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당보드림]암향화연(暗香花燕)
03. 자각
*적폐/ 날조 / 캐해석 주의.
*암향화연 2화 유료 분과 연장선으로 이어지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보 시점으로 이어집니다. (유료입장)
“마음에 드는 거 있으십니까, 누님?”
연홍 련은 복잡한 표정으로 원단을 내려보고 있다. 삼과 베는 물론이고 각양각색의 비단들과 두루마기처럼 쌓여진 원단이 벽면에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녀는 지금 포목점에 와있었다. 연홍 련은 포목점에 오는 게 처음은 아니다. 공연에 필요한 의상을 고르기 위해 마을을 둘러볼 때면 한 번씩은 들르는 곳이니 오히려 아주 익숙한 쪽이다. 하지만 연홍 련은 지금 시비가 가져온 원단을 외면하고 싶었다.
그도 그렇듯이 사천당가의 상징색인 청녹색 비단이 제 앞에 놓여있으니까. 그 밖에도 몇 가지 원단들이 더 꺼내져 있었지만 연홍 련은 엄지와 검지로 원단을 작게 문질러본다. 본가에서 지낼 때, 상단에서 찾아온 이들이 엄선해서 가져오던 상등품들을 이렇게 보니 기분이 묘하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당보를 알아보고 내민 건지 제 앞에 있는 청녹색 비단을 내려보던 연홍 련은 제 옆에서 천연스레 웃는 당보를 힐긋인다.
“..꽤 고급품으로 보이는데, 네가 내는 거니?”
“제가 맞추자고 한 거니 당연하지요? 누님이 저한테 어울릴 꺼 골라줘도 좋소.”
연홍 련은 눈을 깜박이며 의외라는 얼굴로 당보를 올려본다. 준비된 듯이 시비가 원단을 가져왔길래 이미 선택지는 정해져 있다 생각했는데. 본인 옷은 정해두지 않았다는 건가. 연홍 련은 당보를 바라보다 널려있는 원단을 쭉 살피다 하나를 집어 든다. 당보의 얼굴에 가까이 대보는 그녀의 눈은 처음보다 담담하고 진지하다.
“..워낙 녹색을 봐와서 어색할 거 같더니 생각보다 잘 받는구나. 난 이걸로 하마.”
피부가 하얀 편이라 어느 색이든 잘 받겠지만 골라달라 했으니 본 적 없는 색이어도 어울릴지 한번 궁금하기도 했다. 연홍 련은 시비에게 원단을 건네주니 시비가 공손히 받아낸다. 또 다른 시비 두 명이 연홍 련에게 다가와 천막 안쪽을 걷어낸다.
“치수를 재야 하니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시비의 안내에 따라 연홍 련이 따라 들어간다. 당보는 조금 전 연홍 련이 제게 내밀었던 원단을 본다. 비단에는 눈길도 안 줄 것 같더니 제 옷이라 하니 골라준 걸 보면 그녀가 자신의 체면을 신경 써줬다는 걸 알 수 있다. 자신이 골라준 원단엔 그렇게 골똘히 보며 불만스러워 보여도 넘어가 주기도 했으니까. 진지하게 골라준 거 치곤 결정이 빠른 건 의외였다. 거기다 그녀의 눈 색과 닮은 보라색 비단이라. 당보의 눈이 가늘어지다 피식 웃는다.
‘의도한 건진 모르겠지만... 저 천연적인 행동이 참으로 사람을 헤집는단 말이지. 속도 모르고.’
