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소청명] 너는 또다시 내게로
포스타입에서 5장으로 나뉘어진 것을 합쳤습니다.
소장본판이기 때문에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전체 무료 공개였기에 그대로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연후 드림.
一
장일소가 죽었다. 자신이 가장 바란 형태로.
바라지 않았다면 어떤 죽음이 그를 침범할 수 있었겠는가. 장일소는 목에서 꿀럭이는 피를 만끽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궁금해했다.
과연 삶 이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여덟 개의 지옥을 무한히 돌아야 할까. 장일소는 선인이 아니다. 나락이 있다면 빠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고통과 절망을 예상하며 그는 눈을 떴다.
“시, 시체가…! 시체가 일어났다!”
귀를 파고드는 비명에 머리가 울렸다. 장일소는 몸을 일으키며 제 상태를 확인했다. 누워 있었으니 관이 흘러내려 머리카락이 풀어헤쳐진 것이야 당연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달라진 것이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허전한 손가락과 귀 정도. 놀랍게도 잘렸던 목조차 그런 적이 없다는 듯 붙어 있었다.
“…이봐.”
앞에서 소리를 지르던 사내에게 말을 걸자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히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방금까지 숨이 끊어져 있어 신나게 장신구를 챙기던 탓이다. 장일소는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여기는 어디지? 아니, 사패련은, 만인방은 어떻게 됐지?”
“사, 사패련?”
아무리 양민이라 한들 온 중원을 휩쓴 정사대전의 한 축을 모를까. 장일소가 답답한 듯 미간을 찡그리자 사내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백 년 전 와해된 사파 연합 말인가?”
“…백 년?”
장일소가 멈칫하며 되묻자 사내는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화검존께서 패군의 목을 벤 이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 않소. 그 일이 벌써 백 년인데, 어디 산에서 도라도 닦다가 오셨나?”
버릇처럼 비아냥대던 사내는 순간 장일소와 눈을 마주치고 넙죽 고개를 처박았다. 생긴 것만 본다면 도사는 무슨, 사파 놈들의 수장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섬뜩한 인상이지 않은가.
잠깐, 사파의 수장?
“하, 백 년. 백 년이라는 말이지….”
장일소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에 분이 묻어나온다. 그러니까, 외양도 무공도 몸 상태도-목이 붙어 있는 것을 제한다면- 그대로인 상황에서 백 년이 지나갔다는 뜻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세상에 있을 수가 있나. 하지만 장일소는 현실을 깨닫는 자라, 두말없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뭐, 뭐요?”
사내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절하지 않은 것이 용했다. 동관 어느 매에 웬 화려한 남정네 시신 하나가 놓여 있기에, 장신구나 관을 벗겨내 팔 생각에 싱글벙글하고 있지 않았나. 운수 좋은 날이 따로 없다 생각하던 중 시신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기만 했다면 두고 도망이라도 치던가, 겁박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 숨 막힐 정도로 사납게 백 년 전 일을 묻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소름이 끼쳤다.
“아아, 그래. 그렇게 됐구나. 그렇게 됐어.”
오히려 나아진 상황이 아닌가. 더 이상 제 앞길을 막아설 이가 없으니. 장일소는 옷을 털고 사내가 쥐고 있던 제 가락지를 빼앗아 다시 꼈다. 머리를 틀어 올리고 관을 쓰고 나니 이전의 제 모습을 그대로 되찾아온 기분이었다. 장일소는 기분 좋게 웃으며 앞의 사내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가서 전하렴. 누구든 상관 없단다. 네가 아는 이든, 모르는 이든. 널리 널리 퍼뜨리도록 해.”
“무, 무엇을…. 말입니까?”
어느새 공손해진 사내의 말투에 장일소는 파안했다. 그래, 이래야지. 한 번 패했다 하나 여전히 장일소는 공포를 몰고 오는 존재여야 했다. 백 년의 공백이 대수인가. 여전히 그는 패군이다. 다른 이의 공포를 나룻배 삼아 피로 물든 강을 타고 오를. 그는 가볍게 검지손가락으로 입술을 훑고는 즐거이 대답했다.
“사패련의 련주. 만인방의 방주. 백 년 전, 그 매화검존이라는 자가 죽이지 못한 패군 장일소.”
장일소는 싱긋 웃었다.
“그가 돌아왔다고.”
*
이름값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장일소는 가만히 중얼거리며 새로 장만한 전각을 돌아보았다. 처음 강호에 발을 딛었을 때를 생각하니 속이 쓰리면서도 그는 만족했다.
청명은 매화검존이라는 별호를 달고 등선했다 했다. 그의 이름값이 높아질수록 양민들은 그 매화검존이 인정한 호적수를 궁금해했다. 본래 말이라는 것은 주체가 없을수록 허황되게 부푸는 법이라, 장일소의 이름 석 자는 양민들이 잊을 수 없는 것이 된 지 오래였다.
“마음에 드는구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邪의 무리는 그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사파에 발을 들이면서 그의 이름을 추종하던 이들이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로 그를 상상하고 추리하던 그들은 장일소를 마주치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온 몸에서 내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만 보아도 그가 사칭이 아님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장일소는 다시금 사파의 위에 군림했다.
“광서가 이미 정파 소굴이 된 것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리듯 말하고 있지만 제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는 이들이 한가득하다. 다시 말해, 그는 일러두고 있었다. 언젠가는 광서를 되찾아 올 것이라고. 어차피 제가 눈 뜬 동관은 광동이니,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든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재건된 만인방은 거칠 것 없이 제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럼 잠시 둘러봐야겠구나.”
그 말이란 아무도 수행하지 말라는 뜻이다. 부하들이 고개를 숙이자 장일소는 잠시 호가명의 생각을 했다. 호가명은 장일소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제 가슴에 칼을 박아넣었다 했다. 눈을 내리 깐 채 얼굴을 그리듯 기억을 더듬으며, 장일소는 걸음을 옮겼다.
동관은 평화로웠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새로운 사파의 거두가 자리를 잡았다는 소문에 다들 사시나무처럼 떨었던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 만인방은 양민을 수탈하고 죽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만인방 지척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정파가 있는 곳에 모여 살 듯이.
하지만 장일소가 공포를 몰고 오는 것은 그가 의도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양민들이 그를 슬슬 피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장일소는 익숙하게 받아들이며 그저 걸었다. 사파가 지배하는 땅의 평화로운 일상이란, 사邪라는 글자 하나에도 이를 가는 정파가 감히 침범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야! 저 새끼 잡아!”
앞쪽에서 큼직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날쌔게 달려가자, 장일소는 저도 모르게 작은 인영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아직 아이인 듯 들린 무게가 가벼웠다. 장일소는 아이를 들어 얼굴을 슬쩍 보았다가 표정을 굳혔다. 검은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동여매고, 예의 그 날 선 눈매를 찡그린 아이의 이목구비는 단박에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구든 당혹스럽게 만들 기감을 마주치고도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미간을 구기는 것 역시도. 장일소는 아이의 손에 들린 주머니를 흘긋 바라보았다. 소매치기인가.
“방, 방주님.”
아이를 쫓던 사내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이자 장일소는 빙긋 웃었다. 주머니의 주인일 터다. 장일소는 아이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얘야. 주인에게 돈을 돌려주련?”
“이걸 못 가져가면….”
기특하게도 아이는 만인방주를 앞에 두고도 말대꾸를 했다. 주위의 상인들이 사색이 된 채 아이를 바라보았지만 장일소는 그저 웃으며 다시 한번 부드럽게 아이를 타일렀을 뿐이다.
