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이설] 겨울 기억
화산귀환 윤종이설 NCP글
윤종은 새벽 일찍이 먼저 일어나 옷을 챙겨입고 방문을 나섰다. 밤새 내린 눈이 바닥에 쌓여 순백의 자태를 드러내었다. 화산에서의 첫 겨울이다.
시린 공기가 폐부를 자극했다. 화산의 설원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윤종은 창고에서 빗자루를 꺼내 비질을 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날 같았으면 문파의 어른들과 비슷한 시각에 일어나 간단한 운동 후 아침을 먹었겠지만, 유독 추위가 강한 화음에서는 겨울에는 해가 짧다는 이유로 다른 계절보다 느지막이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였다. 그러나 또래에 비해 유독 잠이 없는 편인 윤종은 눈이 더 이상 감기지 않아 차라리 밖에 나와 있는 것을 택했다. 잠이 깬 채로 이불 속에 누워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윤종은 왜인지 일어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흰 눈이 빗자루에 쓸리자 거칠한 토홍색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고요한 산에 작은 소리가 퍼졌다.
윤종은 자신이 화산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였다.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건만, 거리에서 밥을 빌어 먹고 살던 때가 아주 오래전 같았다. 지금의 화산은 열 살도 채 넘지 않은 아이가 자라기에 좋은 곳은 아니지만 윤종이 과거 지내던 환경보다야 백배 나았다. 윤종은 굶주림이나 추위와 같이 이따금 찾아오는 어둠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런 것들은 어린 윤종이 세상의 성질을 깨닫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한 삶을 살다가 현상의 손에 이끌려 화산에 온 이후에는 이곳의 모든 것이 호화스러워 보였다. 그렇기에 어른들과 사숙들의 돌봄이 완전히 기껍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윤종은 넉살 좋게 자신을 향한 도움의 손길을 받아낼 그릇이 아니었다. 윤종이 그 성품 그대로 조금 더 자란 아이였다면 화산사람들을 부담스러워하고 어린아이 답지 않은 일들을 찾아서 하는 자신이 어쩌면 이기적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의 윤종은 그저 조금의 불편감만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한 잡념들은 속절없이 부서지는 눈 덩어리들처럼 다시 작은 알갱이로 분해되었다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반복되는 활동은 작은 생각들을 치워버리기에 충분했다. 열심히 눈을 쓸고 있으니, 윤종은 머릿속이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처럼 깨끗해지는 것을 느꼈다.
윤종이 마당을 얼추 다 쓸고 전각의 처마 쪽으로 다가갔다. 둥근 이마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윤종은 기둥 밑 작은 물체를 발견했다.
작은 새였다.
윤종은 혹시나 죽은 것이면 담 주변에라도 묻어줄 생각으로 새에게 다가갔다. 제가 존경하는 어른들 같았으면 짧게 도호를 외고 명복을 빌어주었겠으나, 윤종에게는 그럴만한 여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가까이 가보니 작은 새는 눈 속에 파묻혀 파들파들 떨며 부리를 딱딱대고 있었다. 아직 죽지는 않고 어딘가 다친 모양이다. 윤종은 고개를 들어 지붕을 쳐다보았다. 나뭇가지로 엉성하게 엮인 새 둥지였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윤종은 다친 동물을 다룬 적이 없는 데다 잘못 손대면 저 약한 다리가 부러질까 두려워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저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 없이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끼익-
그때, 윤종의 처소와 가까운 쪽에서 작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고!”
윤종이 빗자루를 손에 쥔 채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그…. 아…. 기침 하셨어요?”
윤종이 조금 거칠어진 숨에 하얀 입김을 흘려보내며 말했다.
내의를 입은 작은 소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경이 투명한 검은 눈에 비쳤다. 소녀는 겨울 풍경이 눈부신 듯 소매로 눈을 대충 비비고는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윤종을 바라보았다.
“사고, 저기…, 새가….”
윤종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검은 형체가 보였다. 유이설이 신발을 신으려 마루를 밟자 삐거덕 하는 나무 소리가 났다.
겨울 눈의 한기가 신발 틈새로 느껴졌다. 마당에 아주 조금 남은 눈과 젖은 흙이 뒤섞여 신발에 잘박하게 묻었다. 유이설은 윤종을 따라 간 처마 밑에 쪼그려 앉았다.
“저기 둥지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어떡해요?”
유이설은 역시나 말이 없었다. 윤종도 거기에다 더 얹을 말이 없어 가만히 새를 쳐다보았다.‘’
유이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처소로 자박자박 걸어갔다.
“사고….”
