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도리에도 좀이 슨다

천우맹 NCP - 감기걸린 청명과 천우맹

* 1129화 이후(천우맹 단체 수련 시작!) 시점부터 이어집니다. 해당 회차수 전후의 스포일러에 주의!

* 초반부 대부분의 대사들은 원작의 흐름을 따르려고 하다보니 인용된 부분이 많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꼭 1140화대 이후까지 열람하신 후의 감상을 권장드립니다.

* NCP 썰에서 출발한 무언가입니다. 그냥 나약해진 청명이와 돌봐주는 천우맹을 보고싶었을뿐. 천우맹은 가좍이다….

* 원작과는 다른 설정 및 흐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걍… 즐겨… 이런 사람도 있는거죠 저 이런거 처음써봐요

* 게다가 평생 건강하게 살아와서 의학에 관련된 지식을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타쿠버무리로 잘 알아먹어주십시오 

* 글을 써보듯 하지 않아 어색함이 많습니다…… 맞춤법도 틀린게 있다면 그러려니 해주십시오.

  스스로 발견하는 즉시 고치는 편입니다(맞춤법 제보는 환영!)



화산이 그 이름을 드높게 시작한 것은 아마 청명이 화산신룡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니, 분명 그때부터였다.

청명은 화산에 입문한 이래 언제나 불철주야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멈춰서는 일 따위는 없었다.

화산의 전각과 제자라는 이름의 매화들이 달라붙은 절벽들을 오르내렸고, 제 사형제들과 함께 화음과 사천, 운남을 뛰어다니기도 했으며 머나먼 북해를 오가고, 때로는 광동에서 신경을 곤두세울 때도 있었다. 장강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그는 매화도에 펼쳐진 물가를 짓밟아 나아갔으며 지켜내지 못했던 항주에서 단 두 명의 미약한 숨에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그 어떤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염려하지 않고 아무런 생각없이 휴식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을까. 하지만 누군가가 그러한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려보기도 전에, 그가 보이는 여유롭고 장난스러운 태도는 청명을 바라보는 그 누구에게라도 그러한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아니이이이이!”

언제나처럼 화산에서 들어왔던 절절한 고함. 제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청명이가 또 개판을 치려고 하고 있구나. 그래, 청명이가 아무렴 그렇지. 어느새부턴가 청명이라는 이름은 소란의 중심이 되어있었고, 모두가 이를 짐작케 했다. 어련할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곳에 있는 맹도들도 이런 소란에 익숙해져버릴텐데 수 년간 그 청명과 함께 해왔던 화산의 제자들은 그런 고함들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로만 들릴 것이다.

삼대 제자 중 한 사람이 고개를 들어올려 불에 타 까맣게 그을려버린 전각의 일부를 바라보았다. 아직 이 전각에 붙은 열이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화산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장본인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녹림칠십이채의 주인인 녹림왕, 임소병과 그의 수족들을. 하지만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온전히 그들의 몫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더 입을 열지 못한 것이지. 아니…. 완전히 입을 다물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곽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려다 다시 들려온 고함에 어깨가 흠칫 튀어올랐다.

“내가 승질이 뻗쳐서! 어? 내가!”

그를 포함해 맹도들은 고성이 빗발치는 장문인의 (임시)처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가 확연히 달랐다. 장문인의 임시 처소에서 터져나온 이 고함은 결국 모두의 고개를 절로 갸웃거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눈을 깜빡이거나, 얼굴을 미묘하게 구겼다. 여기저기서 의혹을 담은 말들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결론을 내었다.

“…그렇지?”

“그러네. 이, 이거 청명이 목소리 아닌데?”

“그럼 누군데?”

“자, 장문인 목소리 아니야?”

어? 누군가의 바보같은 소리가 연무장에 넌지시 울려퍼졌다. 여기저기서 맹도들이 다시금 일제히 고함이 들려왔던 처소를 향해 삐걱삐걱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두 방울씩 맺혀갔다.


“…그, 음…… 맹주님.”

머쓱하게 웃음을 흘리던 이가 현종을 바라보았다. 그는 덩치에 맞지 않게 현종과 감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처소 안에 있는 문주들 모두가 같았다. 변명의 여지가 눈꼽만큼도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건 화산검협이 하기로 한 일이라…….”

“말씀 잘하셨습니다!”

“예?”

“저기 안 보입니까? 저기!”

눈을 반쯤 까뒤집은 채 고성을 내지르고 있던 현종이 맹소의 대답에 격하게 손가락을 뻗었다. 언제나 활기가 넘쳐, 소소에게 대침을 맞을 때를 제외하면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이가 대략 백 년은 전에 죽은 시체마냥 늘어진 채 처져있었다. 기대어 있는 벽마저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만 같은 착시가 일었다. 저게 과연 불과 얼마 전에 장일소와 합공하여 주교를 쓰러뜨린 화산검협 청명이 정녕 맞는 것인가?

어느 누군가는 그 꼴을 차마 더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거나 시선을 돌리고 있으려니, 현상과 현영이 팔을 걷어붙이던 현종의 좌우에서 그를 붙잡고 말려대고 있었다. 백천은 이 상황을 바라보며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이미 뒤집혀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지. 이 와중에 자신마저 정신을 잃어선 안 된다.

사천당가의 당가주, 당군악은 끝내 현종에게서 시선을 다시 피해버리고 말았고 남만야수궁의 궁주인 맹소는 껄껄 웃기라도 하였으나 곧 현종의 핏발 선 눈에 당군악과 함께 시선을 내리 깔 수 밖에 없었다. 임소병도 무어라 억울하다 외치며 항변하고 있었지만 그리해서 빠져나갈 수 있는 문제라면 이미 진즉 그는 이 처소 밖에서 낄낄 웃으며 내부의 상황을 한껏 비웃고 있었을 테다.

“와, 그걸 입고 가네. 미친놈들이…….”

저 사파 산적놈들의 왕이라는 작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박히는 듯 했다. 현종이 손을 들어올리니 저가 맞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한껏 몸을 숙였던 임소병은 멋쩍게 고개를 들었다. 다음으로 빙궁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반쯤 육포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던 북해빙궁의 총관, 한이명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고선 사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끼어든 오검은 곧장 불똥을 맞고 어깨를 움츠렸다.

“빨리 사과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현영의 말에 문주들은 결국 힘없이 축 늘어져있는 청명에게 순순히 사과의 말을 건네었다. 청명은 죽상으로 실실 웃는 얼굴… 아니다. 힘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들을 마주했다. 평소대로라면 벌써 눈앞의 현종처럼 눈을 뒤집어 깐 채 문주고 나발이고 달려들어 팔에 하나같이 이빨자국을 냈을텐데…. 그렇다. 그에게 화산의 제자들이 붙여주었던 별호, 화산광견의 이름 그대로 말이다.

얼마나 얼이 빠졌으면 청명은 그렇게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든, 이걸로 된 게 아닐까? 지금의 상황이 완전히 선을 넘었음을 어떻게든 인지했으니 지금에라도 문주들이 나서서 맹도들을….

“그냥 다 죽어, 이 새끼들아!”

그러나 청명은 청명이다.

“나 안 해! 나 안 해, 이 새끼들아! 천우맹이고 나발이고 그냥 내가 다 할거야! 안 해애애애애애애!!”


결국 오검은 물론이요, 화산의 장로들까지 동원된 후에서나 제압된 청명은 동앗줄에 감긴 채 겨우 빠져나온 한쪽 손으로 이마를 짚고있었다. 청명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앓느니 죽어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청명이 지금처럼 제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러가는 일은 어지간해선 없었다. 그런데 짜잔! 지금은 하지 않는가! 이 상황이 청명에게 있어선 턱없이 '어지간히 두통이 이는' 상황이 맞긴 했나보다. 하지만 문주들은 한 톨도 신경쓰지 않고 회의를 이어갔다. 중요한 것은 청명의 두통보다도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 였으니까.

사실 각 문파끼리 모여 대련을 하도록 판을 짠 것은 다름 아닌 청명이었다. 그러나 문파 간에 기본적으로 깔려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연이은 수련과 대련을 통해 얽히고 설키기만 했다. 친우(友)의 이름으로 바로 선 천우맹이라는 이름 하에 뒈지지 않을 정도까지만 치고박고 싸움박질만 해온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문주가 막는다고 해서 마구 엉켜버린 실들을 풀어낼 수 있는가?

당군악은 현종을 바라보며 “그 황제조차도 백성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잖습니까?”라며 적절히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당군악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말문이 막히고야 말았다. 현종도 충분히 머릿속으로는 그것이 맞는 말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위나 권위가 높은 자가 문도들을 강제로 진압해 상황을 해결하려 든다 한들, 근본적인 것은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엔 일시적인 해결일 뿐이라는 것이다. 해결해야하는 것은 맹도들, 나아가 그들 사이의 감정의 엉킴이다.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천우맹은 한이명의 말마따나 아무런 의미없는, 대련을 빙자한 패싸움을 이어갈 것이다. 이 좁디좁은 연무장 안에서.

그렇게 의견이 차차 수그러들어갈 때쯤, 신명이 날 만큼 우렁찬 기합소리가 들려왔다. 동앗줄은 눈 깜짝 할 새에 끊겨버려 그 속박도 풀려버리고 말았다.

“어디서 약한 소리를 하고 있어요!”

청명은 언제나 자신부터가 편한 길을 택해 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분명 자신이 일일이 손을 쓰지 않고도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있을텐데, 굳이 하나하나 섬세하게 손을 뻗는. 그러면서도 입은 댓 발 내미는 성격 나쁘고 이상한 놈. 하지만 저런 면이 언제나 화산과 그의 주변을 이끌어온 것이겠지. 당군악은 절로 고개를 끄덕….

“그럼 내가 지는 거잖아! 빌어먹을!”

……일 뻔 했다. 역시 그냥 성격이 나쁜 놈이 맞다. 그래, 그 청명이 어딜 가겠나. 당군악이 한숨을 푹 내쉬며 그에게 맹도들을 진정시킬 것을 권유했지만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청명은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아니, 우선은 맹도들보다 자네가 진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 아니……. 이런 식으로는 안되는 게 맞긴 하지만 아무래도 청명은 당군악의 말을 전혀 다른 식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청명의 눈에서 서서히 광기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뭘 할 것이냐는 물음도 그저 허무해질 만큼 청명은 아주 실성한 사람마냥 웃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저것들 정말 완벽하게 단합시켜 줄 테니까!”

……모든 문주들의 얼굴에서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어디 나도 같이 한번 친해져 보자, 이 새끼들아!

- 밟아!

- 으하하하하핫! 이건 다 수련이다! 수련!

콰아아아앙!

거대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치면 이리도 큰 소리가 나는 걸까? 검은 무복을 입은 채 우수(右手)에 검을 든 마귀를 앞에 두고 반쯤 시체가 된 빙궁도가 간신히 눈을 돌려 제 앞에 쪼그려 앉은 말총머리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를 눈앞에 둔 빙궁도의 동공이 처연할 만큼이나 덜덜 떨리고 있었다. 차라리 기절이나 했으면 좋았을 것을, 대체 어떻게 하면 사람의 곳곳을 골고루 패가면서도 정신은 잃지 못하게 만드는지…. 어라, 아닌가? 눈 깜짝하니 앞에서 까만 무언가가 시야를 대부분 가리고, 그 사이로 녹색 술이 흔들리는 그 한 순간을 눈에 담은 이후로 그의 기억이 끊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넓은 연무장을 휘감던 독연이 서서히 사라지자 그 가운데에 선 마귀가 90년 인생에서 최고로 개운하다는 모양새를 한 얼굴을 소매로 훔치더니 말한다. “속이 다 시원하네.” 이 다음으로 나온 말이 연무장 바닥에 하염없이 쓰러져있던 모든 맹도들의 코를 시큰거리게 만들었다.

“어때? 우리 이제 좀 친해진 것 같지 않아?”

그리 말하며 제 이마를 덮고있던 앞머리를 느릿하게 쓸어넘기자 나는 세상에서 제일 상쾌한 기분이다!를 말하는 듯한 잘난 얼굴이 드러났다. 그 어느 누구도 이만큼 통쾌한 표정을 지을 수 없으리라고 백천은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제 눈가에서 눈물이 조금 새어나오는 것도 같고. 밉살스러운 얼굴이 저물어가는 햇살마저 받으니 더더욱 미워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백천은 문득 청명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이 모든 이들을 때려눕히는 데에 얼마나 열심을 다하면 평소에는 바뀌지도 않던 안색이 변한단 말인가. 아니, 물론 안색이야 휙휙 바뀌는 것이 그가 아는 청명이다. 이대 제자인 백천이 삼대 제자인 그를 봐온 것이 몇 년이던가.

“화공……은 고대로부터…… 쓰던 전략…….”

“이게 기운이 남았네. 끈질기기도 하지. 죽어, 좀!”

청명과 다소 억울한 몇 마디를 나누고 나니 청명은 어느샌가 임소병에게로 향해 그를 뻥 차버리곤 당군악에게 고생했다는 인삿말을 건네었다. 티는 내지 않지만 저 또한 속이 시원한 것 같은 당군악과 맹소를 포함해 청명은 각 문의 장로들을 이끌고 연무장에서 멀어지려다 발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내일도 똑같이 수련할 테니까. 엄살 부리지 말고 다들 나와.”

“…….”

“힘이 남아돌아서 풀 데가 없는 모양인데, 내가 아주 제대로 풀게 해 줄 테니까. 이상!”

바닥에 드러누운 이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필사적으로 내뱉고 싶은 말을 참았다. '개새끼…….' 어느 누군가는 정말로 입 밖에 냈지만 저 만치 멀어져 걸어가는 이의 귀에는 들어박히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맹도들은 밀려드는 서글픔에 인내심마저 바닥난 건지 아랫입술을 지긋이 물 정도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들이 제 입술을 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맹도들이 차차 일어나려는 듯 몸을 움직이며 내뱉는 신음 가운데에서 순간, 크지 않은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 들렸다.

“…케흡.”

“응? 누가 무슨 소리 냈어?”

“소리? 무슨 소리?”

“머리 잘못 얻어맞았어? 의약당 가.”

“사형은 때려도 잘못 때리는 일은 없으니까 멍들거나 찢기거나 중독되지 않은 이상은 시간 지나면 나아져있을 거예요.”

“이 새끼들이….”

“그래, 뭐. 잘못되기 전에 미리 가는 게 좋을 것이오. 내일도 이 미친 짓을 한다 하지 않은가?”

“망할…. 어휴, 소가주님. 괜찮으십니까?”

“죽었다.”

“다행이네요. 죽으셔서…. 어서 일어나십시다.”

"끄으응…. 진짜로 죽겠다."

모두가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몸을 일으켜 힘없이 떠들며 처소를 향해갈 때,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어느새 제 의관을 멀끔히 갖춘 백천은 잠깐동안 멍하니 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가 시선을 보낸 곳은 뒷짐을 진 채 멀어져가는 청명의 뒷모습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 목울대 부근을 가볍게 긁다가 뒤를 돌려 맞잡았던 청명의 손이다. 백천은 그렇게 한동안 청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방금 저 놈….’

‘한 손으로 제 입을 막지 않았었나?’


