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유료

[백천청명] 잠만 자는 사이라니까

화산장문인과 제일검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장문인 백천과 일대 제자 청명.

-정마대전 이후 시점.

-청자배 도호 받았겠지만 대충 넘겨주세요.

-약 15,000자

-결제는 소장용.

-추후에 내용 추가해서 성인 걸 가능성 있음.

타오르는 광야. 그 위에 켜켜이 쌓여 산을 이룬 무수한 시체. 겁화의 불꽃은 부와 신분의 고하를 따지지 않고 공평하게 집어삼키니, 이 광활한 대지에 산자라고는 되려 불길에서 도망치지 않은 자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내 하나둘 그 목숨조차 스러져가니,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생명의 단비가 아닌 가는 이가 내지르는 마지막 울부짖음이었다. 어째서 잃어야만 하는가. 왜 빼앗겨야만 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다시 반복해야만 하는가. 짐승인지 사람인지 모를 하나의 핏덩어리가 빛이 되어 쏘아졌을 때, 그 자리에 살아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헉. 거칠게 들이마신 숨을 급하게 몰아 내쉰다. 커다랗게 뜬 눈동자 속 확장된 동공이 곧이어 본래의 크기를 되찾고, 쿵쿵거리며 머리를 울리던 북소리가 차차 가라앉았다. 얼마 만이더라. 한때, 이 불쾌한 꿈을 매일같이 꾸던 시기가 있었다.

“왜 그러느냐?”

“아무것도 아니야.”

백천은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청명의 모습에 아무 말 없이 땀에 젖은 그의 머리칼을 쓸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

“힘들면 붙어 잘 테냐.”

“내가 앤 줄 알아?”

그러면서도 청명은 백천이 비워놓은 옆구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청명의 어깨를 감싸 안은 백천은 그 위로 이불을 끌어올려 단단히 덮어주었다. 혹여나 새어든 찬기가 그의 단잠을 다시 깨우지 않기를 바라면서.

“슬슬 밝혀도 되지 않아요, 사형?”

“뭐를?”

“뭐긴요. 명자배 들어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두 분 눈치만 보고 있다고요.”

“그니까 뭐를.”

“아이참, 장문인이랑 정인 사이인 거요. 대놓고 부부인데 본인들이 말을 안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거 아녜요.”

“아닌데.”

“아니긴, 저번에도 장문인 앞으로 납채서가 들어왔을 때 다 같이 얼마나 사형 눈치를 봤는 줄 알아요?”

“아니, 우리 정인 사이 아니라고.”

“이 빌어먹을 말코놈이 지금 뭐라는 거지?”

“소소야, 입 밖으로 나왔다.”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주변의 청자배들이 이마를 감싸 쥐고 있던 와중에 유일하게 제정신인 윤종이 대침을 꺼내 들은 소소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 윤종 사형, 좀 놔봐요. 저 놈의 머리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확인 좀 해봐야겠으니까.”

“애당초 나랑 동룡이가 정인사이라고 착각한 이유가 뭐야? 내가 나도 모르게 동룡이만 대가리를 덜 팼나?”

“더 팼지.”

“지독하게 팼지.”

“장문인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마구니 같은 놈”

“마지막 새끼 나와라.”

청자배 한 놈의 대가리를 잘게 깨부순 청명이 어깨에 검을 걸치고 삐딱하게 서며 말했다.

“근데 왜 착각을 해.”

“착각이고 자시고, 매일 밤 대놓고 장문인 처소를 찾아가는데 누가 정인사이가 아니라고 믿어?”

“동룡이 이불이 따뜻하고 좋단 말이다.”

말도 안되는 핑계에 사형제들이 너도나도 썩어가는 표정을 짓자 청명이 목을 양쪽으로 우둑거리며 위협하듯 다가왔다.

“그래서 불만 있어?”

“하지만 청명아, 너와 사숙이 동침한 지도 거의 열두해가 다 되어간다. 그동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더냐?.”

“어, 없었어. 그냥 어쩌다 보니 버릇이 된 거 뿐이야.”

