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스토리 드림

홍일점은 춤추지 않는다 中

올 캐릭터 드림

* 이벤트 ‘글로리어스 마스카레이드’ 엔딩까지의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03.

 

노블 벨 칼리지에 돌아온 리들은 몇 번이고 아이렌에게 휴식을 권했다. 밤에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어제 그렇게 무리해 놓고 몇 시간 자지도 않는 건 현명하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아이렌은 그 제안에 몇 번이나 알겠다고 답하고 리들과 광장에서 헤어졌다. 하지만 현명한 리들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이 교활한 후배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도 자진해서 진실을 말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혼자 남은 아이렌은 그림이 혼자 잠들어 있는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다른 이들의 숙소를 들러 모두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젯밤은 누가 더하고 덜하고 할 것 없이 모두 무리했으니, 혹 탈이 난 이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오, 마드모아젤 르나르. 내가 걱정되어 와준 건가?”

 

루크는 조금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크게 아픈 부분은 없어 보였다. 너무 늦지 않게 일어나 몸가짐을 가다듬은 그는 아직 잠들어 있는 에펠의 몫까지 아이렌을 반기고 걱정해 주었다.

 

“아무래도 걱정이 안 될 수 없어 온 거긴 한데……. 역시 사냥꾼은 체력이 좋아서 그런지 금방 회복하나 봐요?”

“후훗. 평소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덕이지. 사실 나로선 네가 더 걱정되기도 하고.”

“저는 괜찮아요. 잠도 어느 정도 자두었고, 영양 보충도 해뒀거든요.”

“그건 다행인걸? 그래도 무리하면 안 되니, 무도회까진 쉬어두는 게 어떨까?”

 

또 무도회 이야기인가.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입이 삐죽 튀어나왔지만, 못 이긴 척 알겠다는 답을 하고 다른 이를 살펴보러 갔다.

이데아는 종탑을 오르내리는 것에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것인지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피곤해 죽으려는 이를 깨우는 취미는 없는 아이렌은 곧바로 아줄의 방으로 향했다.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다리를 쓰는 일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아줄은 도무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지만, 그래도 잠에서 깬 지는 좀 되었는지 피곤한 얼굴로 아이렌을 맞이해 주었다.

 

“이런 꼴로 맞이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이렌 씨.”

“괜찮아요. 어디 아프신 곳은 없나 해서 찾아온 거니, 편하게 누워 계세요.”

 

절망적인 체력을 가진 아이렌은 아줄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기에 그를 반쯤 강제로 침대에 눕혔다. 웬만하면 어느 정도 갖춰진 모습으로 상대를 대하고 싶은 아줄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가만히 침대에 누워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할 뿐이었다.

 

“아이렌 씨는 괜찮습니까? 어제 보니 손이 엉망이던데.”

“괜찮아요. 금방 낫겠죠.”

“…….”

 

아이렌의 ‘괜찮다’라는 대답은 신빙성이 없다. 아줄 아솅그롯은 그간 수많은 일을 겪어오며 이 여자가 말하는 괜찮음이 보통 사람들에겐 늘 괜찮지 않은 일이었음을 학습한 후였기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상대의 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반창고 하나 붙어있지 않은 손은 자잘한 상처들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억센 풀과 뿌리에 베이고 찢긴 손바닥과 손등엔 붉은 흔적들이 한가득 새겨져 있었지만, 아이렌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입에 익숙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약은 바르시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당연하죠. 연고 발랐어요.”

 

희미한 연고향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듯 하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걸까?

아줄은 총체적 난국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복잡해지는 제 머릿속을 정리하려 노력해 보았지만, 피곤한 머리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결국 생각하기를 관둔 그는 큰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제 눈 위를 덮었다.

 

“피곤하시진 않으십니까? 당신도 어제 무리하셨잖습니까.”

“피로회복제 챙겨 먹었어요. 나중에 하나 더 먹어두려고요.”

“약물로 버티는 건 현명하지 못합니다만.”

“사회생활이라는 게 다 그렇죠, 뭐.”

 

저게 16살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아줄은 어이가 없어서 손을 치우고 상대와 눈을 맞추었다.

평소보다는 나른한 느낌이 강한 제비꽃색 눈동자는 따뜻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디 아프신 곳은 없죠? 어제는 정말 고생하셨어요. 저녁까지 푹 쉬세요.”