연무장은 하루도 성할 날이 없이 닳아갔다. 어디 연무장 바닥 뿐이겠는가? 사람은 굴리고 굴릴수록 튼튼해진다는 어느 망나니 같은…. 같은 것이 아니라 망나니 놈의 말처럼 검과 비도를 손에 쥔 맹도들도 갈수록 닳아갔다. 그렇게 사흘 째가 되는 날 큰 우여곡절도 있었으나 청명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이르게, 그리고 기특하게 안정되었다. 이제 앞으로 남은 것은 이대로 나아가는 것이다. 저들끼리 쌓여있던 불만들이 단 몇십 명의 마귀들로 인해 합해지도록.

청명이 이 터무니없는 친목 수련을 시작한 지 어느덧 닷새 째 되던 날이다. 그는 홀로 숲 안쪽의 잔디밭 위에 덜렁 드러누워 뒤늦게 가쁜 숨을 내뱉으며 끌끌 웃어댔다. 이 병아리들은 하루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아니지. 이젠 슬슬 그 작고 노랗던 이들은 어디에도 없다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지. 누가 앞뒤를 봐주고 있는데, 어?'

그야 최근에는 본인이 과거의 매화검존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지내긴 했다만, 차차 그 시절의 감각을 되찾는 것 이상으로 균형을 이뤄가고 있는 제 육체를 생각하면 충분히 기꺼운 일이었다. 그를 둘러싼, 그와 함께한 모든 것이 과거의 화산을 훌쩍 뛰어넘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그와 마찬가지일 테다.

한껏 만족스럽다는 모양새를 한 젊은 선조의 이마를 타고, 격렬했던 수련을 증명하는 식은 땀 한 방울이 미끄러졌다. 청명이 잠시 눈꺼풀을 가만히 내렸다가 천천히 떠올린 순간, 하늘에 노을빛을 머금은 구름이 일순 흔들렸다.

"응?"

청명이 눈을 크게 깜빡이다 부릅뜨고선 흘러가는 구름을 쳐다보았다. 만에 하나라도 그가 잘못 봤을 리는 없다. 수련을 시작한 지 닷새가 지난 지금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알 수 있었다. 고작 고뿔로 눈앞이 흐려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청명은 내심 부인했다. 부인할 수 밖에 없다. 지금이 가장 애들을 때려 패기 좋은 가장 중요한 때…. 아니! 수련하기 가장 적절한 시기인데 하필이면 그가 고뿔에 걸렸다는 사실이 말이 되겠는가?

만일 사실 그 이유를 짐작한다면 대략 닷새 전부터 목 안쪽이 간질간질한 것이 사라지질 않아 차 대신 술을 물처럼 마셔버린 탓이 클 것이다. 몸에 열이 평소보다 올라있던 것은 덤이었다. 취기 탓이었던 걸까? 청명은 그저 격렬하게 날뛰었던 첫날을 떠올려봤다.

- 속이 다 시원하네.

가만히 기억을 되짚은 후에는 빙긋 웃으며 취기는 아니었으리라 확신했다. 그리곤 제 손을 머리 뒤로 돌려 뒤통수를 받친다. 왜냐하면, 다 제쳐두고 그것만은 정말 속이 뻥 뚫린 듯 시원했으니까.

아무튼 청명은 그로부터 사흘째 되는 날부터 사태가 심각해짐을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그때부턴 술을 목 안으로 넘기자마자 격하게 밀려 올라온 해수로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켁켁, 죽는 소리를 내뱉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모두 술을 급하게 넘기다 사레에 들린 줄로만 알았는지 한숨을 쉬며 그러려니 넘기기에 바빴다. “그러게 청명아, 아무리 그래도 천천히 마시지 그랬냐.”라는 말과 함께 그나마 그 모양새가 안쓰러웠던 화산의 제자들 중 몇 명이 다가와 등을 두들겨주거나 쓸어주었다. 평소의 행실이 다른 이들을 통해 돌아온 것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청명은 그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자마자 지우더랬다.

그러니 그때부터는 아예 술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언제나 그가 홀로 있을 때 항상 곁을 지키던 술병도 지금은 없다. 제 아무리 청명이라 한들 제 상태가 안 좋음을 알고 있을 때에는 스스로 상태를 악화시키려 들지는 않았다. 사형제들, 그리고 당시 타 문파의 정예들과 저 먼 십만대산에 올라 천마의 목을 치고 숨이 다했을 백 년 전 그때. 현세를 떠나 등선을 한대도 제 사형제들의 곁에서 함께 선계에 머무르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줄곧 생각해오긴 했지만…. 청명은 아직 머릿속에 박혀있는 그 두 놈의 모가지를 따기도 전에 스스로 망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고, 그리해서도 안 되었다.

생각이 잠시 길을 벗어나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은 청명은 다시 눈을 살짝 감고 있었던 일을 돌이켜봤다. 문제의 사흘 째, 지금과 같은 술시(19시~21시)에 은하상단에 방문했을 때였다. 은하상단의 상단주인 황종의가 청명에게 당연한 듯 질 좋은 술을 몇 병 내밀자, 내미는 술을 마다하고 차를 달라고 부탁하니 입을 쩍 벌리고 어디 편치 않은 것이냐며 심각하게 굴었다. 그때 지었던 그의 표정이 청명의 뇌리 한 편에 남아있었다. 내가 차를 부탁한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목이 칼칼할 때면 술 대신 마실 수도 있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술을 더 선호할 뿐이라고.

그러나 그것만은 도사가 당당히 선호한다 말할 것은 아니었다.

"끄으응, 이럴 때 죽엽수 한 병 들이켜 줘야 하는데."

청명은 앓는 소리를 내다가도 술맛이 고팠는지 입맛을 다셨다. 그런 와중에도 기억을 되짚고, 무엇을 그르쳤는가를 계속 떠올려보고 있지만 여전히 제 몸 상태에 대한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어쩌다 술을 못 마시게 될 만큼 시달리게 되었던가? 만일 이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이후에는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그라면 목소리는 기합 한번 내지르면 못 낼 것이 없을 것이다. 장강으로 향하기 전, 현종의 처소 위에서 늑대마냥 울음…. 아니, 밤새 악을 지르던 때가 있지 않았던가? 그랬음에도 청명의 모가지는 멀쩡했었다.

회복력이 좋은 청명인 만큼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다. 지학에도 이르지 못했던 아주 어린 시절, 낙법에 실패해 강가에 한번 빠진 이후로 팔순이 넘도록 고뿔이라곤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저 멀리에서 사는 양민마저 고뿔에 들었을 때, 탕약을 사흘 내내 먹고 잘 쉬고 푹 자면 닷새가 되기 이전에 금방 낫지 않던가? 그런데 무슨 차이가…. 아.

순간 청명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말았다. 그래, 돌이켜보면 하루도 마음 놓고 쉰 적이 없었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그가 벌인 일들이 하나같이 커지고 만 탓에 하나하나 적절하게 살피며 손을 보고 있었다. 때문에 굳이 의약당에서 탕약을 받아마시지 않아도 사흘 정도면 나을 고뿔이 점점 심해지지 않았던가? 청명은 고작 고뿔 정도로 의약당을 찾아가는 일도 없었지만, 제 증세가 심해짐을 느끼면서도 의약당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은 괜한 말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막기 위함이었다. 맹도들을 하나로 뭉치기 위해선 자신의 위세를 유지하는 것마저도 필요한 과정 중 하나였으니까.

슬슬 꼭 필요한 일들 외에는 자리 잡은 것들에 손을 놓아도 될 시기이다. 하지만 청명은 괜한 미련인 건지, 여전히 자리한 인사들에게 못 미더운 점이 남아있어서인지…. 아니, 분명 그건 아닐 것이다. 화산의 봉문 시기가 지나면서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이를 지켜온 그들을 청명은 믿고 있으니까. 그래야 천우맹이니까. 그러나 그는 결국 그가 닿아온 모든 것들에게서 시선을 멀리 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 중요한 것에 대한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리하고 나열해, 모든 일을 해결해냈다. 그렇게 치면 날다 못해 용솟음 칠 만큼의 신재(神材)였다. 인재라는 말로는 전부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소질.

하지만 그런 성정이 지금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이었다. 어쩌면 발목이 아니라, 목을 잡고 있는 모양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말이 안 되지. 대체 이 몸뚱이는 뭐가 문제길래 이 중요한 때에 고뿔에 들어? 고뿔이!"

고뿔은 개뿔이! 청명이 소리를 빽 질렀다가 순간 얼굴을 구겨진 화선지처럼 일그러뜨렸다. 참으려 입을 꾹 다물다가도 억지로 다문 입 탓에 뺨은 훅 부풀어오르더니 결국 기침이 절로 터져나와, 옆으로 몸을 돌려 누운 채 연신 괴로운 소리를 뱉어내야만 했다. 몸이 절로 웅크려지고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계속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 자신이 제일 먼저 자세를 갖춰야 한다. 제일 여유만만한 기세로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청명이 사실은 천우맹에서 가장 바쁘고, 가장 많은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화산에, 나아가 천우맹에 없을 리가 없지 않던가. 그러니 청명은 아무렇지도 않은 기세를 유지해야만 했다. 늘 해왔던 일이 아닌가. 청문 사형도 감쪽같이 속여왔던 명연기이다. 백년 후인 지금이라 해서 그것이 무뎌지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을 든든하게 바로세운 청명은 잠시 숨을 고르며 머릿속으로 제 남은 일정을 돌아봤다. 단체 수련이 끝났으니 잠시 숨 좀 돌렸다가 재경각과 은하상단에 얼굴을 비추고 돌아가는 흐름을 살핀 후, 빙궁 꼬맹이의 수련을 봐주고 자기 전에 맹도들의 상황을 짧게 둘러본다. 그 뒤로 제 몫의 수련을 마치고 잠에 들어야 한다. 그 외에도 자잘하게 살필 것들이 많았지만 우선은 그것이 오늘의 남은 일거리들이다.

어쩐지 뺨에 닿는 공기가 오늘따라 유독 서늘했다. 아직 날이 추워지려면 멀었음에도.

"……장문 사형. 내가 이 나이 처먹고 고뿔 따위에나 걸리고… 이러고 삽니다. 이러고. ……바빠서 풀 덮인 사제에게 술도 한 병 못 뿌리고 있소."

입꼬리가 피식 웃음 지으며 올라갔다. 그러다가도 콜록, 콜록, 켁! 마른기침이 두어 번 터져 나온 후에는 떨리는 한숨 소리가 길게 뱉어졌다.

"…나도, 피 안 마른 것들도 이리 고생하고 있으니 당분간은 먼지 쌓여도 참아야 할 거요. 콜록, …. 누군 몸이 서너 개가 있어도 모자랄 판이니까."

“……뭣하면 이 빌어먹을 고뿔이나 가져가 주라니까요? 이거, 간만에 걸리니 엄청 성가신… 쿨럭, 쿨럭! …에라이, 씨. 그래, 미안했다고! 그 시절에는 고뿔 정도야 기합으로 나으면 그만인 줄 알았지! 케헥, 켁….”

어느샌가 깜깜해진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혼잣말을 이어가던 청명은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연달아 내뱉어지는 해수에 지쳐버린 거친 숨소리가 숲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다. 설마 목이 상하지는 않겠지? 목 안을 감도는 비릿한 맛과 동시에 지끈지끈. 한순간 밀려오는 두통이 청명을 쥐어 잡듯 했다. '너무 오래 쉬었군.' 하는 생각도 잠시, 우렁차게 기합 한 번 내지른 청명은 곧장 화음을 향해 내달렸다. 아직 피로한 눈을 감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콰아아아앙!

쿵!

쉬이익!

카아아앙!

끼기기긱, 끼기긱.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런 소리 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단말마와 비명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연무장에서는 연신 피어오르는 독연과 그 사이를 가르는 붉고 하얀 검기들, 누군가의 몸을 강타하는 타격이 이어지고 있다. 전쟁을 방불케하는 모습이었다. 중간중간 전각 사이를 나누는 벽 너머로 사람의 형체를 한 무언가가 날아가기도 했다. 무어라 정의하기도 힘든, 어마무시한 현장이었다. 만일 이 광경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당장에 뒷걸음질을 치며 전쟁이 일어났다며 도망을 쳤을지도 모른다.

청명이 진하게 친해져 보자며 칼을 들었던 그 날로부터 어느덧 칠 주야 째 되던 날이었다. 화산과 당가, 남궁과 녹림, 야수궁과 빙궁까지…. 이 오합지졸들은…. 아니, 천우맹도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차근차근 합을 맞추어 자신들을 상대하는 절대 고수와 각 문의 장로들을 상대해나갔다. 수련을 시작한 이틀, 사흘째에 비하면 너무나 대단할 수준으로 성장해나가고 있었다.

소림이 그들을 어떻게 보든, 주변의 문파들이 이를 어떻게 보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더 저들에게 한 방을 제대로 먹일 수 있을지, 맹도들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맞대며 쥐어짜고 의견을 나누었다.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고 상대와 서로에 대해 파악하고 약점은 보완해가며, 전우(戰友)로서 함께 싸우는 방법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청명도 그들의 노력과 성장을 알고 있으니 매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쉬익!

순식간에 곽회의 왼쪽 뺨에 흰 빛이 스쳤다. 한 순간 아찔하게 그 빛을 담은 눈에는 녹색 술을 달고 있는, 시리도록 흰 검신의 암향매화검이 눈 깜짝할 새에 회수되어 다시 뻗어지고 있었다. 정작 검날은 뺨에 맞닿지도 않았는데 그저 휘두르는 것만으로 피부가 찢겨나간다. 이는 과거에 화산이 봉문을 하고서 시작했던 수련에서도 그러했다. 청명은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모든 적(사파놈들.)들의 몇 배는 되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흩날리며 적을 짓눌렀다. 몇 년이 흘러도 청명의 이 살기에는 언제나 신경이 곤두서고 만다. 짜여진 계획대로 일단은 몸을 무른다. 그 화산검협이라는 거창한 별호로도 담을 수 없는 신진 고수, 청명과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한참 자신의 부족함을 새삼 통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급할 것은 없었다. 곽회가 몇 발짝 물러서기도 전에 제 양 옆으로 날아든 또 다른 두 개의 검신이 청명을 향해 쏘아졌으니까. 전날에 비하면 적절하게 맞춰진 움직임.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청명은 눈앞에서 몸을 훅 낮게 낮추며 돌진을 이어갔고 날아드는 검신을 피한 직후, 검 손잡이에 힘을 실어 오른쪽으로 지나간 매화검수의 옆구리를 찍어내렸다. 그리곤 바닥에 붙을 것처럼 낮춘 몸이 빙글 돌며 왼쪽으로 뛰어들어온 창천검수의 복부를 비스듬히 위로 차올린다. “크악!” “큭!” 짧은 비명이 겹치는 순간, 함께 몇 시진 동안 머리를 꼬박 쥐어짜며 만든 포진이 찰나에 무너졌다. 청명은 역수로 잡았던 암향매화검을 다시 바로잡으며 정면에서 멀어져가는 곽회를 쫓는다. 머리가 터질세라 생각하고 입이 바짝 마르도록 털어낸 의견을 취합해 정성으로 짜인 포진은 언제나 그의 앞에선 사분오열이 나버린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책도 이번에는 염두에 두었다는 사실이 곽회의 등을 밀어주듯 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할 수 있으리라! 곽회는 함께 의견을 나누고 눈 하나가 밤탱이가 되도록 맞서 싸워온 이들을 이 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믿는다. 신뢰한다. ‘고작해야 수련일진데….’ 이 따위의 말은 천우맹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아무리 수련이라 한들 전력으로 임해야만 성과를 얻어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때, 뒤에서 검을 휘두르며 몸을 날린 빙궁도가 청명의 암매검의 면을 쳐내듯 검을 치켜올렸다.

