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당보드림]암향화연(暗香花燕) -完-
07. 약속
* 적폐 / 날조 / 캐해석 차이 있을 수 있습니다.
* 매화연 17화 이후의 시기입니다. 삼각관계 주의.
* 평균 유료 분보다 양이 많아 가격이 다릅니다.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괴롭다.’
숨이 점차 차오르고 의식을 차리기 힘들 만큼 어질거린다. 몸을 웅크려 숨을 참아보려니 온 몸이 불덩이처럼 태워낼 것만 같았다.
“하아…윽..!?”
의식이 점차 흐릿해지는 순간, 작은 손이 입안에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게 독을 먹일 생각인 건가. 물린 손가락은 움찔거리더니 손을 빼긴 커녕 오히려 입안에 뭔가를 더 밀어 먹이자 당보는 당황했다. 혀에 닿는 감촉을 봤을 때 작은 사탕 크기의 환이었다. 비집어진 손가락이 환을 으깨자 식도를 타고 녹아 들어온다. 몸 안쪽에서부터 얇은 내막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터질 것처럼 몸을 좀먹던 고통이 수그러지자 웅크려진 몸에 힘이 풀린다.
“일어났니?”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제비꽃 눈동자가 보였다. 배를 다독이고 있는 손길과 무릎에 눕고 있는 상황에 당보는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거리를 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조금 전까지 자신은 비도 연습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노려보자 말을 건 이는 양손을 벌리고 입을 열었다.
“영단을 먹이긴 했는데, 놀랐구나. 한 식경 정도 쓰러져있었어. 부작용은 시간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부작용이란 말에 당보는 자신의 손을 내려봤다. 거무튀튀했던 손 끝이 처음보다 옅어져 있다. 기절했을 때보다 몸도 가벼워졌다. 당가의 독을 지금 저 소녀가 해결한 건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소녀는 비단옷을 입고 있다. 외부 손님인가. 누군가 온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너 뭐야? 왜 도와준 거지?”
무슨 심계인지 몰라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당가에 속셈을 가지고 접근하는 이들이야 비일비재하니까. 독에 내성을 기르기 위해 이렇게 몸이 말을 안 들을 때가 있지만 그건 외부인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니면 쓰러진 날 도와 가문에 뭐라도 얻어낼 생각이었나?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자니 소녀는 의아하게 보다 쓰게 웃는다. 씁쓸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 사람 돕는데 이유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죽였다는 오해를 사기 싫은 건 아니고?”
이곳은 사천당가다. 아무리 외부인이라도 이런 구석진 별채까지 오는 일은 드물건만. 누가 알려준 건가? 오대세가에선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당가의 소공자가 여아 앞에서 쓰러졌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득달같이 뜯어낼 이들이 수두룩하다. 당보의 비아냥에 소녀는 눈을 끔뻑이더니 곧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리 보일 수 있겠구나. 그렇게 정하자.”
디딤돌에 앉아있던 소녀는 일어나 옷을 탁탁 털어 자리를 나선다. 당보는 황당했다. 그게 다야? 비단옷을 입은 게 귀한 집 자제인 건 확실했다. 일부러 신경을 긁어 말했는데도 저 평온한 태도는 뭔가. 발걸음을 옮기자 소녀의 앞을 당보가 가로막는다.
“잠깐, 이름이 뭐야. 어느 가문 사람이지?”
“멋대로 살린 건 나고 굳이 만날 일은 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말렴.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소녀는 그대로 시선 한번 맞추지 않고 돌아간다. 산들바람이 불면서 반만 묶어낸 감색 머리카락이 흔들거린다. 소녀가 쓰고 있던 붉은 비녀가 안 보일 때까지 보던 당보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팔짱을 끼며 멀찍이 지켜볼 뿐이었다.
**
“-피곤해?”
뒤통수를 톡 만지는 손길에 쭈그려 앉아 엎드리던 당보는 고개를 든다. 기억 너머에서 봤던 앳된 얼굴에서 청초한 얼굴이 기울여본다. 고된 전쟁으로 갸름한 턱선과 함께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은연중에 느껴진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내려보는 시선에 당보는 능청스레 웃는다.
“…누님도 참 한결같소. 선잠 좀 잤소이다.”
“며칠간 계속 싸웠으니까 피곤할 만도 하지. 주변 정리 끝났으니까 돌아가자.”