청명은 윤종의 말을 듣고서야 동룡이와 밤을 지낸 지도 열두해 가까이 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은 분명 마교와의 전투가 한창이었을 때였나. 아무리 애써도 다음날이면 나자빠지는 목숨들에, 손에서 모래알이 빠져나가 듯한 기시감이 청명의 마음을 어지럽히던 시기였다. 과거에는 최후에 최후의 순간까지 모든 걸 잃을 줄은 몰랐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화산과 천우맹에 쌓여가는 상처와 짊어진 목숨을 보답받을 길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것이 청명의 마음에 쌓이고 쌓여 꿈으로 화해 그를 옥죄었다. 또 다시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를 좀먹었다.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지자 청명은 기댈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쪽잠을 잤다. 그러다 고작 일다경도 안되는 얕은 잠조차 악몽은 찾아오고 핏빛이 그의 눈 앞을 가리던 순간, 백천이 그를 깨워 달래주었다. 온통 핏빛이던 시야에 그의 맑은 눈이 가득 차고, 진득한 혈향은 그의 시원한 체향이 몰아내었다. 그날부터 청명은 백천의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비단 숙소가 아니더라도 수련 중인 백천을 끌고 와 나무 기둥에 기대어 자기도 했고, 전장에서는 아무 엄폐물에 숨어 들어가 그의 품에 몸을 뉘었다. 그조차 여의찮을 때는 그저 아무 길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다.

백천이 있어도 악몽은 청명을 찾아왔다. 천마의 목을 벨 때까지 이는 반복되었지만, 그래도 백천이 있었기에 청명은 이 악몽에 끝이 온다는 위안을 얻었다. 분명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백천이 청명을 깨워줄 테니까. 중원에 평화가 찾아오고 하나둘 일상을 되찾은 사람들 사이에서 청명은 여전히 백천과 동침했다. 백천 역시 이를 막지 않았다. 이를 열두해 가까이 행했으니, 확실히 남들이 보면 오해할 만도 하다. 하지만 정말 아닌걸 어쩌나. 둘 사이에 그럴듯한 기류가 흐른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숙, 사형들이 우리가 정인사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더라.”

“누가 그런 끔찍한 소리를...”

화주를 들이키는 청명의 입에 너도 나이가 있는데 안주 좀 챙겨 먹으라며 편육을 한 점 넣어준 백천이 진저리를 치며 대답했다. 백천의 잔소리에 언제부턴가 잔에 술을 따라 마시던 청명은 마지막 한 방울이 사라지자 아쉬워하며 입맛을 쩝 다셨다. 지체 없이 술상을 치운 백천에 청명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진짜 정인이면 사람이 술 좀 마신다고 이리 눈치 주지도 않겠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이나 자자.”

두 사람이 누울만한 크기의 폭신한 비단 금침에는 목침이 딱 한 개만 놓여있었다. 청명이 딱딱한걸 싫어하기도 했지만 거진 백천의 팔에 기대어 잤기에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항상 반듯이 자던 백천은 청명과의 동침 이후 옆으로 누워 자는 버릇이 생겼다. 그 편이 청명이 파고들기 좋았기 때문이다. 추위를 타는 데다가 부드러운 걸 좋아하는 청명은 백천의 옆구리나 다리 사이에 제 손이나 발을 끼워 넣고 자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자연스레 엉겨 붙은 자세로 두 사람은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명자배의 훈련은 어떤 식으로 할지, 오늘 숙수가 만든 야채 볶음이 얼마나 맛있었다든지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청명아, 오늘은 좀 늦었구나.”

“망할 동룡이가 내 머리 빗질도 안 해주고 지 먼저 나갔어. 오랜만에 하려니까 이게 빗겨져야 말이지. 하여간 필요할 때 없다니까.”

어제의 의문이 해결되지 않은 청자배 사이에 고요가 흐르고 그 침묵을 깨며 소소가 물어왔다.

“사형 진짜 둘이 정인사이가 아닌 게 확실해요?”

“도대체 몇 번을 묻냐. 동룡이는 그거다, 그...죽부인! 그 비슷한 거.”

“흐응...그럼 사형은 장문인 없이도 잘 수 있어요?”

“내가 애도 아니고 당연한 거 아냐?”

“그럼 만약 장문인이 혼인한다고 하면요? 아무리 그래도 더 이상 장문인이랑 잘 수는 없지 않겠어요?”

백천이 혼인이라. 아예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화산은 어찌 됐든 혼인을 허하는 문파니까. 하지만 어쩌다 보니 백청자배 대부분이 본산 제자로 남아있고, 혼인한 자가 없지는 않아도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그리고 백천은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천명에 가까운 나이이고, 단 한 번도 혼인에 뜻을 보인 적이 없으니 청명은 자연스레 둘의 관계가 언제까지나 변치 않을 것처럼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까지 백천 앞으로 납채서가 들어왔다고 하니 문파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면 그도 혼인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얼굴을 꾸깃하고 찌푸린 청명이 제가 묶은 머리가 거슬린다는 듯이 거칠게 긁적이며 대답했다.

