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생환 (完)

생환 - 3

쌍존 논컾: 환생 청명 & 생환 당보 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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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

- [ 환생 검협 & 생환 당보 ] 원작 날조

- 글 쓴 사람은 화산귀환을 1549화까지 읽었습니다. 글에 직접적으로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없습니다.


현 무림에 암존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 없고, 그 실력을 얕잡아보는 이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정마대전이 끝난 후 태어난 사람들이 대부분인 현시대에는 암존의 활약상을 과장으로 아는 이도 많아, 그 실력을 범인이 상상 가능한 정도로 낮춰보곤 한다. 그럼에도 암존을 마땅히 존경하고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하물며 장본인의 실력을 직접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사천당가에서야 암존의 명성이 얼마나 드높은지는 설명해봤자 입만 아픈 일이다. 당가에 속한 이들은 암존이 해낸 일들이 고스란히 적힌 기록물들의 진의를 감히 의심할 생각조차 못 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조금도 과장이 없음을 분명히 알았다.

그래, 그렇기에… 지금 당군악은 차마 화를 있는 그대로 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 불쑥 튀어나온 단어에조차 언뜻 노기가 서려 있어 당군악이 큼큼, 헛기침을 하고선 탁자 위 잔을 들어 차를 마셨다. 털어 마신다는 표현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단번에 비워진 잔을 본 당보는 생각했다.

우리 가주께서 애쓰는군….

당군악은 당보가 가문에 지닌 부채감과 증오를 대부분 해갈한 즈음에 태어났다. 애증 중 애정만이 남은 상태에서 마주하여 각별히 관심을 쏟아부었던 갓난아기가 언제 이리 자라서 저를 혼낼 준비를 다 했는지…. 가주로 존중하기 위해 예의를 지키며 근엄히 앞에 자리한 암존이나, 그 눈에 어린 훈기에 더 짜증이 오른 당군악의 목덜미에 핏대가 바짝 섰다.

“그러니까… 화산에 가서 장문인 앞에서 비도를 휘두르셨다고… 심지어 상대는, 화산이 막 거둘까 말까 하고 있던 어린아이고요?”

“그렇습니다.”

당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당군악이 소리만 못 질렀지 눈에 핏줄이 돋는 게 훤히 보였다. 아무리 제가 화를 내도 두려워할 일 없는 상대를 앞에 둔 채 소리 하나 못 지르는 제 처지에 당군악은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차를 붓고, 마시고, 붓고, 마시고를 몇 번 반복한 당군악이 겨우 쓰린 속을 달래며 제 머리를 붙잡았다.

“차라리 고하지나 마시지….”

“타 문파에 이런 실례를 범했으니, 가주께 고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말씀은 잘하시지! 번뜩 뜨인 당군악의 눈에 원망이 서렸다.

당보의 말은 분명 원칙대로는 맞는 말이었다. 그래, 원칙대로는!

그러나 당보쯤 되는 인물이면 독자적인 행동을 해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위치였고, 실제로도 그리 넘기는 일이 수두룩했다. 어디에선가 일을 치고 와서도 태연히 당가타 상석에 앉아, 따지러 온 이들에게 ‘누가?’라고 태연히 묻던 당보였다. 그러면 상대는 당가에 책임을 묻기는커녕 알고서도 순순히 넘어갈 수밖에 없었단 말이다. 그 누구도, 당가 가주라고 해서 그 암존을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당보가 이리 순순히 화산에서 벌인 일을 털어놓는 데엔 다른 의미가 있음이 분명했다. 이번 일을 가문 간 일로 대하고 다루자는 얘기였다.

“…화산에 어떻게 배상하길 원하시는 겁니까.”

당군악이 입을 열자, 당보가 그게 원하던 답이 맞다는 듯 진득이 웃었다. 가주가 된 지도 오래인 당군악에게 이런 식으로 은근히 칭찬해오는 사람은 정말이지 당보가 유일했다. 차라리 환희연을 먹지, 환희연을 먹어… 당군악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았다.