몸을 일으킨 당보는 돌아서 가는 연홍 련을 본다. 이제는 제 몸처럼 가지고 있는 한 쌍의 검을 허리춤에 찬 그녀는 피가 여기저기 묻어있다. 뒤따라가고 있자니 그녀 못지않게 피가 묻은 청명이 다가온다. 무뚝뚝이 둘을 보던 청명은 시선을 내려 다가온 연홍 련의 뺨을 만진다.
“다친 곳은?”
“멀쩡해요. 오라버니 또 바닥에 칼 긁은 거 아니죠? 날 상하니까 주의해주세요.”
“잔소리.”
“자꾸 그러면 선방은 제가 맡는 줄 알아요?”
청명의 서늘한 표정에도 연홍 련은 팔짱을 껴 맞받아치듯 째려본다. 그 모습에 바람 빠진 웃음을 짓는 청명은 연홍 련의 머리를 톡 쓰다듬는다.
“겁대가리가 없어. 꼬맹이가.”
겁없는 거라면 둘 다 만만치 않다고 생각되지만. 지켜보던 당보는 연홍 련의 옆에 금방 따라와 킥킥 웃는다.
“접혈귀희(蝶血鬼姬)잖습니까? 전쟁 끝나면 천마 모가지는 내가 선물로 드리리라.”
접혈귀희. 본대에 마교도를 쓸어낸 이후, 이 누님의 명성은 나날이 올라갔다. 물 흐르는 듯이 내력이 끊이지 않던 무당의 검 같기도, 창천을 상징하는 남궁의 검과도 닮은 그 강대한 내공. 엄연히 다른 성질의 검인데도 연홍 련의 검은 그 둘을 합친 것만 같았다. 내공이 얼마나 있어야 그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가늠도 안된다.
손으로 제 목을 긋는 시늉하는 당보를 보는 청명은 혀를 찬다. 이 전쟁 중에 저런 시늉을 농담으로 할 수 있는 건 이 놈 뿐일 거다.
“차라리 술이 낫지. 돌아가서 마시자.”
심드렁한 청명이 입맛을 다시고 있자 연홍 련의 눈이 가늘어진다.
“오라버니, 치료가 우선이에요. 환자가 자꾸 술 마시면 안된다고요.”
“그럼 옆에 잘 붙어있어. 뒤돌지 마.”
청명의 손이 팔을 붙잡는 연홍 련의 손을 잡는다. 연홍 련은 잠시 멈칫 이더니 쓰게 웃는다. 지금은 전투원으로 결사대에 참여했지만 의원인지라 시체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죽어간 이들에게 무덤하나 만들어 줄 수 없는 게. 이런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해도 대의를 위해 희생되고 한 어린 아이의 시체를 보는 건 특히나 끔찍했다. 연홍 련은 보다 청명의 소매를 꾹 잡아 기댄다.
“…알았어요, 돌아가요.”
여기저기 시체가 보이지 않는 곳이 없고 대지의 색이 언제부턴가 피로 물들어있다. 대규모로 이동하는 만큼 대산을 가는 여정은 길었다. 보급품도 한계가 있으니 마교와의 결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진행된 일이지만. 주변을 보던 연홍 련의 시선이 전각을 향한다.
‘저들의 생각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다.’
본대는 지원군으로서 몇몇은 남을 것이지만 모르는 거다. 이제까지 편제를 나눠 나갈 때가 아니면 전방에 나선 적이 드물었으니까. 무엇보다,
‘혼원단이 풀려났다는 걸 알았다면 저 안에서 물밑싸움이 얼마나 나올지.’
만일 혼원단의 소식이 마교에게도 닿으면? 저 인두겁의 탈을 쓴 살육집단이 지금보다 강해지면? 어느 날 갑자기 천마가 혼원단을 노린다면? 상상하는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제 팔을 쓸어 만지던 연홍 련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저 멀리 귀주를 향한다.
**
“가주, 영단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소가주요. 아시잖소. 소가주의 출정을 금지하고 연홍으로 불러들이시오.”
연꽃이 만발한 거대한 연못이 장관을 이룬다. 향긋한 꽃내음이 밖에서 풍겨오지만 내부는 엄숙했다. 오래된 고가구에 둘러앉은 장로들 사이에서 연홍 화는 담담히 제게 향하는 시선을 본다. 흥분을 수치로 여기는 이들답게 고상히 권하는 태도지만 시선만큼은 위압감을 주기엔 충분하다.
