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청명/암검] 시작과 끝이 온통 너였을 것이다.
들어두 대고 안 들어두 대지만... 노래가 조습니다 ^^)♥
* 사망 소재 주의
* 날조, 캐붕 등등 주의.
형님, 연모합니다.
그가 제 팔에 붕대를 칭칭 감으며 뜬금없이 그리 말했다. 어이없다는 양 바라보고 있으면,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어대더랬다. 받아줄 생각 없다. 단호한 대답에도 마치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덕분에 마음이 어지러워진 것은 제 쪽이었다.
"… 갑자기 왜 그래?"
"아니, 갑자기처럼 보였습니까?"
붕대를 꽉 묶어 단단히 고정한 그가 저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제서야 그가 제 시선을 내리 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저가 침묵으로 재촉하는 것을 느낀 건지 그가 짧은 침음성을 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의미없는 한숨으로만 흘려보내더니, 저를 힐끔 보며 한다는 말이.
"허어, 형님도 도사가 맞긴한가 봅니다. 이쪽으론 영 눈치가 없는 것이… 평소 행실을 보면 영, 악!"
자신의 빠른 응징에 그가 맞은 머리를 부여잡고 후다닥 물러났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고 무어라 씨부렁대기에 스윽 몸을 일으키니 금세 입을 딱 다물었다. 하여간, 매를 벌어요. 자신이 다시 풀썩 침상에 앉으면, 슬금슬금, 다시 제 곁으로 바짝 다가와 앉은 그가 약통을 들었다.
"형님도 다 알고 계셨지 않소."
"……."
침묵으로 답한 것에 당보가 다시금 옅게 웃었다. 아까보단 흐린 웃음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한 평생 누군가와 정을 통한 적도, 누군가를 마음에 품었던 적도 없던 자신이 눈치챌 정도로, 저를 보는 그의 시선엔 항상 무언가 그득히 담겨 있었다. 애정, 염려, 애틋함. 뭐, 그런 것들. 장문 사형이 저를 볼 때와 비슷한 시선이지만, 그 결이 다른 온기를 품은 눈. 지금도 그러했다. 자신이 거절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한결 같은 온기를 품은 눈이 저를 향해 있었다. 그 눈빛이 마냥 싫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좋아했다. 저를 그리 바라봐주는 것이 어찌 싫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은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생사를 넘나드는 이 전장에서, 한 생의 영원을 약속하는 것이 가벼울 수 있을리 없었다. 그나 자신이나,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대단한 별호를 달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말을 고르다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고,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런 거에 정신 팔릴 생각 없어."
"알고 있소."
"그러니까, 끝나면 다시 해라."
"예. … 예?"
얼빠진 소리를 내는 그는 약통을 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워서, 손 끝으로 그의 이마를 툭, 밀어버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난 간다. 제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건지 그가 급히 제 옷깃을 꽉 잡아왔다.
"방, 방금 그거 무슨 뜻이오?!"
"악, 미쳤냐! 옷 벗겨지려고 하잖아! 안 떨어져?!"
"방금 무슨 뜻, 아니! 그리고 아직 치료도 안 끝났소, 이 양반아!"
"이런 건 침 바르면 낫는다니까! 안 놔?!"
실랑이 끝에 다시 침상에 앉혀진 것은 저였다. 몇 번의 씨름 끝인 탓인지 둘 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하여간, 자기 몸이 무슨 똑 떼서 붙이면 다 고쳐지는 건 줄 아시오. 기어코 제 상처 위로 약을 뿌려대는 그가 불만스레 꿍얼꿍얼거렸다. 그것도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문 당보가, 다시 붕대를 감으며 거의 속삭이듯 물음을 건네왔다.
"… 이 전쟁이 끝나고 다시 하면, 받아주실거요?"
저도 모르게 짧게 웃음이 샜다. 고갤 숙인 당보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처럼 저 역시 속삭이듯 대답을 건네었다.
그래.
그 이후, 우리의 사이는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다. 가끔 다투고, 술 한 잔 걸치고, 전장에서는 늘 함께 했다. 자신은 그의 옆을 지키고, 그는 제 뒤를 지켰다. 하지만 간간히, 제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 못할 때면 당보는 얼굴울 발갛게 물들인 체 제 손을 잡고 속살이듯 말하곤 했다.
연모합니다, 도사 형님.
이어지는 고백들에, 더 이상 그것에 태연해질 수 없을 때에, 저 역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곤 했었다. 거절의 말 대신 침묵으로 답한 이후로는 그 빈도가 더 늘었다.
