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스토리 드림

왕자의 책사는 얼굴이 없다, 2장(二章)

레오나 킹스카라, 빌 셴하이트 드림


* ‘타마슈나 무이나’ 이벤트 스토리 스포일러 있습니다.

* 스토리 내에서 묘사되지 않은 부분은 개인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03.

 

효광의 도시에 있는 레인트리 마켓은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가득했다.

내일 있을 캐치 더 테일 시합의 연습 전, 가볍게 관광하기 위해 이곳에 온 일행들은 지역 특산물들을 이것저것 먹고 마시며 낯선 곳의 정취를 즐겼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나자, 이번엔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 걸까.

카림은 가판대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먹을 것 외에도 이것저것 팔고 있구나.”

“예. 이 근처에는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점도 많이 있어 그렇습니다.”

“아! 저 가게에는 이런저런 액세서리를 팔고 있네!”

 

카림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던 키파지는 그의 옆에 붙어 설명을 이어나갔다.

 

“비싼 보석과 귀금속부터 유리구슬로 만든 저렴한 가격의 물건까지 갖춰져 있답니다. 이 나라에서는, 다양한 귀금속과 천연석이 산출되고 있거든요.”

 

왕가의 시종으로서 귀빈에게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하는 그의 모습은 지적이고 기품이 넘쳤다. 옆에서 슬쩍 이야기를 엿듣는 아이렌은 꼭 수업을 듣는 학생처럼 키파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지만, 그 집중은 대화에 끼어드는 레오나 때문에 금방 깨지고 말았다.

 

“산출이라고 해도 파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굴러다니는 돌을 모으는 거지만.”

“그걸로 충분합니다. 자국의 주요 산업이 아니니까요.”

 

키파지는 그 지적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레오나는 그 칼 같은 태도에 오히려 불이 붙은 건지, 도리어 거침없이 조국의 태도를 비꼬았다.

 

“들었나? 광산자원이 풍부한 걸 알면서도 채굴할 생각도 하지 않아.”

“노을의 초원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소중히 여기니까요. 경제적 이익을 위해 국토를 파괴하는 건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렇게 쇠퇴해 가기만을 기다리겠다 건가? 이런, 어리석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이야기인걸.”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는 정치적인 대화에 순식간에 주변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카림은 그 모습을 보곤 초조해져서, 둘을 말려 보려고 했다.

 

“어, 어이. 싸우지…….”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레오나와 키파지는 이런 대립은 대립축에도 못 든다 생각하는지 더는 입씨름하지 않으려 입을 닫았지만……, 제삼자가 엉뚱하게 끼어들어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부어버린 게 문제였지.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수도 광장의 그 분수부터 철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예?”

 

어느새 레오나의 대변인처럼 그의 옆에 꼭 붙어 선 아이렌의 발언에, 키파지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 나온 탓에 기가 빨려 흐리멍덩한 눈으로 음식 몇 개를 받아먹는 게 고작이었던 그는 어디로 간 걸까. 단단하게 빛나는 눈으로 레오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아이렌의 눈동자는 마치 잘 세공한 아이올라이트 같았다.

 

“도심지역은 그렇게 개발해 놓고, 정작 국익에 도움이 될 광산 사업은 등한시하는 건 모순된다고 생각해요. 만약 광산 사업을 주된 사업으로 삼았다면, ‘관광은 주된 사업이 아니니 자연을 파괴할 공사는 할 수 없다’라며 포기하고 나무와 풀로 만든 집에서 자동차도 없이, 편의는 포기한 채 살아갔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보는데요. 애초에 자연을 보호하려면 인간종은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고요. 그리고 만약 주된 사업이 아니니 환경 파괴가 될 활동을 할 수 없는 거라면, 국가 주요 산업이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 건지도 궁금한데요.”

 

속사포처럼 떠드는 아이렌을 본 그의 선배들과 그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헛숨을 삼켰다. 평소엔 많은 말은 하지 않고, 몇 마디 떠든다 해도 부드러운 언어로 상대의 기분을 고려해 말하며, 언쟁을 하게 되면 짧고 굵은 말로 싸우는 아이렌이 이렇게 딱딱한 말투로 조잘거리는 건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놀라 다들 숨도 쉽게 쉬지 못하는 상황 속. 자신을 보는 시선들이 보이지 않는지, 아이렌은 제 주장을 펼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특정 지역은 수도를 만들어 물을 끌어와 미관상 보기 좋은 장식물을 만드는 데 쓰기까지 하면서, 특정 지역은 자연을 보호를 이유로 사업 개발을 막다니. 그렇게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발전을 계속하면 결국 나라가 기울고 빈부격차가 심해질 뿐이겠죠. 채굴 방법도 최대한 자연을 덜 훼손하는 방향으로 연구하면, 국토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제 국토만 지키겠다고 그 지역에서만 생산되는 자원을 묻어만 둔다면 다른 나라들도 곱게 생각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관광 산업이란 것도, 결국 외국인의 발길이 끊기면 끝인 사업인데 나라의 힘을 기르기 위해선…….”