“……하아.”

“어라. 왜 한숨 쉬세요?”

“그냥, 당신도 참 대단하다 싶어서 말입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이렌은 분명 자신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생의 방을 드나들며 안부를 확인하고 왔거나, 지금부터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본인도 피곤할 텐데 대체 저런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신기하다. 몸의 피로는 둘째치고, 정신적 피로도 상당할 텐데 말이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도 어차피 듣지 않을 테지만, 무리하지 마십시오. 아이렌 씨.”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선배. 그런데 무리한 적 없어요.”

 

단호한 아이렌의 대답에 아줄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 보면 이 여자도 참으로 말도 안 통하고 다루기도 힘든 후배라는 생각이 든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 두고 싶지만, 어디 그게 가능할 리 있나. 아이렌은 제게 늘 자애로운 사람이었고, 무엇도 받아 가지 않고 베풀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이 세상 모든 건 주고받는 게 기본임을 아는 그에게 있어, 제게 모든 걸 베푸는 이가 아무 것도 받으려 들지 않는 건 세계관의 법칙이 무너지는 중대한 문제 사항이었다. 하지만 뭘 어쩌겠나. 관대한 듯 완고한 아이렌에겐 강요는 통하지 않는다. 결국 최대한 간접적으로 상대를 챙겨줄 수밖에 없게 된 아줄은 이번에도 제 나름대로 아이렌을 돌보려고 해봤다.

 

“무도회는 오실 겁니까?”

“……가긴 갈걸요.”

“춤은 추지 않을 거라는 말이군요.”

 

잘 알면서 뭘 묻느냐는 듯 아이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다.

아줄은 그 장난스러운 미소에 저도 모르게 웃어버릴 뻔했다가, 급히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저랑 한 곡 춰주셨으면 했는데.”

“으음, 선배 발이 남아나지 않을걸요. 예쁜 구두에 제 발자국이 잔뜩 남으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제가 잘 끌고 가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참으로 잘 빠져나간다. 아마 플로이드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이제부터 아기새우가 아니라 미꾸라지라고 불러야겠다’라고 웃었을 거다. 아줄은 질색하고 싶은 걸 겨우 참고 대화하는 아이렌이 황당하면서도 우스웠고, 제가 생각해도 좀 어이없지만, 확실하게 ‘귀엽다’라고 느껴져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다.

 

“춤은 그럼 그렇다 치고, 무도회는 확실하게 오실 거지요? 기운 없는 모습을 보이면 모두가 걱정할 테니 낮잠이라도 자고 오시는 쪽을 추천하겠습니다. 타인을 신경 쓰이게 하는 건 당신도 싫지요?”

“네. 그러도록 할게요.”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요. 당신은 늘 알겠다고 하고 행동은 따르지 않곤 하지 않습니까.”

“하하.”

 

정직하지는 않아도 거짓말을 하는 건 싫어하는 아이렌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잔소리하려 하는 아줄의 이불을 고쳐 덮어준 아이렌은 ‘말하신 대로 자러 간다’라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피곤해 보이나?’

 

다음엔 실버에게 가볼까 했던 아이렌은 근처 유리창에 제 모습을 비춰보고 한숨 쉬었다.

아직 돌아볼 이들이 많이 남았는데, 이래서야 들리는 곳마다 잠은 자는 거냐는 소리를 들을 거 같다. 어디 그뿐인가. 춤이랑 무도회 이야기도 너무 들어서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다.

 

‘배부른 고민이라는 건 알지만 말이지…….’

 

자신은 그냥 내버려 두고 본인들끼리 즐겁게 놀아도 되는 데 굳이 권유해주고 함께하자 해주는 건 대단한 관심이고 친절이다. 아이렌은 그걸 잘 알면서도, 그들의 호의에 호응해 줄 수 없는 자신이 싫었다. 하지만 가장 문제인 건 이유 있는 자책감이 아닌, 호의를 거절해서 미안하고 불편한 주제에 정작 춤을 추는 쪽이 더 싫어 이 찝찝한 감정을 그냥 견디고 있는 제 고집이었다.

이런 고집불통이 또 어디 있을까. 하지만 역시 싫은 건 싫은 거다. 타인도 저 자신도 속일 순 없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아이렌은 결국 계속 고집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하아.”

“어라, 아이렌 군?”

“응?”