***
사람은, 가졌을 때에는 소중한 줄 모르다가, 그것을 잃은 후에야 뼈 저리게 깨닫는다고들 했던가.
덜덜 떨리는 제 손끝이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 위를 급하게 움직였다. 몇 번이나 점혈을 짚어댔는데도, 그의 입가에서, 가슴에서 울컥이며 흘러넘치는 피가 멎을 줄 몰랐다.
"당보야, 정신 차려라. 잠들면 안 된다. 잠들면 죽는다. 당보야, 내 말 들리느냐. 눈 뜨라고, 이 새끼야!"
눈꺼풀 아래로 감춰질락 말락하는 녹빛 눈동자에 겁 먹은 짐승처럼 소리를 내지르며 그의 상처를 꾹 틀어막았다. 이렇게 다쳤을 때, 어떻게 해야하더라? 이럴 때 어떻게 했더라? 모든 정보들과 기억이 삽시간에 뒤엉켜들어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았다. 당보의 가슴팍이 가쁘게 오르내렸다. 상처를 틀어막은 제 손을 간신히 붙든 그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
"형, 님…."
"지금 안 들을 거야."
애처럼 떼를 쓰며 그의 말을 틀어 막았다. 그런 제 모습에 그는 그저 희미하게 웃었다. 제 손을 붙든 손이 차가웠다. 그게 겁이 나서, 결국 참았던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몸과 우리의 손 위로 눈물 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그의 죽음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있음을 깨닫고 마는데도, 그럼에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비겁하게, 그제서야 다급하게 제 감정들을 쏟아낸다.
"당보야, 연모한다. 나도 너를 연모하고 있다… 빌어먹을, 이깟 말이 뭐라고!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대체 무엇이 무서워서! 뭐가 무서워서, 그에게 이 대답 하나, 제 마음 하나를 제대로 전해준 적이 없단 말인가. 대체 뭐가 무서워서……. 제 말에 그의 녹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눈동자의 색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그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형, 님, 그리, 말, 하면, 내가… 내가……."
죽기 싫어지잖소……. 먹먹히 젖어든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린 목소리에, 그의 손을 간절히 붙들며 흐느꼈다. 몇 번 눈을 끔뻑이며 눈물을 흘려보내던 그가, 제 손을 마주 꽉 잡았다. 죽어가는 이의 힘이라기엔 저조차 놀랄 정도였다. 고개를 들어 그를 간신히 마주보면, 언제나 온기를 품던 눈빛이 차가웠다. 아니, 그리 보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형님, 저는… 더, 이상, 형님을, 연모하, 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 같은 놈을 일평생 마음에 두지 마시고, 행복하시오. 그래야 합니다. 나는 그저, 사랑하는 이를 멋대로 떠나버린 못난 놈으로 기억해주어야하오. 나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혀를 잃은 이처럼 그저 울음만을 토해냈다. 그리고, 그리고, 당가를, 제 숙질들을……. 끝맺지 못한 말꼬리가 흐려졌다. 제 손을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온기가 빠져나갔다. 헐떡이던 가쁜 숨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찾아든 정적에 온 몸이 짖눌리는 것 같았다.
"당보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무언가 제 안에서 산산조각 부숴지는 것 같았다. 터져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며 그의 몸 위로 엎드렸다. 엎드린 등 뒤로, 어느 새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져 내렸다. 고통에 찬 울음을 내지르며 그의 피로 젖은 옷깃을 꽉 붙들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인 이별이였다. 이런 이별을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다. 마교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봄이 찾아든 풍경 아래에서, 이번엔 내가 네게 먼저 말해야지. 너를 연모한다, 그리 말해야지. 그럼 너는 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체로 자신이 먼저 말하려 했는데 저가 먼저 말했다며 괜히 목소리를 높혔을까. 하지만, 끝내는, 자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웃음을 비추며 좋다고 대답했을 터였다. 그렇게, 제 행복의 시작과 끝이 온통 너였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너를 지우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네게 전해주지 못했던, 그래서 네가 감당해야할 마음의 무게를 전부 덜어낼 수 있을 때까진, 그 때까진.
이미 식어버린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가볍게 겹쳤다가 떨어졌다. 빗물 탓에 식은 온도 탓인지, 그의 입술이 마냥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쉬어라.
속삭이듯 뱉은 제 말은, 더 이상 그에게 닿지 않았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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