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이설] 낯선 나의 연인에게

[청명이설] 낯선 나의 연인에게 (1)

펜슬 이벤트 참여 & 명절 기념 공개분

대가리막기 by 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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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엔드 크레딧을 기다리며

깜빡….

분명 눈을 떴음에도 어두워서 다시 깜빡, 눈을 깜빡인다.

그녀는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 묻혀있었다. 당황하지 않았다. 잠자코 기다리자 그녀를 둘러싼 주변이 어렴풋하게나마 천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그녀가 앉아있는 곳은 불그스름한 푹신한 가죽 의자. 손끝에는 컵을 놓을 수 있는 받침대가 움푹 들어간 것이 만져진다. 무릎 위에는 어깨에서 내려놓지도 않은 크로스백. 발끝에 슬쩍 힘을 주니 익숙한 단화를 신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깜빡,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앞에 있는 거대한 검은 벽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저것은 벽이 아니구나. 불시에 깨닫는다. 눈앞에 펼쳐진 저것은 커다란 화면이다. 오로지 검은 화면이 비치고 있는 커다란 스크린.

유이설은 자신이 영화관에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앉은 자리에서 주변을 돌아보았으나 사람은 없었다. 이 커다란 상영관에 앉아있는 것은 유이설 혼자였다.

유이설은 생각한다. 자신은 왜 여기 있는 걸까.

그녀는 혼자 영화 보는 일이 거의 없다. 유이설에게 있어 ‘영화 관람’이라는 것은 곧 친구나 동기들 손에 잡혀서 어쩌다 한 번씩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쯤은 끌려가다시피 보게 되는 영화는 대부분 그 시기에 크게 흥행하는, 영화 마니아가 아니더라도 다들 한 번씩은 본다는 유행작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이렇게 홀로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관에 앉아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이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마냥 이상하게 여기기 전에 한가지 가능성을 더 열어보았다. 그녀 스스로 영화관에 잘 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사실 영화 보는 것 자체는 꽤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술기운을 빌려 용감하게 혼자 심야 극장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그래, 술기운. 왜 이곳에 있는지 기억이 흐릿한 이유가 술을 마시고 취했기 때문이라면 이해가 간다.

‘넌 혼자 술 마실 생각하지 마.’

누군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나무란 적도 있지 않았는가. 인사불성인 상태에서 행동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을 기대하는 건 괜찮은 생각이 아니다. 유이설은 이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귀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화관은 큰 도로에 자리했을 것이고, 나가기만 하면 심야버스나 택시 한 대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유이설은 이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비어있는 옆자리를 본다. 누구와 만날 약속을 했던가.

유이설은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고 잠시 기다려보기로 한다.

애초에 상영이 시작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끝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영화관에 불이 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영상이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화면일지라도,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이 마지막 크레딧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모든 영상이 종료되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이름이 화면 위로 올라온다면. 유이설은 그때에 홀가분하게 손뼉을 치며 이 자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1. 누가 이 자리에 청명이놈 불렀어

“청명.”

“유이설.”

참으로 간단한 자기소개였다. 듣기 좋은 저음의 목소리와 그에 뒤따라붙은 높고 명료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섞였다. 그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첨언이 필요없는, 눈부신 존재감을 가진 그들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자기소개라고 할 수 있겠다.

…이곳이 대학 청춘의 꽃, 단체 미팅 자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누가 이 자리에 청명이놈 불렀어!”

결국 조걸이 참지 못하고 빽 소리친다. 옆에 앉은 윤종이 하하 웃으면서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듯이 들썩거리는 조걸의 머리를 꾹 눌렀다.

“목소리가 크다, 걸아.”

“아니, 진동룡 선배가 오신다고 하셨잖아요!”

“동룡이 그놈 지금 시험에 대회 준비로 바쁜 거 몰라? 바쁜 사람 이딴 일에 불러내야 하겠어? 어?”

대답은 윤종이 아닌 청명에게서 나왔다. 청명은 소파에 반쯤 드러눕고는 다리를 꼰 채, 한 손은 주머니에 꽂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귀를 후비고 있었다. 후줄근한 후드티에 빗질도 안 한 것 같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짧은 머리. 어딜 봐도 미팅에 쌀 한 톨만큼의 관심도 없는, 우연히 지나가던 양아치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모습이다.

문제는 저런 꼴을 해도 잘생겼으니, 어금니를 딱딱 씹으며 상대를 깔보는 듯이 표정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려도 타고난 곱상한 선까지 일그러지지 않는다. 조걸은 저 얼굴을 저런 망둥이한테 허락한 신이 원망스러웠다. 어? 저 얼굴이 내 얼굴이었으면 지금쯤 내가….

“백천 선배한테 말을 걸어보기도 전에 저놈이 먼저 불러세워서 말이다. 선배를 못 데려가면 곤란하니, 네가 대신 나와줄 거냐고 찔러봤더니 흔쾌히 오겠다고 그러더라. 덕분에 인원수는 채우지 않았니.”

