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귀환] 화산에서 제일 좋아하는 사람

2022. 10. 10 청명이의 생일을 축하하며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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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귀환 1210화까지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청명이의 생일을 기념하며… 가볍게 쓴 단문인데 생일의 ㅅ도 안 나옵니다. 퇴고X

"학아, 화산에서 누가 제일 좋니?"

소소가 학이의 머리를 빗겨주며 물었다. 목검의 끝으로 그림 그리듯 연무장 근처 흙바닥을 그어대던 학이가 냉큼 고개를 들고는 웃으며 외쳤다. 그 해맑은 웃음에 보는 이들 모두가 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그 입에서 나온 이름만 아니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저는 청명 도장님이 제일 좋아요!"

"……응?"

그 말에 소소를 비롯해 근처에 있던 모든 제자가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조용할 틈이 없던 소란스러운 화산에 잠시간 침묵이 찾아왔다.

"……사형."

"……왜."

"제 대가리 좀 깨보십쇼. 아무래도 제 귀인지 머리인지가 맛이 간 것 같아서…."

"……내가 할 말이다. 네가 먼저 내 대가리 좀 깨봐라."

멈출 줄 모르는 침묵 속에서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학이만 신나서 넋이 나간 이들이 제대로 듣지도 못할 이야기를 조잘대며 다시 흙바닥을 북북 긁어댔다. 흙바닥에 조금씩 일그러진 꽃이 새겨지고 있었다.


비상이었다.

화산의 제일 성질머리 더러운 녀석이 화산의 제일 어린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그 수습을 하느라 모일 일이 없었건만, 겨우 숨통이 트였다 싶을 때 청명 때문에 그들이 다시 한데 모이게 된 것이다.

"……얼굴일까? 청명이 그 녀석,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나름 잘생긴 편이고."

"무슨 소리예요, 사형. 그랬다면 청명 사형이 아니라 백천 사숙을 제일 좋아했겠죠."

소소가 조걸에게 타박을 놓았으나 묵묵히 고민하던 백천이 입술을 꾹 다문 채 좁혀진 미간을 꾹꾹 눌러 폈다. 거기서 내가 왜 나오냐, 이것들아……. 잠깐 생각하던 백천이 청명의 장점을 겨우겨우 쥐어짜내며 생각하다가 툭 내뱉었다.

“그럼 무위인가……?”

“그런데 청명이가 학이 앞에서는 검을 안 꺼내지 않습니까? 전에 학이를 못 보고 학이 앞에서 진검으로 비무하던 사제들을 청명이가 냅다 걷어차 날려버리던데요. 애 앞에서 무슨 짓이냐고.”

“그 주먹으로도 천하를 이겨 먹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그건 그거대로 문제긴 하다. 한숨을 푹 내쉰 소소가 조심스레 내뱉었다.

“혹시, 목숨을 구해준 사람을 기억하는 건 아닐까요?”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때 학이는 완전 갓난아기였으니까.”

항주에서 마교가 나타났을 때, 항주의 유이한 생존자 중 한 명이 학이였다. 다른 생존자인 학이의 어머니인 추영秋榮은 현재 화산의 숙수로 일하고 있었고, 그런 어머니를 따라 학이도 자연스레 화산에서 자라게 되었다. 그런 둘을 구해낸 사람은 당시 항주로 떠난 천우맹의 열 명이었다. 그중 제일 먼저 그들에게 손이 닿은 이는 청명이었고. 그때를 기억한다면 청명을 은인으로 생각할 수야 있겠지만, 항주마화 당시의 학이는 만에 하나라도, 라는 가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도 너무 어렸다.

“다정해.”

이설이 내뱉자 주변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었다.

“어린아이들은 봐줘. 학이, 지금 화산에서 제일 어려. 나이가 청명 다음.”

“그거야 그렇긴 한데….”

청명의 다정함이야 화산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다. 물론 워낙 불같은 성질과 짧은 인내심에 말투가 상당히 거칠고 요란해서 그렇지, 그는 언제나 제 사람들에게만큼은 진심으로 대했다.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어린아이들에게 약하고 다정한 청명이지 않나. 그 지옥같던 곳에서 제 손으로 구해낸 아이니 만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이야기가 나왔으나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다 싶었는지 백천이 몸을 일으켰다. 학이와 보낸 시간이 있는지부터 그 당사자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청명은 한밤중에 갑자기 제 처소에 몰려온 이들에 잠깐 당황했으나 이내 최근에 잘못한 일이 없다는 것을 기억했다. 사숙이 먼저 이야기하십쇼. 사숙이 오자고 하셨잖습니까. 백천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던 청명의 눈이 점차 가늘어졌다.

“아니, 학이가 날 제일 좋아한다고 한 게 뭐가 문제인데?”

“너를 제일 좋아한다고 하니까 문제지, 인마! 애가 네 성질머리 닮으면 어떡하려고!”

“미쳤냐, 사형?”

청명이 조걸을 뻥 걷어찼다. 저놈은 얻어맞을 걸 알면서도 꼭 주둥이를 놀리다가 한 대 더 맞는다. 날아간 조걸이 맞은 곳을 부여잡으며 다시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나서 윤종이 말했다.

"혹시 학이와 같이 있었던 적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먼저일 것 같아서."

못마땅하다는 듯 청명이 오검을 쳐다보다가 대뜸 물었다.

“사숙. 전쟁 끝나고 뭐 했어?”

“나? 뒷수습하고 장문인께 일을 배우고, 수련하고….”