“혼인한다고 부부가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아니고, 매번 동침하는 것도 아니니, 같은 사내끼린데 가끔 정도는... 같이 자도 뭐...”

갈수록 작아지는 목소리에 민망한 듯 고개 돌린 청명을 소소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자신들이 방도 따로 쓰는 부부 사이보다 더하단걸 진짜 몰라서 이러는 걸까. 양심도 눈치도 없는 사형에게 자비를 베풀자니 배알이 꼬였지만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화산에 화병 환자만 늘어갈 뿐이었다.

“이 사형 진짜 큰일날 사람이네! 그거 분리불안이에요! 주인 있는 개도 그렇게 붙어있지는 않겠다. 혼자서도 잘 잔다니 오늘부터라도 각방써요!”

“아니 넌 무슨 사형을 개새끼 취급....”

“아 닥치고, 요즘 드나드는 외부인도 많은데 엄한 소문나도는 꼴, 저는 못 봐요.”

그 정도인가. 그냥 잠 좀 같이 잘 뿐인데 이상한 소문이 날 이유가 있나. 하지만 당사자들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봤자 소문이란 게 원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보면 곡해되기 쉽다는 사실을 청명도 잘 알고 있다. 입안이 뭔가 텁텁한 느낌이었지만, 사형제들의 반발이 심하니 당분간은 따로 자야겠다. 생각해보자니 백천도 은근히 자신을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외유라도 나가면 언제 돌아오는지 백아 편으로 서신을 꼭 보내라고 하질 않나, 잔소리를 하면서도 술상이나 다과상을 차려놓질 않나, 정인사이도 아닌데 꼭 부부처럼 굴기는 했지. 그리 생각해보니 분리불안은 자신이 아니라 백천이 아닐까. 이번 기회에 백천의 홀로서기도 도울 겸, 당분간 그의 처소를 찾지 말자. 이게 다 장문인씩이나 되어 여전히 손이 많이 가는 동룡이 때문이다.

“이게 이렇게까지 추울 일인가?”

거진 반년 만에 자신의 처소에 들어선 청명은 제 방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으스스 몸을 떨었다. 방안에는 침상과 다탁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물건도 없었고 그나마 있던 침상에는 여전히 여름 이불이 깔려있었다. 이제 와서 새 이불을 가져오게 하는 것도 번거로웠지만, 무엇보다 이 한기는 결코 하루 이틀 온기를 더한다고 괜찮아질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빠른 판단을 내린 청명은 미련 없이 뒤돌아 백천의 처소를 향했다. 하지만 이내 귓가에서 소소가 분리불안! 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발걸음을 멈췄다. 분리불안은 누가 분리불안이라고. 그까짓 동룡이 없어도 잠은 얼마든지 잘 수 있다며 청명은 쿵쿵 소리를 내며 백천의 처소와는 반대 방향을 향했다.

“나 오늘 여기서 잘 거야.”

“엥? 장문인은 어쩌고?”

그렇게 찾은 조걸의 처소에서 청명은 이불을 돌돌 말고 있던 조걸을 끌어내리고는 침상위를 차지했다. 백천의 침상과 달리 조걸의 침상은 사람 한사람이 넉넉히 쓸 정도의 너비밖에 되지 않았기에 둘 중 하나는 내려가야만 했다.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고 자리에 누운 청명이 아무 말 없자 조걸도 눈치를 보며 방구석으로 가 그나마 얻은 이불을 더 꽁꽁 둘러 싸매며 잠에 들었다.

그러나 청명은 이불을 조걸에게 내준 탓인지 절로 목이 움츠러드는 추위에 스스로를 팔로 동여매듯 감싸보았지만 한기는 쉬이 가시질 않았다. 결국 곤히 자고 있던 조걸의 목덜미를 잡아채듯 들고 와 함께 침상에 누웠다. 좁디좁은 침상 위에 덩치 좋은 사내 둘이 꽉 붙어 있자니, 답답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팔뚝에서 느껴지는 뜨듯 미적지근한 온기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괜스레 화가나 조걸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아 넣자 컥 소리가 나며 발버둥 치던 몸의 움직임이 멎었다. 방금전보다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잠에 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평소보다도 이른 새벽에 방을 나선 청명은 수백만번, 수천만번 휘둘렀던 초식을 반복하며 검을 휘둘러댔다.

