 복도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과 별빛이 대강당에서 새어 나오는 인공적인 조명과 섞여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짓말인 거 다 티 났겠지?’
다 안다. 제가 생각해도 방금 거짓말은 너무 형편없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서서 되는대로 변명했으니 누구도 속지 않았으리라.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아이렌은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아 무릎을 껴안았다.
“하지만 싫은 건 어쩔 수 없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말레우스 선배랑 춤이라니. 눈에 띄는 것도 정도가 있지. 하아…….”
‘거절도 일이라니까, 정말.’ 아이렌은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머리에 쓴 보닛 모자와 가면이 불편하고 거슬렸지만,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 그런 자잘한 걸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서 사라지면 좋겠다.”
다소 극단적인 소리까지 중얼거리는 아이렌은 허파를 토해내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일까. 아까까지는 분명 괜찮았는데, 이제는 사지까지 아팠다.
내부에서 요동치는 감정과 통증에 숨이 막혀오는 아이렌은 최대한 외부의 자극을 받지 않으려고 제 호흡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그는 조용한 발걸음이 제 옆에 멈출 때까지 타인의 인기척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아이렌?”
“꺄악!”
나름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건 것이지만 결과는 소용없었다. 실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아이렌을 보고, 저 자신도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유령이랑 만난 듯 식겁했던 아이렌은 제게 말을 건 이를 금방 알아보고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 실버 선배.”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어딘가 아픈가?”
팔다리가 조금 욱신거리고, 머리가 웅웅 울린다. 그러니 ‘그렇다’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렌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이 정도의 고통은, 그냥 견딜만한 아픔일 뿐이었으니까.
“아픈 곳은 없어요. 그냥 쉬러 나온 거라.”
“아하, 그런가.”
실버는 아이렌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상대가 그렇다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그는 꼬치꼬치 자세히 캐묻지 않았지만, 대신에 다른 질문을 던져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표정이 안 좋은데.”
아픈 게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아 걱정된다. 게다가 제가 말을 걸기 전까지 누가 오는 줄도 모르고 맨바닥에 웅크려 앉아있지 않았나. 아픈 게 아니라면, 뭔가 곤란한 일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그리 판단해 물은 실버는 생기가 없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올곧은 오로라 색 눈동자가 보내는 시선에 저도 모르게 지친 마음에 틈이 생긴 아이렌은 벽에 몸을 기대고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이윽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싫은 소리를 게워냈다.
“오지 말 걸 그랬나 봐요.”
“응?”
“무도회 말이에요. 괜히 와서 춤도 안 추고 여기저기서 권유하는 걸 거절하며 도망치고 다니자니, 뭐하러 왔나 싶어요. 제가 빠진다고 큰일 나는 행사도 아닌데.”
처음엔 저 혼자 빠지는 건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라 생각해서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빠진다고 무슨 큰일이 있겠는가. 특별한 선물을 준비한 것도 아니고, 먹고 마시며 즐기지도 못하고, 춤조차도 추지 않는데. 심지어 자신은 마법사도 아니다.
사실 없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텐데 뭐라도 된다는 듯 마음대로 의무감을 가지고 출석해, 도리어 자리를 불편하게 만든 게 아닐까. 아이렌은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 숨이 턱 막혀왔다.
머릿속에 고여있던 생각을 말로 정리한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진 얼굴을 실크 장갑을 낀 두 손으로 쓸었다.
“……죄송해요. 괜한 소릴 해서.”
“음? 왜 사과하는 거지?”
“그거야, 선배에게 투정 부리고 말았으니까…….”
‘진짜 먼지가 되면 좋겠다.’ 입 모양만으로 중얼거린 아이렌은 속내를 털어놔 시원해하기는커녕, 혹 제 말이 실버를 불편하게 한 건 아닐지 걱정했다.
아아. 그냥 입 닥치고 늘 하던 대로 괜찮다고 할 것이지. 왜 쓸데없는 소릴 한 걸까. 이게 다 지쳐서 그렇다. 하지만 그건 변명이 되지 않을 텐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 아이렌은 황급히 방금 말은 잊어달라 간청하려 했지만, 표정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상대를 눈치챈 실버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아이렌, 혹시 춤을 추면 안 되는 중요한 이유라도 있나?”
상당히 뜬금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렇게나 질색하니 궁금해할 수도 있다곤 생각하는 아이렌이었다.
실버의 말 덕에 생각의 고리가 잠깐이나마 끊어진 그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어요. 그냥, 잘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뿐이에요.”
“으음. 그런가.”
우두커니 서서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실버는, 당장에라도 다시 주저앉거나 저 멀리 달아나 버릴 것 같은 아이렌에게 한 걸음 다가가 눈을 맞췄다.
평소에는 잘 닦은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오늘따라 광택이 없다.
가까이서 보니 더 힘들어 보이는 아이렌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뻗은 실버는, 가볍게 양팔을 붙잡아 휘청이는 몸을 잡아주었다.
“네가 싫다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본다. 반드시 춤을 춰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양해를 구하고 돌아가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지. 다들 이해해 줄 거다.”