**
정오가 지나갈 무렵. 창가에서 흘러나오는 햇살이 제법 기울어져 저절로 낮잠을 부르는 보드라운 바람이 살랑인다. 당보는 팔을 의자에 걸친 채 느긋이 앉아있다. 그는 항상 입고 있는 청녹색 장포가 아닌 보라색 장포를 입고 연홍 련을 기다리고 있다. 당가에서 거래하는 곳답게 시비가 가져갔던 원단으로 금방 가봉된 보라색 장포를 내려보던 당보는 천막 너머를 힐끗거린다. 분주히 움직이는 발들이 보이지만 자신이 기다리는 이의 발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슬슬 나올 때도 됐을 텐데 아직인가. 당보는 슬슬 지루함이 드는지 등을 의자에 좀 더 기대앉아 고개를 뒤로 뻗어 닫혀있는 문을 바라본다. 이리 걸릴 줄 알았으면 기루라도 갔다 올 걸 그랬나. 그 누님의 성격이라면 어린애가 대낮부터 여색을 밝힌다고 징그럽단 눈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니 지루하지만 한편으론 궁금했다. 제 취향껏 입고 온 그녀가 얼마나 어울릴지. 날이 점차 더워질 테니 경장도 좋지만 제대로 궁장을 갖춰 입으면 그 얌전하고 여리여리한 얼굴이 훨씬 잘 받겠지.
스륵.
이윽고 천막 너머에서 가느다란 손이 천을 거두어 나온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서 나온 연홍 련은 조금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치수를 재고 옷만 입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이마에 화전을 그리고 머리를 손질하고 장신구를 곁들이기까지하니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연홍 련은 제 피부에 닿는 원단을 만져본다. 그동안 입고 다닌 옷은 튼튼하고 관리하기 쉬운 걸로 고르고 해서 고급스러운 느낌은 부족한데, 이 정도로 얇고 부드러운 감촉의 비단옷을 입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확실히 비싼 게 예쁘긴 하단 말이지. 관리는 까다롭지만.'
연홍 련은 고개를 돌려 널찍한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있는 당보를 발견한다. 자신이 골라준 보라색 장포를 입고 다리를 꼬아 한쪽 팔은 의자에 걸치고 있으니 저대로 술만 쥐여주면 밖에서 술을 기울이다 뻗은 게 아닌지 생각될 정도다. 사람이 나왔는데 여전히 고개가 꺾여져 있고, 설마 자나? 연홍 련은 천천히 당보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서 발을 멈춘다.
‘이 놈이?’
꺾여진 고개 너머 당보의 얼굴을 내려보니 평온히 눈이 감겨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잠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연홍 련의 생각은 달랐다. 아무리 자세가 저잣거리 불량배 못지않게 껄렁하지만 이래 봬도 당가의 소공자인 아이다. 실내라 해도 이 정도로 무방비하지 않을 뿐더러 가까이 왔으면 인기척을 느꼈을 텐데. 연홍 련은 느릿하게 당보의 얼굴을 손으로 쥐어 잡는다. 제 손길에 놀랄 법도 한데 입가에 미소가 느른히 미소지은채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다. 기어이 제 손으로 깨우게 만드는 앙큼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안 자는 거 다 안다.”
“제가 한참 먼저 기다렸는데 감상까지 묻는 건 너무하지 않소?”
잠이 하나도 묻지 않은 목소리. 당보의 능청임에 연홍 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원하는 데로 칭찬해주기로 한다.
“말이라도 못하면... 옷이 날개라더니 제법 태가 나는구나.”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담백한 반응이다. 당보는 눕혀낸 고개를 세워 가늘게 눈을 뜨려다 금방 감아낸다. 옅게 일렁이는 조바심을 진정하기 위해 제 무릎에 얹은 손을 작게 문지른다. 언뜻 보인 백옥같은 피부가 제 앞에 보여서 곤란했다. 가슴팍이 바로 앞에 보이면 아무리 본인이라도 만져보고 싶어질 테니까. 기루에서 제게 다가온 미인들의 가슴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지. 지금은 이 누님을 제게 떨어뜨리는 게 좋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무릎에 앉혀낼까. 생각과는 별개로 당보는 눈을 감은 채 태연히 대꾸한다. 자신의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 쏠려있다는 걸 티 낼 순 없다.
“당연한 소리를, 내가 한 인물 하잖소?”
쿡쿡 낮게 웃는 소리가 제 앞에서 들린다. 얼굴을 쥐어내는 엄지가 느릿하게 제 뺨을 쓰다듬어 고개를 올려잡는 손길이 느껴진다. 순간 청아한 체향이 가까워지는 느낌에 당보는 미세하게 흠칫 인다. 왼쪽 어깨가 잡히며 귓가에 제가 아는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 너도 봐줘야지. 장단 맞춰준 만큼의 칭찬 기대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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