다음날에는 윤종의 방을 찾아갔고, 그다음에는 곽회, 그런 식으로 매일 밤 다른 이의 방에 쳐들어가 잠을 청해보았지만, 청명은 그 누구의 곁에서도 잠에 들 수 없었다. 그렇게 십주야 동안 청명은 제대로 된 수면도 취하지 못한 채 평소보다 강도 높은 수련에 힘을 쏟았다. 음식물이 넘어갈 때마다 위가 요동을 쳐, 식사량 또한 최소한으로 줄였다. 점점 더 예민해지고 포악해져 가는 청명에 사형제들은 오늘 밤은 제발 자신의 방에 찾아오지 말라며, 만약 저 마구니를 보내시려거든 그전에 자신 먼저 등선시켜달라고 원시천존께 간절히 청원했다.

“장문인! 제발 저희 좀 살려주세요!”

“청명이가! 청명이가!!”

“그 새끼 진짜 죽이면 안됩니까?”

바로 어제 청명이라는 재앙이 들이닥친 청연은 청명에게 맞아 부어터진 한쪽 눈을 들이대며 거품을 물고 백천에게 호소했다. 백천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들이닥친 이들의 대가리를 일단 한 대씩 때리며 진정시켰다.

“정신 사나우니 한 놈씩 말하거라.”

“이게 다 장문인 잘못이에요.”

들어온다는 예고도 없이 문을 열고 나타난 소소는 백천에게 삿대질을 하며 대뜸 그를 탓하기 시작했다.

“내 탓이라니?”

“이게 다 장문인이 어중간한 태도를 취해서 그런 거라고요.”

어중간하다니. 백천은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자신이야말로 지난 열흘 청명이 갑작스레 발걸음을 끊어 의아해했던지라 더욱 그랬다. 청명이 제게 찾아오지 않을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어디 놀러 갔겠거니 했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도 없이 오지 않은 적은 처음이었다. 기막을 펼쳐보니 화산 어딘가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 위치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슬그머니 청명의 방을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누가 봐도 사람이 머물지 않은지 오래인 곳이었다. 새삼 청명이 자신의 방에서만 머물러온 사실을 실감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갈 데가 없을 텐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그가 좋아하는 회과육과 분주를 준비하여 밤새 기다려봐도 청명은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찾아와 당연한 듯 먹어 치웠을 그였다. 그래도 어디 가서 굶고 다닐 녀석은 아닌지라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김에 간만에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고자 했지만, 방안에 홀로 있자니 곳곳에 청명의 흔적이 느껴져 도저히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제발 서신에 당과 부스러기 좀 흘리지 말라며 그렇게 타박을 해왔는데, 서신을 여기다 놓은 백천이 잘못한 거라며 되레 화를 내며 꿋꿋이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녀석이 조금은 그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무쳤던 건 역시 밤이었다. 잠버릇 나쁜 청명을 꽉 붙들어 안아 침소에 든 지 어언 열두해다. 이제는 제 체온만큼이나 익숙한 이가 없으니 빈자리가 허해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옆자리를 더듬었다. 덕분에 청명이 오지 오지 않은 그날부터 뜬눈으로 밤을 세운 백천이었다. 헌데 자신이 그리 고생한 그 열흘 동안 다른 사형제들의 처소에 돌아가면서 들었다는 사실에 백천은 기함을 토했다. 청명의 기행은 한두 번이 아닌지라 더 이상 놀랄 일도 없다 여겼는데, 멀쩡히 잘만 지내던 제 자리를 두고 다른 사형제의 방문을 두들길 건 뭐란 말인가.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여기저기 찔러보는 듯한 청명의 태도에 백천은 자신도 모르게 초조함을 느꼈다.

“내가 어중간해서 그렇다는 게 무슨 뜻이냐?”

“청명 사형과 장문인이 함께 지낸 세월만 10년이 넘어요. 그동안 정말 아무런 감정 없이 지냈다고 할 수 있어요?”

“감정이라니. 그 망둥이 놈에게 무슨 감정을 느낀다고.”

“두 분이 사내이고, 여기가 화산이라 그런 거지 보통이었으면 부부가 아닌 게 이상할 정도예요. 금슬은 또 얼마나 좋으신지.”

“금슬이라니... 우리는 그저...”

“사숙과 사질이란 말은 하지 마세요. 화산의 누구도 아니, 어느 문파를 돌아봐도 그런 사숙질 관계는 없으니까. 깔끔하게 인정하고 슬슬 살림 합치세요.”

“부부가 아니래도...”

“하…아니면 청명 사형 장가라도 보내주던가. 저렇게 온기를 바라는 사람이니 적당한 여인이랑 연이라도 맺어주면 저희도 시달리지 않고 좋겠죠.”

“그냥 지금처럼 내가 데리고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게 싫으니까 사형이 밖으로 나돌아다닌 거잖아요.”

