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환 - 2
쌍존 논컾: 환생 청명 & 생환 당보 AU
!주의 ¡
- [ 환생 검협 & 생환 당보 ] 원작 날조
- 글 쓴 사람은 화산귀환을 1549화까지 읽었습니다. 글에 직접적으로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없습니다.
“…이름이 청명이라.”
현종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당보의 표정이 묘했다. 얼굴에 미소 한 점이 가까스로 그려져 있긴 하였으니,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마치 원치 않던 광경을 목도해버린 사람 같았다. 적어도 화산 사람들에게만큼은 솔직히 감정을 드러내던 암존답지 않게도 무섭도록 절제된 표정이라 현종이 슬 눈치를 보았다.
당보는 현종의 불안함을 달래는 대신, 허리를 숙여 청명과 눈을 맞추었다. 청명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놀라지 않고 멀뚱히 당보를 바라보았다. 그 동요 없는 눈을 마주하며 청명의 이목구비를 샅샅이 살피던 당보는 곧 손을 뻗어 청명의 왼팔을 잡아챘다. 청명은 순순히 당보에게 팔을 내주었다.
“아프다는 팔은 이쪽입니까?”
청명을 보되 질문은 현종을 향했다. 현종이 그렇다고 답하자, 당보가 제 손에 쥔 팔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미 의약당으로 향하던 길이었지만, 암존이 직접 상태를 보겠다는데 그 누가 말릴 수 있으랴.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이가 놀랐을까 싶어 안색을 살피던 현종은 청명의 차분한 낯에 다소 놀랐다. 아이를 잡으려던 두 제자가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아이가 지금 이리 조용히 있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둘이 어린아이에게 격한 반감을 살만치 험하게 대했을 리도 없을진대.’
현종이 짧은 의문을 품는 동안에도 당보는 빠르고 꼼꼼하게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이리저리 팔을 움직이며 진료를 보는 그 손길이 사려 깊고도 정확하여서 과연 당문의 큰 어르신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상태를 확인할수록 점차 가라앉는 당보의 눈빛에 묻어나오는 섬찟함에 현종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래… 이전 기억은 또 없다고.”
당보가 진료를 끝내고 팔을 내려놓으며 묻는 말까지도 낮고 서늘하였다. 당보를 오래 봐온 현종이 당황할 만치 날이 선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를 마주한 청명은 한 치 떨림도 없이 당보를 똑바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당보의 미간이 좁혀지고, 곧.
“어르신!”
깡, 맑고도 묵직한 소리와 함께 아이 눈앞에서 두 검날이 맞부딪혔다. 당보가 짧게 잡은 비도를 가까스로 막아낸 현종의 손이 그 여파로 파르르 떨렸다. 직감을 무시하고 의심을 방관했더라면 막지 못했을 일격이었다. 현종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 무슨 짓입니까!”
“장문인은 못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 치 흔들림 없이 바로 나오는 불길한 대답에 현종이 손을 뻗어 빠르게 아이를 제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아이의 상태부터 확인하며 달래고 싶었으나, 상대가 암존이었다. 아무리 화산 장문인인 현종이라고 할지라도 아이를 보호하며 쉽사리 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란 얘기였다. 조금 전 충돌에서 검격이 짧아 현종이 받은 것보다 더 큰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을 텐데도, 비도를 든 당보의 손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지금도 당보는 현종이 아이를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나는 걸 쉽게 막을 수 있음에도 현종의 움직임을 내버려두고 있었다. 얼마든지, 언제든지 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물씬 풍겼다.
검파를 단단히 쥔 현종이 숨을 후 내쉬었다. 당보가 입을 열었다.
“그게 인간으로 보이십니까?”
“그 무슨…”
“그건 사특한 사술이 만들어낸 산물에 불과합니다!”
비명을 지르듯 외친 당보가 이를 까득 갈았다.
