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백천청명] 看雲步月, 一

현화산 백천 X IF 화산이 망해 낭인으로 살아가는 청명.

Pumpkin Time by 화련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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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후 내용 일부가 수정될 수 있습니다.

화산이 망했다.

“허…, 허허…….”

농담이 아니라 진짜 망했다. 무한에서 제게 화산이 어떤 상황인지 이야기해준 거지 녀석의 말을 듣고서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광경을 보니 그저 다리에 힘만 풀렸다. 낡고 지친 꼴의 청명이 천천히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 웅장하던 대화산파의 현판은 온데간데없고, 문짝 또한 너덜너덜해진 채로 오랜 시간 방치된 듯했다. 얼핏 내부를 바라보았을 때는 건물 대다수가 없어져 있었다. 먼지가 내려앉았고, 여기저기 구석진 곳에는 거미줄이 수두룩했다. 청명의 기억이 시작된 이후로 청명은 단 한 순간도 이런 화산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화산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런 모습이었던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꼴이 됐다. 청명이 십만대산으로 향하기 위해 화산의 산문을 나선 지 거의 한 달만의 일이었다. 화산의 어른들이라고 불릴 만한 청자배와 명자배들 모두가 대산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모두 전사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도 단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는 사문의 어른들을 기다리며 남은 어린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마음으로 화산의 현판을 내리고 하산하게 되었을지.

“고작, 고작 이런 꼴을 보자고 그렇게…….”

어린 거지의 몸으로 힘겹게 화산에 오르던 중 느꼈던 아찔함과 힘겨움은 화산이 망한 모습을 마주한 것에 비할 수가 없었다. 청명의 호흡이 점차 거칠게 흐트러졌다. 화산이 망하면서 화음 또한 함께 메말라갔기에 온기를 잃어버린 화음에 들었을 때도 사람이 몇 없어도 좋으니 제발 화산에 누군가 있기를 내심 바랐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청명이 허탈함에 소리 내어 힘없이 웃어도 고즈넉한 저녁의 화산에 울려퍼지는 낯선 웃음소리에 한 번 나와보는 사람도 없었다. 야밤에 번을 서서 주위를 경계하는 사람도, 어두운 화산의 밤을 밝힐 등에 불을 붙이는 사람도 없다. 전각 대부분은 반쯤 허물었거나 몇은 완전히 사라졌고, 연무장에 깔렸었던 청강석도 다 사라지고 흙먼지만 바람에 날렸다.

청명이 무한에서 섬서에 들면서 명문이라던 정파들의 이름은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중에 화산은 없었다.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천마의 몸에 검을 가장 많이 꽂았던 화산을, 다른 문파들이 몸을 사리며 뒤로 뺄 때 미래를 위해서 문파의 주축을 모두 이끌고 대산으로 향했던 화산을, ……모두가 잊었다.

청명의 화산이, 그렇게 죽었다.

무너지듯 주저앉아 공허한 눈으로 화산을 멍하니 바라보던 청명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잇새로 입술에서 터져 나온 핏방울이 새어 나왔으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무도 화산을 기억해주지 않겠다면.

“……강제로라도 기억하게 만들어 주마.”

다시는 잊히지 않을 무너진 화산의 모습을 제 두 눈에 오롯이 담은 청명이 등을 돌렸다.

하여 그 이후로 청명은 정正의 길도, 사邪의 길도 걷지 않고 그저 내키는 대로 걸었다. 본디 그의 뿌리는 정파의 것이었으나, 그가 마주한 현실이 그 길을 외면하게 했다. 그의 검에서 피어난 꽃잎이 닿은 곳은 모두 처참한 시신만이 남아, 혈화마검血花魔劍이라는 별호가 붙었다. 청명은 제 시야에 보이는 사파는 해치웠고, 그 어린 나이에 얻은 별호를 듣고서 갱생을 시키면 쓸만하겠다는 가능성을 엿보고서 제 가문의 양자로 들이려거나 문적에 넣어보겠답시고 찾아온 정파 놈들의 팔이나 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뜨려 돌려보냈다. 구파에 속한 이들을 마주하고서 살심을 억누르면서까지 죽이거나 사지를 잘라내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청명이 검존 무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정파가 연합해 덤비기라도 하면 그 혼자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청명은 정파고 사파고 할 것 없이 돈을 뜯어내어 모아두고서 술을 마시고 끼니를 해결했으며, 발자취를 남기지 않고서 자신만이 아는 곳에서 몸을 숨겼다. 그러다 해가 지나고, 기일이 되면 인적 드문 곳의 객잔을 통째로 빌려 정신을 놓을 지경으로 마셨다. 본인의 기일을 챙긴다기보다는, 제 사형제들 대부분이 대산혈사에서 몰살당했기에 기일이 얼추 겹쳤던 탓이었다.

무위를 완전히 되찾지 못한 청명은 그렇게 이 세상을 견뎌왔다.

눈앞의 대상에 화풀이하고, 분노에 못 이겨 어디서 주운 것인지 알 수 없는 검을 허리춤에 차서 그 검에 피를 묻혀가며. 모두의 머리에 화산을 각인시킬 수 있게 될 그날을 기다리면서.