카아앙!

암향매화검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퍼지며 청명의 발이 땅을 끌며 자국을 남겼다. 어찌 보면 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저 청명을 밀어낼 수 있었다, 며 자화자찬 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늘 방심해서는 안 된다. 튕겨나갔던 검이 순식간에 회수되어 제자리를 찾더니 울리는 듯한 검명을 내며 앞으로 쏘아진다. 청명은 빙궁도의 검을 휘감듯 맞대어 그를 붙잡은 찰나에 발로 그의 복부를 걷어차 날려버렸다.

"푸하앗!"

“…….”

빙궁도가 숨을 거칠게 토해내며 바닥에 볼품없이 처박힌다. 그럼에도 청명은 그 숨이 터져 나온 곳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흙먼지가 수도없이 날리는 탓인지 짙은 색의 무언가를 퉤, 뱉어내는 모습이 뿌연 먼지바람 사이로 보였지만 그것 뿐이다. 몇 시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이들과의 전투를 반복했음에도 전혀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납득이 갈 정도였다. 그러나 짧은 순간, 그의 주변을 감싸던 이 연무장 바닥 위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얕게 베이고 얻어맞은 상처들이 보이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았다는 양, 멀쩡히 선 채 검을 거머잡고 있던 청명이 찰나에 미묘하게 휘청거린 것이었다. 그와 대치하며 이를 지켜본 이들의 눈이 번뜩였다. 누군가가 싸우는 소리만이 가득한 전장에서 목소리 하나가 끄집어져나와 물꼬를 텄다.

“이거, 이거. 천하의 화산검협께서 벌써 체력이 다하신 모양입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기 있는 사파놈이 대신 할 말을….”

“뭐요?”

“하지만…. 맞는 말이지. 우리가 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시면 큰코다칠 겁니다. 도장.”

“이제 슬슬 얻어맞을 때가 됐지, 응? 청명아.”

“…….”

곳곳에서 낄낄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백천은 어쩐지 떨떠름한 얼굴로 거리를 둔 채 서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눈에 불을 켜고 ‘호오오오오~? 아직 덜 맞아서 주둥이가 살았지? 응? 그렇지? 아직 선계 체험이 덜 된 모양이지? 오늘 제대로 죽어봐야 그 주둥일 두 번 못 놀리지!’ …라며 달려들었을 텐데, 오늘따라 유독 청명은 말이 없었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 어떻게 그것 밖에 안 되냐! 그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마교 새끼들 조각내서 장기 둘래! 한 수 때리려다 장문인 등선하시겠다, 이 새끼들아!

- 잘 계시던 장문인은 왜 건드냐, 미친놈아!

콰아아아앙!

- 아아아아아아악!

…라고 잔소리를 부르짖듯 하며 뛰어들었었다. 정말 체력에 한계가 온 건가? 그 ‘청명’이? 그 괴물 같던… 아니, 그 '괴물' 놈이? 여즉 상상만 해왔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 시작하니 막상 눈앞의 현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백천의 머릿속은 저도 모르게 이레 전, 뒷짐을 지고 멀어지던 청명의 뒷모습을 그려냈다. 터져 나온 기침을 억누르는 듯했던 묘한 소리의 주인은 아마 청명이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먼지바람을 너무 마신 탓에 마른기침이라도 가볍게 내뱉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파아앗!

몸을 잠깐 기우뚱, 기울이던 청명이 작은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 찰나에 긴장을 풀어버린 백천의 앞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큭!” 짧은 신음을 뱉은 백천은 표정을 확 일그러뜨렸다. 아직 수련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순간 방심한 것은 온전히 본인의 실책이다. 어느 때라 하더라도 한번 수련을 시작한 이상 긴장을 풀어선 안 됐는데…!

당황한 백천이 다급히 청명의 검을 쳐내기 위해 손목을 들어 검을 세우던 그때,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턱.

타박, …타박.

…풀썩.

털썩, …….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눈들이 휘둥그레 떠졌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검을 맞대고 있던 이들을 포함해 연무장에는 거대한 고요가 내리앉아있었다. 모든 천우맹도들은 열이 오르다 못해 머리가 녹고 있음을 표하는 안색과 가쁜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쓰러진 채 마른기침에 몸이 들썩이고 있는 청명을 얼이 빠진 표정으로 쳐다봤다. 모두가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멈춰버린 머리를 필사적으로 굴렸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청명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왜냐 하니 그것이 사실이니까. 단언컨대, 청명은 농담이나 장난으로라도 이런 짓(죽은 척이라던가.)은 절대 벌이지 않는다. 늘 헛소리와 개소리는 하더라도 의미 없는 말이나 거짓은 고하지 않던 이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것은 거짓말도, 그의 고의도 아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에게도 한계라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바닥을 드러냈거나, 혹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이는 것들 중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청명의 안색에서 드러나보이는 모습으로 추측하건대, 이것이 수련으로 인해 생긴 부상이 결단코 아니라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의 의식이 없어보인다는 점이 문제였다. 누가봐도 수련 이전에 심각할 수준으로 문제가 있던 것이 아닌가? 이를 깨달은 모두의 표정이 서서히 파리해져 갔다. 쓰러진 청명의 지척에 있던 백천이 먼저 납검하고 청명을 향해 다가갔다. 흩어져있던 오검일권 또한 그에게로 모여들어 몸을 숙이고 청명을 살피기 시작했다.

“처, 청명아. 왜 이러느냐? 눈 떠봐라, 청명아.”

“…사형, 몸에 열. 심해요.”

“아, 뜨거! 몸이 뭐 이리 뜨거워! 불덩이 수준이 아닙니다! 사숙, 사형!”

“진정해라, 걸아. 소소, 소소는 어디 있습니까?”

"저 여기 있어요! 이 사형 새끼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아, 아미타불! 시주! 정신 좀 차리십시오!”

"무슨 일인가!"

“화산검협!”

“청명도장님!”

“도장!”

“다른 것보다도 대열(大熱)이 문제예요! 누구라도 좋으니까 얼른 청명 사형 업고 의약당으로 데려가요! 그리고 소열제(消熱劑)를 준비해달라고 전해주세요! 당장!”

"내가 데려가마. 너희는 운각 사숙께 상황을 전해라!"

"예!"

“손이 남는 사람들은 찬 물과 면포를 준비해주세요! 의약당으로 바로 가져오시고요!”

“……! …!!”

“…! …!!”

청명이 의약당으로 옮겨진 후에도 연무장 내 분위기는 쉽게 진정되지 못했다.


콜록, 콜록….

침상에 누워 정신을 잃은 이의 몸이 간간이 들썩인다. 소열제를 먹인 후에도 열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는지 이마에는 찬 물을 먹은 면포가 올라가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더운 숨이 연달아 뱉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을 앞에 두고 선 이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왠지 모를 살기가 뿜어져나오는 듯한 기세.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전투 시에 비하면 평소와 같아, 위협적이지 않은 살기가 향하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지금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청명임을. 그리고 악귀와도 같은 표정을 지은 당소소가 화가 잔뜩 나있는 이유 또한 그들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고뿔이에요. 네, 고뿔 맞아요. 증세를 보니 병명은 그게 맞네요. 운각 사숙께서도 같은 진단을 내리셨고요.”

“…….”

“처음에는 단순한 고뿔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

“과로에….”

“……….”

“……탈진!”

당소소는 고개를 매섭게 돌려 누운 이를 쏘아보았다. 돌아오는 대답도, 마주쳐오는 시선도 없이 앓고만 있으니 그 행동에 의미가 있겠냐만은. 

“대체 뭘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아닌 고뿔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오는 거냐구요! 이 사형 새끼가!”

“소, 소소야. 진정해라. 그래도 환자이지 않느냐.”

“환자고 나발이고! 자기 몸뚱이가 무슨 만년한철인줄알아! 도대체가! 어이가 없어서 정말!”

“…아, 아무튼 며칠간 잘 쉬신다면 금방 회복하실 수 있다는 것이지요? 큰 병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북해빙궁의 궁주인 설소백이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며 청명의 이마에서 면포를 걷어가더니 다시 찬 물에 담가 익어버린 냉기를 채웠다. 당소소도 그 모습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맞아요. 사형이라면 뭐…. 남들보다 내외상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회복이 빠른 편이니 그럴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

“하지만 지금이야 의식이 없으니 얌전히 누워만 있는 것이지,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사형은 또 움직이겠죠.”

“…….”

“피로가 완전히 풀리지 않은 몸뚱이로, 가라앉지 못한 신열을 숨기고, 해수는 억눌러가면서. ……늘 아픈 건 티 한 번 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럼 병이 진절머리가 나서 그 기미가 사라질 때까지 이 상황을 반복할 테죠. 고뿔과 과로는 그런 것이니까요. 사숙, 사고, 사형들도 알고 있잖아요. 청명 사형이 언제 한 번 푹 쉬었던 적이 있었는지.”

저를 부르는 자들과 더불어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해왔던 혜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미는 청명이 휴식을 취하는 것을 제대로 보았던 적은 없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아무런 티 하나 내지 않고 며칠 내내 이어진 수련을 반복해왔을 거예요. ”

“…….”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사형이 언제부터 고뿔에 들었는지 짐작이 가는 사람, 있어요?”

“…음. 내가 생각하건데, 대략 이레는 된 것 같구나.”

“이레……. 사숙은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데요?”

“처음 청명이가 날뛰고 나서 돌아설 때, 짧게 입을 막고 해수하는 것을 보았었다.”

“예? 언제 그랬습니까? 저도 사형도 전혀….”

“그래, 몰랐을 것이다. 딱 한 번이었으니까. 나도 그저 흙먼지 때문에 목을 풀려고 내는 소리인줄로만 알았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회의할 때, 발작하다 제압된 후에 청명이 놈이 흔치 않게 머리를 꾹꾹 누르고 있었는데…. 혹시 그때부터가 아닙니까? 사숙.”

“그……. 언제적 얘기인 것이냐?”

백천의 얼빠진 말에 다시 한번 침묵이 의약당 내부를 나뭇잎 쓸어가는 빗자루마냥 휘잉 지나갔다.

“아니…. 워낙 많지 않느냐. 그 놈이 눈이 뒤집혀서 발작하던 때가…….”

“…아, 압니다. 사숙. 그러니까…. 그 날입니다. 청명이 놈이 완전히 넋이 나가서 주저앉아있었던.”

“…이레.”

“응?”

“딱 그 날. 이레.”

“…….”

“그, 그럼 나흘 전에 술 마시고 사레들렸을 때에도…?”

이미 고뿔에 걸려있었던 건가? 조걸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을 모두가 이해한 듯 싶었다. 또 한 차례 정적이 흘렀다.

“……그럼 청명이 놈은…. 칠 주야가 지나도록 고뿔이 나아지긴 커녕 계속 심해졌던 거잖습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정도로 멀쩡한 체를 하면서 그 모든 일들을 해왔다고요? 그게 가능합니까? 아니, 저 새끼는 정말 사람이 맞나? 맞아?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

적지 않은 인원이 모여있었음에도 조걸의 물음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게 몇 번째 정적이던가? 당소소는 다시 한숨을 뱉었다.

“…아무튼 열이 식으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상황은 충분히 전했으니 이제 다들 나가요. 완전히 회복되기 전까지 절대안정이니까 당분간 필요한 일이 아닌 이상, 의약당엔 용건없이 얼굴도 내밀지 마시고요.”

의약당을 빠져나가는 모두의 발걸음이 주춤주춤, 망설임을 보였다.


결국 터벅터벅, 터덜터덜 걷는 소리만이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몇몇은 자신들의 처소로, 몇 명은 자신이 허리에 찬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모양새가 마치 채 끝나지 않은 수련을 더 하겠다는 양 보였다. 단체 수련이 끝난 뒤에는 휴식을 권장하도록 되어있었지만, 자연스레 개인 몫의 수련을 하겠다는 사람을 말리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 중 대부분이 화산의 제자들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남은 화산의 제자들 중에서도 가장 깊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곱슬머리 사내가 입을 벙긋거린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청명이 놈, 어떻게 된 걸까요.”

“무엇이 말이냐.”

“아까도 말했잖습니까, 사형. 평소에도 그렇게 괴물같던 놈 아닙니까? 남의 상태도 곧잘 살피고 알아채는 놈이 자기 자신의 상태를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 모를 리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

물음을 받아주던 윤종도 어느새 입을 다문채 조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문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청명이 그 새끼는 늘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이 혹여 다치거나 죽는 것은 그렇게도 꺼려하면서…. 아니, 그렇게 두지 않겠다는 듯이 언제나 먼저 앞장서서 자기 몸을 먼저 위험에 내놓는. 그런 놈 아닙니까?”

“…….”

“그래놓고도 다른 사람들이라면 못 할 일을 해냅니다. 그냥, ……. 예, 그래요. 괴물놈입니다. 그런데 그 괴물놈도 싸움 끝에 쓰러질 때가 있고, 정신을 놓을 때가 있었죠. 우리처럼요.”

“……그 놈도 결국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예. 사숙.”

“…….”

“…만약에.”

임소병이 느릿하게 펴보인 부채로 제 얼굴의 반을 가린 채 조곤조곤 말을 붙여왔다. 모두가 그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주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도장께서 팔 걷어붙이고 여러분을 두들겨 패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 거라 보십니까들?”

“…뭐, 보여졌던 대로….”

“천우맹의 해체?”

“정작 가주님이나, 궁주님들은 싸움에 참가하지 않으셨었는데도?”

“저나, 녹림왕도 있었잖습니까. 당패 형님.”

남궁도위가 슬쩍 손을 올리다 말았다.

“……음, 도중에 일이 있었지만 빙궁주께서도 계셨었고.”

“뭐, 상상은 자유라지만… 대충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었겠지요. 예.”

“그런데……. 그걸 그대로 두고 볼 청명이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여러분이라면 다들 제가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정확히는……. 화산의 제자들께서 더 잘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요.”

순간 오검을 제외한 남은 이들의 시선이 오검에게 집중되었다. 무어라 의미를 담은 눈빛은 아니었으리라.

“그게… 무슨 소립니까? 녹림왕. 사파새끼랍시고 말 돌리지 마시고 말씀해주십시오.”

“남궁 소가주께서는 그새 차릴 명분을 어디 흙바닥에서 다시 주워오셨나 보군요. 쯧쯧. 사파새끼 서럽게.”

임소병은 혀를 몇 번 차더니 부채를 착, 소리나게 접고선 말한다. 그러나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전부 뱉을 의도는 없다는 듯 적당히 뜬 구름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저는 언제나 도장이, 자신의 모든 진심을 여러분에게 꾸밈없이 보이고 있음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딱히 의심을 해보더라도 그런 종류의 사람들과는 확연하게 그 행동의 양상이 다르더군요.”

“…….”

“……도장은 언제나 진심입니다. 전심전력이라는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테죠.”

“…연기 못함.”

“…그건 그렇지.”

“항상 억지로 하려는 연기는 개보다도 못했다니까요.”

“어느 개? 일전에 야수궁주께서 데려오신 개?”

“시, 시주. 야수궁주께서 데려오신 그 개들 외에도 다른 개가 또 있었던 것입니까…?”

“아…. 하긴. 스님께서도 슬슬 먹이주다 정이 드실 때가 되셨었죠.”

“아, 거 화음발 소음 좀 꺼보십쇼! 좀!”