“소가주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시군요. 영단의 관리는 연단가의 자존심입니다. 어찌 대의를 위해 참전한 아이의 출정과 비교하시는지요?”
연홍은 의술을 다루는 연단가 집안이다. 각 문파의 영단 연구와 천하에 알려진 온갖 영단은 연홍을 거치게 되고, 그것이 과거 고금제일연마 약선이 만든 최고의 영단인 혼원단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무가지보의 보물이 나타난 소식에 침을 흘릴 소식이지만 연홍만큼은 반기지 않을 소식이었다. 숱한 소문이 자주 오가는 영단이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것이 세상에 나타났다는 건 결코 좋은 의도라고 볼 수 없으니까.
곱게 웃으며 말하는 연홍 화의 질문에 비단옷을 입은 중년인이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대의? 그게 연홍의 존속보다 중요한 문제요?”
“연홍은 무림맹의 의원으로 최선을 다했네. 근데 그들은 무얼 했소? 또 다시 소가주가 쓰러진다면 그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소?”
“애초에 의원이 칼을 들고 전장을 누비는 게 맞는 것이오? 가주는 왜 이 불합리한 출정을 막지 않은 건가!”
“제 힘이 부족한 탓이지요. 어찌 제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분들의 의견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입가를 가린 연홍 화는 겸손히 말했지만 속으로는 비웃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수장들이 부상을 입어 견제가 줄어들었다. 그 기회에 결사대원을 조정했더니 이젠 내부가 제 발목을 잡는다. 그것도 소가주가 쓰러졌었던 걸 빌미로.
전쟁 내내 연홍에서 벗어나지 않은 이들이었다. 나이가 많아서, 혹은 몸이 예전 같지 않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이유로. 그런데도 가문의 어른들이니 만큼 연홍에서 가주 못지않은 대접을 받는다. 연홍 화의 시선은 그들이 입은 말끔한 옷을 향한다. 자신도 항상 궁장을 깨끗이 관리하고 있지만 저 손 떼라곤 하나도 없는 옷 같지 않다.
“…얘기가 돌아갔습니다만, 제가 여기로 돌아온 이유는 그게 아니라는 건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연홍 화는 조용해진 분위기에 숨 한번 돌리고 소매에서 작은 함을 내민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함은 한눈에 보아도 귀한 물건을 보관하는 물건으로 보였다. 장로들의 눈이 잠시 굳어진다.
“……가주, 이건 설마?”
“말씀드렸잖습니까. 영단의 관리는 연단가의 자존심이고, 나는 내 책임을 증명하러 온 겁니다.”
혼원단이 퍼졌다는 건 곧 연홍의 관리책임이고, 귀한 영단일수록 장로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주가 사용할 수 있었다. 관리하는 영단은 가주의 비고 혹은 제조실의 깊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비고의 위치는 가주와 장로만이 알고있지만 여는 방법은 가주만이 안다. 언젠가 소가주에게 알려줘야 되지만 그건 지금은 아니다.
장로 중 한명이 함에 손을 뻗으려 하자 연홍 화가 먼저 잡는다. 그녀의 제지에 장로의 시선이 가늘어진다.
“…이게 무슨 짓이오, 가주.”
“보여드리기 전에, 장로님들께선 제게 약조해주셔야겠습니다. 그대들은 연홍의 존속을 위해서면 뭐든 할 수 있습니까?”
“가주, 우리는 연홍을 최선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늙은이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소. 그 점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소.”
연홍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내공이 높다. 겉보기엔 중장년으로 보여도 백 살은 아득히 넘은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과거의 영광에 틀어박혀 연구만 해온 사람들이니 바깥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가는지 귀로만 들을 뿐. 그 참상을 보았으면 동생뿐만 아니라 자신도 가뒀을 거다. 이곳은 가장 안전한 죽은 명예의 성소니까.
‘미래. 중요하지.’
연홍 련을 이곳에 불러오는 게 미래를 위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소가주는 자신보다 많은 가능성과 다음을 책임질 몸이니까. 그런 귀한 이를 전장에 보내는 건 가주로서 존속이 아닌 명예에 가치를 둔 판단이라는 것이 이들의 의견이었다. 허나,
‘천마를 막지 못하면 다 무의미하지. 가문의 존속도, 미래도, 생존도.’
