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에고에서, 아이나.

Dear …

알프레드 님, 잘 지내시나요. 막상 마음 먹고 편지로 얘기하려니까 꽤 부끄럽네요. 혼자 주무시는 건 좀 익숙하실지 염려되네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제 향수를 조금 뿌려서 같이 보낼게요. 이상한 의미 아니에요.

제 고국은 전보다 한층 분위기가 누그러졌어요. 꿈의 힘으로 보호받는 이상 예전처럼 이드의 폭주가 종종 일어나진 않을 거라고 해요. 물론 여전히 여러 나라의 문화가 섞여 있어 구역을 나눠 놓아도 시장 쪽은 늘 싸움이 있고, 일시적인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순 있지만 그건 아플 때 먹는 약 같은 거니까 마법 하나만 바라볼 수도 없어요. 외부 세력이 없는 대신 다양한 문화와 종족을 모두 존중할 수 있는 인식 개선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정치적인 부분만 잔뜩 얘기했네요. 직업병이라고 하지요, 저도 이제 어엿한 왕족이 되었다는 뜻이겠죠?

이제 진짜 근황을 전해 드릴게요. 일단 에고에 와서 오랜만에 볶음밥이 아닌 삶은 쌀밥을 먹었어요. 도미니아에서 새로운 음식을 꽤 접했는데도 가끔 익숙한 맛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영영 여기서 살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어요. 약 20년을 저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걸까요. 분명 내가 태어난 곳임에도 가끔 이방인임을 느꼈어요. 이전 세계보다 더 길고 폭 넓은 치마를 입는 게 낯설었고, 철제 건물과 석조 건물이 섞인 풍경이 낯설었고, 감정의 힘이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낯설었어요. 그래도 가족들도 친척들도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까, 처음 왔을 때보단 많이 괜찮아졌죠. 막내이모께서 제가 예전보다 좀 말이 많아졌다고 하셨어요. 긍정적인 거겠죠? 게다가 어릴 때는 좀 더 말괄량이였다고 하셨어요. 멋대로 요정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나무 위에서 자고, 아버지의 서재에서 책으로 탑을 쌓았다는데 과연 진실일지…….

침대는 매일 눕던 그 자리가 아니라서 조금 불편하네요. 오히려 정원에 둔 푹신한 안락의자가 더 잠이 잘 온다니까요. 인적 없고 새 울음소리와 바람 날갯짓과 풀끼리 부딪히는 까칠한 소리만이 존재하는 곳에 적당히 그늘진 곳을 찾아 몸을 눕히면 값비싼 이불이 따로 필요 없어요. 처음 에고에 왔을 때도 이 자리가 제 시작점이었죠. 햇볕이 따뜻해서 그대로 쿨쿨 잘 뻔한 게 생각나네요.

아아, 당분간 글은 안 쓰고 놀기나 하려고 했는데 결국 쓰고 앉아 있네요. 빨리 다른 여가 생활을 해서 사념을 없애든가 해야겠어요. 아, 두통은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의사 선생님도 큰 이상은 없다고 하셨어요. 제가 갑자기 고국에 다녀와야 될 것 같다고 짐을 싸서 놀라셨을 것 같아요. 갑자기 없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잠깐 힘들었던 것 같아요. 타인의 시점에서 아이나를 보고 있는 듯한, 아니, 마치 제가 아이나가 된 듯한, 시선이 1인칭이었으니까 후자에 가깝겠죠. 여전히 간밤에 꾸었던 꿈처럼 희미하지만, 날이 갈수록 갱신되는 걸 보니 곧 완성형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기억이 저를 기다리고 있더라도 저는 이 세계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아니, 오히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기 싫어요. 하지만 제가 정말 여기서 한 번 쫓겨났던 사람이라면 그 이유가 뭔지는 알아야겠어요. 이상하죠, 그냥 가족들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질문이 조금이라도 깊어지면 다들 입을 다물어요. 그러니 직접 떠올리는 수밖에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반드시 돌아갈 거예요. 좋은 기억을 가지고.

그래도 혹여나 제가 괴로운 얼굴로 마차에서 내리면, 처음엔 그냥 말없이 안아주세요. 그 다음엔 천천히 이야기할게요. 끔찍한 기억을 공유하게 되면 미리 죄송하다고 할 거예요. 당신에게만 안정을 바라게 되는 것 같아 이미 좀 양심에 찔리지만요. 그렇다고 저처럼 본인 일도 아닌 것에 눈물 흘리고 그러진 마세요. 이건 제 일일 뿐이니까요.

밤공기는 여전히 쌀쌀해요. 밤하늘 내려다보지 말고, 과음하지 말고, 건강하시길. 사랑의 힘을 담아서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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