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2차

[금룡송백] 還童 : 환동

* 진금룡이 어려졌습니다.

[還童 : 환동]


잠에서 깬 금룡은 무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누운 자리에서 눈을 여러 차례 깜박이던 금룡은 무엇이 이상한지를 추측해 보았다. 그렇게 조금 지나서야 위화감 하나를 깨달았다. 창에 비친 햇살이 평소보다 더욱 밝은 것이다. 하-. 한숨이 터졌다. 답지 않게 늦잠을 잔 것이 틀림없었다.

무인이란 놈이-.

지금이 몇 시인지, 아침 수련을 얼마나 빠진 건지를 자책하며 금룡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야 두 번째 위화감이 덮쳐왔다.

“…….”

금룡은 잠시 동작을 멈춘 채 눈을 찌푸리며 천장을 보았다. 묘하게 시선이 평소와는 달랐다.

뭔가가……. 천장이 아주 살짝 더 높게 느껴지는 듯한데-.

눈을 찌푸린 금룡이 이 이상한 위화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채 눈치채기도 전, 세 번째 위화감이 찾아왔다. 스륵-, 하고 옷이 자꾸 불편하게 흘러내리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손을 들며 옷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내린 금룡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손이 침의 소매로 가득 덮여있다 못해 묻혀있는 수준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팔이 짧고 가늘었으며 손이 작았으니까.

그래. 작았다.

“이, 이게 대체……, -!”

반사적으로 나온 목소리조차 여린 미성인지라 저도 모르게 손이 목을 향했다. 목을 쥔 작고 여린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분명 제 것이 맞는데, 그 감각이 느끼는 것이 전부 이상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것처럼 매끄럽기만 한 목에서 근육과 목울대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은 것이다.

수초의 시간 동안 굳어있던 금룡이 흡, 숨을 겨우 들이켜며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동경(銅鏡)-!

다급하게 경대 앞으로 허둥지둥 달려간 금룡은 놀라서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 게 무엇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경 속의 자신은 옷에 잡아먹힌 듯, 하루아침에 반으로 줄어버린 키에 가늘게 변한 골격을 한-, 어린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동경에 맺힌 동글고 오밀조밀한 얼굴을 보며 금룡이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보았다. 그러자 동경 속의 손도 똑같이 움직인다. 커다란 눈에 점점 경악이 들어찼다.

“……말도 안 돼.”

동경 속의 소년이 저와 똑같은 허망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

 

무엇이 문제였을까? 전날에 특별한 일 따윈 없었다. 수련만을 반복하는-, 어찌 보면 지겨울 뿐인 일상이었으니까. 그렇게 며칠을 되짚어보아도 그랬다. 특별히 걸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파악할 만한 단서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사형, 안에 계십니까?”

문밖에서 저를 찾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지금-,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회피할 수 있는지가 더 큰 문제였다.

“사형. 저 이송백입니다. 오늘 왜 수련에 안 나오신 건지 걱정돼서 와봤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그제야 금룡은 늦잠을 잤다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수련을 빠트린 적이 없던 그다. 그런 그가 아침 수련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이상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리 찾으러 온 것일 테지. 평소라면 그런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다 여겼겠지만,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상대가 이송백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때 다시 한번 밖에서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안에 있는 기척을 느꼈을 테니 이제 와 방 안에 없는 척하는 것은 무리였다.

“혹시 어디 아프신 겁니까?”

생각나는 변명 따위는 하나도 없었지만, 마침 상대가 적당한 핑곗거리를 꺼내왔다. 금룡은 그렇다 하며 무어라 말이 나오는 대로라도 말하여 송백을 돌려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목소리가 달라졌으니까.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문밖의 기척은 여전했다. 어딘지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지는 듯싶더니, 한 발자국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긴장한 진금룡의 머릿속에서 설마-, 하는 불안한 경종이 울렸다.

“사형. 죄송하지만 들어가겠습니다.”

설마가 역시나였다. 안돼! 다급한 거절의 말이 채 나오기도 전-, 행동력 빠른 제 사제는 드르륵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사-, …….”

사형을 부르려던 입이 더 이상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사고가 정지한다는 것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금룡도 송백도-. 서로의 경악 어린 눈을 마주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한참을 굳어버리고야 말았다.

 

*

 

송백은 현재 눈앞에 벌어진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옛날에 처음 마주쳤던-, 아니, 그때보다 더 작아 보이는 사형이 헐렁하다 못해 넘쳐흐르는 옷 사이로 눈을 크게 뜨고 굳어있는데 이해가 되는 것이 더 이상할 일이었다.

설마 숨겨둔 자식-? 아니, 있을 리 없지.

아주 잠깐 고민한 가설은 바로 폐기되었다. 아주 갓난아이라면 모를까. 대충 보아도 일고여덟은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 기간 동안 아이의 존재를 숨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걸 떠나서 진금룡이 그럴 리 없었다. 무인이자 종남의 장로인 진초백을 존경은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진초백의 행실은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였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해나가던 송백은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말이 안 되지만-. 정말로 말이 안 되지만-.

“……사형?”

저 어린 소년이 진금룡 본인이라는 것이다.

반 정도는 확신에 찬, 하지만 여전히 상황에 대한 믿음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혼란스러운 목소리에 금룡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제대로 정신을 차린 것은 아니었다. 얼이 빠진 사제 놈의 얼굴도, 정신을 차린 뒤에 나올 말을 예상하는 것도 전부 싫었기에 당장 떠오르는 것이라곤 저놈을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나가.”

어린아이답지 않은 살벌한 목소리였다. 그 살기에 송백의 눈이 한차례 더 떨리는 듯하더니만 이내 평소처럼 단단해졌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결의에 찬 것도 같았다. 잠깐만-, 결의? 금룡이 무언가를 느낀 사이, 송백이 문을 닫고 완전히 들어섰다.

“너 나가라고 했지, 누가-.”

당황한 금룡이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려보았지만, 현재의 그는 험악함을 풍기기엔 너무도 곱고 여린 얼굴이었다. 사형의 날선 반응에도 성큼성큼 금룡의 앞으로 걸어온 송백이 곧 시선을 맞추듯 무릎을 꿇었다.

“사형.”

어느 때보다도 단단한 목소리였다. 금룡은 송백이 무슨 말을 내뱉을지 두려워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자존심이 있어 그 자리에 꼿꼿하게 버티고 섰다. 하지만 차라리 물러서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제가 사형을 책임지겠습니다!”

이송백의 입에서 이딴 말이 튀어나올 줄 알았다면 반드시 그랬을 것이다. 금룡의 얼굴이 새하얘졌다가 이내 붉게 달아올랐다.

“……뭐, 뭣?”

그런 금룡을 보며 이송백이 다시 한번 굳건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형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제가 책임지고 챙겨드리겠습니다!”

“…….”

그 순간 금룡은 정말로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이송백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

 

안타깝게도 송백은 사형의 기분 변화까진 다 알아채지 못했다. 어려진 대사형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고, 당장 진금룡이 부재함으로써 인해 벌어질 일들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뒤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형의 안전과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는지의 여부였다.

“사형. 혹시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있을 것 같으냐?”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잔뜩 골이 난 사형이 씹어뱉는 듯한 소리로 되물었다. 하긴 원인을 알고 있다면 이러고 있진 않았을 터였다. 답도 없는 상황이니 기분이 나쁘실 만도 했다. 송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럼-. 장로님들께는…….”

그러자 금룡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알려야지.”

대답했던 것처럼 장로님들께 보고는 해야만 했다. 둘이 머리를 맞댄다고 해서 해결 방법이 튀어나올 것도 아니고, 장로들은 상황을 알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바로 장로님께 찾아갈 엄두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금룡은 이 모든 상황이 전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상식이라는 틀을 벗어나고 있어서 머리가 아팠다.

눈을 구기고 있자니 앞에서 송백이 갑자기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가 화들짝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가 곧 또 머뭇머뭇 손을 든다. 갑자기 저건 또 무슨…….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데 앞에서 저리 굴고 있으니 더욱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무어냐?”

“아-, 그게…….”

“똑바로 말해라.”

다그치고 나서야 송백이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꺼냈다.

“미간이 구겨져 있어서요.”

“그게 뭐 어쨌다는-,”

“사형인 걸 알지만……, 눈앞에 아이의 모습으로 있어서인지 표정이 구겨져있는 건 보고 있기가 그래서요.”

“……그래서 미간을 펴주기라도 하려 했단 말이냐.”

그렇게 물으니 제대로 된 답은 하지 않고 눈을 슬쩍 피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내가 저보다 여섯은 더 많은 걸 알고 있긴 한 건가? 외관만 어려졌지 속에 든 것은 대사형인 진금룡 그대로다. 누굴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건지-!

분명 그의 생각은 틀린 점이 없었다. 인간이 시각에 있어서 취약한 동물이라는 점이 문제였을 뿐. 송백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눈앞에 있는 진금룡은 그야말로 깜찍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였고, 아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한 번쯤 돌아보고 깜짝 놀랄 만큼 어여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세상이 무너진 듯 침울해하는데 누구라도 송백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한 모습을 보이진 않을 터였다.

송백은 그런 사실을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말을 돌려야겠다 여기며 송백이 입을 열었다.

“그럼 사형,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금룡은 사제가 말을 돌리는 것을 눈치챘으나 더 기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혹-, 내력은…….”

“그대로다.”

“다행입니다.”

송백은 정말로 안도하여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글쎄.”

금룡의 입에서 나온 말이 어쩐지 부정적이었다.

“글쎄라니요?”

금룡은 송백의 티 없는 얼굴을 보며 아주 잠시 말을 할지 말지를 망설였다. 하지만 송백을 딱히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금 상태가 언제까지, 어떻게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 자신의 빈자리를 위해서라도 알아두는 게 낫겠다고 여기자 망설임이 빠르게 사라졌다.

금룡은 손바닥을 위로 둔 채 송백에게 내밀었다. 송백은 의아함을 담고 금룡이 내민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다시피 물집 하나 제대로 없는 손이다. 내 경지도 그렇지만-, 나이만 봐도 육체가 최상의 조건으로 돌아간다는 환골탈태는 아니야. 부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난 거지. 이건 신체가 그냥 어려진 거다.”

“예. 확실히…….”

그렇게 말하던 송백이 잠시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들었다. 무표정한 어린아이의 얼굴에 작게 씁쓸함이 어렸다.

“이 육체가 내력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

 

그 후, 장로들이 급하게 모였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기절초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바탕 난리가 난 이들 사이로 대책이 논의가 된 것은 반시진이 조금 지나서였다.

“폐관 수련을 하는 것이 좋겠소.”

“그 무슨 소립니까. 당장 몸이 내력을 버티지 못할 텐데-!”

“지금 정말로 수련을 하라고 하는 거겠소이까? 제대로 된 해결 방법을 찾을 때까지 이 일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 아닙니까!”

“정녕 이 사태에 대해 어떠한 원인도 생각나는 바가 없단 말이냐?”

“예.”

“주화입마의 일종으로 이런 일이 있는지 무각주는 아는 바가 없으시오?”

“이런 주화입마가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이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어려진 사형이 누구 눈에라도 뜨일까 싶어 따라왔다가 밖에서 기다리게 된 송백에게마저 그 소란스러움이 전해질 정도로 분위기는 과열이 되어있었고, 우울했으며, 이 황망한 일에 어떠한 해결책도 찾을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송백은 걱정스럽게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사형은 괜찮으시려나. 머릿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그의 걱정이 끝난 것은 한시진 하고도 일각 정도가 더 지나서였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금룡이 타박타박 걸어 나오는 것을 본 송백은 얼른 그의 안색부터 살폈다. 조금 지친 듯 피로한 얼굴이었으나 그리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송백을 본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어찌 되었습니까?”

“별것 없었다. 장로님들께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하시는군. 무각주와 의약당주께서 해결 방법을 강구해 보겠다고 하시는구나.”

그다지 희망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송백은 해결이 될 거라 믿었다. 장로님들이 나서면 해결 방법을 분명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가 문제였다. 그럼 그 시간 동안은 어찌 되는 걸까? 멀리서 듣기론 분명 폐관이라는 말이 오고 갔었다. 걱정이 된 송백이 사형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그동안은 어찌 지냅니까?”

송백의 물음에 금룡의 걸음이 뚝 멎었다.

“…….”

“사형?”

내려다본 금룡의 미간에 골이 패였다. 무언가 심사가 뒤틀린 것처럼-, 못마땅하다는 듯이.

“왜 그러십니까? 설마 폐관에 들어야 하는 겁니까?”

금룡의 눈이 송백을 향해 힐난하듯 날을 세웠다. 감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을 입에 올리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도 잠깐이었다. 금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육체가 이 모양이라 폐관을 길게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 하여 이대로 지낼 거다. 다만 이 일을 아는 자가 많아지면 좋을 것 하나 없으니-, 대외적으로는 폐관에 들었다고 알리고 그동안은 다른 전각에 있을 생각이지.”

“그렇군요.”

해결 방법을 찾는 동안 폐관을 하거나 하산하여 지내기엔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황이다. 무슨 일이 생길 경우엔 장로님들의 도움도 필수적일 터. 그러니 사문 안에 있되, 눈에는 띄지 않게-. 조건에 맞는 것은 금룡이 말한 방법뿐이었다. 이해한 송백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고? 아까보다 더 구깃해진 얼굴로 보아 금룡이 정말 못마땅해하는 것이 이제 나올 말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맞는 옷이 없다 하니 당분간은 삼대제자의 옷을 입고 지내야 한다더군.”

 

*

 

“흠, 흠흠.”

송백은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잔뜩 심통이 난 듯 보이는 얼굴이 아무리 귀엽다고 하더라도-, 분명 사형이었으므로 웃어선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웃음을 참으려는 송백의 노력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었다.

“우스우냐?”

서릿발이 날릴듯한 목소리에 송백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아닙니다.”