“그건 가주께서 정하실 일이지요. 다만 화산과 연이 끊기지 않게만 하면, 그게 가문을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

당보가 흘리는 말에 당군악이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불평을 멈칫, 멈추고선 머리에 있던 손을 내려 자세를 바로 하였다. 당군악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진실로 마교가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암존이 이번에 저지른 일로 바로 연이 끊어지기엔 화산과 이어진 연이 지나치게 끈끈했다. 그 연이란 단순히 검존과 암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어져 온 우정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교류가 긴밀하여 당가와 화산 사이에는 여러 이권이 이리저리 얽혀 있었다. 게다가 조부모가 화음 출신이었던 사천 사람, 또는 조부모가 사천 출신이었던 화음 사람이 파다하여 문화적인 연결성 또한 단단했다. 그러니 설사 암존이 이제부터 당장 두 문파 간 교류를 끊자고 해도, 당군악과 현종이 함께 뛰쳐나와 장포를 붙잡고 매달려 말릴 판국이었다.

그러므로 화산 간 연을 공고히 하자는 말은… 실로 끊어질 연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화산에 사과를 빌미로 당가 눈을 두어 감시하자는 얘기였다.

“가능성이 아무리 낮아도, 마교가 언급되는 순간 무시해선 안 될 일이니 말입니다.”

당보의 태연자약한 대답에 당군악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하필 북해에서 마교의 흔적이 나타난 이 시점에 화산에 수상쩍은 인물이 나타난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당군악은 당보가 전하는 옛이야기들을 직접 들으며 자란 이로 간접 경험으로나마 마교의 악랄함과 교활함에 통달한 이였다. 그러니 당보가 신중히 구는 이유를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당군악이 소리를 죽여 물었다.

“수상한 기색이 나타날 시, 즉시 죽이면 되겠습니까?”

당연하다는 듯 던져진 당군악의 물음에 당보는 순간 터져 나오려는 실소를 참았다. 제가 지난밤, 화산에서 과연 사천당가의 방식대로 일을 해결하려고 했음을 다시 깨달은 탓이었다. 고름을 내버려두었다간 멀쩡한 살까지 곪아 문드러지니, 당장 원인을 제거하여 뒤탈을 없애야 한다. 그게 사천당가를 이끄는 이들이 가지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러나 화산 일에까지 사천당가의 방식을 적용할 수는 없는 법.

당보는 새삼 사천과 화산의 이 지나친 돈독함을 주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산을 진실로 다른 문파라 여겼다면 이리도 당연하게 간섭하려 들 리 없었다. 너무 오래 함께하여 심정적으로 가까워지니 저도 모르게 한 가족으로 취급하고 대하려 하지 않는가. 특히 사천당가는 혈연으로 이뤄진 세가인 만큼 은연중에 ‘이런다고 연이 끊어지진 않겠지’하는 역치가 제법 높아서, 화산의 시선에서 도가 지나친 일을 해버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칫 중심을 잃었다간 서로에게 독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처음으로 들었다.

‘서로 닮기를 바란 적은 없어.’

한 가지 방식으로 성장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각자 제 방식대로 성장하기를 바랐을 뿐.

이는 당가 내 사람들을 성장시킬 때 이미 각별히 신경 썼던 부분이었는데… 가문의 뜻에 개인이 지닌 뜻이 묵살당하는 일이 없도록 그토록 주의해왔으면서, 어째서 문파 간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 못했나.

“화산의 일이니, 과히 간섭해서 되겠습니까? 다만, 화산이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가 늦지 않게만 신경 써야겠지요.”

당보가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당군악이 언뜻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군악이 제 뜻을 이해한 것인지 알 수 없어 당보는 잠깐 고민하다가, 설명을 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당군악에게 인사했다. 지금 당군악에게 필요한 건 설명이 아닌 시간이다. 현종이 화산의 방식을 알아서 정했듯, 당군악 또한 사천당가의 방식을 알아서 정하겠지.

‘현역이라 이거지.’

언제 세월이 이리도 지났나. 조금 쓸쓸한 기분으로 당군악에게 인사하며 가주의 처소를 나선 당보는 처소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당보가 똘망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당보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할아버님!”

“어허, 소소야.”

옆에 있던 당조평이 점잖게 당소소를 타이르자, 당보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네 어릴 적을 내 뻔히 다 기억하고 있거늘’하는 눈빛에 찔끔한 당조평이 뭐라 말을 더하지 못하고, 그저 돌아오셨냐며 인사하였다. 품 안에서 당보를 올려다보던 당소소가 히히 웃으며 당보 품 안에서 벗어나 당조평이 하는 양을 따라 하였다.

“그래, 수련은 잘하고 있었고?”

“네!”

