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2차

[금룡송백] 雪裏:눈 내리는 가운데

* 짧음

[雪裏 :설리]

눈 내리는 가운데

문득 글씨를 써내리던 손을 멈추고 창을 쳐다보았다. 잠을 깨기 위해 열어둔 창밖으로 어느새 눈이 나리고 있었다. 제법 일에 집중을 했었던가. 눈이 쌓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일을 멈춘 금룡은 한참동안 하얗게 쏟아져내리는 눈송이들을 쳐다보았다.

눈이 내리는 순간-, 가끔은 모든 것이 하얗게 지워져내린 것처럼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눈이 전부 묻어버리는 것처럼. 먹물처럼 곳곳에 번져있던 산과 나무가 하얗게 덧입혀지는 것은 꼭 종이 위에 붓질을 하기 전으로 시간이 되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집중하여 써내리던 문서는 잊힌지 좀 되었다. 손 위를 구르는 가느다란 세필 붓은 손마디를 장식하는 도구가 되었고, 종이는 하얗게 도드라진 손을 받치고만 있다.

금룡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져내리는 하얀 눈송이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복잡하게 머릿속을 채우던 생각을 같이 지워냈다.

바쁜 한 때의 시간 속에서 찾아온 고요하고도 아득한 순간-.

금룡은 이 순간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두시진 째 놓지 못하고 있던 붓을 내려두었다. 손이 쉬긴 쉬어야할 때다.

목이 조금 건조한 것도 같아 고개를 기울여 식어내린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새로 차를 우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마침 얼마 전에 질 좋은 백호은침(白毫銀針)이 새로 들어왔던 것이 떠올랐다.

찻잎을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 때, 바람도 불지 않아 정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저 멀리 사박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이토록 규칙적이고-, 또 단단한 걸음걸이라면 제가 아는 한 이 종남산에선 단 한사람 뿐이다.

회랑을 지나는 걸음이 곧 가까워지더니-, 불이 켜진 것이 의아해서였는지 창 근처에서 멈추었다.

창이라는 허공을 그어둔 경계를 사이에 둔 채 이송백과 시선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것이 무어 놀랄 일이라고 잠시간 둥글어졌던 눈매가 곧 좁아들더니 예쁜 모양새로 바뀌었다. 그에 맞춘 듯 호선을 그리는 입매가 열렸다.

“사형.”

인사처럼 나온 호칭에 금룡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조금 늦게서야 고개를 한번 까닥였다.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인 것인지 송백이 창가로 좀 더 다가서며 물었다.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는 너야말로 이 시각에 무얼하는 것이냐. 이경(二更)이 다 지나가는데.”

그의 질문이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답을 해주자면 못할 것은 없으나 으레 그렇듯 그를 대할 때면 퉁명스럽고도 무뚝뚝한 대꾸가 습관적으로 튀어나오곤 했다. 제가 말을 하고서도 금룡은 잠시 눈을 조금 찌푸렸다.

하지만 송백은 그런 금룡의 태도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는 것인지 시선을 떼고 창의 맞은편, 눈 날리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눈이 오질 않습니까.”

송백이 뻗어낸 손 위로 제법 알이 굵은 눈송이가 떨어졌다. 미세하고도 자잘한 흉이 덮은 투박한 손임에도 새하얀 눈송이와는 잘 어울리는 듯했다. 방금 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송백 또한 모든 것을 잊고 넋을 빼고서 눈 오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진금룡은 그 틀어진 옆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전까진 세상을 지워낼 것처럼 내리던 눈이었는데, 이송백이 서있으니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았다. 이송백이 워낙 덩치가 커서인가. 저 놈은 눈에 파묻혀 있어도 눈에 띌 것 같았다. 잃어버릴 일은 없겠군. 저답지 않게 실없는 생각이 든다.

금룡은 기울였던 고개를 다시 세웠다.

“거기서 그러고 있을 참이냐. 지나갈 거면 지나가고, 들어올 거면 들어와라. 거슬린다.”