그렇게 답하는 뻔뻔스런 얼굴을 진금룡이 야멸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럼 그 얼굴은 뭔데?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의 사형에게선 볼 수 없었던 뾰로통한 표정인지라 송백은 이번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푸흐흐- 하하, 시원스런 웃음소리가 금룡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금룡의 눈에 살기가 어리려는 순간-.

“그냥 제가 모르던 사형의 어릴 적을 보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배분이 바뀐 후로 본 적 없던 사형의 삼대제자 차림이다. 게다가 기억하던 것보다 더 어린 모습이 아닌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형의 어린 시절을 엿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만 미소가 새어 나왔다.

금룡은 그런 송백을 잠시간 빤히 바라보다 마저 옷을 정리했다. 그리곤 단정해진 차림으로 송백의 맞은편에 앉았다. 낮은 다탁 너머의 이송백은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다. 비웃는 게 아니라는 걸 이미 느꼈기 때문일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웃는 얼굴이 제법 봐줄 만은 하구나 싶었을 뿐. 그러고 보면 저 녀석이 저리 웃는 건 오랜만에 본 듯했다.

“실 없는 놈. 그래봤자 내가 사형이다.”

“예, 압니다.”

“흥.”

금룡은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아까 전 송백이 따라놓은 차였다. 진하지 않고 은은한 향은 늘 마시던 차였다. 평소처럼 입에 한 모금을 머금자, 향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그와 동시에-.

“……, -!”

와락 얼굴이 일그러진 금룡이 찻잔을 급하게 내려놓았다. 갑작스러운 금룡의 반응에 송백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사형?”

“……뜨거워.”

혀가 데인 건지 금룡이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미간을 좀체 펴질 못했다. 송백은 다른 잔에 찬물을 따라 금룡에게 주며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어, 평소와 똑같을 텐데-. 왜…….”

그러다 시선이 금룡에게 멈추었다. 정확히는 일어서서 보니 한참은 ‘낮아진 그’를. 송백의 시선에서 금룡 또한 평소와 같은 차를 왜 갑자기 뜨겁게 느끼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

“…….”

“……빌어먹을 몸뚱어리.”

침묵하던 그가 돌연 성질을 벌컥 내고야 말았다.

 

*

 

“사형,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금룡은 저 질문이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을 포기했다. 뜨거운 차에 혀를 데인 이후로, 이송백은 자신이 무언가를 할 때마다 저렇게 몇 번이고 되물으며 옆에서 귀찮게 굴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도자기가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것을 보듯이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다.

“사형, 정말 불편한 건 없으십니까?”

“괜찮대도! 고작 계단 하나 내려가는 걸 가지고 이렇게 유난을 떨 일이냐!”

짜증스럽게 버럭 외치는 걸 듣고서야 이송백은 물러섰다. 하지만 시선은 계속 계단을 내려가는 금룡의 걸음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금룡은 속으로 참을 인을 여러 번 새겼다. 일고여덟 정도 되는 나이면 몸을 못 가눌 정도가 아닌데도 유난이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그렇게 조금 걸으면-,

“사형, 다리가 아프지는 않으십니까?”

하고 진지하게 물어왔다. 고작 복도 저 끝에서 걸어왔을 뿐이었다.

금룡은 이놈을 빨리 보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라면 당장 화병에 몸져누울 판이었으니까.

“너 수련은 하지 않는 것이냐?”

“아, 새벽에 이미 하고 왔습니다. 장로님들께서 사형 옆에 있으라고 하셔서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움직이는 게 좋을 테니까요.”

“…….”

말이야 맞는 말이다만-. 장로님들이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이 있었던가? 금룡은 속으로 지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제가 사형을 책임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넌 제발 말 좀……, 아니 됐다.”

금룡은 포기했다. 이송백은 너무도 강적이었다.

 

*

 

그리고 또다시 밤.

“자꾸 이럴 것이냐.”

“사형이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지금 이건 네가 고집부리는 것이 아니냐?”

금룡과 송백이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마주했다. 그들이 대립하고 선 이유는 이것이었다.

“고집이라니요. 엄연히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몸으론 수련 양이 너무 과합니다.”

“삼대제자들이 하는 양만큼만 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줄이기라도 하란 뜻이냐?”

처음에 검을 몇 번 휘두를 때는 분명 송백 또한 수련을 하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그런데 한시진이 넘어갈 때쯤엔 슬슬 표정이 굳어지는 듯싶더니만, 곧 쉬어야 한다며 거듭 저렇게 반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삼대제자 중 지학(志學)을 넘긴 아이들이 하는 양이 아닙니까? 사형의 육체는 그보다 어립니다!”

“내가 괜찮다고 했지. 내 몸이고,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 하는 것 아니겠느냐!”

여기까지 오면 또다시 서로가 고집을 부린다고 주장하며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 그렇게 둘의 입씨름은 벌써 이각을 넘겼다.

육체가 어려진 이후로 자꾸만 송백에게 말려드는 금룡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다름 아닌 수련-, 무(武)에 대한 것이다. 이는 진금룡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제아무리 이송백이라도 하더라도 무어라고 참견할 부분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무리한 양입니다. 사형은 지금 자기 얼굴이 지금 어떤지 모르시지요. 어느 아이가 검을 두시진이 넘도록 쉬지 않고 휘두릅니까?”

마지막에 나온 아이라는 말에 금룡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네놈이 끝까지-.”

이송백은 스스로가 한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금룡은 지금까지 송백의 언행과 방금 전의 한마디로 그의 사제는 정말로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을 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말았다. 고작 육체가 여려지고, 작아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룡은 그것이 못 견디게 짜증이 났다.

“좋다. 네가 나를 그리 생각한다는 거지?”

서늘한 목소리를 흘린 금룡이 검 끝을 송백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한 발을 뒤로 물렀다. 뒤로 물렀던 발이 언제든 앞으로 튀어나올 수 있도록. 상단세(上段勞).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금룡에게서 살기와도 같은 예기가 흘렀다.

“-! 사형……!”

갑자기 말도 없이 공격을 하겠다 의지를 표명하는 어린 사형을 보며 송백이 당황했다. 송백이 당황하건 말건 금룡은 한 발을 빠르게 내딛곤 칼을 내리긋더니, 중간에 궤도를 틀어 비어있는 허리를 향해 휘둘러 들어갔다. 송백을 상대하기엔 적합하지 않은 신장이었기에 초식이 평소보다 어색한 것이 사실이나, 금룡에게 있어서 눈앞의 송백은 빈틈투성이였기에 공격하는 움직임엔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욱 금룡의 화를 부추겼다. 다른 때였다면 송백은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침착하게 검을 들어 날아드는 칼을 막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송백은 검도 제대로 꺼내들지 않고 발을 뒤로 물러 한각만을 돌아 검을 피할 뿐이다. 금룡의 눈이 점차 온도를 잃고 차게 굳어갔다.

“계속 피할 수만은 없을 거다.”

금룡은 두 손으로 쥐었던 검에서 한 손을 떼고 빠르게 움직여 날 끝으로 송백을 쫓았다. 휘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날이 쾌속하게 움직인다. 어린 몸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닌-, 명백한 살기 어린 강검(強劍)이었다.

“-!”

사형이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송백이 다시 한번 뒤로 물러서며 검을 피했다. 하지만 이번엔 완벽하게 피하지 못했다. 촤악-! 옷자락을 가른 검이 피부를 따갑게 할퀴었다.

“사형!”

“말했지. 피할 수만은 없을 거라고. 다치기 싫으면 너도 검을 드는 게 좋을 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금룡이 검을 재차 휘둘렀다. 단 두 번의 공격으로 신장 차이에 익숙해진 금룡의 검은 좀 전보다도 정교하고 묵직해졌다. 초식의 정교함이 외양이 어려지기 전과 거의 비슷했다.

피를 보았기 때문에 정신이 든 것인지 드디어 송백이 검을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날은 검집에 쌓여있다. 송백이 검집 채 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칼을 막았다. 콰앙-! 여린 손끝에서 피어오른 검의 위력이라기엔 너무도 무겁고 강한 일격이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큰 소리가 장원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사형, 그만하십시오!”

“그럼 멈춰세워봐.”

송백의 외침을 무시한 채 금룡이 검을 찔러들어갔다.

‘빨라-!’

방어하는 손이 좀 더 다급해졌다. 송백은 여전히 검을 뽑아들지 않고 막아서는 것에만 치중했다. 쾅! 쾅! 검이 부딪치는 소리라고 믿기 힘든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송백은 사형의 손에 점점 내력이 실린다는 걸 깨달았다. 이래선 안되었다. 사형의 몸은 내력을 견디지 못할 가능성이 컸으니까. 송백은 사형의 공격이 닿지 않도록 거리를 두기 위해 뒤로 훌쩍 물러섰다.

물러서는 신형을 까만 동공이 빠르게 뒤쫓았다. 금룡은 이번엔 장법을 두 번 쏟아붓곤 송백의 시선을 흩어놓았다. 그리곤 그 틈을 타 강하게 땅을 박찼다. 작은 몸을 활용하여 빠르게 이동한 그는 어디 이것도 막아보라는 듯-, 뒤늦게 저를 발견한 송백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검을 횡으로 그었다. 그의 검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실렸다.

“-!”

송백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반사적으로 검을 뽑은 그가 내력을 실어 날아드는 검기에 맞대 휘둘렀다. 콰아앙-! 큰소리와 함께 폭발적인 바람이 휘몰아쳤다. 부딪친 두 인영은 반동으로 튕겨져 나갔다. 바람이 사그라들면서 먼지가 내려앉자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나간 두 인영 중 하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사형!”

위협을 느끼곤 반사적으로 검기를 가득 싣고 말았다. 언젠가 그의 사형과 실전과 같은 비무를 했듯이. 평소의 사형이라면 막아낼 수 있을 검이었지만-, 지금은? 송백은 아득한 마음에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사색이 된 그가 납검(納劍)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형을 향해 뛰어갔다.

뒹굴어서 잔뜩 엉망이 된 모습이었으나 다행히 크게 다친 것은 아닌 건지 금룡이 상체를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얼굴을 말끄러미 들여다본 금룡이 납검했다. 독기가 빠진 듯 한풀 꺾인 얼굴로 그가 눈을 감았다.

“……속 한번 시원하군.”

내력을 쓰면서 속이 진탕 된 것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마음껏 검을 휘두른 덕인가. 답답했던 속이 풀렸다. 마지막 한 번이긴 했어도-, 이송백이 진심으로 검을 맞대왔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

 

“다행히 큰일은 없었구나.”

의약당주는 맥을 짚고 있던 가느다란 손목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하지만 조심스런 행동과는 달리 그의 표정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서늘했다.

“죄송합니다.”

일말의 변명 없는 반성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의약당주의 노기를 완전히 가라앉힐 수는 없었다. 당연했다. 제자가 몸을 돌보지 않고 내상을 입어왔으니까. 원래 그의 모습이라 해도 응당 화를 낼 일이었는데, 지금은 내력을 버틸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몸이 되지 않았는가? 조심하라 그리 일렀거늘 함부로 내력을 운용하여 다쳐온 것이다. 한 치만 더 어긋났어도 몸이 다 터져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화가 날 수밖에.

“말해보거라. 도대체 왜 그랬느냐?”

하지만 분노에 앞서 의약당주는 진금룡이라는 제자가 함부로 이러지 않는 성품이라는 것을 믿었다. 그렇기에 화를 내기보다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금룡이 눈을 내리깔았다. 하얀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몸이 어려진 후로 돌아갈 방법을 모르니 초조해서 그랬습니다.”

의약당주는 혀를 찼다. 이해를 할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모른 채 저리 있으면 자신이라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터.

“그렇다 해도 몸을 상해서야 쓰겠느냐. 일이 해결되려면 우선 네가 멀쩡해야 하는 걸 어찌 몰라? 조급해 말거라.”

의약당주는 수심에 잠긴 아이를 바라봤다. 이대제자 중 맏이. 종남의 정수를 쏟아부은 대제자. 그토록 듬직하게 느껴졌던 녀석이 어려지고 나니-, 이 녀석이 이토록 어릴 때가 있었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까마득하여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딱 저만했을 때의 일들이.

“옛날에도 너는 강해지는 것에 집착하여 이처럼 무리를 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

“……그랬습니까?”

“딱 지금 정도였겠군. 그때는 진검을 휘두른 것으로 혼났었다. 크게 다칠 뻔했었지.”

금룡이 어색하게 눈을 찌푸렸다. 어렴풋하게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그를 눈치챈 의약당주가 말을 이었다.

“그때도 같은 잔소리를 했었다. 초조해하지 말라고. 그런데……, 어째 변하는 것이 없구나. 다시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 것이냐.”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예나 지금이나 그는 늘 같은 것으로 혼이 나고 있었다. 초조함. 자신을 갉아먹는 감정은 지독히도 바뀌질 않는 모양이다. 씁쓸한 웃음이 새었다.

“그 성질이 너를 갈고닦게 했겠지만-, 과하면 늘 독이 되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금룡이 포권하며 말씀을 받들겠다는 의지를 표했다. 의약당주는 그제야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몸을 보(補)할 수 있는 탕약을 지어줄 테니 마시고 가거라.”

“예.”

 

*

 

“죄송합니다.”

의약당에서 나오자마자 듣는 소리가 사과다. 한숨이 나왔다.

이송백의 언행이 짜증을 돋운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볼 순 없었다. 그의 걱정은 진심이었으니까. 다만-. 그 형태가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생전 겪어본 적 없던 아이 취급. 그것도 이송백이 저를.

하지만 그런 사실을 다 감안하더라도 화를 참지 못하고 장로들의 말을 어긴 건 결국 금룡 본인이었으므로-, 이송백이 책임을 질 일이 아니었다. 그가 혼이 나야 한다면 침착하지 못했던 대응에 관련된 것뿐이다. 상대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결국은 검을 겨눈 채 마주한 이는 적. 그 사실을 잊고 엉거주춤한 일은 분명 혼이 나야 할 일이 맞다. 그런데 꼴을 보아하니 다른 부분에 대해서 더 크게 혼이 난 모습이었다. 저 미련스럽기 짝이 없는 사제가 순순히 자신의 잘못임을 인정했을 것이 눈에 훤하게 보이는 듯했다.