당소소가 자신 있게 내민 손에 상처가 잔뜩 나 있었다. 당보가 흐뭇하게 웃자, 잔뜩 차오르는 뿌듯함에 당소소가 어깨를 쭉 펴며 턱을 쳐들었다.

당가 여식들에게 전수가 허락된 지는 제법 오래되었으나, 세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당가에 오는 유력가들의 혼담은 여전해서 은근히 여식들의 결혼을 바라는 시선이 있었다. 그 탓에 당소소의 피부가 타고, 몸에 상처가 날 때마다 그를 아까워하는 은근한 시선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보만큼은 늘 당소소를 한 명의 어엿한 무인으로 대해주었다.

“굳은살도 제법 박였구나.”

“물집 안 잡힌 지도 오래되었는걸요!”

그래서 당보가 오랜만에 사천에 돌아올 때면, 이렇게 당소소가 가장 먼저 달려 나와 제 성과를 자랑하곤 했다. 지금도 빨리 제 솜씨를 보여주려 당보를 연무장으로 데려가고 싶어 안달이 난 당소소가 발을 동동 굴렀다. 상대가 당보가 아니라 당패나 당잔이었으면 벌써 손목을 잡아끌어 당장에 데려갔을 법한 모습이었다.

‘하여간.’

제 형제들은 당보와 감히 눈 마주치기도 주저하는데, 이 아이는 어찌 이리도 당찬지. 어떤 일이 있어도 제 원하는 길을 걷는 데 서슴지도 기죽지도 않는 아이의 모습이 기특해서, 당소소가 원하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당부가 문득 드는 생각에 입을 열어 물었다.

“소소야, 화산에 가보고 싶지는 않으냐?”

생환 - 3

퍼억!

청명의 목검이 맞아 떨어진 조걸이 청강석 위를 우당탕 구르자, 연무장 안에서는 그럼 그렇지 하는 끄덕임이 이어졌다. 청명이 이제 막 입문했던 시기, 그 앞에서 기강을 다잡겠다며 나섰던 조걸이었다. 그런 조걸이 비무 상대로 나서는 날에는 청명의 검이 유난히 매서워졌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청명은 착실하게도 은원을 잊을 줄 몰랐다.

퍽, 퍽, 퍼억! 신들리게 패는 손길에 맞춰 악, 악, 아악, 하는 비명도 함께 울려 퍼졌으나 누구도 걱정하지 않았다.

‘어이쿠, 소리 봐라. 신명 나네.’

‘으… 근데 저놈이 또 어디 한군데 잘못되게 때리는 놈은 아니란 말이지.’

사실 다들 말리고 싶어도 말릴 방도를 몰랐다. 조걸이 먼저 덤벼들어 자초한 저 지옥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인사불성이 되거나 직접 패배를 인정하는 건데, 패배를 섣불리 고했다가는 조걸은 제 사부로 내정된 유이설의 은근한 질타 담긴 빤한 시선에 온종일 시달려야 할 터. ‘그 정도밖에 못 버텨?’하는 말 없는 시선에 시달리지 않을 정도로는 맞아야 할 조걸을 향해 짧게 도호를 읊은 이들이 매정하게 뒤돌았다.

“잠깐!”

조걸이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올리자, 청명의 검이 날아오다가 조걸 옆구리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청명이 말해보라는 듯 말없이 고개를 까딱했다.

“이 미친놈이 어떻게 더 빨라지냐! 속임수를 쓰지 않고서 이게 말이 돼?”

“속임수?”

“그래!”

조걸의 항복을 은근히 기대하던 이들이 그 대신 튀어나온 허튼소리에 서로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돌려 수련이나 계속하였다.

‘이제 다 알만한 놈이 또 헛소리하느라 귀한 기회를 날리네.’

‘빨리 못하겠다는 말이나 할 것이지.’

물론 청명을 제외하면 제 배분에서 가장 빠른 검이라 불리며, 백자배에서 가장 날랜 유이설의 제자로 일찌감치 정해졌던 조걸이니만큼 속도로 지는 게 적잖이 억울할 만도 했다. 그러나 그 억울함도 몇십 번이고 반복되면, 그건 어리석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고개를 저은 이들이 은근히 다시 들릴 타격음을 기대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청명이 조걸을 내려다보며 후, 한숨을 내쉬더니 곧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속임수를 쓴다 이거지?”

“어… 어?”

“그럼 사형은 그깟 속임수에 진 사람이 되는 거네?”