대의든 뭐든 상관없다. 결사대에서도 그 아이가 필요하니까. 그럼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전쟁을 버티고 있었던가. 생각에 잠겨있는 연홍 화는 정갈한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럼에도, 해야 할 수밖에 없소. 나아가는 것이지요.
굳은 살 박힌 다정한 손이 그리 말했다. 연홍 화가 자리에 일어나니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덜컹거린다. 열매가 그려진 술 장식이 흔들리면서 그녀는 비릿하게 웃는다.
“혼원단이 풀려났다. 이 소식에 있어 당신들의 공작이 내 눈에 띈다면, 내게 증명해야 될 겁니다. 나는 입만 살아있는 존중 따위 필요 없으니까.”
**
‘이 망할 오라버니. 하여간에 정도가 없어.’
물기가 흐르는 머리를 내공으로 말리고 침의를 추스른 연홍 련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침대에 엎드린다. 처음 색사 했을 때보단 낫다지만 거칠게 움직이지 않아도 두꺼운 사타구니에 계속 부딪치니 다리가 후들거리는 감각은 익숙지 않았다. 그는 갑갑할 만큼 제게서 떨어지지 않았는데 정신 차리고 나면 꿈이라도 꾼 것처럼 곁에 없다. 청문진인이 불러서 나갔던가. 중상 입을 땐 어림도 없지만 내상 치료를 몸으로 해결하는 도사라니 기가 막힐 일이다. 반나절은 아니지만 두 시진은 지났나.
똑똑.
누워있으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연홍 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덮자 문이 열린다. 제 옆으로 무게가 실리며 말이 없자 연홍 련은 이불을 거둬 들어온 이를 본다.
“…당보구나. 무슨 일이야?”
“대답이 없길래 실례했소이다. 많이 피로한 모양이오?”
“누구 덕분에. 오라버니네랑 술 마시는 줄 알았는데.”
“아픈 누님 두고 내가 놀고 있을 순 없잖소? 약재 가져왔으니 손질해두겠소.”
태연하게 대꾸하는 당보는 바닥에 내려앉는다. 장포 소매에서 꺼낸 약재는 금방 가져왔는지 신선해 보인다. 암기의 지존으로 불려서 그렇지 약재를 다듬는 손이 익숙한 게 그도 의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이였다.
누워서 구경하던 연홍 련은 뒷모습을 가만히 본다. 붉은 비녀를 머리에 꽂아 길게 내려온 나무색 머리 아래 반듯한 턱선이 엿보인다. 예전이랑 다름없는 모습을 볼 때면 이곳이 전시상황이라는 걸 가끔 잊어버린다. 그리운 과거의 모습이라서일까.
“…둘끼리 있는 건 오랜만이네. 네가 오라버니랑 계속 있으니까 누구 정인인 건지 가끔 질투 났는데.”
“징그러운 소리를. 내 장담하건대 그 말코 형님을 좋다고 따라다니는 별종은 우리 뿐일 거요.”
연홍 련은 쿡쿡 웃는다. 맞는 말이었다. 내 편이라서 든든한 미친놈이라는 느낌이랄까. 옆에 있는 당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좋으니까. 오라버니도, 너도.”
손질한 약재를 면포에 담은 당보는 잠시 손이 멈추나 싶더니 주머니 모양으로 소분해 뒤돌아본다. 나른히 누워있던 연홍 련은 촛불을 등지고 있는 당보를 보다 눈을 휘며 웃는다. 손을 뻗으니 그는 약재 주머니를 건네고 몸을 돌려 허리춤에서 술병을 꺼내 마신다.
“놀랐어?”
“새삼스럽게 하는 말이라서 그다지. 갑자기 무슨 바람이오?”
“그냥, 하고 싶은 말이었어.”
나중엔 못할지도 모르니까. 라는 말은 삼켰다. 전쟁이 길어지며 시간도, 감각도 조금씩 무뎌져 갔다. 잠시 소강상태가 됐을 때나 숨 돌리지 긴장을 놓을 순 없다. 살기 위해 죽이고, 죽고, 쉬고, 이동하고의 반복. 그것이 며칠, 몇 년간 지속되었다. 속에서부터 들러붙는 혈향과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이 길어지니 청명과 잠드는 날도 늘어났다.