자신이 먼저 건 싸움이고 끝난 후에 속이 시원하다고까지 했는데도-, 감히 사형을 다치게 한 것이 스스로 용서가 안되는 모양인지 송백의 얼굴은 죄책감으로 얼룩덜룩했다. 금룡이 그런 송백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왜 저리 구는 걸까. 그는 솔직히 이송백의 저런 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런 점을 굳이 바꾸고 싶지도 않았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송백의 눈이 한차례 흔들렸다.

“사형-,”

“됐다. 그보다 피곤하니 돌아가서 쉬도록 하자.”

말을 돌릴 요량도 없잖아 있었으나, 정말로 피곤하기도 했다. 내상 탓인지 아니면 내리 혼난 탓인지 아까부터 눈꺼풀이 무거워 침상에 머리를 대는 즉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돌아서자, 한참 뒤 송백이 조심히 뒤를 따라 걷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사박사박-. 흙모래를 밟아 나는 소리가 따로 머물고 있는 전각까지 고요하게 이어졌다.

“이송백.”

작게 이어지던 소리가 끊긴 것은 전각의 지붕이 보일 때쯤이었다. 땅을 향해있던 송백의 시선이 위로 올라왔다. 금룡이 어느새 뒤를 돌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아니야.”

갑작스런 말에 송백의 눈이 커졌다.

“비록 몸이 어려지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대종남파 이대제자 중 대제자이고, 후일 종남을 이끌 사람이다.”

당연한 사실을 굳이 짚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송백은 요 며칠 동안 자신이 그를 위해 한 행동이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걸 어렴풋하게 눈치챘다.

“사형, 저는-,”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래. 난 네 사형이지. 네가 날 사형이라고 부르고 있는 동안은 응당 생각 또한 그리해야 하지 않겠느냐.”

말하려던 것이 목 끝에서 나가지 못하고 삼켜졌다. 금룡을 마주하고 있던 눈동자가 한차례 흔들렸다. 분명 사형은 사형인데-. 작은 키와 앳된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송백은 눈을 내려 땅을 바라봤다.

복잡한 얼굴을 한 송백을 보며 금룡이 몸을 돌렸다. 저놈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지. 잠깐이라도 혼자 있는 것이 서로에게 나을 터였다.

 

*

 

씻고 나온 금룡이 마른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짜낼 때였다.

“사형.”

송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송백이 올곧은 시선으로 저를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깊은 눈에 새겨진 복잡한 빛이 아예 지워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가신 것 같았다. 금룡은 들어오란 눈짓을 해 보이곤 다시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툭툭 쳐냈다.

“제가 말려드리겠습니다.”

“이것도 못할 줄 알고 그러느냐?”

심통스런 어조로 툭 던지는 말은 전각에 들어서기 전의 연장선이기도 했지만, 그 일을 가볍게 넘기겠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사형에게서 느껴지는 심술기에 송백이 어정쩡하게 웃어 보이자, 금룡은 흥-, 콧김을 얕게 내쉬며 수건을 넘기곤 근처의 의자에 앉았다. 송백은 수건을 받아들고 조심스런 손길로 금룡의 뒤에 섰다.

물기에 젖은 머리칼은 정말로 매끄러운 흑단 같았다. 송백은 부드러운 수건을 들어 머리칼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머리를 만지는 송백의 손은 검을 쓰는 손답게 거칠고 투박하지만 손길은 더없이 다정하기만 했다. 금룡은 이 조용한 순간이 마음에 들었다.

한참을 조용하게 송백의 손길을 받아내던 금룡이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사형, 졸리십니까?”

“…….”

아니라고 하기엔 의약당에서부터 피로함을 느꼈던 터다. 어려진 몸 때문일까? 유난히도 졸음을 참기 힘들었다. 금룡은 무거워진 머리를 잠깐 짚었다.

“자야겠군.”

“머리가 덜 말랐는데…….”

“괜찮아.”

침상이 축축해져서 괜찮지 않으실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만 정말로 피곤해 보이는 금룡을 보니 차마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송백은 고민하다 축축해진 수건을 옆에 두고 다른 수건을 한 장 가져와 머리가 닿는 곳에 깔아주었다.

송백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보모가 따로 없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졸려서일까 화가 나진 않고, 기분이 이상하기만 했다. 어쩌면 한바탕 쏟아낸 후여서인지도 모른다. 문득 이송백이 저리 구는 것이 과연 다른 이여도 그랬을까 의문이 들었다. 어려진 것이 다른 이가 아닌 저이기에 저리 다정한 거라면-…….

“이송백.”

부르는 소리에 송백이 고개를 돌렸다. 대답하기 전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자고 가거라.”

“예?”

난데없는 말에 송백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차피 아침에도 다시 올 생각이 아니더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시간까지 아깝군. 그냥 여기서 자라.”

그렇긴 했다. 이곳은 손님용 전각이었고, 개중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해 일이 년에 한 번 청소할 때나 개방되는 곳이었다. 당연히 문도들이 있는 곳과는 거리가 꽤 있어 아침저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제법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금룡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사형.”

송백이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긴 침상이 하나뿐입니다.”

송백 딴에는 꽤 진지하게 거론한 문제였다. 다른 방은 여전히 청소가 되어있지 않았고, 침상만 우선 청소한다고 하더라도 이불 한 자락 없는 이상 너른 나무판자일 뿐이다. 무인이 그것도 못 견디겠냐마는-. 상황이 그러했고,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숙소와 이 전각을 계속 오고 갔으니 오늘 밤까지는 차라리 하던 대로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금룡의 표정이 왈칵 구겨지기 전까지는.

“같이 자면 될 것 아니냐?”

“……예?”

그야말로 멍청하게 굳어버린 이송백을 보며 진금룡은 피로에 짜증까지 더해진 상태로 다다다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침상이 하나뿐이면 뭐가 어떻다고? 한 침상을 공유한 적이 한두 번이더냐? 네가 내 옆에서 깬 것이 몇 번인 줄 아나? 같이 자면 되는 것을 무얼 그리 어렵게 생각을 하지? 새삼 이제 와 침상을 같이 못 쓸 이유라도 생겼느냐?”

쏘아지는 말들을 멍하니 듣던 송백의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그건-!”

“그건 뭐? 또 내 몸이 어려진 핑계를 댈 참이냐? 말했듯이 내가 어려졌다 해도 네 사형인 진금룡이다. 그리고 빌어먹을 네놈의 정인이기도 하지!”

진금룡에게서 터져 나온 분노 어린 말에 송백은 벙찌고 말았다. 금룡은 그런 송백을 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자고 가.”

내 옆에서. 네놈 말 따윈 더는 듣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통보임과 동시에-, 거스르지 못할 명령이었다.

 

*

 

종남의 밤은 고요하다.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산에 위치한 도문답게 언제나 정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니, 저녁이 넘으면 돌아다니는 이라곤 번을 서는 문도들뿐. 이따금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소리와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부딪치는 소리, 조금 떨어진 곡에서 흐르는 물소리 외엔 이렇다 할 소리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니 푹신한 이불에 눕기까지 하면 아무리 피로하더라도 피곤이 한 꺼풀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래, 그럴진대-.

송백은 전혀 쉴 수가 없었다. 색색 숨소리조차 거의 내지 않고 조용히 잠에 든 사형이 바로 옆에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몸은 체온이 조금 더 높다고 들은 것 같은데,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 몸을 부대끼던 사형의 체온보다 조금 더-, 온도가 높았다. 어쩌면 지금 상황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지도. 송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정인이라니.’

한 번도 그와 자신의 사이를 정리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외면해왔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사형제 간에서 벗어난 형태를 생각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금룡과 그가 몸을 섞은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것은 그야말로 가끔이었고-, 애정에 기반하기보단 서로에게 불이 지펴진 어떠한 욕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리고 금룡의 말은 조금의 과장이 섞여있었다. 아니, 분명 그의 말은 거짓이 없는 진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 말만 들으면 마치 그들이 매일 몸을 섞은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하지만 진실은 조금 달랐다. 진금룡도 이송백도-, 도문에 속한 이들답게 그들의 생활은 금욕적이었고 대부분의 욕구는 수련과 비무를 통해 풀렸기에 몸을 섞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반동일까? 아주 간혹가다 불이 붙으면-, 그때는 정말로 지금까지 눌러 참았던 것을 폭발시키듯 아주 격하게 색사를 치렀고, 이송백과 진금룡 둘 다 녹초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니 움직이지도 못하고 금룡의 옆에서 기절하듯 잠을 청한 것이다.

그렇게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해 본 적 없이 몸을 섞고 해가 뜰 때는 다시 사형제 간이 되는데-, 이를 어찌 정의하는 게 좋을지 생각하기를 미루고 미루던 차였다. 그런데-.

―정인.

사형은 아주 확고하고 당연하게 외쳤다. 한 번도 그게 아닌 다른 걸 생각한 적이 없다는 듯이.

‘미쳤구나.’

이는 사형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되뇌는 소리였다. 흥분하여 서로의 몸을 물고 뜯으며 탐할 땐 전혀 느껴진 적 없던 긴장이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온몸을 조여왔으니까. 사형이 어려진 이 순간에 말이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돌아가거나-, 하다못해 바닥에서 자는 것이 낫지 않을까? 혹여라도 사형이 깰까 봐 실행하지 못할 생각을 속으로 수십 번을 되뇌었다.

송백은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옆에 누운 금룡을 힐긋 쳐다보았다. 어려진 모습이 많이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금룡의 분노를 겪은 탓인지, 새삼스럽게 사형이 어려졌음을 깨닫는 일은 없었다. 그저-, 이리 잠든 사형을 본 적이 없구나. 그런 생각만이 들었을 뿐이다.

종남파의 대제자. 후일, 장문인이 될 사람. 저의 사형 진금룡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다른 제자들에 비해 일이 많았고, 더욱 혹독한 수련을 하곤 했다. 그리고 제게 떨어진 그 모든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짊어지고 견디면서도 그린 듯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로 침식을 잊어가며 해내곤 했던 것이 종래엔 병증처럼 도졌던 것은-.

그가 누구에게도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송백만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송백은 가끔 의약당에 속한 사제들이나 식당의 숙수들에게서 수면에 좋은 것들을 챙겨오기만 할 뿐 그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금룡이 내색하지 않은 것은 그 사실을 송백을 포함한 그 누구도 아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랬기에 송백은 금룡의 의사를 존중했고-, 자신도 그가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만 보이지 않게 챙겼다. 그것이 사제된 도리라고 생각했고, 또- 그를 경애하고 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겨우 그런 것으로 불면증이 치료될 리 없으니-, 격한 색사를 치르고 금룡의 곁에서 잠든 몇 번의 경험에서도 그가 편안한 얼굴로 잠에 빠진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금룡이 현재는 깊게 잠이 들었다. 찌푸리지 않은 미간을 보는 것이 오랜만이다 느껴질 정도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눈 밑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오똑한 코가 어린 티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곧게 뻗어있었다. 그 아래 자리한 입술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보기 좋은 크기였고 정갈한 모양이었다. 보고 있자니 감탄하게 된다. 정말 예쁜 얼굴이셨구나. 이리 말을 하면 얻어맞을 것이 분명하기에 속으로만 삼킬 생각을 하며 송백이 다시 눈을 천장으로 돌렸다.

‘정인.’

어려진 사형의 상황에 더해 조금 더 머리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 추가되었다. 송백은 눈을 감았다. 잠을 자긴 그른 것이 분명했다.

 

*

 

아침에 일어났을 때 어쩐지 몸이 조금 개운했다. 내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에 불편한 점이 하나도 없었고, 전날 마신 탕약의 효과 때문인지 기가 원활하게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금룡은 자리에서 일어나 옆을 돌아보았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이송백이 있었다. 언제나 정자세로-, 하지만 피곤했는지 옆으로 살짝 틀어진 고개가 저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군.’

자기만큼이나 빨리 일어나는 이송백이 일어날 기미가 없어 보이는 것이 제 옆자리가 편했나 싶어, 어쩐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전날 밤의 짜증은 순식간에 수그러들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닌 저놈이 어려졌으면 볼만했을 텐데-’, 하고 말이다.

금룡은 송백이 깨지 않게 조용하게 침상에서 내려와 가부좌를 틀었다. 어려진 이후에도 운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흐트러진 마음이 바로 모였다. 단전에서 시작되어 나온 기운이 몸을 천천히 돌기 시작하며 현실이 서서히 멀어졌다.

 

잠시 후-, 적막 속에서 금룡이 눈을 떴다. 미묘한 찌푸림과 함께.

 

*

 

송백이 눈을 뜬 것은 조금 더 지나서였다. 평소보다 늦게 깨긴 했으나, 밤을 꼴딱 새우다 해가 뜨기 직전에 겨우 잠이 든 것을 감안하면 잠든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겨우 한시진이나 잤을까. 송백은 무겁게 잠긴 눈을 손바닥으로 지긋하게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옆자리가 허전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형?”

반사적으로 불러보았으나 방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어딜 가신 거지? 의아함을 품고 주변을 둘러보던 송백은 옆에 놓인 탁자에 물그릇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 깨끗한 물이었다. 누가 둔 것인지는 뻔했다. 여기 머무르는 이는 딱 한 명뿐이니까. 그리고 그가 물을 왜 떠 둔 것인지-, 잠시 멍하게 그릇을 내려다보던 송백이 곧 그 의미를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저의 사형이 물을 떠두는 건 둘이 같이 잠든 날이면 아침마다 해주었던 일이다. 그땐 색사의 흔적을 치우기 위해서, 그리고 지친 그를 배려해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건 마치-. 누가 보는 이도 없건만 송백은 앓는 소리를 약하게 밭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간밤을 지새우게 만든 두 글자가 또다시 불쑥 떠오르며 지워지지 않는 탓이다.