윤종도 따라 일어나고는 발은 그대로 땅에 붙인 채로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윽고 다시 인영이 소리 없이 윤종의 눈에 나타났다.
유이설이 제 처소에서 다시 나오더니 무언가를 들고 윤종 쪽으로 다가갔다.
유이설의 작은 손에 들린 것은 흰 천이였다.
유이설은 바닥에 천을 펴놓더니 새를 조심스럽게 들어 천 위로 내려놓았다. 윤종은 그제야 유이설이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유이설은 새를 담은 천을 살짝 들어 올려 다시 제 처소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윤종도 그 뒤를 따랐다.
유이설의 조그만 발이 허공을 밟는 듯 가벼웠다. 반면 윤종의 발은 땅에 닿을 때마다 사박사박 소리가 났다. 윤종은 그 소리가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부끄러워져서, 제 사고처럼 소리 없이 걸으려 하였지만 잘 안되었다.
유이설이 입고 있는 흰 의복이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하늘하늘 움직였다. 저 존재감도 분위기도 투명한 사고는 항상 구름처럼 하얗고 흘러가듯 조용했다.
윤종은 문득 유이설이 기름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같은 배분의 형제들과 있을 때는 물과 절대 섞이지 않은 채로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고, 홀로 있을 때는 암향을 풍기는, 길거리에 나앉았었을 적, 어느 지나가는 귀공자로부터 향기를 맡았던 향유 같았다. 사고라면 분명 매화향이 나는 기름일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였다가, 윤종은 제가 비유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곧 생각을 그만두었다.
작은 발로 걸어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인 이설의 처소에 도착했다. 이설이 나무 문을 열자 윤종은 미약한 훈기를 느꼈다. 찬 공기에 빨갛게 얼은 윤종의 뺨과 코가 온기에 닿아 가려웠다.
이설의 처소는 썩 좋다고만 할 순 없지만 그리 나쁜 곳도 아니었다. 화산의 사정상 찬바람이 새는 건물이 많아, 아이들 중에서도 몸이 약한 이설이 지내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그나마 해가 잘 들고 냉기가 덜 들어오는 곳에 이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한 어른들의 배려였다.
방은 낡은 나무와 낡은 이불, 낡은 바닥과 낡은 천장으로 온통 뉘렇고 닳은 것들 투성이여서, 꼭 세상과는 동떨어진 곳 같았다.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어린 아이마저도 오래된 무명옷 마냥 닳고 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는 인간의 사념 때문임을, 이 작은 세상의 근심이 물이 새는 지붕마냥 이곳에 졸졸 흘려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설이 장 안의 옷가지를 들고 윤종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미지근한 물에 천을 적셔 새의 자그마한 몸뚱아리를 살살 닦기 시작했다. 추위로 얼어 굳어진 몸을 풀어주고 피를 닦기 위함으로 보였다. 윤종은 여전히 말이 없는 유이설의 옆에서 쭈뼛하게 계속해서 서 있기가 민망하여 소리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살짝 바랜, 원래는 하얀색이었을 천에 검붉은 것이 묻어나왔다. 이설이나 윤종과 비슷한 아이 또래들은 그것을 보고 겁을 먹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설은 그저 담담하였다. 꼭 그것이 원래 자신의 일이었던 듯이.
윤종은 그저 자신의 어린 사고를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고작 한 살 더 많지만, 훨씬 더 큰 어른 같고 어려운 사고를. 유이설은 항상 물 안의 기름 같았고, 설원 속 매화와 같았다. 항상 홀로 지내며, 말도 거의 하는 일이 없었다.
유이설은 원래부터, 그러니까 자신이 기억하는 순간부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을 계속해서 휘둘렀다. 아마 잠을 자거나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머릿속에는 오직 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이설과 대우할 수 있는 기회는 이렇게 이른 새벽에 우연히 마주친 경우 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유이설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하느작거렸다. 그의 손에는 굳은살이 간간이 박혀있었다. 그런 손까지도 왠지 모르게 슬펐다.
무심하리만큼 담담한 저 사고는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높다라고도 고결한 뜻이 있어서, 자신과 같은 범인은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길로 걸어왔고, 또 앞으로도 걸어갈 것임을 윤종은 그저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
이튿날, 윤종은 눈을 뜨자마자 마당으로 나왔다. 어제 내내 어른들이 화산의 제자들이 다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마당을 쓸었기에, 윤종이 거기서 더 할 일은 없었다.
윤종은 야외에 있되, 어제와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평소 때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늘만큼은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어제 아침, 다친 새라는 유이설과의 작은 연결고리가 생긴 이후로 전보다 더 친밀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어렵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고이지만, 또래의 같은 관심사를 가진 이가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기꺼웠다.