“어서.”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무는 얼굴조차 어찌 저리 닮았을까. 아이가 주머니를 건네자 사내는 더 말하지 않고 장일소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짓 한 번으로 그를 물린 장일소는 아이에게 물었다.
“개방의 무결개더냐?”
아이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방지다 할 수 있는 행동이었지만 넘어갈 정도의 어리광이었다. 아니, 장일소에게는 오히려 기꺼운 행동이었다. 장일소는 다시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지?”
고갯짓으로 넘어 갈 질문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아이가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장일소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까지의 이름은 무용할 테니까. 장일소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갈 데가 없을 테니, 따라 오거라. 만인방에 들여주마.”
“저를요?”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다니? 걱정 말렴. 잘 입히고 먹여줄 테니.”
잠시 고민을 하는 듯 눈을 내리깔던 아이는 이내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조차도 익숙해, 장일소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때의 그도 이렇게 순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니, 그러면 재미가 없었으려나? 의미 없는 생각일 뿐이었지만.
“옛 이름은 버리거라. 개방이 찾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아이 입장에서는 정을 붙일 만한 이름도 아니었고 아이가 보기에 개방은 그 어떤 것보다 커 보였으니 책잡혀서 좋을 것 없었기 때문이다. 장일소는 문 앞에 멈추어 서서 아이를 마주 보았다. 지저분한 넝마를 입은 와중에 자신을 올려다보는 말간 얼굴에서 장일소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을 찾았다. 제가 알던 어떤 이도 남아 있지 않은 세상이기에. 제 목을 친 이와 단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기분이 고양될 줄이야.
“이 문을 지나면 많은 것이 바뀔 거란다. 준비 되었니?”
장일소의 말에도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 한 줄 스치지 않았다. 만족스럽다. 만족스러워 미칠 것만 같다. 흥분감을 애써 억누르며, 장일소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네 이름은, 앞으로 청명이란다.”
가장 증오했던 이름을. 가장 얽매였던 이름을.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고, 앞으로도 기억에 남을 이름을 읊조리며 장일소는 웃었다. 가장 해사하게, 가장 아름답게.
二
만인방의 청명이라, 이 어찌도 이질적인 이름인지.
장일소는 쿡쿡 웃었다. 충동적으로 청명이라 이름 붙이기는 하였으나 그 두 자는 이미 온 중원에 널리 퍼져 있었다. 이에 장일소는 아이를 부를 때 이름을 온전히 부르지 않는 것으로 제 속내를 숨겼다. 오직 아이와 장일소만이 그 이름을 알았다.
“아명아. 이리 온.”
만인방의 누군가와 대련을 하고 있던 아이가 쪼르르 달려오자 장일소는 다정하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허리께밖에 오지 않던 아이의 머리가 가슴팍에 닿을 만큼 자랐다. 잠시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던 장일소는 뒤에 있던 아이의 대련 상대에게 가볍게 손짓하고는 한 걸음 물러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참 기가 막히지 않은가. 시비에게 자연스럽게 제 애병을 맡기는 모습이나, 땀을 닦아주는 영견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모습은 이전의 청명을 생각한다면 보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모습이다. 금사가 수놓아진 비단으로 만든 무복과 손목을 묶었음에도 늘어질 정도로 펄럭이는 소매를 당연시하는 청명이라. 장일소는 치기임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마음에 차서다.
“왜 불렀어요?”
이름을 듣자마자 달려온 주제에, 아이가 당돌하게 말했다. 아이는 처음 만인방에 들었을 때부터 장일소에게 존댓말과 반말 사이를 내뱉었다. 주위 사람은 기함하기도, 미간을 찌푸리며 혼을 내려고도 했지만 장일소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너그러이 용인해주었다. 오히려 기꺼워한 듯도 했다.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이라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러려니 하며 지나가게 되었지만.
“해가 지지 않니. 오午시부터 대련을 했다 들었는데.”
“아직 모자라는데요.”
“저런. 그래도 식사는 해야지.”
“그러니까 방주님이 대련해주면 되잖아요. 저런 조무래기들 말고.”
오만하기도 하지. 방금까지 대련하던 사내가 불편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장일소는 쿡쿡 웃으며 다정하게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봐주면 싫어할 거면서 투정을 부리는구나. 나는 널 오래 보고 싶은데 말이다. 자, 가자.”
하고 싶은 것은 웬만하면 다 해주지만, 가끔 타협점을 없애버리는 장일소의 버릇은 아이도 알고 장일소도 알았다. 아이는 별 말 하지 않고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장일소와 나란히 걸었다. 만인방에서, 아니, 온 중원에서 오직 아이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아이의 존재는 금방 소문이 퍼졌지만 정작 아이가 어떤 얼굴을 가졌는지나 어찌 자라고 있는지는 아는 이가 드물었다. 청명의 얼굴이나 성격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기에 철저히 막은 탓이다. 그나마 흘러나간 소문이란 장일소가 아이를 아주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가볍고 당연한 말뿐이었다. 장일소는 제 목을 벤 이를 닮은 아이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퍼붓고 있는지 몰랐다. 그렇게 장일소는 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청명을 알던 이가 본다면 그 이질감에 기절할 이 아이를. 얼굴은 청명을 똑 닮았건만, 하는 생각이나 행동은 장일소의 축소판인 이 아이를.
식사는 아이의 처소에서 이루어진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이가 지금보다 한참 어릴 때였던가. 식사 예절을 가르치기 힘들다 고하는 시비 탓에 장일소가 친히 걸음한 것이 시작이었다. 굳이 바꾸고자 한다면 바꿀 수야 있었겠지만 장일소는 식사를 핑계로 아이의 방을 둘러보는 것을 좋아했기에 놔두었다. 모두 제가 건네준 것이 아닌가. 이 아이가 거주하는 곳뿐만 아니라 아이가 생각하는 연결고리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모두 제 손이 아니 거친 곳이 없기에 장일소는 기꺼이 식사 때마다 아이의 처소에 행차했다.
그런 그가 이질적인 무언가를 잡아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건…. 처음 보는 장신구구나.”
자그마한 비녀였다. 머리를 틀어 올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이기에 굳이 사 넣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비녀를 찬찬히 바라보던 장일소의 표정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비녀 끝에 달린, 자세히 보면 보이지도 않을 음각의 꽃 하나가 눈에 들어왔어서다. 그래, 매난국죽梅蘭菊竹이니, 장신구에 쓰여도 이상하지 않을 꽃이지. 헌데 이것이 왜 아이의 방에 놓여 있을까. 그의 귀환으로 인해 회자하는 빈도가 줄기는 했으나 패군은 매화검존의 검에 목이 날아갔다. 그런 패군이 총애하는 아이의 방에, 감히 매화라.
“엇. 그거….”
아이가 떨떠름하게 시선을 피하자 순간 장일소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아이는 크게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뜨끔한 반응. 작은 사고를 쳤을 때의 반응과 흡사하다.
“그으, 오늘 잠깐 시장에 나갔다 왔는데요….”
“시장에?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몰래! 몰래 나갔다 왔어요. 그냥 답답해서. 근데 지나가던 땡중이 저를 붙잡더니 딱 그러는 거예요.”
장일소의 기가 요동친 탓에 아이는 그를 살피기보다는 내력을 말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장일소는 아이의 가련한 노력에도 표정을 풀지 못했다. 무엇보다, 이야기가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청명이라고. 저 보자마자 청명이라고 불렀어요.”