송백은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물에 손을 담가보았다. 손에도 열이 옮은 것인지, 유난히도 시원하게 느껴지는 물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들었다. 얼른 씻자. 씻고 머리를 비워버려야지. 이러다 사형이 돌아와서 이 꼴을 보면 무어라 하겠는가? 송백은 자느라 풀어둔 머리를 대충 한쪽으로 치우곤 세수를 했다. 촤악- 물이 몇 번이고 얼굴을 씻고 후드득 흘러내렸지만 열이 도통 빠질 것 같지 않았다. 큰일이었다.

“하아…….”

긴 숨을 토해내는 때였다.

“무슨 한숨을 그리 내쉬느냐.”

며칠 동안 들어 익숙해진 미성이 갑작스럽게 들려와 송백이 깜짝 놀랐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으면 사형이 온 지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꼴은 그게 다 무어고.”

고작 세수치고 온통 머리카락과 옷섶이 흠뻑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금룡의 눈엔 퍽 이상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송백은 제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엉망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뒤늦게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그냥-, 좀…….”

별다른 변명이 생각나지 않아 그렇게만 웅얼거리는데, 금룡은 의구심 어린 눈으로 송백을 힐긋 쳐다보기만 할 뿐 구태여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저-.

“거기 앉아라.”

그렇게 말하며 한쪽에 놓인 방석을 가리켰다. 송백이 반사적으로 예? 하고 되묻자, 금룡이 심드렁한 눈으로 무얼 하느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무언의 독촉에 송백이 얼떨떨한 얼굴로 사형이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왜…….”

“머리가 엉망이야. 꼴 보기 싫다.”

“아.”

송백이 멋쩍게 웃으며 물기가 가득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금룡이 그 머리칼을 이어 받아 쥐며 손끝이 살짝 닿았다. 아무렇지 않게 스쳤으나 송백은 자신의 손끝이 아까 전의 얼굴처럼 화끈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형을 등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괴이쩍은 얼굴을 보여주었을 테니. 송백은 애써 생각을 떨치고자 입을 열었다.

“이리 해주시니 예전 생각이 납니다.”

“예전? 무슨 생각 말이냐.”

“왜- 어릴 때, 제 머리를 자주 묶어주시지 않았습니까.”

말을 하다 보니 정말로 그 어릴 적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머리끈을 들고 사형을 찾아가면, 사형은 귀찮다는 식으로 핀잔을 주면서도 단정하게 머리를 정리해 묶어주곤 했다. 송백의 말에 금룡이 흠-? 소리를 흘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 기억났다. 산발을 하고 엉망진창으로 나다니는 꼴이 보기 싫었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흥.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웃음기 섞인 물음에 송백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반박했다. 하지만 금룡의 귓가엔 가소롭게만 들리는 답이었다.

“작달만한 것이 머리를 어떻게 묶었는지 사방으로 뻗쳐서는 세 걸음마다 머리끈이 풀어지기 일쑤였다. 보고도 모른 척 내버려 뒀더니 바로 다음날 수련 중에 풀어진 머리가 잘려나갔더랬지.”

말을 듣는 순간-, 기억이 우르르 덮쳐들었다. 부끄러운 옛일이었다. 송백은 아으……, 앓는 소리를 내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귓가가 홧홧했다.

“그런 건 좀 잊어주십시오.”

“어찌 잊느냐? 뭉텅이로 잘려나가 한동안 꼴이 제법 웃겼는데. 그리고 내가 네 머리를 그때부터 묶어주었다. 네가 기억하는 것이 어찌 시작된 건지는 알아야지?”

“그랬던 겁니까?”

말을 하는 사이 축축하게 젖어있던 머리를 수건으로 잘 닦아낸 금룡이 머리를 가지런히 모아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땐 제법 귀여웠지. 말도 잘 듣고 말이다.”

“지금은 아닙니까?”

“말이라고 하느냐? 쓸데없이 커져서는.”

“그래도 작은 것보단 좋지 않습니까?”

“흥. 쓸데없어.”

시시껄렁한 농이 몇 마디 더 오고 갔다. 길게 늘어졌던 머리가 어느새 단정하게 정리되었다.

“되었다.”

그 말에 송백이 고개를 돌렸다. 사형이 만져준 머리가 오랜만이라 어색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제가 만져준 머리를 꽤 흡족한 눈으로 보는 것이-, 평소보다 좀 더 나은 상태인 것 같았다.

“그런데 사형,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그 물음에 금룡이 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아침마다 네가 하는 걸 오늘은 내가 했을 뿐이다.”

“예……? 아-.”

몸이 어려진 후에도 금룡의 생활은 전각만 옮겨졌다 뿐이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수련 양이 대폭 줄어들긴 했으나, 어쨌거나 수련과 수련.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며칠이었다. 그에 반해 송백은 장로들의 명으로 그들과 금룡 사이를 오고 가며 보고를 하는 일이 더해진 상황이었다.

“직접 가셨습니까? 사제들과 마주치진 않았는지요.”

“그 녀석들 기척 하나 못 잡겠느냐.”

송백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냥 저를 깨우지 그러셨습니까.”

금룡의 얼굴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왜 그래야 하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자꾸 반박하는 것이 거슬린 것 같기도 했다.

“역시 넌 잘 때가 더 나아.”

“예?”

“말대꾸가 없으니 말이다.”

이해를 한 송백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사형-.”

길게 끌리는 말을 들으며 금룡도 픽 마주 웃었다. 나쁘지 않은 아침이었다.

 

*

 

그로부터 칠 주야가 더 지났다. 여전히 금룡의 몸은 그대로였고, 돌아올 방법 또한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금룡에게 날이 서기 시작했다.

 

“젠장-!”

수련을 하던 금룡의 검 끝에 푸르스름한 검기가 맺히는가 싶더니만 이내 바람 소리를 내며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에 날아가 부딪쳤다. 으지직 부러지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바닥에 닿으며 둔중하게 쿵-, 쿠궁-. 나무가 겹쳐 쓰러지는 소리가 장원을 가득 메웠다.

“사형!”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송백이 금룡이 또다시 내상을 입었을까 염려하여 바로 달려갔다. 금룡이 검기를 발출한 것은 워낙 순식간이라 말릴 새도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걱정 어린 질문에 금룡이 버럭 소리쳐 답했다. 그런 모습에도 송백은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금룡이 왜 저렇게 날이 잔뜩 서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전 사형의 몸이었다면 이까짓 검기를 쓰는 것에 내상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몸이 어려진 것 자체로도 문제였지만, 어려지면서 딸려온 부차적인 문제들이 천성 무인인 그에겐 너무나도 크다는 사실이 더 문제였다. 제 힘을 다 발출할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제 실력에 미치지 못하는 삼대제자의 수련을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것도 보름 가까이. 보름은 그리 길지 않은 듯하면서도 길었다. 그 보름이 두 번이면 한 달이었고, 한 달이 쌓이면 금세 일 년이 된다. 금룡이 하루하루를 얼마나 잘게 쪼개 앞으로 나아가는지를 생각해 보면 보름은 너무도 긴 시간이었다. 심지어 앞으로도 얼마나 더 이리 버텨야 하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이송백은 그저 사형의 상황이 안타깝기만 했다. 마음 같아선 사형이 속이라도 풀 수 있게 마음껏 수련하고 검기를 쓰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내상이 문제였다. 의약당주가 말하기를 금룡의 문제는 특수하다 하였다. 지금 상황에서 내상을 입는다면, 그 상처를 통해 내력이 흘러나올 것이고, 원래 가야 할 길을 벗어나 폭주한 내력으로 인해 결국 주화입마에 이를지도 모른다고 했다. 무인으로서 가장 멀리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송백은 금룡의 내상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금룡 또한 그날 이후로 송백이 저를 마냥 어린 취급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더는 날을 세우지 않았다. 최대한의 인내였다. 금룡은 숨을 몇 번 크게 내쉬며 화를 가라앉혔다.

“오늘은 이만해야겠다.”

“예. 씻을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됐다. 전각 뒤로 온천수가 나오지 않느냐. 같이 씻기나 하지.”

납검을 하는 찌푸려진 얼굴에서 약간의 시무룩한 기색 또한 읽혔다. 송백은 보이지 않게 숨을 내쉬었다. 어서 사형의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 할 텐데. 그리 생각하며 금룡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송백은 금룡이 돌아올 방법이 막막해서 짜증을 내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실상은 미묘하게 달랐다. 금룡은 한 가지를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그가 날이 선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 금룡의 눈이 복잡한 빛을 띠었다. 내상을 입은 다음 날, 운기를 하며 느낀 것 때문이었다.

‘분명 그릇이 넓어졌어.’

다르게 말하자면 어려지기 전의 신체와 가까워졌단 뜻이다. 하지만 그것을 가까워졌다고 말하기엔 미묘했다. 아주-, 정말 아주 조금 넓어진 것에 불과했으니까.

처음엔 시간이 답이라고 여겼다. 어려진 후로 며칠이 지나서 서서히 돌아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운기를 하거나 신체에 변화가 있는지 매일매일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일주일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즉-, 돌아갈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 그 답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손을 들어 보니, 일주일간 말 그대로 피가 터지게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그 이상을 휘두른 검, 그리고 내지른 장과 권으로 인해 짧은 사이 손이 걸레마냥 너덜너덜해져있었다. 그 손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팠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실마리. 지금 상황은 꼭 진득하고 깊은 안갯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사형.”

바로 옆에서 저를 불러오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송백의 깊은 두 눈과 마주쳤다.

“안 잤느냐?”

“사형도 안 주무시지 않습니까.”

송백의 시선이 살짝 틀어지며 금룡이 들고 있던 손으로 향했다.

“…….”

금룡이 손을 내렸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감추려는 심정에 더해 송백이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 탓이었다.

송백의 시선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 어떤 씁쓸함도 동정도 없는 곧고 단단하기만 한 눈이었다. 그런 눈을 하고서 이송백이 말했다.

"사형, 분명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안갯속에서 아주 잠시 환한 빛이 반짝인 듯했다. 그 언젠가 보았던-, 자신이 뱉은 말을 흔들림 없이 믿는 눈이었다. 마주 보는 이들도 신뢰할 수밖에 없는-, 깊고 깊은 눈. 금룡은 그 한 쌍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이송백은 옳은 말만을 한다. 그러니 이번에도 옳을 것이다. 금룡의 답에 송백이 빙그레 웃었다.

“이만 주무십시오.”

다정한 음성에 짜증과 불안이 밀려났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잠을 못 잘 정도는 아니었다. 피식 웃음이 샜다. 금룡은 고개를 돌리느라 삐죽 흘러내린 송백의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밤의 어두움 탓일까 송백의 얼굴색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너도 이만 자라-.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매캐한 향이 한 번 일었다. 금룡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송백이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섰다.

“방금…….”

이상한 소리도 한 번 들렸다. 뭔가 쿵- 내려앉는 듯한-. 자신이 착각한 건 아닌지 의심하는데-,

“이상한 기척이 둘, 가까이서 느껴진다.”

어느새 검을 든 금룡이 날카롭게 밖을 통하는 창을 주시하고 서있었다. 송백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님을 깨달았다.

“이 전각을 찾을 이는 장로님들뿐인데-.”

“이 시간에?”

그것도 이리 기척을 죽이고? 송백 또한 느끼고 있는 사실이었다. 느껴지는 기척이 종남의 문도라고 하더라도 처음 매캐한 향은 불길한 것이 틀림없었다. 인위적으로 어딘가에 불이 붙은 냄새였다. 무언가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둘 사이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이 가득 찼다. 송백은 제 검을 찾아 쥐었다. 그리고 사형의 뒤에 등을 지고 섰다. 이제는 확실하게 가까워진 기척이 느껴졌다. 저쪽에서도 여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알고 가까이 오고 있는 거다.

“어디로 들어올까요.”

제가 막고 선 문과 사형이 노려보고 있는 창. 둘 중 어디일까?

“어디가 되었든-.”

금룡의 입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기척 하나가 빠르게 문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검을 겨누는 것과 동시에 금룡의 말이 마저 들렸다.

“막으면 그만이지.”

콰앙-! 문을 박살 내며 들어온 검은 인영과 송백이 부딪쳤다. 등 뒤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들렸고, 나무로 된 격자가 부서져 튀어나오는 파편들이 등을 때려댔다. 송백은 사형이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정체 모를 침입자가 우선이라는 걸 직시했다. 고개를 돌려 사형의 모습을 확인하고픈 마음을 누른 송백이 상대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침입자는 어둠 속에 묻힐듯한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팔 길이 정도의 짧은 검 또한 반짝임을 다 죽여 광택 없는 흑색이었다. 누가 보아도 좋지 않은 이유로 은밀함을 추구하는 이들의 복색이었다.

“어디서 온 자들이냐?”

송백의 물음에 침입자의 입에서 쇠를 긁는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차피 죽을 놈이 그런 것을 궁금해할 필요가 있을까?”

더해져 가는 살기에 송백이 검을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강호의 경험이 적긴 하지만-, 경험이 적다는 이유로 이런 이들에게 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침입자의 발이 움직였다. 움직임을 보자마자 송백의 검이 상단을 막았다. 챙-! 무게가 실린 검치고 부딪치는 소리가 가벼웠다. 상대가 쓰는 검이 특수 제작된 탓도 있었지만-, 애초부터 노림수였던 탓이 더욱 컸다. 상대의 다른 손에서 얇고 작은 비도가 나왔다. 송백은 빠르게 검을 회수하며 비도를 막았다. 상대의 공격은 살수답게도 빠르고 가벼웠다. 송백은 제가 쓰는 검이 침입자의 검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허나 그것이 약점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송백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검을 막았다. 좌우의 손에서 휘둘러져오는 검과 비도의 경로를 따라잡은 눈이 제가 휘둘러야 할 최적의 길을 찾아냈고, 특유의 무겁고 강한 기운으로 상대의 검을 밀어냈다. 캉-! 카강! 쇠붙이들이 부딪치며 귓가를 여러 번 어지럽혔으나, 송백의 두 눈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침입자의 움직임만을 살폈다.