“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지나갈 줄 알았거늘. 금룡의 미간이 살풋 일그러졌다. 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인데다, 축객령을 내리고 싶은 것은 아닌지라 별다른 대꾸 없이 손을 까닥여 들어오란 신호를 보냈다. 돌아서는 사이로 송백이 빙그레 웃는 것이 보였다.

 

*

 

방에 들어선 송백의 얼굴은 가까이서 보니 추위에 질려 평소보다 낯이 하얬다. 그런 와중에 뺨과 코끝이 발그레한 꼴이 어린아이들 같아 웃기기만 했다.

“고뿔도 걸리겠군.”

“그 정도는 아닙니다.”

무어가 그리 기분이 좋은건지 아까부터 계속 웃는 낯으로 있어 시비를 걸었더니, 역시나 웃으며 대꾸를 해온다. 평소 같았으면 눈을 구기고 볼 일이지만 이번엔 별달리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것이 참 묘했다.

“일이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해가 지나갈 때가 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하하.”

“웃을 일이 아니다. 네놈이라고 일이 피해갈 것 같으냐. 너도 이번 해가 바뀌면 검을 들 시간을 줄여 업무를 배우게 될 것이다.”

“……그건 정말 웃을 일이 아니군요.”

딱히 머리가 나쁜 놈도 아니건만, 일을 시킨다고 하니 벌써부터 질린 얼굴을 해보인다. 아니면 수련시간이 줄어든다고 하니 저러는 걸 수도 있겠다. 금룡은 무어가 됐든 속 시원한 일이라 생각하며 찻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개완에 부어냈다.

백호은침의 은은하고 맑은 향이 금세 방 안에 퍼져들었다. 다탁 앞에서 편안한 얼굴로 창밖을 보던 송백이 그 향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차 때문인지 사형의 방에선 늘 좋은 향이 납니다.”

방 곳곳에 묻어나는 먹 향과 방금 끓여낸 차 향이 절묘하게 섞인 향은 사형의 방을 방문할 때마다 맡곤 했던 것이다. 이송백은 이 향이 늘 좋았다.

“갑자기 무슨 실없는 소리냐. 사내놈 냄새가 좋을 리가 있나.”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닌데. 하지만 말해보았자 사형이 귀담아 들을 것 같지 않아 말을 돌리는 것이 나을 듯했다.

“그런데 무슨 차입니까? 백차인 건 알겠습니다만.”

“차향을 맡고도 모르는 네놈에겐 아까운 차다.”

“……그러지 말고 알려주십시오.”

송백의 떨떠름한 대꾸에 금룡이 피식 웃었다. 개완에서 우러난 차를 두 개의 찻잔에 나눠 따른 금룡은 그 중 한 잔을 송백에게 밀었다.

“맞춰봐라.”

“찍어야합니까?”

“마셔보면 알 일 아니더냐.”

모를 터인데. 송백은 한숨을 내쉬듯 웃어보이곤 잔을 들었다. 잔을 옮겨 닮으면서 적당히 식어내린 차는 마시기에 딱 좋았다. 쌀쌀맞은 행동거지와 달리 항상 이렇듯 온하시니-, 겨울이라하여 사형 곁은 추울 일이 없었다. 그것을 다른 이들은 잘 모르고 자신만 아는 사실 같아서 송백은 조금은 아쉽기만 했다. 조금만 더 솔직하시면 좋을 것을.

잔을 든 송백이 차를 한모금 머금었다. 차를 마시는 방법 같은 건 잘 모른다. 눈으로 익혀두기만 했을 뿐이다. 한번에 다 마시는게 아니라 향을 맡고, 음미하면서. 하지만 그리 마신다고해도 역시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다. 자신이 느끼기엔 백차는 다 거기서 거기였으니.

“백호은침 같은데…….”

“그게 맞다. 운남에서 들여온건데 평소보다 향이 좀 더 진하고 깊지.”

“찍긴 했지만 어쨌든 맞췄네요.”

그러자 금룡이 차를 마시다 말고 또 피식 웃었다. 그 옛날처럼 그린 듯한 웃음이 아닌 작은 웃음이었지만, 이송백은 이 바람 빠진 것 같은 웃음을 더 좋아했다. 억지로 꾸며내지 않았고, 어느 때처럼 날서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사형 같다 느껴서였을까. 보기 편안하니 좋았다.