 

유리창 속 자신을 마주 보며 한숨 쉬던 아이렌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배가 고파서 나온 거였을까. 먹을 걸 한가득 들고 있는 러기와 그 옆에서 같이 걷던 쟈밀은 어두운 표정의 아이렌을 보곤 저마다 걱정의 말을 던졌다.

 

“왜 그러는 검까?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 애초에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네 숙소는 반대 방향 아냐?”

 

‘아…….’ 어디서부터 대답해야 할지 몰라 탄식하던 아이렌은 결국 지금까지 해왔던 흔해 빠진 말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렇게 말해도, 뭐가 괜찮은지조차도 모르겠습니다만…….”

 

러기는 영혼 없는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렌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피곤해 보였다. 그나마 영양제라도 먹어 이렇게 피곤한 상태로 돌아다니는 거지, 사실 아이렌의 평소 체력을 생각하면 온종일 뻗어 잠만 자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저주받았다 해도 좋을 아이렌의 체력을 잘 알고 있는 러기와 쟈밀은 조용히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냅다 비어있는 홍일점의 양팔에 제 팔을 하나씩 끼웠다.

 

“어?”

 

마치 연행당하듯 오른쪽 팔은 러기, 왼쪽 팔은 쟈밀에게 잡힌 아이렌은 무력하게 제 숙소로 끌려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제 나름 팔을 빼보려고 하기도 하고 다리 힘만으로 버티는 짓도 해본 한 아이렌이었지만, 움직이는 것보단 앉아서 하는 일을 좋아하는 여자가 운동부 소속의 남자 둘을 힘으로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들어가서 주무세여. 어차피 또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어서 이리저리 돌아보고 다녔던 거 아님까?”

“러기 선배, 혹시 리들 선배한테 뭔가 들었어요?”

“아뇨? 딱 봐도 알 수 있습니다만.”

“…….”

 

러기의 단호한 말에 할 말을 잃은 아이렌에게 결정타를 먹인 건 쟈밀이었다.

 

“넌 네 걱정이나 하고, 잠이나 푹 자둬. 분명 무리해서 일어나 어제 실수하거나 놓친 건 없는지 걱정되어 돌아다니고 있었겠지. 네 체력 수준을 생각해보면, 밤새 풀을 뜯으러 돌아다니고 트레인 선생님까지 부축하고 다녔는데 벌써 깨어나서 돌아다니는 게 가당키나 한지.”

“혹시 사실을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고소가 가능한 사실을 아시나요, 쟈밀 선배?”

“고소해봐야 내가 승소할걸.”

 

당당하게 답한 쟈밀이 숙소 문을 열자, 깔끔하게 정리된 방과 아직 꿈나라에서 여행 중인 그림이 보였다. 러기는 정리된 침대 위에 아이렌을 앉혀두고, 최대한 소리 죽여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괜한 걱정하지 말고 제발 주무세여. 저희 다 무사하고, 지금 제일 걱정되는 건 아이렌 군이니까.”

“제가 그렇게 짐이 되었나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여? 솔직히 저희 중 제일 체력이 약한 건 아이렌 군이고, 손이 그 지경이 될 정도로 풀을 뜯고 다닌 걸 아는데 조금만 자고 돌아다니는 걸 보면 걱정이 안 되는 게 이상하죠.”

 

이렇게까지 설명해도 잠들지 않겠다고 하면 에펠을 깨워 강제로라도 재워버려야겠단 생각을 하는 러기였다. 참고로 옆에 있는 쟈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졸음과 불만이 반쯤 섞인 얼굴로 자신들을 올려다보는 아이렌에게 단호하게 충고했다.

 

“지금 잠들지 않는다면 오늘 저녁 무도회에서 네 의사와 관계없이 잔뜩 춤추도록 만들어 주겠어. 어차피 남들 눈에는 네가 직접 수락한 것처럼 보일 테니 이상하게 보진 않을 거야.”

“아니, 잘게요. 잘 테니까 제발 그것만은.”

“정말이지?”

“정말이긴 한데,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당연하지.’ 쟈밀과 러기가 시선으로 그렇게 대답하는 덕분에, 아이렌은 얌전히 재킷과 신발을 벗고 자리에 누울 수밖에 없었다.

 

“잘 자요 아이렌 군. 나중에 무도회서 봐여.”

“네…….”