생환 - 2
갑작스레 화음에 나타난 한 아이, 기억을 잃어 이전 삶의 흔적 따윈 없다. 그 아이를 화산까지 이끈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왼쪽 팔의 통증. 그러나 당보가 직접 제 두 눈으로 확인하건대 왼쪽 팔에는 신체적으로 문제가 있을 만한 구석이 없고, 하물며 그 통증은 화산에 와서 멈추었다. 그 모든 게 수상한데, 하필 그 이름마저 ‘청명’이라고?
‘이 빌어먹을 놈들이…’
정마대전이 끝난 후 당보는 마교를 뿌리 뽑는 데에 전력을 다하여 마교가 부리는 온갖 사특한 사술을 직접 마주했다. 사람을 제물 삼아 힘을 뽑아내고, 사람을 산송장으로 만들어 부린다. 그들은 본인들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천마의 재림만큼이나 집착하는 게 바로 매화검존의 이름을 치욕 속에 처박는 일이었다. 그를 위해 화산과 당가를 몰락시키려는 마교의 손길을 처단한 게 몇 번이었던가. 청명을 함부로 입에 담는다면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이 채 두 마디가 되기도 전에 서슴없이 목을 직접 하나하나 따준 게 몇 번이었던가!
그러나 결국 당금의 작태에 치달았으니, 그 모든 노력이 무용했던 모양이다. 제 살아생전 이런 모욕을 겪을 날이 올 줄이야.
하, 당보가 분노 담긴 웃음을 짧게 토해내며 아이를 노려보았다. 저 아이를 감싸는 품이 현종만 아니었다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이 화산의 사조를 능멸하고 있으니, 직접 처단하든지, 아니면 내 앞길을 막지 마십시오.”
노기 가득한 얼굴을 마주한 현종은 그제야 당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그래, 현종 또한 청명이란 이름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올린 이가 있지 않았던가. 화산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이름이었다.
현종이 검을 들지 않은 팔을 아이의 얼굴에 둘러 머리를 꾸욱 안아 눈과 귀를 어설피 막았다. 두 손으로 직접 귀를 막아주고 싶었으나, 그마저 여의찮은 대치 상황이었다. 혹여나 아이가 현종의 품 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순간, 당보가 바로 그 목을 벨 것처럼 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당보에게서 피어오르는 사나운 기세에 손이 떨릴 지경이었다.
“마교에서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장문인, 소식을 듣지 않았습니까?”
당보가 청문과 함께 마교 잔당을 해치우던 시절. 마교를 완벽히 소탕하기도 전에 그 버러지 같은 놈들이 핵심 인력을 숨기기 시작했다. 제 잔혹한 본성을 죽이면서까지 세상에서 사라진 듯 숨어버린 집단을 전부 잡아내 뿌리뽑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완벽한 소탕에 실패한 후, 그 이후로 당보는 아군의 힘을 기르는 데 집중하였다. 언젠가는 마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기다리며.
그리고 얼마 전, 북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으나, 주시해야 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마교의 흔적이 발견된 이 시점의 화산에 수상한 사술을 두른 이가 들어온 게, 우연 같습니까? 그 추악한 저의를 못 느끼겠느냔 말입니다!”
현종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보마저 사술이라 확언한다면 결국 팔에는 이상이 없단 뜻이었다. 상황과 시기가 석연치 않았고, 심지어 그를 말하는 이가 암존이었다. 암존이 누군가. 그가 죽인 마인을 전부 모은다면 이 화산마저 뒤덮고도 남을 정도로 마교 소탕에 치열히 생을 바친 무인 아니던가.
‘마교라.’
현종은 마교가 활동하던 시기가 끝나고 무인으로 자리 잡은 이였기에 마교와 직접 맞부딪힌 적은 없었다. 그러나 어릴 적 마교가 습격한 화산에서 제 사형제들과 함께 떨며 검을 동아줄처럼 꽉 붙잡은 적은 있었다. 광소를 터뜨리며 죽이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던 그들은 감히 인간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부정함 그 자체였다. 그런 이들에게서 나온 산물이 화산에 있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인가.