산 속으로 점점 들어가면 이런 숙소에 머물기보다 더 협소한 곳에 도착할 거다. 둘이 있을 때 아니면 청명이 어디서 나타나 당보를 걷어차고 할 테니 기회 있을 때 얘기하고 싶었다. 연홍 련의 대답에 그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묻는다.
“이참에 묻는 것도 좋겠지. 누님은 내 어디가 좋소?”
“진짜 동생처럼 챙겨주는 점이? 얄미울 때도 있지만 밉진 않아.”
받아낸 약재를 협탁에 둔 연홍 련은 순순히 대답한다. 술을 기울이던 당보는 고개만 돌려 그녀를 슬쩍 본다. 조금 더 듣고 싶다는 눈빛에 누워있던 연홍 련은 머리를 쓸어 생각을 더듬어본다. 막상 칭찬해달라 하니 어렵네. 음..
“..생각보다 세심하고. 짓궂은 장난도 많이 치지만 눈치가 빨라서 같이 있으면 편해.”
당보는 연홍 련의 말을 가만히 듣는다. 조곤조곤히 제 생각을 하며 듣기 좋게 얘기하는 걸 듣자니 입매가 점점 짙어진다.
“그리고?”
“……더 들을 생각이야?”
“말하기 부끄러우면 내가 도와줄 수 있소만?”
팔을 뻗어낸 당보가 잔에 술을 채워 연홍 련에게 내민다. 마실 거냐는 눈치에 흐리게 보던 연홍 련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앉는다. 잔을 받아서 들자 침대를 짚던 당보가 턱을 잡아 기울여본다. 지긋하게 바라보던 눈이 히죽 웃는다.
“나랑 있으면 좋소? 도사 형님보다?”
“요 입 입. 자꾸 비교하면 못 써.”
미간을 살풋 찌푸린 연홍 련은 제게 가까워진 당보의 입을 손으로 툭툭 때려 얼굴을 밀어 잡는다. 침대에 흘릴까 고개를 돌려 술을 넘기니 식도를 타고 목 안이 뜨끈해진다. 흐트러진 감색 머리카락 아래로 목에 새겨진 상흔을 보던 당보는 뺨이 눌리도록 잡히자 시선을 맞춘다. 표정을 풀지 않은 연홍 련이 잔을 돌려주며 말한다.
“다른 사람 아픈 건 귀신같이 알면서 본인 아픈 건 한계까지 참는 버릇 언제 고칠래? 앉아봐.”
침대에 반쯤 올라앉던 당보가 엉거주춤 바닥에 앉으니 연홍 련이 잡아낸 손에서부터 내력을 불어넣는다. 체내에 붙어있는 불순한 찌꺼기를 정화하면서도 오랫동안 축적해 만들어 온 만독불침의 몸을 깨뜨리지 않는 건 언제 느껴도 신기한 경험이다. 치료를 끝낸 연홍 련은 뺨을 꼬집는다.
“다음에도 이렇게 병 키워오면 혼날 줄 알아.”
“거 분위기 좋았는데 봐줄 것이지. 오늘치 친절은 끝이오?”
“미련하게 구니까 그렇지. 누가 누구보고 한결같다는 건지.”
처음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잡아보니 알았다. 술이 들어가서 체온이 올라갔나 싶었는데 그럼 식은땀을 저리 흘리지 않았겠지. 누워있느라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옆으로 모은 연홍 련은 손으로 빗어 정리한다.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에 툭 묻는다.
“더 할 말이 있니?”
“고민이 많아 보이길래.”
연홍 련의 입이 다물어진다. 청명과 있을 땐 그럴 정신이 없었지만 혼원단의 소식은 신경 쓰이긴 했다. 지금은 위에서만 오가는 말이라 가주로서 언니가 해결한다고 했지만 그게 보통 영단이었어야지. 잠시 한숨 쉬는 연홍 련은 나직하게 말한다.
“…있긴 하지만 괜찮아. 지금은 천마가 우선이지.”
“대산이 워낙 넓으니 찾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누님은 찾을 수 있소?”
“정확한 위치는 어려워도 강남으로 계속 가야 해.”
영단도 문제지만 천마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주교의 기운이 짙은 곳. 가장 불길한 기운이 모인 그곳에 천마가 있겠지. 생각에 잠겨있자니 기다란 손이 손을 잡으며 부른다.
“련이 누님.”
댓글 0
추천 포스트