“아니, 불러낼 사람이 따로 있죠! 청명이 저놈은 쓸데없이 윤종 선배 말은 잘 들어서!”

조걸을 필두로 남성 참가진이 이렇게 왁왁거리며 어수선할 때, 여성 쪽도 사정은 비슷했다.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빠진 당소소가 대타로 부른 사람이 하필이면 유이설이었던 것이다.

“유 선배, 진짜 괜찮아요…?”

“응.”

“이설아. 진짜, 진짜로 괜찮은 거 맞아?”

“응.”

몇 번이고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동응답기 같은 짧은 대답이다. 미팅이 뭔지나 알까. 평소 유이설의 성향을 잘 알고 있는 여성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이설을 살피느라 남성진이 빽빽 소리치는 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유이설이 미팅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음날 학교 익명 게시판의 메인 토픽감이다. 지금도 카페 안 다른 테이블에서 이곳을 주목하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학교 근처 명당인 만큼 손님부터 알바생까지 다 같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이었다. 발 빠른 몇몇 사람이 벌써 이 현장을 ‘게시판’에 제보했을지도 모른다. 유이설은 ‘에타’가 뭐의 줄임말인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대학교 단체미팅이라고 해봤자, 사실 같은 학교 학생들끼리 모이는 시점에서 진지하게 연애를 위해 참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평소 교류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을 소개받아 학교 내 인맥을 넓히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고, 겸사겸사 느슨해진 일상에 이성과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긴장감을 주면서 비어있는 하루를 꽉 채워 신나게 놀기 위한 모임 때문이다.

그래도 기왕 하는 거, 기분은 제대로 내야 하지 않겠냐며 남녀 각각 히든카드로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백천’이라 불리는 법대의 진동룡과 유명 기업가의 금옥지엽 아가씨이자 경영대의 아이돌인 당소소가 그러했다. 두 사람 다 아름다운 외모, 좋은 집안, 우수한 성적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털털해 단체 활동에 인색하지 않아서 이런 미팅 제안에도 섭섭하지 않게 잘 어울려줄 인재들이라 선정했던 것인데….

“…이건 대체 무슨 조화야?”

누군가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 시간 카페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깊은 공감의 표시로 몇몇 사람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그가 누구인지 설명하라면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덤벼들어 사흘 밤낮으로 머리를 모아도 부족할 남자, 청명.

그와 대조적으로 단 한 개의 수식어도 필요하지 않은 여자, 유이설.

그 누구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윤종 선배. 이거 술 마시는 모임이라며. 술은?”

“지금 오후 두 시다, 청명아….”

그리고 너… 이미 먼저 몇 잔 마시고 온 거 아니냐…?

윤종은 차마 사람들 앞에서 그걸 대놓고 물어볼 수 없어서 속으로 말을 삼켰다. 술을 찾는 청명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 그것도 제법 많이. 윤종이 식은땀을 훔치려는데 옆에서 조걸이 입을 삐죽 내밀고 끼어들었다.

“그나저나 청명아. 너 지금 무슨 검법인가 복원한다고, 옛날 무인들 폐관 수련하는 것처럼 숨어지내지 않았냐?“

왜 하필 이런 날에 세상 밖에 나왔느냐는 질문이었다. 조걸이 한마디 던지자 다른 동기 남자들도 한 마디씩 보탰다.

“맞아. 난 이번 학기 들어와서 청명이 네 얼굴 처음 본다.”

“난 진작에 졸업한 줄 알았어. 전공 필수도 안 들어오길래.”

“뭐였지? 이십삼? 이십사? 무슨 24시 편의점 같은 이름이었, 히익!”

“야 이 새끼야! 이십사수! 이십사수매화검법!”

“청명아, 참아라! 네가 참아라!”

쾅! 이곳이 카페든, 앞에 처음 보는 여성들이 앉아있든 말든 상관없이 언제 어느 때라도 내리꽂는 청명의 발길질이 탁상을 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카페 안에 아는 얼굴이 많아서 걱정했는데, 이 발길질 한 번에 그 생각이 뒤집혔다. 아는 얼굴만 있어서 다행이라고. 청명의 망한 인성은 이미 전교에 유명했기 때문이다. 바로 한 테이블을 쓰고 있는 여성진조차 그 유명한 청명의 ‘지랄’을 직관할 수 있어 재밌다는 반응이었다. 참으로 담력이 강한 학우들이 아닐 수 없다.

그때,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매화?”

어수선한 와중에도 마치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던 유이설의 눈에 처음으로 이채가 돌았다. 유이설은 웅크려있던 상체를 곧게 펴고는 청명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매화, 보고 싶어.”

청명은 쥐고 있던 멱살을 놓고 그제야 유이설의 얼굴을 본다.

흑단 같은 긴 생머리와 곧은 눈썹, 새하얀 피부, 그리고 더없이 맑고 큰 두 눈. 자신 있게 말하건대 이는 청명이 평생을 살면서 본 적 없던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허나 청명은 청명이었으니.