“싫다고...?”

충격받은 얼굴의 백천을 보고도 소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장문인도 부인을 들이세요. 보아하니 청명 사형 없다고 날밤이라도 샌 모양인데, 그렇게 누군가 옆에 있길 원한다면 정인이라도 만드시던가요. 10년 넘게 아무 사이도 아닌 사숙과 사질? 한쪽이 정인이라도 생기는 순간 더 이상 지금처럼 지낼 수는 없습니다. 미래를 생각해 영단을 내리심이 옳지 않을까 제자는 생각합니다. 장문인.”

소소는 포권을 한 채 고개를 깊게 숙이며 백천에게 고했다. 정중한 태도와는 다르게 그 말은 칼날과도 같아서 부동심을 유지한 지 오래인 백천의 마음에도 자그마한 생채기를 냈다.

부인이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화산의 장문인으로서 문파를 위해 살고자 각오했다. 하지만 과연 그 각오 속에 홀로 밤을 보내게 될 청명에 대한 걱정이 조금도 없었다 말할 수 있을까. 청명과 연을 맺고 싶다는 뜻을 비치는 가문과 문파는 아직도 많다. 백천은 당연히 생각이 없을 것이라 여겨 모두 거절했다.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청명의 의사를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제야 떠올랐다.

정인이라던가, 혼인이라던가 자신과는 연이 없다며 화산에 뼈를 묻겠다는 말코 도사놈들이 널리고 널린 화산이다. 그래도 어쩌다 납채서라도 들어오면 제가 먼저 한번 생각해보라며 제자들에게 들이밀지 않았던가. 어째서 청명이에게는 그러지 않았던 걸까. 사실 자신은 은연중 알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자신이 청명에게 혼인을 권하는 순간, 그의 침상 반쪽을 당연하게 차지했던 그 온기가 사라질 거란 것을.

혼자서 잠에 드는 밤. 더 이상 청명이 없는 밤. 제법 길고 숱이 많은 그 속눈썹이 두려움에 파득거릴 때마다 등을 토닥여 주지 못하는 밤. 앞으로 찾아올 청명이 없는 무수히 많은 밤을 견뎌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가 평생 떨쳐내지 못할 그 원인 모를 두려움을 과연 타인에게 맡겨두고 잠에 들 수 있을까. 청명 없이 백천은 밤의 안락을 누릴 수 있을까. 백천은 여전히 왁왁거리고 있는 제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리를 박차며 산문 밖을 나섰다.

“이만삼천육십칠.”

깍아진 절벽,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청명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기존에 은거지는 이미 예전에 들킨지라, 새롭게 파놓은 자그마한 동굴 속에서 청명은 여섯 시진 가까이 무심히 수련했다. 비 오듯 내리는 땀에 배여 젖은 지 오래인 상의는 벗어던졌다. 고된 수련 때문인지 아니면 수면 부족으로 인해 떨리는 눈과 손 때문인지 청명의 말총머리가 비뚤게 묶여있었다. 그나마도 비죽하고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청명의 정신상태를 대변하는 듯했다.

아 이제 한계다. 드디어 잠을 자는 건가 싶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찌르는 듯한 한기가 수마를 막아섰다. 벌써 몇 날을 이렇게 보내고 있는 거지. 이제는 해가 뜨고 저무는 감각조차 없었다. 청명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수면과 백천 이 두 가지만이 남아 있었다.

백천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지금쯤 자신을 찾고 있을 텐데. 아닌가. 찾고 있는 건 자신이다. 그런데 왜 그에게 가지 않지? 동룡이는 부인을 데려올 거야. 그 방으로 가서는 안돼. 하지만 잠을 자고 싶어. 그래도 가서는 안돼. 넌 앞으로도 혼자야.

이마부터 흐르는 땀이 청명의 눈가에 고였다가 마저 흘러내린다. 뚝뚝 하고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마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멀어진다. 동떨어진 현실감각에 청명은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리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검이 들려있는 이상 청명은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무리 고된 수련을 해도 청명은 결코 잠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 왜 검을 잡았을까. 차라리 제자리에 죽은 듯 누워있던 편이 잘 수 있는 가능성이 컸을 텐데. 자신은 처음부터 자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혼자서 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주인 잃은 개새끼라...”

큭큭거리는 소리를 내며 청명은 웃었다. 인정하자. 자신은 그저 혼자서 자기 싫어 투정 부리는 애나 다름없었다. 다섯 살배기도 이리 지독하게 고집부리지는 않을 것이다. 청명은 곁을 내주지 않는 버림받은 개처럼 주인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백천은 청명을 찾지 않았다. 아마 그의 존재 여부는 백천의 수면과는 하등 상관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의 숙면을 방해해왔던 건 자신이었겠지.