이설도 그 날 이후로 윤종을 평상시보다 더 친근하게 대하는 것 같았고,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윤종은 매일 아침 이설의 처소로 달려갔고, 유이설은 그런 윤종을 맞았다. 이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윤종도 원채 말이 없는 편이라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곁에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은 각별한 사이가 된 것 같았다.
새는 조금씩 회복되어 새까만 눈동자가 조금 보일정도가 되었다. 상처도 거의 아문 것 같았다. 아직 일어난다거나 하는 건 무리였지만, 하늘이 그리워 못견디는 것인지 이따금씩 날개를 움찔거릴 뿐이였다.
어느새 윤종은 그 새에게 정을 붙여 버렸다. 새가 고통스러워 눈을 깜박깜박거릴 때, 몸통의 털을 손가락으로 살살 쓸어주곤 했다.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과, 공을 쏟은 대상이 날로 갈수록 회복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실로 커다란 기쁨이였다. 윤종의 마음속에는 그렇게, 자그만한 희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새벽공기는 아직 차갑지만 화산 위의 눈은 녹아서 흰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 어느날의 아침, 윤종은 어김없이 기상하여 나갈 채비를 하였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설의 처소로 가던 그때, 윤종이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는 계속 방 안에 있던 유이설이 어쩐 일인지 마루에 걸터 앉아 겨울 바람을 쐬고 있었다.
윤종은 의아하여 그 옆에 다가갔다. 윤종을 발견한 이설의 부동의 얼굴이, 오늘은 무언가가 달랐다. 아주 미세하게 말이다. 항상 평온함을 유지하던 입꼬리는 우는 것인지 아닌지 살짝 말려 있었고, 까맣고 영랑한 빛을 내는 눈동자에는 당혹이 서려있었다.
유이설이 긴 침묵 뒤에 입을 움찔거리더니, 한마디 말을 느리게 내뱉었다.
“죽었어.”
“….”
“일어나서, 날개. 피다가, 뒤로 넘어갔어….”
“….”
…
현종은 조반을 먹고, 이설의 처소로 향하고 있던 참이였다. 평소에 말은 없어도 꼬박꼬박 식당에 오던 유이설과 윤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요새 둘이 붙어다니던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현종은 화산 사람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겉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윤종이 함께 있어준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아이들이 친해지는 데에는, 자신같은 늙은이가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그저 조용히 눈으로 좇을 뿐 크게 상관하지 않는 체 했던 것이다.
오늘같이 겨울바람이 추운 날에, 현종은 유이설을 발견해 데리고 왔었다. 그리고 1년하고도 조금 모자란 올해 초봄, 윤종이 화산에 왔다. 그 두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을 만큼 겨울을 너무 오래 지냈고, 그만큼 추위를 너무나도 많이 견뎌내왔다.
화산에는 이설과 윤종 밖에도 어린 제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또 그들에게 정을 느끼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 둘에게 느끼는 것은 편애가 아닌, 그저 종류가 다른 무언가였다. 이를테면, 현재 백자배는 대사형을 맡고 있는 백천을 중심으로 유대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것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다만, 아이들이 무리를 이루면, 자의로든 타의로든 겉도는 이가 필히 생기기 때문에, 백천이 아무리 노력을 하여 아껴주어도 모든 제자들이 똑같이 지낼 수는 없는 것이다.
‘어렵구나.’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만족시키는 것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쉽지 않은 것이었다.
현종은 갑갑한 마음을 찬공기에 흘려보내려는 듯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러한 생각을 하다, 유이설이 지내는 방에 다다랐을 때, 현종은 방문이 살짝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문 틈으로 유이설과 윤종이 살짝 보였다. 헌데 무엇이 조금 이상하다.
유이설은 쭈그려 앉은 채 황망히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고, 윤종은 그 옆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치도 못한 풍경에 놀란 현종은 인기척을 내는 것도 잊고 문을 활짝 열었다.
“어…, 장문인….”
윤종이 당황한 듯이 울먹이며 불렀다.
“아니…. 이게…. 무슨 일….”
윤종은 확실히 침착히 어른에게 상황을 설명할 여유가 없었지만, 옆에 있는 사고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모양이라 자신이 횡설수설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윤종이 그동안 저의가 산새를 거두어 돌봐주었다고 말하자, 그제야 현종의 눈에 바닥에 놓인 미물이 들어왔다. 어린 아이들이 소동물을 지키려 그 동안 공을 쏟았다는 것과, 그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들으니 그저 황당하였다.