 

주절주절 떠들던 아이렌의 말이 멈춘 건, 넋이 나간 키파지와 눈이 마주친 후였다.

신들린 듯 제 머릿속 생각을 쏟아내던 그는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자각하곤, 순식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맙소사. 아니, 그.”

 

자신은 그냥 레오나의 의견이 관습을 핑계로 거부되는 게 싫어서 한마디 보태려고 한 건데,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떠들어버린 걸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두 사람이 이런 주제로 하루 이틀 입씨름한 게 아닐 테니 제가 말한 이야기도 어쩌면 다 이미 논의된 문제일지도 모르는데. 레오나가 자조적으로 자신을 ‘어리석다’라고 비꼬는 걸 보고 발끈해서 필요 이상의 말을 하다니.

이 상황을 어찌 수습해야 하나 정신이 아찔해진 아이렌은 손을 저으며 말을 더듬었지만, 레오나는 소리죽여 웃으며 잔뜩 움츠린 둥근 어깨를 한쪽 팔로 감쌀 뿐이었다.

 

“큭……. 들었나, 키파지? 아무래도 16살짜리 이방인 꼬맹이도 뭐가 더 이득인지 아는 모양인데?”

 

노여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 느긋한 목소리와 장난스러운 웃음은 긴장을 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아이렌은 귓가에 들리는 달콤한 중저음에 힘이 쭉 빠져서, 어느새 평소처럼 레오나에게 말대꾸를 해왔다.

 

“저는 꼬맹이가 아닌데요. 16살이면 다 컸다고 생각해요.”

“아, 그러신가? 그래, 다 커서 좋겠군, 아이렌. 조만간 시집도 가겠어.”

 

장하다는 듯 가볍게 아이렌의 등을 두드린 레오나가 팔을 거둔다. 그 사이좋은 모습을 본 키파지는 길게 한숨을 내뱉더니,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이런, 이런. 레오나 님의 정인이라고 해서 여러모로 보통 분은 아닐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래서야 정인이라기보다는 책사 같군요.”

“네?”

“아이렌 님께서 말씀하신 바는 깊게 생각해보고, 다음번에 레오나 님과 다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어어, ……감사합니다.”

 

저게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든, 진짜로 그렇게 할 거라서 알려주는 말이든, 제 말을 무례하게 여기지 않고 받아들여 주어서 참 다행이다.

다만, 신경 쓰이는 것은.

 

‘방금, 정인이라고 하지 않았어?’

 

아이렌은 차분히 머리를 굴려, 제가 아는 정인의 정의를 떠올렸다.

정인.

1. 명사. 마음이 통하고 친한 친구.

2. 마찬가지로 명사. 남몰래 정을 통하는 남녀 사이에서 서로를 이르는 말.

자, 그러면 방금 키파지가 말한 ‘정인’의 의미는…….

 

‘절친한 친구라는 뜻으로 한 소리겠지, 이거?’

 

아이렌은 망설임 없이 1번 뜻을 골랐다. 비록 자신과 레오나를 친구나 선후배라 정의하기엔, 서로서로 조금씩 불건전한 일을 많이 한 것 같긴 하지만, 키파지는 그걸 모를 것 아닌가?

언쟁 이후 찾아온 얼떨떨한 결말에 아이렌의 머리가 과부하 상태에 처한 와중. 놀람을 가라앉힌 학우들은 벌써 다른 것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아! 이 팔찌, 반짝반짝한 게 정말 예쁜걸!”

 

장신구를 둘러보던 카림은 수많은 상품 중 마음에 드는 걸 발견하곤, 검지로 가리켰다.

어느새 같이 물건을 구경하고 있던 릴리아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확실히.”

“나에게도 보여주겠어?”

 

패션에 관심이 많은 빌은 곧장 둘 사이에 끼어들어 카림이 지목한 팔찌를 살폈다.

팔찌의 알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더니, 한숨과 함께 물건을 내려놓았다.