“…뭐?”
“방주님하고 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봤더니 비녀를 주더라고요. 이걸 보면서 무언가가 떠오르거든 소림으로 찾아오라고. 뭐, 중이니까 당연한 소리겠지만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를 보며 장일소는 한숨을 삼켰다. 듣자 하니 누군가가 기감을 느낀 모양이다. 아이의 기감은 청명을 쏙 빼닮았으니까. 정작 아이는 비녀를 봤음에도 별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매화를 본 적이 없을 아이이니 그 꽃이 매화라고 생각지 않은 듯했다. 장일소는 비녀를 집어 들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알았다. 비녀는 필요하면 새로 사 줄 테니, 밥이나 먹자꾸나.”
몰래 빠져나갔다고 혼날 줄 알았는지, 아이의 표정이 밝아졌다. 장일소는 내심 안심하며 젓가락을 들고 반찬을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먼저 젓가락을 들지 않으면 식사를 시작할 수 없다 가르친 것은 자신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식사를 거르지 말라 가르친 것 역시 자신이라, 방금까지 안절부절못하며 눈동자를 굴렸던 아이는 열심히 입에 음식을 밀어 넣었다. 만족감과 불안함이 섞인 탓에 장일소는 식사를 남겼다.
평소라면 차까지 마시고 나섰을 테지만, 장일소는 식사만 마치고 아이의 처소를 나왔다. 두고 생각할수록 불안함에 화가 치밀어서다. 소림의 제자 중 매화가 새겨진 장신구를 들고 다닐 놈이 세상천지에 어디 둘뿐이겠는가. 그 애송이가 분명하다. 청명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그 소림의 일대제자. 백 년이 지났으니 산 송장이나 다름 없을 이가, 굳이 만인방의 지척에 와 아이를 찾을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저도 모르게 힘에 손이 들어가자 비녀가 맥없이 일그러졌다.
경고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는 여전히 장일소만을 바라보고 있고, 시간이 조금만 흐른다면 그 땡중도 곧 죽을 테니까. 하지만 장일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소림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 년 전의 망령은 자신으로 족했기 때문이다.
*
“찾아오실 줄 알았소이다.”
숭산의 산꼭대기 부근에 위치한, 감히 소림의 제자조차 침범할 수 없는 작은 암자의 문이 바스러졌지만 암자의 주인은 별 기색 없이 합장했다. 장일소는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작은 소반 위에 방금 우린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두 잔이 놓여 있다. 장일소는 백 년의 시간을 겪지 못했다. 하지만 혜연은 아니었다. 그 간극이, 그는 퍽 마뜩잖았다.
“앉으시오. 그때의 마지막 연을 내 손으로 끊을 일은 없으니.”
연緣이라. 그래, 악연 역시도 인연이다. 장일소는 소반 앞에 앉아 차를 입에 머금었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씁쓸하고 향기로운 매화차. 젠장, 이 백 년 묵은 구렁이는 저를 엿먹이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장일소는 한 입 머금은 차를 내려놓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찾아온 게지?”
“인연생기因緣生起외다. 산 구석이라 한들 시주의 이름 석 자가 안 들리지는 않소. 자연히 그때의 연을 회상하게 되고, 그 회상이 그 아이의 기감을 알렸을 뿐이오.”
장일소는 제가 숫제 어린 아이처럼 굴고 있음을 알았다. 기댈 곳이 있는 사람은 아이처럼 투덜대고 떼를 쓰면서도 그것을 놓지 못한다. 꼴사납게도, 한참 어리던 애새끼 앞에서. 중후한 노년이 되어 말투 하나하나에서 섬세한 품격마저 느껴지는 노승을 애새끼라 칭한 장일소는 다시 물었다.
“기감과 얼굴만 닮았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지 않나. 고고하신 소림의 전 방장께서 모르실 리가 없을 텐데?”
“번뇌에서 탈피하지 못한 영혼은 윤회할 수밖에 없소. 청명 시주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무엇보다 청명 시주는….”
혜연이 잠시 입을 다물자 장일소는 눈에 힘을 주었다. 어쩌면, 이 말을 듣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무의식중에 눈치챘을지 모른다. 장일소가 혼란스러운 눈을 한 반면, 혜연의 눈은 명경지수마냥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속세의 이들은 모르나, 청명 시주는 등선하기 전 주위 인들에게 숨기고 있던 것을 드러내고 떠났소.”
“숨기고 있던 것이라….”
장일소는 기억을 더듬어 청명을 끄집어냈다. 아니,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장일소에게는 몇 년 되지 않은 기억이었으니까. 그 나이답지 않게 원숙한 심계와 치기라 볼 수 없는 행동들. 청명은 그 당시의 법정 이상의 능구렁이였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몰라도 보통 일은 아니라 짐작하고 끝냈던 생각이 스멀스멀 머리를 잠식한다. 하지만 이어지는 혜연의 말에 그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백 년, 아니, 지금은 이백 년이군. 이백 년 전 대산혈사에서 영면한 매화검존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말이오.”
“…뭐?”
“우리가 아는 청명 시주 역시 매화검존의 별호를 달았다고는 하나, 본래 매화검존이라 하면 천마의 목을 벤 결사대의 일원을 칭하는 별호. 청명 시주는 그 분의 기억을 갖고 한 거지의 몸에 들어왔다, 그리 말하셨소.”
장일소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환생, 환생이라. 그것이 어디 그리 쉽게 일어나던 일이던가. 풍문에서조차 누군가의 바람일 뿐인 것이 환생 아니던가. 하지만 장일소는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청명의 행동을, 의지를,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숙이라는 단어 앞에 환생을 붙이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혜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윤회를 한 번 경험한 이이니, 두 번 경험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닐 터. 그 아이가 매화를 보고 기억을 찾아 화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 아이에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소.”
“불자가 속세에 간섭하려 들다니, 사필귀정이 괜한 말이 되었군.”
“그 말도 맞소이다. 그리 돌려 말씀하시다니, 시주께서도 예전에 비해 퍽 온화해지셨구려.”
혜연이 작게 웃자 장일소는 속이 불편해졌다. 온화? 그 말이 어디 장일소에게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장일소는 은원을 아는 자다. 정확히 말하면 은혜를 입는 것을 못 견디는 자다. 혜연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을 무시하며 그는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혜연은 인자하게 웃었다. 곱게 나이 든 얼굴에는 번뇌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시주께서야 육신과 함께 돌아온 셈이니, 윤회라 하기는 무엇하지만 어찌 되었든 큰 의미에서 청명 시주와 동병상련일 터. 홀로 계신 것보다 위안이 되실 게요.”
“왜 내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혜연은 말하지 않겠다는 듯 입을 다물고 차를 마셨다. 더 들을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장일소가 일어나자 혜연은 합장했다.
“아미타불, 그리도 싸웠건만 그 또한 인연이라고, 소승만이 알던 일을 덜어낼 수 있어 다행이외다. 살펴 가시오.”
장일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암자를 나가자마자 머릿속이 잔뜩 헤집어졌기 때문이다.
그래, 매화검존. 백 년이 가까운 세월을 살았던 정신이니 그리 행동했겠구나 싶었다. 혜연이라도 만난 데다가 제 이름은 물론 정사대전 당시의 이름이 여기저기 널려 있던 자신과는 달리, 그때의 청명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무공도, 신체도, 아는 이도, 심지어는 제 사문조차도. 구파일방에서 떨어져 나갔다 할 지라도 화산은 화산이니 매화검존이 귀환했다 하면 빠르게 명성을 얻었을 터였지만 육신과 함께 돌아온 자신과는 다르게 청명은 정신만 돌아온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몇 년 만에 정파를 끌어모았고, 화산을 부흥시켰다. 새삼 경탄스러워 장일소는 헛웃음을 지었다.