그때가 온다면, 현종은 그 피에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고개를 숙인 현종이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저를 향한 이 날 선 공방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어쩌면 이미 현종이나 당보의 목소리가 귀에 흘러 들어갔을 텐데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가만히. 제 목에 들이밀어질 처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 작은 모습을 보자, 불현듯 잠에서 깨어난 듯 아득한 공포가 깨어지고 선명한 현실감이 덮쳤다.
“그렇다고 한들… 어린아이입니다.”
“비켜라.”
결국 현종을 향해 지키고 있던 일말의 예의가 깨져나가고, 당보의 입에서 하대가 튀어나왔다. 그러나 현종은 개의치 않으며 당보를 똑바로 마주하였다.
“진의는 암존 어르신조차 모르는 것 아닙니까. 설사 마교가 얽혔다고 한들, 이 아이는 피해자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섣부른 추측으로 한 아이의 목숨을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하… 장문인!”
당보가 피를 토해내듯 외쳤다. 괴로움이 잔뜩 서린 게 확연한 외침에 현종이 주춤, 아이를 품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나 당보는 현종이 물러나든 말든, 그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현종은 죽이지 못한다.’
마교가 얽힌 일 앞에선 어쭙잖은 동정 한 번에 수천 명, 수만 명이 생을 다한다. 전쟁 당시엔 정신 잃은 교인을 뭣 모르고 돌봤다가, 깨어난 교인 하나에 마을 전체가 몰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선의를 베풀어도 오로지 악의로 갚는 게 마교다. 마교와 관련된 모든 것은 인간사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는 당보가 직접 전쟁을 겪으며 뼈저리게 새긴 깨달음이기에 현종이 알 리 만무했다. 아무리 잘못된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게 인두겁을 쓰고 있는 한 현종은 그 올바른 성정상 쉽게 죽이지 못할 게 뻔했다. 그걸 알면서도 자신은 왜 손속에 사정을 두었을까. 왜 단번에 저 사특한 것을 죽이지 않았지?
이제 현종과 화산에 상처를 입히지 않는 한, 저것을 죽이는 건 힘들었다.
당보는 거칠게 숨을 삼켰다가 뱉어내며, 가까스로 호흡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죽이지 못하겠다면 내쫓기라도 하십시오. 화산에 둬선 안 될 것입니다.”
당보의 시선이 언뜻 현종과 아이를 떠나, 전각들 사이 화산의 가장 깊숙한 한 곳으로 향하였다가 돌아왔다. 그 시선이 향했던 곳이 어디인지 현종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사조인 매화검존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었다. 그제야 현종은 당보가 슬퍼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 이 노여움은…
“그대들은… 적어도 그대들은, 그 이름을 존중할 줄 알아야지.”
한탄과 회한이 섞인 목소리가 낮게 흐르고, 짙은 비애가 담긴 눈이 현종을 향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그 시선이 진실로 자신을 향해 있지 않음을 알았다. 머나먼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눈. 현종의 앞에 자리한 것은 상처 입은 이였다.
그를 깨달은 현종이 입을 슬 벌렸다가 꾹 다물었다.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결심이 단단히 섰다.
“암존 어르신… 언제나 화산을 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암존이 지닌 슬픔은 이해한다. 그가 얼마나 자신들의 사조를 아끼고 존중하는지 또한 안다. 그러나, 그렇기에 이 일은 암존의 판단에 맡길 수 없었다. 감정에 휩쓸린 자에게 누군가, 특히 어린아이의 목숨을 쉽게 앗을 기회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드높은 자리에 선 자도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는 법, 지금 암존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화산은. 단 한 명에게 결정을 위탁하는 문파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일은 화산이 정해야 할 일입니다.”
“…….”
“마교의 수작임이 불분명한 상황이니, 당장 아이의 거처를 화산에 둘지 말지를 정하는 건 화산의 일이지 않겠습니까.”
“…책임이 무서워 눈앞에 있는 결정에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화산의 안위가 걸린 일을 좌시하겠다는 얘기입니까?”