“이송백. 네놈은 정말 배울 필요가 있어.”

“아주 모르지는 않습니다.”

“비싼 찻잎을 내어줘도 무엇이 다른지도 모르는 놈이 말은 청산유수로군.”

“……그리 말씀하시면 할 말이 없죠.”

오가는 실없는 소리가 끝나고 차를 마시는 동안 어색함 없이 평화로운 고요가 흘렀다. 창 밖은 여전히 눈이 내렸다.

 

*

 

차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이경(二更)을 완전히 지나 삼경(三更)에 들어섰다. 이토록 늦은 시간에 제 방에 누군가가 있어본 적이 드물었기에 금룡은 새삼스럽게 낯설었다. 어색함을 느끼는 저와는 달리 이송백은 여전히 아무 생각이 없는 듯 창밖의 풍경을 고요히 즐기고만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터라 도드라진 목빗근이 눈에 띄었다. 편안한 차림인 탓인가. 평소처럼 꼼꼼히 싸맸다면 보이지 않을 쇄골도 눈에 들어왔다. 금룡은 이유 모르게 입가가 마르는 것 같다 느꼈다. 방금 찻잔을 비웠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금룡은 이송백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시선을 거두고 똑같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엇이 그리 시선을 빼앗고 있는 것인지. 온통 어두운 밤하늘 아래 하얗게 부서지는 세상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별도 달도-, 그 아래 어떤 것도 말이다.

하지만 저도 똑같이 그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기에 달리 이송백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사형.”

소리마저 먹어치우는 풍경 속에서 어느 순간 적막을 깨고 이송백이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금룡은 눈만 이송백을 향해 힐긋 돌렸다. 여전히 이송백은 창밖을 보고 있는 옆모습이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무어냐.”

“눈이 내립니다.”

그도 보았으니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이송백은 굳이 입밖으로 이 말을 중얼거리며 제게 말을 건 것이다. 금룡은 그가 무슨 말이 하고픈 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완전히 틀고 이송백을 찌푸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송백은 그 말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말만이 하고 싶었다는 듯.

그 말 이후로 금룡은 이송백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창밖으로 흩어지는 그의 하얀 숨이 꼭 흩날리는 눈발 같아 시선을 끌었다. 밤이 너무 늦은 탓에 피곤함이 도져서일까. 평소처럼 꽉 다물리지 않고 조금 벌어진 입술 사이가 신경 쓰였고, 하얗게 질린 얼굴에 붉어진 뺨도 눈에 자꾸만 밟혔다.

모든 것을 다 지워낼 듯 나리는 눈 사이에서 금룡이 몸을 일으켰다. 이송백이 떨어져내리던 눈송이를 잡아내던 것처럼, 그는 하얗게 부서지는 숨결에 손을 뻗었다.

금룡은 시야 아래로 천천히 불쑥 파고든 어두운 그림자를 인식한 눈이 깜박이며 제게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나이에 맞지 않게 말간 빛을 담은 눈이 저를 담아냈다.

“-.”

아마 사형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은 내리는 눈이 전부 삼켜서일 것이다. 커진 눈동자를 본 것도 같으나 어차피 다 지워져버려 보이지가 않았다. 전부 사라진 감각 속에서 오롯하게 살아있는 것은 손 끝에 닿아있는 딱딱하게 긴장한 온기였다. 뭘 어쩌지도 못한 채 움찔움찔 떨리다가 끝내 아무것도 못한 손이 허공을 배회하는 것도 느껴졌다.

길게 들이켰다 내쉬는 한 번의 숨. 그 짧은 시간 모든 세상이 지워졌다.

아래를 향해 늘어져있던 긴 속눈썹이 다시 위로 향하고, 닿아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고서야-.

“사, 사형.”

잔뜩 놀란 이송백의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쿵-, 쿵-, 심장 소리도 들렸다.

적막하던 세상이 뒤집혔다.

 

* 이경(二更) : 밤 아홉 시부터 열한 시 사이

* 삼경(三更) : 밤 열한 시부터 새벽 한 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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