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의 별 2
화산귀환 윤종드림
내가 ‘공략의 시간’이라고 했던가? 헛소리였다. 난 윤종을 공략할 생각이 없다. 나는야 아가리 드림러. 드림캐와 하고 싶은 거라고는 그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밖에 없죠!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굴렀다. 빡세게. 아마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별거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에겐 매우 대수로운 일이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연무장 돌고 기초체력 키우는 게 말이다. 원래 나는 한국의 직장인이었다고. 그나마 이 몸이 아직 팔팔한 어린애라서 다행이지, 안 그랬다면 지금쯤 과도한 운동으로 인한 사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정도론 안 죽어, 안 죽어. 걱정 마. 그렇게 말하는 청명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다른 사제들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하다보니 나는 따로 수련을 했다. 일단은 여자애 취급받아서 남자애들이랑은 다른 방을 쓰게 되기도 했고.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여자애는 아닌데 이 세상에서 논바이너리에 대한 논의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서 그냥 그러려니 했다. 청명도 딱히 자세한 사항에 신경쓰지 않는지 날 사제라고 부른다.) 그래서 청명을 제외한 원작 캐릭터들과는 접점이 거의 없었다. 원래도 존재감이 없는 편이라 ‘벽진’은 청자배의 나머지가 모르는 사이 새로운 막내가 되었다.
그렇게 몇 년 같은 며칠이 지났다. 나는 수련이 끝난 뒤 힘겹게 다리를 끌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청명이 먼저 나를 불렀다.
“어이, 사제. 체력단련은 어떻게 되어가고 계신가?”
“사제? 청명이 니가 무슨 사제야, 사제는.”
“아 사형은 모르면 가만히 있어.”
“청명아? 그게 무슨 말이냐.”
목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찾았다, 내 최애캐. 근데 이런 꼬질한 모양새로 첫 인사를 하라고? 청명 이 자식 진짜. 혀를 차는데 어느새 뒤로 온 신룡가리가 내 목깃을 잡고 들어올려 내놓았다. 아니 내가 무슨 고양이 새끼도 아니고…
“다들 인사해. 며칠 전에 새로 입문한 벽진 사제야. 야, 니가 좋아하는 사형 여기 있듭.”
‘좋아하는’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청명의 주둥이를 막고 말았다. 웬일로 순순히 맞아준대,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머리를 한대 꽁 당했다. 그럼 그렇지.
“아파요.”
“그러니까 누가 함부로 사형 주둥이를 건드리래?”
“지가 먼저 도발해놓고…”
“지가? 지가아아?? 네가 아직 덜 굴렀구나?”
“아 영감탱 지대 짱나 즐.”
“뭔소리야 그건 또. 죽는다.”
청명이랑 꽁트를 찍고 있을 동안 슬쩍 앞을 보았다. 오, 웹툰 비주얼이네. 드림러 맞춤형 세계관 디자인인가. 필사적으로 윤종의 만두를 보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랬다. 눈 맞추면 안돼. 눈 맞추면…
“네가 새 청자배 막내구나. 나는 대사형 윤종이라고 한다. 잘 부탁하마.”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 녹는다… 헛 이럴 때가 아닌데!
“안녕하십니까. 새 동생 받으십쇼. 벽진입니다. 진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두 손을 무협식으로 모으고(이걸 뭐라고 하더라. 포권?) 눈을 깔았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래, 진이구나. 생활하면서 무슨 문제가 있다면 내게 찾아오거라.”
“네에.”
“아유 착하다 우리 사제.”
“엥? 사매 아니었어?”
옆에 있던 조걸이 청명의 말을 듣고 끼어들었다. 와 쟤는 진짜 앞판을 까고 다니네. 대단하다. 그리고 내가 드림러긴 하지만 조걸윤종도 먹는 입장이라서 씁(이하생략)
“아, 사매였느냐.”
“사매였어?”