“그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 그 책임은 제가 집니다.”
당보는 헛웃음을 지었다. 당보가 보기엔 참으로도 안이한 말이었다.
누군가가 죽고 나면, 그 책임을 대체 어떻게 질 것인가?
한 무리를 이끄는 자가 지는 책임은 결국 제 무리에 속한 이들이 고통받을 미래를 없앰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일 뿐, 일이 벌어진 뒤에 남는 건 오로지 뼈저린 후회뿐이란 말이다. 그때 가서 후회하여도 잃은 건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책임진다는 말은 허울 좋은 빈말이 되어버린단 말이다.
현종은 아직 경험이 부족하여, 그리하여 그 뒷수습이라는 게 얼마나 뼈저리게 고통스러운지 몰라서 이리도 쉽게 말하였다. 그러니까 자신이 나서야만 했다. 어떻게든, 이 화산이… 도사 형님이 그토록 지키고자 하였던 화산이 고통받는 일이 없도록…
-도사 형님, 때때로 답답할 때는 없소?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비도를 다시 꽉 쥐던 찰나,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당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 * *
“뭐, 화산이야 우리 가문이랑 많이 다르긴 해도… 그래도 도사 형님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당보가 건넨 질문에 청명이 허, 짧은 숨을 흘리며 손을 들었다.
“그래서, 너처럼 문파를 나와 살기라도 하라고?”
딱, 하고 시원하게 뒤통수를 때리는 손길에 당보가 아, 하고 엄살 어린 신음을 뱉었다. 이 정도는 아픈 축에 속하지도 않을 걸 잘 아는 청명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에이, 그건 아니죠. 맨날 청문진인께 혼나면서…”
“매일 혼난다는 게 이미 내가 매일 하고 싶은 일 하고 있다는 소리잖냐.”
어… 어라? 그렇네?
당보가 고개를 기울이자, 청명이 별 쓰잘머리 없는 소리 말고 마시던 술이나 마저 마시라며 잔에 술을 콸콸 따랐다. 대충 따르는 것 같이 헐렁한 태도인데도 기가 막히게 잔에 술을 꽉 채우되, 술 방울 하나 떨어트리지 않는 신묘한 손놀림이었다. 당보는 이 인간 또 이상한 데에서 잘난 척한다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러나 잔을 가져다가 확 손목을 젖혀 단번에 마시는 동안 술을 조금도 흘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건 당보도 마찬가지였다.
마찬가지로 한 잔 들이켠 청명이 문득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장문사형 정도 말은 좀 듣고 살아도 돼. 똑똑한 사람이니까.”
“세상에… 이 말코가 남을 인정할 줄도 알고. 제가 제일 잘난 줄 알고 살 줄 알았는데…”
청명이 검집을 꽉 잡자, 이번에야말로 두들겨 맞을 것을 직감한 당보가 빠르게 청명이 내려놓은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싱글벙글 웃었다. 그에 청명이 한숨을 내쉬며 검집 대신 잔을 들었다.
‘오늘 비싼 술을 들고 오길 잘했지.’
청명이 또 술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잔에 따라 마시는 게 감질난다는 듯 술병을 보며 입을 한 번 다신 청명이 삐딱하게 앉아 말을 이었다.
“장문사형은 내가 못 보는 걸 보는 사람이거든. 그런 사람을 보고 있으면, 뭐 아무리 이 세상이 한참 모자란 멍청이들로 가득하지만 그래도 내가 또…”
또. 그리 말을 끝마친 청명이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청명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제법 흥미진진한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아 당보가 숨을 죽였다.
“…….”
잠시 술병을 매만지며 생각하던 청명이 곧 별 대수롭지 않은 말을 한다는 듯 툭, 가벼이 내뱉었다.
“이기지 못할 사람도 있긴 하구나 싶지.”
미친…. 당보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저급한 감탄사를 황급히 틀어막았다.