“혹시 못 깨어날까봐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시간이 늦어도 일어나지 않으면 깨우러 와줄 테니까. 그러니 그냥 푹 자.”

“예, 예.”

 

두 사람은 그림이 깨지 않게 조용히 나가면서도 몇 번이고 아이렌에게 확인차 말을 건넸다. 아이렌은 집요하다고 해도 좋을 두 사람의 걱정에 마냥 웃을 수는 없었지만, 저 모든 게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임을 알았기에 불평하기 보다는 정말로 잠을 청하는 쪽을 선택했다.

편한 자세로 고쳐 누운 아이렌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편안함에 금방 적응해 나른해지는 몸과 달리,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듀스는 괜찮을까. 리들 선배 눈치가 보여서 가보진 못했는데, 무도회에 갈 시간쯤에는 일어나겠지?’

 

디어솜니아의 세 사람도 좀 걱정되는데, 낮잠을 자고 난 후 시간이 남으면 찾아가 보는 게 좋을까. 괜히 찾아갔다가 세벡에게 쫓겨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아이렌이었다.

무도회에 가면 무슨 핑계를 대며 춤 권유를 피해 다닐까. 주목받는 건 질색인 자신과 달리 그림은 신나서 날뛰겠지. 그러고 보니 롤로 선배는 괜찮을까.

꼬리를 물고 이어가는 생각에 집중하던 아이렌은 어느새 잠들었다. 만약 이 상황을 리들이나 러기, 쟈밀, 아줄이 알았다면 굉장히 기뻐했겠지만……. 문제는 이 잠이 오래 이어지진 못했다는 거였다.

 

“으으, 꼬붕.”

 

그가 깊은 잠에 빠져들고 얼마나 시간이 들었을까. 해가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 즈음.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그림이 슬금슬금 아이렌에게 다가가 미동도 하지 않는 몸을 흔들었다.

 

“꼬붕, 나 배고프다고……. 일어나서 밥 좀 가져오라고…….”

“으응…….”

 

오래 잠들지 못했음에도 아이렌은 금방 눈을 떴다. 아마 이러니저러니 해도 늘 파트너를 챙기는 건 잊지 않는 성실한 감독생인 그였으니, 그림이 보채는 걸 오래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비척비척 일어나 반쯤 뜬 눈으로 시계를 확인한 아이렌은 막 잠이 깨 따끈한 그림을 안아 들었다.

 

“그림, 잘 잤어?”

“아직 피곤해, 배고파서 깨버렸다고. 너는 배도 안 고프냐? 세상모르고 푹 자고 있다니.”

“하하.”

 

제가 일찍 일어나 여기저기 싸돌아다녔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겠지. 알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말해줘 봐야 ‘왜 쓸데없는 짓을 하고 왔느냐, 잠이나 더 잘 것이지’라는 식으로 말할 것 같았으니까.

마치 반려동물을 쓰다듬듯 그림을 토닥이던 아이렌은 결국 재킷을 챙겨입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녀올게. 조금만 기다려.”

“그래. 나는 어제 먹은 그 치즈가 든 빵이 좋을 거 같다고! 참고하도록 해, 꼬붕!”

 

잠이 덜 깬 그림은 어째서 아이렌이 잠옷 차림으로 자고 있던 게 아닌지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몇 시간 만에 다시 밖으로 나온 아이렌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먹을 걸 사러 나갔다.

 

 

 

04.

 

‘선배들이랑 마주치면 안 될 텐데.’

 

그림이 말한 빵을 포함에 이것저것을 사 오던 아이렌은 저도 모르게 자꾸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제게 잘 것을 권유한 이들과 마주쳤다가는 뭐라고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정말로 자다가 깼다는 걸 어떻게 말해야 믿어줄지 신경이 쓰여 초조해졌기 때문이었다.

제가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아이렌은 멀리서 익숙한 교복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저 사람들은…….’

 

나란히 붙어서 대강당 쪽을 바라보는 두 남자의 옷은, 분명 로얄 소드 아카데미의 교복이다. 게다가 저 깜찍한 고양이 귀와 새까만 머리카락은, 분명…….

 

“어라? 아이렌 양.”