백천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행적을 곱씹었다. 백천 또한 전쟁에서 부상을 면치 못했기에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의약당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다 낫고 나서는 태상 장문인 현종과 장문인 운암의 지도하에 업무를 나누었고, 몸이 굳지 않게 틈이 날 때마다 수련으로 잊힐 뻔한 감각을 깨웠다.

“사고는?”

“사형과 마찬가지. 수습 돕고 수련.”

“사형들도 사숙들이랑 전쟁 뒷수습 도왔지? 소소도 계속 의약당에 드나들었고.”

윤종과 조걸, 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나고 부상자들이 완전히 다 나을 때까지 의약당의 불이 꺼지는 날이 없었다. 교대로 문파의 환자들을 살폈고, 주기적으로 마을의 의원들과 함께 피난민들의 치료도 도왔다. 특히 당가의 의술을 대부분 전수받아 입문 초기부터 의약당에 큰 도움을 주었던 소소가 갈려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그동안 애는 어땠겠어? 화산의 대부분이 바쁘고, 추 부인도 바쁘신데.”

청명이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제야 오검은 청명의 전쟁 이후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옛날부터 화산의 대소사에 모두 관여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화산의 막내다. 전쟁 끝에 큰 부상으로 긴 휴식을 취해야 했고, 다 나은 이후에 재경각과 의약당 모두 잠깐 들려 일의 진행을 확인하기만 했다. 처음에야 청명은 스스로를 갈아 넣으며 모든 일에 관여하려 했지만, 이제는 더 그러지 않았다. 모두에게는 모두의 역할이 있는 법이었고, 그들 모두 옛날보다는 맡은 일에 능숙해졌으니까. 청명은 중원을 구한 화산의 검수로서 완전히 회복해 멀쩡해진 낯을 사람들에게 보였고, 그 수습을 도왔으며, 안정된 이후에는 다시 검을 잡았다. 때로는 산에 틀어박혀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때로는 사형제들과 비무를 하기도 했다.

“태, 태상 장로님들과 태상 장문인께서 학일 봐주고 계시지 않느냐?”

“어이구, 이 양반아. 등선이 머지않은 어르신들과 갓 태어난 애가 잘 어울릴 수 있겠어? 어른들이야 애가 귀여우니 데리고 있을 맛이 나도 애들은 아니란 말이야. 자기 또래나 나이 차이가 적은 사람과 같이 있기를 원한다고.”

청명도 그 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세상에 화산밖에 없었을 때, 청명은 청문이, 그리고 그 뒤로 제 사제들이 입문하기 전까지는 화산의 어린아이라곤 청명뿐이었으니까. 당시의 장문인과 장로들, 그리고 제 사숙조들과 사숙, 사고들도 당시 화산의 유일했던 어린아이를 무척이나 아꼈으나 청명은 비슷한 나이대와 함께이길 내심 바랐다. 장문인과 함께 내려간 화음현에서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또래 무리 아이들처럼. 검에 재능이 있는 녀석이면 더 좋고.

물론 학이와 청명의 나이 차이는 꽤 크다. 당장 초삼의 몸과 비교해도 그렇지만, 청명 자체와 비교하면 태상 장문인과 장로인 현자배보다도 더 크다. 다만 아이들에게 생각보다 보이는 것의 영향이 커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겉보기에 이 화산에서, 심지어 더 나아가서는 천우맹에서 가장 어린 사람은 설소백을 제외하면 청명일 테니까. 물론 학이도 청명과 오래 같이 있게 된다면 다른 어른들과 있을 때와 다를 것이 없다는 걸 눈치채게 되겠지만…….

‘그 문제는 머지않아 명자배를 받게 되면 해결될 테니 상관없지.’

청명이 그리 생각하며 심드렁하게 귀를 후벼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오검이 종종 모습을 감추던 청명을 떠올렸다. 전쟁이 끝나면 다 끝나는 거냐며 외치던 그 모습이 선명해 당연히 산속으로 혼자 수련하러 간 줄로만 알았는데, 예상 밖의 일을 해오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면 그간 네가 드문드문 사라졌던 게…….”

“학이 데리고 이 주변 돌아다니면서 놀아주느라 그랬지. 뭐, 그래봤자 화음 주변이나 다녔지만. 추 부인께도 다 허락받았어. 저 나이 때는 기력이 넘칠 때라 온종일 돌아다녀도 지치질 않으니까.”

대개 어린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려는 평범한 어른은 길어봐야 한두 시진 뒤에는 나가떨어지기 마련이다. 청명이 무인이고 그 경지가 높았기에 어지간해선 지치지 않고 학이를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놀아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해주고, 먹고 싶다는 것이 있다면 적당히 타협해서 사주고, 화음에서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등을 밀어준 뒤 제 시야 안에만 두면 된다. 과거 청문을 비롯한 사문의 어른들이 청명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궁금증은 해결됐어?”

그래도 애가 날 제일 좋아한다고 하니 기분은 좋네. 그럼, 그 나이에는 먹을 것 주는 사람과 놀아주는 사람이 제일 좋은 법이지.

청명이 피식 웃었다. 


……문제가 생겼다.

오검으로부터 청명의 일과를 전해 들은 화산의 제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학이와 놀아주기 위해 학이 곁을 차지하려고 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는 당과를 챙겨왔고, 누구는 장난감을 챙겨왔다. 목검을 챙겨온 녀석도 있었다. 그 꼴을 바라보던 청명의 눈가가 파들파들 떨려왔다. 

"수련! 이것들아, 수련이나 하라고! 약해빠진 놈들이!"

"청명이 너만 학이 사랑받아서 좋냐!"

그리 외치면서도 제 꼴이 우스운지 여기저기에서 소란스러운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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