“아니 뭐, 그게 중요합니까? 그냥 진이라고 불러주시면 되는 일인데요.”
내 말에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으쓱하고 말았다.
“그렇다면야 뭐.”
“근데 항상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좀…”
“아 거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수다. 애가 원하는 대로 불러주면 되는 거지.”
“오, 청명. 옳은 말도 하시네요?”
“이게 날 뭘로 보는 거야 진짜.”
다시금 윤종이 웃었다. 이 사람 미소가 기본장착이라더니 진짜인가봐 어떡하냐 온 세상 사람들 다 꼬시게 생겼네 이 도사님이. 청명에게 등짝을 맞으면서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청명이가 동생이 생기더니 좋은가 보구나.”
“얘랑 나랑 엮지 마, 사형. 얘한텐 사형밖에 없으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청명소리입니다, 대사형.”
“음, 그렇구나.”
“뭐야 왜 그걸로 넘어가는 건데.”
“사형들! 안오십니까?”
“어, 간다! 사형, 가죠. 나중에 보자, 막내.”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조걸은 윤종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청명도 그 뒤를 따르려다가 멈칫했다.
“...너, 윤종 사형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냐?”
“그랬죠.”
“근데 왜 적극적으로 자기표현을 안해?”
“왜 그런 걸 신경쓰시죠? 어차피 내가 어필해도 연애놀음할 시간이 어딨냐면서 블락할 인간이.”
“어…필? 부락? 그건 뭐야 또.”
“에휴, 그런 게 있어요. 그냥 내가 원하는 건 한가한 연애놀음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흠. 이상한 녀석일세.”
청명은 갸웃하다가 가버렸다.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진아, 너도 이제 슬슬 다른 청자배 아이들과 같이 식사도 하고 어울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
“네에…”
그 말대로였다. 나는 과하게 기존 스토리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칩거하고 체력단련 때만 나가고 있었다. 제 이름은 벽진, 아싸죠. 할 수 없이 아침 식사 시간에 동참하게 되었다. 장로님은 나를 앞에 세우고 간단하게 소개를 했다.
“이쪽은 벽진, 아마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청자배의 막내로 들어온 아이다. 다들 잘 챙겨주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벽진입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웬만해선 다들 처음 듣는다는 눈치다. 지나가다 날 본 몇 명만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끄덕였다. 내가 청명의 뒤를 이은 막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안쓰럽다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식사가 시작되고 나는 한구석을 골라 앉으려다가 청명의 손에 이끌려 윤종의 옆자리에 앉았다. 미친 영감탱이가 진짜 왜 이래. 청명은 씩 웃기만 했다. 저거 분명 재밌는 걸 발견한 표정이다. 남의 연정이 재밌냐. 에휴. 하긴 나이 먹을대로 먹은 인간한테는 애들의 소꿉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내가 윤종 본인 앞에서 크게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나는 묵묵히 밥이나 먹었다.
“진아, 청명이가 괴롭히진 않더냐?”
“아 사형 왜 그런 걸 물어 또.”
“청명이 녀석이 괴롭혔으면 쟨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지 않았을까요, 사형?”
“음.”
나는 웃으며 젓가락이나 움직였다. 청명은 딱히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나는 그에게 있어서 이해자(추정)이고, 또 아직은 속내를 알 수 없는 관찰대상이니까. 뭐 가끔 티키타카 하는 건 연륜 있는 자의 여유일까. 물론 이건 전부 나의 생각일 뿐이다. 나는 소설을 읽지 않아서 캐해가 부족하니. 와, 나 진짜 아는거 별로 없구나.
“걱정 마세요, 조용히 지내는 저를 누가 굳이 건드리겠어요. 그렇죠?”
윤종한테 대시할 생각 없다는 걸 돌려 말하며 청명을 보았다. 그는 이해한 건지 뭔지 밥이나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 말이 틀렸음은 금방 알게 되었다.
드디어 윤종 등장인데 이제 비축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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