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귀환] 그날 밤의 이야기

부상을 입어 쉬던 검존이 간호하던 당시 삼대제자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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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년 1월 디페스타 / 아이소에서 판매예정인 단편집 '夜話'에 수록된 단편입니다. 

※ 화산귀환이 1100화대가 최신화일때 작업시작한 글이며 이후 원작에서 진행되는 내용과 어긋나는 내용 및 설정이 다소 포함될 수 있습니다.

빛이라고는 방 안의 호롱불이 전부인 늦은 밤, 청명은 인기척에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흐릿하게 보이고, 옆에서 허둥대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없더라니, 막판에는 정신을 놓았던 것 같기도 하다. 가만히 누워있던 청명이 눈알만 살짝 굴려 확인하니 어린 제자 한 명이 걷어붙인 소매까지 적셔가며 천을 물에 담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물에 푹 젖은 흰 천에 묻어나는 불그스름한 자국과 제 어깨 부근이 축축한 것을 보아하니 몸과 머리카락에 말라붙어있던 피 부스러기들을 젖은 천으로 닦아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의약당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이는 화산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마교와의 전쟁으로 모든 문파와 세가, 그리고 민간 의원들까지 비상이 걸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은 수많은 무인의 목숨을 살려내었고, 또 무력하게 떠나보냈다.

부상자의 증가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화산의 의약당에서는 막 일을 배우기 시작한 삼대제자까지 동원해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고 보고하라 명했으며 동시에 실전으로 응급 처치하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니 어린 제자가 제 몸 상태를 살피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삼대제자냐?”

청명이 마른 목소리로 묻자 화들짝 놀란 제자가 대야에 수건을 그대로 떨구며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잔뜩 긴장해 차마 청명의 눈조차 마주치지 못한 채로 허둥댔다. 삼대제자에게 한 문파의 장로, 특히나 매화검존 청명의 이름은 너무나도 무겁고 높았다.

“네, 네! 그…….”

청자배인 청명이 현재 장로 자리에 있으니 눈앞의 어린 제자는 운자배다. 완전히 빠지지 않은 젖살 하며, 채 다 자라지 않은 팔다리를 보아하니 지학을 겨우 넘긴 것 같았다. 많아 봐야 약관 언저리일 것이다. 청명은 저도 모르게 아이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새파랗게 어린 녀석에게 보여줄 만한 광경은 아닌데, 이것 참…….’

인력이 부족하니 삼대제자에게까지 실전으로 의술을 가르치겠노라고 결정하면서 의약당주인 사제 녀석이, 그리고 그 결정을 승인하던 장문인 청문이 어떤 심경이었을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해서 청명도 이에 관하여 말을 얹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그건 그의 역할이 아니었다.

청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 보나 마나 의약당 녀석들이나 당보 녀석이 잠깐 맡기고 자리를 비운 거겠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어린 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청명이 입을 다물려다가 물었다.

“……도호가 무엇이냐.”

“운, 운진雲眞이라고 합니다.”

운진, 운진이라.

청명이 그의 도호를 짧게 여러 번 읊조려보았다. 어린 제자들을 대할 때는 그들이 겁먹지 않도록 조심해서 대해라는 청문의 말이 떠올라 청명이 최대한 그쪽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했다. 이상하게 자신과 눈이 마주친 어린 녀석들이 달리 말을 걸지 않아도 대뜸 겁먹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쁘지 않은 도호로구나. 네 사부는 누구지?”

“……현천玄天 사부셨습니다.”

침묵 끝에 이어진 우울한 답에 청명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한 것을 물었다. 나름대로 겁을 먹지 않게끔 하려고 했던 일이 되레 분위기만 더 무겁게 만들고 만 것이다. 청명 또한 화산의 제자 모두를 알진 못해도 오가다 자주 마주친 녀석들 도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현천은 현자배 중에서도 나름대로 기재 소리를 듣던 이였다. 얼마 전 명자배, 현자배 몇과 함께 지원 나갔던 곳에서 주교를 맞닥뜨려 오른쪽 팔이 잘려 나가고 심장 부근이 뚫린 채 죽었다. 청명의 눈앞의 운진은 그 현천의 직전 제자였다.