만인방에 돌아오자 부하들과 시비들이 혼비백산해 그를 맞이했다. 아무 언질도 없이 방주가 사라진 탓에 다들 혼란스러워한 듯했다. 장일소는 한 손을 휘적여 사람을 물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향해 뛰어들었을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명은 어디 있지?”
“처소에 계신 것으로 압니다.”
“알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제가 지금까지 길러온 아이는 잠을 자고 일어나 자신을 보느니 밤을 새워서 자신을 맞이할 성정이다. 더해서 차조차 마시지 않고 떠났으니, 자신을 잘 아는 아이가 어떤 애먼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장일소는 아이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아명아.”
부러 작게 목소리를 냈다. 방 안에서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리자 장일소는 조금 안심했다. 장지문이 벌컥 열리고 아이가 장일소를 올려다보았다. 제 표정을 볼 수는 없지만, 장일소는 제가 눈앞의 아이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약간의 당황과 약간의 안심. 청명의 낯을 한 채로 장일소의 표정을 하고 있는 아이가, 장일소는 처음으로 낯설었다.
“어디 갔다 왔어요?”
“이런, 걱정이라도 한 거니? 미안하구나.”
동문서답인즉,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아이는 고개를 주억거릴 뿐 달리 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떠나지 않은 것에 안심한 듯했다. 장일소는 그런 아이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청명이었다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말을 캐물었을 텐데.
“늦게 들어왔는데 가서 자요.”
“…자는 것은 보고 가마.”
대답이 한 숨 느리다. 아이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지만 장일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침상에 눕혀 이불을 덮어주었다. 가끔 아이를 재우고 간 적도 있었기에 어색함은 없었다. 가슴을 일정하게 도닥이는 손길에, 그리고 하루 종일 가졌던 긴장감이 풀어져 아이는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장일소는 그런 아이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제멋대로 뻗은 검은색 머리카락과 보들보들한 피부.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도톰한 입술. 장난스러운 인상. 단박에 보아도 누군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외양이다. 혜연조차 이 아이를 청명의 분신이자 환생마냥 대하려 하지 않았는가.
부혜생아父兮生我 모혜국아母兮鞠我. 아비는 아이를 낳고, 어미는 아이를 기른다 하던가. 청명을 닮고 제가 기른, 사랑해마지않을 이 아이는 그렇다면 어떤 의미를 담는가. 그 생각까지 도달한 순간 장일소는 제 얼굴을 틀어쥐었다. 아, 젠장. 부정하느라 애써 막았던 둑이 터져 생각이 흘러나온다.
[장일소!]
예의 그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날카로이 벼려진 검을 들고 달려오던 청명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장일소는 그때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그리도 좋을 수 없었다. 온 중원을 통틀어 자신을 그리도 오싹하게 만들고, 즐겁게 만들고, 긴장하게 만든 이는 지금도 그때도 단 한 명뿐이다. 그랬기에 그는 기꺼이 제 목을 내어줄 수 있었다.
그런 청명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를 주워서 자식으로 키운 이유. 그 아이에게 애정과 관심을 주며 오냐오냐 기른 이유. 아이를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한 이유. 도발 당했음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혜연을 찾아가 청명의 이야기를 들은 이유. 뻔하지 않은가.
장일소는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그는 목이 베이기 직전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목이 베이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三
아이, 청명은 혼란스러웠다.
개방의 무결개로 살아간 어린 시절이 까마득할 정도로 청명은 수없이 많은 것을 누려왔다. 맛있는 음식, 부드러운 옷. 자신을 보살펴주고 우러러보는 사람들. 하지만 청명이 그 무엇보다 좋아했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뿐이었다.
장일소. 세상은 그를 사파의 거두이자 비겁하고 비열한 백 년 전의 망령이라 불렀으나 아이에게는 달랐다. 자신을 바라보며 짓는 미소는,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망령이 갖추기에 너무도 따스했으니까. 아이는 그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유가 있는 호의라기에 장일소는 제게 얻어갈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요즈음에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행동은 같았다. 여전히 장일소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제 몸에 맞추어 옷을 지으라 지시했고, 장신구를 가져다가 달아주었으며, 매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겉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장일소 역시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청명은 달랐다. 아무리 장일소가 눈치가 빠르다 하나 청명과 장일소 둘 중에서 눈치를 보는 이를 고르라면 당연히 청명 쪽이었다. 더욱이 개방 출신인 청명이 눈치가 빠르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떤 점이 달라진 것인지 알 수가 없기에 청명은 침묵을 선택했다. 그렇게 어색하지만 평온한 일상이 흐르고 또 흘렀다.
“아명아. 오늘은 술이나 한잔 해 보겠느냐?”
평소와 다름 없는 날이었다. 아니, 달리 생각한다면 특별한 날이기는 했다. 청명이 열 다섯이 되는 생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장일소도 청명도 만인방에 든 날을 더 특별히 여기기에 소리 없이 지나가는 날이기도 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당연히 다구가 들어올 것이라 생각한 청명은 탁자에 놓이는 술병과 술잔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셔도 돼요?”
“열다섯 쯤 되었으면 주도를 알 때가 됐지.”
누가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장일소는 술잔을 내밀었다. 청명은 눈치 좋게 술병을 들어 장일소의 잔을 채웠다. 그저 평소처럼 표정을 풀고 있던 청명은 술을 받는 순간 흠칫했다. 탐색하는 듯한 시선. 청명은 저 시선을 수도 없이 봐 왔다. 앞으로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장일소는 늘 만인방에 누군가가 방문하면 주렴 뒤에 청명을 세워두곤 했으니까. 다른 이를 탐색하는 시선. 다시 말해,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시선이다. 아이는 술을 단숨에 넘겼다.
“윽, 켁!”
하지만 술을 처음 배우는 이가 으레 그렇듯,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감각에 청명은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었다. 몰래 마셔보았던 탁주보다 독하다. 저도 모르게 눈꼬리에 달린 눈물을 닦아내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장일소가 보였다. 청명은 당황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제게 만족과 불만족을 표현한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헌데 이 눈은….
“방주님?”
“…역시, 아직 네게는 조금 일렀나 보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지. 안 그러니?”
대답이, 또다시 한 숨 느리다. 장일소가 유독 생각에 잠긴 날이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조차도 모를 것이다. 오직 청명만이 알았다.
시비를 시켜 순한 것으로 바꿔주자 청명은 홀짝이며 술을 배웠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뱃속을 따스하게 데우는 것이나 이지가 흐려져 몽롱해지는 것 또한 기분이 좋았다. 주는 대로 받아먹는 청명을 보며 장일소는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그래야지.”
청명은 그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대를 충족했다고 생각했다. 앞선 술을 잘 마셨다면 더 좋았으련만. 청명은 몽롱한 정신으로 그와 마주 웃었다. 그것이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보는 장일소의 눈에 스친 달갑지 않은 기색은, 그저 술기운에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
열 다섯이면 다 자랐다 생각한 것인지, 장일소는 그 뒤로 아이를 대동하고 공식적인 자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그는 청명에게 반투명한 입 가리개를 하도록 했다.