부채를 두어 번 휘저어대던 임소병은 다시 부채를 착, 펴보였다. 불평을 늘어놓은 사람 치곤 시원시원한 움직임이었다.

“…정말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다 알고서도 부정하며 그 안락함 속에 있고자 하는 것입니까.”

일순 모두의 입이 굳게 닫혔다. 임소병에게는 그것이 아무도 그 물음에 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후자에 가깝다는 건가. 그 안락함에 몇 번이고 기대는 이들이 지척에 있다면 도장은 언젠가 오늘처럼 또 쓰러질 지 모르겠군. 아니,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이…'

임소병은 순간 드는 생각을 입 밖에 꺼내지 않기 위해 저 또한 입을 의식적으로 다물었다. 부채 끄트머리 위로 보이는 그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 때 다시 입을 연 사람은 백천이었다.

“그 놈은 늘 우리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입소병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이 이상은 말을 아끼겠다는 듯 한 발을 살짝 뒤로 빼두었다.

“만인방이 화산에 쳐들어왔을 때에도, 북해에서 마교의 교주를 마주했을 때에도. 광동에서….”

무언가를 되짚어보듯 입을 열던 백천은 순간 덜컥 그대로 멈추었다. 곁에 있는 몇 문주들은 모를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저 군사와 같은 임소병까지도 모를 청명의 어느 처절하고, 안타까웠던 감정의 일면을.

“……백천 도장?”

누군가의 물음에 화산의 제자들 또한 백천과 같은 일을 상기한 것인지 시선을 잠시금 떨구었다. 그래, 당시에 오검은 서로 암묵적으로 정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후에 청명이 스스로 그의 과거에 대해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 이야기 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나서서 청명에게 과거를 묻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또한 그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 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지 않으리라고. 백천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의 어미가 이어지지 않음에 몇 명은 눈을 깜빡였지만 누구도 구태여 그 까닭을 물어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별 말없이 백천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장강에서의 일에서도, 화산이 봉문했을 당시에도, 매화도에서나, 항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렇게 닿을 수 없는 화산의 꼭대기 어딘가를 보며 앞서 달려나가는 놈입니다.”

“…….”

“제 몸 하나 건사하려들지도 않고, 그저 그렇게 모두의 앞에 서서 날카로운 바람이란 바람은 모조리 다 가로채가고,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굴고!”

꾸드득.

백천의 주먹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 놈을 보며, 제일 화가 나 있는 이들이 누구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

“……사질이 건방져.”

“…아미타불. 당분간은 청명 시주께서도 얌전히 있으셔야 할 것입니다.”

“아까도 그랬지만, 그 새끼는 늘 그랬습니다! 사숙! 어떻게 한두 번도 아니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지! 아니, 끝은 아니지만!”

윤종은 흥분하기 시작한 조걸을 고개 저어 만류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임소병은 어쩔 수 없다는 양 벌써부터 힘 빠진 모양새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마치 달그락거리는 해골바가지 같았다. 윤종은 잠시금 침묵을 지키다 백천에게로 고개를 돌려 차분히 입을 열었다.

“……사숙. 일전에 누군가가 그러덥니다. 사고가 과묵하기 때문에 알기 어려운 사람이라 한다면….”

유이설은 딱히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윤종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뿐이었다. 어쩐지 그는 윤종이 하는 말의 출처가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 알 것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놈은 과하게 말을 하고, 과격한 행동을 하며 그 의도를 알기 어렵게 한다고요. 하지만 저희는 그 녀석이 그렇게 한 일들이 우리에게 해가 되어 돌아온 적이 없음을 알고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그렇다면 이번에는 우리가 녀석이 없을 때 녀석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했던 것인지를 파악하고 행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그 말이 맞구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시주. 오히려 청명 시주가 계실 동안 당가주님과 야수궁주께 가르침을 받는 것이 어려울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화산오검과 혜연이 동시에 남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렇게 되었으니 같이 힘내보자는 것입니다. 남궁 소가주님, 당가 소가주님.”

“…예!”

“……음. ……예에, 늘 보고 있자면 언제나 가주님께서 늘 신이 나계신 것 같지만 말입니다.”

“빙궁주님과 녹림왕도요.”

“당연히 그리할 것입니다! 청명 도장님을 위해…, 아니! 도장님께 도움이 되어드리기 위해서요!”

“……쯧. 사파라고 해서 더 굴리면 굴렸지. 열외시켜버릴 도장도 아니니 말입니다.”

투덜거리듯 하던 이들도 어느샌가 그 입가에 실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임소병은 그 모습을 한숨쉬며 바라보다, 문득 청명이 잠들어있을 의약당을 한번 쳐다보았다. 문창지 너머로 어딘가에 있을 촛불의 빛이 은은하게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도장. 이 참에 본인이 이곳에, 나아가 이 중원에 다시 없을 존재임을 상기해주십시오.’

‘지금의 그 호흡, 오직 그 하나가 도장의 남은 목숨임을.’

그가 의약당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에. 조잘조잘 떠들며 작전을 나누던 이들이 차차 멀어져갔다. 임소병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시선을 돌린 채 걸어나갔다.

“아이고, 병자만 놔두고 홀랑 가십니까. 다들 참 매정하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까맣기만 했다. 그저 ‘여기서 나가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을 뿐이다. 큰 움직임이 얼마나 마음이 급하고 필사적인지를 알려주듯 했다. 그러나 그 간절함이 닿는 이는 당장 주변에는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팔다리를 휘저었고, 위로 나아가려 애를 썼지만 저 멀리 일렁이는 빛에는 손가락 하나 닿지 못했다. 몸은 점점 가라앉아가고 있었다. 흔들리는 눈망울이 당황을 그려냈다.

푸그르르륵!

작은 입에서 그나마 남아있던 숨이 방울져 터져나왔다. 아이는 필사적으로 누군가를 불러댔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남은 숨마저 자신을 두고 저 먼 곳으로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는 아직 닿지 못할 빛의 한가운데로. 점점 휘적거리던 팔다리가 무거워졌고, 차차 자맥질을 하던 모양새가 멎어갔다.

‘청문 사형…!’

이윽고 흐릿해지는 눈 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투명한 포말을 잔뜩 두르며 나타났다. 익숙한 인영이 작은 아이의 팔을 붙잡아 제 옆에 끼고선 빠르게 물 위를 향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강 위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하앗!” 먹은 물을 급하게 입 밖으로 뱉어내며 둘은 홀딱 젖은 모습으로 땅 위에 올라서자마자, 청문은 아이를 품에 안고 다급히 등을 두들겼다. 그러자, 다행히 아이는 입 밖으로 남은 물을 게워낸다.

“……우웨엑! 콜록, 콜록!”

“청명아, 괜찮은 것이냐!”

“콜록, 콜록……. 켁, 켁…. 사, 사형….”

“다, 다행이야. 다행이구나. 그러게 물가에서는 늘 조심하라 이르지 않았더냐!”

“…….”

물을 뱉어내던 청명은 숨을 가쁘게 내쉬며 고개를 푹 떨군채 쫄딱 젖어 자신을 안고있는 청문의 옷깃을 꼭 붙잡았다. 잘못했다 한마디 하지 않은 청명이지만, 안색을 보아하니 자신이 청문의 말을 듣지 않고 주의하지 못해 생긴 일이었음을 알고 있을 터였다. 영민한 아이니까. 척 보기에도 억울함을 표하는 뚱한 표정이지만 청문은 안다. 이것은 곧 청명이 나름 제 잘못을 알고 있을 때 드러나는 얼굴임을.

“말하지 않았더냐. 이런 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제자가 잘못했어요.”

“그래. 알고있다면 되었다. 얼른 돌아가자꾸나. 빨리 몸을 뎁히지 않으면 고뿔에 걸릴테니.”

“네….”

여전히 청명은 뚱하게 입을 비죽 내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청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안쓰럽게 웃어보이고선 작은 아이를 품에 안고 훌쩍 뛰어올랐다. 슬슬 추워질 시기였다. 어린 아이에게는 잠깐의 추위가 곧장 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화산으로 돌아가 몸을 뎁혀야한다. 청문이 물기를 잔뜩 털어낸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다시 맺힌 물방울들이 툭툭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고뿔, 입니까…?”

“안타깝게도 그러하구나. 화산은 입동이 지나기 전에 추위가 먼저 찾아오는 법이다. 미리 일러두기라도 했으면 물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 아니더냐? 다른 놈들이라면 몰라도 청명이가 네 말을 듣지 않을리는 없지 않느냐.”

“……제자의 불찰입니다, 사숙조. 단순히 보기에 멀쩡해보여 평소처럼 대하던 것이….”

“…그 청명이잖느냐. 이해한다. 이렇게 된 거, 앞으로는 이런 날에 더 잘 살펴보아주면 될 일이다. 이걸 받거라.”

청문은 단색으로 이루어진 비단 주머니를 양손으로 받았다. 그러고선 살짝 힘을 뺀 손으로 그 안에 든 것을 조심히 만지작거려보았다. 둥글고 작은 무언가가 만져졌다. 청문은 금새 이 주머니가 무엇을 담은 주머니인지 깨닫고선 곧장 입을 열었다.

“이것은… 약환주머니입니까?”

“진통제만 따로 지었다. 정량으로는 아이에게 독할테니 약초의 양을 줄여 청명이에게 맞게 제약(製藥)한 것이다. 크기도 조금 작을 것이야. 소열제는 미리 먹여두었지만, 계속 앓는 것이 보인다면 물과 함께 한 알씩만 먹이도록 해라. 속이 편해지는 약초를 함께 넣었으니 배 아파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계속 열이 가라앉지 않거든 백준에게 이야기하고.”

“…응? 사숙조는 어디 가십니까?”

“나는 따로 장문인과 의약당에 대해 이것저것 상의할 것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워야한다. 내가 없을 때 봐줄 이가 백준이라는 말이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란다.”

“그, 그렇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청명이가 깨어난다면 알려드리러 가겠습니다.”

“그래. 문이 너도 쉬어두거라. 같이 빠졌었다면서?”

“제가 고뿔 정도에 걸릴 사람이겠습니까.”

“하하하. 막내가 윗사람들을 여럿 걱정시키는구나. 요 자그마한 게.”

열이 올라 잠에 든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던 의약당주, 운산이 미묘하게 안쓰러운 웃음을 머금고선 자리를 떠났다. 그래, 그랬다. 어째서인지 오늘 아침 수련에 청자배의 제자들이 전부 모이고 나서야 터덜터덜 걸어나오는 모습하며, 어쩐지 붉어져있는 얼굴하며. 여느 때처럼 잔소리 들은 것에 투덜대다 몰래 누군가가 숨겨놓은 술을 한 병 맛보고 나온 줄로만 알았는데…. 오늘의 청명은 평소와 같지 않던 모양이었다. 어째서인지 잔소리를 듣고도 크게 이렇다 할 반응이 없던 것을 좀 더 이상하게 여겼어야 했었다.


털썩!


- 무슨 소란이더냐!

- 사숙조! 아명이… 아니! 처, 청명이가 쓰러졌습니다!

- 청명아! 정신 차려라! 청명아!

당시에 청문은 다급히 청명에게 뛰어나가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당연하다 여겨질 일이 사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것을 당연히 여겨왔기 때문에 무언가 이상하다는 말 하나 없이 아픈 체 하나 하지 않고 제 몫의 목검을 단단히 손에 쥐고서 ‘당연하게’ 수련장에 나타난, 당당한 화산의 제자를.

청문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그리곤 잠든 청명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의 목소리로만 중얼거렸다.

‘……네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바라보던 나보다 낫구나.’

열감이 느껴지는 작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천천히 멈추었다. 약을 먹인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열은 가라앉지 않겠지만, 면포로라도 열을 식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귀가 밝은 이 작은 녀석이 눈치채지 않도록 청문은 조심히 움직여 이마에 얹어진 면포를 회수했다. 그리곤 발소리가 크지 않게 조용조용 움직여 의약당의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열어젖힌 의약당 문 앞으로 청자배 제자들이 우르르 쏟아져내렸다.

걱정이 되어 찾아왔음은 이해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문제가 있었다. 잠에 든 청명이 이 소란에 깨기라도 하면 일이 배는 성가셔질 것이다. 화들짝 놀라있던 청문은 다급히 제 입 앞에 검지를 가져다 대고선 ‘쉬이이이잇!’ 하는 소리를 날카롭게 내었다. 쏟아져 눈을 동그랗게 뜨고있던 제자들이 침상 위에 누운 청명을 보더니 하나같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 사이에 긴장한듯 청문은 고개를 삐걱삐걱 돌려 아이의 잠이 이어지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

“……깨지 않은, 모양이구나.”

“휴우우….”

자신을 향해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사형, 어디가십니까?”

“면포에 적실 물을 가지러 간다. 아직 열이 가라앉질 않아서 말이다.”

“제가 가도 되겠습니까, 사형?”

“청진이, 네가 말이더냐?”

“이리 주십시오. 이 망둥이 같은 사형이 뭐가 이뻐서 대사형 손까지 빌려야 한답니까?”

“…….”

청문은 제가 든 물 양동이를 빼앗아 든 청진을 향해 말없이 웃었다. 저보다 어리고 재능이 넘치는 복에 겨운 사형이 못마땅하다는 듯 차게 굴던 청진은 늘 이렇게 한번씩 섬세하게 청명을 챙겨주는 면이 있었으니까. 청문은 그의 이런 모습 또한 기특하다 여겼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네가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들었다.”

“뭘 말입니까? 에이, 그런 거 모르니까 사형들도 나와들 보십시오. 좀! 못 나가지 않습니까!”

“쉿! 쉿!”

“아, 알고 있다고요…!”

작은 목소리로 투덜대던 청진이 의약당 밖으로 나간 후, 청문은 남은 제자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하며 모두를 들이고 의약당의 문을 닫았다.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청명에게로 다가가 각자 몸을 수그리거나, 무릎을 꿇어 앉거나하며 앓고있는 청명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자는 게 맞는거지? 자는 척 하거나 그런 거 아니지?”

“응. 그런 것 같은데?”

“청명 사형도 아이는 아이구나. 늘 빨빨 돌아다니는 것만 봐오다보니 이렇게 얌전히 누워있는 모습이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청명이 손이 이렇게 작았나?”

“그럼, 작지. 아이잖아? 고사리 손이 따로 없네.”

“이 고사리 손으로 술병을 그렇게 우악스럽게 잡고 마셨단 말이야?”

“이것들이 못하는 말이 없네. 아무리 아이라도 사형이야, 사형.”

“……끄으응.”

“허억… 흡! 쉿! 쉬잇!”

‘쉿!’

‘이러다 깬다!’

“켈록, 켁켁…….”

“물, 물 주거라! 청한아!”

“네, 넵! 대사형! 너희도 비켜봐!”

“물! 여기 물 있습니다!”

우당탕 소란이 일어난 후에는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청명의 모습을 살폈다.

“…….”

“청명아, 정신이 드느냐.”

“사형…?”

“그래. 아픈 건 좀 어떠하냐.”

붉은 뺨을 하고선 눈이 멍한 모양새로 끔벅이는 것을 보아하니, 청명은 아직 열 기운이 채 가시지 못해 몽롱한 상태인듯 했다. 그런 청명의 멍한 시선 앞에 제자들의 얼굴로 인산인해가 이루어져 있었다. 어린 눈이 한 명, 한 명을 전부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익숙한 얼굴들이다. 그들이 하나둘 씩 손을 뻗어 제 이마에 조금 시원한 손바닥을 마주대어주었고, 소매를 걷어 손등을 쓰담아주었고, 뺨에도 손등을 대어 남은 열감이라도 가져가주겠다는 듯 굴었다. 개중에는 환자 귀찮게 하지 말라며 다가온 청진도 있었고. 청명은 해수에 쉬어버린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지고, 코 언저리가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바보같은 사형들. 나 볼 시간에 수련이나 하지….”