참으로 다정한 위로다. 보통은 이런 말을 듣는다면 감동했겠지만, 오늘의 사교성을 모두 소모한데다가 습관적으로 말의 뒷면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아이렌에겐 진심을 담은 위로는 잘 듣는 약이 되질 못 했다.
‘아. 괜한 소리를 해서 결국 이런 위로까지 받아내다니, 이 얼마나 형편없는 짓인가.’
제가 올곧고 순진한 실버를 이용한 게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던 아이렌은 입술만 물어뜯다가, 생뚱맞은 소릴 꺼냈다.
“선배는 저랑 춤추고 싶어요?”
대체 생각이 어디까지 흘러가야 저런 말이 나오는 거지.
실버는 너무나도 뜬금없는 질문에 속을 알 수 없는 이 후배가 더 신기해졌지만, 그 생각의 길의 지도를 알려달라는 요청은 하지 않았다.
“갑자기?”
“갑작스럽죠? 근데 다들 권유하길래, 궁금해서요.”
‘다들 권유하길래.’ 그 말에 실버가 작게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아이렌과 춤을 추고 싶어 했지. 세벡은 그다지 관심 없어 했지만, 제가 모시는 주군은 꽃의 거리에 오기 전부터 감독생과 함께 춤을 추고 싶다고 말했으니까. 아줄도, 리들도, 러기도 쟈밀도……. 아니, 이렇게 나열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모두가 한 번쯤은 아이렌과 춤을 추고 싶어 했다. 평소엔 절대 스텝을 밟지 않는 홍일점이지만, 무도회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은 채 말이다.
“네가 싫다면 굳이 권유하고 싶진 않아.”
“그럼 제가 괜찮다면요?”
“그렇다면…….”
그리고, 참으로 얄궂게도.
실버 자신 또한, 분명 그런 생각을 했었다.
“추고 싶어.”
실버는 솔직하게 제 욕망을 답해주었다. 이 대답이 아이렌에게 부담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참과 거짓을 잘 구별하는 이 후배를 상대로 괜히 거짓말을 하는 건 서로에게 득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아이렌은 크게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고, 한층 침착해진 목소리로 질문할 뿐이었다.
“이유를 묻는 건 좀 센스 없겠죠?”
“나는 딱히 상관없다만……. 궁금한가?”
목소리로 답하진 않았지만, 그는 분명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궁금하다면 답해줘야지. 그리 어렵거나 곤란한 질문도 아니니 못 해줄 것도 없다. 실버는 그리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즉답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있다. 그러나, 이걸 어떻게 말로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리하고, 침착하고, 어떤 면에서는 명석하기까지 한 그이지만 옳고 그른 것으로 딱 나눌 수 없는 감정에 관해서는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안 그래도 피곤한 아이렌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그는 제 모든 어휘력을 끌어모아 행동의 근원이 된 감정을 구체화해냈다.
“너와 춤을 추는 건 특별한 경험이 될 것 같아서. 즐거울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기억에 남는 일이 될 것 같다.”
이건 그가 내뱉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세련된 말은 아니지만, 진심이 듬뿍 담긴 진솔한 대답말이다.
속뜻 따윈 없는 견실한 답의 위력은 대단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대로 픽 쓰러질 것 같던 아이렌은 실버의 말을 듣곤 목을 꼿꼿이 세우더니, 혈색이 돌아온 얼굴로 멋쩍게 웃었다.
“저는 춤을 엄청 못 추는데도요? 즐겁지 않을 거예요.”
“실력이랑은 상관없어. 너랑 함께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네게 춤을 권하는 거겠지. 좋아하는 이와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은 건 자연스러운 욕구라 생각한다.”
“…….”
뭐든 지나치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고 하던가. 아이렌은 지금 딱, 그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진솔한 언행으로 좋아하니 마니 하는 남자가 있다니. 저 좋다는 의미가 꼭 연애적 의미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조각상 같은 얼굴로 저리 말하니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창백했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아이렌은 횡설수설 변명하듯 반박했다.
“실수로 발을 밟아버릴 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 밟을걸요.”
“괜찮다.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지 않나?”
“전 생초보라 리드하는 것도 힘들 테고.”
“나도 그렇게 춤이 능숙한 건 아니야.”
참으로 멋진 받아치기다. 혹시 이 사람은 검술뿐만이 아니라 언쟁하는 법도 교육받은 게 아닐까.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훔친 아이렌은 오래 농성하지 않고 침묵하는 걸로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입을 꾹 다물고 붉어진 얼굴을 문지를 아이렌을 보던 실버는, 그제야 아이렌이 왜 제게 이유를 물었는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아이렌, 혹시 춤을 추고 싶나?”
제 예측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속 시끄러운 이 후배가 굳이 불편한 주제를 먼저 꺼내고 이유까지 물었다면 다 이유가 있을 거다.
실버는 그리 직감했고, 아이렌은 그 예측에 동그라미를 그려주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고, 이렇게 차려입은 이상. 역시 한 번은 추고 싶어요.”