패군이 애지중지한 탓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이에 대한 소문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것과는 달리 알려진 것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대신 청명이 안 것은 무궁무진했다. 만인방이 하는 일. 해야 할 일. 장일소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 그 여유로운 모습에 청명은 심장이 뛰었다. 주렴 뒤에서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꼭, 후계자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아명아. 이것 좀 보거라.”
허허벌판이 된 광서에 장일소를 따라 간 날이었다. 그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에 청명은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을 바라보았다. 어느 건물의 기둥을 받쳤을 주춧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본래 만인방이 있던 자리란다. 내 처음 눈 뜬 곳이 광동이라 그곳에 터를 잡기는 했으나…. 언젠가는 이 곳에 돌아오리라 생각했지. 감회가 새롭구나.”
새삼 추억에 젖은 장일소를 바라보며 청명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끔 잊는 사실이지만, 장일소는 백 년 전에도 사파의 거두였다. 아니, 거두이기만 할까. 그 사파를 한 데 모은 사패련의 수장 아니었던가. 죽었다 살아난 뒤 바로 만인방을 재건할 정도의 이름값과 실행력을 가진 패군을, 청명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만인방은 나의 요새란다. 아무것도 아닌 시절을 이겨낸 산물이자, 나의 이름을 단단히 받쳐 그 누구도 쉬이 넘길 수 없는 수식어이지. 언젠가는 네 손에 들어갈 테고.”
장일소는 몸을 돌렸다. 아직 어린 탓에 그를 올려다본 청명은 그의 눈이 또다시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이전이 약간의 기대를 담은 눈이었다면, 지금은 기대를 주었으니 그에 보답하라는 눈이다. 노골적이었다. 청명은 순간적으로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말해 봐. 원하는 걸 말이야.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뭐든 들어줄 테니까. 설사 그게….]
머리가 웅웅 울렸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무언가 달랐다. 다정했지만 냉혹했고, 부드럽지만 잔인하다. 제가 평소 듣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조금 더 흥미를 끈, 살심을 머금은, 그런 목소리.
“아명아, 안색이 안 좋구나. 괜찮니?”
그러니까, 자신을 한껏 걱정하는 이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분명 같은 사람의 것이다. 눈앞에 화려한 장포를 입은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지자, 청명은 이마를 문질러 정신을 차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장일소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 한번 머릿속에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가, 머릿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땅에 처박고, 더 필요하다면…. 그 신발이라도 핥으며 빌지. 제발 도와달라고. 제발. 제발….]
“…제발.”
청명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 말의 끝을 완성하자 장일소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청명 역시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끔벅였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낸 청명은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요.”
“…내가 너무 심각한 이야기를 했나 보구나.”
대답이 한 숨 느리다. 장일소의 눈이 다시 다정함을 품자 청명은 움찔하며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이 눈앞의 장일소와 겹쳐진다. 다를 것 없이 겹친 이목구비와는 다르게 눈빛은 전혀 달랐다. 이전까지는 본 적 없는 낯선 것. 하지만 지금,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 그것. 기대를 담기도, 시험을 하기도 하며 자신을 탐색하려는 그것. 표정 하나하나, 근육 하나하나를 뜯어 보는 그것.
“괜찮다니까요. 그냥 좀 의외였어서 그래요. 가지려면 기어올라 보라고 할 줄 알았거든요.”
청명은 대수롭지 않게 둘러댔다. 누군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보려 한다면 당장 멱살을 잡고 두들겨 팰 터였지만, 장일소가 그랬다면 말이 달라진다. 장일소는 피식 웃으며 한 손을 내밀 듯 뻗었다.
“자, 그럼 생각해보자꾸나. 네가 이 만인방의 주인이 된다고 말이다. 어떤 주인이 되고 싶으냐?”
이 물음은 시험일 것이다. 청명은 그리 생각하며 장일소를 바라보았다. 그는 죽어서도 살아서도 하늘만을 바라볼 사람이다. 그리고 청명이 생각하기에 만인방은, 그의 발판이었다. 그것을 밟고 뛰어오르든, 더 높여 손을 뻗든 그의 발밑을 받치는 것은 언제나 만인방일 것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어떻게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할 것 수 있을까. 청명은 장일소가 죽음조차 거스른 자라는 것을 간과했다.
“만인방이 잘되도록 힘써야죠.”
“그러니?”
“방주님이 절 키워줬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보답해야죠. 만인방을 키워서 이름만 들어도 정파 놈들이 대거리도 못 하게 만들 거예요. 저는….”
청명은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아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선언하듯이, 청명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저는, 만인방의 검이니까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장일소가 자신만큼 아끼는 만인방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일소의 미간이 좁혀지자 청명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야. 그럴 리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였다. 장일소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청명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언제나 두 번 말하는 법이 없었다. 청명을 가만히 바라보던 장일소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었을까, 다시 예전과 같은 얼굴로 돌아온 장일소는 자애로이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말이구나. 그래, 좋은 말이야.”
진심일까,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청명은 묻지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표정이라고 생각한 중에 언뜻 새어 나온 감정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명확히 알 수 없었지만, 청명은 기시감에 말을 줄였다.
“돌아가자꾸나.”
장일소가 훌쩍 단을 내려가자 청명은 묵묵히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슬쩍 장일소가 내려다보던 주춧돌을 눈에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장일소를 바라본 순간, 청명은 감정의 이름을 깨달았다.
불안함. 장일소가 갈무리하지 못한 것은 불안함이었다.
*
‘나답지가 않아.’
장일소는 머리를 짚었다.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것 같았다.
굳이 아이를 광서로 데려간 이유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그 곳에서 아이를 떠 본 이유도 알지 못했다.
광서에서 아이에게 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 주춧돌이 만인방의 전각 중 하나를 받치고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에는 없는 돌덩이였고, 관심도 없었다. 또한 장일소에게 만인방이란 그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일 뿐 크게 의미가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굳이 의미를 찾아내자면 그저 이름 정도. 하지만 굳이 그렇게 거짓을 말한 것은, 아이가 제 몸담은 곳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어서다. 그리고 아이는 제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최악의 대답을 했다.
‘화산의 검.’
만인방을 제 이름 높이는 데 이용할 뿐인 장일소와는 다르게, 청명은 오직 화산만을 생각했다. 온 화산이 그에게 의지했으니 그것을 이용해 천하제일인을 노릴 수도 있었음에도 청명은 그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는 화산을 위해 스스로를 철저하게 이용했다. 그랬기에 청명은 스스로를 화산의 검이라 칭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아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바란 것일까.’
아이가 청명을 닮기를 바랐을까. 그렇다기에는 아이의 말을 들었을 때 장일소는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불안했다. 제 몸을 하늘로 올리는 방법이 불사르는 것 외에는 없는 사람처럼 구는 것이, 청명처럼 언제든 마음에 발자국만 남겨두고 떠날 것만 같아 불안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닮지 않은 것은 달갑지 않았다. 술을 좋아하는 것이 기꺼웠고 제 원하는 것을 당당히 말하는 당돌함이 사랑스러웠다.
장일소는 불쾌했다. 스스로의 감정을 저도 모른 채 두는 것은 제 사전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해결을 보려 몸을 일으킨 순간 그의 귀에 가는 비명 한 줄이 스쳐 지나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이의 처소에 발을 딛은 순간 장일소의 얼굴 옆으로 목각 필통 하나가 날아갔다. 장일소는 가볍게 피하고는 손짓 한 번으로 시비를 물렸다. 굳이 사람들에게 보일 만한 광경은 아닌 탓이다.