 

그리 오래 보고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걸까. 체냐와 이야기를 나누던 네쥬는 뒤를 돌아보더니 금방 아이렌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조용히 밥만 사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일이 귀찮게 되어버렸다. 아이렌은 갑자기 아는 척을 해오는 옆 학교 학생들을 보며 그리 생각했지만, 모른 척하고 갈 수는 없었기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는 얼굴이 나타나 반가운 걸까. 후배도 내버려 두고 성큼성큼 다가온 체냐는 귀를 쫑긋거리며 아이렌의 얼굴을 살폈다.

 

“안냥? 피곤해 보이는데, 잘 못 잔 건가?”

“아, 예……. 저는 괜찮아요. 체냐 씨는 괜찮으세요?”

“나? 헤에, 날 걱정해 주는 거냥?”

“그거야 홍련의 꽃에 시달리셨으니까,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요.”

 

다들 마력을 완전히 잃진 않아 다행이지, 자칫했다간 큰 소동이 될 뻔했다. 그날 대강당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가장 먼저 홍련의 꽃과 접촉했던 걸 아는 아이렌은 눈앞의 두 사람이 무사해 보이는 점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비록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학생들은 대부분 로얄 소드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자신도 너무 눈부신 이 소년들이 썩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사람이 쓰러진 이상 걱정하는 게 당연했으니까 말이다.

 

“아앗!”

 

뒤늦게 체냐를 따라 아이렌에게 다가온 네쥬는 안부 인사를 하려다가, 먹거리를 들고 있는 손을 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렌 양, 손이!”

“예?”

“세상에,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니…….”

 

이런, 봐 버렸나.

깜짝 놀라며 손을 가리키는 네쥬의 눈이 가늘게 떨리고 있어, 아이렌은 머쓱하게 웃었다.

분명 보기 흉한 상처니까 눈에 띄고 만 거겠지. 간헐적으로 따끔거리고 물이 닿으면 쓰리긴 하지만, 그것 외엔 불편한 점도 없었는데 다들 이렇게 걱정하니 멋쩍기 그지없다.

아이렌은 불필요한 오해를 낳지 않게 하려고 연고 냄새가 거의 사라진 왼손을 내밀었다.

 

“어제 풀을 뽑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약을 발라뒀으니 금방 나을 거예요.”

“아…….”

 

하지만 그 행동은 오히려 네쥬를 더 걱정시키고 말았다. 손바닥부터 손가락, 손등까지 상처가 난 아이렌의 왼손을 바라보던 그는 양손으로 상처투성이 손을 포개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달리 따스한 네쥬의 체온이 상처에 닿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 아이렌은 얼른 손을 빼내려다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네쥬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이런.’

 

제 손목이 날아간 것도 아닌데, 저런 표정을 지을 건 뭐람. 자신은 그저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홍련의 꽃을 뽑았던 거지 딱히 특정한 누군가를 구하려고 이런 게 아닌데, 저 슬픈 얼굴을 보고있자니 꼭 제가 강당에 있던 모두를 위해 희생한 것처럼 보이지 않나!

당황한 아이렌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을 붙잡으려는 손에서 벗어났다.

 

“좀 흉해 보여서 그렇지 단순한 찰과상이니, 부디 괘념치 마세요. 저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고생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보다, 두 분은 뭘 보고 계신 거예요?”

 

이럴 때는 아예 말을 돌려버리는 게 효과적이다. 아이렌은 일부러 체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쥬의 올곧은 마음에 당황하는 아이렌을 구경하던 체냐는 갑자기 자신을 향하는 눈동자에 흥미를 느낀 건지 꼬리를 살랑이며 히죽 웃었다.

 

“흐음, 그게 궁금해서 우릴 보고 있던 거였어?”

 

사실 걱정되어서 본 것도 있지만, 주된 목적은 저거였으니 부정할 필요는 없겠지.

괜히 꼬투리 잡히기 싫은 아이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체냐가 대강당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안에 그 녀석이 있어서, 뭘 하나 봤을 뿐이지. 재미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 녀석?”

“그래, 그 녀석 말이야. 열심히 혼자서 청소하고 있더라고. 도움도 받으려고 하질 않고 말이야.”

 

체냐의 말에는 분명 그 나름 정보가 들어있었지만, 아이렌은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짐작해 낼 수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청소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지 않나. 겨우 그런 게 흥미로워서 빤히 보고 있었을 리는 없는데 말이다.

네쥬는 상황파악이 안 되어 눈만 깜빡이는 아이렌에게 대신 사과했다.