침입자는 몇 번이고 제 공격을 전부 막아내는 송백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젊은 검수는 좁아터진 실내에서 장검을 쓰는 것이 익숙지도 않을 텐데도, 크지 않은 동작으로 매우 효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침입자의 눈이 어두워졌다. 실전 경험도 별로 없을 텐데-. 아주 잠시 생각이 흐트러진 틈을 타, 코앞으로 검이 휘익- 바람을 가르며 뻗어왔다. 침입자는 급하게 뒤로 몸을 굴렀다. 허나 창피하진 않았다. 저걸 맞았다면 제 얼굴에 바람구멍이 났을 테니까. 침입자는 몸을 일으키며 뒤로 훅 물러섰다.

“봉문까지 해 별것도 없는 놈들이 제법이군.”

“대종남파를 무시하지 마라.”

송백의 눈에 푸르디푸른 분노가 어렸다.

“다시 묻겠다. 이곳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라.”

침입자가 검을 슥 내려뜨렸다.

“좋아. 알려주지.”

이렇게 순순히? 그럴 리가 없는데-. 생각하는 순간, 침입자의 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기척이 훅 줄어들었다. 송백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향하는 게 자신이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종남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서다-!”

“사형!”

또 다른 한 명을 상대하고 있던 금룡의 어린 등 뒤가 훤하게 비어있었다. 송백의 벼락같은 외침에 금룡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의 앞에서도 검이 날아들었다. 양방향에서 질러오는 검을 사형이 전부 막을 방법은 없다. 그 모든 장면이 느리게 보이는 듯했다. 그 위태로운 그림 속에서 사형의 눈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주친 커다란 눈에 박힌 눈동자가 언제나처럼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송백이 검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물 흐르듯 멈춤 없이 매끄럽게 움직인 검에서 푸른 검기가 쏘아져 나가 온 방안을 쓸고 지났다. 침입자들은 풍압에 속절없이 떠밀려 벽으로 쿵! 쿵! 연달아 처박혔다. 오직 진금룡만이 검을 바닥에 박아 넣은 채 버티고 서있었다. 무겁지만 날카로운 검기에 의해 비록 꼴이 엉망이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송백과 몇백 번이고 검을 맞대왔던 그다. 송백의 검이 어떤 힘을 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보다 더 잘 아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맞서서 버틸 수 있었고-, 그걸 알기에 이송백도 과감한 수를 쓴 것이다.

“사형!”

송백이 사색이 되어 금룡에게로 뛰어갔다.

“너, 잘도-.”

제가 더 아픈 얼굴인지라 농이라도 치려는 순간이었다. 쿠궁- 무언가가 어긋난 소리가 전각 전체를 울렸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송백이 어?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와는 달리 금룡은 전각에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바로 눈치챘다.

“이송백-!”

금룡이 박아 넣었던 검을 바로 뽑아들었다. 그리고 고민할 새도 없이 위를 향해 검기를 발출했다. 정확히는 무너져내리는 전각의 천장을 향해서-.

“-!”

콰아앙-!

큰 소리가 다시 한번 더 전각을 가득 울렸고, 멀리 어둠 속에서도 보일 정도로 흙먼지가 한차례 장원을 크게 뒤덮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렸다.

 

*

 

“허억-.”

송백이 숨을 토해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무너지는 전각에서 탈출한 것은 매몰되기 일보 직전의 아슬아슬한 찰나에 일어났다. 금룡은 검기를 발출하자마자 몸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송백이 그를 아슬아슬하게 받아들고 보이는 창밖으로 바로 뛰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전각 전체가 내려앉은 것이다.

“사형-, 사형!”

송백은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감싸 안고 있던 금룡을 살폈다. 핏기 가신 얼굴, 희미한 숨. 사형이 좀체 눈을 뜨지 않았다. 송백의 머리가 순식간에 하얗게 텅 비었다.

사형이 쓰러진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머리가 숨을 쉬는 것을 거부하듯-, 송백의 안색도 점차 파리하게 질려갔다. 건물이 무너진 것은 자신이 실내에서 검기를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아-. 숨이 턱 막혔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양쪽에서 찔러오는 검을 막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 따위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의, 의약당…….”

간신히 굳은 머리를 굴려서 나온 것은 의약당의 존재였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침입자가 저 둘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탓이었다. 저들이 전각을 습격하기 전, 멀리서 매캐한 재의 냄새가 났고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었다. 아마 산문 내에서는 더 큰일이 벌어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사형을 데리고 움직이다 다른 침입자와 마주한다면? 송백은 조금이라도 사형이 위험해지는 가능성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때였다.

“사형! 송백 사형-!”

멀리서 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금 전까지 물속에 잠긴 사람처럼 제대로 내쉬지 못했던 숨이 트였다. 송백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고휘?”

“사형! 무사하십니까?!”

고휘가 송백을 발견하고 멀리서부터 뛰어왔다. 그 뒤로 화소도도 보였다. 그들 또한 한바탕 전투를 치르고 온 것인지 옷 여기저기가 구져지고 핏방울이 이곳저곳에 묻어있었다.

“너희가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것이냐?”

“장로님들께서 가보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사형, 왜 여기에 계신…….”

가까이 오던 고휘와 화소도의 걸음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사정은 나중에 설명하겠다. 빨리 의약당주님을-,”

말을 하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송백이 의아한 얼굴을 들었다. 급한데 이상행동을 보이는 사제들을 향해 화도 나는 참이었다. 그런데-.

“이, 이…….”

말도 제대로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고휘의 얼굴이 굉장히 이상했다. 무언가 경멸 어린-……, 어? 경멸?

“사형……, 사형은 쓰레깁니다!”

……내가?

사제가 하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송백이 한참이나 멍청하게 굳은 얼굴로 고휘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 선 화소도 또한 경멸까진 아니었으나 비슷한 결로 기겁한 얼굴이었다. 어쨌거나 둘 다 송백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은 분명했다.

“너희 지금-,”

송백은 다급한 상황에 왜 저러는지 사제들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고휘의 말이 더욱 빨랐다.

“어찌 어린아이를-!”

메아리처럼 온 장원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였다. 숨을 한차례 들이키고 내쉬는 동안 적막이 이어서 들이찼다.

“지학이나 되었을까요?! 그런 아이를 어찌-! 사형이 그러고도 사람입니까!”

지학? 대체 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고휘의 시선이 제 아래를 향한 것을 본 송백의 시선도 따라서 아래를 향했다. 제 밑에 깔린-,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는 금룡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직후에 비해 얼굴선이 조금 더 짙어져있고, 키가 조금 더 커진…….

“어?”

그래. 커졌다. 그것도 눈에 확 보일 정도로. 일고여덟이 이제는 지학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어어?”

송백의 입에서 얼이 빠진 소리가 흘렀다. 그 소리에 반응하기라도 한 것인지 금룡의 눈썹이 한차례 파르르 떨렸다.

“쿨럭-.”

기침과 함께 숨을 토해내더니-, 긴 속눈썹이 팔랑이며 위를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금룡의 눈이 바로 앞에 있던 송백을 확인하더니 또렷하게 빛을 냈다.

“……이송백?”

기절하기 직전에 전각이 무너져내리던 것만을 기억하고 있는 금룡은 눈앞에서 무사히 살아움직이는 이송백을 확인하고 나니 그제야 푸스스 바람 빠진 숨이 새어 나왔다.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다 쓴 게 헛짓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유난히 송백의 표정이 괴이했다. 멍해 보이기도 했고,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뭐지? 설마 어딜 다친 것은……. 일단 몸을 일으키자 싶어서 금룡이 송백에게 말했다.

“비켜봐라.”

그제야 제 위를 다 가리고 있던 송백이 비켜섰다. 다행히 이송백은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그놈들은 어찌 되었느냐?”

“…….”

물음에도 송백의 얼빠진 얼굴이 변할 기미가 없었다. 금룡은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왜 답이 없-,”

다그치려는데-, 송백의 뒤로 도열한 사제 둘이 보였다. 금룡은 말을 잃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그 둘 또한 금룡의 얼굴을 확인하고 저마다 충격을 먹고서 입을 떠억 벌린 채였다.

“어-, 그, 그러니까…….”

“대, 대사형…….”

몸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리면 다른 이들에게도 들킬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생각보다 큰 충격은 없었다. 금룡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작게 수긍하는 목소리에 사제들이 헉-, 숨을 들이켰다. 사제들은 서로를 돌아보더니 이내 표정이 정리되었다. 고휘가 눈을 떨며 무언가를 결심한 듯 한발 앞으로 나오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금룡 사형에게 아들이 있는 줄 몰랐다.”

뭐? 굳어버린 금룡의 앞으로 화소도까지 다가와 기어이 입을 열었다.

“저도요. 이렇게 장성한 아들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아니, 그보다 사형이 혼인을 한 줄도 몰랐어요.”

“얘, 이름이 무엇이냐?”

“어떻게 이렇게 똑 닮았지?”

“…….”

넋이 나가버린 금룡의 귀로 몇 초 뒤, 큽-, 누군가의 기침과도 같은 웃음소리가 박혀들었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눈을 마주친 이송백이 입을 꾹 다물고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대사형도 진초백 장로님을 빼다 박지 않았느냐. 그 집의 피가 진하긴 진한가 보다.”

“그러니까요. 신기하네요. 어릴 때부터 잘생겼구나. 장래가 기대될 정도입니다.”

“그보다 사형은 왜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셨지?”

“어찌 숨겼는지도 궁금합니다. 이렇게 큰데.”

사제들의 천진난만하고 무구한 수다에 금룡이 검을 꾹 움켜쥐었다. 한마디만 더 나오면 검이 뽑혀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송백이 뒤늦게라도 말리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괜찮습니까!”

갑자기 들린 다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종서한이 저 멀리서 빠르게 계단을 뛰어오고 있었다.

“종서한.”

송백이 몸을 바로 서며 종서한을 맞았다.

“놈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이쪽으로도 왔을-, 잠깐-, 저, 전각이-……!”

걱정스럽게 질문을 하던 종서한의 시선이 무너진 전각을 향하더니 크게 뜨였다. 구석에 있긴 했으나 두 개의 층에 방도 여러 개 있고 정원이 딸려 제법 운치 있게 꾸며져있던 손님용 전각이 말 그대로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 기존의 모습이라곤 한 군데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 장로님들이 보게 된다면 그대로 뒷목을 잡고 기절을 할지도 모를 정도였다. 종서한은 아-, 억-, 간간이 끊어지는 소리를 내며 전각을 쳐다보다, 뒤늦게 아차 하며 고개를 돌려 송백을 살폈다. 전각이 무너져내릴 정도의 전투라면 사형의 꼴도 만만치 않을 터. 건물 다음으로 사람을 살피다니. 이 무슨-.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그런데-.

“어째……, 멀쩡하십니다?”

송백은 흙먼지를 조금 뒤집어쓴 것 말고는 크게 다친 모습이 없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내상은요?”

“없다. 그보다 서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건 내가 묻고 싶구나.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송백의 질문에 종서한이 머리를 한 번 짚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내려가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곳에 온 놈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종서한의 질문에 송백의 시선이 전각을 향했다.

“…….”

시선을 따라 전각을 보던 종서한의 눈에 아연한 기색이 떠올랐다.

“……사형 짓이었습니까?”

“……그렇게 됐다.”

시선을 피하는 송백을 종서한이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송백의 옆으로 본 적 없는 아이가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

아니-, 본 적 없진 않은 것 같았다. 때마침 사제들에게 헛소리를 연달아 듣고 기분이 잔뜩 상한 금룡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었다.

“어, 어?!”

누가 봐도 진금룡과 똑같이 생긴 소년이었다. 어찌 보면 송백보다도 더 오래 금룡의 옆을 보필한 것이 종서한이었다. 그러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종서한은 눈앞의 아이가 누구인지를 확신했다.

“대사형에게 아들이 있었습니까?!”

“…….”

 

*

 

“큽. 크흡-.”

“아주 울지 그러느냐.”

단단히 열이 받은 금룡의 목소리엔 서늘한 살기가 감돌기까지 했다.

“아, 아닙, 흡-.”

어깨가 한참 동안이나 떨리고, 얼굴을 제대로 못 드는 꼴이 정말로 우는 꼴과 다름이 없었다. 더욱 열이 받는 건-,

“사형-! 잘못했습니다!”

“대사형, 용서해 주세요!”

문밖에서 사제들이 외치는 소리에 송백의 부들거림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에 비례하듯 금룡의 주변으로 공기가 점점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아갔다. 송백은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흠흠, 그래도 돌아올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까?”

애써 말을 돌리는 이송백을 한번 노려본 금룡이 눈을 감고선 지친 듯한 숨을 내쉬었다.

“아직 정확한 것이 아니다. 장로님들께서 한 번 더 확언을 내리실 때까지 함부로 판단 내리지 마라.”

“예.”

답하면서도 빙그레 웃는 얼굴이다. 하여간 저의 사제는 심사가 뒤틀리게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미소 짓고 있던 송백의 얼굴이 어느 순간 흐려졌다. 금룡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곤 가만히 기다렸다. 송백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내력을 써야만 다시 돌아오는 것일 줄은 몰랐습니다.”

“누가 알았겠느냐.”

“……오히려 제가 사형을 방해하고 있었던 거였구나 싶습니다.”

말하는 송백의 시선에 씁쓸함이 어렸다. 저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바닥을 향해있다. 금룡은 그런 꼴을 보다 속으로 혀를 찼다.

“장로님들께서도 내게 내력을 쓰지 말라고 하셨다. 내상을 입으면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다고.”

“…….”

“너는 장로님들도 내가 돌아오는 것을 방해했다고 할 셈이냐?”

“……아닙니다.”