“아명아, 이게 무슨….”
“…나가!”
아이에게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이다. 하지만 장일소는 알 수 없는 익숙함에 미간을 찡그렸다. 엉망진창이 된 아이의 방을 슬쩍 훑어본 장일소는 버릇처럼 다정하게 아이를 어르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이는 멀찍이 떨어지며 머리를 붙들 뿐이었다.
“아가.”
“오지 말라고! 아니, 오지 마요!”
아이의 눈동자가 사정 없이 흔들리자 장일소는 순간 멈추어 섰다.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불안함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제가 아는 아이는 언제나 반말과 존댓말의 사이를 내뱉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는 반말과 존댓말의 양 끝을 내뱉고 있다. 마치 다른 사람의 말투처럼. 장일소의 표정이 굳자 아이는 숨을 몰아쉬며 제 가슴께를 틀어쥐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나는, 나는…!”
“아명아, 일단 진정하려무나.”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요! 제발! 나는…!”
제가 아는 아이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지를 잃을 이가 아니었다. 무슨 쓸데없는 말이라도 들었던가. 누가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일단 진정시킨 뒤에 입이 무거운 시비들로 교체해야겠다는 생각만을 하던 장일소는 아이가 무너지듯 내뱉은 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나는, 화산신룡이 아니야…!”
“…뭐?”
“나는 화산신룡이 아니야. 나는 화산검협이 아니에요. 나는….”
아이는 이를 악물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장일소를 마주 보며 아이는 힘주어 말을 끝냈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청명이 아니에요.”
그토록 바라지 않았던 상황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四
“이야기를, 하자꾸나.”
장일소는 일단 숨을 골랐다.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이에게 침착하게 말을 건넨 것은 버릇이 고착된 것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다음 할 일은 명확했다. 아이를 진정시키고, 그다음 어떻게든 타이르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를 바라본 장일소는 입조차 떼지 못했다.
“들을 말 없어요.”
차갑다. 장일소는 그 눈빛을 수도 없이 봐 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언제나 즐거이 여겼다. 살심이 가득해 금방이라도 제 목을 틀어쥐고 히죽 웃고 싶다는 듯 벼려진 눈빛이 아니고서는 제게 닿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그 눈을 다시 보니 썩 즐겁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좀 궁금하긴 했어요. 방주님 같은 사람이 왜 나 같은 거지를 주워서 이렇게 키운 건지. 그래도 뭐, 아무렴 어떤가 싶었죠. 좋잖아요. 등 따숩고 배부르고. 하고 싶은 거 실컷 하고.”
아이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 하나에 헤아릴 수 없는 허탈함이 담겨 있었다.
“대체품인 줄도 모르고.”
“그런 게 아니다. 나는….”
“너는, 너는!”
아이는 이를 갈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아이는 장일소를 그런 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뭘 원한 거냐, 도대체!”
말투가 바뀌었다. 평소의 아이는 다른 이는 몰라도 장일소에게만큼은 말투에 장난을 섞었다. 본래 목소리보다 조금 높고, 조금 과장되고, 조금 어리광이 섞인. 그래, 딱 아이다운 투. 하지만 지금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투는 전혀 달랐다. 훨씬 걸고 투박하다. 제가 다듬고자 했던 그 돌덩이처럼. 하지만 절대 다듬어지지 않을 그 돌덩이처럼.
“얼굴이 닮았다고, 말투가 닮았다고! 기감이 닮았다고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를 멍청이였나? 백 년 후에 뚝 떨어져서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다시 살아야 하니 옛 생각을 한 거야 그렇다 치자. 나도 놀랄 정도로 닮았으니까!”
나, 라. 저 단어는 도대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내용은 분명 아이일진대 말투는 너무도 청명이라 장일소는 미칠 것 같았다.
청명은 거지의 몸에 기억으로 돌아왔다 했으니 몸에 남아 있던 기억은 사라진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자신은 몸과 기억이 모두 돌아왔다. 둘은 이전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혼백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청명은 옛 혼魂과 새 백魄을, 장일소는 옛 혼과 옛 백을 갖고 살아갔다.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하나의 백에 두 개의 혼이 깃들었다. 그 충돌의 여파는 고스란히 장일소의 몫이었다. 장일소의 표정을 보지 못한 아이는 말을 이었다. 비명 섞인 고함이었다.
“겹쳐 보지는 말았어야지. 다른 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지! 고작 겉껍데기 하나 닮았다고 꿩 대신 닭마냥 들이지 말았어야지! 아니, 아니야. 그렇게 대체품으로 쓸 거였으면….”
아이는 한숨을 내뱉었다. 속내를 감추긴커녕 드러내지 못해 안달인 아이였다. 이런 식으로, 답답한 속을 삼키는 아이가 아니었다. 장일소를 똑바로 바라보며 아이는 조용히 말을 맺었다.
“…애정 같은 걸, 모르게 했어야지.”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눈앞에서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우선 그저 기다린다. 그런 이들을 움직이게끔 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장일소는 손을 뻗었다. 아이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흐릿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돌이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이를 잃을 것 같았다. 그러니 몸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청명은, 늘 그랬듯이 장일소의 손을 쳐냈다.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려 하얗게 재가 된 얼굴이 중얼거렸다.
“청명, 그래. 그렇게 청명을 원하셨다니 청명답게 해드려야지.”
묶은 뒷머리에 꽂은 머리 장식도, 귀에 걸었던 귀걸이도, 팔에 주렁주렁 매달린 팔찌도 전부 내던진 아이는 아무것도 없이 방을 나가버렸다. 장일소는 굳어있다가 뒤늦게나마 몸을 돌려 뒤쫓아나갔지만 아이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것마저도 제가 아는 이를 닮아, 장일소는 처음으로 비참해졌다.
*
“알아보라 한 것은 어찌 되었지.”
한 사내를 내려다보는 옅은 빛 눈동자에는 한 치의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장일소는 그 어떤 것에도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드러낼 감정이 없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는 제 주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화산으로 가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래?”
사내는 대답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장일소는 팔찌 하나를 손에 쥐고 굴리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화산. 또다시 화산이라는 말이지. 청명이 그토록 사랑했던 화산. 청명을 키우고 기른 동시에 청명이 키우고 기른 화산. 동시에 아이에게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던 화산.
“그래…. 화산이란 말이지. 알았다. 고생했구나.”
장일소의 말에 사내는 안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방을 나가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장일소의 손에 들려 있던 팔찌가 사내의 가슴을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진 사내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장일소는 제 얼굴을 훑어내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이런 죽음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기에 장일소는 너무도 많은 피를 눈에 담아왔다.
‘그러고 보면, 마찬가지였지.’
청명 역시 죽음에 익숙한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죽음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세상 그 누가 대산혈사의 매화검존보다 많은 죽음을 보았을까. 장일소는 청명이 제 부하를 죽이는 얼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익숙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것은 그와의 마주한 마지막 얼굴이다. 당연한 일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장 강렬했던 감각을 기억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머릿속을 비집고 떠오르는 옛 기억에 장일소는 눈을 감았다.
[다시 볼 일 없을 거다, 망할 놈아.]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주제에, 좌수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주제에 청명은 당당하게 선언했었더랬다. 그렇게 회상하는 장일소도 좋은 꼴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말을 들을 상태긴 했다. 몸이 반쯤 날아가 앉지조차 못한 채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으니까. 장일소는 킥킥거리며 그를 올려다보던 과거를 떠올렸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었다. 마침내 목표한 과실을 따낸 어린애처럼 히죽댈 지, 고통에 가득 차 일그러진 채로 눈만 번뜩일 지. 아니면 다른 이들을 칠 때처럼 덤덤하고 감흥 없이 굴 지. 하지만 노을 탓에 그림자 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었다.