“아니, 그, 그게 그렇게,”

그게 그렇게 되나? 함정에 빠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청명의 눈빛이 서슬 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화산 무인이 그깟 속임수에 져?”

“잘못했다!”

“무슨 속임수인지 알아내고 이길 때까지 패줄 테니까 이겨내도록 해!”

퍽, 퍽, 퍽, 퍽! 결국 다시 시작된 타격음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레 기본자세를 취했다. 몇몇은 유이설의 반응이 궁금하여 눈을 굴렸으나, 어디에서도 유이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사제들의 의아함을 눈치챈 백천이 말했다.

“당가 여식께서 또 오셨다고 하는구나.”

“아.”

청문이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교류차 당가에서는 장인과 의원들을 보내왔는데 그중 가장 앞에는 당가 가주의 여식인 당소소가 있었다. 첫인사 후로도 화산에 꽤 자주 와 얼굴을 내비치던 당소소는 어느 순간부터 유이설의 무재에 관심을 가지더니, 급기야 냅다 비무를 신청하다가 나중 되어서는 올 때마다 유이설과 비무를 하였고… 대부분 이기지 못했다.

그러니 현종이 근심이 깊어지다 못해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팰 수밖에 없었다. 혹여 당군악이 아끼는 자식이 크게 자존심이 상해도 문제고, 몸을 다쳐 어딘가 잘못되어도 문제다. 그러한 문제로 유이설에게 해가 갈까 봐 전전긍긍하는 현종을 알아챈 유이설이 당소소의 비무를 거절하기 시작하자, 당소소가 해맑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럼 안 보이는 데에서 하면 되죠!

현종이 들었으면 바로 뒷목 잡았을 말이었으나, 유이설은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데다가 조용히 호승심 많은 유이설도 당소소와 하는 비무가 퍽 즐거웠기에 망설임 없이 대꾸한 것이다.

당연하게도 현종은 얼마 안 가 이 둘의 일탈 아닌 일탈을 알게 되었으나… 결국 둘을 말리지 못했다.

-그래, 둘 다 원한다면 해야지 어쩌겠는가….

유이설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둘의 행적을 알아내어 고한 건 운검이었다. 인적 드문 골짜기에서 이뤄지는 둘의 비무를 고했을 당시에 들었던 아득하고도 아련한 장문인의 목소리가 떠오르니, 제자들의 수련을 지켜보던 운검이 저도 모르게 장문인의 거처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언뜻 돌렸다.

현종이 나와서 청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나게 공격하고 있는 건 청명이요, 처참히 맞고 있는 건 조걸이건만. 청명을 바라보는 현종의 얼굴에 드리워진 근심에 운검이 힐끗, 제 옆에 선 운암을 바라보았다. 운암이 대신 감독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운검이 바로 현종을 향하였다.

“장문인.”

운검이 현종 옆에 서자, 현종이 나지막한 미소와 함께 운검을 반겼다. 그런데도 눈에 서린 걱정이 가시질 않아, 그 속내를 짐작한 운검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리 활기차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운검이 건네는 위로에도 현종이 느끼는 안타까움은 가시지를 않았다.

청명은 입문한 이후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단순히 키가 자라거나 체격이 커진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이 정녕 무술 하나 익히지 않고 들어온 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제 배분의 실력을 뛰어넘어, 백자배와 싸우고도 이기지 않던가.

자라나 천하제일검 자리를 거뜬히 거머쥘 법한 천재! 그러한 천재가 문파에 들어왔다며 장로들이 잔뜩 들뜰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청명이 막 입문한 시기에는 마교와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범상치 않은 혐의점 탓에 은근히 경계하는 눈빛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라나며 조금씩 드러나는 청명의 성정이 그러한 눈빛을 누그러뜨렸다.

청명은 얼핏 봤을 땐 최대한 좋게 말하면 천방지축이고 나쁘게 말하면 안하무인적인 면모가 있는 아이였다. 그러나 애정을 주면 주는 만큼 답하는 어린아이다운 성정을 지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제 문파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자의가 거의 배제되다시피 하여 입문하게 된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화산파를 아끼니, 속정이 깊어 화산을 성장시키는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 게다가 제 실력에 안주하지 않고 매일 수련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그에 자극받은 화산 제자들이 모두 비약적으로 성장을 이뤄낸 것도 좋은 일이었다.

현종은 언젠가 청명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청명아, 힘들진 않으냐?