“이,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청명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운진이 다급히 외쳤다. 그러면서도 혹여 치료받은 상처가 다시 터지기라도 할까 차마 그 몸을 붙잡지는 못했다.

그 외침에 청명은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 암존께서…….”

‘누가 녀석에게 이 일을 시켰는가 했더니 당보였나.’

청명은 당보가 왜 어린 삼대제자 하나에게 굳이 제 감시를 맡겨둔 것인지 대번 알았다. 제 사문의 제자들, 특히 어린 제자들에게는 위협적으로 굴지 않는 청명이기에 당보에게 했던 것처럼 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었겠지. 실제로도 당보가 욕을 하건 술병을 집어던지건 상관하지 않고 움직여대고 술이나 뺏어 마시던 청명이 운진의 외침 하나에 순간이나마 멈추지 않았던가. 과연 청명과 오래 알고 지냈던 당보다운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 녀석이 뭐라고 하던?”

“움직이면 상처가 벌어질 테니, 자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장로님이 그 몸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잘 지켜보라고…….”

‘정답이군.’

그럴 줄 알았다며 더는 움직이지 않을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 가슴과 팔에 칭칭 감겨있는 붕대를 힐끔 내려다본 청명이 언제나 그랬듯 몸을 일으켰다. 붕대가 감긴 곳이며 흉이 가득해진 곳들이 욱신거렸으나 청명은 잠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가 의식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듯 어깨를 꾹꾹 주무르며 고개를 좌우로 조금씩 꺾어대자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 살벌한 움직임에 운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뭘 그렇게 보냐. 이 정도론 안 죽는다.”

내뱉고 운진의 얼굴을 살피니 그리 적절한 농담은 아니었던 듯싶었다. 상대에게 농을 건네며 분위기를 푸는 건 청명이 하던 일이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밖에서 울어대는 풀벌레 소리만 간간이 방에 들어왔다.

“……장로님.”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운진이 한참의 침묵 끝에 청명을 불렀다. 더 말 안 걸 줄 알았더니. 청명이 대답했다.

“왜 부르냐.”

“저는, …전, 역시 전쟁이 너무 싫습니다.”

전쟁 좋은 인간은 없을 텐데. 그 설움 어린 투정에 청명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팔을 뻗어 운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작은 아이의 몸이 좌우로 마구 휘청였다. 손을 뗀 청명이 무심히 말했다.

“인마, 전쟁 좋은 놈이 어디 있어?”

“하지만…….”

충분히 이해한다. 청명도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어디에다가도 털어놓을 수 없어 이를 악물고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그저 글자와 수로 치환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때로는 청명이 그 죽음을 보고해야 했고, 때로는 청명이 그 죽음을 보고 받았다. 사람의 목숨이 모래와도 같아서, 붙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고 만다.

“그냥 화산으로 돌아가서 문을 잠그고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어요. 그러면 아무도 죽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청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되레 운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우물쭈물 말을 고르던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장로님께서는 약한 말을 하면 싫어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용케 그 말을 뱉었구나 싶다. 물론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전쟁 전의 청명이었다면 다 약하고 수련을 게을리하니 저런 말을 하는 거라고 비웃었을 테니까.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이 옅게 웃으면서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가끔은 나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는데, 어린 네가 그 말을 한들 왜 싫어하겠냐.”

“예?”

처음 들어보는 진심이 담긴 말에 운진이 크게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청명을 바라보았다. 굳이 할 말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툭 튀어나온 말에 저런 반응을 보이자 청명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이지, 청명은 전쟁이 지긋지긋했다. 청명이 전쟁에서 제 몸을 갈아가며 나서는 이유는 별것 없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제 주위의 누군가가 죽을 테니까. 또…….

청명이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간 내가 화산에 보답한 것이 없던 차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으니 이런 거라도 해야지.”

그랬기에 청명은 주저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제 몸을 갈아 상대의 목을 치고, 제 살을 기꺼이 내어주고 그들의 가죽을 뜯었다. 청명은 죽을 것같이 괴로워도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매화검존梅花劍尊이라는 제 별호가 전쟁에서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마교의 절망이자, 아군들의 희망이어야 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런 것을 바란 적 없음에도.