 

“……당연히 예쁘겠지. 그거, 진짜 다이아몬드잖아?”

“뭐라! 음, 확실히 굉장한 가격이구먼. 여행 선물로는 너무 비싸지 않나.”

 

뒤늦게 가격표를 본 릴리아는 고개를 저었지만, 안타깝게도 카림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제 선택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예쁘잖아. 마음에 들었어! 나, 이걸 선물로 살래!”

“즉결이지 않나. 역시 카림이구먼.”

 

릴리아는 시원시원한 후배의 선택에 웃었지만, 빌은 그럴 수 없었다. 선물이라는 건 받는 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정도에서 줘야 함을 잘 아는 그는 은근슬쩍 돌려 말하여 카림을 막으려 해봤다.

물론, 순수한 카림에겐 이런 방법은 통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 값비싼 물건을 받으면, 쟈밀이 정말 좋아하겠네. 너무 기뻐서 곤란할 정도로 말이야.”

“응! 쟈밀도 좋아할 거야!”

“……쟈밀‘도’?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도 사 줄 게냐?”

“그거야 기숙사생 전원에게 사줘야지.”

“스카라비아 기숙사생, 전부 다!?”

 

카림의 충격적인 발언에, 대화를 나누던 빌과 릴리아 외에도 모두가 깜짝 놀랐다.

아무렇지 않게 돈을 쓰려는 카림은 순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예쁜 걸 받으면 누구나 좋아하잖아!”

“……절대로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겠지.”

“아니, 설마 진짜 다이아몬드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지 않겠나.”

 

빌과 릴리아가 어이가 없어 한탄할 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그림은 재빨리 손을 들었다.

 

“어이, 카림! 이 몸에게도 선물을 사 달라고!”

“그림! 버릇없게 무슨 소리야!”

 

파트너의 대담한 요구에 정신이 번쩍 든 아이렌은 재빨리 그림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착해빠진 카림은, 그 요구를 너무나도 간단히 들어주려 했다.

 

“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모두에게도……. 어라?”

 

카림이 엄청난 금액의 소비를 하려던 그때. 마치 신이 도운 것처럼, 지갑을 연 그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쪽의 알록달록한 팔찌가 더 예쁜걸? 이걸로 사야지!”

 

진짜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보다 더 화려한 그 팔찌는 분명 다채로운 색이 예쁘긴 했지만, 어딘가 투박한 멋이 있었다.

빌과 릴리아는 최종적으로 카림의 선택을 받은 팔찌를 보더니 묘한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그건 유리 비즈 제품이네. 확실히 예쁘지만…….”

“카림은 재료의 가치 같은 건 흥미가 없는 거구먼. 마음에 들었다면 그걸로 다인 모양이야.”

 

물론 선물용이라면 이쪽이 더 적합해 보인다는 건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이었다. 그림은 제 입을 막고 있는 아이렌의 손을 도리질로 떨쳐내고, 한숨 섞인 불평은 내뱉었다.

 

“다이아몬드 팔찌를 받을 수 있을까 했는데, 유리구슬 팔찌가 되어버렸어…….”

“그림, 받는 주제에 이러쿵저러쿵하지 마. 버릇없잖아.”

“흥! 그만 좀 엄마처럼 굴라고, 꼬붕!”

 

‘내가 언제 엄마처럼 굴었어?’ 그런 말로 시작된 아이렌의 잔소리는 릴리아가 선물을 고르는 동안 끝나지 않았다.

그 태도는 꽤 엄한 부모를 떠오르게 하기도 했지만, 다들 그를 말리려고 하지 않는 건 거기 있는 모두가 한 기숙사의 사감이거나 부사감이기 때문이었다.

이건 고물 기숙사의 일이다. 아이렌은 그림의 감독자이고, 어찌 보면 고물 기숙사의 사감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닌가. 사감이 제 기숙사의 학생을 지도하는 건 당연한 일이며, 그림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자연스럽게 아이렌도 책임을 져야 하니 저렇게 깐깐하게 구는 것도 당연하다 여기는 그들이었다.

 

‘남의 기숙사 일은 끼어드는 게 아니지.’

 

그렇게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릴리아는 쇼핑을 끝내 버렸고, 카림은 사 온 유리 팔찌를 나눠주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희는 어떻게 할 거야?”

“음! 이 몸과 아이렌도 기념품을 살 거라고!”

 

잔소리를 듣느라 기가 빠진 것도 잠시일 뿐. 팔찌를 선물 받고 기분이 좋아진 그림은 기운차게 제 포부를 밝혔다.