“…?”

제 머리칼에 까치집이 세워진 유이설이 물을 담은 바구니에 면포의 물을 쭉 짜내던 순간이었다. 그가 손을 멈춘 이유라 한다면 딱 하나. 청명의 입에서 명확한 중얼거림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변화 없던 표정에 눈만 살짝 동그랗게 커져있었다.

“…….”

청명의 중얼거림은 더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이설은 감긴 눈에서부터 뺨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그는 청명이 무슨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다. 그야 당연한 것이, 안 그래도 표현에 서툰 자신이 남의 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마 천지신명도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짐작하기가 여간 쉬운 것이 아니리라, 그리 생각했다. 눈물을 한 줄기 흘려보낸 청명은 어째서인지 표정이 조금은 편해보였다. 청명을 바라보는 시선이 살짝 가라앉았다.

‘내 사질, 청명.’

“…너는 대체 꿈에서 무엇을 보길래 그런 표정을 지어?”

작게 중얼거린 유이설은 그가 짓는 표정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자신과 청명의 과거는 어딘가 짐작할 수 없는 일정 부분이 닮아있음을. 그 덕택인지는 모르겠지만, 청명과 유이설은 굳이 많은 시간을 대화하려 애쓰지 않아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은, 유이설도 하고자 한다. 그가 해야한다고 하는 것이라면, 유이설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에는 한 치의 의심도, 주저도 없었다. 이것은 둘이 닮았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유이설이 그를 닮아가고 있는걸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찬물을 머금어 조금 시원해진 면포가 청명의 이마 위에 다시 얹어졌다. 유이설은 서서히 수분을 잃어 말라가는 눈물자국을 지긋 쳐다보다가, 청명의 뺨을 쓸어주듯 눈물자국을 지워주었다. 아직 채 자라지 못한 아이를 대하는 듯한 모양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청명의 뺨은 자신의 손에 비하면 따스하기 그지 없었다.

"얼른 나아야해. 또 수련을 하려면."

그리고 그 때, 의약당의 문이 조심히 열리고 윤종과 조걸이 고개를 내밀었다. 유이설도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둘을 바라보았다.

“…사고, 청명이는 좀 어떻습니까?”

“……아직 열 있어. 어제보단 나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둘은 얼굴빛을 조금 밝히며 의약당 안으로 들어섰다. 유이설은 조걸의 손에 든 큰 보따리 하나를 유독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그것이 무엇인지, 내용물을 묻듯이.

“간식입니다. 당과! 거기에 월병이랑, 산사도 조금 챙겨 왔는데…. 청명이 단거 좋아하지 않습니까?”

조걸의 말에 윤종이 내용물을 듣자마자 마른세수를 했다.

“…먹을 것이라기에 말리진 않았는데…….”

“부족할 걱정은 없을 겁니다. 원래 아플 때에는 오히려 더 든든히 먹어줘야 한다지 않습니까, 사형.”

“그래. 챙겨주는 것은 좋지만 문제는 환자가 먹어도 괜찮은 음식인지는 소소에게 물어야겠구나.”

“소소는 잠깐 재경각. 슬슬….”

“다들 모여서 어쩐 일이더냐.”

“응?”

어느샌가 백천과 혜연이 의약당 안으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사숙! 거기에 스님도!”

“쉿…. 목소리가 너무 큽니다, 조걸 시주.”

“헙.”

조걸이 제 입을 양손으로 막으니 바닥에 내려놓았던 보따리의 매듭이 풀렸다. 내용물을 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리던 백천은 다시 슬며시 문을 닫는 혜연을 뒤로하고 유이설의 옆으로 다가왔다.

“사매, 어때보이느냐.”

“…….”

“……왜?”

그가 말이 없자, 백천은 눈썹 한쪽을 치켜올렸다. 뭔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 결국 같은 말을 두 번 하기 전에 윤종이 먼저 답을 주었다.

“아직 열은 남아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는 한결 나아진 모양이시랍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

“사숙께서 오시기 전에 제가 같은 물음을 드렸으니까요.”

“아…. 그랬군. 아무튼 차도가 있어보이니 다행이구나.”

“아무리 시주께서 회복이 빠르다 해도 이 정도로 심해졌다면 적어도 사흘은 넘겨야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혜연이 다가와 청명이 덮은 이불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정리해주며 말했다. 그 옆에서 백천은 들려오는 대화를 들으며 자연스레 청명의 이마 위를 덮은 면포의 냉기를 확인했다.

“무엇보다 회복에는 휴식이 가장 큰 약인 법입니다. 그래서 생강차 같은 걸 끓여보려고….”

“…끓여보려고?”

“……생강을 조금… 캐왔습니다.”

“……캐? 캐왔다고요?”

“예. 수련하다 날아가 쓰러진 곳에서 우연찮게…. 고뿔에는 생강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

“…….”

“아, 아미타불! …여하튼 그렇게 백천 시주와 의약당 앞에서 마주쳐 함께 들어왔습니다. 다른 분들께서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니까…….”

조걸이 혜연에게 대답하며 소곤소곤 대화를 이어나갔다. 윤종은 어째서인지 지금의 모습들을 보더니 실없는 모양새로 웃어버렸다. 다들 평소에는 죽일듯이 대하면서도 결국엔 사형제인 것이구나. 혜연 스님은 조금 다른 경우라곤 하지만 합류하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여정을 줄곧 함께하고 있었으니 또 다른 가족이자 친우일 테지. 기꺼워하는 얼굴로 무언가 입을 떼려던 순간,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이기 시작했고 의약당 내부에 있는 모든 이들이 왈칵 몸을 굳히며 잔뜩 긴장하기 시작했다.

“……형.”

“…뭐라고 한 겁니까?”

“혹시… 일어난 겁니까? 사숙.”

“…청명아, 정신이 드느냐…? 청명….”

“……청문, 사형….”

다시 소란스러워지려던 의약당 내부가 또 한번 고요해졌다. 조걸과 윤종, 혜연과 백천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한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지만, 유이설만이 다시금 청명의 뺨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중얼거린 말 끝에 내려앉은 눈가를 따라 한 방울이 쭉 미끄러져 내려와, 그것을 다시 쓸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때, 청명이 마른 기침과 함께 몸을 들썩이더니 눈을 슬며시 떠보였다. 유이설은 그 눈물을 보고도 태연히 해야할 말을 건네었다.

“청명, 몸은 어때.”


―축시(오전 1시~오전 3시)가 되었을 즈음, 열기를 먹어 무거운 눈꺼풀이 가까스로 들어올려졌다. 눈앞에서 펼쳐졌던 따사로운 매화수(梅花樹)의 풍경은 온데간데 없다. 그저 보이는 것은 적막한 실내, 은은하게 문창지 너머로 비춰져오는 달빛 뿐이었다.

여긴 어디일까. 무슨 일이 일어났지? 분명 곁에 있었던 화산의 제자들이 떠들썩하게 굴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청문 사형도, 청진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언제 또 잠에 들었더라? 분명 제 목검을 쥐고선 사제들 사이에 자리잡고 서 있을 청명이었다. 어째서인지 몸이 무거워 수련 시간에 조금 늦었었는데, 그 뒤로 기억이 없다. 열감에 몽롱한 눈빛이 주위를 둘러봤다. 머리는 붕 떠있는 듯하면서도 몸은 깊게 가라앉아 무거운 느낌이 기이하게 다가왔다. 청명은 이것이 무척이나 어색했다.

"……거기 누구 없어?"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제 몸을 불살라 주변을 밝히던 초 하나만이 꺼져버린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듯, 딱딱하게 굳은 채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어두움이 깊게 내려앉은 것을 보아하니 어느덧 밤이 된 모양이다. 한참동안 청명은 눈을 굴리며 상황을 짐작해보았다. 침상이 있는 위치, 탁자 위의 물건들, 서적을 담은 서장의 생김새. 시선이 닿는 곳곳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낯설면서도 이유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아, 그제서야 청명의 흐릿했던 눈빛이 선명해졌다. 그렇다. 이곳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화산이 아니다. 이젠 더이상 자신도 화산의 13대 제자로 있을 수 없다. 그는 꿈에서 보았던 얼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보고나선,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제대로 정신이 든 모양인지 지끈지끈, 끔찍한 두통이 밀려들었다. 청명은 뒤늦게 잊고 있었던 사실들을 다시 머릿속에서 떠올려냈다. 정신을 잃기 전, 청명은 분명 수련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한껏 올라있던 전신의 열이 들끓음을 깨달았다. 코 안쪽에서 비릿한 향도 함께 맡아졌었던 것 같다. 모래바람이 부는 틈에 코피를 풀어냈으니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아무튼 그로부터 얼마 가지 않아 격한 두통과 함께 현기증이 일었고, 청명은 그 찰나에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눈앞이 한 순간에 뒤집어진 후로 기억이 전무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방심한 사숙의 헌앙했던 얼굴이 바보같은 모양새로 일그러지던 얼굴이었다. 아마 정신을 잃었다면 그 꼴을 본 직후였을 것이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청명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마에서 제 열을 잔뜩 먹어 따스해진 면포가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신열이 아직 가라앉지 못했는지 몸이 이부자리를 벗어나자 으슬으슬 한기가 오른다. 청명은 으으, 작은 신음을 내며 제 양 팔을 부여잡았다.

키익?

제 베개 한쪽 밑에서 몸을 둥글게 만 채 주인의 옆을 지키던 흰 담비 하나가 고개를 힘없이 들어올렸다. 척 봐도 비몽사몽한 얼굴이었다. 백아는 잠이 덜 깬 채 청명을 바라보았다가, 이윽고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타고 올라 목께를 두르고 앉는다. 평소라면 어깨에 걸쳐 놓고도 더우니 떨어지라는 말을 했을 터였다. 그러나 신열에 체온이 잔뜩 올라있던 탓이었는지 하얀 털의 담비는 이전보다도 시원했고, 면포보다도 훨씬 부드러운 감각이 들었다. 지끈거림에 혼란스럽던 머리가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청명은 잠시간 눈꺼풀을 내린채 뺨에 머리를 부벼오는 담비의 움직임에 살짝 제 고개를 기울여주었다. 백아는 그런 청명의 순순한 몸짓에 움찔거렸다. '이 주인놈이 왜 이러지?'싶은 듯한 모양새로. 하지만 그 이상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제 주인의 몸상태가 좋지 않음을 이해하기라도 한 건지. 백아는 닿은 몸이 청명의 열기로 따스해지면, 몸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열을 식혀주었다.

그렇게 잠깐의 기분좋음도 잠시, 청명은 다시 눈을 천천히 뜨더니 평소와는 다른 힘빠진 투로 입을 열었다.

"......야, 임마. …너도 고뿔 옮는다. 떨어져."

"키이익!"

"성질은…. 나중에 옮았다고 성이나 내지 말고."

기껏 열 좀 가져가 줬더니 떨어지라니, 빌어먹을 주인놈! …이라고 말하는 듯 키익키익, 시끄럽게 굴던 백아는 콧방귀를 한번 뀌고선 청명의 목 주변을 든든히 감싸주었다. 청명은 어이가 없어 백아를 잡아서 떼어내려다, 열기에 찬 숨을 푹 내쉬며 결국 들어올린 손을 다시 축 늘어뜨렸다. 아니, 생각해보니 영물도 고뿔에 들던가? 눈썹 한 쪽을 치켜세우며 미묘한 얼굴로 백아를 내려다보던 청명은 제 입을 소매로 가린 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콜록, 콜록. 열기가 담긴 해수를 뱉으며 의약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마자 밤의 찬 공기가 훅, 의약당 내부로 파고들었다. 숨을 가볍게 들이쉬자 갑작스레 밀려오는 찬 기운에 참지 못하고 콜록거리는 소리를 내다 등을 굽힌 채 제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때 아닌 밤 중에 제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깰 이들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이 정도 쌀쌀한 밤이라면 청명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터인데, 몸상태가 평소같지 않은 탓인걸까. 답지않게 목을 두르고 있던 백아가 키이익…. 꼬리를 축 내린 채 걱정하듯 청명을 바라보았다.

열감에 붉게 물든 얼굴이 아무도 없는 연무장에 시선을 두었다가, 고개를 슬 들어 저 멀리 떠있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달이 떠있는 위치를 보아하니 곧 축시에서 인시(오전 3시~오전 5시)로 넘어가는 시간일 것이다.

'이 시간이면 아직 사숙이나 사고가 개인수련하느라 밖에 있을 텐데.'

내뱉는 숨이 튀어나오려는 해수를 막으려 자꾸만 불안정하게 떨려왔다. 머리를 제 손으로 지긋이 누르며 청명은 연무장 앞까지 느릿한 걸음으로 향했다. 제 딴에는 모두에게 티내지 않으려, 고작 고뿔 따위마저 숨기려 들었는데. 보나마나 어느 누군가는 자신이 기절해 있을 때 갈갈이 날뛰었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자신보다 더 챙기려 꼬박 의약당을 방문했을 것이고, 또 어느 누구는 꼴좋다며 비웃었을 것이고, 또 누구는 수련이 조금은 편해졌다며 마음을 놓지 않았을까.

아니지, 마지막과 마지막에서 두 번째는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서 반쯤 도륙을 내버릴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의 죗값을 치르게 해줘야지. 

“키익!”

백아가 단호하게 소리를 내었다. 청명은 그런 백아의 고함이 무슨 연유로 뱉어져나왔는지를 단숨에 이해했다. 얼른 다시 의약당 안으로 들어가던가, 눕던가 하라는 소리일 것이다. 아, 알았어. 알았다고. 청명은 낮게 으르렁거리는 백아를 보고도 피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백아는 도리어 그 웃음이 평소와 달라 몸이 굳었다. 평소같았으면 '감히 먹여살려주고 일도 시켜주는 주인에게 반항을 해? 그래그래, 목도리가 필요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거든….' 따위의 말을 하며 드잡이에 가까운 짓을 했을 것이다. 그래도 백아는 알고 있다. 제 주인은 평소에 보이는 모습 뿐 아니라 잔잔하거나 고요한 면도, 나약하거나 고독한 면도 존재한다고. 지금은 분명 그 나약하고 고독한 면이 제게 보이는 것이다. 때문에 백아는 그저 얌전히 주인의 체온을 지켰다.

청명의 시선이 잠시 몽중에 있는 듯 멍해졌다. 찬 바람이 소매나 깃 사이로 스며들어 온몸이 절로 떨려오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서 다시 정신을 차리긴 했다. 그의 시야가 가장 처음으로 해가 머리를 내미는 동쪽의 하늘을 바라본다.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는지 하늘은 검고, 또 고요했다. 그 사이로 빛나는 별들은 무엇을 위해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밤하늘을 수놓으며 반짝이고만 있었다. 그런 어둑한 하늘에 청명이 떨리는 숨을 한번 불어넣으니, 어두운 하늘에 뿌연 입김이 퍼져나간다.