[네놈 목은 내가 고이 잘라서 화산 꼭대기에 걸어주마.]
[저런…. 크, 나는 죽어서도 너를 내려다 볼 수 있겠구나. 참…. 달가운 일이야. 네가 한 것 중…. 가장.]
[미친 새끼.]
그 때 청명의 목소리는, 꽤 가벼웠다. 증오도, 후련함도, 희열도 없는 가볍고 가벼운 한 마디. 그 한마디가 욕설이라는 것조차 그답다 생각했던 장일소는 가벼운 와중에 담긴 감정을 집어냈다.
“허탈….”
허탈虛脫이라. 그 탐욕스러운 인간이 허탈이라니. 참 이질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때의 청명은 그랬다. 더 말하지 않은 그는 검 끝을 치켜올렸었다. 가장 안 어울리는 감정과 가장 어울리는 행동이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냐?]
[아주, 좋아죽겠구나. 응? 청명아. 날 죽이게 되어서.]
[개소리할 거면 닥치고.]
[내가 이렇게 큰 덕분에…. 내 목 하나로 온 사파를 발 밑에 두게 되지 않았니. 선물이란다, 선물. 알고야 있겠지만.]
청명은 그 이죽거림에 대답하지 않았었다. 장일소는 그를 퍽 아쉬워했다. 이런 농담 따먹기도 오늘까지가 아니던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청명은 툭 내뱉었다.
[안 아프게는 보내주지.]
친절하기도 하지. 장일소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부릅떴었다. 마지막이 될 청명의 얼굴을 만끽하기 위해서. 마지막 남은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목에 날붙이가 닿아 목뼈를 통째로 날리는 그 순간, 장일소는 똑똑히 보고 말았다. 청명의 눈이 커지고, 동공이 확장되고, 입이 멍하니 벌어지는 것을. 그때는 미처 무슨 표정인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장일소는 알았다. 장일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제멋대로 나뒹굴었지만 신경조차 쓰지 못했다. 버릇처럼 얼굴을 손으로 덮고 입꼬리를 올렸지만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허탈이라니. 감정조차 그득그득 쌓인 그 얼굴에 허虛라는 단어를 붙일 수 없다. 굳이 붙이자면, 해解다. 스스로의 의구심을 풀어내고, 스스로의 감정을 깨달은 표정.
[…애정 같은 걸, 모르게 했어야지.]
같은 백魄이다. 그렇다고 꼭 같은 표정을 짓지는 않는다. 혼魂이 다르니까. 같은 즐거움에도 아이는 활짝 웃는 것이 익숙하다면, 청명은 피식 웃는 것이 익숙한 차이다. 하지만 장일소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합쳐진 두 기억은 완벽히 맞아떨어졌다.
‘청명.'
머릿속에 인영이 떠오른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자신과 나란히 설 유일한 사람. 그 인영이 두 갈래로 찢어져 모습을 바꾼다.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수수한 화산의 무복을 입은 청명과, 묶은 머리 위에 장식을 드리우고 온갖 패물을 찬 채 비단옷을 입은….
'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이냐?'
혼란. 두려움. 서글픔. 후회. 돌이킬 수 없다는 깨달음.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확신. 그리고, 그 끝의 자그마하고 간질간질해 오히려 먹먹할 지경인 무언가.
장일소는 스스로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니, 웃기지도 않지. 장일소는 조소했다.
장일소는 고향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할 필요가 없던 탓이다. 그야, 지나간 일이 아닌가. 치열하게 살아간 그는 오직 전진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먹힌다. 후회에. 두려움에.
하지만 그는 지금 광서에 있었다.
관을 쓰지 않은 탓에 허리까지 늘어진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제멋대로 휘날렸다. 폐허가 된 허허벌판 위에서 장일소는 머리를 쓸어올렸다. 왜 이 곳에 온 것인지 자신조차 알지는 못했다. 그저 와야 할 것 같았다. 많은 것을 쌓아 올렸던 곳이어서일 수도 있고, 스스로 무덤으로 정했던 곳이어서일 수도 있으며, 가장 마지막으로 실수를 범한 곳이어서일 수도 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 장일소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이전이라면 예의 그 눈매를 야살스럽게 휘며 정사의 통일이라 이야기했겠지만, 아이가 떠난 순간부터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평화가 찾아든 탓에 중원에는 장일소만큼의 무공을 가진 이가 드무니 손쉽게 강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아득바득 바닥부터 기어오르던 때를 생각하면 시작점도 좋았다.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장일소가 나아간 길의 끝은 정사통일이다. 하지만.
“…너무 쉽지. 너무 쉬워. 그런 건….”
즐거울 리가 없지. 장일소는 중얼거리며 무감정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자신은 같았다. 주렁주렁 매달린 팔찌와 부드럽게 아래로 떨어지는 비단. 청명과의 마지막 전투가 통째로 사라지기라도 한 것마냥 얌전히 붙어있는 손가락과 목. 하지만 주위가, 너무도 달라지지 않았나. 자신을 긴장하게 만들고, 오싹하게 만들고, 예상 이상의 상황까지 고려하게 만들었던 자신의 호적수가 사라지지 않았나. 장일소는 길게 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발 닿는 대로, 아무 곳으로. 하지만 본능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 그가 닿은 곳은 한 돌덩이 앞이었다. 단정하게 깎인 흔적이 있는 돌덩이. 장일소의 거짓말과 불안이 앉았다가 갔던 그 돌덩이의 앞에서 장일소는 픽 웃었다.
“그러나…. 즐거웠지.”
호적수는 사라졌으나 나란히 설 이는 여전히 남아 있었기에. 긴장하게 만들지는 못하였으나 편안히 만들었고, 오싹하게 만들지는 못하였으나 다정히 만들었고, 기함할 만큼 너그럽고 자애롭게 만들었던 있지 않았나. 실수는 돌이킬 수 없다. 장일소의 삶은 언제나 그랬다. 삐끗 하면 줄 밑으로 떨어져 다시 오르지 못하는 삶. 더 이상의 미련은 의미가 없기에 장일소는 몸을 돌렸다. 다시 광동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안 어울리게 청승이나 떨고 있군.”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렇다고 이 곳에서 들을 목소리는 아니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이들은 눈앞에서 알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우선 그저 기다린다. 장일소가 뻣뻣하게 굳어 있자 목소리는 다시 한번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은 보여줘야지. 사파 놈이라 그딴 예의는 밥 말아먹은 지 오래라 이거냐?”
그 말에 장일소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청명이었다. 제 기억 속의 청명과 다를 것이 없었다. 초록빛 끈으로 질끈 묶은 머리와 화산의 검은 무복. 그리고 그 위에 단출한 검은 장포까지 기억 속의 그와 똑같았다. 하지만 늘상 찌푸려진 표정은 어디로 사라지고 느긋한 평온함만이 남아 있다. 그 이질감에 장일소는 당황을 숨기지도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청명이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백 년 만이다?”
“아명…. 아니, 청명.”
장일소는 순간적으로 아이를 부르듯 불렀다가 이름을 고쳤다. 안심과 불안이 동시에 머리를 잠식하는 기분이 들었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은 그는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거니?”