“그래. 너 또한 마찬가지다. 모르고 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그렇게 말한 금룡이 피곤한지 고개를 벽에 기댔다. 제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미련 없이 눈을 감아버리는 모습을 송백이 가만히 주시했다. 일견 퉁명스럽고 차가운 언행이었으나-, 그가 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송백이 금룡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사형은 언제나 사형이었다. 그 모습이 어떻건. 이는 변하지 않을 터였다.

 

*

 

최근 종남에 큰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첫 번째로는 얼마 전에 감히 대종남파에 간 크게도 사파의 무리가 들어와 소란을 피운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전각 두 개가 전소되었고, 다른 전각 하나도 무너져내렸다. 그나마 사상자가 없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였다. 살아남은 놈들을 심문하여 알아낸 정황으론-, 종남이 봉문을 한 것에 원인이 있었다.

구파일방의 기둥 중 하나였던 만큼 문파의 세는 드넓고 컸다. 당연히 적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봉문을 하고 있으면서도 바깥이 혼란스러운 것은 파악하고 있었다. 구파일방이 통제력을 잃자 사파를 중심으로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했다. 정파에 속한 작은 문파들을 대상으로 공격하는 일이 빈번해져도, 구파는 큰 대응을 하지 못했다. 호북의 무당이 봉문하여 호북은 그야말로 무법천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바로 위에 있는 섬서에도 사파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엔 종남에도 원한을 가진 문파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여기에 더해 화산에 대패를 겪은 후, 봉문은 길게 진행 중인 종남이다보니 과거 종남의 저력이 폄하 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실 화산이 강한 것이 아니라 종남이 약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말에 현혹된 자들이 필두로 서서 밤중에 종남을 습격한 것이다. 무지의 발로였다.

사상자가 없기도 했고, 이 일에 대한 수습과 미래에 대한 결정은 장로들의 몫이었기 때문에 문도들은 빠르게 이 사건을 최근 겪은 일 중 기억에 남을만한 일로만 치부하고 넘어갔다. 무엇보다 문도들이 첫 번째 사건을 그리 크게 취급하지 않은 건 두 번째 사건이 더욱더 충격적인 탓이었다.

 

“사형.”

“사형-, 한 번만요.”

“어릴 때는 사형이 엄청 크게 느껴졌는데, 이렇게 보니 그리 크지는 않았네요. 우와. 신기합니다.”

종남은 봉문을 하며 더 이상 제자를 받지 않아, 삼대제자 중에서도 가장 어린 아이가 지학을 넘긴 상황이었다. 문도들은 딱히 어리다 하여 아이들에게 관심을 주는 편은 아니었지만, 사형이 어려진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지금 몇 살이신 겁니까?”

“열넷? 열다섯?”

“사형은 어릴 때부터 키가 크셨으니 어쩌면 열셋일지도 모릅니다. 그때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합니다.”

사제들에게 둘러싸인 진금룡의 머릿속에 참을 인(忍)이 수십 개 쌓여갔다.

원래대로 돌아갈 방법을 알았다고 해서 내력을 펑펑 써젖히고 돌아올 수 있는 것 아니었다. 사파가 쳐들어온 후로 사흘이 지나고서도 금룡은 몸을 정양하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 번에 무리를 할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입을 상처라고 몸에 연달아 상처를 내고 과다출혈로 죽는 것과 똑같은 이치였다.

그런 이유로 금룡은 아직까지 지학에 가까운 소년의 모습으로 사제들을 참아주고 있는 것이었다.

“사형-, 전에 그 말은 실수였다니까요.”

“진짜입니다. 사혀엉-.”

물론, 저를 제 아들 취급한 종서한들은 아직도 용서하지 않았다.

“저리 가서 수련들이나 똑바로 해라.”

평소대로 말해도 어려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녀석들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돌아만 간다면 호되게 굴려줄 각오를 다질 뿐이다. 금룡은 짜증스러운 시선을 돌리다 저 멀리서 저를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쳤다.

조금 뒤 사제들을 떨궈낸 금룡이 그에게 다가갔다.

“역시 네놈이 제일 짜증 난다.”

“또 왜 그러십니까.”

“말려야 할 놈이 그따위로 웃고만 있으니, 저놈들도 저리 풀어져서 그러는 것 아니냐.”

금룡의 말에 송백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요, 사형. 몇 년 동안 웃을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사형도 지금 참아주고 계신 거죠.”

“…….”

금룡의 눈이 삐딱하게 휘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송백의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 송백은 그 모습을 보며 솔직하신 건지, 솔직하지 못하신 건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돌아올 때까지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돌아가면 호되게 굴릴 생각 아니십니까?”

이 또한 맞는 말이다. 송백은 금룡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금룡은 그가 자신의 속을 다 읽어내는 것이 못마땅해 속으로 혀를 찼다. 빙글빙글 웃는 낯이 짜증스러웠다. 다시 원래대로만 돌아가면-. 아. 무언가를 생각해낸 금룡이 송백을 보곤 피식 웃었다.

“뭐, 너도 호되게 굴릴 생각이다.”

“봐주시지요.”

수련이라면 충분히 하고 있습니다. 하며 너스레를 놓는 송백의 앞으로 금룡이 한발 다가섰다. 송백이 의아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순간-, 탁, 멱살을 잡아챈 금룡이 속삭였다.

“내가 말한 것은 수련이나 비무가 아니다.”

“……예?”

“울 준비나 해둬라.”

예?

어벙하게 굳은 송백의 멱살을 놓은 금룡이 평소보다 기분 좋은 듯이 웃었다.

[외전]

산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은 점점 원래대로 돌아오는 금룡의 모습을 보며 익숙해져가는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일고여덟의 모습에서 지학으로 훅 성장했을 때와는 달리 그 성장 폭이 눈에 띠지 않았으나, 한 달 동안 꽤 키가 커 이젠 6자가 살짝 넘어갈 정도였다. 얼굴 또한 어린 티가 가시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딱 청년으로 보였다. 나이로 치자면 약관을 막 벗어난 듯했다.

그리고 몸이 받쳐주기 시작하자 그간 힘을 다해 휘두르지 못했던 검에 폭발적인 검기가 실렸다. 그러니 내도록 그늘이 드리워져있던 금룡의 얼굴에도 드디어 구름이 걷혔다.

다른 의미로는 몇 달간 화기애애했던 종남에 지옥이 도래했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

 

“컥-.”

날아드는 목검을 피하지 못하고 허리를 가격 당한 몸이 고꾸라졌다. 결국 숨을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털썩-, 쓰러지고 만다.

“……후.”

그와는 달리 가뿐한 숨을 한 번 내쉬며 목검을 갈무리하는 인영을, 종남의 제자들이 아연하게 바라봤다. 그의 주변으로 드러누운 사제의 수가 넷을 넘겼다.

“다음 나와라.”

그러고도 모자라 저리 다음 상대를 찾는다. 지금까지는 몸풀기였다는 듯이 그 얼굴이 일견 시원해 보이기까지 하자 그 모습을 보며 사제들이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숫제 괴물 아닙니까.”

“아무리 대사형이라고 해도……. 다 회복하지 못했는데…….”

“원래대로 회복하면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걸까요.”

어린 육체엔 부담이 되던 내력을 어느 정도 성장하면서 쭉쭉 뽑아 쓸 수 있게 되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원래의 몸만 못한 것이 당연했다. 그럼에도 금룡은 가뿐하게 사제 넷을 때려눕히고 다음을 외치고 있었다. 처음에야 여전히 회복하지 못한 사형을 상대하는 거라 생각하고 전력을 다하지 못했을 거라고 친대도 그 뒤는 아니었다.

빠악-!

그 사이 다섯 번째 희생자의 머리에 목검이 내리 꽂혔다. 머리를 부여잡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사제를 내려다보며 금룡이 눈을 찌푸렸다.

“그간 수련을 게을리한 거냐?”

그건 아니다. 반박하고 싶었으나 두들겨 맞은 입장에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여기서 수련을 게을리한 적 없다 반박하면 ‘그래? 그럼 너는 낫겠군. 나와보거라.’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눕게 될 확률이 높았다. 사제들은 어쩐지 서러움이 솟았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물론 그간 어려진 진금룡을 보며 귀찮게 굴긴 했다지만. 그래도 그건 어디까지나 호의에서 빚어진 호기심 어린 언행이었을 뿐-, 괴롭힐 의도는 하나도 없었다. 맹세코.

사제들은 또다시 다음 희생자를 찾아 눈을 빛내는 대사형을 보며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눈 마주치면 그다음은 나다.

간절함이 닿은 걸까? 시선 끝에 이 지옥을 끝내줄 구세주가 보였다.

“사형.”

그렇게 말하는 그는 늘 그렇듯이 단정하게 머리를 여민 긴 끈을 어깨 앞으로 내려뜨리고 있었다. 약관의 사형에게 다가서는 그의 걸음마다 끈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일견 서늘해 보이는 금룡의 얼굴 위로 미약하게 훈풍이 불었다.

“이송백.”

“의약당에 가실 시간입니다.”

송백의 말에 금룡의 얼굴에서 머물던 훈풍이 훅 지나갔다. 삽시에 겨울의 매서운 공기를 머금은 듯한 눈이 이송백을 흘겨보았다. 이제 막 몸이 풀리던 찰나에 방해가 들어오니 못마땅한 것이다.

원래 규칙적인 생활에 더 얽매이는 것은 이송백이 아닌 금룡이었다. 하물며 의약당주가 기다리고 있으니 더더욱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아는데도-. 역시 이대로 물러서긴 아쉬웠다. 금룡은 손에 쥐어진 목검을 꾹 쥐어 보였다.

“저를 마지막으로 하고 가시죠.”

금룡의 눈이 살짝 커졌다. 미련이 사라진 눈에 들어차는 것은 반색이었다.

“좋다.”

송백이 바닥에서 비척비척 일어서는 사제에게서 목검을 넘겨받았다. 그리곤 몸을 틀어 금룡을 마주 보는데, 그에게서 크게 티가 나진 않지만 신이 난 기색이 읽혔다. 그 모습에 송백이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비무를 중단 당해 미련이 뚝뚝 떨어지던 모습도, 기분 좋아진 지금의 모습도-. 어려진 모습 탓일까. 예전의 사형과 달리 풋풋하기 짝이 없어 귀여워 보였다. 사실 금룡의 지금 모습은 약관이 넘은 건장한 청년인지라 송백도 ‘귀엽다’ 생각한 것이 본인 스스로의 콩깍지나 다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저의 사형을 보며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는 것이다.

“사제 이송백이 사형께 비무를 청합니다.”

그 말을 듣는 눈에 묘한 충족감이 어린다.

어려진 이후 이송백이 저를 어린아이 취급한 것은 초반의 한순간뿐이었다. 한바탕 한 뒤론 어려지기 전과 다를 바 없이 평소와 같았으나, 금룡의 속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초조했고, 시시때때로 화가 났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 달이 되도록 여전히 원래의 몸을 회복하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최근엔 내력을 감당할 만한 수준이 되었으니 참고 있었던 것뿐이다. 그런 와중 아주 오랜만에 이송백과 속 편하게 비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어찌 기껍지 않을까.

이송백이 왼발을 앞으로 뻗어 자세를 낮추는 것을 보며, 금룡 또한 자세를 잡았다.

상단세.

곧 자리를 박차고 저에게로 달려드는 이송백을 보며 금룡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몸은 좀 어떠하냐.”

사파의 무리가 종남을 쳐들어온 사건 이후론 하루에 한 번은 찾는 의약당이었다. 별다른 점이 없는 것이 뻔하건만 제자를 아끼는 의약당주는 늘 그렇듯이 자상하게 몸이 괜찮은 지부터 물었다.

“어제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오늘은 사제들과 비무를 했는데도 무리함이 없는 것이, 이제는 육체가 내력을 감당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금룡의 말에 의약당주가 미소를 띠었다. 다행이구나. 이 또한 어제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한 번도 빈말인 적이 없었다. 금룡은 걱정을 받는 것이 곧 나약함이라 여겨 싫어했던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주변의 걱정을 유하게 받아들이는 얼굴 위로 온기가 돌았다.

“내력을 감당할 수 있다면, 이제는 거의 회복했다고 봐도 되겠다. 이전처럼 생활하는 것에도 무리는 없겠어.”

“그 말씀은…….”

“그동안 검에 매진하지 못했을 텐데-, 이제는 괜찮을 것 같구나.”

금룡의 눈에 드물게도 반짝임이 떠올랐다. 그를 눈치챈 의약당주는 ‘하지만’ 하며 조건을 덧붙였다.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다 싶으면 당장 수련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금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정말로 어리게 보여 의약당주가 웃었다.

“그리 좋으냐.”

“아무래도 그간 너무 답답했으니까요.”

“허허, 녀석-. 이리 보니 모습뿐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어려진 모양이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두 달을 답답하게 보낸 제자를 이해 못 할 바도 아니었기에 의약당주는 금룡을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내력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탕약을 내밀자 금룡이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씁쓸한 약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작은 그릇을 비우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릇을 내려놓자 의약당주가 입을 열어 물었다.

“내력이 감당되기 시작했으니 회복이 좀 더 빨라질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느냐.”

금룡은 잠시 눈을 감고 내력을 느껴보았다.

“확신할 순 없지만-, 그릇이 넓어지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이전엔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려지고 나선 한동안 그릇이 강제로 고정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내력을 폭발적으로 사용해 그 그릇을 깨부수고 넓혔다면-, 지금은 그릇이 내력을 감당하기 위해 자연스레 넓어지고 있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 그렇다면 정말로 회복이 빠르겠구나. 다행이야.”

걱정 없이 미소 짓는 장로의 얼굴이 매우 오랜만이었다. 금룡 또한 편안하게 마주 미소를 지었다.

 

*

 

의약당을 나선 금룡이 눈을 찌푸렸다. 항상 제가 나오길 기다리던 이가 보이질 않은 탓이다. 어딜 간 거지? 의아해하는 찰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쭈뼛거리며 사질 하나가 다가왔다.

“사숙을 뵙습니다.”