“나쁜 새끼. 빌어먹을 놈. 진가네 놈은 믿을게 못 된다더니. 저 닮은 토끼 같은 부인이나 들일 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냐.”

청명의 흐릿한 시야 사이에 익숙한 그림자가 비쳤다. 드디어 환각이라도 보는구나 싶었지만, 헉헉 거리며 숨을 들이 내쉬다가 입을 연 백천의 목소리가 공기를 때렸다.

“드디어 찾았다, 이 새끼야.”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중천에 올 때까지 화산의 봉우리란 봉우리는 모두 뒤지다 시피하던 백천이었다. 겨우 발견한 청명에게서 들은 첫마디가 욕이라니. 하지만 이마저도 반가웠는지 청명에게 다가가는 그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날아가듯 뛰어간 백천은 몰골이 말이 아닌 청명의 얼굴이 보이자 마자 곧바로 소리쳤다.

“왜 찾아오질 않았어!”

“뭐?”

“왜 내 처소에 오질 않았냐고!”

버럭 호통을 내지르는 백천에 청명은 순간 서러움이 복받쳐 올랐다. 자신이 그동안 어떤 수모를 당했는데, 동룡이가 편하게 잠이나 자고 있을 때 자신은 사무치는 추위와 꺼지지 않는 의식 속에서 기나긴 밤을 홀로 지새웠다. 가뜩이나 아픈 머리를 울리는 호통 소리에 청명은 절로 예민하게 대꾸했다.

“나 없어서 살판난 거 아니었어? 언제는 바쁠 때 찾아오지 말라고 쫓아냈으면서!”

“그건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찾아오란 소리였지!”

“내가 개야? 동룡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게?”

“그런 뜻이 아니잖아, 청명아.”

“아니긴! 장문인 씩이나 돼서 사질 놈 뒤치다꺼리나 한다며 한숨이나 푹푹 내쉬고. 나 없으니 넓은 침상 독차지해서 좋았겠수다!”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청명의 상태는 언뜻 보아도 심각해 보였다. 눈을 붉게 충혈되어서는 초점이 안 맞는 듯 흔들렸고, 피부가 얼어붙은 것처럼 온몸을 덜덜 떨었다. 땀에 젖은 몸이 그나마 남은 열기를 빼앗아 가듯 입술은 점점 더 파래졌다. 당장이라도 그를 끌어안아야만 하는데 백천이 다가갈수록 청명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뒤로, 더 뒤로 물러나기만 했다.

“가뜩이나 소소가 분리불안이니 어쩌니 해서 짜증 났는데...”

“그래, 그래서 나와서 자보니 잠이 잘 오더냐?”

“어, 엄청 잘 잤지! 기운이 남아도니 이렇게 수련도 하지. 마저 끝내야 하니까 공사다망하신 장문인은 이만 가시던가.”

“청명아, 나는 말이다. 조금도 자지 못했다.”

“뭐...?”

“나는 이제 네가 없으면 안되나보다. 한 문파의 장문이라는 사람이 이리 한심해서야.”

그제서야 청명은 백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흩어지는 시야를 겨우 붙잡아 본 백천의 얼굴은 평소의 그 좋았던 혈색은 어디로 가고, 창백한 낯에 핼쑥한 모습이었다. 눈이 무거운 듯 몇 번이나 깜박거리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백천은 제 얼굴을 쓰다듬으며 청명에게 물었다,

“봐라. 엉망이지? 이래 봬도 화산의 얼굴인데 이런 꼴로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뭐라 쑥덕거리겠느냐. 네가 없어지니 바로 이런 꼴이야. 청명아 네가 필요하다. 다시 와주면 안 되겠느냐.”

청명의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더 이상 뒤로 물러가지 않았다. 되려 앞으로 나아가며 청명은 입을 열었다.

“...장문인의 명인데 화산의 제자 된 도리로서 따르지 않을 수는 없지.”

청명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백천의 몸을 끌어안고, 백천 역시 청명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대로 쓰러지듯 자리에 누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두 손을 맞잡으며 그리웠던 온기를 나누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에도 둘은 전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짧아 아쉬운 것처럼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네 방 빼거라. 쓰지도 않을 거면서 아깝다. 들인 제자가 몇인데 놀리는 놈에게 주냐.”

“그럼 난 어디서 지내라고.”