-걱정하지 마세요. 좋아서 하는 건데요.

-…그래, 그렇구나.

-무엇을 걱정하시는지는 알겠지만… 장문인, 저는 여기가 제 자리 같아 좋아요.

-네 자리 말이냐.

-네, 제가 있어야 할 자리.

묘한 말이었다. 마교의 술수로 이 화산에 자리하게 된 것이라는 의심을 돋을만한 말이었으나, 현종이 느낀 것은 그러한 불길함이 아닌 현기였다.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이인데, 어찌 말하는 양은 오랜 세월 한곳에 머무른 산천초목을 닮았을까.

어쨌든 때때로 거세고 매서워도 결국엔 자연 닮은 아이이니 내칠 이유 없는 귀한 아이였다. 그러므로 화산은 다가오는 화종지회를 기점으로 이 뛰어난 제자를 기필코 자랑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특히나 이번 화종지회는 종남에서 치를 차례이니, 이겨 통쾌할 만한 자리였다. 다들 몰려올 유쾌함을 미리 겪을 정도로 기대가 남달랐다.

그러나 종남으로 향하던 길. 화산에서 멀어질수록 청명의 낯빛이 급격히 나빠지더니…

-청명아!

급기야는 제 팔을 붙잡고 쓰러졌다. 그의 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일대제자 위로는 모두 알고 있는 바였으나, 화음현에 내려갈 때마다 간간이 팔이 욱신거리고 만다는 청명의 태연한 말을 일찍이 믿었으니… 팔의 통증이 그리 큰 문제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아파도 아픈 티 낼 줄을 모르는 아이 아니더냐. 걱정을 쉬이 덜어낼 수가 없구나.”

현종의 한탄과도 같은 말에 운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 당시 청명을 업고 화산으로 돌아온 건 운검이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청명은 의식도 없는 채로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화산으로, 돌아가야 해…. 화산으로… 반드시. 화산에서….

정말로 사술에 걸린 듯 집착적으로 구는 모습이었으나, 섬뜩하기보다는 슬프게 들렸다. 간절히 화산을 찾는 그 목소리가 마치 부모를 찾는 어린아이의 투정만치 무해하고도 애절하였다.

애원에 가까운 속삭임은 화음에 도착하고 나서야 멈췄다.

“…….”

그 당시를 잠시 회상한 운검의 얼굴에도 얼핏 걱정이 어렸다.

실력이 있으나 산문을 벗어나지 못할 검수라.

운검은 연무장 전체를 훑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청명이 내는 소란에 다들 어쩔 수 없이 휘말린 모습이나, 실제로는 다들 평소와 같은 모습을 내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하고 있었다. 청명이 좌절감에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화종지회 이전 모습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화종지회에서 이겨 돌아오고서도 자랑 한 번 않던 제자들의 속내를 가늠한 운검의 표정이 차차 굳어갔다.

“장문인!”

그러나 바닥에 널브러진 조걸을 뒤로 하고 청명이 재빠르게 달려와 현종과 운검 앞에서 칭찬해달라는 듯 기대를 담아 웃었다. 그러니 둘 모두 표정을 다시 지었다.

‘그래, 그때도 그랬지.’

-뭐야, 왜 죽상이야? 설마 지고 온 거야? 확!

-청명아… 대사형이다.

-그래! 설마 대사형인데 지지는 않았겠지?

화종지회에서 돌아오는 제자들을 마중 나온 청명은 일상과 달라질 바 없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대에 보답하고자 진지하게 화종지회 준비에 임하였던 청명의 노력을 아는 이들로서는 깊고 짙은 괴리감을 느꼈을 정도로 말이다.

현종이 밝게 웃으며 청명에게 칭찬을 건네는 모습을 보던 운검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 * *

“후우.”

사람 없는 봉우리에 자리 잡은 청명은 한숨을 내쉬며 삐딱하게 앉았다. 하여간, 지난번 화종지회 일로 다들 아닌 척 처져 있었다.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구나. 다들 한마음처럼 구니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역시 가장 큰 감정은 짜증이었다. 다들 왜 이리 제 눈치를 보는지. 신경 쓰여서 살겠나!

청명은 제 왼쪽 팔을 내려다보았다. 하여간, 튼튼하기만 한 팔이 화음만 벗어나면 통증을 일으키니 영 골칫덩이였다. 게다가 문제는 통증만이 아니었다.