그렇기에 그는 타인의 앞에서 무너질 수 없었고, 상대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일 수 없었으며, 고통에도 이를 악물어 참아내고 마교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악귀처럼 검을 휘둘러야 했다.

매번 술이나 마시고, 검을 휘두르다가 놀러 다니기만 하던 청명이 처음으로 수행하게 된 역할이 척마斥魔라니,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게 어쩐지…….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살아 숨 쉬는 한, 놈들은 화산에 쳐들어오진 못할 테니까.”

청명이 잡생각을 떨쳐버리고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장난기를 가득 머금은 듯 보였으나 어쩐지 무거워 보였다. 그러더니 대번 웃음을 싹 지우고 심드렁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제 잡담은 여기까지 해야겠군. 올 놈도 왔으니까.”

청명의 말에 운진이 고개를 홱 돌렸다.

밖은 여전히 고요했고, 문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군가 온다고 하면 응당 들려야 할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운진이 눈을 끔뻑이며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쾅!

“아니, 댁은 움직이지 않으면 어디 덧나기라도 합니까?”

문이 거칠게 열리며 당보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인지 닫히는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의 큰 소리에 운진이 움찔거렸으나 당보는 따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애초에 어린 제자 한 명의 말이라고 청명이 얌전히 누워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 말코를 침상 주변에 붙잡아둔 데다가, 그 사이에 청명이 술도 마시지 않은 것을 보니 어린 제자에게 그 일을 맡기고 자리를 비운 제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한 당보의 표정을 본 청명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시끄러워. 애한테 이런 일이나 맡기고 간 놈 주제에.”

“아니, 내가 자리를 비우고 싶어서 비웠냐고! 쯧, 아무튼……, 청문 진인께서 형님을 부르셨소.”

투덜대며 매무새를 정돈하던 손길이 잠깐 멈추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머리를 대충 올려묶으며 한결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원 요청?”

“아마도.”

“가지.”

운진은 두 절세 고수의 대화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채 둘의 움직임에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청명이 그를 불렀다.

“운진.”

아까 전과는 다르게 차가운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한 걸음 물러나 있던 운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청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이야기는 타인에게 절대 말하지 말거라.”

그 위압감에 잔뜩 움츠러든 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로님.”

당보가 그 모습을 보고는 괜히 아까와 다르게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험악한 얼굴을 한 채 그런 식으로 말하다 애 하나 울리겠소.”

“뭐? 그냥 말한 건데 애가 울긴 왜 울어!”

위압감 넘치던 모습은 눈 녹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고는 별안간 우뚝 멈춰서더니 목덜미를 벅벅 긁고서 청명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도 네 덕에 그나마 멀쩡한 꼴로 장문인을 뵐 수 있겠구나. 고맙다.”

말라붙은 핏자국을 연신 닦아준 것 말이다. 원활한 치료를 위해 닦아둔 상처 부위 외에는 따로 씻기거나 닦지 않았기에 머리카락이며 여기저기에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사실 운진이 그러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청명을 보게 되는 타인이 그 모습에 조금 겁먹을지언정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터를 돌아다니다 보면 더 험한 꼴도 보게 되니까. 청명이 그런 몰골인 것이 하루 이틀인 일도 아니고, 금방 또 나가게 되면 말라붙은 핏자국 위로 새 피가 끼얹어질 테니 녀석이 했던 것은 시간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는 운진의 표정이 청명의 한 마디에 환해졌다.

 

 


주위가 소란스럽고 뜨거웠다. 운진은 손에 쥔 무거운 진검에 힘을 주었다. 두려움에 도망쳐버리고 싶었으나 앞도, 뒤도 도망칠 곳은 없었다.

“현자배들은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운자배들을 지켜라! 우리는 화산의 제자다! 죽더라도 화산의 제자답게 화산을 지키다 죽어라!”

허무하게 스러져가는 사숙들과 상처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화산의 어린 제자들을 보호하려는 사숙들이 보였다.

-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살아 숨 쉬는 한, 놈들은 화산에 쳐들어오진 못할 테니까.

어째서일까? 문득 그날 밤에 청명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청명, 장로님…….’

지독한 혈향과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과 기합 소리, 그리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운진이 눈을 꾹 감고 말았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를 짙은 밤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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