“…뭐야, 이 미친 여자는?”

청명이 툭 뱉은 한마디에 같은 테이블에 있던 남자와 여자들. 심지어 저 멀리서부터 이 테이블을 주목하고 있던 카페 안의 모든 사람이 입을 떡 벌리고 경악했다.

웬만한 연예인을 옆에 세워놔도 순수하게 미모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저 아름답기로 소문난 유이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물며 저 얼굴 앞에서 저렇게 신랄한 말을 내뱉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저 뭐 씹은 듯한 얼굴로 유이설을 내려보면서 다짜고짜 욕을 뱉는 청명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 과연. 저 패악질은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었구나. 청명이 사람을 가려서 지랄하는 것이 아님을 명쾌하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졸지에 ‘미친 여자’가 된 유이설이었으나 그녀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 청명 앞에서조차 유이설은 유이설이었다. 유이설은 청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내가, 매화를 좋아해.”

“어쩌라고.”

그것이 둘의 첫 대화였다.


“청명.”

“아, 좀! 왜 자꾸 따라다녀!”

“다녀?”

“……요.”

유이설이 성큼 다가와 얼굴을 훅 들이밀자, 청명이 무심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청명은 다른 남자들에 비해서 키가 약간 작고, 유이설은 다른 여자들에 비해 키가 큰 편이다. 유이설이 가까이 다가오면 남들보다 마주하는 거리가 훨씬 좁다. 청명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키 작은 게 다른 것도 아니고, 여자 상대하는 데 애먹일 줄이야.

“하아….”

청명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뱉었다. 과제 때문에 간만에 출석한 일반 수업에서 떡하니 마주친 예쁜 얼굴. 저와 마주 보는 얼굴은 하나인데 따라붙는 시선은 과장 보태지 않고 일백 개쯤 넘어가는 것 같다. 같은 강의실에 앉아있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본인들 수업은 어쩔 생각인지 강의실 문과 복도 창문 너머로 무슨 매미 떼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들이 전부 두 사람을 주목하고 있었다. 얼씨구? 저기 붙어있는 건 교수 아니냐?

청명은 놀랍게도 지금까지 살면서 저가 부려왔던 행패에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처음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그놈의 미팅인지 뭔지 어린애들 모임에 따라나섰다가 웬 골치 아픈 혹을 달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다 가려워지는 기분이었다. 청명은 제 큰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쓸고는 다시 제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유이설. 경영대 3학년. 좀 예쁘게 생겼다 했더니, 전교를 넘어 지역구 급으로 유명 인사인 줄도 몰랐다. 이 여자 때문에 학부 건물마다 연예 엔터테인먼트 사람이 명함 들고 대기하고 있다는 것도. 기껏해야 진동룡 얼굴이 유명한 것만 알고 있었지. 진동룡 별명 중에 ‘유이설급’이라는 말이 있다는 걸 어디서 들어봤다 했더니, 그 ‘유이설’이 방송에서 쓰는 요즘 애들 줄임말이 아니라 사람 이름일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뭐, 무슨 용건 있어?”

“이십사수매화검법, 알려줘.”

“네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말이 짧아. 너, 2학년. 나, 3학년.”

“내가 학번 말한 적 있었나?”

“내가 선배.”

“아니, 너 조기입학이라며. 나는 말이야, 지금 나이가….”

“내가 선배. 그러니까 알려줘.”

“하….”

청명은 몇 번째인지 알 수 없는 한숨을 뱉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 여자. 돌려 말하는 법도 모르는 것 같고. 애초에 사회적인 언어표현이 약한 것 같다. 뭐, 주변에 얽매이는 것도 없이 신선인지 선녀처럼 신비로운 사람이라더니? 그냥 사회성 부족 아닌가? 더해서 완전 찰거머리다. 청명은 유이설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던 조걸의 얼굴을 지금보다 더 못생겨지도록 주먹을 선물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청명은 힐끗 주변을 돌아보았다. 평소에는 청명이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고 피하던 놈들이 지금은 청명이 쳐다봐도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을 부릅뜨고 이 재밌는 광경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거의 노려보고 있다. 반대로 몇몇은 입을 헤 벌리고 유이설의 얼굴을 보느라 청명 따위 눈에 안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걸 가관이라고 욕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그렇게 입 벌린 채 정신 놓은 인간의 반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청명은 책상 위에 펼쳐놓았던 노트를 쓸어 담듯이 가방에 넣고는 손바닥만 한 태블릿을 휙, 돌아보지도 않고 옆으로 집어 던졌다. 그 자리에 있던 곽회가 얼떨결에 태블릿을 받았다.

“대리 출석. 그리고 그거 제출해 놔.”

“뭐야, 넌 어디 가려고?”

“연구실.”

청명은 아직까지도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이설을 내려다보았다. 맑고 커다란 눈이 청명을 비춘다. 그 눈이 퍽 간절해 보이기까지 해서 청명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여자는 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지.

“별 이상한 여자 다 보겠네.”

청명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유이설을 두고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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