아이렌은 기어들어 가듯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지만 남들에게 뚝딱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으니, 역시 됐어요. 딱 한 번 추는 거라면 한 명하고 밖에 못 추니까, 뭔가 공평하지 못한 느낌도 있고.”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나?”
“그거야,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웃음거리가 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걸 감수해야 할 만큼 간절하게 춤추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남들에게 주목받기 싫다는 이유로 하고 싶은 걸 포기하기엔, 인간의 삶이란 너무 짧지 않을까.
요정의 손에서 길러졌기에 자신들의 수명이 얼마나 덧없는지 아는 실버는, 망설이는 후배를 위해 명쾌한 해결책을 내어주었다.
“그럼, 여기서 출까.”
“예?”
“여기라면 너랑 나 단 둘뿐이니까. 희미하지만 음악도 들려오니, 춤을 출 수 있을 거다.”
제 나름 그럴듯한 대안을 내었던 실버는 문득 이 제안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자신과 춤추는 것으로 가정하고 말한 걸 떠올리고, 급히 말을 정정했다.
“혹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추고 싶다면…….”
“아뇨!”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던 걸까. 아이렌은 딱 잘라 말을 끊고, 제 팔을 잡은 손을 꽉 맞잡았다.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실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선배랑 추고 싶어요. 선배랑 할래요. 제 파트너가 되어주세요.”
얼굴을 가까이하고 부탁하는 아이렌은 그렇게 간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아마 그동안 춤 신청을 거절당한 이들이 본다면, 자신들이 헛걸 본 건 아닐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정말 자신으로 괜찮은 걸까. 굳이 한 명 골라야 한다면, 말레우스 님이 파트너가 되는 게 맞지 않을까.’ 어째서 아이렌이 이렇게 단호하게 자신을 선택한 건지 알 수 없는 실버는 주군의 얼굴을 떠올리고 멈칫했지만, 생기를 되찾은 제비꽃색 눈동자 앞에서 나오는 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래.”
시원시원한 대답에, 아이렌이 안심한 듯 웃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추게 될 춤이라면, 제 속내를 알아버린 이와 추는 게 그로서는 마음이 편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이 고민을 또 구구절절 털어놓는다면, 그건 피해자만 한 명 더 생기는 꼴이 되지 않나.
어차피 실버도 자신과 춤추고 싶다 하였으니, 그와 춤 추는 게 모두에게 이득일 거다.
그리 판단한 아이렌은 실버의 손에 이끌려, 넓은 복도의 한 가운데로 이동했다.
“기본은 알고 있지?”
“네. 기본만 아는 거지만요.”
“그거면 충분해.”
다음 곡이 시작하기 전 자세를 잡은 두 사람은, 호흡을 가다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두 사람의 모자 끝을 살짝 흔들고, 맞잡은 손의 체온이 비슷해질 즈음.
닫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실버의 발이 먼저 움직였다.
‘우와.’
서툴게 발놀림을 따라가며 몸을 움직이던 아이렌은 춤이 시작한 뒤 한동안은 발밑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자신을 배려해 주는 것인지 느릿느릿 쉬운 스텝만을 밟는 실버 덕에 곧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그가 소리 없이 감탄한 건, 눈앞의 남자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뚝뚝하게 자신을 리드하는 실버의 얼굴은 진중하지만 심각하지는 않았다. 희미한 빛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은발과 가면 아래에서 빛나는 오팔 같은 눈동자. 날렵한 콧날과 턱선은 신이 빚은 듯 완벽하고, 살짝 벌어진 입술은 가늘고 매끈하여 성스러울 정도로 청순한 외모에 묘하게 농염한 분위기를 더했다.
그가 잘생긴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그야말로 왕자님 같다.
지인 중 진짜 왕자가 둘이나 있음에도 그런 생각이 불쑥 든 아이렌은 예술품 같은 상대의 얼굴을 응시하며 무방비하게 웃었다.
“헤헤.”
그건 그야말로 아이 같은, 걱정도 고뇌도 없는 순수한 웃음이었다.
언제나 짐짓 다 큰 어른처럼 의연하게만 웃어 보이는 게 보통인 아이렌이 이런 미소를 보여주는 건 너무나도 드문 일이다. 이 후배와 긴밀하다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는 실버는, 어쩐지 숨이 턱 막혀 스텝이 꼬일 뻔했다.
뜻밖의 모습에 놀란 건가?
아니면, 이렇게 가까이서 아이렌의 얼굴을 오랫동안 본 건 처음이라 어색해서 그런 걸까?
이 가슴의 답답함이 무엇 때문인지 혼란스러운 그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불쑥 생각난 말을 툭 내뱉었다.
“나쁘지 않은걸.”
“예?”
“네 춤. 그렇게 나쁘지 않아.”
칭찬이라기 보다는 위로같은 말이지만, 아이렌은 그걸로도 충분히 기쁜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아이 같은 미소는 감추고 다 큰 처녀처럼 새침한 표정을 지은 그는 도로 구두 끝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마워요, 실버 선배.”
“음.”
이런 걸 귀엽다고 하는 걸까. 실버는 늘 어른스러워만 보이던 홍일점의 색다른 모습에, 제 마음대로 그런 감상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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