“광동 갔는데 네가 없다길래. 그럼 있을 곳이 여기밖에 더 있겠냐.”
경공 쓸 수 있는 몸이라 얼마나 다행이야. 예전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청명이 중얼거리자 장일소는 그제야 그가 청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장일소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 아이는…. 사라진 건가?”
“청명.”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장일소는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청명은 장일소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 애가 아니라 청명이다. 내가 그 이름 나만 쓸 거라고 못 박아놓은 것도 아니고. 지어준 네가 껄끄러워해도 받아들인 사람이 있으니 이 애는 청명이야.”
“….”
“그래서 뭐…. 질문에 대답하자면 나도 모른다. 그 애의 혼魂이 사라졌는지, 아니면 이 백魄 깊숙한 곳에 남아 있는지. 일단 이 백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말을 끝낸 청명이 멋대로 바닥에 주저앉자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주병이 부딪혀 맑은 소리를 냈다. 장일소는 그제서야 그가 봇짐을 매고 있는 것을 알았다. 자신만 보러 화산을 나왔다면 이런 짐을 챙길 이유가 없다. 그 작은 희망에도 마음이 설레는 스스로에게 조소를 머금고 장일소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왜 찾아온 거니? 죽이러 온 것이라면 모르겠다만, 지금의 몸으로는 나를 상대할 수 없을 텐데.”
“내가 무슨 모가지에 미친 놈도 아니고. 그냥, 할 말이 있어서.”
그에 대해 할 말은 많았지만 장일소는 잠자코 입을 다물고 그의 옆에 앉았다. 청명이 제게 하고 싶은 말이라니. 청명 역시 쉽사리 말할 수 없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시간이 길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몸에 기억이 남아 있더군. 원래는 사라질 줄 알았다. 이전에도 그랬으니까. 그 이유를 짐작을 좀 해 봤는데….”
청명은 장일소를 돌아보았다. 묘한 눈빛이다. 의아함과 확신이 섞인. 청명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너 때문인 것 같더라.”
“…내가 무엇을 했길래?”
“아무 미련 없이 웅크릴 만큼 배신감을 느끼게, 그러면서도 절대로 잊지도 싫어하지도 못하게. 잘도 퍼부었잖냐. 그 빌어먹을 애정을.”
장일소가 입을 꾹 다물자 청명은 픽 웃으며 주병을 건넸다. 던지지도 함부로 다루지도 않는 그저 평범한 전달이다. 장일소는 마개를 열어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목 넘김이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술을 처음 배우던 청명을 달래기 위해 내주었던 그 술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죽었다 살아났다고 인격이라도 바뀐 건지. 어떻게 내 얼굴 단 놈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지. 근데, 기억 속 네놈 눈은 똑같더군. 백 년 전에 날 보던 눈으로 보더란 말이야.”
흥미와 호의를 가득 담은 눈. 장일소는 늘 그런 눈을 했다. 상황이 그랬기에 서로의 목을 노리고 으르렁댔다지만 그때도 청명은 알고 있었다. 장일소는 제가 본 사람 중 가장 특이한 놈이다. 그리고 특이함이 유일함으로, 유일함이 특별함으로 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청명은 폐허가 된 이전의 만인방을 바라보았다.
“일전에 그랬었지. 전투는 내가 이겼는데, 전쟁은 네가 이겼다고.”
뜬금 없는 말에 장일소는 그를 돌아보았다. 옆모습에는 한 치의 번민조차 없어, 장일소는 제가 청명을 눈앞에 둔 것인지 해탈한 불자를 눈앞에 둔 것인지 헷갈렸다. 그런 중생을 옆에 두고 신경조차 쓰지 않은 청명은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도 같았어. 네놈이 죽던 그때도.”
“….”
“그렇게 죽일 수 있는 놈이 아니었다, 넌. 알고는 있었어. 나만큼 미친 놈이면서 나만큼 용의주도한 놈이 그런 식으로 굴 리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네 계획에 놀아난 걸 알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음에도 네 목을 쳤다. 그 순간 진 거다. 너한테.”
장일소는 죽었다. 자신이 가장 바란 형태로. 그 모든 것은 그의 계획하에 이루어졌다. 의심의 여지가 없이, 청명이 자신의 목을 치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간과했다. 점과 점을 잇는 방법을 누군가에게 묻는다면, 십중팔구 사람들은 직선을 그어 이을 것이다. 하지만 점과 점을 잇는 방법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청명은 점과 점을 이었다. 하지만 장일소가 예상한 방법은 아니었다.
“왜 네놈 손바닥인 걸 알면서도 놀아놔 줬는지는 죽을 때까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몸 들어와 보니까, 들어와서 너 보니까 좀 알겠어.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청명은 빙긋 웃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동시에 수도 없이 본 그 편안하고 느긋한 웃음에 장일소는 말을 잃었다. 청명은 그런 그를 보며 킥킥대다가 벌떡 일어섰다. 장일소가 따라 일어나는 것을 본 청명은 봇짐을 고쳐매고는 팔짱을 꼈다.
“뭐, 키워준 보답이랄까. 이번 생은 굳이 나서지 않을 거다. 화산에서도 하산했어. 지금의 화산은 내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세 번째 사는 건데 한 번은 자유롭게 살아도 괜찮겠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즐기다가 죽으련다. 넌 네 하고 싶은 것 실컷 해라.”
“나는….”
하고 싶은 것? 장일소는 알 수 없었다. 굳이 지금 열렬히 바라는 것을 집으라면, 청명을 따라가고 싶었다. 그를 따라 세상을 유람하며 평범하게 삶을 즐기고 싶었다. 화려한 옷도, 맛있는 음식도, 강인한 무공도 청명의 존재 하나가 줄 즐거움에 비할 바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 장일소의 표정을 본 청명이 픽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모든 것을 초월한 도사의 얼굴이다.
“일어나자마자 만인방부터 재건한 놈이 무슨 생각이냐, 그건? 이대로 나 따라와도 한 번은 생각날 걸. 네놈은 아직 진짜 목표를 이뤄 본 적이 없잖아.”
“…목표라.”
“나 없는 중원, 잘 한 번 먹어봐라. 생각보다 정점은 별거 없더라.”
고통도, 욕망도 없이 말간 얼굴로 청명은 어깨를 으쓱했다. 한낱 중생은 모든 걸 다 이룬 후에야 모든 것을 놓은 신선을 붙잡아 둘 수 없다. 장일소는 그제서야 미소를 지었다.
“다시 만날 수는 있겠니?”
하지만 또 한낱 중생이라, 마지막 미련까지는 버리지 못한다. 자애로운 신선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선선히 당연한 답을 들려주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청명은 고민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하염없이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일소는 눈을 감았다.
실은 가느다랗고 연약해 조금만 힘을 주어도 끊어진다. 하지만 그 실이 뭉치고 얽히면 그 무엇보다 얄궂고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인연 또한 그러하다. 한 삶의 인연조차 그러할진대 백 년의 시간이 더해지고 두 개의 삶이 더해진 인연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않은가. 장일소는 가뿐하게 몸을 돌렸다. 청명이 사라진 반대 방향. 만인방이 있는 방향으로.
“다시 보자꾸나.”
뒤늦은 인사를 건넨다. 청명은 이전에도 지금도 단 한 번도 제 예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일소의 뒷모습에는 더 이상 의심도 두려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가 중원을 통일했을 때 청명이 알아서 제 앞에 나타날 테니까.
또다시, 내게로 와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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