하지만! 정말이지 놀라운 일 아닌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망종이 저런 생각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니. 뭐, 실로 저 인간이 생각 얕은 사람이라 생각한 적은 없으나, 그래도 자신감 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에게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당보가 놀라는 모습을 힐끔 본 청명이 술병에 바로 입을 대며 술을 꿀꺽꿀꺽 마셨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말이었다는 자각이 든 건지, 아니면 당보가 놀란 틈을 타 비싼 술을 한 번에 강탈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 하여튼 그리 술을 단번에 해치운 청명이 병을 탁자에 턱 내려놓았다.
“어쨌든, 문파라는 게… 혼자서는 볼 수 없는 세상을 누군가가 가르쳐줄 수 있는 곳 아니겠냐.”
“그것참… 멋집니다 그래?”
당보는 슬쩍 비죽거리면서도 바로 손이 날아올 곳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막으려 한다 해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딱, 아무리 경계하여도 그 틈을 타서 뒤통수를 딱, 휘갈기는 손길에 당보의 볼이 움찔거렸다.
“아! 부러워서 그러지요! 부러워서!”
저 인간, 한 번이라도 때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도 맞아 이제는 웬만큼 맞아서는 혹도 안 나는 제 뒤통수를 당보가 손으로 스윽 훑었다.
“부럽긴 뭐가 부럽냐, 떡하니 당가에 속한 처지에.”
“허, 우리 가문은 답답한 종자들 천지입니다, 천지. 우리 가문엔 ‘대’화산파의 ‘대’장문인 같은 사람 없습니다.”
이 자식은 아주 맨날 비꼬는 게 취미지, 하는 게 청명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때때로 청명과 술을 마시다보면 청명이 때리는 것조차 질려하는 때가 찾아오는데, 드디어 그 순간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당보가 치졸한 승리를 기념하며 내밀히 웃던 찰나, 빈 잔을 내려다보던 청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글쎄… 볼 생각조차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너도 그 답답한 종자 중 하나거나.”
* * *
“…….”
현종이 불안한 눈으로 당보를 보았다. 분명 소매 안쪽으로 손이 들어가긴 했는데, 그 손이 나오기는커녕 당보가 그 자세 그대로 우뚝 굳어서 서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 틈을 타서 사람을 불러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현종이 잠깐 고민하던 찰나. 정신을 차린 당보가 곧 얼굴을 구기며 외쳤다.
“…아, 씨. 짜증 나게!”
살벌하던 분위기는 어디 가고, 투정을 부리는 듯한 외침에 현종이 의아한 눈을 했다. 그러나 당보는 소매에서 비도 없이 손을 떼고서는 두 손으로 머리를 쥐더니 긴, 그러나 한결 가벼운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그래도 도사 형님보다는 훨씬 남 말 잘 듣고 사는 사람입니다!’
울컥 튀어 오르던 노기가 한 번 환기되니, 하나로만 흐르던 생각이 다른 쪽으로도 흐르기 시작하였다. 당가든 화산이든 간에 모든 걸 당보가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특히 화산이라면,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화산의 일에 당보가 과히 제 권한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믿고… 듣고. 한 번 따라주는 거.’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당보 인생에서 아직도 제일 힘든 세 가지였다. 그러나 믿어주지 않으면 후대는 성장하지 못한다. 청문이 등선한 후 흔들리는 화산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니 당보가 해야 하는 건 그 선택을 가로막는 게 아니라, 잘못된 선택으로 발생하는 피해를 최대한 줄여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훈은 얻되, 재기하지 못할 만치 큰 상처는 얻지 않도록.
‘허 참… 그래도 도사 형님, 내가 꼴 좀 보소. 불쌍하지도 않소? 내가 화산을 위해서 해준 게 몇인데!’
정신머리는 되찾았으나, 그래도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네 일이라고 당보 저를 빼놓겠다고 현종이 선언한 게 제법 서운하였다. 당보가 현종을 쳐다보자, 현종은 움찔거리면서도 당보가 평소와 비슷해졌음을 느꼈는지 긴장이 조금 풀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장문인.”