가엾은 ‘그것’은 비상하려는 준비를 하다가 뼈가 부러졌던 것인지, 상처가 터졌던 것인지 그대로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바로 저 하늘로 날아가려고 하다가.
현종은 일단은 울고 있는 윤종을 달래고, 그 옆에서 멍하니 있는 유이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현종은 화산의 전각 뒤쪽에 있는, 개울을 넘고 오솔길을 걸었다. 채 녹지 않은 살얼음과 마른 풀덩이들이 발에 밟혀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겨울의 산길은 생명이 모두 숨어들어 보이지 않지만, 존재만으로도 영험한 존엄이 깃들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바람은 아직 차가웠고, 얼음 낀 시냇물은 아주 조용하고 느리게 흘렀다.
현종은 산 속 돌이 적고 흙이 고른 곳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불쌍히 죽은 산짐승을 고이 묻어주었다.
화산 속에 작은 무덤 하나가 생겼다. 현종은 눈을 감고 짧게 도호를 외운 후 눈을 떴다.
세 사람이 선 곳 바로 뒤에는 화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벼랑이였다. 눈이 흙과 돌 위에 얇게 쌓인 회색빛이 햇살에 비쳐져 눈부셨다. 그 환한 세상을, 윤종은 뿌리치지 못하고 홀린 듯 뒤돌아보았다.
그 광활하고도 웅장한 풍경은 황홀경을 불러일으킨다기 보다는 해방감과 동시에 일종의 위압감을 주었다. 모든 것이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마치 이 화산에 걸려 꼼짝치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토록 거대한 자연을 보다보니 인간이란 건 보잘것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윤종을 바라본 현종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도를 따라하는 도인이나, 세상은 어느 한 가지 이치로 돌아가지 않아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
윤종은 뜬금없는 현종의 말에 영문을 모른 채 눈을 크게 떴다.
“아마도 이 새는 하늘세계에서 원신천존을 모시는 일을 맡거나, 그래. 어쩌면, 내세에 다른 것으로 태어나 살아갈 지도 모르겠구나.”
그래, 내가 모르는 것. 그것이 도고 길이겠지.
현종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윤종 옆에 서서 광대한 화산을 바라보았다.
현종에게 화산은 항상 모순투성이였다. 화산의 옛 영광만을 쫓기에는 자신 앞에 닥친 어려움이 너무도 많았더래다. 그렇기에, 한때는 화산과, 그것을 지키는 이들의 가여운 운명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차가움과 따듯함, 낡은 것과 어린 것, 상처 입은 것과 치유 된 것, 과거와 미래, 미련과 나아감은 오래도록 화산에서 공존해왔다. 이 모순투성이고, 서글픈 화산은 전에도 그랬었고, 앞으로도 자신의 터전일 것임을 현종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옆의 두 아이는, 아무런 죄 없이 겨울을 보냈어야만 했고, 또 화산으로 왔어야 했다. 그러니, 언젠가 이들이 떠날 날이 온다하여도 자신이 그것을 막을 권리는 없으며, 최대한 그들을 존중해줘야 할 것이다.
저 어린 여자아이도, 곤경에 처한 미물을 구해주고 그 동시에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은 것은, 그저 그러한 행동이 낯설었었던 것을 안다. 그저, 미숙하여 그랬을 뿐이다.
‘그렇기에 더욱 알려주어야 겠지.’
노인의 검은 눈동자에 선의가 담긴 다정함이 느껴져, 윤종은 고개를 떨구었다. 음울하고 가라앉은 마음 한 켠에 온기 한 줌이 들어온 것만 같았다.
윤종은 항상 이 세상의 어둠을 마주하여 살아왔다. 그렇기에, 세상이 아름답다는 말에 공감을 하지 못했건만, 놀랍게도 그 앞에 펼쳐진 장관은,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현종이 말하려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고 윤종은 생각하였다. 비록 삶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차갑고 서러운 것일지라도, 이 세상은 넓고, 산은 아름답다.
현종은 어쩔 수 없이 화산에 오게 된 유이설을 언제든지 보내줄 각오를 하고 있지만, 그의 사고는 그냥, 계속 검을 휘두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이설은 조용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구름같이 투명하였다.
윤종은 유이설의 삶이 어떠하였는지, 또 어떤 심정일지 알지 못하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계속 화산에 남는다면 그 옆에서 지켜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물 웅덩이의 기름 같고, 공기 속 안개 같은 사고가 사람처럼 사는 것이 보고 싶어졌다.
‘만에 하나라도 날이 따뜻해지고 나서, 모든 것이 잘 되는 날이 온다면….’
입춘은 아직 멀었건만, 봄을 알리는 훈훈한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