화산의 공기는 어느 새벽보다도 훨씬 차가웠다. 백 년 전에도, 지금도 그것만은 변함이 없다. 제 주변의 모든 것이 바뀌었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정도는 남아있다는 사실이 청명에게는 조금, 아주 조금의 위안이 되었다. 쓰러진 후에 처음으로 눈을 떴던 그 날 새벽의 화산은 무척이나 그윽했고, 어색할만큼이나 조용했다. 청명은 아무도 없는 차디찬 색으로 가득찬 화산에서 겨우 눈을 떼어 키이익, 짧게 우는 백아의 턱을 검지 끝으로 벅벅 긁어주고선 다시 의약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나마 들었던 정신이 다시 흩어지고 열이 또 오르게 된다면, 천마보다 더한 마귀같은 면상을 하고선 득달같이 달려들 어느 멧돼지같은 놈들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청명, 몸은 어때.”

“……사고.”

“걸아, 물을 좀 가져와라. …이제 조금 괜찮으냐? 청명아.”

“……윤종 사형.”

“일어설 수 있겠느냐.”

“……동룡이가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고.”

“이 새끼가….”

“아직 무리하지는 마세요. 그 상태로 의약당 밖으로 나갔다간 뒈져요, 진짜.”

어느새 다가온 당소소가 눈을 부라리며 쳐다보자, 청명을 포함한 모두가 크게 흠칫거렸다. 그 말의 의미가 곧 청명이 고뿔로 고생을 더 겪는다는 것이 아니라, 소소의 손가락 사이를 채우고 있는 대침에 찔려죽게 될 것이라는 의미임을 모두가 하나같이 짐작했으니까. 조걸과 당소소가 각각 들고온 물잔과 탕약을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목 주변을 두르고 있는 백아는 신경쓰지도 않고 청명이 몸을 일으켜 침상에 앉았다.

“…콜록, 뭐 사람 어떻게 죽나 다들 구경하러 왔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시주….”

“우리 청명이가 고작 고뿔에 개고생을 한다는데 그럼, 보러 와야지. 안 그럽니까? 사형. 앞으로도 보기 드물텐데.”

“…….”

“…….”

조걸의 그 한마디에 혜연이 연신 불호를 외웠다. 조걸의 입방정에 대한 자비를 구하는 의미인 걸까. 조걸은 순간 표정이 뚱해졌다.

“……호오? 조걸 사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왔나, 콜록! …보네.”

“…아무리 청명이라지만 어떻게 사제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최악.”

“…사형 맞아요? 그래도 자기 사제한테.”

“…이건 조걸 시주께서 너무하셨습니다. 그래도 환자인데.”

“……항상 나한테만 그러지, 나한테만.”

조걸이 다른 이들에게 말로 두들겨 맞은 후에는 의약당 한 구석에 무릎을 껴안은 채 주저앉았다. 그 사이에 당소소는 청명에게 탕약을 건네주었다. 청명이 잠시 표정을 와락 구겼다가 턱에 주름이 잔뜩 질 정도로 입 모양새를 찡그리며 주저하고 있었다. 그걸 본 윤종이 눈치좋게 조걸이 챙겨온 간식 보따리를 풀어 월병 두어 개를 집어들고 청명에게 내밀자, 청명은 잠시 미묘한 표정으로 윤종을 한번 쳐다보더니 탕약을 쭉 들이키고선 내민 월병을 입에 다급히 집어넣었다.

어떻게 당과도 아니고 월병을 콕 집어들어 내미는 모양새가 청문 사형과 똑같을까 몰라. 청명은 월병을 마저 씹어넘기며 잠시 눈을 데굴 굴렸다. 이런 미묘한 위화감은 아마 시간이 지나도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선계로 올라가 그들을 다시 만나지 않는 이상은. 

그리고 그때, 손님이 의약당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청명 도장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정신이 드신 모양이네요. 다행입니다, 도장.”

“…가주님께서 곧 수련을 시작하신다는 모양이니, 전달해드리러 왔습니다.”

“뭐, 그 성격에 고작 고뿔로 죽을 거란 생각은 안 했습니다만 옮기지는 말아주십쇼. 아시다시피 저는 절맥 환자이지 않습니까?”

“환자가 환자더러 옮기지 말라네.”

“아니, 인간들아. 내게는 중요하다니까요? 거, 도장께서 영약만 꼬박 줬으면 고뿔 옮길까봐 노심초사 할 이유도 없었다니까 그러네!”

“아, 예에. 녹림왕께서는 연약하시니 말입니다. 조심하셔서 그 쓸데있는 머리라도 보중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남궁 소가주께선 아주 건강하셔서 좋~겠습니다, 아주! 부러워서 피라도 뱉고싶군요.”

순식간에 의약당 내부가 시끌벅적해졌다. 조금 나아졌나 싶었는데, 돌아가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 나으려면 하루는 더 누워있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결국 참다못한 당소소와 청명이 동시에 외쳤다.

“아, 시끄러! 고뿔 옮아보고싶어?! 살만한 꼴 봤으면 이제 나가!”

“환자 있는 데서 문 열고 여럿이서 뭐하는 거야! 나가요! 정수리에 대침으로 매화 수놓아버리기 전에!”

“그러게 녹림왕이 왜 입을 털어선!”

“아니! 그게 제 탓입니까! 제 탓이냐고요! 아이고! 콜록, 콜록! 쿠헥헥! 쿨럭! 쿠우우울럭! 쿨럭!! 아이고오오! 환자 죽네, 죽어!”

“환자고 나발이고 일단 나가요! 빨리! 청명이 눈돌아간다!”

“사고, 일단 먼저…. 이 사람 어디갔어?”

“청명이와 소소가 화내자마자 슬쩍 먼저 나가더구나.”

“어떻게 혼자 도망갈 수가 있어요! 사고오오!”

“됐고, 빨리 나가아아아! 콜록! 콜록! 이 새끼들이 사람을 가만히 안 놔두네!”

쉬라고 할 땐 언제고 다 몰려와서 귀찮게 해! 청명이 얼굴에 열을 올리며 눈을 부라리자, 의약당 안에 있던 이들이 저거 저거, 또 눈 뒤집어지네! 그런 말 따위를 뱉으며 쏟아지듯 의약당 밖으로 쫓겨나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청명의 어깨를 그 자리에 남은 백천과 소소가 붙잡았다.

“…아무튼 누워라. 수련은 어떻게든 해볼테니 너는 정말 푹 쉬고.”

“가만히 못 있겠답시고 밖으로 돌아다니면 그땐 정말 가만 안 둘 거예요.”

“……으, 알았으니까 사숙도 소소도 나가봐. 탕약도 먹었으니 자려고 해도 어린 놈들이 시끄러워서 당최 잠을 못 자겠다, 잠을!”

“네가 화산에서 나이로는 제일 어리다, 임마.”

“아, 맞다. 이거 가끔씩 잊어먹는다니까.”

“알았으니 눕기나 해라. 소소야, 더 필요한 것이 있느냐?”

“아뇨. 사형 상태를 보면 회복은 빠른 것 같으니…. 내일이나 모레면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더 필요한 건 없어보이네요. 하지만 또 무리했다간…….”

이번엔 당소소가 눈을 부라리며 침상에 누운 청명을 내려다보았다. 한기가 잔뜩 서린 눈빛이었다. 청명은 그 시선에 몸을 잠시 움츠리다가,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불을 코까지 뒤집어 쓰고선 몸을 돌려누웠다. 이불에서 살짝 뺀 우수가 휘적휘적 흔들리며 둘을 무르듯 쫓아내는 시늉을 했다.

“그래, 그래. 그러니까 둘 다 가봐. 난 한숨… 콜록, 잘 테니까.”

“다 나아서 보자꾸나.”

“미시(오후 1시~오후 3시)와 해시(오후 9시~오후 11시)에 탕약 한번 씩만 더 가져올테니까, 남기지 말고 먹어야해요.”

“……기왕이면 월병도 같이 부탁 좀.”

“……알았어요. 그럼 쉬세요.”

탁.

닫힌 문 너머로 고요했던 바깥에서 조금씩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마 수련이 시작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평소보다 소리가 들려오는 위치가 조금 멀게 느껴지는 것은 당군악이 고뿔에 걸린 자신을 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청명은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적에 누군가와 했던 대화를 떠올려보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 도사 형님,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 형님은 죽어도 고뿔 따위에는 고생도 안 할거요.

- 왜? 언제는 몸뚱이가 눈 깜짝하면 낫는 줄 안다면서 주둥이 놀리던 놈이.

- 칼부림에 맞고 낫길 반복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지! 정도가! 아니, 이 인간아. 외상이랑 고뿔이 같소?

- 병에 맞냐, 칼에 맞냐의 차이일 뿐인데.

- 돌겠네, 염병. 내 말은 형님이 하도 칼에 안 베여 오는 곳이 없으니 고작 고뿔에는 고생도 안 할 거라는 소리였지. 그렇다고 칼에 맞고 와도 된다는 소리겠냐고! 대체 정신머리를 어디다가… 아니, 정신머리가 문제가 아니고 다른 게 문제긴 하……. 아니, 손 내려 놓으쇼. 근데 내가 뭐 틀린 말 했냐고! 허구한 날 그쪽 몸뚱이에 금창약 발라주고 붕대 두르는 게 누군데 이런 말 정도는…! 악! 아악! 잠깐! 형님, 아악!

……생각해보면 그 대화는 딱히 아름다운 추억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들려온 구타소리는 분명 꿈에서 들려오는 것이겠지. 청명은 그렇게 믿기로 하고 차차 잠에 빠져들어갔다. 

그래도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 병에 걸려서 이리 고생도 하는 걸 보니 네 말대로 나는 사람이 맞았나보다. 안 그러냐? 당보야.


청명을 진정시키고 나서야 의약당 밖으로 나와 합류하려던 백천과 당소소가 발걸음을 재촉하던 때였다. 윤종과 유이설이 둘을 돌아보며 청명이는 자느냐고, 그리 묻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여러 사람의 발목을 잡는 듯 했다.

“…그러고보니, 청문 사형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조걸이 꺼낸 화제에 모두가 그제서야 눈을 크게 깜빡이며 조걸을 돌아보았다. 화산의 제자들은 물론이요, 그 자리에 함께하고있던 천우맹의 몇 문주들 또한 하나같이 똑같은 타이밍에 일제히 저를 돌아보니 조걸은 순간 크게 흠칫거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 청명이 놈이 잠에서 덜 깼을 때 중얼거린 말 말입니다…. 소가주님들이나 궁주님, 녹림왕은 몰라도 사형이나 사고, 사숙은 듣지 않으셨습니까?”

“…….”

“…음. 듣긴 들었다. 하지만 고작 잠꼬대일 뿐이니 신경쓸 것 없다.”

“…저도 들었지만 묘하긴 합니다, 사숙. 잠꼬대로 누군가를 그렇게 명확하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웅얼거리는 말도 아니었고.”

“우연일 수도 있죠. 웅얼거리는 말이 그렇게 들리는 일도 적진 않을 거예요. 아마도요.”

“끄으응, 그런 것 치곤 너무 확실하게 들렸는데.”

“곧 수련이 시작하지 않느냐. 신경쓰지 말고 그쪽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

몇 발짝 앞선 화산의 제자들이 조금씩 떠들기 시작하자 뒤따르는 문주들도 고개를 기울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당패였다.

“…잠꼬대라 하면, 보통은 꿈에서 하는 말이 무심코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때가 가장 잠에서 깨기 쉬운 때이기도 하지요.”

“그럼, 청명 도장께서는 그…. 청문이라는 분을 꿈에서 만났고, 그 분을 부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화산의 제자분들 중에 청문이란 도호를 가지신 분이 계신지요?”

동그란 눈을 크게 깜빡이며 말하는 설소백의 말에 화산의 제자들은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설소백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쪽 팔로 팔짱을 끼고서 남은 손으로 턱을 괸 모양새로 침음을 내던 백천에게로 시선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 말하기를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 더 고민을 하는 듯 보이더니, 뒤늦게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그, 제가 기억하는 분의 도호가 맞다면…. 아니, 청명이가 말한 것이라면 아마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아니지. 아닐 것이다. 딱히 접점도 없는 분을 무엇하러….”

“뜸들이지 말고 말해주십쇼, 사숙.”

끄으응, 백천이 앓는 소리를 내다가 말을 이었다.

“……과거 대화산파 13대 장문인이셨던, 대현검(大賢劍) 청문(靑問)진인이 떠오릅니다.”

“대현검이라 하신다면…. 백 년 전의 사람이 아닙니까? 당대 화산에서 가장 어질고 천하에 이름이 높았던 검수이자 도인으로 알려졌던.”

“알고있으신 겁니까? 소가주님.”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어요? 화산의 제자는 난데.”

“…….”

…소소야, 그렇다면 너는 지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 못한 당패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도장께서는 그런 대현검의 도호를 잠결에 막 부른 것이 되겠군요? 이건 정말…….”

끝내주는 기사멸조로군. 이어지는 임소병의 중얼거림에 윤종과 백천은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청명이야 늘 그렇지만 결국엔 사파의 수장 된 사람의 입에서 끝내주는 기사멸조라는 말이 나오고야 만 것이다.

“…그, ……렇게 되겠지요.”

“이게 아무리 몸이 안 좋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기사멸조를……!”

“벌 받아야 해.”

“감히 대현검 청문진인을 함부로 칭하다니, 원시천존께서 대가리를 깨도 할 말이 없어야 할 놈입니다.”

“아, 아무리 그래도 청명 도장이신데 대가리가 깨지다니요! 저로선 도저히 상상이 안 갑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빙궁주님.”

“아니, 근데 상식적으로 기사멸조를 정신 못 차릴 때에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도장이라면 왠지 모르게……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럴 것도 같고.

차마 남궁도위가 꺼내지 못했던 뒷말을 모두가 들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이거 분명 이전에도 있었던 일 같은데…. 미묘한 위화감에 천우맹도들은 각자 제 생각을 추스렸다. 아무리 청명이라도 화산의 장문인과 장로들에게는 깍듯이 대하는 모습을 늘 지켜보던 화산의 제자들마저 순간 그런 생각이 들고 말았으니 청명의 성격이 그들에게 얼마나 개망나니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겠는가. 하지만 이곳에 있는 그들은 알고있다.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음을. 그러니 그저 지레짐작만 하고 넘기는 것에 그쳤다.

“잠깐, 기다려보십쇼. 다들 뭔가 착각한 게 아닙니까? ‘사형’이라 불렀다고요, ‘사형’이라고! 그때 청명이가 사형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저나 윤종 사형 밖에 없었잖습니까?”

“그것도 그렇긴 한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이냐.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라도 있는 것이더냐.”

“으으음…. 다들 얘기하시는 걸 보고 떠오른 것이지만 말입니다. 청명이도 청자배지만 도호가 아니라 그냥 이름이듯이, 그 청문 사형이라는 분도 사실 대현검 청문진인이 아니라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이 아닐까하는 거죠.”

“그렇다면… 청명이 화산에 입문하기 이전의 사형제를 부르던 것이다……. 뭐 그런 말이냐?”

“예. 사실 그것 말곤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고요. 청명이 나이가 이제 고작 약관을 넘긴 지 몇 해가 안 지났습니다. 그런 청명이가 백 년 전의 선조이신 대현검과 연관이 있을 리도 없지 않습니까?”

모두가 조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그렇지. 조걸은 늘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 못하고 입 밖으로 무작정 내뱉기에 바쁜 사람이다. 하지만 어느 때에는 이런 식으로 똘똘한 말을 할 때도 있었다. 역시 잘 나가는 사해상회의 자제라 이건가. 모두가 납득하고나니 그 뒤로는 이 화제도 슬슬 가라앉은 듯 다함께 연무장을 향해 바삐 걸음들을 옮겨갔다.