-청명아.

환청, 환상, 그리고 기시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고,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 지나치리만큼 익숙하다. 지금도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지는 듯해 움찔거리게 되지 않는가. 제 머리를 짜증스럽게 털어낸 청명이 얼굴을 구겼다.

이렇게 제멋대로 제 감정을 헤집어내는 일들은 특히 혼자 있을 때 빈번히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 혼자 있고 싶지 않은데, 또 사람들과 섞여 있자니 다들 제 일을 신경 쓰는 게 훤히 보여서 신경질이 나니… 진퇴양난이었다.

‘…수련이나 해야지.’

생각해서 무엇하겠는가. 청명은 터덜터덜 일어나 늘 섰던 자리에 다시 섰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수련이었다. 적어도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까지 미칠 듯이 땀을 흘리고, 검을 휘두르면 잡념은 사라지고 생각은 오직 하나로 일통한다.

앞만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길을 계속하여 걷는 것. 전진.

검을 꽉 쥔 청명이 자세를 잡으며 물었다.

“볼 거예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청명 뒤에 자리한 수풀에서 한 사람이 흠칫 놀라 다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엿보려고 한 건 아니에요!”

멋쩍게 웃는 이는 당소소였다. 당소소를 힐끔 본 청명은 고개를 휙휙 돌리며 유이설을 찾아보았다. 사고만큼은 그 기척을 찾아내는 게 몹시 힘들어 힐끗 봐서는 발견하기 힘들었다.

당소소는 청명이 누구를 찾는지 눈치채고서 이설은 돌아갔다고 고했다.

“사고 다쳤어요?”

“그럼 나도 같이 갔죠.”

유이설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운 게 걱정된 탓에 간 것이라고 덧붙인 당소소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냐며 청명이 무심히 답했으나, 이미 어디 다쳤냐고 물어본 시점에서 속정을 눈치챈 당소소가 웃으며 청명 옆에 가 앉았다.

‘감시해봤자 얻어갈 수 있는 건 없을 텐데.’

당소소가 처음 화산에 왔을 때부터 그 내의를 눈치챈 청명이었으나, 굳이 그를 멀리하진 않았다. 어차피 청명도, 화산 사람들도 제 상태에 대해 아는 바 없으니 무언가 들킬 것조차 없기 때문이다. 그런 실정인데 쓸데없이 경계심을 세워봤자 머리만 아팠다.

몸을 슬슬 풀던 청명이 힐끔, 당소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 사람은 다시 안 와요?”

“그 사람?”

“저 죽이려고 했던 사람.”

청명이 무심하게 툭 뱉자 당소소가 잠깐 놀랐다가,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경계심이 필락 말락 하는 얼굴을 옆에 내버려둔 채 청명은 무게중심을 낮추며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기 시작하였다.

‘…묻는 이유가 뭐지?’

그저 묻는 거라기엔 꽤 단도직입이라 위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예민한 질문을 해놓고선 연습에 임한다. 근데 또 연습에 임하는 자세에는 한 치 흔들림이 없었다. 단순한 내려치기 자세를 반복하나, 옳은 길로만 가 허공을 긋는 검로를 확인한 당소소가 주먹을 꾹 쥐었다.

청명을 꽤 오래 지켜봤으나, 아직도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기가 힘들었다. 단일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속내는 조금도 털어내는 일이 없으니, 차라리 말은 없어도 행동은 직선적인 유이설이 훨씬 대하기 쉬운 상대였다.

“어르신께서는 바쁘시니까.”

“그래서 그 사람 대신 일하는 건가?”

당소소가 애매하게 존대를 놓으니, 청명도 혼잣말인 척 반말로 물었다. 얄미운 대응에 당소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만이 있으면 그냥 말하지 그래요.”

날 선 반응에 청명이 웃었다. 여전히 검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불만이라면 그분이 있는 거겠죠. 아직도 저 죽이고 싶어 하진 않나 모르겠는데요.”

“암존 어르신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마시죠. 어르신을 모욕하려 든다면,”

당소소가 위협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청명은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을 잘랐다.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여기서 화낼 사람은 전데, 너무 찔려 하는 거 아니에요?”