다만 아이렌은 제 파트너와는 생각이 다른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누구에게 사줘야 하는 거지?’

 

이 세상 모든 일 중 인간관계를 가장 어려워하는 아이렌은 제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를 신중하게 고민하며 기념품을 선물할 사람을 선별해보았다.

 

‘역시 플로이드 선배 걸 사야 할까? 아냐, 플로이드 선배만 사 주면 그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그럼 제이드 선배랑 아줄 선배 것까지? 잠깐. 그럼 멜로드가 서운해할 텐데? 그렇지만 멜로드까지 사 주면, 정작 같은 반인 에이스랑 듀스 선물은 안 사 온 게 이상해지지 않아? 그럼 그 둘까지? 그럼 다른 1학년 애들은? 어어…….’

 

한번 시작된 생각은 무시무시하게 불어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어진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제 머릿속의 생각들에 파묻혀가던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머리만 굴렸지만, 이 무리의 통솔자는 입을 꾹 닫고 멍하니 있는 아이렌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레오나는 가볍게 상대의 팔뚝을 손등으로 툭 쳐서 건드렸다.

 

“어이, 아이렌.”

“네?”

“아까부터 불렀는데, 뭘 멍하게 있는 거냐.”

“……부르셨어요?”

 

정말로 못 들었다는 듯 놀라서 되묻자, 레오나가 혀를 차며 가판대로 고갯짓했다.

 

“넌 어떤 걸로 살 거지? 태피스트리는 어떻냐고 말했다만.”

“아니, 전 아직 누굴 사다 줄 건지도 못 정했는데……. 으음, 그냥 안 살래요. 공평하게 모두에게 안 사 주는 게 맞겠어요. 여윳돈이 별로 없어서.”

 

누구는 받고 누구는 못 받는 선물만큼 허무한 게 있을까. 아이렌은 결국 누군가가 소외감을 느끼느니, 차라리 모두에게 매정해지는 걸 선택했다.

그러나 아이렌의 말을 들은 주변인들은, 어리둥절 해하며 서로를 보았다. 그건 아이렌의 선택을 의아해하는 것보다는, 전혀 엉뚱한 대답을 들어 황당해하는 표정에 가까웠다.

묘한 침묵 속. 빌이 결국 대표하듯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아이렌. 네가 사갈 것 중 어떤 게 괜찮냐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거잖아. 너 정말 하나도 안 들은 거니?”

“예?”

 

우습게도, 이번에는 아이렌이 주변과 똑같이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지금까지 대화가 집단적 독백일 뿐 전혀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음을 눈치챈 빌은 고운 얼굴을 구기며 한탄했다.

 

“정말이지, 사람들이 대화할 땐 귀를 기울여야지. 넌 가끔 중요한 이야기 중에도 이렇게 멍해져서…….”

“이런, 빌. 너무 야단치지 말게. 아이렌도 고민하느라 못 들은 게 아닌가.”

 

선배 좋다는 말은 이럴 때 있는 게 아닐까. 릴리아는 귀찮을 정도로 복잡한 아이렌의 성격을 이해하고 동급생을 말려주었다. 그리고 마치 그 중재를 거들 듯, 카림은 빌이 다음 말을 꺼내기도 전에 끼어들어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서, 아이렌은 태피스트리로 살 거야? 이건 별로 안 비싸다고 하는데!”

 

선배들이 이토록 도와줬으니, 이젠 기념품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이렌은 여전히 얼빠진 얼굴로 눈만 깜빡이다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쓸 기념품을 사라는 건가요?”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방금 대화해놓고 또 되묻는 건 뭐 하는 짓이지?’

모두가 그렇게 말하고 싶어했지만, 사람은 원래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이 안 나오는 법이었다.

그림은 잔소리꾼인 제 파트너가 정신이 아니라 영혼이 빠진 게 아닐까 걱정되어, 푹신한 발로 다리를 꾹꾹 누르며 물었다.

 

“꼬붕, 혹시 졸고 있었냐?”

“아니. 기념품은 보통 선물용으로 사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쓸 용으로 사라고?”

“……엥?”

 

그때, 빌과 레오나의 입에서 절로 소리 없는 한탄이 터져 나왔다. 아이렌이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어째서 지금까지 대화에서 겉돌았는지, 저 한마디로 완벽하게 답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행을 좋아하고 기념품도 자주 사는 릴리아는 오히려 아이렌의 생각이 이해가 가지 않는 지, 굳이 되물어 사실을 확인했다.