방금까지 대치하고 있던 상대에게서 빠르게 안심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신뢰의 증거였다. 당보는 서운함을 털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이 바라는 뜻대로 하시지요.”
* * *
그리하여 화산 장문인과 장로들이 논의한 결과, 바로 처분을 결정하는 대신 청명을 몇 년간 돌보며 진상 조사를 하자는 유예기간이 정해졌다. 말이 유예기간이지, 당보는 화산의 행보가 눈에 뻔히 보였다. 아이가 자라나며 문파 내에서 살육을 저지르거나 양민을 괴롭히는 천인공노할 일을 벌이지 않는 한, 화산은 한 번 품은 이를 쉽게 내쫓지 않을 터.
그러나 어쨌든 당보는 그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결과를 들은 당보는 수긍하며 현종에게 이만 돌아가겠다고 말하였다. 현종은 밤이 늦었으니 하룻밤 자고 가라며 붙잡았으나 당보가 거절했다. 심력을 소진한 터라 빨리 제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제 심상을 어지럽히는 이가 있는 곳에서야 자도 잠이 아닐 테니 말이다.
“실례하였습니다, 장문인.”
심중이 무엇이었든 간에 어쨌든 화산 내에서 장문인의 뜻에 반하여 멋대로 군 건 사실이었으니, 당보가 깍듯이 인사하자 현종이 극히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일부러 더 예의를 차리며 작은 심술을 부린 당보는 잠시 현종 옆에 선 아이를 바라보았다. 무슨 실랑이가 있었는지가 뻔한데도 아이는 겁 하나 먹지 않은 듯,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얼굴로 당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마저도 싫어 당보는 아이에겐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은 채 홱 돌아 산문을 나서 걸었다.
몇 번이고 올랐던 산인지라 제아무리 밤길이라고 한들 눈 감고도 절벽을 뛰어놀 수 있었으나, 당보는 괜스레 천천히 걸었다. 가을인지라 바닥에는 떨어진 매화잎들이 마른풀에 섞여 바스러지는 소리가 이따금 났다.
매화나무에 꽃망울이 맺힐 날도 얼마 안 남았구나.
당보가 가늠하며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허… 하, 허허!”
아무도 없는 곳에 서서야 헛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서운함이 완전히 씻겨 내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제가 괜스레 현종에게 심술을 부리며 나온 걸 보면.
도사 형님은 지금쯤 하늘에서 화라도 내고 있을까. 도사 형님 무서워서 한참 어린 장문인에게도 예의 지키며 살아왔는데, 오늘부로 다 망해버렸다. 그래도 도사 형님이 벼락을 내리치지는 못하는 걸 보면 선계에서는 제 성질 다 못 부리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내 딴엔 화산 지켜보겠다고 그런 거니까, 너무 그리 화내지 마시고. 응?”
살살 달래듯 말한 당보가 곧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뭐, 저만 해도 만약 도사 형님이 살아있어서 제 가문 일에 왈가왈부한다면….
…….
뭐지, 왜 끝내주게 잘 챙겨줄 것 같지.
이끄는 건 몰라도, 문제 있는 놈 패는 데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도사였으니… 정마대전 직후 당보가 고생했던 긴 시간을 단번에 단축하며 끝내주게 당가를 뜯어고쳐 줬을 것 같긴 하다. 그 이후 이끄는 거야 당가 가주가 알아서 했을 테다. 당가 가주들도 대대로 어떻게든 당가를 이끌고자 아등바등 고군분투해왔으니 말이다.
…이 인간은 상상에서조차 이길 수가 없네. 그 사실에 짜증과 웃음이 동시에 난 당보가 하늘을 향해 외쳤다.
“뭐, 불만 있으면 살아나시던가!”
그러나 언제나처럼,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당보는 고요한 하늘 아래에서 한참을 고개 치켜든 채 있다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고개를 내리며 다시 앞을 똑바로 보았다.
이제 제 후대들을 돌보러 가야지. 당보가 바로 발을 내디디며 빠르게 내려가려던 찰나, 누군가가 장포 끝자락을 잡았다. 그에 휘청한 당보가 고개를 돌렸다.
