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조걸윤종

역시나 썰과 연성 사이 어드메

테라리움 by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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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누가 뭐라 해도 제가 사형께 느끼는 이 감정은 연모입니다. 설사 사형이라 하더라도 그걸 부정하실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 목소리는 어딘가 먼 곳에서 들린 것마냥 아득하게 윤종의 귀에 닿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던가. 눈앞에 닥친 현실을 도피하듯 기억을 더듬어나가지만 계기를, 시작을, 혹은 이 순간에 도달하게 된 분기점을 이제 와 찾아낸다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이미 감정은 말이 되었고 이제 윤종은 그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리될 줄 알고 필사적으로 외면해온 저를 아마 그도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을진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제가 무슨 답을 할지도 조걸이라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어째서. 배신감에도 가까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어 그 격정을 눌러 삼키니 남은 것은 체념이라 윤종은 한숨처럼 답했다.

“그렇다면 버리거라.”

“사형.”

“연모라 하였느냐. 나는 그에 답하지 못하니 그럼 버리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마주한 시선은 누구도 돌리지 않았다. 윤종의 서늘한 표정에 조걸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으나 물러서는 대신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검수에게 있어 쉬이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거리, 보다 더 가까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이고 속삭이는 목소리조차 생생히 들릴 거리에서 조걸이 다시 입을 열었기에, 윤종은 그를 덮듯 먼저 말을 쏟았다.

“걸아. 나는 내 욕심을 앞세울 수 없다. 아니, 이게 내 욕심이다. 내게는 화산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나는 한 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재주가 좋지 못하다.”

그러니 버리거라. 내가 그리했듯이 너도 포기하거라. 그렇게 중얼거리다시피 하는 말에도 조걸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어이 닿은 손끝이 뜨거워 윤종은 제 손이 차게 식은 걸 알았다. 움츠리는 손가락을 따라와 감싸 쥔다.

“압니다.”

답하는 목소리는 담담하다.

“사형이 그런 이라는 걸 압니다. 사형은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사형이 그런 사람이라 좋다고. 그러니 괜찮습니다.”

오래전 들었던 말이 마치 어제 있은 일처럼 귓가를 스친다. 저는 사형이 그런 사람이라 좋습니다. 기억은 희미해질 법도 하건만 윤종은 그때를 쉬이 떠올릴 수 있었다. 목소리 눈빛 표정은 물론 그날 그 공간 그 시간의 공기까지도 생생하게. 그때 그리 말했던 건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 텐데. 조걸이 윤종의 손을 끌어와 체온을 나누듯 제 양손으로 쥐었다. 겨울이 가까워지긴 했나 봅니다, 손이 찹니다. 농을 하듯 가벼운 어투로 웃는다.

“다만 한 가지만 약조해주세요.”

사형의 짐이 가벼워질 때가 올 겁니다. 네, 오겠지요. 언젠가 화산의 장문인이 되어 그리고 또 언젠가 다시 장문인 직을 내려놓으시게 될 때, 그 때 사형은 그저 한 명의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소중한 것 하나를 더 둘 여유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 이후의 인생을 제게 주신다 약조해주시면 저는….

마치 미리 준비해둔 것 마냥 부드럽게 이어지던 말이 끊겼다. 준비해둔 게 맞겠지. 조금 멍한 머리로 윤종은 깨달았다. 윤종이 그를 아는 만큼 그도 윤종을 알았고, 그렇다면 윤종의 대답 역시 알고 있었을 테니까. 언뜻 생각 없이 구는 것처럼 보여도 아무런 준비 없이 일을 저지를 놈은 아니었다. 그런 윤종을 한켠에 조걸은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사형이 약조해주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사형의 것이지요. 저는 이미 화산의 것이며 그러니 사형의 것입니다. 이미 드린 것이니 이를 조건으로 걸 수는 없겠습니다. 그렇다면,”

조걸이 제 양손으로 쥔 윤종의 손을 끌어 그 끝에 입술을 눌렀다. 담백하고 건조하여 접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체온을 나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싶었다. 숨결이 스쳤다.

“이건 그저 제 욕심입니다. 그냥 제게 주세요.”

그리고 씩 웃는다. 거절하는 이유가 윤종의 욕심이었으니 저도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겠냐며. 뻔뻔하리만치 당당한 요구다. 배짱 같기도 했다.

윤종은 그 눈에 숨을 삼키고, 그리고 또 잠시간 말을 고르다가, 한숨처럼 숨을 내쉬었다. 의식하지 않은 헛웃음이 함께 흘렀다. 감싸였던 손은 닿은 온도에 따뜻하게 된 지 오래다. 달리 길을 찾을 수 없으니 이제 내줄 수 있는 건 날 것의 진심뿐이었다.

“오래 걸릴 텐데.”

언외로 표현된 허락에 이미 걸려있던 웃음이 짙어진다.

“어차피 제 자리는 사형의 곁인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오래 살아야겠구나.”

“그건 제가 아니라도 그리 해주세요.”

이젠 숫제 낄낄 웃는 꼴이라 윤종은 슬쩍 눈을 흘기다 결국 따라 웃으며 말았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남은 건 막연한 미래의 말 뿐인 기약이건만, 지금은 그걸로도 좋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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