 

“그거야 보통은 남에게 선물하는 용으로 많이 사지만……. 여행 기념용으로 하나 사면 좋지 않겠나?”

“아니, 전 됐어요. 여윳돈도 없는걸요. 꼭 사야 하는 것도 아니고.”

“으음, 정말? 여기까지 와서?”

“추억이라면 사진을 찍고 맛있는 걸 먹어보는 정도로 충분해요. 전 물건에 욕심이 없어서요.”

 

이유는 잘 알겠다. 하지만, 과연 그걸로 괜찮은 걸까.

떠들썩한 분위기에도 휘말리지 않고, 기념으로 남길만한 무언가를 가지는 것도 사양하는 후배를 보며 초조해하던 카림은 특유의 사람 좋은 성격 때문에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버렸다.

 

“아이렌, 돈 때문에 사양하는 거라면 내가 사 줄까?”

“예? 아녜요! 됐어요! 굳이 안 사줘도 된다니까요? 아까 그 팔찌로 충분해요!”

“하지만……!”

“선배가 돈이 엄청 많은 부자인 건 알지만, 그래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강경하게 사양하는 아이렌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호의가 부담스럽다는 듯, 양손을 저으며 극구 사양하는 홍일점의 모습을 보던 빌은 몰려오는 착잡함에 이마를 짚었다.

 

“하아.”

 

‘정말이지, 무슨 애가 저런지.’ 아이렌의 저런 모습을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닌 그는 제가 다 답답해져서 입술을 씹었다.

아이렌은 기본적으로 베푸는 것에는 도가 텄지만, 제가 무언가 받게 되는 일은 어색해하며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적당한 구실과 이유가 있거나, 받아두는 게 상대에게도 더 득이 될 호의는 받을지언정. 일반적으론 늘 겸손을 가장해 뻗어온 손을 피해버리고 말았지.

누군가는 그걸 ‘소박하고 겸허하다’라며 좋아할지도 몰랐지만, 빌의 생각은 달랐다. 주지는 않고 받기만 하려는 쪽은 당연히 문제지만, 그 반대의 경우 또한 문제라고 생각했으니까. 세상은 원래 중용을 지켜야 굴러가는 법이지 않던가.

마땅히 받을만한 건 받고,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며 쌓아 올리는 인간관계가 가치가 있는 건데. 저 계집애는 성인(聖人)도 수도사도 아니면서 왜 저러는 것인지. 빌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둘 다 물러설 기미가 안 보이잖아?’

 

카림과 아이렌이 권유와 사양을 반복하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탄식하는 빌은, 부디 카림이 이기길 바라며 팔짱을 꼈다.

그러나, 시끄러운 건 질색인 레오나는 이 어이없는 언쟁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이, 아이렌.”

“예?”

 

후배들이 아웅다웅하는 사이 잠깐 자리를 비웠던 레오나는 둘 사이에 끼어들더니, 아이렌 손에 뭔가를 쥐여주었다.

 

“챙겨. 아니, 껴라.”

 

명령에 가까운 말에 손을 펴 본 아이렌은, 적잖이 당황하며 레오나를 올려다보았다.

상대가 건넨 건 근처 가판대에서 팔던, 이름 모를 짙은 주황색 보석이 박힌 귀걸이였다. 이곳 특유의 전통공예로 만든 것이라 그런 걸까. 그 귀걸이는 지금 아이렌의 복장과 퍽 잘 어울렸다.

 

“뭐예요, 이거?”

“됐고, 끼라고. 아니면 버리든가.”

 

이토록 무심한 선물 전달이 어디 있을까. 빌과 릴리아는 무드라고는 없는 레오나의 태도에 입이 떡 벌어졌지만, 아이렌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지 머뭇거리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전할 뿐이었다. 카림 또한 레오나의 태도에 놀라기보단, 아이렌이 기념품을 가지게 된 점에 만족하는지 쉽게 물러서는 덕에 팽팽했던 언쟁은 쉽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레오나는 군말 없이 귀걸이를 갈아 끼우는 아이렌을 보다가, 앞장서서 나아갔다.

 

“키파지, 그만 가지.”

“……아, 예. 알겠습니다, 레오나 님.”

 

키파지는 표정 관리를 하느라 입을 꾹 닫고 있다가, 한발 늦게 대답했다.

지금 제 눈으로 본 게 현실이 맞는지 얼떨떨해하는 그는, 손부채질로 얼굴을 부치며 헛기침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