“어차피 내 방에서 살다시피 했잖느냐.”

“장문인께서 바쁘니 나가라고 하시면 제자는 갈 데가 없는데요?”

“이젠 안 그러마. 계속 내 옆에 있어.”

“귀찮을 텐데.”

“내가 언제 너를 감당하지 못한 적이 있더냐.”

“어, 많지.”

낮게 푸흐하며 웃는 소리가 들리고, 백천과 청명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달콤한 수마는 두사람에게 깊은 잠을 선물했다.

노을이 질 무렵 함께 화산에 들어선 두사람은 제자들 앞에서 동거를 선언했다. 청자배들은 지난날의 악몽이 떠올라 애통의 눈물을 삼켰고, 소소를 비롯한 백자배는 드디어 저 염병첨병할 것들이 진도를 뺐다며 묵은 속이 내려가 쾌재를 불렀다.

“두 분 그럼 이제 정인 사이인 거죠?”

“아니, 그거랑 이건 다르지. 안 그래 사숙?”

“어? 그...렇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에 소소는 그날 장문인과 사형에게 검을 들이대는 기사멸조를 범했지만, 그 누구도 말리는 이가 없었다.

“소소 걔도 유난이야. 가끔보면 조걸 사형보다 답이 없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걸이보다는 낫지.”

차락. 나무통에 담긴 따듯한 물을 청명의 머리에 부어주던 백천은 방금전의 소동을 되돌아봤다. 소소가 왜 그리 난동을 피웠는지 백천은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분명 청명은 백천에게 있어 누구보다 소중한 사질이다. 이번 기회에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걸로 충분한 건 아닐까. 둘의 사이가 굳이 지금과 달라져야 할 이유를 백천은 여전히 느끼지 못했다.

얇은 내의만 걸친 청명의 몸을 씻겨주면서도 백천은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았다. 물에 젖은 청명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그의 손이 닿지 않는 매끈하면서 섬세하게 짜인 등을 쓸어내리면서도 자신은 그에게 음심을 품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기대하던 청명과의 사이가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던 찰나, 백천을 향해 고개를 뒤로 젖힌 청명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에 물기를 머금은 청명의 머리카락이 백천의 허벅지에 내려앉았다.

“사숙 얼굴도 이제야 볼만해졌네.”

“...”

“사숙?”

“어..! 아니다. 그래 너도 이제야 좀 낫구나.”

백천은 청명의 얼굴을 잡고 휙 하니 그의 고개를 돌려버렸다. 알맞게 혈색이 돌아 붉어진 청명의 뺨 위로 물방울이 흘러내려 그의 턱선부터 목젖, 쇄골로 이어지더니 이내 그의 가슴골 사이로 사라졌다. 물방울을 따라간 자신의 시선에 미약한 열기가 깃든 사실을 알아챈 백천이 차마 청명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어 그의 고개를 급하게 돌려버린 것이다.

설마 아니겠지. 이제 와 청명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리 없다. 김이 서릴 만큼 뜨거운 탕의 열기에 취한 것 뿐일 것이다. 정말로? 뭐라 웅얼거리는 청명의 입을 따라 움직이는 촉촉하면서 부드러운 볼의 감촉이 느껴진다. 뺨을 붙잡은 손을 치워내려 청명이 백천의 손목을 잡아챘다.

“뭐하는 거야!”

“미, 미안하다.”

“갑자기 목을 꺾다니, 불만 있으면 말로 해! 아직 안 풀린 거라도 있어?”

“안풀린...그래 있,있다! 네 목 좀 풀어주려 한 거다. 수련만 주구장창 해서 그런지 근육이 뭉친 것 같더구나. 오랜만에 이 사숙이 안마라도 해줄까?”

“안마?”

동룡이 안마가 기가 막히긴 하지. 목욕도 했겠다 이참에 제대로 근육 좀 풀어보자.

“그래, 그럼.”

청명이 탕을 박차고 일어나자 백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먼저 가서 준비하겠다며 일어난 백천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급해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청명의 백천의 등을 바라보며 그가 감싸 쥐었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런 청명의 목덜미가 붉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백천은 알지 못했다.

방에 들어가자 대충 말린 청명의 머리에 백천이 다시 한번 천으로 박박 물기를 털어냈다. 청명은 추위를 타는 주제에 물기를 닦아내는 일에는 영 서툴다. 고르게 빗질까지 마무리한 백천이 청명을 침상으로 이끌었다. 자연스럽게 청명이 침상 바닥에 배를 대고 누웠다.

“이러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 같은데.”

