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귀환] 악몽

악몽을 꾼 청명이 윤종에게 갑니다.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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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03. 05. 화산귀환 전력 주제 '그들의 밤'

※ 화산귀환 1033화 내용 스포일러 및 과거 날조가 일부 포함될 수 있습니다. 퇴고X 단문.

※ 23년 1월 디페스타/아이소에서 판매된 단편집 '야화'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모두 죽는다.

제 사형과 사제들이, 사질들이, 친우가, 알고 지내던 모든 이들이 모두 그 지독한 광신도와 그들의 신에 의해 무참히 죽어 나간다.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그의 노력을 비웃듯 그들은 모두 채 유언을 끝마치지도 못하고, 눈을 감지도 못한 채 그렇게 그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평생 검만을 잡았던 팔이 떨어져 나가고, 땅을 딛고 살아온 다리가 날아간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저 붉기만 하다. 그 익숙하고도 지독한 광경에 청명은 두려움 섞인 숨을 힘겹게 내뱉는다.

고통으로 흐려지는 호흡을 외면하듯 주변 풍경은 끝나지 않고 이어져 제 새로운 장문인이, 장로들이, 사숙조와 사숙, 사고들이, 끝에는 제 사형들과 사매, 그리고 화산에서 지내던 혜연과 천우맹에 들었던 모든 이들이 그의 눈앞에서 처참하고 허무하게 죽는다. 몸이 찢기고, 팔과 다리가 뜯어져 나가며, 몸에는 머리만 한 구멍이 뚫린 채 청명이 너덜거리는 몸으로 차마 그들을 붙들고 어떻게든 살려주겠노라 한마디라도 해줄 틈도 주지 않고 숨이 멎고 만다.

아무도 지키지 못하고, 그렇게 청명은 처참해진 몰골로 또 혼자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는다. 제가 아는 이들로 이뤄진 시체의 산 정상에서. 또다시, 그렇게…….

 

 

“헉!”

두 눈을 번쩍 뜬 청명이 상체를 일으키며 숨을 거칠게 토해내었다. 옛날보다 작고 얇아진 몸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이내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옹송그린 채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한참을 이어지는 흐트러진 호흡에 악몽의 여운은 쉬이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공기에 아스라이 흩어지며 청명을 찔러댔다. 눈을 뜨고 있어도, 다시 꾹 감아버려도, 그 끔찍했던 광경이 여전히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밤공기에서 혈향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최근 들어 자주 꾸기 시작한 그 악몽은 청명이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올 때마다 그의 목을 졸라대며 찾아왔다.

꿈속에서 뜯어져 나갔던 제 팔과 다리가 멀쩡하게 붙어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온몸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은 가시질 않는다. 한참을 그리 웅크린 채 잘게 떨던 청명은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켜 침상을 벗어났다.

청명이 정말 어렸을 때, 아주 가끔 악몽을 꾸곤 했다.

물론 그 꿈이 지금처럼 잔인한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화음에 함께 내려간 청문을 놓치고 끝내 화산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꿈이거나 청문이 더 이상 제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꿈이 대다수였지만, 당시 두려운 것 하나 없이 화산을 활기차게 싸돌아다니던 어린 날의 청명을 잠시라도 움츠러들게 만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비록 청명이 사제들보다 나이가 훨씬 어렸다고는 하나 그는 그들의 사형이었다. 이런 일로 만만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아이 취급하다 제게 대차게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청명은 사제들이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도 그들에게만큼은 절대로 찾아갈 수 없었다. 분명 그 약한 모습 하나를 가지고 평생 놀려먹을 테니까.

해서, 청명은 악몽을 꾸게 되었을 때면 때를 가리지 않고 청문을 찾아가곤 했다. 청문은 아무리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악몽으로 잠에서 깨 자신을 찾아온 제 사제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지학을 넘긴 때부터는 악몽을 꾸더라도 그를 찾아가는 일이 없었지만 말이다.

청명은 식은땀을 닦지도 않고서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청명아?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윤종의 잠이 덜 깬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청명은 정신을 차렸다. 흐려진 시야가 점차 선명해진다. 저도 모르게 윤종의 방문을 냅다 열어버린 것이다. 그것도 옷차림과 표정을 조금도 갈무리하지 못한 상태로.