“누가 객잔을 빌렸느냐고 물으면 그냥 어떤 돈 많은 어르신이 빌렸다고 둘러대세요. 내 용모파기는 절대 말하지 말고요. 특히 거, …개방에는 더더욱요.”

너무나도 수상한 요구였으나,

“아이고, 당연하지요. 그리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손님 정보는 황제께서 행차하여 여쭤보셔도 답하지 않는 게 저희 객잔에서의 법입니다.”

두려움을 핑계로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많은 돈이었다.

점소이가 제 손에 떨어진 돈을 보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느냐는 점소이의 물음에 청명은 그저 술만 넉넉히 넣어달라고 대답했다. 이 정도로 많은 돈을 주고서 요구하는 것이 고작 많은 술이라니. 그 정도는 잔뜩 내어오겠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계단을 올라 방문을 열고 들어간 청명이 초라한 짐을 풀어내고는 곧바로 창가로 향해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저 산 너머로 해가 저무는 눈을 어둑한 눈길로 바라보던 청명은 이내 술을 궤짝으로 챙겨온 점소이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가 방을 나서자마자 망설임 없이 술병 뚜껑을 땄다. 쓰린 속에 쉬지도 않고 술이 물처럼 목구멍을 넘어갔다. 이즈음이 되면 청명은 술에 절여지듯 지냈다.

더없이 평화로운 중원을 바라보며 청명의 머릿속은 그저 복잡하기만 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모두 죽어야만 했던 걸까? 가족을 잃고, 친우를 잃어가며 앞만 보아야 했던 그 전쟁에는 대체 무슨 가치가 있었던 걸까?

청명은, 그리고 화산은 목숨을 바쳐 중원을 구했으나 정작 화산을 구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눈을 뜬 청명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이제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 사실이 청명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청명이 단 한 모금으로 반절밖에 남지 않은 술병을 흔들거리며 그가 마지막으로 등졌던, 주춧돌조차 남지 않은 화산을 떠올렸다.

“……사형은, 내가 이리 살면 안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평생 청명 한 사람을 어떻게든 인간으로 만들려 했던 사람이지 않나. 어쩌면 다 무너진 화산을 보고서 쓰린 속을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더라도 다른 누구도 아닌 청명만큼은 도道를 등져버리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녁 바람이 차다.

지난 생에선 한서 불침의 경지에 올라 추위조차 느끼지 않았던 청명이었기에, 이런 추위가 영 익숙하지 않고 낯설었다. 금세 어둑해지는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에 이내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고 방을 데우기 시작해 시간이 지나도 추위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리 추우면 술로 몸을 데워야지. 청문이 들으면 뒷목을 잡고 넘어갈 법한 소리를 읊조리며 청명이 팔을 뻗어 새 술의 뚜껑을 열었다. 점소이가 내온 모든 술을 비운 뒤에 잠들 때는 부디 꿈을 꾸지 않길 바라며, 청명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방 안으로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데도 뼛속까지 찬 바람이 들어오는 것처럼 시렸다.


- 청명아, 좀 일어나 보거라.

이상하다. 저런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러줄 이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 흐릿하게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청명은 흐릿한 정신을 붙들 생각도 하지 않고서 그리 생각했다. 오며 가며 마주친 산적 놈들과 구파의 후기지수 녀석들을 털어 쌓아둔 돈을 내어주고 객잔을 이틀간 통째로 빌렸기에 그를 찾아올 사람도 없다. 이 세상 살아가는 누구도 청명의 이름을 모른다. 누군가 퍼트린 그의 새 별호만이 중원에 퍼져있으니까. 그의 출신도, 이름도 모른 채 그저 그의 검만으로 만들어진 그 별호만.

-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냐? 이건 술이 널 마신 수준이 아니냐. 안주라도 좀 먹으면서 마시지, 술만 이렇게 마시면…….

되살아나고 곁에 아무도 두지 않았다. 주위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청명은 절대 풀어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멀쩡한 정신이었다면 진즉 저리 떠들어대는 입을 주먹으로라도 막아버렸을 텐데, 저게 실제 목소리인지, 아니면 꿈속의 목소리가 섞여 울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잔소리에 섞여든 안타까운 감정만은 온전히 전해져서, 청명은 인상을 찌푸린 채 숙취로 인해 물먹은 듯 무거운 몸을 뒤척거리며 “……잔소리는.”하고 웅얼댈 뿐이었다.

간밤에 청명이 마시며 방안에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려 놓은 술병들이 누군가에 의해 빠르게 정리되어간다. 달그락대는 소리가 연신 들려오자 몽롱한 상태의 청명이 이내 시끄럽다는 듯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객잔에 들어오며 봤던 점소이는 분명 비쩍 마른 사내였는데, 숙취로 정신이 영 들지 않아 시야가 어지러워 그런지, 방을 치우는 사내는 건장한 체격에 팔다리도 길었다. 게다가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조금씩 보였다가 가려지는 얼굴은 또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을 것 같은 미인이라, 멍한 정신에 왜 저런 이가 객잔에서 일하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어련히 알아서 치우고 갈 테…….”

대충 손짓하며 사내를 내보내려다 흐릿하던 시야가 선명해진 그 순간 청명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언제 숙취로 골골대고 있었냐는 듯, 마치 섬전閃電이라도 된 것처럼 날아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검을 빼내어 방을 치우고 있던 사내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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