“바쁘신 장문인께서는 시간도 빨리 흘러가나 보오. 벌써 달포는 지났을걸?”

벌써 그리되었나. 백천의 손바닥 가득 종자유를 부어 청명의 뒷목에 문질렀다. 오돌한 목뼈를 따라 엄지로 꾹꾹 주변 근육을 눌러주자 청명은 기분이 좋은 듯 콧소리를 흥얼거렸다. 위아래로 피부를 쓸어올리자 사내치고는 하얀 피부에 마찰로 붉은 자국이 떠오르고, 백천의 손길이 지나는 곳마다 기름으로 매끈하게 빛이 났다. 백천이 청명의 허리춤의 매듭을 풀고 내의를 등까지 끌어내렸다. 청명의 백천이 더 수월하게 옷을 벗겨낼 수 있도록 몸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 때문에 청명의 몸이 돌아가며 가슴이 백천을 향했다.

무량수불. 자신도 모르게 도호를 외친 백천은 최대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옴푹 들어간 척추뼈를 따라 자신보다도 훨씬 얄팍한 청명의 탄탄한 허리선이 눈에 들어왔다. 위로도 아래로도 향하지 못하는 시선에 백천은 서둘러 청명의 옷을 벗겨내고 그의 머리를 꾹 누르며 청명의 몸을 원래대로 돌려버렸다.

“웁!!!”

“으아! 미안하다 청명아!”

왜 이러는 건가 대체. 그동안 무수히 많이 그의 몸을 풀어줬지만 오늘처럼 시선도 손도 갈 곳을 잃은 적은 없었다. 보지 않아도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을지 알 수 있을 만큼 열에 오른 백천은 그냥 안마는 다음에 하자고 할까 싶었다. 그럼에도 청명의 허리선 아래로 봉긋하게 솟은 언덕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매끈한 다리를 힐끗 바라봤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청명의 몸이 였기만 그렇기에 더 눈에 담고 싶었다.

꿀꺽. 목젖을 울리는 소리가 백천의 귓가를 때렸다. 청명의 맨 허리에 양손을 얹고 그대로 옆구리까지 쓸어올렸다. 흠칫. 청명의 몸이 잘게 떨렸다. 침구에 얼굴을 박으며 웁웁거리던 목소리도 어느샌가 조용해 졌다. 몇차례 뭉근하게 쓸어 올리던 백천은 그대로 침구사이를 파고들어 청명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읏.”

제 입에서 나온 소리에 놀란 청명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게 뭐야. 청명의 당황에도 백천은 부지런히 가슴을 문질렀다. 강약을 조절하며 움직이는 손길에 청명이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평소와는 무언가 다른 백천에 손길에 청명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청명아, 여기가 많이 뭉친 것 같구나.”

도대체 사내 가슴이 뭉쳤다는 말은 무엇인가. 제 입에서 나온 방정맞은 말에 백천은 순간 민망했지만 그럼에도 청명은 백천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마냥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구나. 백천은 청명의 가슴을 지분대던 손을 척추를 따라 아래로 내려 그의 허벅지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천 위로 노다니는 손에 체중을 실으며 그러면서 은근슬쩍 손가락으로 허벅지 안쪽을 파고들며 연약한 살을 자극했다. 흣, 응, 틀어막은 손이 무색하게 새어 나오는 신음에 백천은 이 이상 나아가면 더 이상 돌이킬 길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청명아, 내가 미안하구나. 내 장난이 지나쳤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청명의 입술이 붉게 부어 있었다. 목소리를 억누르느라 입술을 깨문 모양이었다.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래 청명아, 지금이라도 이런 건 이상하다고, 싫다고 말해. 그럼 우리의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장난? 이게 장난이라고?”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구나.”

“젠장, 기분 안 나빴어! 좋았다고 빌어먹을!”

그 말에 백천이 청명의 몸을 덮치듯 그 위에 눌러 앉았다.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청명을 내려다 보던 백천이 이를 악물며 입을 열었다.

“멈추지 않을 거다.”

“내가 질색이라도 할 줄 알았어? 이 겁쟁이가.”

그 말에 청명의 어깨를 쥐던 손에 힘이 강해졌다. 도발을 받아놓고 이를 맞받아쳐 주지 않는다면 화산의 장문인 자격이 없지. 서로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백천의 입가에 걸린 미소의 의미를 알아챈 청명이 그의 고개가 채 내려가기 전 백천의 옷깃을 잡아끌어 올라간 입가에 제 입술을 찍어 올렸다.

“나중에 우는 소리 해봤자 절대로 안 떨어질 테니까 각오해.”

추위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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