시야 한가운데, 오늘 중심이 되었던 아이가 서 있었다.
‘…왜 기척이…’
아무리 그가 경계를 소홀히 하던 상태라고 한들, 제 옷자락을 잡을 때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적잖이 충격이었다. 역시 위험한 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던 당보는 곧 아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에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소란을 뻔히 아는 화산 이들이 아이가 혼자 나와 저를 만나는 걸 두고 본다고?
“돌아가라. 네게 좋은 감정은 없으니.”
“가요?”
당보가 매섭게 경고하였으나, 아이는 제 할 말만을 했다. 그 당찬 태도에 당보는 일견 어처구니가 없어졌으나, 아이에게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아이 손에 들린 옷자락을 거두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비게 된 손안을 잠깐 본 아이가 다시 당보를 마주했다.
“어디로 가요?”
“…….”
당보가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발을 박차고 떠나려던 찰나, 다시 아이가 확 장포를 잡아당겼다. 이번에는 바로 넘어질 수도 있을 정도로 과히 휘청거린 당보가 얼굴을 확 구기며 아이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잡은 거지?’
무학 하나 배우지 않은 아이가 따라잡기엔 빠른 움직임이었는데도, 정확히 자포를 낚아챈 아이에 당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러나 아이는 구겨진 얼굴을 마주하고서도 또 물을 뿐이었다.
“어디로 가요. 집?”
대답하기 전까지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얼굴에 허, 웃음을 지은 당보가 아이의 손목을 잡고 제 옷자락을 빼냈다.
“그래, 집 간다.”
그리고 아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툭, 하고 가벼이 밀쳐 바닥에 쓰러트렸다. 당보는 바로 몸을 돌려 훌쩍 떠났다.
그리하여 어두운 밤 속에 아이는 혼자 남겨졌다.
“…….”
풀벌레 우는 소리가 적막강산을 가득 메웠다.
아이는 잠시 넘어진 채로 가만히 있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옷에 묻은 흙을 탁탁 턴 아이가 제 왼쪽 팔을 내려다보았다.
-나랑 비무하고 싶다고? 왜? 너 이 꼬락서니 안 보이냐? 너도 걸어서 집 가기 싫어?
-어차피 걸어서 집 못 갑니다! 돌아갈 집이 없거든!
‘…분명 저 사람이었지.’
아이는 모두가 ‘암존 어르신’이라며 지칭하는 남자가 제 팔을 붙잡았던 순간, 팔을 찌르던 통증과 함께 밀려 들어오던 누군가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짜고짜 무기를 들고 덤벼들던 앳된 남자의 모습, 그리고 오늘 본 모습이 서로 비슷하였다. 그래서일까, 기억 속에서 느꼈던 즐거움과 동화된 탓이었는지 남자가 한 위협이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 집 간다.
너는 드디어 돌아갔구나.
‘왜 안도감이 들었지?’
아이는 조금씩 욱신거리는 팔을 들어 제 가슴 위를 마구 문질렀다. 알 수 없는 통증과 감정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건 저 남자 말대로 제가 ‘무언가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여서일까? 그렇다면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건 정말로 악의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지만 악의라고 하기엔 이 모든 장소,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드는 감정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한데.
“아, 모르겠다! 생각해서 뭐 해.”
아이는 일단 생각을 보류하기로 했다. 이미 조금 전, 실랑이가 벌어지는 동안 제 존재에 대하여 꽤 길게 생각하였으나, 결국 저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결론만 내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확실한 사실만을 되새기는 게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이곳에 남아있을 수 있단 사실,
또 앞으로는 배곯을 일은 없어 보인다는 사실,
그리고…
-청명…아.
제가 청명이라는 사실.
이 이외의 일들은 더 생각해봤자 어차피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새로운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다.
뒤로 방향을 튼 청명이 가볍게 제가 출발할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처음 내디딘 길인데도, 이상하리만치 익숙하여 돌아가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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