당가 사람으로서 암존을 향한 적의는 넘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를 내뱉은 이가 단순 삼대제자가 아니라 설사 더 높은 항렬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눈을 치켜뜬 당소소가 비도를 꺼내 달려들자, 청명의 검이 방향을 달리했다. 기본자세와 별다를 게 없는 간단한 검로였다. 당소소가 가벼이 검을 피하며, 청명 가까이 붙어 비도를 맞부딪히더니 곧 빠른 손놀림으로 소매에서 침을 꺼냈다. 검의 궤도를 바꾸기엔 늦었고, 당소소의 손에 들린 침은 청명의 혈을 완벽히 노리고 들어왔다. 독침이 아니라 치명적이진 않겠으나, 몇 시진은 거뜬히 몸이 마비될 혈 자리였다. 목숨에 위협은 주지 않으면서 골탕 먹이려는 의도에 완벽히 들어맞았다.

됐다, 하고 당소소가 손끝에 힘을 준 순간.

“안쪽으로 들어오는 이유를 모르겠네.”

바로 검을 떨어트린 청명이 한 손으로는 당소소의 침이 들린 손목을 꽉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어깨를 붙잡으며 뒤로 밀었다. 중심이 뒤로 쏠리는 순간, 그를 놓치지 않고 청명이 무릎으로 당소소의 배를 가볍게 치며 두 손을 놓았다. 당소소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차라리 던지는 게 낫지 않나?”

한순간에 무방비 상태에 놓인 당소소가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도발한 사람치고는 싱거울 정도로 얕은 대응이었다. 이미 청명이 사람을 어느 정도로 다채롭게 때릴 수 있는지를 너무 많이 봐온 당소소는 청명이 자신을 봐주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모욕감에 당소소가 얼굴을 험악히 구겼다.

“너는 왜 검을 놓았는데!”

“에이, 목검도 아닌데 저도 처세는 해야죠. 당가 사람 크게 다치게 하는 날엔 장문인이,”

“같아. 손을 떠나 날아가는 순간, 제어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 나도 네 사정을 봐준 셈이지, 하고 당소소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청명의 표정이 일순 멍해졌다. 청명이 화산에 온 날, 그날 밤에 녹색 장포를 입은 남자가 짧게 잡았던 비도를 떠올린 청명이 생각을 재빨리 털어냈다.

‘가까워서 그랬던 거겠지.’

제 팔을 가까이에서 진료하고 난 뒤, 팔을 놓자마자 비도를 들고 덤벼들었으니 던지는 것보다는 잡고 휘두르는 게 편했을 테다. 그리 생각을 갈무리한 청명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들어 쥐었다.

“그럼, 서로 사정 봐주지 말고 하던가?”

“…….”

어중간한 존대와 하대 모두 가시고 완전한 도발만이 남자, 당소소는 오히려 들끓던 감정을 쉽게 식힐 수 있었다. 너무 노골적이니 그 의도가 선명했다. 청명은 지금 원하는 게 따로 있었다.

“뭘 원해서 이러는 건데?”

당소소의 물음에 청명이 삐딱하게 웃으며 검을 차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분한테 만나고 싶다고 전해줘요.”

청명의 시선에 어중간하게 제 왼팔이 걸렸다.

골칫덩이이나 화산에 있을 때만큼은 조금도 아프지 않고 멀쩡하기만 한 팔이었다. 그러나 딱 한 번, 화산 내에서도 통증이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그 암존이라는 사람과 닿았던 그날 밤. 심지어 그리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그 어떤 때보다도 선명한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으니, 이제 와 되짚어보면 그때 일은 확실히 예외적인 일이었다.

‘분명 그 사람과 관련이 있을 거야.’

청명은 평생 이 팔이 고쳐지지 않아서, 화산 내에서만 자리하게 된다 하여도 별 상관없었다. 무엇이 대수란 말인가. 이 화산과 화음으로도 충분히 누리고 살 만큼 넓었고, 모든 이들이 제게 퍽 살갑고 다정했다. 연고 없던 거지가 배곯을 걱정 없이 이 정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왜 뵙고자 하는지, 이유를 말해.”

“그 사람만이,”

쏟아지던 기대에 답할 수 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러나 남이 원하는 길을 걷지 못 해준다는 이유로 위축될 것은 없다. 제 길은 제 길일 뿐. 애초부터 남이 정해줄 수 없고, 정하게 내버려둘 마음도 없다. 그러니 고작 그러한 이유로 팔을 고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단지, 그저.

“내 팔이 이런 이유를 알려줄 테니까.”

걱정이 드리운 얼굴들을 보는 게 싫증 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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