예의 바른 인사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며 금룡은 여전히도 사라진 인영을 쫓아 시선으로 두어 번 주변을 훑었다.

“저-, 이송백 사숙은 객청으로 갔습니다.”

그제야 금룡의 시선이 사질에게 닿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사숙께서 나오시면 객청에 들렀다 숙소로 향하겠다 전해달라 했거든요. 이각 전이었습니다.”

객청? 봉문을 한 종남에 손님이 온 것은 아닐 테고-. 사질에게 더 말해보라는 듯 가만히 쳐다봤으나, 사질은 그저 그게 다라는 것처럼 눈만 깜박였다. 결국 금룡은 알았다 답하며 사질에게 가보라고 했다.

“객청…….”

생각하던 금룡의 눈이 무언가를 떠올리곤 살짝 찌푸려졌다. 저와 이송백이 머물다 습격을 받아 무너뜨리고 만 곳. 보수도 아니고 아예 건물을 새로 지어 올려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빈터에 가까운 곳이었지만. 지금으로선 이송백이 객청에 향할 이유론 그것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의약당 앞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금룡이 걸음을 옮긴 것은 객청이 있는 방향이었다.

 

*

 

너른 터엔 이층의 멋들어진 전각 대신 바닥의 석재와 기둥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너져내렸던 잔해는 이미 치워 보이지 않았지만, 골조만 남긴 휑한 터를 보고 있자니 씁쓸하긴 매한가지였다.

석재와 기둥 위치를 가늠하며 걸음을 옮기던 송백은 어느 한곳에서 멈춰 섰다. 바로 여기-, 이 자리였다. 자신이 검기를 발출해 전각을 무너뜨린 곳이. 송백은 잠시 그곳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사형과 저에게로 주저앉았을 천장이 있던 곳을. 그를 올려다보는 송백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때 일어난 일로 인해 사형이 원래대로 돌아올 방법을 찾은 것은 맞지만-, 도저히 그때의 일을 실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형이 아니었다면 필시 죽었을 것이고, 그가 어려진 문제의 해결법과 우연하게 일치하지 않았다면 그 피해는 진금룡이 오롯하게 전부 떠안았을 것이다.

―그래. 자신이 아닌 사형이.

좁은 실내에서 검기를 써댄 것부터가 생각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송백이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한 탓이다. 이곳에 와서 자책하는 것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간에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고, 같은 실수가 없도록 나아가는 것이 옳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사형의 목숨이 걸렸던 그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점령해 계속해서 실수를 되새기게 만들었다.

떨어지지 않는 자책을 겨우겨우 밀어낸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한숨을 흩어내듯 내쉬고서야 송백이 고개를 틀었다. 걸음을 옮기는데-, 문득 저쯤에 탁자가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며 돌아가려던 발이 서서히 멈추었다. 한 번 의식의 흐름을 타니, 어려진 사형이 의자에 앉아있던 것도 떠올랐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꽤 깊게 각인된 기억이었다. 하루하루 불안하고 걱정스러웠지만, 돌이켜보니 평화롭기도 했던 것 같았다.

푸스스 미소가 새려는 순간-,

‘그리고 빌어먹을 네놈의 정인이기도 하지!’

벼락같이 귓가를 때렸던 음성이 생생하게 기억을 울렸다.

아-.

부지불식간에 떠오른 목소리가 얼굴을 홧홧하게 데웠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지만, 누가 보기라도 할까 송백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날 밤 이후 사형의 발언에 대해선 부러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겉모습에 연연해하지 않으려 해도, 어린 모습에 대고 진지하게 우리의 관계에 대해 말을 나누기는 어려웠으니까. 쓰레기가 된 기분이 들 테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점점 자라서 키가 크고 어린 모습이 사라져, 원래 알고 있던 사형의 모습을 찾아가는 그를 보면 곤혹스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정인이라니.”

그의 사형이 지학의 모습에서 현재 약관 정도의 모습을 찾기까지 한 달여가 걸렸다. 쓸 수 있는 내력이 많아지면서는 성장이 조금씩 더 빨라지는 듯했지만. 그렇다 해도 남은 회복엔 시간이 조금 더 걸리지 않을까? 최소 한 달만이라도. 유예기간을 어떻게든 늘리고 싶었다.

그의 마음이 사형을 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인. 처음엔 얼떨떨했으나, 곱씹을수록 사형이 저를 그리 생각한다는 것이 기뻤다.

하지만-.

점점 사형이 제 모습을 찾아갈수록, 이전에 닫아둔 채 그 마음을 부러 들여다보지 않으려 한 이유를 새삼스럽게 깨닫고 만 것이 문제였다.

대종남파를 이끌 장문기재.

금룡의 겉모습이 지학을 넘기고 몸의 회복 속도가 빨라지자, 그는 그간 거두어졌던 업무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종남을 대표하는 이로써 반듯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는 그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위치가 원래 어디인지 자각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짓눌러왔다.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형제지간-, 그것도 남남.

세간의 눈이 그를 어찌 볼지 두려웠다. 그것들을 견디는 것이 자신이라면 괜찮았다. 하지만 그 시선이 향할 대상은 자신이 아닌 사형이었다. 이는 무너진 지붕을 뚫고 빠져나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송백은 사형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들었다. 사형이 완전히 제 모습을 찾기 전까지 답을 내야겠다 여기며.

 

*

 

“이송백.”

걸음이 객청에서 얼마 멀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앞에서 기다리는 인형(人形)이 보였다. 송백의 걸음이 빨라졌다.

“사형?”

왜 여기에 계시지? 객청에 들러 숙소로 돌아간다고 전해달라 했기에 당연히 사형이 숙소로 향했을 거라 여겼다. 송백의 얼굴에 의아함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금룡을 마주친 것에 대한 약간의 반가움이 떠올랐다.

“너…….”

무어라 말하려던 금룡이 그 반가운 기색을 읽고 허물어졌다.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못마땅한 듯-, 탐탁지 않은 듯-. 찌푸려진 얼굴이 이내 한숨을 내쉬곤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여긴 왜 온 것이냐.”

“아-.”

송백이 자신이 걸어왔던 곳을 잠시 돌아보며 귀밑의 여린 살을 긁적였다. 그 행동에 난감한 기색이 묻어났다.

“오늘부터 공사가 시작된다고 해서요.”

금룡의 눈썹이 한 번 까닥였다. 그래서? 딱 그렇게 묻는 듯했다.

“제가 무너뜨린 곳이니까요. 완전히 무시할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나와 같이 갔어야지.”

“예?”

“지붕은 내가 박살 냈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렇긴 했다. 하지만 애초에 자신이 검기를 쓰지 않았다면, 사형이 지붕을 박살 낼 이유가 있었을까? 잠시 멈칫했던 송백이 어두워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형. 그건 제가 실내에서 검기를 휘두른 탓이 아닙니까? 사형은 아무런-,”

“헛소리 할 생각이거든 다물어라. 네가 검기를 썼기에 객청이 무너진 것은 맞지만, 그렇게 따진다면 그놈들에게 빈틈을 보인 나에게 먼저 잘못이 있겠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었을 겁니다. 제가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한 게 문제입니다.”

금룡의 눈이 구겨졌다. 왜 저리도 쓸데없는 고집을 포기하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나, 이것은 분명 선을 넘어선 자책이었다.

“이송백. 그때의 일은 끝났어. 지나간 일에 연연해하지 마라.”

“어떻게 그럽니까?”

“이-,”

“제가 저지른 일에 사형이 크게 다칠 뻔했습니다!”

소리치는 말에 금룡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송백의 말에 구깃하게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에 깔리지 않은 것도-, 무리하게 내력을 운용하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운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아 사형의 문제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지만, 처음부터 운에 기대지 않고, 자력으로 해결이 가능했더라면-!”

“이송백!”

금룡이 소리쳐 부르고 나서야 쏟아져 나오던 말이 멎었다. 허억-, 허억-. 어느 순간부터 거칠어져있던 숨이 차가운 공기 중에 연기처럼 흩뿌려졌다. 그 모습을 노려보듯 빤히 보던 금룡이 입을 열었다.

“나는 멀쩡해.”

단 한마디였다.

송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에 힘이 풀리고 짙은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금룡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송백에게 향했다. 뻗어진 손이 송백의 눈가에 찍힌 흉터를 문질렀다. 물기는 묻어나지 않았다.

“네가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지키는 거다. 감히 거꾸로 하려들 생각 마라.”

“하지만-,”

“그놈의 하지만.”

듣기 싫군. 중얼거린 입이 송백의 입술을 덮었다. 갑작스럽게 말을 먹어버린 접문에 송백이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기색이 여실했으나, 금룡은 무시하며 송백의 머리를 붙잡아 제 쪽으로 기울게 했다. 뒷목을 누르는 손길에 송백이 움찔 몸을 굳혔다. 금룡은 끔벅거리는 눈을 똑바로 마주 보다 눈을 감고는 여유롭게 안에 든 혀를 탐해갔다. 이송백의 몸에서 긴장이 풀려 접문에 익숙해질 때까지 아주 길게-.

눈꺼풀 위로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지고서도 몇 번 더 혀를 훑고 입천장을 긁어올린 후에야 금룡은 입술을 뗐다. 송백의 호흡이 아까완 다른 열을 품은 채 거칠게 드나들고 있었다. 금룡은 만족스런 미소를 띠곤 침으로 범벅된 송백의 입술을 엄지로 쓸었다.

“사, 사형-.”

“또 헛소리를 해보아라.”

짓궂은 눈이 송백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내포된 의미를 읽은 송백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손등으로 입술을 가리며 뒤로 물러선 송백이 억울한 듯, 분한 듯 불만 어린 어조로 말했다.

“이건-, 치사합니다.”

“흥, 정정당당한 건 어떤 건지 모르겠군.”

그러며 금룡은 송백이 물러선 만큼 다가가선, 입을 가린 손을 쥐어 밑으로 내렸다. 동시에 도톰한 입술 위에 쪽 소리를 기어이 다시 남겼다. 떨어진 얼굴은 매우 뻔뻔한 낯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사형에게서 이런 면을 볼 거라 생각한 적 없던 송백으로선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 그만하십시오.”

곤혹스러운 기색을 띤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금룡은 자신의 취향이 퍽 나쁘단 생각이 들었다. 발갛게 물든 눈가며, 일그러진 눈썹이 마음에 들었다. 노상 담담하고 차분하기만 하던 사제가 제 앞에서만 어리숙하게 구는 것이 좋았다. 금룡은 송백의 뺨 위로 손을 올린 채 이곳저곳을 엄지로 쓸었다. 당황하면서도 제 손을 감히 치워내지 못하는 것도 꽤나 흡족했다.

“사형-. 제발.”

아-.

무의식적으로 터져 나온 소리인 것이 분명한데도, 귓가에 또렷하게 파고든 애원에 금룡의 손이 멈췄다.

“…….”

“왜 그러십니까?”

멈춰버린 손처럼-, 미소가 사라진 채 굳어버린 얼굴을 송백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전혀 모르는 자의 낯이었다.

“너는-.”

말하려던 금룡이 마른 세수를 하듯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덮곤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됐다. 내려가자.”

돌아선 걸음이 잠시 흐트러졌지만, 곧바로 다시 평소의 호흡으로 돌아왔다. 송백은 아주 잠시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가 금룡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입술 위에 남은 감각이 괜히 신경이 쓰여 아랫입술을 한 번 잘근거렸다. 귓가가 어쩐지 홧홧했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열을 식혀주기만을 바라며 발을 움직였다.

 

*

 

“이송백.”

숙소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사형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걸음을 금룡이 불러 세웠다. 송백이 고개를 돌려 돌아보자, 금룡이 답지 않게 시선을 다른 곳에 두고선 두어 번 입을 달싹였다. 어딘지 머뭇거리는 기색이 가득해 보여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송백은 걱정이 들었다. 숙소까지 오는 내내 조용하던 그의 얼굴이 생각해 보니 무언가 불편했던 것도 같았다.

“사형? 무슨 일이 있-,”

“자고 가지 않겠느-, 뭐?”

“예?”

서로 동시에 말하며 말이 충돌했다. 제대로 듣지 못한 말에 송백이 눈을 끔벅였고, 금룡은 짜증과 허탈함 사이를 헤매는 눈으로 허공을 한 번 보았다.

금룡이 입을 꾹 다물자, 송백은 의아한 눈을 한 번 굴리며 자신이 들었던 말을 어떻게든 기억해 보려 했다.

자고 가라고 권하신 건가……?

기억을 옳게 되짚었음에도 그럴 리가-, 하는 생각이 불쑥 파고들었다. 설마. 이게 다 아까 헛된 생각을 한 탓이다. 송백은 속으로 허한 웃음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이송백, 자고 가지 않겠느냐?”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송백이 눈을 크게 뜨고 사형을 바라봤다. 미묘하게 구겨진 눈이 시선을 제대로 맞추질 못하고 있었다. 마치 부끄러운 말을 흘렸다는 듯이.

“…….”

“…….”

말의 의미를 뒤늦게 이해한 송백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으……. 절로 앓는 소리가 흘렀다. 송백의 반응을 본 금룡이 슬쩍 송백의 팔뚝을 쥐었다. 그러며 약하게 힘을 줘 제 쪽으로 당기려 했다. 하지만-.

“사형, 안됩니다.”

달아오른 얼굴로 이송백이 단호한 음성으로 거절의 뜻을 내비쳤다. 그도 모자라 금룡의 손아귀에서도 제 몸을 쑥 빼내는 것이 아닌가?

금룡이 당황해서 “……뭐?” 하고 중얼거리자, 송백이 그새 자세를 바로 하며 답했다.

“아직 몸도 다 회복되지 않으셨잖습니까.”

“……오늘 의약당주께서 이전과 동일한 생활을 해도 괜찮다고 하셨다.”

“정말입니까?”