 

“체냐 선배도 참. 아이렌 양, 미안해. 선배는 원래 이런 식으로 말해서…….”

“괜찮아요. 그래서, 그 녀석이라는 건?”

“그건 그냥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어떠냥?”

 

과연, 그렇게 나오는 건가.

장난스러운 체냐의 대답에 호기심이 솟구친 아이렌은 방에서 그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제 눈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로 했다.

 

“그러도록 할까요. 그럼, 저 먼저 가볼게요.”

 

고개를 푹 숙여 인사한 그는 네쥬랑 체냐가 인사에 답하는 걸 듣지도 않고 바쁜 걸음으로 대강당으로 향했다.

루크에게 전해 듣길, 어젯밤 대강당은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바람에 바닥이 엉망이 되었다고 하던데. 대체 누가 혼자서 그걸 다 정리하고 있는 걸까. 청소부가 따로 있는 걸까? 로얄 소드 아카데미의 두 사람이 그렇게나 흥미롭게 보고 있었다면, 어쩌면 대단한 마법사가 마법을 이용해 한 번에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추측을 하며 대강당으로 들어선 아이렌은 깨진 유리를 빗자루로 치우는 상대를 확인하고 탄식했다.

 

“아.”

 

아주 작은 탄식은 넓은 강당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본래라면 빗자루질 소리에도 묻혀야 할 목소리가 너무 커지자 아이렌은 놀라 제 입을 막았지만, 청소에 열중하던 이는 이미 그를 눈치챈 후였다.

 

“당신…….”

 

롤로는 생각을 잃을 수 없는 무표정으로 아이렌을 불렀다. 오늘따라 눈 밑에 그늘이 유독 짙게 느껴지는 그는 다가오지도 도망가지도 않는 아이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어…….”

 

그냥 누가 있나 궁금해서 와본 것뿐인데, 상대가 너무 예상 밖의 사람이라 말이 잘 나오질 않는다.

아이렌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꾹 다문 롤로의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여전히 정숙(靜肅)한 롤로의 표정에 당황한 마음도 조금은 진정된 그는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역으로 질문해 왔다.

 

“도와드릴까요?”

“예?”

“혼자서 청소하시기 힘들 것 같아서요.”

 

아마 로얄 소드 아카데미의 두 사람의 제안도 거절한 롤로니까 제 제안도 거절하겠지. 그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물어본 건, 혼자서 이 넓은 곳을 청소하는 그를 도무지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대강당이 이 꼴이 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남자 때문이긴 했지만, 그게 비효율적으로 혼자서 치울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아이렌은 그리 생각했기에, 선뜻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렌의 그 호의가 롤로에겐 당연한 것이 아닌지, 그는 놀란 눈으로 빗자루를 만지작거렸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하는 겁니까?”

“예?”

“어젯밤만 하더라도 나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나를 돕겠다고 하는 겁니까?”

 

마치 따지듯 묻는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상처로 뒤덮인 손으로 향했다.

제 계획을 망치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한 건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학생들, 특히 마법을 쓸 줄 아는 다른 이들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이렌이 제 계획을 막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 그들이 마음 놓고 종탑으로 향하게 된 것은 눈앞의 이 여자가 교사와 함께 마을로 가주었기 때문이지 않던가.

 

“동정이라면 불요. 돌아가십시오.”

“하지만 혼자 하려면 힘들 텐데요.”

“그렇다 하여도 어차피 이건 주최 측의 일입니다. 손님의 손을 빌리는 건 언어도단이지요.”

 

저 강경한 태도를 보니 억지로 도우려 나선다 해도 금방 내쫓길 거 같다. 고집이 센 아이렌은 저와 같은 성향의 사람은 밀어붙여 봐야 역효과만 나는 걸 알기에, 찜찜함을 뒤로하고 물러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인사 후 돌아가려고 결심한 순간.

 

“당신은.”

 

까지고 베인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롤로가 미간을 잔뜩 구긴 채 물었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나를 막으려 한 겁니까?”

 

그건 원망이 아니었다. 아이렌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진심으로 제 생각을 궁금해하고 있으며, 마법사도 아닌데 일련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 자신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정신적 에너지 대부분을 타인을 파악하는 일에 사용하는 그는 롤로의 마음을 재빨리 눈치채고 답했다.

 

“그 꽃이 위험해 보였으니까요.”