“참….”

남궁도위는 그 얘기를 들은 후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고개를 슬 돌려 청명이 있을 의약당의 문을 한번 바라보았다. 어찌 그리도 말썽을 피우시는 걸까. 자리를 비울 때에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때에도, 온전히 제정신일 때에도 그러했다. 아니, 사실 제정신일 때가 더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궁도위는 그를 걱정하기보다도 청명이 제 몸을 추스리고 있을 동안, 그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그것을 행할 뿐이었다. 다시 시선을 앞으로 두고 가까워지는 연무장을 바라보면, 어느샌가 수련을 위해 모여든 천우맹도들이 나란히 도열해 다가오는 그들을 각자 바라보거나 반기거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타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수는 없는 법이다. 제 생각과 의지. 그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곧 자신을, 나아가 남궁을 구하고 이끌어준 은인에게 들러붙어 발목을 붙잡고 짐을 늘리는 꼴이다. 남궁도위는 결코 그러길 원치 않았다. 남궁의 가솔들 모두가, 스스로 남궁의 의지로서 맑고 청아한 푸른 하늘(蒼天)과 같은 의복을 갖추고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남궁의 검수로서 올바르게 서기를 바랐다. 협(俠)을 지키며, 의(義)를 행하는. 이것이 화산검협에게는 더더욱 힘이 되고 보탬이 될 테니까.

빙긋 입꼬리를 올려 웃음지은 남궁도위는 재차 감사를 표하듯 의약당을 향해 상체를 살짝 틀어 바라보았다. 그러자 순간, 그는 눈썹 한쪽을 살짝 들어올렸다. 닿은 시선 끝에 살짝 열려있던 의약당의 문이 누군가에 의해 닫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누군가가 그를 간호해주기 위해 들어간 것일까. 그 이상 무언가 생각하길 그만두고서 남궁도위는 제 숙부가 지키고 있는 자리를 향해 다시 성큼성큼 나아갔다.

‘도장,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도장을 아끼니 하루 빨리 나아져서 다시 검을 들어주십시오.’

우리가 당신의 앞길을 활짝 열 수 있도록. 우리가 당신의 곁을 받치고 뒤를 지키며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젠간 한 방 먹여줄 수 있도록 말이지.’

오늘은 어쩐지 수련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둘러싼 자연의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변화는 하늘이자 땅이며, 작은 씨앗과 거대한 나무이고, 이파리에 맺힌 이슬이자 강물이다. 이처럼 무언가를 성장케 하는 때가 있다면, 역으로 푸르렀던 숲이 말라 비틀어지고, 거대했던 폭포의 물이 틀어막혀 흐르지 않아 비어가는 물덩이가 되어가고, 구름 한 점 없이 흘러가는 텅 빈 하늘처럼 허무함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변화는 결코 일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세상 모든 만물이 이 변화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렇게 이어져 온 세상이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공기의 흐름, 세상의 시작을 모르고 쓸어내리는 바람의 흐름. 하늘과 땅을 선회하는 물의 흐름. 흙의 고옥을 유지하는 청초의 흐름. 끝없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매화의 흐름. 그리고 이것은 곧 사계(四季)를 말함이니, 시작은 언젠가 끝을 맞이하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작은 변화의 첫발이 될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미래로 나아가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는다. 이는 그 자연에 속해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언제나 움직이며 살아간다.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만 있다면 썩어 이끼를 피워냄을 모두가 알고있는 것처럼. 멈춰있는 자는 그 사고(思考)가 말라비틀어져 뱃가죽 사이로 뼈를 드러낼 것이며, 마음은 굳어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드러난 겉모습에서 감정이 쥐어뜯겨 더는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시체가 될 것이다. 

그는 의미없는 물음을 머릿속으로 넌지시 던졌다. 어찌 너는 움직이려 하는가? 왜 무거울 몸을 일으켜 시야를 자꾸만 움직이는가? 어째서 자꾸만 입을 열어 날선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몸을 불살라 제 모든 것을 감싸려 드는가? 도대체 그 작은 등에 무엇을 짊어지고 있기에 그리도 슬프고 잔혹한 매화의 검무(劍舞)를 추는가? 체구에 비해 거칠고 넓은 손은 그 검을 틀어쥐고 얼마나 많은 악적의 숨을 무참히도 베어왔는가? 너는 어찌 한번을 편히 잠들지 않는가? 잠시간만 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리고 편히 감는다면 복잡한 생각할 필요따위 없이 안락한 곳에서 네가 아끼는 이들과 남은 생을 함께할 수 있을 터인데.

허나 굳이 입으로 직접 묻지 않더라도 이유는 간단했다. 내뱉는 숨이, 울리는 심박이, 깜빡이는 눈꺼풀이, 하늘을 향해 들어올린 턱끝이, 녹빛의 머리끈으로 질끈 묶어올려 흔들리는 단정치 못한 긴 머리칼이, 허리의 장식끈과 순백으로 빛나는 검신의 끝에 달린 술이 친우의 색을 담은 채 흔들리고, 청명한 하늘을 담은 붉은 매화빛의 눈동자가, 그 마음에 품은 이유모를 애달픔과 굳은 의지, 얼핏 보이던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진중한 도기(道器)까지. 그가 보고 만나고 닿아왔던 모든 것들이 그를 멈춰서게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현종이 가만히 의약당의 문을 열었다. 마침 당소소가 건네주고 간 탕약을 전부 목으로 넘기고 월병 하나를 입에 문 채 누워있던 청명이 그 모습을 보고서 몸을 다시 일으켰다. 현종은 그런 청명에게 더 누워있으라며 몸을 일으키려는 청명을 만류했다. 어떨떨한 표정으로 현종을 올려다보는 청명의 앞머리를 제 손으로 슬 걷어낸 현종은 안쓰러운 얼굴로 이마에 손을 얹는다. 펄펄 끓었던 청명의 열은 어느덧 가라앉아, 이제는 현종의 체온보다도 더 따뜻할 정도에 그쳤다. 현종의 손이 느릿하게 물러나자, 살짝 제 눈을 감고있던 청명이 장문인의 표정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어차피 곧 나을텐데.”

“제자가 아프다는데 장문 된 이가 오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

“…고뿔 옮습니다. 장문인께서 고뿔에 들면 정말 큰일인데.”

“내가 고뿔 들 걱정일랑 말고 우선은 너부터 건강하면 그걸로 충분하단다.”

“…….”

청명의 입이 벙긋거리는 사이에 현종은 당소소가 옆에 놓아둔 물 바구니에 걸쳐진 물수건을 들고, 찬물을 가득 먹인 후 물기가 거의 남지 않을 만큼 쭉 짜서 청명의 얼굴과 목 부근을 닦아주고선 곁에 앉았다. 그러자 청명의 품에서 체온을 지켜주던 백아가 살짝 고개를 내밀다 말았다.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를 지키기 위해 있는 이 이다.”

“…….”

“그런데, 내가 네 상태를 짐작하지도 못했었구나.”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고뿔 정도야 저는 기합으로 나아요. 장문인도 아시면서.”

“항상 그리 티 한번 내지 않고 홀로 참으며 말이냐.”

“…….”

“나는 말이다. 그 누구보다 화산을 생각하는 청명이 네가, 가끔은 진정으로 숨을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나 뿐만이 아니다. 화산의 모든 장로와 모든 제자들도 그리 생각할 것이다.”

“……장문인.”

“……언제나 화산이 너를 지킬 것이다. 너 또한 소중한 화산의 제자이지 않느냐.”

부드럽고도 온기가 담긴 목소리에 청명은 수 년 전에 들었던 장문인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 네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건 화산에 입문하여 화산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이상, 너는 그저 내가 지켜야 할 화산의 제자일 뿐이다!

청명은 당시에 들었던 현종의 목소리에는 노기와 울분이 서려있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거의 울음을 대신하는 듯한 음성이었다. 이는 분노해 떨어지는 벼락과도 같았으며, 끓어 넘치는 화산(火山)의 분화구와도 같았다. 그는 백 년 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늘 꾸었던 악몽과 똑같은 풍경으로 화산에 다시 피비린내가 불며 전각이 불에 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스로 몸을 던져 자신이 끝끝내 돌아갈 장소를 지켜내었다. 그때에는 감당할 수 없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딘가에 쏟아내고 싶었다. 당연하게도 그 분을 싣던 살기가 펼쳐져 만인방의 본거지에 피를 흩뿌리기도 전에 오검과 현종에 의해 저지당했다. 지금이야 그 모가지를 잘라줄 대상이 단 둘로 분명하게 자리잡아있으니 그 외에는 신경 쓸 겨를도 없지만서도. 

- 착각하지 마라. 청명아. 화산은 네가 지켜야 할 곳이 아니다.

- 네가 화산을 지키는 게 아니라, 화산이 너를 지키는 것이다. 너 역시 화산의 제자다. 그런데 어찌 너 홀로 화산을 짊어지려 하느냐.

청명이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와 지금 제 곁에서 자신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이의 목소리는 천지 차이라 해도 좋을 만큼이나 달랐다. 청명은 잠시 눈을 내리깔며 눈동자를 굴려 시선을 비스듬 옆으로 피했다가, 다시 굳건한 천우맹의 맹주. 제자들을 자식처럼 아끼는 화산의 장문을 바라보았다. 매화검존으로서 바라보는 그는 그저 자신이 지켜내주지 못한 안타까운 후대였으며, 아픈 손가락과도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현판이 걸려있을 자리가 비고, 모든 전각이 낡아 멸문만을 목전에 두고있던 화산을 묵묵히 지켜내고있었던 대화산파 23대 장문인 현종. 그의 제자들이 함께하며, 언제나 잔소리와 사소한 벌을 주며 잔뜩 혼을 내더라도 중요할 때에는 끝까지 청명과 제자들을 망설임없이 믿는다. 제자들의 뒤를 나긋한 미소로 지켜주는 그가 있어 화산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청명은 그런 현종에게 모자란 선조로서의 깊은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뢰를 쌓아올렸다.

순간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청명의 입이 꾹 닫히고 말았다. 여차하면 무언가가 입 밖으로 토해져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먹은 것을 게워낸다는 의미가 아니다. 속에서부터 기어오른 것은 울컥함이었다. 왜 이러는 걸까. 아직 신열이 채 가시질 못해서 그런걸까. 복잡미묘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다 입을 꾹 문 청명을, 현종은 그저 기다렸다. 그는 청명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왜 그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알려고 하지 않는다.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모든 속내를 꺼내놓지 않음은, 아직 꺼내놓을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고 현종은 짐작했다. 꺼내놓는 순간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혹은 화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시덥잖은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짐작은 하더라도 그것이 정답은 아니다. 

그렇기에 현종은 기다렸다. 다시 청명이 표정을 갈무리하고 입을 열기까지.

덕택에 여러 의미로 아찔해지는 머릿속을 애써 정돈한 청명은 다시 잔잔히 목소릴 낼 수 있었다. 

“……음. 뭐…. 고작 고뿔인데 지키기까지야.”

“허허허.”

현종은 그 말에 나지막이 웃는 소리를 내었다.

“어느 때든 늘 크게 다치고, 말썽피우고. 고생한 것도 네가 아니더냐. 그러니 이리 드러누워있는 것이지. 또, 이렇게 되기 전에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냥 뭐, 쪼끔. 쪼오금 힘을 오랫동안 써서 그런거지, 별 거 아니라니까요. 그렇게까지 걱정하실 필요는…….”

“그럼, 청명아. 그 별 거 아닌 것에 너는 그리도 끙끙 앓은 것이구나.”

“……장문인께서 제자의 사소한 문제까지 신경쓰시면 정말 병 드실걸요.”

“지금의 너처럼 말이냐?”

“…….”

청명은 할 말을 잃었다. 말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청명은 바보처럼 입을 벙하니 벌린 채 현종을 바라보았다. 현종은 그 모습에도 그저 담담히 입을 열 뿐이었다.

“당가주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시는 모양이더구나.”

“……당가주님이요?”

“그래. 맹도들의 수련은 네가 몸을 추스릴 동안에 야수궁주님과 각 문의 장로들께서 힘 써주고 계신다. 당가주께서도 그러시더구나. 청명이 네가 그 비실한 몸상태를 이끌고 계속 수련을 하느니, 한번 푹 쉬어서 온전한 몸상태를 갖추고 나서 수련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효과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고.”

“…….”

아저씨가…. 그런 청명의 중얼거림에도 현종은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독왕이라 불리우는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이 화산검협 청명의 친우임을 모르는 현종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그저 “게다가, 친우이기에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덧붙였다. 이 자리에는 없는 당군악도 분명 그리 말했으리라. 현종은 그리 짐작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거, 틀린 말 하나 없네요. 제가 누군데. 그치만 제가 없으니 가주님도 궁주님도 힘깨나 쓰셔야 할 텐데도요. …아무리 애들이라도 다굴에는 장사없다고….”

“허허허, 그 분들을 잘 아는 것도 네가 아니더냐. 믿어보려무나. 정 걱정이 되면 네가 빨리 회복해서 다시 복귀하는 것도 방법일테지.”

쓰다듬이 이어지는 다정한 손길에 청명은 졸음이 밀려들기 시작했는지, 깜빡이던 눈꺼풀의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졌다.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의 사이가 점점 벌어져간다. 청명은 이 손길에서 어딘가 익숙함을 느꼈다. 과거 어릴 적에, 청문에게서 받았던 따스한 쓰다듬이 딱 이러했었다고.

“……그러게요. …이 정도 고뿔이야… 눈 한번 깜짝, …할 새에 나아서…. 이런 건 금방, ….”

“한숨 자거라. 탕약도 먹었으니 금방 나을 것이다.”

현종의 나긋한 목소리가 청명의 잠을 부추기는 듯 했다. 흐릿해져가는 시야, 울리는 듯한 목소리. 하지만 여전히 멈추지 않는 상냥한 움직임이 잠시동안 청명에게 꿈을 꾸게 했다.

“…푹 자거라, 청명아.”

- 잘 자거라, 청명아.

‘……장문사형.’

눈앞에 있는 이의 목소리에 자신이 매우 잘 아는, 무척이나 보고싶었고 다시 듣고싶은 목소리가 겹쳐 들려오는 것 같았다. 꾸벅 졸던 청명은 그렇게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고개에 힘이 빠지니 베개에 뺨을 기대는 모양새가 되었고, 가슴께를 덮은 이불이 조금씩 오르내리고 있었다.

현종은 소리없이 잠든 청명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청명이 화산에 입문한 이후부터 현종이 바라보았던 청명의 수많은 표정들 중, 지금 얼굴에 떠오른 청명의 표정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가장 편안해보이는 아이같은 미소임을. 마치 부모의 품에 안겨 아무 걱정일랑 없이 아늑하다는 표정. 은은하게 떠오른 표정 위로 현종은 잠든 청명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어주며 저도 정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미소는 조금 안쓰럽고, 안타까움에 속이 쓰린듯한. 약간의 슬픔이 담긴 미소였다.


청명은 그 뒤로 그날 하루를 꼬박 잠에 들어있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푹 자지 못했던 만큼의 잠을 전부 몰아서 자는 듯한 기세였다.