송백이 파안했다. 환하게 미소짓는 얼굴을 보며 금룡은 그리도 좋은가 싶었다. 하긴 자신이 어려진 이후로 이송백이 심적으로 부담을 같이 나눠지긴 했다. 이해를 못 할 바도 아닌 데다, 그만큼 저를 걱정한 것이 내심 기분이 좋아 금룡이 조금 풀어진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안 하던 짓을 하려니 조금 민망하긴 하나, 슬쩍 송백이 물러난 만큼 한 발자국을 내디디며 송백의 허리춤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였다.

“하지만 그래도 안됩니다.”

미소가 사라졌다. 뭐?

“아무리 사형이 사형이라지만, 지금 사형은……, 너무 어립니다.”

“……뭐?”

“사제들이 저한테 쓰레기라고 불렀던 게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러니-, 사형. 완전히 돌아오면……, 그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게 무슨 개소리지? 이게 다시 생각할 일인가? 금룡이 멍청하게 굳어버린 사이 송백이 그럼 가보겠습니다. 하며 순식간에 멀어져 버렸다. 잡을 새도 없었지만, 잡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못했다. 너무도 어이가 없었으므로.

“……하?”

송백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금룡이 어이없는 소릴 내는가 싶더니, 곧 분노 섞인 숨으로 바뀌며 “하!” 하며 크게 내쉬는 소리가 회랑을 쩌렁쩌렁하니 울렸다.

금룡은 아주 오랜만에 이마에 핏대가 서는 경험을 하며, 서늘한 눈에 오기를 띄웠다.

이송백……, 그렇게 나오시겠다?

 

*

 

아무렇지 않게 차분한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온 송백은 그제야 두방망이질을 치는 심장을 붙들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사형이 저렇게 저돌적으로 나오실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것도 저리 어린 모습으로-. 머리가 어질거렸다.

기실 금룡은 약관이 막 넘은 모습으로 청초하기 짝이 없었다. 자고 가지 않겠느냐 물었을 때 정신을 다잡고 있지 못했다면 그대로 그의 말에 알았노라 고개를 끄덕일 뻔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보다 어린 모습의 사형은 너무도 과했다. 사형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기 전에 그와의 관계에 대해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보려던 계획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고 있었다.

송백은 마른 세수를 하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얼굴에 얼마나 열이 올랐던지 눈에 닿는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두어 번의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빠르게 뛰는 심장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하지만 완전히 가라앉기 전-, 문 뒤로 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함이란 얼마나 위험한지. 방금 전 사형과 그런 일을 겪고, 조심해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 익숙함이 사형의 것이라는 걸 느낀 몸은 무방비하게도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문을 먼저 두드리며 들어가겠다 기별하는 평소와 달리-, 벌컥 소리를 내며 열린 문으로 금룡이 들이닥쳤다.

“사, 사형?”

여전히 심장이 진정되지 않은 상황에 사형을 마주하니 얕게 가라앉았던 맥박 소리가 온몸을 널뛰듯 울어댔다.

“그, 방에 들어가신 게 아니었-.”

“이송백.”

나직하고 서늘하게 깔린 목소리에 송백이 말을 멈추었다. 사형이 아직 이전의 키를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한 터라 자연스럽게 시선이 약간 아래를 향했는데, 문득 자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그렇지 않아도 복잡하던 심정에 착잡함까지 더해졌다. 순간적으로 눈을 치켜뜬 사형을 보며 귀여우시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송백은 스스로의 생각에 위기감을 느끼곤 뒤로 한 발을 물러섰다. 그로 인해 금룡의 분노에 불이 더욱 붙는다는 건 전혀 알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담은 눈이 한차례 떨리더니 이가 절로 악물렸다. 금룡은 오기로 점철된 손을 뻗어 이송백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송백은 갑작스럽게 훅하고 당기는 힘에, 어? 하고 멍청한 소리를 흘리며 사형의 손에 따라 상체를 숙여야만 했다. 접문의 기억과 위기감을 느끼곤 잔뜩 긴장해 있던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탁-, 작은 소리를 울렸다.

“…….”

“…….”

“이송백-.”

송백의 손으로 막힌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이를 가는 음성이 뭉개져 샜다. 이젠 금룡의 눈이 흡사 저를 향해 살기를 틔울 것만 같았으나, 송백으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와는 달리 여전히 손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손을 잠시 내려다본 짙은 눈썹이 한 번 휘었다.

“손 당장 치워라.”

“사형. 잠시만요. 그, 일단 떨어져서-.”

당황스러운 상황에 말이 더듬더듬 나갔다.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가 않으니 이 상황을 모면한 그 어떤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떨어질 필요가 있나?”

“예?”

“널 안을 건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고야 말겠다, 의지를 불태우는 눈에 송백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안는다는 말만 아니었더라면, 금룡이 송백을 죽이려고 멱살을 잡은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작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금룡도, 송백도-, 둘 중 그 누구도 그에 대해선 생각지 않고 있었다. 하나는 오기로, 하나는 혼란으로. 둘 다 이성이 날아간 탓이었다.

“그러니 얌전히-.”

손 내려라. 말하려는 순간 송백이 멱살을 쥔 손을 풀어내는가 싶더니 훌쩍 뒤로 물러서서 거리를 벌렸다. 허망하게 멀어지는 송백을 보며 금룡이 멍하니 제 손을 보다, 주먹을 꾹 쥐었다.

“이송백, 너 진짜-.”

탁-! 바닥을 강하게 밟으며 제 앞으로 성큼 다가오는 사형을 보며, 송백은 다급함에 머리가 정지하는 것을 느꼈다. 어찌해야-, 엉망진창으로 꼬인 머리로는 더 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송백은 급한 대로 냅다 입을 열었다.

“제가, 제가 싫습니다!”

흐트러진 호흡 사이로 정적이 흘렀다.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

분노조차 가신 얼굴로 저를 멍하니 쳐다보고 선 금룡을 보며, 송백은 자신이 크게 실수를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형.”

아차 싶은 마음에 그를 불렀으나,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싫다고…….”

그렇게 한 번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어라고 할까.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송백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 채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런 그의 귓가로 사형의 낯선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왜지?”

방금 전까지 가득 담고 있던 오기와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차갑고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그런 투였다.

“왜 싫은 거지?”

한 번 더 들렸을 땐-, 그 차가운 살얼음 같은 음성이 잘게 떨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금이 간 것처럼. 불안을 담고서. 송백은 무어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굳어버린 입을 간신히 움직였다.

“사형-, 저는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어쭙잖은 변명에 금룡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기가 막히다는 듯 웃어버렸으면 나았을 터였다.

“지금은? 그럼 내가 완전히 회복을 하면 동침에 응할 것이냐?”

하지만 그는 그저 확인하듯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되묻기만 했다. 송백이 답하지 못할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답하기엔 진실로 그러하질 않았기 때문이다.

사형이 좋았으며, 그와의 동침 또한 좋았다. 고통스럽고 한켠으론 수치스러울 수 있는 행위를 견뎌내는 것이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모든 순간이 저의 사형인 진금룡과 닿아있었기에. 허나-. 그럼에도 ‘그러겠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답하지 못하고 꾹 다물리는 입술을 담아낸 금룡의 눈이 아까보다도 더욱 가라앉았다.

“이송백.”

부르는 소리에 이송백의 시선이 머뭇머뭇 금룡을 향했다. 그렇게 얽힌 시선을 금룡의 눈이 진득하게 잡아챈다.

“진짜 이유를 말해.”

“……사형.”

“나를 좋아하고 있지 않느냐.”

그런 것쯤은 이송백의 시선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저를 향해 한없이 조심스럽고 다정함을 띠고 반짝였다. 그것은 소중한 것을 대하는 시선인지라-, 보고 있기만 하여도 절로 뒷목이 간질거릴 종류의 것이었다. 지금도 이송백은 그와 같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니-, 단언컨대 금룡은 저의 사제가 여전히 저를 좋아하고 있다 자신할 수 있었다.

“네가 망설이는 이유를 말해, 이송백.”

사형의 오만하고 뻔뻔한 선언과도 같은 발언 뒤에 이어지는 저를 향한 인내와 다정에 송백은 기어이 무너지고야 말았다. 마음 한자락 감추는 것조차 사형 앞에선 쉽지가 않았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송백은 내도록 열지 못했던 입을 간신히 움직였다.

“사형. 저는 사형이 저로 인해 무너지는 것이 싫습니다.”

그토록이나 어려웠던 말은-, 생각보다는 담담하게 흘러나갔다.

“그간 저는 한 번도 사형과 저의 관계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정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형과 여러 차례 닿았다고 하더라도, 그저-, 사형이 저의 사형이고, 저는 사제이면 된다고……. 그렇게 여겼어요. 그렇기에 사형께서 제게 정인이라고 하셨을 땐, 기뻤지만 당황스럽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정인이라고 소리쳤던 사형에게 전하기엔 미안한 말이었으나, 그럼에도 송백은 그 어떤 변명도 없이 꼭꼭 감아둔 터럭 같은 속마음을 사실대로 풀어냈다.

금룡은 그런 송백을 잠시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넌 욕심이 없는 건지, 많은 건지 모르겠군.”

“많은 겁니다. 그리고 그만큼 비겁하죠.”

“네가 비겁하다고?”

이만큼 이송백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금룡을 보며 송백이 씁쓸하게 웃었다.

“사형. 사형은 멀쩡하다고 하셨지만, 그날의 저는 사형을 한 번 잃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요. 얼마나 제가 무서워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고휘가 나타나 자신을 부르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었다. 사형의 무사함을 깨달았을 땐 원시천존에 대한 감사를 표하며 안도했으나, 이따금 그 순간이 밤잠에 찾아들어 다시 되풀이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이송백은 짓눌린 숨을 내뱉지도 들이마시지도 못하고 죽어가다-, 겨우 눈을 뜨는 것이다.

“저는요-. 사형. 저로 인해 사형이 다치거나 무너지는 것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겁한 것이다. 그와 이따금 몸을 섞고, 더 가끔은 다정한 목소리로 저를 불러주는 안온함에 취해 벗어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저는 정말 비겁한 사람입니다. 하는 송백의 입가가 쓰게 떨렸다.

“이송백.”

잠시의 간극을 둔 사형의 목소리가 방을 낮게 채웠다.

“너는 무인이지.”

갑작스런 말에 송백이 눈을 한 번 깜박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무인은 언제고 죽을 각오를 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었느냐.”

“……아니오. 잊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만큼만 걱정하도록 해라. 언젠가 내가 눈먼 너의 칼에 찔려죽는다고 해도-, 무인인 이상 그만한 각오도 없겠느냐.”

“사형. 그것과 이것은-,”

“다르지. 하지만-, 나는 쉽게 죽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 어떤 일에도. 특히 너에게는 더더욱. 그러니 쓸데없는 것보단 다른 것을 걱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 송백의 심마를 단순하게 압축한 말이었다. 허나-. 금룡이 가진 특유의 오만한 성정 때문이었을까? 송백은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또 뭐라고 했었지? 내가 무너질까 무섭다고 했었나?”

하-, 기도 안 차는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짜증이 담겼다.

“이송백, 아무리 네놈이라도 그 말은 못 참아주겠구나. 말했을 텐데. 내가 어려졌다고 해도 대종남파를 이끌 장문인이 될 사람이라고. 그리고 네 사형이기도 하다고.”

“사형이 사형이기에-, 장문인이 될 사람이기에 더욱이 위험한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의 관계에 대해 좋지 못한 시선이 따라붙을 겁니다.”

그 말에 금룡이 못마땅한 눈썹을 한 번 휘더니 송백에게 한 발자국을 다가섰다. 하얗고 고운 손이 슥 뻗어올라와 송백의 턱을 쥐었다. 그리곤 제 얼굴 앞으로 훅 내려당겼다.

“이송백. 건방지게 누굴 걱정하는 거지? 좋지 못한 시선? 얼마든지 그러라고 해라. 뒤에서 도는 말 따위야 관심 없다. 오히려 앞에서 지껄여주면 고맙겠군. 본보기로 박살을 내주면 될 테니.”

“사형을 어떤 식으로든 흠집 내려 할 텐데도요.”

걱정 어린 말에 금룡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미 더한 일도 겪었는데 겨우 그깟 흠집이 무어 대수라고.”

그렇게 말한 금룡이 이송백의 턱을 더욱 당겨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물어오는 자극에 송백이 입을 벌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컹한 덩어리가 입안을 침범했다. 천천히 벌어지는 입안을 재촉하듯 턱을 쥔 손에 약하게 악력이 더해졌다. 송백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려주었다. 곳곳을 훑어가는 혀에 제 혀를 얽었다.

평소보다 조금 낮아진 시선임에도 송백을 진득하게 올려다보는 눈은 무척이나 강렬했다. 송백은 내려다보는 것이 저임에도, 사형이 저보다 우위에 있다고 느꼈다.

그의 눈엔 자신이 선택한 일에 대해서 그 어떤 후회도 하지 않을 오만무도함이 엿보였다. 그런 눈이 꿰뚫듯이-, 전부 집어삼켜버릴 듯이 올곧게 자신만을 향한다. 송백은 그제서야 자신이 그간 걱정했던 것이 덧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형은 감히 제가 걱정을 할 대상이 아니었다. 정말로 사형의 말처럼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입술이 잠시 떨어져 나가고-, 금룡이 콩 하니 이마와 이마를 부딪쳐왔다. 매우 가까이 자리한 시선이 송백을 책하듯 흘겨보았다.

“이송백. 너는 네 일에 대해선 단순하게 생각하고 밀고 나가는 주제에, 이럴 땐 이해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구는구나.”

“사형이야말로……, 정말이지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길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배짱도 크군.”

넌 절대 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리 덧붙이는 사형의 말에 송백이 그제야 힘을 빼곤 웃어 보였다.

“예, 정말 못 이기겠습니다.”

눈을 감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중얼거리자, 금룡이 언제나와 같이 흥, 하여 코웃음을 흘렸다.

“그것 봐라. 너는 언제고 내게 질 수밖에 없다.”

재차 닿아오는 입술 새로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 이어지는 외전은 성인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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