“악몽을, 꿔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실수로 방을 착각한 거라며 평소처럼 말하고 제 처소로 떠났으면 됐는데……. 청명이 그리 말하면 윤종이 굳이 더 캐묻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제 입을 떠난 후였다. 막 그 꿈에서 벗어나 정신이 안개라도 낀 것처럼 뿌옇게 흐려진 탓이다. 이 나이를 먹고 어린아이 같은 말을 해버렸다는 생각에 곧바로 문을 닫고 나가려던 청명의 귀에 잠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이라 그런가, 문을 열려있으니 찬 바람이 들어와 춥구나. 얼른 들어와라.”

“……응?”

청명이 얼빠진 얼굴로 되묻자 윤종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얼른 들어오래도, 하고 청명을 재촉했다.

그 말에 쭈뼛대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자 윤종이 몸을 뒤로 물리며 청명이 누울만한 자리를 만들었다. 그의 덩치를 생각하면 과하게 몸을 물리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다. 오히려 청명에게 양보한 자리가 윤종이 누워있는 자리보다 더 넓어 보이기까지 했다.

입을 꾹 다문 청명이 한참을 침상 앞에 서서 망설이다가 그의 옆에 누웠다. 무어라 말이라도 할 것 같던 윤종은 청명이 자리에 누운 뒤에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이불을 끌어당겨 그의 위로 꼼꼼히 덮어주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청명은 제가 뱉은 실수를 만회할 거짓말을 꽤 많이 생각해두고 있었는데도 그것들을 입 밖에 낼 기회는 생기지 않았다. 얌전히 누운 채 눈만 데구르르 굴려 제 몸에 덮인 이불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이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가 툭 던지듯 물었다.

“……무슨 꿈을 꿨는지는 안 물어봐?”

“물어보면 대답은 해줄 생각이 있고?”

“…….”

청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줄 수 없다. 어떻게 그 처참한 광경을 이야기해줄 수 있겠는가. 청명이 입을 다물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윤종이 말했다.

“그럼 됐다. 꿈은 꿈일 뿐이지. 지금은 현실이고.”

윤종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던 청명이 어울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꿈은 꿈일 뿐이라…….”하고 몇 번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 윤종은 청명이 문을 열던 그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힘없이 떨리는 몸, 축 늘어진 왼팔과 가쁜 호흡.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의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법이 없던 청명을 이리 만들 악몽의 정체가 대체 무엇일지, 윤종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기도 하고.’

윤종이 할 수 있는 건 청명의 현실이 이곳임을 알게 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악몽은 그저 악몽일 뿐이라고.

“……사형.”

청명이 잠깐의 침묵 끝에 윤종을 불렀다.

“응.”

담담히 대답한 윤종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이 망설이다 그의 옷자락을 붙든 채 조용히 말했다.

“……오래 살아야 해. 이백은 족히 살도록 내가 만들어줄 테니까.”

무위를 올리면 어떻게든 오래 살겠지. 청명이 조금 험악해진 얼굴로 그리 중얼거리자 윤종의 낯이 잠깐 창백해졌다. 청명의 말에 지금도 충분히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앞으로 얼마나 더 굴릴 생각이냐며 장난스레 투덜대던 윤종이 팔을 뻗어 그의 등을 느리게 도닥였다.

“오냐, 그러마. 나 아니면 산적 같아진 녀석들을 그 나이가 될 때까지 화산의 누가 감당하겠느냐? 이백은 무리여도 백은 살아보마.”

“약속한 거야. 절대…….”

청명이 말끝을 흐렸다. 말이 더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자 윤종이 두 눈을 끔뻑였다.

“응?”

“……아무것도 아냐. 졸려. 나 이제 잘 거야.”

괜히 불퉁스레 말한 청명이 눈을 꾹 감고 베개에 머리를 처박았다.

“그래. 얼른 자거라. 가뜩이나 잠도 많이 안 자는 녀석이.”

청명이 가만히 눈을 감고 작게 숨을 내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윤종도 눈을 감았다. 그러고도 한참 이어지던 토닥임이 어느 순간 멈추자, 청명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는 잠든 윤종을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약속했어. 절대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청명이 그렇게 만들고 말 것이다.

윤종이 말했듯이, 제 악몽이 그저 꿈일 뿐이라며 안심할 수 있도록.

제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반드시…….

청명은 그렇게 한참을 윤종의 숨소리를 듣다가 다시 눈을 꾹 감았다.

꿈을 꾸길 바라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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