주변에 누가 오가든, 누구의 인기척이 느껴지든 깨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몇몇 맹도들은 설마 정말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말도 꺼내보았지만 현재 중원을 가장 뜨겁게 달구고있는 화산검협이 아니던가. 만일 정말 이승을 떠났다면 가장 먼저 울부짖을 이들이 화산의 제자들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화산의 제자들이 얌전히 할 일을 충실히 행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분명 죽지는 않았으리라. 한동안 얼굴을 보이지 않는 화산검협은 둘째치고, 지금 당장 닥쳐온 문제는 따로 있었으니 더 이상 신경 쓸 여력이라곤 없기도 했다. 바닥에 나란히 드러누운 야수궁의 궁도와 사천당가의 가솔은 오늘도 끙끙대며 야수궁주와 가주님의 가차없는 수련에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는 그들 뿐만 아니라 다른 문도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제 검 끝이, 제 주먹이 닿지 않는 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들은 성장하고있다. 그들과 대련을 펼치는 이들의 옷가지가 너덜너덜해져 흙먼지가 묻거나 몸 한구석에 옅은 자상과 멍이 남아있는 모습들을 본다면 수련을 시작했던 첫 날에 비해 확실하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열성을 내어 맹도들과 소통하며 그들과 검을, 발을 맞추어 움직였다.

‘할 수 있어. 지금 이대로만 간다면!’

손때가 잔뜩 묻은 당문전이 순식간에 비상하여 묵은 빛살로 쏘아져 내렸다. 그 모습이 마치 날이 잔뜩 벼려진 추혼비(追魂匕)를 보는 것만 같다. 독왕, 당군악의 손에서 펼쳐지는 동전의 움직임은 감히 눈에 담기지 않을 만큼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이것이 수련이라 한들, 그가 내보이는 초식들은 한 치의 망설임 하나 없이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녹림도들이 그의 주변을 휘감기라도 하겠다는 듯 뛰어들었고, 그의 정면과 후미에서는 각자의 검을 든 이들이 이번에는 기필코 때려눕힐 것이라는 각오로 시린 눈을 한 채 덤벼들었다. 한 치 거리를 두고서 당패 또한 당문전을 던져 그들 사이에 생겨난 빈틈을 메꾸는 것으로 아군을 지원한다. 그러나 그들의 상대는 절대고수로 알려진 자들 중 하나. 당군악이었다.

오늘도 거침없는 난전의 시간이 흘렀다. 맹도들이 죄다 바람에 날리다 연무장에 펼쳐진 천쪼가리마냥 널부러져 있을 지경이 되어있을 즈음에는 어느덧 해가 산 중턱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림자가 짙게 기울어 연무장에선 보이지 않을 장원의 한 편. 당군악과 맹소, 각 장로들이 지친 숨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먼저 숨을 돌린 맹소는 장원의 벽에 기대어 난장판이 된 연무장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맹도들은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자신들이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의논하고,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멈추는 이 하나 없이 착실히 성장해나가고 있음을 매일매일 몸으로 체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런 식으로 맹도들의 성장을 느끼며 깨닫게 될 것이라고는 야수궁주인 그 또한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그의 옆에서 의관을 정비하고 있는 당군악도 그러할 것이다. 화산겁협의 빛살같은 추진력에 맞춰 행동하는 것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벅찬 일이었으니까. 맹소는 연무장 어딘가에서 제 궁도들이 허울과 격의없이 중원인들과 거침없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을 바라본다. 말없이 그 모양을 보던 맹소는 실소와 함께 중얼거림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새삼 기이한 것 같소.”

“무엇이 말입니까.”

“사실 중원인에 대해 쉬이 믿지 못하고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것이 야수궁의 문제라면 문제라 여기었소. 이전, 맹이 개파하기도 한참 전에 화산검협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우리마저 이런데 화산의 제자들이나 당가의 식솔들, 야수궁도들이 서로를 믿는 건 오만이다.’라고 말이오.”

“…….”

“우리가 아무리 천우맹이라는 이름의 한 식구로서 연을 맺었다 하여도 그 밑에 있는 가솔들이나 궁도들도 똑같이 서로를 친우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외다.”

“궁주님, 그 말은….”

“일단은 들어보시오.”

당군악은 맹소의 말에 좁히려던 미간을 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참 요상하다고 생각되지 않소이까. 화산검협이 시작한 일로 인해 궁도들과 가솔들도, 너나 할 거 없이 모두가 저리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소.”

“그렇지요.”

“화산검협이 웬 요술이라도 부린 것처럼 말이오.”

“…허허! 궁주께서 그런 농을 다 하시고.”

“크하하하! 가끔은 이런 날도 있기 마련이 아닌가!”

당군악과 맹소는 기분이 좋다는 양 시원시원하게 웃어보였다. 둘의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덧씌워져있던 피곤함이 씻겨져나간 듯 했다.

“…아, 그렇지. 화산검협은 어떠한가? 낮에 한번 가주께서 상태를 보고 온 것으로 알고 있소만.”

“상태는 괜찮아보였습니다. 잘 깨어나지 못하는 것도 회복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테니 염려 마십시오. 무엇보다 우리는 맹도들을 최대한 굴리… 아니, 수련 시키는 것에 집중해야겠지요. 화산검협이 고작 이 정도냐며 자리에서 일어나 쫓아오기 전에 말입니다.”

“하하하하! 아무튼 다행이군. 화산검협이 없으니 역시 사람 수에서 밀리기 시작하니 말이오. 화산검협에게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우리도 더 힘을 써야하는 것이 좋을 듯 하외다.”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회복에 대해선 의약당에서 단단히, 아주 단단히 일러두었으니 화산검협도 그 와중에 술을 마신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지요.”

“그렇다면 다행이오. 가져온 술로 대작을 할 수 없다는 건 조금 안타깝지만….”

“혹여라도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회복되었다 말하기 전까지는 환.자. 에게, 술은 절.대.로. 권하시면 아니됩니다.”

말을 뚝뚝 끊으며 단호하게 얘기하는 당군악의 기세가 살벌했다.

‘사천당가의 가솔들은 가주를 포함해 전부 환자가 관여되면 이리도 살벌해지는가?’

맹소는 저도 모르게 양손을 올리며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도 하는 것처럼 항복의 의사를 표했다.

“알겠네, 알겠소이다. 그러니 가주께서도 진정하시오.”

“음.”

“…뭐 아무튼, 그리 말씀하시니 나도 내가 해야할 일을 하며 기다리는 수 밖에. 이 수련은 앞으로도 천우맹에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니 말이오.”

“화산검협도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뒤는 의약당원들에게 맡겨두지요. 어서 저희도 다음 날을 위해 가급적 체력을 보존해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것이 좋겠소.”

둘의 시선이 의약당을 잠깐동안 머물다 말았다. 그 후에는 각자가 처소를 향해 나아간다. 처소를 향하는 둘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수련을 시작한 지 어느덧 열흘이 넘어가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수련에 너덜너덜해진 맹도들은 그 사이에서 제 의관을 멀끔하게 차린 채 고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는 백천을 바라보았다. 화산의 제자들도, 당가와 남궁의 가솔들, 야수궁과 북해빙궁의 궁도들, 그리고 녹림칠십이채의 녹림도들도 질린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괴물 놈인가….’

‘그 문파에 그 제자네.’

‘저건 거의 광인 수준이야.’

‘대체 어찌하면 이런 혹독한 수련 속에서 저런 미친 짓이 가능한 것인가?’

‘저 자는 굶어죽더라도 때깔은 고울 것이다. 절대로…!’

“다들 뭘 그리 보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도장.”

“나는 보지 않았소.”

“바닥의 흙이 참 곱습니다.”

맹도들이 여기저기로 시선을 돌리고 있으니 멀리서 다가오는 인영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맹도들은 표정을 굳히며 자세를 바로했다. 전날에도 마찬가지로 수련을 했을 텐데, 익숙해지긴 커녕 언제고, 몇 번이고 몸은 자연스럽게 긴장하고 말았다. 누군가의 목울대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지금은 그것에 신경쓸 때는 아니었다. 당군악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그 때였다.

“다들 모였지?”

익숙한 목소리와 당당한 걸음. 위로 대충 올려 질끈 묶은 검은 말총머리의 사내. 어깨를 툭툭 치고 있는 검집은 녹색의 술을 단 암향매화검임이 틀림없다. 이제는 완전히 멀쩡해진 듯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의 청명이 휘적휘적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몇몇 이들이 훌쩍 뛰어와 청명의 옆에 서서 몸을 다급히 살폈다.

“청명도장님!”

“청명아!”

“시주!”

“사형!”

“도장! 괜찮으십니까!”

“내 이럴 줄 알았지. 하여간 끈질긴 분이시라니까.”

“청명아, 괜찮으냐? 열은? 다 나은 것이냐?”

“내가 싸온 간식들은? 다 먹은거지? 크으, 챙겨주길 잘했네!”

“아이, 귀찮게! 다 나았으니까 떨어지기나 해! 이젠 멀쩡하니까.”

“걱정 많이 했습니다, 도장님!”

“아니…. 됐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수련 안 해?”

“우리는 네가 걱정되어서…!”

“아, 돌아가라고! 초장부터 대가리 깨지고 시작하고 싶어?”

청명이 눈을 부라리자 오검을 포함해 가까이 다가간 이들이 몸을 작게 움찔거리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 남은 유이설과 백천은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안 들어가?”

“…….”

“사고, 사숙.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슬슬….”

“이젠 아프지 마.”

“…….”

“잘 쉬어. 사질이 아프면 곤란.”

“…….”

그 말을 남기고서 유이설은 자박자박 제 자리로 향했다. 이제 청명의 앞에는 백천만이 남아있었다. 청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유이설을 바라보며 입을 벙하니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괜찮은 것이냐.”

“고뿔이라면 진즉 다 나았다니까 그러네. 사숙은 말귀를 못 알아먹어?”

“이 새끼야 말을 좀….”

백천은 어쩔 수 없는 노기가 올라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끙끙 앓고 있을 때의 녀석이 훨씬 얌전하니 배는 귀여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녀석의 앞에 선 것은 아니었다.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자 청명은 눈썹 한쪽을 치켜세웠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니다. 청명아.”

“그럼 뭔데?”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이번에 네가….”

백천은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본디 하려던 말은 많고도 많았다. 어째서 몸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고도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계속 숨겼는가, 왜 그렇게까지 제 몸을 돌보려들지 않고 남을 위해 할애하는가. 잠결에 부른 청문이라는 이는 너에게 어떤 이였으며, 너는 잠들었던 동안 무슨 꿈을 꿔왔는지. 이번에도 너의 그 괜찮다는 말이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한 허세인지, 아니면 정말로 괜찮아진 것인지. 많고 많은 물음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으나 결국 백천은 그 물음들에게서 말을 돌리고 말았다.

“……아니, 네가 없으면 우리가 이 수련으로 금새 너를 따라잡을 지 모를 일이 아니냐.”

“호오? 나 없을 동안 그렇게나 자신만만해졌을 줄은 몰랐네. 그럼 열흘동안 얼마나 컸는지 좀 볼까? 우리 동룡이!”

“이 새끼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주둥이 말고 검을 들어, 새끼들아! 가주님! 궁주님!”

“각오하거라!”

“크하하하핫! 오늘은 네놈들이 고생 좀 할 거다!”

“큭! 대열을 갖춰! 전날 얘기했던 대로다! 변수가 생겼으니 발목잡히지 않고 각자 대비해!”

“어림없지! 우선은 사숙부터!”

“왜 나부터야, 미친놈아!”

“사숙, 열흘 전에 딴 생각하다가 제대로 반응 못한 거 내가 싹 다 기억하거든!”

“왜 다 기억 못하고 그것만 기억하고 있는건데! 아악!”

청명이 검을 시원하게 뽑아들고 백천에게로 달려드는 것으로 그 날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암향매화검의 검신이 시리도록 흰 빛을 내었다. 한껏 신난 얼굴로 뛰어드는 교관들과 굳게 각자의 무기를 쥐어잡고 긴장한 얼굴로 맞서는 맹도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 그런 말이 있다.

유수불부(流水不腐) 호추부두(戶樞不蠹) 동야(動也)라.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도리(경첩)는 좀먹지 않는다.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첩도 언젠가는 망가진다. 세월이 흐르고, 움직임이 격하면 격할수록 좀을 먹는다. 흐르는 물길을 만들고있는 바위 틈에도 이끼는 낀다는 것이다. 언제나 붉은 매화를 피워내는 매화나무라 하더라도 꽃을 세상에 피워내고, 열매를 떨구고 나면 푸른 이파리는 낙엽이 되어 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분명 자연의 섭리이자, 흐름. 땅 속에 잠들어 그 기운을 보존한 채 차디찬 겨울을 보내고 나면 다시금 매화는 피어난다. 고이 모아두었던 기운을 끌어올려 또 한번 피어날 것이다. 만발할 꽃을 재촉하지 않고, 억지로 피우려들지도 않아야 할 것이며, 그저 매화가 피는 순간이 오기를 다시 기다리면 된다. 요컨대, 사람과 자연의 움직임에는 어느 정도의 휴식은 필요하다.

그때까지 그대 또한 가끔은 숨을 돌리도록 하자. 나무가 은은한 향 실어 따사로운 매화를 피워내고자 할 때까지, 주저앉은 그대가 하체에 힘을 싣고 일어나 나아가고자 할 때까지. 이 또한 곧 도(道)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필시 그대들 또한 알아두어야 할지니,

문지도리에도 좀이 슨다, 고.


  후기

와! 문지도리 완결! 난생 처음으로 2차 연성을 글로 적고, 또 이걸 공개적인 곳에 올리게 되다니…… 저에게는 정말 난생 처음 있는 일입니다. 부끄럽고 쑥쓰러운데 간질간질하기도 하고…. 아무튼! 짧고 간단하고 빠르게 끝내려던 문지도리가 6화(포스타입 기준)까지 왔습니다…. 펜슬에서는 6화를 한 편으로 합쳐 두었지만요. 사실상 가볍게 하려던 나홀로 챌린지 같은 것에 가까웠는데 많은 분들이 봐주시고 좋았다고 해주시는 분들도 계셔서 정말정말 기뻤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글이었지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초반에 코로나+독감 복합판정으로 고생하더니 후반에는 개인일정(수강과 연말 공연준비….)으로 바빠져서 정말 잠이 모자랄 정도였던지라 마지막 연재 텀이 길어진 것이 조금 아쉽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뭐 어때요 역시 사람은 잠을 자야죠. 여러분도 꼭 잠은 졸리면 꼬박꼬박 주무시길 바랍니다.

지인과 디스코드를 하며 문지도리를 작성하던 도중 자잘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중간중간 졸면서 작성하다보니 엉뚱한 서술이 들어가있어 황당했던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특히 6화 中, 청명이가 고뿔은 이제 괜찮냐며 달려드는 애들을 밀어내더니 난데없이 애들 앞에서 가죽지갑을 꺼내고 용돈을 준다……. 는 내용이 될 뻔 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아직도 구글문서 제일 밑에 남겨뒀어요. (왜…?)

본래 저는 감기에 걸린 캐릭터가 힘들어하는 묘사와 그 주변 캐릭터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감기변태라….(저만애 좌근 이상성욕…여러분에게만 공개.) 문지도리는 맨 처음 구상되었을 때부터 단순하게 '아~ 나 감기소재 겁나좋아~!!!' 하고 메모장에 끄적끄적해두고 저혼자 먹고있던 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홀로쩝쩝썰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은……. 하지만 나름대로 잘 끝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글이었지만 문지도리를 봐주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덕분에 너무너무 힘이 되었습니다! 또 이런 나홀로 챌린지를 할 기회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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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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