“홍련의 꽃은 마력을 갖지 않은 이들에겐 해가 없는 꽃입니다.”

“하지만 제 친구와 선배들이 위험에 처했으니까 가만히 있을 순 없었어요.”

“…….”

 

롤로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서늘한 그 숨은 고요한 대강당에서 울리지도 않을 만큼 작아서, 눈앞에서 봤음에도 아이렌은 그가 그저 입만 벙긋거린 건 아닐까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마법이 없어져도 괜찮다는 나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까?”

“없어져도 괜찮다는 말은 꼭 없어져야 한다는 말과 같은 건 아니지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지만 아직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는 한 있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는 거죠.”

“다수의 의견이 옳다는 겁니까?”

“그런 건 아녜요. 그냥 제 주변에 마법이 사라지면 곤란한 사람들이 더 많았고, 저는 제 주변 사람들을 도운 것뿐이지요.”

 

어느 쪽에게도 다소 냉정할 수 있는 대답이겠지만, 아이렌은 정말 저런 생각만으로 롤로를 막은 것이었다. 원래 마법이 없던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던 그는 마법이 없어진다 해도 세상은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어쩌면 그편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롤로의 의견에 동의했던 거지만, 그건 아이렌 본인의 사상은 아니었다. 그에게 마법이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그러니 제 주변인, 그러니까, 소중한 학우들이 마법을 원한다면 그로서는 그저 어떻게든 온몸을 다해 홍련의 꽃을 박멸할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었다.

 

“저는.”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던 아이렌은 크게 심호흡하고 빗자루를 꽉 쥐고 있는 롤로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쳤다.

스스럼없는 접촉에 흠칫한 롤로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설 뻔했지만, 까이고 벗겨져 거칠어진 피부의 감촉에 정신이 빼앗겨 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힘을 주지도 않은 손에 엉겨 붙잡힌 그는 아이렌이 입을 열 때까지 숨도 뱉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가 무언가 엄청난 악의가 있어 이런 일을 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이게 정말 옳다고 생각해서 한 일이겠죠. 원래 사람들은 보편적이지 않은 사상에는 쉽게 반감을 보이잖아요.”

“……무슨 소리를…….”

“그냥 개인 의견일 뿐이에요. 저는 마법사가 아니니까, 딱히 선배를 원망하거나 하진 않는다는 거죠. 선배 눈에는 제가 배신자쯤으로 보일 것 같지만.”

 

아마 이 세계에는 마법이 없어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겐 롤로가 영웅이겠지. 이런 세상에서 마법사도 아니며 이세계에서 온 제가 눈앞의 남자와 그 사상을 재단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런 말을 다른 이들에게 털어놓으면 좋지 않은 소릴 들을지도 몰랐지만, 아이렌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제가 살가죽이 다 뜯길 정도로 홍련의 꽃을 뽑은 이유는, 그저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이 이 사태를 막고 싶어 하여서였을 뿐. 무언가 대단한 사상이나 이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관통하는 진리나 정의가 있을 리 있는가.

냉소적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는 고향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정말로 롤로가 그다지 밉지 않았다.

 

“무엇이 선배가 마법사임에도 마법을 거부하도록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에겐 누구나 개개인의 사정이 있는 법이죠. 어제 저지른 그 일도 세상이든 선배든 무언가 한 가지는 구할 수 있다 믿어서 한 일일 테니, 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슬며시 손을 거둔 아이렌은 그림과 자신을 위해 사 온 빵 사이, 간식으로 먹기 위해 따로 구매한 마카롱을 꺼내 내밀었다.

 

“단 거라도 드시고 하세요. 설탕은 좋은 에너지원이 되니까요.”

 

롤로는 잠깐 망설였다가 마카롱을 받아들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해도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상대를 향해 능청스럽게 웃어 준 아이렌은 들으라는 듯 혼잣말하며 대강당을 빠져나갔다.

 

“속죄라는 건 의외로 타인보다 자기 자신에게 더 기쁨을 주는 일이긴 하죠.”

 

‘저지른 일에 대해서 반성할 거라면 혼자서 엉망이 된 강당을 청소하기보다는 명상이라도 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그런 의미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아무래도 롤로에게는 그렇게만 들리지는 않은 모양이다.

빠른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하는 아이렌의 등을 바라보는 롤로는 입술만을 움직여 뭐라고 느리게 중얼거리다가, 결국 입을 다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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